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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겐 엄마가 필요해. 그러니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나서......)
안진심
1. ‘엄마를 부탁해’ - ‘우리들의 엄마를 부탁해.’, 혹은 ‘이런 엄마가 되어주길 부탁해.’
소설을 읽고 나서 이렇게 찜찜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마지막 장에서 엄마가 죽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행방불명된 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약간의 추측만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참으로 나에겐 찜찜했다. 끝까지 소설을 읽으면서 좀 더 집중하지 못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말이 너무도 궁금하였기에 조금은 대충대충 읽어 나갔는데 끝장까지도 엄마가 실종 된 이후를 자세히 그려주지 않는다. 물론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그것이 정말 중요하지 않음을 알지만, 찜찜한 것은 찜찜한 거니깐 말이다.
소설 제목인, 엄마를 부탁해. 처음엔 그저 마지막에 소녀씨의 첫 딸인 ‘너’가 피에타 상에게 가서 불쌍하고 고된 삶을 산 우리들의 엄마를 부탁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우리들에게 지금 이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엄마를 부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엄마들을 엄마라는 이유로 매어놓지 말라고, 엄마도 누군가의 아이였고, 소녀였고, 여자였음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난 어쩌면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박소녀씨와 같은 엄마가 되어주길 부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소녀씨의 영혼으로 보이는 사람이 작은 딸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에서 더욱 더 그렇게 느꼈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 딸이 결국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아파하는 엄마. 하지만 큰 딸과 대비되어 어쩌면 우리에게 앞으로 이런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어쩌면 나는 그래서 조금 더 찜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엄마들에게 밍크코트는 자존심이다. - 한국의 어머니를 말한다.
도대체 우리 엄마와 공통점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나름 내 또래 엄마들에 비해 연세가 있으신 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에게로 치자면 우리 외할머니같은 이 소설 속 엄마와 우리엄마와의 공통점이 있다면(이 부분에서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밍크코트에 대한 로망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처럼 우리집은 내가 학생이었던지라 직접 사 드리진 못하고 ‘밍크의 난’을 일으키시며 엄마가 직접 사시긴 했지만, 이 밍크코트란 것은 엄마들 세계에서 엄마들의 ‘자존심’인 것이다. 아직도 이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박소녀씨는 그 옛날의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나올법한 어머니상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한국인에게 있어 가장 보편적인 어머니를 너무도 뛰어나게 묘사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지나치게 정형화 된 듯한 우리네의 어머니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 식상한 느낌도 들었지만,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어머니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어쨌든 이 ‘엄마를 부탁해’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한국의 어머니를 잘 그려내고 있다. 그랬기에 쉽게 공감을 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녀씨와 전혀 달라 보이는 우리 엄마와도 밍크코트에 대한 로망이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3. 그래도 소녀씨에겐 곰소의 ‘그’가 있어 행복했다.
가끔 우리엄만 그런 말씀을 하신다. 평생을 살면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 해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그럼 아빠는 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네 아빠가 하도 쫓아 다녀서 결혼 해 줬을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하신다. 아빠가 아시면 참으로 서운하시겠지만 난 아빠보다도 같은 여자인 엄마가 더 안쓰럽다. 그저 나이가 차서 적당히 결혼하여, 싫든 좋든 40년 가까이 살아온 남편.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다름을 잘 알기에 드라마 주인공처럼 찐한 연애 한 번 못해보셨다는 우리 엄마가 같은 여자로써 난 참 불쌍한 것이다.
측은함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우스울 수 있겠지만 수많은 요인들이 우리 엄마보다 박소녀씨가 더 측은하게 그려지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 장을 봤을 때, 나는 우리 엄마가 그 불쌍한 박소녀씨 보다 더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물며 소녀씨에게 있는 ‘그’가 그리고 ‘로맨스’가 우리엄마에게는 없었으니깐. 물론 소녀씨의 일생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고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매에 걸려서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그’가 있기에 그녀의 삶은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절대로 잊지 않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진한 추억이 될 수 있는 삶, 그건 참으로 복된 삶이니 말이다.
4. 나는 그래도 소녀씨 같은 엄마는 되지 않으련다.
