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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 제 13 강]
不即不離하며 不住不著하며
부즉불리 부주불착
어디에 예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며 거기에 머물고 집착할 일도 아니며
“부즉불리하며 - 부즉은 어디에 예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떠나 있는 것도 아니야” 우리가 쳐다보고 주고받고 말하고 대답하는 이런 것에 딱 예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사실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부주불착이며 - 거기에 머물 일도 아니고 집착할 일도 아니야.”
縱橫自在하야 無非道場이니라
종횡자재 무비도량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서 도량(깨달음) 아닌 곳이 없느니라
“종횡자재하야 - 종횡자재하야 가나오나 자재해.” 가로세로로 동으로 서로 오고감에 자유자재해서, “무비도량이니라 - 도량 아닌 곳이 없느니라.” 도량이라고 하는 말은 깨달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깨달은 자리를 도량이라고 하거든요. 보리(깨달음)도량 이렇게 표현하니까 깨달음 아닌 것이 없다. 사찰을 도량 그러잖아요. 도량은 도를 닦는 곳이기도 하지만 도를 통하는 곳이기도 하며 도의 장소다 이말 입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나 다 도의 장소다 이런 말이 있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행복이다.”어디서든지 이 주인공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는 이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하는 것. 부처라고 하는 것. 곧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 이것만 우리가 제대로 챙기면 ‘수처작주하면 어디에 있든지 입처개진이야. -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진정한 삶이고 진정한 행복인 거야.’ 보통 우리가 집 떠나서 딴 곳에 있으면서 집을 염려하거나 사람이 어디를 가고 오는 것을 우리가 염려할 때가 있잖아요. 내가 현재 여기에 안전하게 있으면 됐지 그게 중요하잖아요. 내가 여기에 현재 안전하게 있으면 사실은 아무 일 없는 거라. 그 외 것은 모든 여벌이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도 내 마음이 다른 현상에 빼앗기지 않고 있는 것. 빼앗기지 않고 내 자신으로 있는 것. 이것이 참으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게 이제 입처개진이라 - 내가 있는 그곳이 진정한 행복이다.
世人은 聞道諸佛이 皆傳心法하고
세인 문도제불 개전심법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이 심법인 마음의 도리를 전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세인은 문도제불이 개전심법하고 -세상 사람은 모든 부처님이 심법을 마음의 도리를 전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將謂心上에 別有一法可證可取라하야
장위심상 별유일법가증가취
마음위에서 따로 어떤 하나의 도리가 있어서 가히 증득하고 가히 취할 것이 있다 여겨서
“장위심상에 별유일법가증가취라하야 - 마음위에서 따로 어떤 하나의 도리가 있어서 가히 증득하고 가히 취한다. 증득할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다고 여겨서
遂將心覓法하고 不知心即是法이요
수장심벽법 불지심즉시법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고 마음 그대로가 진리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요
“수장심멱법하고 부지심즉시법이요 - 드디어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고 마음이 그대로(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그대로가 마음)진리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法即是心이라 不可將心更求於心이니
법즉시심 불가장심갱구어심
법이 곧 이 마음이인 줄 알지 못하니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
“법즉시심이라 불가장심갱구어심이니 - 법이 곧 이 마음인줄을 알지 못한다. 가히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 법은 곧 진리를 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음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마음인 줄을 알지 못한다. 그게 하나죠. 그걸 좀 확대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일체가 다 마음으로 지어진 것이니 마음이 근본이고 뿌리고 전체라는 말이죠. ‘불가장심갱구어심 - 가히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 구하는 것도 마음이라 처음부터 마음이 하는 것이 들어서 따로 딴 마음을 구하는 거야. 마음을 가지고 괜히 딴 마음을 구하는 거야. 그렇다고 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구하려고 찾아 나섰는데, 정작 찾아 나서니 더 멀어짐이라.
그래서 봄 찾아서 온 언덕을 다 누비고 돌아왔더니 나중에 자기 집 담 밑에 매화가 활짝 피었더라. 봄은 바로 자기 집에 있는 봄을 놔두고 엉뚱한 들로 산으로 헤매 찾아다녔더라하는 그런 표현이 바로 이런 거죠. 봄은 바로 자기 집안에 있는 거야. 마음은 바로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그것이 마음이야.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그 자체가 마음인 거야. 그러므로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
歷千萬劫하야도 終無得日하리라
역천만겁 종무득일
천만겁이 지난다고해도 마침내 얻을 날이 없으리라
역천만겁하야도 종무득일하리라 - (그렇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따로 찾아나서 면은) 천만겁을 지난다고해도 마침내 얻을 날이 없으리라.”
