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이씨 가문의 유래 및 번영 ☞메뉴를 선택 하여보시기 바랍니다.☜
1.관향(지명) 성주의
변천 -성주(星州)는 고대 육가야국(六伽倻國)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이었다. -신라(新羅)가 멸망시켜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경종(景宗)이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이 되었으나, -995년 (성종 14)
대주도단련사(垈州都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여 1군 14현을
영속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한 후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을 두었고
-충선왕(忠宣王)이 다시 경산부로 강등하였으나 조선 태종(太宗)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仁祖)때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되었다.
☞성주이씨의
관향지:경북 성주 맨위로 2.성주이씨 유래 ●.성주이씨의 시조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제56대 왕, 재위기간 924 ∼ 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 태조에게 손위(遜位)하자
마의태자(痲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성주이씨 중흥시조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지방에 살며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장경(長庚)이 크게 현달 (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고종(高宗: 제23대 왕, 재위기간 1214 ∼ 1260) 때 그의 어머니가 문창성(文昌星) 이
경산(京山)에 떨어 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뛰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했다고 하며, 학문에 정통하여 존경하며 따르는 자가 많았다.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이 성주쉬(지금의 군수)로 부임하여 장경의 인품을 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살게 하였는데,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어,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크게 명성을 떨쳤으므로 나라에서 삼중대광 좌시중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三重大匡左侍中都僉議政丞知典理司事上護軍)에 추증하고,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추봉하였으며, 그의 손자 승경(承慶: 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농서군공으로 선칙(宣勅: 크게 향연을 베푼 후에 내리는 칙령)하여 봉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처음에 농서이씨로 칭관(稱貫)하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성주(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嶺南) 내륙에 터를 잡고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의 집안으로 명망을 떨쳐왔던
성주이씨는,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아들 5형제가 가문의 5대 인맥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기틀을
다졌다. 長男--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밀직공파 파조 次男--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참지공파 파조 三男--문하시중
이만년(李萬年)--시중공파 파조 四男--개성유수 이억년(李億年)--유수공파 파조 五男--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문열공파
파조
중시조 이장경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능곡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한다. 성주의
안산서원, 연봉서원, 고흥의 성산사, 산청의 안곡영당, 금능의 보본사, 옥천의 평산사, 금능의 상친사에 제향한다.
맨위로 3.성주이씨 가문의
번영-1-
장경(長庚)의
맏아들 백년(百年)이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했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 裕)와 더불어 맹자(孟子)의 도(道)를 강론하여 유교(儒敎)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그의 아들 인기(麟起)는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많은 치적을 남기고 향리에
돌아와
아버지 백년의 뜻을 따라 유교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추성좌명공신(推誠佐命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던 원구(元具)의 아들 숭인(崇仁)은 목은(牧隱: 이 색), 포은(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도은 (陶隱) 숭인(崇仁)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관직을 역임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라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우왕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거쳐 서연관 (書筵官)이 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경산(京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92년(태조 1)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 (黃居正)에
의해 배소에서 살해당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목은의
동문으로 다정했던 사이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됨으로써 도은은 절개를 지켰고 정도전은 새 왕조에 귀부한 변질된 자가
되어 세상에 더없는 앙숙으로 변하였다. 도은이 정몽주의 일당이라 하여 경산(京山)에 귀양갔었는데,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태종(太宗) 때
황거정(黃居正)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에 올랐었는데, 도은을 죽였다는 말이 임금 귀에 들어가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온 터이라,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구나"하고는 훈작(勳爵)을 삭제,
서인(庶人)으로 삼고 자손(子孫)은 금고 (禁錮)시켰다.
