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3일 청림회(1)
<법화경> 공부, <비유품(譬喩品)> 81쪽, 68번부터 할 차례죠. 여기 이야기가 유명한 비유, “화택 비유(火宅 譬喩)”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화택유(火宅喩)”는 <법화경>에서도 중요한 비유로 손꼽히지만 불교에서 ‘비유(譬喩)’하면 의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화택(火宅)”에다가 비유했다고 해서, 성인의 안목이, 말하자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 이걸 이제 표현한 아주 명쾌한 비유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이 “화택 비유(火宅 譬喩)”는 곳곳에서 인용을 많이 하는 그런 비유입니다. 정확하게 잘~ 알아둘 필요가 있죠.
“화택 비유(火宅 譬喩)”에 모순이 이제 있는데, 그 모순을 제자들에게, 당신이 비유를 이야기 해 놓고, 그것을 이제 제자들에게 심판을 받습니다.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불난 집에서 철없는 아이들을 꺼내는데, 방편(方便)을 썼다는 거죠. 방편이란 사실은, 알고 보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엄청난 거짓말을 했죠, 사실은. 아이들의 성정(性情)에 맞는 그런 장난감을 주겠다고 해서 유혹해서 밖으로 꺼내 놓고는, 정작 나오니까 아이들에게 준 것은, 어마어마한, 상상도 못하던 그런 큰~ 수레였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처음에 주겠다고 한 그 수레와 나중에 받은 수레의 차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로 하면, 이건 뭐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가 돼요. 그래서 부처님 자신도 이건, 누가, 뒷사람이 문제 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여기 이제
68. 舍利弗(사리불)아! 於 汝意云何(어 여의운하)오 是長者(시장자)가 等與諸子(등여제자)의 珍寶大車(진보대거)호미 寧有虛妄 不(영유허망부)아
사리불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 장자(長者)가 여러 자식들에게 평등하게, 아주 ‘진보대거(珍寶大車)’를 준 것이, 골고루 다 줬죠. 주고도 얼마든지 남을 정도로 그렇게 부자니까요. “영유허망(寧有虛妄)가, 허망부(虛妄不)아?”, 그랬습니다. 이것이 어찌 허망한 것이 아닌가? 이거는 내가 사실 따지고 보면, 거짓말한 것이 아니냐, 이 말 이예요. 그, 아이들 장난감에 불과한 그런 수레를 주겠다고 해 놓고는, 나오니까 이건 뭐, 상상도 못한 어마어마한 수레를 이제 줬으니, 결국은 앞뒤 말은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거지. 그래서 이것이,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냐? 그 심판을 받는 거죠.
69. 舍利弗(사리불)이 言(언)호대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是長者(시장자)가 但令諸子(단령제자)로 得免火難(득면화난)하야 全其軀命(전기구명)이라도 非爲虛妄(비위허망)이니
그러니까 사리불이 이제 말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장자(長者)가 다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화난(火難)에서 면하게 해 가지고 그 구명(軀命), 몸과 목숨을 안전하게 한 것, 그것만이라도, 그런 거짓말을 안 했으면 도대체 아이들이 나올 줄 모를 텐데, 그런 방편을 썼기 때문에 거기에 쏙아서 일단 나왔으니까, 그래서 몸과 목숨이 안전해졌다, 이거지. 그 몸과 목숨을 안전하게 한 것만으로도 비위허망(非爲虛妄)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이거여. 허망이 되지 아니함이니.
何以故(하이고)오 若全身命(약전신명)이라도
만약 그 신명(身命)을, 몸과 목숨을 온전하게 한 것이라 하더라도
便爲已得玩好之具(변위이득 완호지구)어든 況復方便(황부방편)으로 於彼火宅(어피화택)에 而拔濟之(이발제지)오녀
완호지구(玩好之具)라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보물을 얻은 것이다, 이거여. 아, 몸을 안전하게 하고, 목숨을 보전한 것,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보물을 얻은 것이냐? 그런데 하물며 다시 방편으로, 그 화택(火宅)에서, 그 화택(火宅)에서 벗어나오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런 말 이예요. 그러니까, 몸도 보전했고·목숨도 보전했고·또 불난 집에서 하나~도 상처받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게 됐으니 얼마나 이익이 크고 많으냐? 이거야. 그런데, 그것을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런 말입니다.