不如當下無心이니 便是本法이니라
불여당하무심 갱시본법
바로 이 순간에 찾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니 그것이 곧 본법이라
“불여당하무심이니 갱시본법이니라 - 바로 이 순간에 찾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니 그것이 곧 본법이다.” 찾는 마음 쉬어버리는 게 바로 무심이에요. 따로 찾는 마음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함이니라. ‘갱시본법이니라 - 그것이 곧 본법이고 본래의 법이다’ 이거야.
如力士가 迷額內珠하야
여력사 미액내주
예컨대 장사가 이마 안에 있는 구슬을 미혹해서 알지 못하야
“여력사가 미액내주하야 - 비유컨대 예컨대 장사가 이마 안에 있는 구슬을 미혹해서
向外求覓하며 周行十方하야도 終不能得이라가
향외구멱 주행시방 종불능득
밖을 향해 찾으며 어느 곳을 찾으려 돌아다녀도 마침내 얻지를 못하다가
“향외구멱하며 주행시방하야도 종불능득하라가 - 밖을 향해 찾으며 마침내 두루두루 시방을 찾으려 돌아다니다가 얻지 못하다가
智者指之하면 當時에 自見本珠如故하나니
지자지지 당시 자견본주여고
지혜 있는 사람이 가리켜 줄 것 같으면 당시에 바로 스스로 본래의 구슬이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느니라
“지자지지하면 당시에 자견본주여고하나니 - 지혜 있는 사람이 그것을 가리켜 줄 것 같으면 당시에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본래의 구슬이 옛 과 같다.” ‘본주여고 - 본래의 구슬이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느니라.’ 이건 열반경에 있는 것인데,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서 저 위대하신 부처님도 저렇게 육신을 버리고 열반하니까 중생들의 소견은 몸만 보므로 부처님의 본성 여래장 불성 여래성 이런 표현을 하는데, 그것에 대한 영원성을 아주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래 성품이라고 하는 열반경에 그런 품이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육신이 아무리 천번 만번 소멸해 가도 본성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어디 뭐 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닌 어느 육신에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온 우주 전체에 꽉 차 있고 그것이 인연을 만나면 석가모니 얼굴로 몸을 받아서 나고, 또 인연을 만나서 여자의 몸으로 만날 수도 있고, 문수의 몸으로 보현의 몸으로 관음의 몸으로 온갖 사람들의 몸으로 다 인연이 되어 그렇게 나타나요.
수분이 세상에 가득하므로 봄이 오면 풀마다 나무마다 수분을 다 빨아들여서 각자의 싹을 틔우잖아요. 감나무는 감나무의 싹을 틔우고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싹을 틔우는 그와 같이 불성도 그래요. 우리 불성과 마음도 나한테 있으므로 컵에 담으면 컵 물이며 내 몸에 담겨있으니 내 몸처럼 그렇게 한정됨 생각을 해. 그런데 그렇게 한정된 것이 아니에요. 이 한계가 없이 툭 터져 있다고요.
열반경에 여래의 영원성을 이야기하시면서 힘센 장사가 어느 부호 집에 역사가 있었어. 그는 옛날 그림에 보면 이마에다가 다이아몬드를 박아 붙여있지요. 그 그림이 힘을 과시하는 거라. 장사들끼리 씨름하고 싸움을 하며 치고받고 하다가 다이아몬드끼리 부딪쳐서 이마 속으로 들어 가버렸어. 나중에 싸움을 다하고 나서 보니 다이아몬드가 없어졌거든.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한데로‘주행시방周行十方이라 -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이마에 있던 다이아몬드 못 봤냐고 돌아다니면서 찾는 거예요.
어떤 명의가 이마를 가만히 보니 쏙 박혀있어 속에 있거든요. 그래서 ‘지자지지智者指之라 - 지혜로운 사람이 그것을 가리켜 줄 것 같으면’ ‘당시에 자견본주여고當時自見本珠如故라 -스스로 본래의 구슬이 옛날과 똑같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느니라.’ 그렇게 지혜로운 의사가 딱 보고는 가리켜줘서 가만히 손을 더듬어 보니 도망가지 않고 그곳에 더 안전하게 다이아몬드가 이마에 딱 박혀있거든 그렇게 해서 역사가 구슬이 자기 몸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의 불성도 인간이 이렇게 집에서도 크게 환영 못 받고 어디가도 별로 인정 못 받는 그런 세고 세 버린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부처님이라고 하는 위대한 스승을 우리가 모시고 살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인 황벽스님 같은 분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대가 바로부처야.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은 이건 어마어마한 거야. 그걸 여래라고 하고 부처라 하며 여래성과 불성이라고 하는 여래장 여래가 그 속에 감춰져 있다. 나와 임제 스님 같은 경우는 바로 그대로가 사람이 부처다. 이렇게 가르쳐 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가 존귀한 존재의 사실인 것을.