백년의 아우인 천년(千年: 봉선대부로 전객부령을 지냄)의 아들 승경(承慶)은 원(元)나라에 유학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내며 나라에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그의 부친 천년(千年)과 조부 장경 (長庚)에게 농서군공을
추봉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郎將) 겸 중군지후(中軍祗侯)를 역임했던 만년(萬年)의
현손(玄孫) 지활(智活: 이조 판서 비의 아들)은 단종(端宗) 때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내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居昌)의 박유산(朴儒山)에 들어가 망월정(望月亭)을 짓고 매일밤
북녘을 바라보며 단종을 사모하는 시(詩)를 짓고 통곡하였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夜夜相思到夜深) -기우는 달만
님과 나를 비추이네(東來殘月兩鄕心) -이 원한을 풀어 줄 사람 없어(此時寃恨無人解)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孤倚山亭淚不禁) 그 후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성주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은 충혜왕(忠惠王) 때
정당문학 (政堂文學)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그의 아들 포(褒)는 광정대부(匡正大夫)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역임했다.
1326년(충숙왕 13) 19세로 문과에 급제했던 인복(仁復)은 어려서부터 백이정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주자학 (朱子學)에 밝았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 (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성산군(星山君) 에 봉해졌다.특히 그는 문장(文章)이 탁월하여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와서 [고금록(古今錄)] 을 편수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목은 이 색(李 穡)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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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주이씨 가문의 번영-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직(稷: 평리 인민의 아들) 은
개국3등공신 (開國三等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4등공신 (佐命四等功臣)이 되었으며,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 를 설치,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뛰어난 문장으로
시명(詩名)을 떨쳤던 그는 1411년(태종 11)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 초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순충좌명개국일등공신(純忠佐命開國一等功臣)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던 제(濟: 성산군 인립의 아들)는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혼인했고, 왕자(王子)의 난 때
태조비 신덕왕후의 구명 소청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다. 남편이 죽자 경순공주는 아버지인 태조 앞에서 울면서 삭발하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절(寺)로 들어갔다.
세종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던 발(潑: 성산군 인립의 아들, 제의
아우)의 현손(玄孫) 항(恒)은 일찍 부터 무사(武士)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무예(武藝)를 익히다가, 백부(伯父)의 꾸지람을 들은 것을
계기로 각성하고 30세에 이르러 박 영(朴 英)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호남오현(湖南五賢)>의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어느날
말 위에서 책을 들고 생각에 잠기다가 관원 행차의 벽제(존귀한 사람의 행차 때 여러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것)를 범하여 종은 붙들리고 말만 가는데도
그는 깨닫지 못할 정도로 독실하게 글을 읽었다고 한다. 1566년(명종 2) 조정에서 학행이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을 거쳐 임천군수(林川郡守)로 나갔으나 잘못 다스린다는 비방이 있자 곧 사직하고 어머니와 함께 태인(泰仁)에
은거(隱居)했는데, 전라도로 감사(監司) 나간 사람은 으례히 그를 찾아보는 것이 예의가 되었을 만큼 학덕(學德)과 인망이
높았다.
태종(太宗)의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혼인하여 성원위(星原尉)에 봉해졌던 정녕 (正寧: 영의정 직의
손자)의 아들 집은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이조참의(吏曹參議) 부제학 (副提學)·대사간(大司諫)·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치게 청렴하고 사청(私請)을 거절
하여 송(宋)나라 포증(包拯)이 법관으로서 사정(私情)이 없었기에 지옥의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붙여졌던 별칭인
<포염라(包閻羅)>로 불리웠다.
대사헌(大司憲)
언충(言忠)의 증손 광적(光迪)은 삼조(三朝:
효종·현종·숙종)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 했던 명신(名臣)으로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며,
맨위로 영의정 직(稷)의 현손(玄孫) 충건(忠楗)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15년 (중종 10)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의 아우 문건(文楗)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 쓰고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통곡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일파로
지목 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특히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었고, 당대의 석학 (碩學) 이
황(李 滉)·조 식(曺 植)·이 이(李珥) 등과 응답(應答)한 내용을 엮은 묵휴창수(默休唱酬)가
전해진다.
