산 로렌소* 외 4편
염민기
지하 700미터 갱도에서
병원 텔레비전을 응시하던 그들도 간절히 희망을 캐는 중이었다
실시간 방영된 화면과 수술실 영상
그 간극에서 쥐어짜는 듯
어둠마저 딱딱하게 굳는 밤
산 로렌소라 이름한
탯줄 같은 통로로 새 생명을 받아 구조용 캡슐이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주름이 우는 시린 손 꼭 부여잡고
소읍에서 구급차로 달려오던 내 생애 가장 머언 길을 생각했다
막바지 구조가 한창인
극적인 순간마다 지켜보는 이들은 환호하고 가족 품에서 안도의 눈시울 붉힐 때
영상의학과 담당 전문의는 황금시간대*와 카테터 시술에 대해 얘기하고
사타구니 부위 고동맥 속으로 넣는다는 풍선이나 스텐트가
지름 55센티의 불사조처럼 어머니의 막힌 지상과 지하를 뚫어 처음 들여다본 내 원천인
핏줄 곳곳이 다시 고동치길
반 스푼 참치 같은 하루 분량의 목숨
극한이 교차한 숱한 시간에도
매몰된 마음 서로 다독이며 끝끝내 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추가된 남은 한 명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구조 속도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수술실 앞에서 나는
희망의 원석을 채굴하고 있었다
* 칠레 산호세 광산의 구조명.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로렌소 이름을 땀.
* Golden Hour, 심근경색은 시간 이내에 치료하는 것이 생존율을 급격히 높일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함.
나무의 공간
나무는 뿌리부터 죽는 것이 아니다 덧난 공중의 상처로 말라 죽는다
그러므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가 아니라
가지가 뻗어간 만큼의
한 그루 푸르른 공간이다
훤칠하게 잘 자란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도 애써 닦아 놓은 그곳이 저토록 눈부시기 때문이다
처마 끝 풍경이 바람과 장난질할 때도
끊임없이 나무는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제 공중의 상처들을 그렇게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한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선다는 건
옹이 박인 나무의 공간을 품에 안아보며 그 나무의 푸른 내상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는 일
햇볕 가득 초록의 내력 뿜어 올리며
넉넉한 허공 열어 거미와 새와 별에게 보료처럼 아늑하게
고래구멍 군불로 큰방 윗목까지 도란도란 데우는 것도
둥구나무 아름드리 공간이 이곳까지 옮겨온 것이다
유년의 마티에르
- 「할아버지와 손자, 박수근」을 보면서
서까래 굽은 널결을 타고 파아란 남향 하늘이 음복같이 내리던 문중 재실
고솜하니 들지름 머금은 우물마루 주름진 송판에 반질반질한 햇살 통통 튀던 늦봄
계자난간 기대어 선산 바라보다 풀쳐생각*에 마주한 대들보 아래 목침 베고 누우신 할배
담뱃진 아스롬이 풍기는 곁에서 한나절 이따금 횟배 쓰다듬으며 가물가물
보늬 같은 눈꺼풀 콕콕 쪼는 볕뉘에 허리짬 간질이는 명지바람으로 까무룩 잠들던 유년
* 맺혔던 생각을 풀어버리고 스스로 위로함.
어달항에서
톡 톡 초릿대 끝
어신은 노련한 바다의 연륜이다 어쭙잖은 미늘로는 챌 수 없는
환한 햇살의 미끼에 찰방찰방한 바다가 연신 낚이고
파도의 주름진 소매를 잡고 보채듯 아이의 함박웃음도 함께 갈며
다시 낚싯대 드리우는 식솔의 시간
방파제 결 따라 이는 포말의 푸짐한 소요에 금세 해조류처럼 까불대고
푸르싱싱한 수심의 안구 바라보는 등대 너머
바다의 슬하에 안긴 우리는
그리움의 부기가 어느 정도 아물어 파아란 하루로 마침맞게 간이 밴다
기일 모시고 나선 모처럼 가족나들이
갖은 바다가 차려진 소담한 두레 밥상에 모여
달짝지근 짭조름한 노모의 연대기 밑간으로 무쳐놓은 수평선 바라보다
물괴기는 배 쪽이 젤루 맛있다시던 노릇노릇한 그 부위에 슬쩍
젓가락을 가져가면 툭
손끝으로 전해진 저릿한 입질은, 물때의 어로에서 재바르니 챔질한 것은
남도 산간 내륙만을 남기신 아버지의 난류성 내력이었다
꽃의 입양
햇살의 껍질도 엷어지는
들신선나비 앉아다 간 가을 자리
올여름 땡볕에 주홍점박 꽃몸 그을리며 몽글지게 길러 낸 꼬투리 품
애지중지 어린 새끼들 다 보내고
먼발치 손사래하며 마디마디 길어진 그 꽃대궁
돌돌돌 착 안겨 살 가히 대하는
늘그막에 얻은 연보랏빛 여식애 환한 재롱으로
제피붙이 같은 마음에 묵은 젖이 도는지
오물오물 여린 잇몸에 간지럼 타는지
햇솜이불같이 포근히 부신 오늘 아침
지어미 센머리에 업둥이가 선물한 이쁜 꽃핀 하나
이웃집 스레트 지붕 만삭의 몸으로
덩쿨목 빼고 엿보는 호박새댁 보란 듯이 살랑살랑
자랑하고 있네, 나팔참나리꽃엄마
■ 당선소감
불혹의 끄트머리에 얼떨결 찾아온 당선 소식, 이 당황스럽고 불안한 기쁨을 누리며 생각한다.
지금도 고치인데 날개를 가지는 건 아닐까. 아직도 꽃샘추위로 시린데.
그리고는 덜컥 마음 한쪽에 얹힌 무게감. 옹이같이 박히는 불안감이다. 시집 칸도 없는 소읍 서점,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시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제대로 된 귀가 열리고, 맑은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부족한 능력이야 언제나 감내하고 사는 일이니 그리 부끄러움은 아니다. 그리하여 한 편의 시에서 농익은 삶의 잔을 모든 이에게 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래야겠다.
우선, 내게 수많은 영감을 준 시집들에게 감사함을 드린다.
언제나 맨 처음 독자이며 비평가가 되어준 아내 백종숙 사랑하는 가족에게, 항상 같이해 준 나의 제자들 고마움을 전한다. 그들에게 또다시 들려줄 말을 만들어 놓았다.
늘 관심으로 기대해준 경남작가, 거창문학회, 예장, 거창작가 회원들. 격려와 따뜻함을 더해준 김태수 백신종 정일근 박구경 최영욱 오인태 시인 하아무 소설가 그리고 이경재 신승열 정연탁 신승희 시우. 늦깎이로 시의 맛에 흠씬 빠져 있는 김병준 선배,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시의 길을 배려해주신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와 계간 『서시』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일흔 중반에 싱글이 되신 어머니, 오늘도 찰지게 지어주는 지난 이야기를 맛나게 들으러 가야겠다.
1963년 경남 거창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경남작가회의 회원.
염민기 010-8550-9055
첫댓글 축하합니다. 앞으로 좋은 시 많이 부탁드립니다.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