비록 어디가나 인정 못 받고 천덕꾸러기인 그런 존재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어마어마한 가치관은 부처야. 부처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그걸 우리가 부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거야. 무슨 옆집에서 인정받고 가정에서 인정받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부처님으로부터 우리가 직접 인정받은 사람이라고요. 황벽스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면 그럼 됐지 뭐. 몰라주는 옆의 친구가 아무리 무시한들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인정해 주어야 가치 있는 거죠. 이치가 그래 된 겁니다. 그래서 역사도 황벽스님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열반경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셔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고 말았잖아요.
그러면 부처님 평소의 위대한 본성은 어떻게 된 거냐 이거야. 실망이 크지 않을까요? 사실 깨달은 사람이야 다 알지마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실망이 크거든요. 훌륭한 성인이 저렇게 돌아가셨냐며 한국불자들은 괜히 잘 있다가 열반당에 가서 괜히 운다. 열반당에 가서 다들 예배하고는 눈물 질질 흘리면 웁니다. 돌아가신지 삼천년이 됐고 우리하고 거리가 얼마나 많이 떨어졌습니까? 여행으로 인해 피로에 지쳤을 텐데, 열반당에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예배한번하곤 한국불자들이 감정이 지나쳐서 엉엉 우는 울죠. 그럼 그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겠어요. 그림을 보면 토끼도와서 울고 노루도 울고 소 돼지 다 와서 우는 그림이 있잖아요. 깨달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보통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상에 팔려서 보니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데, 그러니 이게 보통일입니까.
열반경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게 되는 전후사정 또 화장을 해서 사리를 나누는 그런 이야기만 딱 그려놓은 것이 열반경이야. 그 순간만을 열반경이 권수로 무려 40권이나 돼. 본래 생사가 없는 이치를 부처님과 조사스님들도 끊임없이 가르쳤고, 우리 눈으로 보는 이 육신은 생사가 있는데, 그럼 생사가 없는 면이란 도대체 뭐냐. 모르는 사람에겐 전부 사기고 거짓이 아니냐.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을.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해하고 깨우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장사를 예로 들기도 하고 별별 예를 들어가면서 불성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죠. 우리가 이런 몸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내 마음에 내 몸에 한정된 이런 몸을 생각하는 거야. 이런 마음을 생각하는 거라고요. 내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 컵에다 물을 따르면 이 컵에 담겨져 있는 동안은 이 컵의 물이야. 그런데 이 컵의 물을 가지고 바다에다 부어버리면 바닷물이 된다고요. 흐르는 물에다 비우면 흐르는 물이 되고, 마음도 그릇 따라서 보통 다르고 씀씀이도 그릇 따라서 다릅니다. 본심도 그릇 따라서 표현이 달리됩니다. 표현이 달리될 뿐이지 그렇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어 놓으면 금부처고, 금을 가지고 비녀를 만들면 금비녀가 되고 그렇잖아요. 금이 한결같이 금부처와 금비녀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또한 금시계와 반지에 제한되어 있나요. 아니잖아요. 녹여서 다른 것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그와 같이 우리 마음도 그런 존재라는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 조사스님처럼 도를 제대로 깨달은 분들은 이 마음이 한결같이 위대하다고 마음마음 하잖아요.
육조스님은 금강경 읽는 소리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 머물지 말라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마음이야기 듣고 불교가 뭔지 부처가 뭔지 전혀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이 그 말 한마디 듣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도를 먼저 통하고 그 다음에 출가해서 불교와 절이 뭔지를 공부한 순서가 됐잖아요. 그분은 억수로 재수 있는 분이야. 우리는 절차를 다 밟아도 잘 모르는데, 그 분은 일체의 절차를 다 뛰어넘고 도통부터 해 놓고 따지는 거야. 일이 그렇게 돼야 참 쉬운데, 우리는 마음공부를 끊임없이 하잖습니까? 앉아서 기도하면서 참선방에서도 하고 경을 보면서도 하고, 전심법요를 공부하면서도 그저 마음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는데 이론적으로라도 우리가 소상하게 알아야 되며 그렇게라도 차츰차츰 알고 있을 때 제대로 알아야 느껴야 되고 느끼게 되면 어느 날 언제 보게 된다고요.