그 밖의 인물로 연산군(燕山君)이 그의 가기(歌妓: 노래 잘하는 기생)를 위해 가시(歌詩)를 지어 바치라고 했을 때
최초로 거절하고 성덕(聖德)을 우려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자건(自建)은 이것이 탈이 되어 곤장을
맞고 선산(善山)으로 유배당했다. 그 죄상으로 보아 복직이
가망없다고 생각한 선산의 수령은 군졸을 데리고 가서 자건의 우소(寓所)를 포위 하고는 그를 묶어서 꿇어 앉히곤 직접 매질까지
하였다. 그 후 자건이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을 때 이 선산의 수령은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다가 그 저보(邸報) 를 보고
수령직을 사임하려 하자 자건은 안악으로 찾아가 잘 달래어 머물러 있게 했고, 치산(治山)에 소홀 하여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녹미(祿米)를
아껴 조금씩 술을 빚어먹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낸 종일(鐘一)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가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아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성주이씨를 더욱 빛냈다. 맨위로
5.성주이씨
종파별 분파도
●.시조(始祖)님 휘 순유(諱 純由) ●.중시조님 이전 선계(中始祖님 以前 先系) 시조--2 세--3 세---4
세---5세-6세-7세-8세-9세--10세-11세-12세 순유-휘실전-휘실전-휘실전-범-정거-충경-영-효참-돈문-득희-장경 純由-諱失傳-諱失傳-諱失傳-凡-廷居-沖京-瑩-孝參-敦文-得禧-長庚 ●.중시조(中始祖)님 휘 장경(諱 長庚)1世 ●.5대 종파(5 大 宗 派) -2세 휘 백년(諱 百年)밀직공파 파조(密直公派 派祖) -2세 휘 천년(諱 千年)참지공파
파조(參知公派 派祖) -2세 휘 만년(諱 萬年)시중공파 파조(侍中公派 派祖) -2세 휘 억년(諱 億年)유수공파 파조(留守公派
派祖) -2세 휘 조년(諱 兆年)문열공파 파조(文烈公派 派祖) ●.종파 별 지파(宗派 別 支派) ★.밀직공파(密直公派)
◎.5世 휘 숭인(諱 崇仁)도은공파
파조(陶隱公派 派祖) -┃━6세 휘 차약(諱
次若)군수공파 파조(郡守公派 派祖) -┃━6세 휘
차삼(諱 次參)전직공파 파조(殿直公派 派祖) -----┃━8세 휘 문박(諱 文博)진사공파 파조(進士公派 派祖) ◎.5세 휘 숭문(諱
崇文)판서공파 파조(判書公派 派祖)
★.참지공파(參知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3세 휘 의인(諱 宜仁)정랑공
의인파 파조(正郞公宜仁派 派祖) ◎.3세 휘 태수(諱 台秀)랑장공 태수파 파조(郞將公台秀派 派祖) ◎.3세 휘 태보(諱
台寶)성산군공 태보파 파조(星山君公台寶派 派祖) -┃━6세 휘 지활(諱 智活)고은공파 파조(孤隱公 派祖) -┃--┃━7세 휘 문현(諱
文賢)현감공파 파조(縣監公派 派祖) -┃--┃━7세 휘
문수(諱 文粹)군수공파 파조(郡守公派 派祖) -┃--┃━7세 휘 문미(諱 文美)정랑공파 파조(正郞公派 派祖) -┃--┃━7세 휘 문통(諱
文通)계정랑파 파조(季正郞公派 派祖) -┃━6세 휘 지원(諱 智源)참판공파 파조(參判公派 派祖), ◎.3세 휘 태무(諱 台茂)판서공
태무파 파조(判書公 台戊派 派祖) 맨위로 ★.유수공파(留守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4세 휘 인복(諱 仁復)초은 문충공파 파조(樵隱 文忠公派 派祖) ◎.4세 휘 인임(諱
仁任)광평군공파 파조(廣平君公派 派祖) ◎.4세 휘