아직 조금은 먼 이야기인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엄마’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소녀씨 같은 엄마는 되지 않으련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나’를 잃어버린 채, ‘엄마’로 ‘아내’로 사는 삶을 나는 하지 못 할 것 같다. 나는 ‘안진심’인 ‘나’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깐 말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나도 이 소설의 막내 딸 같은 엄마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든다. 내 직장도 가져야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양말짝도 짝짝이로 신는 그런 엄마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말이다. 사실, 내가 예전부터 꿈꾸어 왔던 엄마는 항상 집에서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놓고 학교에 갔다가 오는 나를 맞아주는 그런 엄마였다. 나도 물론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5년 후의 나도 남편이 입다 버린 셔츠에 자둣물을 묻히고 둘째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나’를 지키며 누군가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래도 소녀씨 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이 조금은 많이 서글프다.
5. 우리 모두에겐 엄마가 필요해, 그러니 엄마를 부탁해.
소녀씨는 마지막에 말한다.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고. 그렇다. 우리 모두에겐 엄마가 필요하다. 할머니의 이름을 가진 그녀들에게조차도 엄마는 필요하다. 모든 것을 감싸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 평소엔 귀찮고, 짜증나고 때론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인 것 같아도 결국은 나의 모든 아픔을 감싸안아주고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엄마가 필요해. 그러니 엄마를 잊지말자. 그리고 잃어버리지 말자. 항상 엄마를 잊고 사는 그대들에게 엄마를 부탁해. 잃어버리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신호근
나는 대중의 선택을 지지한다. 대중의 선택은 간혹 중우 정치로 비춰지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의 작품이 대중의 기호에 맞추었다는 것은 그 작품속에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내면화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내면화의 방법이 세련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에서 이번 엄마를 부탁해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토론을 처음시도하는 우리에게 엄마를 부탁해는 치열한 토론의 주제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 모두의 입을 열게하는 가장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누구나 엄마는 있으며, 그 엄마에 대한 간절한 말 할 거리가 있다.
1. 엄마를 부탁해를 보며
처음 글을 읽으면서 혼라스럽고 거북했다. 너는..... 내가 배웠던 시점 들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1인칭 주인공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등등 아무리 보아도 작가에게 '너'라하고, '너'는 그랬다라고 하는 '그'는 누군인지가 참으로 애매했다.
처음에는 작가의 자기 이야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오빠가 등장하고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엄마의 관점에서 글이 진행된다. 어쩌면 혼란스럽고 난해 할 것은 이런 작업을 신경숙 작가는 아주 매끄럽게 잘 이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읽고 소설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각각의 입장과 견해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2. 역시나 시선은 자신의 위치에서 시작 된다.
이 글을 읽으며, 죄송함, 안쓰러움, 서글품, 그리고 막연하게 그리운 감정들이 봄 들판의 새싹들처럼 피어 올랐다. 그중 내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큰 아들의 이야기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엄마를 지켜야하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근근히 버티어 살아가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내게 크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삶이 내 삶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늘 자신과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에게는 여러가지 고민이 있을 수 밖에는 없다. 가족도 지켜야 하며, 성공도 해야 한다. 가족들의 모든 일들을 다 책임져야 하며, 그것을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엄마 만큼의 큰 짐은 아니겠지만, 큰 아들의 짐은 크다.
나역시 가난한 집안의 큰 아들로서 삶이 버겁다. 늘 대하는 사람의 작은 실수는 큰 흠이 되지만, 가끔 찾아오는 손님의 선님은 오래 도록 기분 좋은 추억거리다. 마치 부모를 모시는 큰 며느리의 일상은 당연한 것이지만, 설날에 던져주는 작은 며느리의 용돈은 큰 의미를 지니느 것처럼....
하지만 그 일이 버겁다는 것을 표현 할 만큼 큰 아들의 자리는 넉넉하지 않다. 모든 잘 못의 근본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 큰아들의 운명, 역시나 시선은 나의 위치에서 나오는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참고로 시선은 나의 위치에서 나온다는 호자님이 하신 말이다. )
3. 나의 어머니로....
모든 이의 어머님이 그렇겠지만, 아마 나의 어머님 만큼 파란 만장한 삶을 사신 분도 없을 것이다. ....... 나의 아버님은 법 없이도 살 사람, 하늘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내일 아침 꺼리라도 다른 사람이 저녁을 못 먹었다고 하면 퍼주는 그런 분이었다. 더 없는 호인. 하지만 그런 호인을 아버지로 둔 가족의 삶은 늘 처량하다. 그런 가족의 삶을 처량이으로 부터 지켜 내야 했던 어머님은 독해 지셔야 했다. 나의 엄마는 자식들을 지키기위해 작은 몸으로 독하게 일하셨다. 기다렸던 아들인 나를 낳고도 어머님은 산후 조리를 포기한 채 3일만에 논에가서 풀을 뽑아해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나가셔도 술 한잔 자시면 사람들과 이야기만 나누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3일을 풀을 뽑았는데, 엄마가 가보면 논에 풀은 늘 그대로 였다하셨다. 하지만 말 끝에는 늘 그래도 아버지가 더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우리에게 꼭 되풀이 하셨다.
