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며, 그가 어떤 역사의식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현실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3 1운동에 대한 이해도 그 예외일 수 없다. 3 1운동은 한국교회가 민족사와 관련하여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이해의 주체에게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1919년 일제 헌병경찰의 무단통치에 의한 식민통치 체제가 완성되어가던 단계에서 일어난 3 1운동이 역사상 성공한 운동이었는가 실패한 운동이었는가? 그 대답은 3 1운동을 일으킨 주체들이 그 목표를 어디에 두었는가와 그 영향과 시간적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목표를 현실 정치적인 즉각적 독립에 두었다면 이 목표는 당시에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분명히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신석구 목사님이 "나도 이른 줄은 안다. 그러므로 나는 독립을 거두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을 일깨워 민족독립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 목표였으며, 장기적으로 보아 1945년의 해방도 결국은 이러한 독립에 대한 민족적 염원의 결실이었다고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성공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사실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측면에서 3 1운동은 우리 민족이 근대민족으로서 거듭나는 혁명적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과거의 충군애국적 복벽주의 사상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독립사상과 민족 평등 평화 공존 사상을, 대내적으로는 민주공화사상과 민족 통일 대동단결 사상을 확대 심화시키고 내면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러한 과정에서 산파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국기독교는 신자수가 전인구의 1-2%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였다. 그러나 전인구의 20-25%를 차지하면서도 사분 오열되어 제대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지금과는 달리, 일제가 두려워할만한 대단한 민족 지도력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한국기독교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지도력과 생명력을 발휘했던 사건인 3 1운동에서 교회의 역할과 교회가 받은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3 1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를 하고자 한다.
1. 3 1운동에서 한국교회의 역할과 수난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3 1운동은 기독교인, 천도교인, 불교인 등 종교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천도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기독교는 3 1운동의 초기 조직화단계의 7개 계열 가운데 6개 계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독립선언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조직화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전국교회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으며, 그 평가는 별도로 하고라도 해방 후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 1독립선언의 이념도 기독교에 영향받은 바가 컸다.
3 1독립선언을 종교인들이 주도하였던 만큼 운동 전개과정에서도 종교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1919년 6월에 보고 된 일제 헌병대의 한 보고서를 분서거해 보면 전국 13도 중 충청남북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천도교.불교 등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경기도는 기독교.천도교.불교가 연합하였고, 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평안남북도.함경북도는 기독교가 주동하고 천도교가 협력하였으며, 강원도와 함경남도는 천도교가 주동하고 기독교가 협력하였고, 불교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북도에서 협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기독교인이 시위를 주도한 사례와 참여 방법을 몇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의 경우 지방시위를 주도하기 위하여 서울의 선언식에는 불참하였지만, 의주지역의 김창건 목사, 김이순 전도사, 안석응, 김두칠 등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일 의주서부교회당 공터에 7,8백여 명을 모아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당하였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도 이일영, 김이제 강규찬 목사, 정일선 전도사등과 함께 평양에 있는 6교회가 연합하여 선언식과 시위를 계획하고 3월 1일 숭덕학교 운동장에 약 1천 수백 여명을 회집시켜 김선두 목사 사회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사회자로서 "구속되어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뜻의 연설을 하여 군중들을 열광케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그 해 장로회 총회가 열리는 10월까지도 복역중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부회장 마펫이 총회를 주재하였다.
노회의 임원들이 기독교 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을 동원하여 3 1운동에 참여한 사례로는 경북노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당시 노회장이던 정재순 목사와 노회 서기이던 이만집 목사 등은 3월 8일 대구 장날을 기하여 교인들과 계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독립만세라고 쓰인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시기인데 각자가 그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하여 이에 호응한 7,8백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공주에서도 공주읍교회 감리교 목사 현석칠이 영명학교 교사,학생들을 포섭하여 4월 1일 공주 장날을 이용한 시위를 계획하여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이와 같이 교역자들 뿐만이 아니라 의식 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잖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강화군의 시위이다. 이 시위는 은세공을 하던 유봉진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일으킨 것으로 시위 참여 인원이 1만명을 상회하였다. 물론 평화적인 만세시위이긴 하였으나, 시위 도중 피해자가 생기자 경찰서에 몰려가 피체자를 구하고 다시 군청에 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 시위가 대규모로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교회조직을 통한 치밀한 연락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의 3 1운동 참여 사례는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운동 방법에 의한 참여 사례를 두 가지만 더 들어 보자. 이 운동의 초기에 해당하는 1919년 3월 3일경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이 뿌려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 지며, 신자는 매일 세 때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이는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할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기독교측의 비폭력 주장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나 피억압자가 억압자에 대해서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고 하는 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대단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맨손이었던 우리 민족으로서 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1919년 12월 일본정부의 비공식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한 여운형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완전한 독립이 보장되기 전에는 일본과 타협도 협상도 할 수 없다...우리는 무기도 없고, 무방비 상태이지만 우리의 명분은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방법의 억압을 받아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현 임시정부를 설립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주요 원칙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명분에 대한 신념은 위대한 것이며, 여기에 우리의 신뢰가 담겨있다."