뭐, 어릴 때, 울며는 “밖에 호랑이가 왔다”, 이런 소리를 부모들로부터 듣고 자랐지마는, 나중에 어느 자식이 그런 말 한 부모를 거짓말했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건 거짓말이 아니죠. 그래서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진정한 이익을 위해서는 그런 거짓말은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방편이다,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도 제자들을 위해서·제자들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서·또는 중생들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 한 것은, 그것은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방편이라고 한다, 이제 그런 말입니다. 아주 참,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이야기 같으면서도 또 성인으로서, 성인으로서 그런 방편의 말씀이 사실 불교 안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온갖 방편들을 여기서 한 번 이렇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거죠.
이렇게 방편에 대해서, 거짓이냐·아니면 방편이냐, 하는 이 문제를 경전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 간 데가 다른 경전에서는 잘 보기 힘들어요. 그냥 뭐, 방편이다, 이래 버리고 말았지, 그것을 제자에게 물어 가지고, “사리불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장자(長者)가 아주 훌륭한 수레를 준 것이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냐?” 안 좋은 걸 주겠다고 했으면 안 좋은 걸 줘야 되고, 처음부터 좋은 걸 주겠다고 했으면 좋은 걸 줘야, 말한 대로 그대로 맞는데 그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한 번 짚고 넘어 가고, 제자들로부터 심판을 한 번 받고, 그래서 방편과 거짓말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하고 넘어 가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법화경>의 이 말씀 이후로 이제 더 이상 방편을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죠. 그런데 또 방편을 빌미삼아 가지고서 너무 방편에 치우쳐서, 정말, 방편은 보다 더 나은 이익을 위해서 쓰는, 정말 성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또 뭐 뒷사람들이 너무 방편을 그렇게 남용을 하는 그런 사례들이 사실, 너무 많죠.
지금, 우리나라 불교를 우리가 보더라도, 방편으로·정말 방편으로 했다면 나중에 우리 불자(佛子)들이 보다 더 나은 그런 정법(正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쓴 방편이라며는, 그건 뭐 흠잡을 데가 없죠. 그러나, 언제나 그 방편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방편이 아니라 알고 하는 거짓말이고, 그건 그야말로 부처님을 팔아서 어떤, 다른 속된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법화경>을 우리가 이야기하면서 또 그런 문제를 한번쯤 이야기 안할 수도 없는 거죠. 뭐 뻔한 일이고 한데 눈 감고 아웅 할 거는 없지 않느냐, 그런 생각도 들고. 또 이런 방편 이야기를 우리가 하면서 한번쯤 떠올리고, 우리들의 불교 신행(信行)에 대해서 점검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가 이익한 거예요. 서로가 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깨 놓고, 분명하게! 짚을 건 짚고 넘어 가는 것, 이게 서로가 이익한 일이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정당화 시키고·합리화 시키고 하기 위해서 그냥 덮어 두고 넘어 간다, 하는 것은 그건 서로가 이제, 이익하지 못한 그런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이런 대목이 참, 그, 갈등 생기는 대목이예요, 이야기 하려면.
70. 世尊(세존)이시여! 若是長者(약시장자)가 乃至不與最小一車(내지불여 최소일거)라도
세존이시여! 만약 장자(長者)가 내지(乃至) 최소일거(最小一車)를 주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설사 아주 작은..., 큰 수레는 그만하고, 그만두고, 이런 말입니다, 내지(乃至)라는 말은. 큰 수레를 주었고, 또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성정(性情)에 맞는 수레를 설사 주지 아니했고, 아주 작은 수레까지는 주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猶不虛妄(유불허망)이니 何以故(하이고)오
오히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거지. 거짓말이 아니다. 왜냐?
是長者(시장자)가 先作是意(선작시의)호대
이 장자(長者)는 먼저 생각하기를. 선작시의(先作是意)하되. 먼저 생각하기를
我以方便(아이방편)으로 令子得出(영자득출)호리라함일새
나는 방편을 써 가지고서 자식들을 화택(火宅)에서부터 벗어 나오도록, 자식들로 하여금 화택(火宅)에서부터 벗어 나오도록, 자식들로 하여금 화택(火宅)에서부터 벗어 나오게 하려고 했던 것이 이 아버지의 마음이었거든요. 처음부터 마음먹기를, 그것을 마음먹었다, 이거야. 왜냐? 집은 허물어졌고·낡았는데 불까지 나 가지고 금방 아이들이 다 타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더라도 뭐, 수레는 그만두고라도 화난(火難)을 입지 않도록, 어떻게 하더라도 아이들을 끄집어내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오직 그 마음, 하나였다고요, 사실.