아버지는 늘 사람들을 집으로 부르시는 것을 좋아하셨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의 고민상담소였고, 아버지는 상담 역할을 위해 늘 술을 드셨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해, 파킨슨씨 병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는 그때부터 내가 대학교 2학년때까지 총 7년의 아버지 병수발을 하셨다.
아버지가 쓰려지신 상황에도 어머님은 나를 대학에 보냈고, 집을 새로 지셨다.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여자몸으로 혼자 농사를 지으셨고, 살림 살이를 하셨으며, 작은 돈이나마 돈을 모았다.
어머님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소 먹일거리를 위해 풀을 베어 오셨고, 6시부터 7시까지 아버지를 씻기시고 식사를 차려드렸으며, 밥을 먹고 7시 30분부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논에가서 일을 하다가 12시에 집에 와서 아버지를 돌려 눕도록 도와 주시고 다시 논에가서 저녁에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돌 보시고, 가축을 거두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으셨다.
어느날 숲길(1차선)에서 군수님의 차와 어머님의 달구지가 마주쳤다. 시골사람들에게 군수님은 당연히 하늘 같은 분이셨지만, 어머님은 물러날 수 없었다. 군수의 기사가 내려, 빨리 뒤로 비키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그 기사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이보시오. 기사 양반. 소는 달구지 달고 뒤로는 못 갑니다. 자동차는 후진이 되니, 자동차를 좀 비켜주시오.
마침 기사와 어머님의 실랑이를 보던 군수님이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나왔다가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그리고는 " 김기사, 그 아주머님 말이 옳다. 어떻게 소 달구지가 뒤로 가겠냐? 차를 뒤로 빼서 먼저 가시도록 해드려라"
나중 군수님은 행색이 초라한 아줌마가 혼자 소달구지를 끌고 마을에서 1시간이나 떨어진 산골로 간 사연을 동네 리장님께 물었다고 한다. 남편은 4년째 병중이고, 아이들 공부를 위해 혼자서 농사를 짓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군수는 어머님께 상을 내렸지만, 어머님은 그 상조차 받으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남의 일을 가셔서도 점심에는 집으로 와서 아버님을 간병하셨다.
한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가족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사셨던 어머님, 그 어머님의 인고의 세월을 다 아는데도, 전 아직 사람 구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내일 저녁 6시 30분 지평 사업 토론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꼭 참석해주세요.
참가 대상 : 지평 교사 및 토론 교사 시간장소 : 6시 30분 한식마당
준비물 : 엄마를 부탁해 책, 엄마를 부탁해 책을 읽고 자료 - 발표자료( 10부씩 각자 복사해주시고, 쿨로 신호근에게 보내주세요.)
분량이나 내용은 마음입니다. 소감문 형식도 좋습니다. 발표는 1인당 5분 정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곽재원
- 책에 대한 느낌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너무 통속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고서는 아주 오랜만에 끊지 않고 읽으려고 노력하는 책이 되었다. 재미도 있고, 옛날 생각도 나고, 다들 그러하겠지만 내 입장에서 엄마 생각도 해보고... 아내에게도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금방 다 읽더니 돌아가신 장인·장모님 보고싶다고 하였다.
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가까이 있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늘 보고 얘기하고 오랜 시간 같이 하였기에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며 엄마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책 읽는 동안 마음이 감상적으로 변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다시 찾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놓치기 쉽고 잃기 쉬운 감정을 다시 찾게 해준 이번 기회가 고마울 뿐이다.
- 우리 엄마는
소설에도 나오지만 우리 엄마는 먹성이 너무나 좋은 우리 3남매 때문에 일을 많이 하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녀왔을 때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내가 기억을 하는 시절부터 시작되어서 엄마와 낮에 점심을 먹어본 기억은 드물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나를 업고 식당이나 세차장 등에서 계속 일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배운 게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노동일을 주로 했지만 꾸준한 일은 아니었고 자주 몸이 아프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술과 관련되어 있다. 늘 술과 함께한 삶이었다.
