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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극좌파가 본
–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비판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여자와 남자』,
최재천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1
기독교 시인 오든은 일찍이 “과학 없이는
평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철저하게 과학적인 논리로 남녀평등의 당위성을 논의할 것이다. 개인적인 감흥에 치우친 분석이나
구호성 발언은 되도록 자제할 것이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8쪽)
과학에서 당위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이끌어내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내가 「섹시함과 도덕적 허무주의」, 「사실과
당위 – 과학과 윤리학」에서 썼듯이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도덕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취향의 문제다. 이제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려는
저는 자연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제는 인류 집단 그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호주제도가 유독 이 한반도에서만큼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는 아무런 과학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38쪽)
자연계에서 대부분의 경우 수컷이 암컷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암컷이 보통 자식에게 더 많이 투자하기 때문에(예컨대
포유류의 경우 임신을 하는 쪽도 젖을 먹이는 쪽도 암컷이다) 수컷 사이의 경쟁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힘이 센 수컷들은 그 힘을 이용해서 암컷을 두들겨 패기 십상이다. 이것은
자연계에서도 인류 집단에서도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수컷의 폭행을 정당한가? 만약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가 기준이라면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여성이 주도권을 주장해도 남성이 반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핵 DNA는 정확하게 절반씩 투자하지만 미토콘드리아 등 다른 세포소기관의 DNA는 암컷만이 홀로 제공하므로 유전물질만 비교하면 암컷의 기여도가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32쪽)
그렇다면 왜
사회생물학의 본질은 사실 페미니즘의 이상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사회생물학은 그 기본을 다윈의 진화론에 두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
중에서도 특히 성선택론에 따르면 성의 선택권은 궁극적으로 암컷에게 있기 때문에 수컷은 자연히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사회의 중심에 궁극적으로 여성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다윈은 이미 한 세기 반 전에 꿰뚫어 보았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6쪽)
성선택론에 따르면 수컷들은 경쟁을 더 많이 하게 되며 더 공격적이다. 침팬지와 인간의 경우 암컷이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로 수컷은 암컷을 두들겨팬다. 이것은 성선택의 결과다. 성선택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려고 한다면 수컷의 그런 행동도 정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호주제는 전혀 생물학적이지 못한 제도이다. 어쩌다 보니 인간 세계는 아들이 필수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어냈지만 자연계 어디에도 아들만 고집할 수 있는 동물은 없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6쪽)
남성 중심의 사회는 전혀 자연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모름지기 번식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생물이라면 그 번식의 주체인 암컷이 삶의 중심이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27쪽)
자연적인 제도를 원하나? 그렇다면 병든 개체를 고치는 의료 행위는 자연적인가? 병든 개체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자연적인가 또는 생물학적인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병원을 몽땅 없애야 할 것이다.
인간도 생물이라면 우리 삶의 목표도 당연히 자식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175쪽)
위의 문장은 모호하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인간도 생물이기
때문에 진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마치 번식 경쟁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설계되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위의
문장에 시비를 걸 이유가 없다. 둘째, ‘인간은
번식 경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또는 알면서도 내버려두면서 그 자식이 장차 제대로 성장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원활하게 퍼뜨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176쪽)
위의 문장은 별로 애매하지 않다. 유전자를 원활하게 퍼뜨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간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강간은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새끼들을 죽이는 잔인한 수사자가 있는 반면 자기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고귀한 모성 본능도 있다. 자연(사실)으로부터 당위를 이끌어 낼 때에는 이끌어내고자 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도덕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우생학자는 자연에서는 열등한 개체가 도태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열등한 인간 개체를 도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는 열등한 집단이 도태된다는 사실(예컨대 개미 군체 사이의 전쟁)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는 자연계에서 협동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예컨대 개미 군체의 ‘공산주의’)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다.
세계관이 독특한 사람은 사마귀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여성이 남성을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 사람은 자연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당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이미 있다. 그들은 자연을 정당화에 이용할 뿐이다.