이것이, 이제 불교의 어떤, 발전 과정. 그것을 사실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도 사실은, 뭐 우리가 대승 불교에 와서 ‘중생 제도’·‘중생 제도’, 그렇게 하지, 사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했고, 또 수행했고, 그래서 결국은 깨달음을 얻었죠. 그래, 깨달음을 얻고 보니까, 이것이 자신의 어떤 고통의 문제, 생로병사라든지 기타, 온갖 여러 가지 고통을, 해결을 해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그거만이 문제가 아니고, 참으로 큰~! 삶. 성인으로서의 삶·부처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아주 너무나도 위대한 그런, 큰 성자(聖者)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건 처음에는 생각 못했어요. 그 성자(聖者) 노릇 할려고 부처님 출가한 것도 아니고, 성자(聖者) 노릇 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죠. 오직 자기가 처음에 고민했던, 보통 인간의 고통, 이 고통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그 마음에서 출가했고·그 마음에서 수행했고·그 마음에서 성도(成道)를 했는데, 나중에 의외로 얻은 것은 보다 더 몇 천배·몇 만배 더 훌륭한 그런, 부처로서의 삶의 길이 앞에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 불교라고 할까요? 여기에서 보며는,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어쨌든 하여튼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 보통 열반(涅槃)이라고 하는데, 그 열반을 누리는 그것이 초기 불교,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부처님 열반하신 이후, 한, 3~4백년 까지는 그것이 불자(佛子)들의 전 과제였다, 이렇게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뭐 그렇게 “대승 보살도(大乘 菩薩道)의 정신” 이런 것이 불자(佛子)의 길이다, 그런 생각, 사실은 크게 하지 않았어요. 혹 이제 그렇게 생각 하는 사람들도 있죠. 앞선 생각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마는 사실, 대다수 그 당시 불자(佛子)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불자(佛子)들의 삶은, 수행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고통에서부터 해방되는 것, 이것만 관심 가졌어요. 무슨 보살행을 해 가지고 봉사 정신으로서, 또 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더라도 고통을 벗어나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보살도(菩薩道) 정신을 그렇게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사실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 4백년·5백년, 이렇게 접어들면서 불교가 차츰차츰 더, 이제 발전하죠. 또 발전하지 않고는 인도, 그 다종교 사회에서 배겨날 수도 없고. 또 불교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한 가지, 아주~ 특장(特長)이 있는데, 그 특별한 장점은 “깨달음”이라는 거죠. 그 깨달음의 성자(聖者)들이 자꾸 이제 많~이 탄생하다 보니까, 깨달은 사람들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수행 하다 보니까 깨달은 사람들이 자꾸 많이 나오니까, 그래서 이제 깨달은 안목이 자~꾸 축적이 되고·축적이 되고, 기존의 가르침에서 또 발전되고·발전되고 하다 보니까 비로소 이제, 4~5백년경에 대승 불교(大乘 佛敎)라고 하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 비로소 “대승 불교 운동”,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와서 비로소 이제 이 <법화경>이라든지·<화엄경>이라든지 뭐 기타 많~은 대승 경전들이 결집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제 대승적 수행과 대승적 삶을 살아야지, 그게 이제 부처님의 본래의 취지다, 그 뭐 소극적으로 자기 안녕만을 추구하는 이것은 소승이다, 이렇게 이제 소승과 대승을 그 때부터 나누기 시작하고. 말하자면 소극적 수행과 보다 더 적극적이고 대승적인 수행의 길, 이걸 이제 딱 나눠서 이야길 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대승 경전은 의례히 소승을 폄하하는 그런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제 부처로서의 삶의 길·보살의 길, 이런 것들이 제시되기 시작해서, 이 <법화경> 같은 데서는 그런 것이 아주 구체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 아주 뚜렷하게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죠. 그래서 내가 가끔 말씀드리지만 <유마경>이나 <법화경> 같은 것이 “대승 불교 운동의 선언서”다. 대승 불교 운동이 이런 경전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그래 여기서도 자식들에게 화택(火宅)에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 하는 사실, 이건 이제 자식의 안녕을 꾀하는 일인 것만은 사실이고, 자신이 바라던 그 안녕은 얻었어요. 자신이 바라던 안녕은 얻었는데, 그것 가지고는 전부 다라고는 할 수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살아왔듯이 그런 삶을 모~든 불자(佛子)들이 다~ 살 수 있다, 하는 것. 그것이 여기서 이제 “대백우거(大白牛車)”,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다, 라고 하는 그런 비유로서 이야기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초기불교의 열반, 열반을 추구하고 자기만의 안녕을 추구하는 그런 이야기들에서 정말 대승적인 보살행으로 전환되는, 그 아주 과정이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 힘든 과정에 대해서 여기서 아주 이론적으로 정리를 잘 하고 있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이제 이런 말을 주고받는 거죠.