내가 중학교때는 엄마가 운전을 배우셔서 운전일을 시작하셨다. 출퇴근 차도 몰고 자동차 운전면허 학원에서 강사도 하셨다. 강사를 하면서 대형 면허도 따서 내가 고등학교 때는 성남에 가서 시내버스를 운전하셨다. 지방에서 일을 하는 것에 비하면 수입이 많으니까. 갈 때 5만원과 종이가방 하나 들고 가셨다. 10년을 버스를 하셨다. 지방과 달리 수도권은 버스 운행 시간이 길어 엄마는 힘들어했다. 새벽에 3시 반에 일어나고 밤 12시에 들어왔다.
너무 힘들어 하셔서 우리들(자식들)은 좀 편한 직행버스나 지방에서 하기를 권했지만 엄마는 일은 힘들어도 수입이 많은 일이라며 일을 많이 하셨다. 엄마가 일을 계속 하였기에 형과 나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술도 먹고, 놀러도 다닐 수 있었다. 10년 만에 엄마는 개인택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빚을 내기는 하였어도 내 생각에는 일이 좀 편해지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 힘들었다. 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이게 엄마가 일하는 방식이다. 일을 나갈 때 박카스와 각종 약을 챙겨 들고 졸릴 때는 혀를 깨물고 위장이 나쁘지만 커피를 마셔주고.
이제 자식들이 다 컸다. 누나는 시집가서 부동산하며 잘 산다. 형은 자격증 잘 따서 작은 회사이지만 계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 결혼해서 잘 산다. 나도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엄마는 아직 힘들다. 책에도 나오지만 아들들은 표현이 없다. 엄마는 아들들만 대학을 졸업시키셨다. 난 막내지만 책에 아들의 얘기에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딸은 엄마에게 잘하기도 하지만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누나는 잘나가는 개인택시 기사를 집에 보모로 1년째 두고 있다. 그리고 엄마는 9살짜리 손자와 3살짜리 손녀와 매일 싸운다.
나는 책을 읽고 엄마를 얼마나 이해하고 생각하고 애쓰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점점 할말이 없어지고 부끄러워지는건 왜일까. 엄마를 누나에게 부탁한 것처럼 모양새는 되었는데.. 생각과 실천은 이렇게 거리가 먼 것일까. 생각 또 생각해 볼 뿐이다.
엄마를 부탁해를 보면서 정 의 순
너로 시작하는 작가의 시점이 어디인지 처음에는 좀 혼란 스러웠다. 작가가 생각하는 ‘너’는 처음에는 작가 자신인줄 알았다. 그런데 오빠, 아버지, 엄마로 넘어가면서 그때 마다 또 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혼란 스럽기도 했지만 당사자의 입장이 조금씩 이해 되기도 했다. 이글에 등장하는 다양한 식구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각각의 입장을 잘 표현한 거 같다.
이 글을 보면서 난 우리 엄마들의 모습은 항상 그 자리에 자식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 과일을 먹어도 난 먹었다. 또는 난 지금 생각없다는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먹고 있으면서 엄마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 하지 못하고 살다가 엄마가 그 자기에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의 소중함과 그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가족들이 각자의 자기 자리에서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하면서 살다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진다.
나와 엄마의 관계는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니 난 처음 집을 떠나 대학생활을 하고 나서 나 스스로 많이 자라고 컸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살게되었다. 좀 자랐다고 생각된 나의 시각으로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틀린것 투성으로 보였다. 그 당시 내 눈에 아버지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비추어 졌으나 엄마의 모습은 모든 것이 못마땅해 보였고 사사 건건 엄마를 고치려고 간섭하고 잔소리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년을 엄마와 갈등하면서 엄마를 생각해 보니 부잣집 딸로 태어났으나 외할아버지의 가부장적 사고로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고 엄마는 배움의 갈망으로 집을 나와 혼자 서울로 상경하여 양재 기술을 배우고 20여년을 양장점을 하시면서 배움에 대한 한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딸이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컸으며 그것도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딸들을 전문직으로 키우신거 같다. 그 당시 나의 가장 잘못된 생각은 엄마를 내 방식과 생각으로 고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엄마를 대하는 말투나 태도가 나의 모습과 많이 유사함을 느꼈다. 엄마의 모습을 내가 바꾸려고 한 것이 잘못임을 깨달은 이후 엄마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게되고 지금까지 살가운 딸은 아니지만 엄마와의 갈등은 없었던 거 같다. 맏딸에 대한 엄마가 거는 기대와 희망을 다 채우지 못한 딸로 살고 있음이 죄송할 뿐이다.