보이면 손에 잡는 건 문제 아니라고요. 사과를 따려고 하면 멀리서라도 보고 알아야 되잖아요. 가까이에 가면 사과 익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된다고요. 그래야지 가서 손에 잡고 딸 수가 있지요. 그와 같이 육조스님과 같은 근기는 듣자마자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이 알아버리는 그런 계기도 있고, 또 사람 따라서 느끼고 알아가는 것도 다 다르고 한결같지 않아요. 구슬이야기는 열반경에 있던 것을 황벽스님께서 이끌어다가 간단하게 했을 뿐이죠.
故로 學道人이 迷自本心하야 不認為佛하고
고 학도인 미자본심 불인위불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본심이 스스로 미혹해서 부처로 삼지를 못하고
“고로 학도인이 미자본심하야 불인위불하고 -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미혹해서 본심을 알아 부처로 삼지를 못하고
遂向外求覓하고
수향외구멱
드디어 밖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고 부처를 찾고
“수향외구멱하고 - 드디어 밖을 향해서 부처를 구하고 부처를 찾는다.”이거야. 목이 터지라고 관세음보살을 찾고 부르는 그 대단한 능력이 관세음보살의 능력이야. 임제록에 그랬잖아요. 오대산에 뼈 빠지게 문수를 찾으려가고 있는데 찾으려가는 그 당사자의 그 능력이야말로 바로 부처다. 그대로 산 문수보살이라는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본심이 그대로 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서 부처를 찾고 관세음보살을 찾는다.
起功用行하며 依次第證하나니
기공용행 의차제증
공을 일으켜 노력을 하며 행을 하며 차제에 의해서 증득하나니
“기공용행하며 의차제증하나니 - 공을 일으켜 노력을 하며 행을 하며 차제에 의해서 증득하나니”
歷劫勤求하야도 永不成道라
역겁근구 영불성도
오랜 세월을 부지런히 구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하리라
“역겁근구하야도 영불성도라 - 그러니까 십주 십행 십회향 하나하나씩 닦아 올라가야 되는 줄로만 아는 거야. 전혀 그런 게 아니거든요. 마음이 앞뒤와 선후가 있나요. 역겁- 오랜 세월을 부지런히 구한다고 하더라도 영불성도라 -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 한다 그랬어요. 밖을 향해서는 우리의 그 마음을 도대체 알 길이 없느니라.
不如當下無心이니라
불여당하무심
그 찾는 마음이 당하에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지 못 하느니라
“불여당하무심이니라 - 그 찾는 마음(밖을 향해서 찾아가는 그 마음) 당하에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決定知一切法이 本無所有하며
결정지일체법 본무소유
결정코 일체법이 본래 있는바가 없으며
“결정지일체법이 본무소유하며 - 일체법이 본래 있는바가 없으며”
亦無所得하며 無依無住하며 無能無所하며
역무소득 무의무주 무능무소
소득도 없으며 의지함도 없으며 주함도 없고 주관도 객관도 없으며
“역무소득하며 무의무주하며 무능무소하며 - 또 소득도 없으며 의지함도 없으며 주함도 없으며 능(주관)도 없으며 소(객관)도 없으며”
不動妄念하면 便證菩提니
부동망념 변증보리
망념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곧 보리를 깨달을 것이니
“부동망념하면 변증보리니 - 망념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결정코 그 도를 알 것 같으면 곧 보리를 깨달을 것이니”
及證道時에는 秖證本心佛이요
급증도시 지증본심불
도를 증득할 때에는 다만 본심인 부처를 증득함이요
“급증도시에는 지증본심불이요 - 도를 증득할 그때에는 다만 본심 부처를 증득한다.”는 거예요. 깨닫고 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본래 그 마음이야. 딴 부처가 아니고 그 마음이 부처지 어디 밖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법당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누가 준 것도 아니죠. 참 그것 알고 보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할까요. 봄 찾으려갔던 사람은 그래도 겨우 하루 동안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기나 했지. 부처 찾는 노력은 수년 수십 년 피나는 고행을 해가면서 딴 데로 찾아 돌아다녔거든. 딴 데로 찾아다닌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걸음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에 있는데 그걸 찾는 일이다 그것이야. ‘지증본심불 - 다만 본심이 부처를 증득하는 것이다.’