71.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無虛妄也(무허망야)하니
이러한 인연으로서 무허망야(無虛妄也)라, 그랬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다, 이거여. 처음에, 아버지가 생각하기를, 그 아들들이 불난 집에서부터 벗어나게만 해야 되겠다, 부처님도 사실은 그랬어요. 4~5백년 되기까지, 거의 불교라고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열반을 추구한 것, 자신의 안녕을, 어떤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안녕을 꾀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거의 전반적인 그런 목적이었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좀 외람된 표현일른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불교를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실 그래요.
그러다가 4~5백년이 경과하면서 비로소 이제, 우리 제자들이 그렇게만 살아서야 어찌 부처님 같은 그런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느냐? 우리도 부처님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해서 대승 불교에서 부처님의 삶을 본보고, 보다 더 적극적이고 대승적인 불교를 비로소 펼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 또 초기 불교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중생들의 존재적 안녕을 꾀하는 것, 이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코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랬어요.
何況長者(하황장자)가 自知財富無量(자지재부무량)하고
그래서 하물며 장자(長者)가. 자기의 재부(財富)가, 재산이 한량없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아,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터에. 이럴 때, 자기 자식들에게 실컷 아주 뭐든지 풍요롭게 해 줘야 되겠다, 비유는 그래요.
欲 饒益諸子(욕 요익제자)하야
여러 아들들을 요익(饒益)하게 하고저 해서
等與大車(등여대거)라
큰~ 수레를, 어마어마한 수레를 평등하게 주었다~. 준 것이겠습니까?, 이런 말이여.
거기까지가 이제 사리불 이야기야. 그래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내가 이렇게이렇게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냐? 그러니까 펄쩍 뛰면서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면서 그 거짓말이 아닌 이유를 여기까지 주~욱 설명한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마음이 딱 놓이는 거예요. 그리고 지혜제일인 사리불이라고 하는, 아주 최고의 제자로부터 이런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 인정을 받으니까 부처님도 아주 기분이 좋아서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72. 佛告舍利弗(불고 사리불)하사대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如汝所言(여여소언)하니라
아, 훌륭하고 훌륭하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드는 이야기를 네가 했구나. 여여소언(如汝所言)이니라. 그대의 말한 바와 같나니라. 사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할 바가 아니고, 제자들. 내 이야기를 든는 그대들이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이 사실은,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자가 알고 그렇게 이야기를 다~ 해 버렸으니까. 부처님 속에 생각하는 이야기를 제자가 다~ 해 버렸으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어요? 뭐, 물론 부처님이 유도는 했죠. 그러나 이제 제자로부터 이런 말을 해서 검증을 딱, 이제 받게 되는 것이고, 그 방편과 거짓말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확실하게 짚고 넘어 가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경전에는 그런 방편 이야기가 많지마는, 요렇게 분명하게 짚은 대목들이 잘 없어요.
그 다음에 이제 “비유(譬喩)”하고 “법(法)”하고. 실지로 부처님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법(法)]과 “비유(譬喩)”와 합해서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73. 舍利弗(사리불)아! 如來(여래)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則爲一切世間之父(즉위일체세간지부)어든
곧 일체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다, 이거여. 여래가 세상의 아버지다,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다. <법화경>에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아버지다.”