인미(諱 仁美)판사공파 파조(判事公派 派祖) ◎.4세 諱 인립(諱 仁立)성산군공파 파조(星山君公派 派祖) -┃━5세 휘 제(諱
濟)경무공파 파조(景武公派 派祖) -┃--┃━7세 휘 맹순(諱 孟淳)부장공파 파조(部將公派 派祖) -┃--┃━7세 휘 숙순(諱
叔淳)사직공파 파조(司直公派 派祖) -┃--┃━7세 휘 계순(諱 季淳)남선당파 파조(南宣堂派 派祖) -┃--┃━7세 휘
의순(諱 義淳)어모공파 파조(禦侮公派 派祖) -┃--┃━━9세 휘 조(諱 晁)동곡공파 파조(桐谷公派 派祖) -┃━5세휘 발(諱
潑)평간공파 파조(平簡公派 派祖) ------┃━━━9세
휘 항(諱 恒)문경공파 파조(文敬公派 派祖) ◎.4세 휘 인민(諱 仁敏)성산부원군공파 파조(星山府院君公派 派祖) -┃━5세 휘 직(諱
稷)문경공파 파조(文景公派 派祖)
-┃--┃━6세 휘 사후(諱 師厚)판윤공파 파조(判尹公派 派祖) -┃--┃--┃━7세 휘 정녕(諱
正寧)장절공파 파조(章節公派 派祖) -┃--┃--┃--┃━8세 휘 의(諱 誼)순정공파 파조(純貞公派 派祖) -┃--┃--┃--┃━8세 휘
전(諱 詮)도정공파 파조(都正公派 派祖)
-┃--┃--┃━━10세 휘 충건(諱 忠楗)눌제공파 파조(訥濟公派 派祖) -┃--┃--┃━━10세
휘 문건(諱 文楗)묵제공파 파조(默濟公派 派祖) -┃--┃ -┃--┃━6세 휘 사원(諱 師元)동지공파 파조(同知公派
派祖) -┃--┃━6세 휘 사순(諱
師純)참판공파 파조(參判公派 派祖) -┃--┃--┃━7세 휘
영분(諱 永賁)수사공파 파조(水使公派 派祖) -┃--┃━6세 휘 사형(諱 師衡)간성공파 파조(杆城公派 派祖) -┃ -┃━5세 휘
수(諱 穗) 총제공파 파조(總制公派 派祖) -┃━5세 휘
이(諱 移) 문과공파 파조(文科公派 派祖) -┃━5세 휘 갈(諱 ?) 봉례공파 파조(奉禮公派 派祖) -┃━5세 휘 아(諱 莪)
첨추공파 파조(僉樞公派 派祖)
☞자료출처 : 성주이씨 대종회 편성표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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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주이씨
항렬표
백파(柏派)-밀직공파 |
참지공파(叅知公派-忠烈公派) |
시중공파,유수공파,문열공파 |
-20세:○수(○秀)
-21세:○환(○煥) -22세:규○(圭○) -23세:○현(○鉉) -24세:○영(○永) -25세:
木部 ○-미지정 -26세:○(변)火-미지정 -27세:(변)土○-미지정 -28세:○(변)金-미지정
-29세:(변)水○-미지정 -30세:○(변)木-미지정 -31세:(변)火○-미지정 -32세:○(변)土-미지정
-33세:(변)金○-미지정 -34세:○(변)水-미지정 -35세:(변)木○-미지정
|
-21세:○석(○錫) -22세:원○(源○) -23세:○주(○柱) -24세:형○(炯○),홍○(烘○) -25세:○규(○奎),○곤(○坤) -26세:현○(鉉○),종○(鍾○) -27세:○호(○浩),○구(○求) -28세:동○(桐○),환○(桓○) -29세:○희(○熙),○열(○烈) -30세:재○(○在),○배(○培)
|
-20세:○용(○容),○화(○火) -21세;교○(敎○),토○(土○) -22세:종○(鍾○),금○(金○) -23세:○순(○淳),○수(○洙) -24세:상○(相○),병○(秉○) -25세:○희(○熙),○섭(○燮) -26세:재○(在○),규○(圭○) -27세:○현(○鉉),○석(○錫) -28세:택○(澤○),영○(永○) -29세:○식(○植),○근(根○) -30세:병○(炳○),현○(炫○) -31세:○기(○基),○배(○配) -32세:옥○(鈺○),용○(鎔○) -33세:○홍(○洪),○락(○洛) -34세:병○(柄○),계○(桂○) -35세:○형(○炯),○렬(○烈) |
☞자료출처:1975년에 발행된 성주이씨 대동보를
참고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