소설에서의 엄마의 모습과 나의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가진 애환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알수 있고 큰딸이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왜 그랬을까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엄마의 고생하는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남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환경이 결혼을 하지 않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글을 읽으면서 우리 엄마들의 모습과 나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생각하게 했고 어머니 세대가 일방적인 희생으로 자녀들을 키웠다면 지금의 난 그 정도로 일방적인 희생은 못하지만 엄마란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세대의 엄마도 자녀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를 부탁해 권미연
들어가기 전
휴직기간이 다 되어 갈 즈음 그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한권은 모신이라는 책, 일년동안 내 딸에게 미성숙한 엄마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 너무 미안해지고 죄책감을 느낄까봐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내려놓았다. 다른 한권은 엄마를 부탁해많은 사람들의 서평속에서 읽고 싶은 책이었지만 엄마의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내마음이 아플 것 같아 다시 내려놓았다. 굳이 두 권의 책을 읽어 내려가며 아파서 꽁꽁 싸매고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고 딸에 대한 내 마음을 어지럽게 펼쳐놓고 싶지 않았다.
남자들은 알까 엄마와 딸 그 숙명적 관계를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엄마의 인생을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에 소름끼치도록 놀랐던 적이 있다는 것을... 목이 메인다. 쿨하게 쓰고 싶었던 엄마의 관한 글은 언제나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게한다.
읽어가며
이기심으로 애써 외면했던 책을 집어
들었다. 너라는 독특한 시점에 처음은 출판사의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라는 시점의 표현 때문에 소설에 집중할 수가 없다. 우리는 칭찬할 일이 생기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며 따뜻한 말로 전하지만 비난이나 잘못을 이야기 할때는 너는~다. 너는 ~야라고 한다. 신경숙의 너라는 표현은 계속 나를 거슬리게 한다. 계속 너의 잘못을 깨달으라는 식으로 나를 닦달한다. 너를 돌아보라고 채근한다. 너가 곧 나이므로 답답한 마음에 책장을 넘기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엄마의 대한 미안했던 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며 너의 나는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다.
공감하며
나의 엄마는 언제나 엄마였다. 아니 엄마여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에게 결혼 전 꿈을 물어봤을때 엄마는 이젠 꿈이 없다고 했다. 참 지루하고 따분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꿈이 없을 수가 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중고등학교 시절 나와 내 동생을 불러서 “오늘은 엄마하기 싫은 날이니 너희가 엄마하고 날 찾지 마라 가만히 누워 있을란다.”그때는 그냥 엄마가 엉뚱한 농담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 엄마의 말에도 하루 종일 엄마를 찾아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달라고 요구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는 당신의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텐데 때로는 그것이 숨막히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도 같은데 묵묵히 이겨온 그 시간들이 그 인내만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난 엄마에게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변하지 않을 하루 한달 일년 그리고 평생을 아빠가 첫 남자였던 엄마는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안타깝다. 책속의 너의 엄마는 그가 있었다. 우리엄마에게 그는 없다 추억할 그도 없다 오로지 아빠인 그만 오직한사람만 존재할 뿐 가슴 떨리는 사랑도 아픈 기억도 없이 엄마의 인생이 끝나는게 난 싫다. 딸들이 서운하게 남편이 서운하게 할때 엄마가 위로받을 듬직한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동네아줌마들이 다니는 무도회도 다녀보라고 하시지만 나쁜남자 많아서 무서워서 못 간다는 엄마 고스톱도 아줌마들이라 하지만 말고 아저씨들이랑 해보라고 하면 아빠가 싫어해서 안된다고 난 엄마에게 그가 단 한 사람이라는게 여전히 안타깝다. 엄마의 청춘을 위해 브라보 그러나 아빠는 초등학교 동창아줌마들 만나는 것 조차 싫은 데는 이유가 없다. ^^
책속에 엄마는 막내딸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리고 기대감 또한 컸다. 엄마에게 있어 나는 그런 딸이었다. 나의 경험으로 엄마를 대리만족시키고 많은 일들을 종알종알 참새처럼 이야기 하며 엄마와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그런딸이다. 동생친구이름은 몰라도 큰딸인 내 친구들 이름은 다 아신다. 동생이 차별한다고 하면 언니는 성격적으로 친구가 별로 없어서 외워진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신다.