74. 於諸怖畏(어제포외)와 衰惱憂患(쇠뇌우환)과 無明暗蔽(무명암폐)에
그래서 모든 두려움과. 쇠뇌우환(衰惱憂患). 포외(怖畏)와. 쇠(衰)는 이제 자꾸 손해보고·기울고·허물어지고·늙어가고...이런 거예요. 그게 쇠(衰)라. 쇠퇴(衰退)해 간다는 거죠. 모~든 분야에서 쇠퇴(衰退)해 가는 것. 그 다음에 뇌(惱)는 그것으로 통해서 자꾸 번민이 생겨. 그 다음에 걱정거리가 생겨. 우환(憂患)이라 그러죠, 우환(憂患). 이런 것이 생겨. 그리고 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저 마음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캄캄해·답답해. 길이 안 보여. 그게 무명(無明)이라. 깜깜해. 무명암폐(無明暗蔽)여. 밝음이 없어, 그래서 캄캄~한 데서
永盡無餘(영진무여)하고
그런 것이 영원히 다해서 남음이 없고. 그런 것이 이제 다~ 없어지고 나서
75. 而悉成就 無量知見 力無所畏(이실성취 무량지견 역무소외)하며
한량없는 지혜. 지견(知見)은 지혜라는 뜻이랑 같애요. 한량없는 지혜를 다~ 성취하고. 또 역(力). 10력(十力)이라 그러죠. 부처님이 갖춘 10가지 힘. 또 4무소외(四無所畏). 이런 것을 다~ 갖추어서
有 大神力(유 대신력)과 及 智慧力(급 지혜력)하며
아주 크고 신비한 힘이 있어. 이것이 우리 마음에 다~ 갖추고 있는 건데, 그 우리가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서 노력한 만~치 10력(十力)과 4무소외(四無所畏), 그 다음에 지혜력. 이런 것을 갖추게 되는 거죠. 이런 게 있어요, 분명히. 우리 마음속에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고·이해하고·자꾸 계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제 자기의 살림살이로 활용이 되고, 거기에 대한 이해도 없고·믿음도 없고·들은 바도 없고 그러면 뭐, 모르는 만치 그대로 사는 거죠. 그래서 우리 중생들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자꾸 들어야 돼요. 자기 소견, 뭐, 그 몇 푼어치나 되겠습니까? 정말 인류의 큰~ 스승들의 그런 가르침을 자꾸 듣고·보고·읽고 이렇게 접하는 시간들이 많아야 돼요. 그래 이제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서로 이제 의논도 해 보고·토론도 해 보고 그러면서 또 우리 인간들, 보통 사람들의 실상(實相)과 서로 연관시켜서도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가차 없이 우리 생활을 스스로 점검도 해 보고·비판도 해 보고. 이런 과정에서 뭔가 걸러질 거, 걸러지고 지혜의 눈의 열리기 시작해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는 사람은, 참~ 똑같은 그 인생을 살면서도 아주 빛나고 정말 지혜롭게 살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뭐,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며는 뭐, 그걸로 끝이고, 그래요.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참, 부처처럼, 살 수가 있고, 정말 뭐 축생이나·아귀나·무슨 아수라나 이렇게 또 살 수도 있고. 정말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고,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갈고 닦고 하느냐에 따라서, 삶이란 게,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이 천양지차로 차이가 난다, 하는 것입니다.
具足方便智慧婆羅蜜(구족방편지혜바라밀)하야
그리고 또 구족(具足)했다, 이거야. 방편과 지혜와 이런 바라밀을. 방편이니·지혜니 하는 이런 것들을 다~ 갖추어서.
大慈大悲(대자대비)로 常無懈倦(상무해권)하고
항상, 자비심 때문에 남을 배려하고·남을 생각하고·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이 불교에서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뭐, 다른 면에서 어려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없는 것을 어려운 사람이라고 봐요. 지혜가 없는 것. 이 지혜가 없는 것을 어려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뭐 다른 어떤, 경제적으로 라든지·지위가 낮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이라든지 절대 그런 것이라 보질 않아요. 지혜가 없고·무지 몽매한 것, 그래서 어둠 속을 헤매듯이 살아가는 그런 삶을 보기 때문에, 그래서 대자대비(大慈大悲)로서 그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상무해권(常無懈倦)이라. 항상 게으름이 없고. 그래서
恒求善事(항구선사)하야
참 좋은 말이죠. 항상 좋은 일을 구해.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도움이 될까. 부처님은, 늘 그렇습니다. 당신의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니까, 깨달음에 의한 지혜니까 그걸 가지고 나눠 주는 일이예요. 그게 항구선사(恒求善事)야. 항상 좋은 일만 구한다. 그거지 뭐, 부처님은 언제 뭐, 쌀 한 톨, 누구에게 줘 본일 없고, 돈 한 푼, 누구에게 줘 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그러면서 “나는 대시주(大施主)다.” 그랬어요. 대시주(大施主)다, 나같이 큰~시주(施主)는 이 세상에 없다. 스스로 대시주(大施主)라는 그런 말을 하거든요. 무얼 그렇게 많이 베풀었냐? 그야말로 항구선사(恒求善事)다. 좋은 일, 지혜로.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잘 계발해서 쓰도록 지혜의 길을 터주는 그런 일에 부처님은 늘~ 고민하고·노력하고 살았다, 하는 것. 그게 이제 상무해권(常無懈倦)하야 항구선사(恒求善事)다, 이렇게 이제 표현하고 있습니다.