아무튼 이 통고문이 제시한 성경본문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주려고 하였던 함의(含意)는 무엇이었을까 ? 이를 대략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요 일
말 씀
주 요 내 용
함 의
월
이사야 10장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에게 임할 진노
앗수르의 교만과 받을 벌
구원받을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
앗수르의 패망에 대한 예언
억압자 일본의 멸망과 하나님의 백성 조선의 해방
화
예레미야 12장
예레미야의 불평(악한자의 형통)과 하나님의 응답(악한 이웃을 뽑아버리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원함)
악한 이웃 일본의 멸망과 조선의 회복
수
신명기28장
순종 - 축복(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심), 불순종 - 저주
우리 민족의 독립과 발전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림
목
야고보 5장
부자와 억압자에 대한 경고, 고난 중에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라.
억압자 일본에 대한 경고, 고난 중에 인내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금
이사야 59장
이스라엘의 죄와 고통,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
우리 민족이 죄를 떠나면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심
토
로마서 8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대적할 자가 없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최후의 승리 보장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며 최후의 승리(독립 해방)이 보장되어 있음
주일은 금식, 매일 3때 기도, 성경을 읽되 순환하여 다 읽으라고 함.
이러한 성경을 읽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처신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자료가 3 1운동 초기 성경말씀에 대한 것이라면, 다음 자료는 후기에 나온 기도제목에 대한 것이다. 1919년 11월 28일자 평남도지사의 보고에, 10월 19일자로 상해에서 평양에 사는 장로회신학교 생도 박종은 집으로 보내온 소위 '불온인쇄물'을 평양경찰서에서 압수하였는데, 그 속에 '한국내 예수교회 기도 제목'이 들어있었는데, 이것은 평양 및 안주 기타 각 교회에서 수감자 및 그 유족을 위한 기도를 비롯하여 다른 몇몇 항목의 지정하여 기도시킨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자료에 의하면 요일별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다.
요 일
기 도 제 목
월(예배 제1일)
특히 우리나라 교회 상황에 대하여 기도할 것
화(예배 제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및 기타 각 단체를 위해 기도할 것
수(예배 제3일)
부흥사업에 대해 전국인민의 통일을 영구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할 것
목(예배 제4일)
독립운동으로 순절한 자의 유족 및 옥중에 고난을 겪고 있는 자 및 그 유족을 위해 기도할 것
금(예배 제5일)
우리의 자유 독립을 조속히 완성시키기 위해 기도할 것
토(예배 제6일)
국제연맹을 하나님의 뜻대로 완전하게 조직하기 위해, 특히 천주의 영광을 실현시키기 위해 기도할 것
이와 같이 요일별로 교회와 독립운동단체, 민족 단결, 독립운동가 유족, 자유 독립, 국제연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되, "각 신도에게 이 일정을 지시하여 기도를 시작하게 하고 매주간 항상 계속하여 진행시켜 줄 것을 바람. 단 시국의 추이에 따라 어떤 제목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면 변경 추후 전달하기로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를 통한 3 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으로,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 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점이 다음에서 살펴보듯이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하였던 기독교 세력이 지도적 총피검자의 17.6%나 차지하게 하였던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3 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초기 조직화 단계의 거의 모든 흐름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으로 관여하였으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조직이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 1운동이 그처럼 신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평안북도를 위시하여 경상도.함경도. 전라남도 등 거의 모든 지역의 최초 독립선언식과 시위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기독교는 평신도들을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서.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3 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컸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을 헌병.경찰과 군대까지 동원, 증파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상살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당시의 일본 수상 하라다카시(原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탄압지시 전보는 표리부동한 그들의 기만성을 잘 드러내고있다.
