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가면 인쇄되지 않는 사람들의 분주한 골목이 있다.
한장의 인쇄물을 얻기 위해 무수한 발길로 찍어냈지만 아직
도 머리 속에 인화되지 않은 고만 고만한 골목들. 어느 한켠
좁은 목조계단을 오르면 모니터 앞에서 한장의 생을 배열하
는 도안가의 긴 손마디가 마우스 패드 위에서 빗금의 거미줄
을 엮는다. 뭇 사람의 눈길이 걸려들 세심함을 담아내며 늦은
밤을 밝힌다. 도안가는 네가(nega) 속 인화될 꿈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암전(暗轉)처럼 다음 무대를 묻어두고 긴 하루를 접
는다.
허름한 문을 밀치면 쌓였던 기계음이 우루루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인쇄소. 한면 가득 무수한 활자를 한꺼번에 읽어내는 기
계음 속에 인쇄될 백지장이 찰진 절편처럼 한켠에 쌓여 있다.
기계음에 입 먼 인쇄공은 묵묵히 먹물 번진 파지를 골라내며
어젯밤 어둔 골목의 골목 속 환한 창가 안에서 도안가가 밤새
품었던 화면 속 생들의 부화를 지켜 서고 있다.
추려진 인쇄물과 버려진 파지는 화려한 외출과 재생을 꿈꾸
며 서로 다른 차에 실려 을지로 인쇄골목을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