利益一切(이익일체)호려하사
일체 중생들·일체 사람들에게 전~부 이익케 했다. 이익일체(利益一切)하느니라. 그게 부처님의 삶이죠. 또 우리,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들은 궁극에 가서 우리 모~두가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되고·그런 원(願)을 또 갖춰야 되고 하는 것이 이 불교 공부하는, 책임입니다. 불교 공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예요. 불교 공부하며는 그만~치 또 책임도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이익일체(利益一切). 이익일체(利益一切)하는 게 이게, 불교 공부 많이 해서 불교 공부 하도록 해주고, 부처님의 지혜, 자기가 지혜가 부족하며는 부처님의 지혜를 빌어서, 또 불교의 역사는 깨달음의 역사기 때문에 수~천·수~만·수~억의, 3천년의 불교 역사 속에서 깨달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수~억의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를 해서 그 지혜를 우리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지혜가 있으며는 더 말할 나위 없고, 자기가 그런 지혜가 스스로 있기 까지는, 그 과거의 부처님과,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조사 스님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해서 나눠 주는 것, 그게 이익일체(利益一切)예요.
당장에, 일체의 사람들을 이익하게 해야 된다, 불자(佛子)는 그런 책임이 있다, 이렇게 하며는 당장에 자기 주머니에 바람 들어 가는 것, 그걸 염려하죠. 전~혀 그거 염려 안 해도 돼요. 십 원도 안 써도 돼. 부처님도 십 원도 쓴 적이 없어요. 부처님, 십 원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대시주(大施主)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요, 평상시에. 무얼 그렇게 시주(施主)했느냐? 부처님이. 여기 大慈大悲(대자대비)로 常無懈倦(상무해권)해서 恒求善事(항구선사)라. 항상 좋은 일을 구해 가지고서 일체 사람들에게 이익케 했다. 지혜를 나눠 준 거예요, 지혜를. 지혜를 나눠 준 일이 부처님이 한 일이고, 불교가 하는 일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이제 부처님의 본업이고 불교의 본업이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걸 이제, 제대로, 제대로 된 교과서, 정말 대승 경전 중의 왕(王)이라고 하는 이 <법화경>을 가지고 공부하는, 이런 좋은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불자(佛子)들은 그런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죠. 이익일체(利益一切)하느니라.
76. 而生三界朽故火宅(이생삼계후고화택)하야
삼계(三界)의 후고화택(朽故火宅). 아주 다 썩고·허물어지고, 거기다가 불까지 활활 타고 있는 그런 삼계화택(三界火宅) 속에 태어나가지고서.
爲度衆生(위도중생)의
왜 태어나느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生老病死(생로병사)와 憂悲苦惱(우비고뇌)와 愚癡暗蔽(우치암폐)인 三毒之火(삼독지화)하야
중생들은 어떤 고통이 있느냐? 생·로·병·사(生·老·病·死). 그리고 우·비·고·뇌(憂·悲·苦·惱). 또 우·치·암·폐(愚·癡·暗·蔽).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삼독(三毒)의 불[三毒之火]이다. 탐·진·치(貪嗔癡), 3독(三毒)의 불이다. 이런 불이 뒤끓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와 우치암폐(愚癡暗蔽), 이런 불이 뒤끓는 데 부처님이 태어나셔 가지고
敎化令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교화영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케하시며
그들을 교화해 가지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0를 얻게 했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했다, 이거야. 부처님이 우정 그런 데 태어나셔 가지고서 중생들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그렇게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평생, 가르침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도록 하고·스스로 눈을 뜨게 하고 그래서 자기가 이미 갖추고 있는 그런 무한한 재보(財寶)를 꺼내 쓰도록 그렇게 일러 주는 일, 이게 부처님이 평생 하신 일이고, 또 불교가 하는 일이고, 이제 그렇죠.