이것은 종교의 도덕과 매우 흡사하다. 예컨대 기독교의 성경에는 온갖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한편에는 동성애자를 쳐죽이라는 구절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 중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신이 자신의 도덕을 정당화해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도덕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신을 이용해 정당화할 뿐이다. 만약 정말로 성경에서 도덕을 이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이 불가능함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모순된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순된 구절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해석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즉 해석자의 도덕적 취향이 성경 구절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Richard Dawkins의 『The God Delusion』에서 잘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논리가 남자에게는 바람을 피울 확실한 이유가 있고 여자들은 근본적으로 바람을 피우려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는 없다. 초창기의 사회생물학자들은 바로 이 점을 경솔하게 부각시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110쪽)
일차적인 잘못이 사회생물학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초창기 사회생물학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암컷의 유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생물학에 대한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오류를 범했다면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공격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공격은 인신공격이 아니라 논리적 반박이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 인신공격이 아니더라도 논리가 없는 공격이긴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한 유명한 사회생물학자와 진화심리학자 중에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져서 ‘남자가
여자에 비해 더 바람을 피우도록 설계되었으니까 바람 피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유명한 사회생물학자 중에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 사람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트집을 잡았다. 자세한
것은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과 나의 글 「어느 극좌파가 본 사회생물학」을
참조하라.
으뜸수컷이 되려면 항상 위험한 격투를 겪어야 하고 그런 몸싸움에서 언제나 성하게 걸어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운이 좋았건 힘이 셌건 일단 으뜸수컷이 되고 나면, 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경계를 게을리하지 못한다. 자기가 거느리는 암컷들을 늘 즐겁게 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38쪽)
여기서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생명을 바라보면, 윤리, 자기희생, 종교,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결국 인간의 역사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48쪽)
‘종교가 적응적(adaptive)이다’ 또는 ‘종교는 적응(adaptation)이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나는 종교를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생각이 대세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Richard Dawkins의 『The God Delusion』에서 간단히 소개하고 있으며 Pascal Boyer의 『Religion Explained: The Evolutionary Origins of Religious Thought』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100여 년 전에 이미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보다 평균적으로 약 15% 정도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후 남성 학자들은 이를 엄청나게 이용했다. IQ 테스트를 해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더 높게 나온다는 등의 온갖 증거 아닌 증거들을 제시하며 “그래서 여자는 어딘가 좀 모자란다”는 논리를 줄기차게 펴왔다. 그러나 뇌가 크다고 해서 지능이 높다는 상관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분명하게 밝혀졌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75쪽)
인간의 아기는 생후 약 3개월 안에 그 뇌가 거의 1/3 정도 더 커지고 여섯 살 무렵이면 거의 두 배가 된다. 유전적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남녀의 차이는 아마도 상당 부분 태어난 다음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기간 동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더욱 ‘남자답게’ 키우고 여자아이들은 보다 ‘여자답기’ 키운 것이리라.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80쪽)
탄생한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을 후천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보면 이차성징도 학습이나 문화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탄생을 기준으로 보는 것은 포유류의 편견일 뿐이다. 선천성-후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하기도 하지만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골치아픈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은폐된 배란은 인간 남성들로 하여금 일부일처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가정에 묽여 마음껏 뜻을 펼 수 없다고 투덜대는 남성들이 있지만, 결혼은 원래 남자가 원해 생겨난 제도라고 생각한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120쪽)
마을 주변에서 야채와 열매 그리고 견과류를 채집하는 여성들이 거의 매일 식단을 책임졌다. 남자들은 가물에 콩 나듯 사냥에 성공할 때에나 가족에게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하며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불과 1만 년 전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로소 근육의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해졌다.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남성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14쪽)
근육의 힘은 전쟁, 부족 내 갈등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10 만년 전에도 말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남자가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면서 더 큰 대우를 받았다고? 기여도와 대우 사이에 정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 10만 년 전이나 5천 년 전이나 임신과 수유는 여자가 전적으로 맡았는데, 그리고 아기를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데 여자는 왜 엄청난 차별을 받은 것일까? 일은 다 노동자가 하는데 돈은 왜 다 자본가에게로 가는 것일까?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