"이번 소요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한다.3월 11일."
이러한 기만적 탄압정책과 함께 자행된 일제의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당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더라도 평남 강서 사천의 학살 사건(3월3일), 정주의 학살, 방화 사건(3월4일-4월2일), 서울의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 사건(3월9일), 의주의 교회당 방화 파괴 사건(3월 하순경), 천안 병천의 학살사건(4월1일),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4월15일) 등이 있다.
또한 교회는 3 1운동 참여로 인한 교역자들의 피체 투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장로교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평양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복역중이었기 때문에, 그 해 장로회 제8회 총회의 회장 직무를 부회장이던 마펫에게 위임하였다. 이 총회에서 보고된 장로교의 피해는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체포된 자: 3,804 ;체포된 목사: 134 ;기타 기독교 관계지도자로 체포된자: 202; 감금된 남자 신자: 2,125 ; 감금된 여자 신자: 531 ; 매맞고 방면된 자:2,162 ; 사살된 자 :41 ; 현재 수감중인 자:1,642 ; 매맞고 죽은 자:6 ; 파괴된 교회당:12
이러한 교회의 피해 상황은 감리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제20회 감리교 연회에서 평양지방 감리사 무어가 "본 지방회를 개회하려고 할 시에 조선목사 중 1인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하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야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권사, 속장,학교교사, 주일학교 교사 합수가 160인이라. 3월1일에 이 운동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기 영향이 있다... 본래 목사의 수가 28인인데 길 중14인은 금고되고, 4인은 퇴직하다...고로 남은 이가 불과 10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 지역 감리교 목사의 과반수가 체포 구금되었던 것이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말까지 3 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배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구한말부터 여성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의 영향이 3 1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총인구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 1운동과 관련된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이들이 대부분 과격행위자이기보다는 시위주동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의 정도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가 1,705개소,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 472개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만 합하더라도 교회가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 숫자는 3 1운동의 피해로 전해에 비해 교회는 88개소, 신자는 무려 22,409명이나 줄어든 것이었다. 여기에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한다면 교회의 피해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3 1운동이 교회에 이러한 피해와 부정적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 절에서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2. 3 1운동이 교회에 미친 영향
1)비기독교인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 변화
1920년 평양지방 감리사 무어는 그의 보고서에서 3 1운동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열린 마음들:
독립운동에서 성장한 정치적 동란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해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에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수용적이 되어서 많은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비기독교인들의 태도"라는 항목으로 그 지방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며, 교회 건축과 사업을 위한 헌금, 토지 기증을 한 사례들이 있다고 열거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3 1운동 참여가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음을 보여 주는 자료다. 이러한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해서 강원도 지방의 3 1운동을 검토한 조동걸 교수도 "3 1운동의 지방사적 성격"이라는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특수한 점을 지적하면 먼저 종교간의 반목을 해소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를 백안시하던 태도가 불식되었다는 데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영동지방과 같은 토착사회의 성격이 강한 지역에서 기독교의 전도는 쉽지 않아 3 1운동 전에는 교세가 대단히 약하였다. 때문에 기독교가 단독으로 추진한 운동은 대중성을 띠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3 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을 목격한 대중은 기독교를 백안시하던 태도를 고쳤다. 그것은 횡성과 강릉에서 3 1운동 뒤에 있었던 청년회 구성이 기독교인의 여부를 막론하고 조직되었던 사실로서도 알 수 있다. 또 종교간에도 3 1운동 전에는 서로 대화가 오가지 못하였는데, 3 1운동이라는 민족적 사업을 치르면서 그 공동운명에 처했던 경험을 계기로 서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위 [철원애국단 사건]에 잘 나타났다. 철원애국단은 불교도, 기독교도, 유학자 일반 청년 등 강원도 지도급 인물들이 총 망라되어 3 1운동 직후에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철원 도피안사에서 조직된 것이다. 목사와 불승이 한 자리에서 민족운동을 의논한 자체, 유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 종교인이 하나의 애국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한다는 것은 종교간의 반목을 해소시킨 증거로 충분할 것이다."