歷劫功用은 並是虛修니라
역겁공용 병시허수
오랜 세월을 공부하는 것은 결국은 헛된 수행이니라
“역겁공용은 병시허수니라 - 온 세월을 보내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울러 헛된 수행이다.”이건 아무에게나 가르칠 공부가 아니라 골치 아픈데, 실컷 다 해 놓고는 ‘역겁공용은 병시허수라 - 오랜 세월 공부한 것은 결국은 헛된 수행이다’ 그랬어요. 그렇게 또 우린 무릎이 닿도록 기도해 쌓고 또 어쨌건 열심히 하잖아요. ㅎㅎ.. 그게 다 헛된 수행이라 했든 말든 그건 황벽스님의 말이고, 전심법요를 공부하면서 그게 맞습니다. 이러면 곤란하지. 여기도 있네요.
如力士得珠時에는 秖得本額珠요
여역사득주시 지득본액주
역사(금강주)가 구슬을 얻었을 때에도 본래 자기 이마에 있든 구슬이요
“여역사득주시에는 지득본액주요 - 역사(금강주)가 다이아몬드를 얻었을 때에는 본래 자기 이마에 있든 구슬이지 밖에서 따로 떨어져 있던 것을 주워 온 것이 아니라고요. 이렇게 정곡을 찔러서 한 가르침이 흔치가 않습니다. 그러니 천고에 임제스님과 같은 제자를 둘 수가 있었지요. 우리가 부처됐다고 해도, 본마음 부처 - 본심불. 본액주- 본래의 내 이마에 있던 구슬을 얻었을 뿐이고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얻고 자시고도 할 것도 없지요. 말을 하자니 편의상 우리가 얻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죠.
부처를 이뤘다 성불 또는 견성 이러지요. 부처를 이룬 게 아니라고요. 본래부처임을 말은 한계가 있으니 편의상 부처됐다. 우리가 그런 표현을 할뿐이지 본래부처인 본심불이라고요. ‘본액주本額珠며 그 장사가 구슬을 얻었다고 하지마는 얻은 게 아니라 본래 자기 이마에 있었든 것이고’ 법화경에도 이런 비유가 있지요. “불관향외구멱지력고不關向外求覓之力故로 - 밖을 향해서 구하고 찾고 한 힘은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고로”이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잖아 역사力士가 예를 들어서 자기가 놀러 다니고 씨름하던 씨름판이라든지 말을 타고 돌아다녔던 곳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찾았다손 칩시다. 그게 무슨 보탬이 되나요. 자기가 놀던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구슬을 찾느라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 노력이 무슨 보탬이 되냐고요. 자기 이마에 본래 있었던 구슬이 내 이마에 본래로 있었구나. 난 본래 잃어버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러므로 허수虛修라고 하지요. 헛된 수행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육년 고행도 헛된 수행이지요. 어떤 수행도 다 헛된 수행이야.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돼 있어 이게. 수행해서 얻는 것이라면 수행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이치잖아요. 이건 큰 횡재하는 가르침이야. 노력도 하나 하지 않고 부처되는 가르침이 바로 이거니까. 이게 차원이 너무 높아서 곤란하다니까. 그래도 우리가 이런 공부를 귀로 스치고 가는 그런 인연이라도 얼마나 좋은 겁니까? 역사가 구슬 찾으러 돌아다닌 것은 괜히 돌아다닌 것이고 부처되기 위해서 온갖 난행고행難行苦行을 다하고 육바라밀을 다 닦고 한 것도 전부 헛된 수행이다. 이런 말입니다.