77. 見諸衆生(견제중생)이
보니까 모든 중생들이
爲 生老病死 憂悲苦惱 之所燒煮(위 생로병사 우비고뇌 지소소자)하며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의 볶이고·타고·그슬리는 바가 되고
亦以五欲財利故(역이오욕제리고)로
또 오욕(五欲), 여기서 오욕(五欲)이라 함은 5근(五根)의 욕망입니다.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이것도 이제 보통 5욕이라고 하지마는 이건 이제 중국 쪽에 와서 정리한 5욕이고, 불교에서 오욕(五欲)은 5근(五根)의 욕망이예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눈은 좋은 거 볼려고 하고, 귀는 자꾸 이제 달콤한 소리 들으려고 하고, 맛은 아주 입에 맞는, 맛있는 거만 택하려고 하는...이런, 5근(五根)이 다~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거든요, 본능적으로. 그리고 재리(財利). 재물에 대한 이익, 뭐 모~든,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뭐, 재리(財利)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죠. 이런 것을 가지고서 삶의 목적으로 우리가 매달리고, 그 외의 것은 생각 하지 못하기 때문에
受種種苦(수 종종고)라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又以貪著追求故(우이탐착추구고)로
또, 계~속 탐착(貪著)하는 거야. 계속 탐착(貪著)하고 추구(追求)하는 거라. 더·더·더·더...계~속, 아~무리 많아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고 싶어 하는 것이, 어떤, 오욕(五欲)과 재리(財利)에 대한 거라.
그러니까 적당~히 이제, 살 만 하며는, 불교적으로 보면 그래요. 의식주 문제, 최소한의 의식주 문제 해결 되며는 더 이상 그렇게~ 거기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목을 매고·인생을 던져야 할, 길이 또 있어요. 얼마든지 더 가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게 중요한 거죠. 그걸 볼 줄 알아야 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나요? 뭐 한 가지 이렇게 습관들이기 시작하면 자~꾸 그 쪽으로 기울어져요. 그것이 자꾸 이제, 달리기 시작하면 계속 달리고. 내리막길은 이렇게, 돌이 굴리기 시작하며는 그 탄력이 붙어 가지고 계속 더 빨리 달리잖아요? 우리가 물질을 추구하고·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계~속 꼭 그와 같애요.
보통 심리학에서도 “수로 현상(水路 現象)”이라 해 가지고 물길이 한 번 이렇게 나기 시작하면 비만 오면 물이 계~속 그 길로 이제, 가게 되면 더 패이고·더 패이고 그래서 주변에 있는 물이 전부 그 쪽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일도 그래요. 오욕(五欲)과 재리(財利), 이런 것을 인생의 최고 목표라 생각하고 그 쪽만 자~꾸 추구하다 보며는 그거 밖에 달리 눈에 보이는 거 없어. 그래, 업(業)을 잘 지어야 된다, 하는 게 그거라. 업(業)을. 그게 업(業)이 되어 버리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이제 그러다가 어느 순간, 크~게 깨우친 바가 있어 가지고, 인생을 180도로 사~악 회전시킬 수 있으면, 그건 아주 큰 그릇이죠. 아주 대인(大人)이라고 할 수가 있고. 그러기 전에, 아예 그렇게 되기 전에,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 된다며는 정말 그 인생을 참~으로 가치 있고·보람 있게 사는 길을, 우리가 진짜 모색해야 돼요. 여기 이제 지적한 대로라며는 오욕(五欲)과 재리(財利)로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고 거기에다가 더, 더해가지고서 그것을 또 계속 탐착하고. 더 추구하는 거야. 계속 더 탐착하고 더 추구해서. 그래서
現受衆苦(현수중고)하고
눈앞에서 환~하게 여러 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그 뭐, 한 단계만 올라가면, 앞길이 투~욱 트이고·아~무런 고통 없고·아무 문제없을 것 같지마는, 이제 쪼끔 한 단계만 높이 올라가면, 높이 올라간 만~치 더 고통 더 많고·더 공격 더 받고·더 어려움은 더 많고...회사가 발전해도 그렇고·벼슬이 높아져도 그렇고 갈수록 더 그렇거든요. 그런데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고통이 자꾸 줄어들어. 자꾸 줄고 더 밝아지고. 세속의 어떤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한 단계 한 단계 높아질수록 더 캄캄하고·더 모르겠고·위험성은 더 많고·공격은 더 많이 받고·또 문제는 더 많이 야기되는 거라. 그게 이제 세상사죠. 그런 이치를 우리가, 뭐 당장에 인생에 대해서 역회전은 안 된다 하더라도, 그런 이치를 소상~하게 알고나 살며는 이렇~게 이제 언덕에서 앉아 가지고 물 흘러가는 흐름을 이렇~게 굽어보듯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자기가 그 인생을 젖어 있으면서 자기가 또 제 3자가 돼서 자기 인생을 이렇게 언덕에서 물 흘러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듯이, 그런 마음가짐도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객관시해 놓고 자기 인생을 볼 수가 있다고요. 그런 훈련만 쪼끔 쌓아도 훨씬 달라요.