엄마는 30년 나를 키우면서 나를 누구보다 잘 아셨다.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다. 혼자 당당히 즐기면서 살라고 하셨다. 결혼해서 더딘 임신에도 걱정하지 않으셨다. 그냥 나와 내신랑둘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셨다. 그렇게 혼자살기를 기대한 딸이 결혼을 했고 아기를 낳아서 처녀 때의 당당한 모습이 아니고 산후우울증으로 병원까지 다니면서 엄마는 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정신적 변화만 감당하기 힘든 게 아니고 아기 낳고 처진 가슴이며 탄력을 잃은 피부들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들을 보며 많이 속상해하셨다. 부모들은 손주들을 더 예뻐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나를 더 많이 생각하셨다. “네가 있어야 네딸있는 거다. 미연아 나에겐 네가 무엇보다 가장 소중 하단다.이 엄마의 첫 정인 네가 말이다”.
지난 일년 난 남편과 함께가 아닌 친정에서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안정을 많이 찾았고 내아기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그래서 걱정을 덜고 학교에 복직했다. 주말마다 만나는 엄마,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커지고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 지는 일도 많지만 여전히 난 엄마와 티격태격 싸우고 큰소리 내며 그렇게 살고 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지낼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안다 신은 내게 고통을 주셨으며 그걸 이겨내는 과정의 끝에서 주위에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리고 그 신은 바로 나의 엄마라는 것을 나의 성모마리아는 나의 크리스티나(엄마의 세레명)라는 것을.....
‘엄마를 부탁해’ 를 읽고
신 재 명
엄마라는 존재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꺼내어 우리 곁에 던져놓고 스스로를 둘러보게 해 준 것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였다는 것을 책을 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줄 것 없이 받기만 했던 엄마의 사라짐은 나로 하여금 책을 덮는 순간까지 채찍질하며 ‘너도 똑같아’라고 질책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간간히 눈물 방울이 맺히는 것을 누가 볼새라 손가락으로 훔치면서 다시 한번 나의 자리를 생각게 하였다.
집안이 가난하고 여자라는 것 하나로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벌러 나가야 했던 나의 누나는 소설속에서 살아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를 스치었다. 누나의 월급날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누나가 사올 빵(도우넛)을 그리며 ‘누나는 언제와’를 연실 엄마에게 물었던 철부지 나는 집안이 가난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게 해준 엄마의 ‘전투적 삶’을 내가 가정을 이루고서야 알게 되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농사일로 한 가정을 이끌기엔 한없이 무겁고 힘겨웠을 텐데도 자식의 공부라면 당신들의 먹는 것, 입을 것을 생각할 여유마저도 사치로 여기며 살아온 삶을 내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누나를 공부 시키지 못한 엄마의 한스러움은 소설속 ‘엄마의 미안함’ 그것이었으리라.
‘엄마를 부탁해’는 우리들의 이야기지만 어쩜 ‘나의 이야기’로 제한하고픈 아픔과 미안함과 어렸을 적 원망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내 엄마의 이야기’이다. 소설속 사산한 아이를 두고 슬피 울었을 그 엄마는 나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누나한테 들은 얘기지만 첫째 형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사산한 걸 말하는 것 같다. 그것보다도 울 엄마를 힘겹게 했을 일은 누나와 나 사이의 형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기차에 치어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고 놀래서 귀를 막고 울었다고 하는데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너무 놀래서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학창시절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엄마에게 나오지 말라 했을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말을 잊을 수 없다 ‘네 형만 살아있어도 안 그래’ 그 말은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떠올라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소설 속 엄마가 딸의 소설을, 아들의 편지를 해석하는 방법 또한 나의 ‘아빠, 엄마’를 더욱 안타까움과 감사함으로 때론(아주 오래전) 불쌍함으로도 떠올리게 하였다. 아빠(소설속 엄마와 눈높이를 맞춰보려고 일부러 불렀 봤음. 한번도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도 늘 아버지였다. 그땐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평범했다고 생각되어진다)와 엄마는 글을 읽을 줄 알아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 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나도 글을 제대로 알았으면’이었다. 사시면서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아마도 거기서 비롯된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어느덧 내 아이 셋이다 보니 당신들이 살아오신 삶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나보다 더 힘겹고 고통스러움 속에서 살아오셨을 것을 생각해본다. 한 지붕아래 건강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엄마를 부탁해’는 앞으로 다가올 엄마, 아니 당신들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경고장일 거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면서 지금 당신들의 존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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