不關向外求覓之力故로 佛言 我於阿耨菩提에實無所得이나
불관향괴구멱지력고 불언 아어아뇩보리 실무소득
밖을 향해서 찾은 것과는 아무 관계가 되지 않는 까닭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 실로 얻은바가 없어
“불관향외구멱지력고로 불언 아어아욕보리에 실무소득이나 - 밖을 향해서 찾은 것과는 아무 관계가 되지 않는 까닭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 실로 얻은바가 없어”본래 있던 것이니까 얻은바가 없다. 그러나
恐人不信故로
공인불신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아니할까 염려되는 까닭으로
“공인불신고로 - 사람들이 그것을(내가 본래가지고 있던 것이라면) 믿지 아니할까 염려되는 까닭에
引五眼所見과 五語所言하니
인오안소견 오어소언
오안의 소견과 오어의 소언을 이끌어 온 것이니
“인오안소견과 오어소언하니 - 오안(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의 소견과 오어(진어 실어 여어 불광어 불의어)의 소언을 이끌어 온 것이니”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을 가지고 남보다 뛰어난 안목으로서 최상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로 얻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오어소언이라고 해서 진어 실어 불광어 불의어 이런 말을 했잖아요. “금강경에서는 내말이야말로 이게 진짜고 정말 실다운 것이고 사실과 같은 말이고 거짓말이 아니고 다르지 않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해가면서 이걸 왜 했느냐.” ‘공인불신恐人不信故이라 -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서 하는 말이다.’
真實不虛라 是第一義諦라하시니라
진실불허 시제일의제
진실해서 헛되지 아니함이라 이것이 제일가는 도리라 하시니라
“진실불허라 시제일의제라하시니라 - 진실해서 헛되지 아니함이라 이것이 제일가는 도리라 하시니라”제일가는 진리와 이치의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이 이상의 이치는 없다. 이것이 제일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스님께서 별별 가르침을 많이 폈지마는 그것은 결국 본심의 실체를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성불이라 정의를 한다면 그 성불한다고 하는 것과는 사실은 관계가 없어. 그렇지만 그렇게만 나가면 그 이론의 근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불과 몇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근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안 믿어. 여러 사람이 이 좋은 보물을 다 알도록 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하는 가르침을 펴야하니까 일단 믿고 들어와야 하거든. 그러니 별별 말씀을 다 하는 거죠.
오안소견이니 오어소언이니 하는 이런 가르침을 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팔만대장경이 전부 방편설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팔만사천 근기에 맞는 그런 방편의 가르침이고 또 팔만 사천 병에 약방문이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약방문으로 그렇게 가르친 것이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전심법요가 우리 선문으로 알아주는 가르침이거든요. 이렇게 간단명료하면서도 정곡을 찔러 더 이상 어떤 소견도 이것보다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최궁극의 소견이에요.
안목이나 견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안목과 견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우리가 눈여겨봐야 되고 우리의 신행생활에 조금 거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깨달은 분의 최궁극의 안목으로 하신 거라는 것이 언젠가 우리의 마음에도 와 닿을 때가 있고 내 공부의 살림살이가 될 때가 있다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겠죠. 그런 것 저런 것 없이 마음에 다 흡수되고 그야말로 저기 저 감, 흙밭에 물을 부으면 물이 쑥쑥 스며드는 것과 같은 이런 고준한 가르침이 우리마음에 쑥쑥 스며들어 하나도 거역함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거죠. 결국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첫댓글 不如當下無心이니 便是本法이니라 ... 바로 이 순간에 찾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니 그것이 곧 본법이라 ... 청비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도를 증득할 때에는 다만 본심인 부처를 증득함이요...청비님! 수고하셨습니다.._()()()_
不關向外求覓之力故로 佛言我於阿뇩菩提에 實無所得이나 恐人不信故 로 引五眼所見 과 五語所言하니 眞實不虛 라 是第一義諦라하시니라, 해설 밖을 향해서 찼은 노력과는 관계가 없다 그르므로 부처님 께서 최상의 꺠달음을 성취 하는 데는 실로 얻은바가 없으나 사람이 믿지 않을까 염려 해서 오안의 본바와 오어의 말한바를 인용 하였으니 진실 하여 허망되지 않아 제일의 의제라고 하였으니 학도인는 의심하지 말라,,,,청비님 감사드림니다,,,_()()()_
감사 합니다._()()()_
不可將心更求於心이니...가히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_()()()_
不如當下無心이니 便是本法이니라 ...청비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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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너가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
遂將心覓法하고 不知心即是法이요, 法即是心이라 不可將心更求於心이라.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음은 마음 그대로가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 함이요, 법이 곧 이 마음이인 줄 알지 못함이니 마음을 가져서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지니라!
모셔 갑니다
마하반야바라밀()()()
不如當下無心(불여당하무심)이니 便是本法(갱시본법)이니라. ㅡ 바로 이 순간에 찾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니 그것이 곧 본법이라 불여당하무심이니 갱시본법이니라 - 바로 이 순간에 찾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니 그것이 곧 본법이다.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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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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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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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即是法, 法即是心이라 . 마음을 따로 구하지 말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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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