後受地獄畜生餓鬼之苦(후수축생아귀지고)하며
나중에 가서는 이제 지옥 고통·축생 고통·아귀 고통, 이런 것을 이제 받고.
若生天上(약생천상)커나
설사 어찌어찌해서 좋은 삶을 산다하더라도. 약생천상(若生天上)커나. 천상(天上)에 만약 태어나거나.
及在人間(급재인간)에 貧窮困苦(빈궁곤고)와
또는 인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제 빈궁곤고(貧窮困苦)야. 다 써 버렸으니까. 전~부 가불해서 이리 땡겨 쓰고·저리 땡겨 쓰고 다 써 버렸으니까 바닥 다 난거죠. 그럼 어떡해? 빈궁(貧窮)할 수밖에 없지. 곤고(困苦)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온갖 고통이 이제 야기되는데.
愛別離苦(애별리고)와
자기가 좋아하는 것하고는 자꾸 이제 떠나는 고통이 생겨. 사람만이 아니고, 뭐 장관도·국회의원도·대통령도 하고 싶은데, 자~꾸 그거하고 거리가 멀어지는 거야. 그것도 애별리고(愛別離苦)예요. 우리, 8고(八苦) 중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자기가 좋아하는 것하고 자꾸 거리가 멀어지는 거라.
怨憎會苦(원증회고)인
그리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 하고는 자~꾸 만나게 돼. 원증회고(怨憎會苦). 싫어하는 것 하고는 자~꾸 만나게 돼. 사람만이 아니라고요. 이거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돼. 싫어하는 게 어디 사람뿐입니까? 사람이야, 거, 피해 버리면 되지. 그런데, 피하지도 못하는데 이, 싫은 것이 자~꾸 가까이 오게 된다고요. 원증회고(怨憎會苦).
如是等 種種諸苦 衆生(여시등 종종제고 중생)이 沒在其中(몰재기중)하야
이런 등등. 가지가지 여러 가지 고통. 그 속에 빠져 있어가지고서
歡喜遊戲(환희유희)하며
그거 좋다고 이제, 희희덕거리고·놀고 그러는 거지.
不覺不知(불각부지)하고
그게 뭐, 어떤 삶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이제 살잖아요? 그게 불각부지(不覺不知)라. 모르고 사는 거여.
不驚不怖(불경불포)하며
놀라지도 아니해·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래 부처님 같은 이들은 선천적으로 아주 뛰어난, 어떤 성품을 소유하게 된 것이, 그 왕자의 지위에 그렇게 있으면서 세 철[季節]을 각각, 다른 별장을 지어 놓고 즐기도록 그렇게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빠지지 아니하고·그것이 결코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거기에 이제 도취하지 않는 거죠. 그렇게 했다는데, 우리들, 사바 세계(娑婆 世界)에 태어난 중생들은 고통이 참 많은 그런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각부지(不覺不知)하고 불경불포(不驚不怖)라. 두려워도 안 한다.
亦不生厭(역불생염)하고
싫어하는 생각도 낼 줄 몰라. 쪼끔은 싫다가도 나중에 이제 또 살만 ~하면, 금방 잊어버리죠. 그래 고통이 몸에 다가오면 그때사 이제 알고.
不求解脫(불구해탈)하며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구하지도 아니하며
於此三界火宅(어차삼계화택)에서
이러한 삼계화택(三界火宅)에서
東西馳走(동서치주)하야
동쪽으로·서쪽으로 이리 달리고·저리 달리고.
雖遭大苦(수조대고)나
그래서 비록 큰~ 고통을 만나나.
不以爲患(불이위환)이라
근심꺼리로 여기지를 않는다, 근심꺼리로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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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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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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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無懈倦하야 恒求善事다..좋은 일, 지혜로,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잘 계발해서 쓰도록 지혜의 길을 터주는 그런 일에 부처님은 늘~ 고민하고, 노력하고 살았다...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_()()()_
不求解脫(불구해탈)하며 於此三界火宅(어차삼계화택)에서 東西馳走(동서치주)하야 雖遭大苦(수조대고)나 不以爲患(불이위환)이라....._()()()_
恒求善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