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문종
1414~1452년, 재위기간 : 1450년 2월~1452년 5월, 2년 3개월
세종 + 소헌왕후 심씨(8남2녀)의 1남
세종의 치세 기간은 자그마치 31년 6개월이었다. 세자 향은 세종 즉위 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기간 중 8년 동안은 세종 대신 섭정을 했기 때문에 세종 치세 후반기는 왕자 향의 치세라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왕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1421년으로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누운 것은 1436년(세종 18년)으로 향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결심했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종은 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세종은 왕세자의 섭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 이상 건강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부터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한 탓에 병은 날로 악화되었고, 병상에 누워야 하는 일이 잦아져 편전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어서 세종이 더 이상 집무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자의 섭정은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세자의 섭정이 좌절되자 세종은 별수 없이 업무량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의정부서사제였다.
의정부서사제란 부분적인 내각제를 의미한다. 즉, 육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심의한 다음 결론을 내려 왕에게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이는 곧 정도전이 왕도정치의 표본으로 내 세웠던 재상정치의 일부였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 재상정치를 정치 이념으로 내걸었으나,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태종으로 등극한 후에는 의정부가 중심이 되는 재상정치를 폐지하고 왕이 직접 육조를 관장하는 육조직계제를 도입해 왕권을 강화했다. 이런 제도는 세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육조직계제는 왕이 모든 실무를 관장해야 하기 때문에 왕의 업무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다. 잔병이 많았던 세종은 이런 과다한 업무량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되었고,더 이상 육조직계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한 이후에도 세종은 업무를 결재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세종은 5년 후인 1442년에 다시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이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신하들은 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세자로 하여금 정사를 결정하게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세종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고,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은 고려 때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뜻 것으로 이는 충렬왕 이후(1276년)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 제도를 임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편,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짧은 치세와 왕권의 위축
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원래 병약했던 그는 세자 시절의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즉위 후에는 병세가 더 심해져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 자는 휘지였다. 8세 되던 해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29세 되던 해인 1442년부터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산(일월 및 오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법) 및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8년 동안의 섭정에 이은 즉위였기에 문종시대의 정치는 세종 후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 대에 비해 다소 위축되었다. 그것은 세종이 집권기 절반을 병석에 누워 있었고 또한 후반기에 세자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기에 수양, 안평 등 다른 왕자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있었던 탓이었다. 왕자들의 세력이 심상치 않게 조성되자 언관들의 종친들에 대한 탄핵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문종 집권기 내내 종친과 언관들 사이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輪對, 돌아가면서 왕을 마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등을 편찬하게 했다. 이는 곧 문종이 역사와 병법을 정리해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고려사』와『고려사절요』등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 제도, 문화의 정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 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기에 일찍 혼인했다. 그래서 첫 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 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당시 양원에 진봉되어 있던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다.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칙 양씨에게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으며, 현덕왕후도 이곳에 함께 묻혀 있다.
문종실록은?
『문종실록』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50년 3월부터 1452년 5월까지 문종 재위 2년 3개월간에 이루어진 각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문종실록』은 1454년 3월『세종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 작업에 들어가 1455년 11월에 완성되었다. 이 책의 감수관은 원래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이어 수양대군 이었지만 수양이 즉위하자 정인지가 책임을 맡았다.
이 작업이 완료된 다음 달 세조는 실록각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도승지 박원형, 좌부승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편찬 관계자들에게 술, 감귤, 향혼 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문종실록』은 문종 1451년(문종 1년)12월과 이듬해 1월에 해당하는 두 달분이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하여 1600년(선조 33년)8월 예문관 대교로 있던 권태일이 묘향산에 가서 실록을 살피다가 처음으로『문종실록』의 착오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성주, 충주사고가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아 이것을 묘향산으로 옮겼는데, 이 전주사고본에는『문종실록』11권의 표지와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즉, 표지에는 11권이라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9권이어서 실제로는 11권이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권태일은 인쇄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할 때 착오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해 춘추관본을 인쇄하여 전주사고로 보내질 때『문종실록』의 11권은 표지는 11권이고 내용은 9권인 채로 묶여져 갔다는 해석이었다. 그것은 또 전주사고 이외의 다른 사고 중 한 곳에 표지는 9권이지만 내용은 11권으로 되어 있는『문종실록』이 있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현재『문종실록』은 11권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 문종시대인 1451년 12월과 1452년 1월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