2) 선교사들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 변화
3 1운동은 한국인 내지 한국기도교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한국인을 용기가 없다고 열등하게 여기고 친일적이었던 선교사 게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19년 4월 30일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서 이대위 선생을 방문하여 한국에서 3월 이래로 한국인들의 용감한 기상과 일인들의 폭악한 행동에 대하여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 한편을 보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연내로 한국 민족을 안다고 하는 외국인은 한국 민족은 용기가 없는 인족으로 생각하였으니, 그가 혹 탄압 하에서 광폭한 행동을 행할런지 알지 못하나, 어떠한 위해에 대해서든지 미소로 이를 대하는 태연자약한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념할만한 과거 두달간 한국 민족은 이 용기를 보여 주었으니, 그 동안에 한국 민족은 공포라는 것을 몰랐으며 전장에 임한 대장과 같이 정숙하고 전후를 헤아리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국 민족의 용기있는 특색이 청년 여자로 인하여 표현되었다...
한국 민족의 용기있는 표는 무상식한 농부에게도 드러나니, 농가에 골몰하여 인생의 큰 문제에 접촉할 기회도 없었건마는 각기 자유의 권리가 있음을 깨달아 알고, 90도의 흉악한 태형을 당할 줄 알면서도 밭갈이를 중지하고 만세를 불렀다. 일전에 도장관을 지냈던 한국인에게 '향촌 인민들이 어찌하야 비할 바 없는 가혹한 형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저렇게 활발히 계속하는가'하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자기의 행위가 의로우니, 의는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고한 신념이 머리 속에 신기하게 굳게 맺혀있기 때문이라' 하였다...한국인들은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 마음대로 학살하여라. 죽이고 싶거든 죽이고 때리고 싶거든 때려라.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호소하리니 세상에 공정한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 호소하리라' 하였다. 일찍이 서양 사람들은 한국 민족이 겁이 많고 나약한 민족으로 알았으나, 현대의 한국 민족은 세계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용기와 자제력이 있음을 실증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겉으로만 나타난 변화가 아니었던 것임은 1919년 5월 26일자 그의 일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한국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이 사람들이 자유의 투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은 일본의 심한 지배를 받고 있다.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며 얼마나 거짓되고 이기적이며 비정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감옥 속 고통의 집에서 들리는 기도소리를 들으소서. 버려진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진실한 아내와 어머니의 모든 기도 소리를 들으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기에 옳은 것은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여 ! 시련에 빠져있는 한국을 축복하소서. 일본인에게 진실된 회개와 신앙심을 가져다 주옵소서"
3) 청년 지성인들의 태도 변화
1917년 11월 [청춘]이라는 잡지에 당시 청년 지성인을 대표하는 이광수는 [금일 조선예수교회의 흠점]이라는 글을 써서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즉 당시 조선기독교는 ① 계급적이다(자유 평등 사상 몰각, 목사-장로-하위 교역자-보통교인 순의 우월적 계층 구조) ② 교회지상주의(악폐: 교속(敎俗) 구분 태심, 학문 천시, 종교이외의 사업 천시, 종교적 이외의 국가 사회 유익에 대한 의무 소홀 ③ 교역자의 무식(교역자가 세태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함) ④ 미신적이다(문명적 종교의 사명 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래 유교육계급의 인사와 청년학생들이 점차 조선교회를 떠나 외인의 교회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3 1운동 직후 이러한 청년들의 태도가 바뀌어 청년들이 대거 교회를 찾아왔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선교 보고서에 보인다.
"젊은이들의 반응: 전년까지 한국교회는 대부분 늙은이들과 어린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 교회들은 젊은이로 차있다. 20개 교회가 엡뛕청년회와 젊은이들을 위한 다른 단체들을 조직했다. 젊은 여성들까지 전도회와 찬양대를 조직했다."
감리교 천안지방 감리사 윌리암스도 1920년도 보고에서 교회에 대한 청년들의 기대와 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해의 소요는 (교회) 사업에 영향을 남겼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일을 '계속 수행'하기로 더욱 다짐하였지만,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다른 곳에서는 박해 때문에 겁먹고 약해졌다....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교회를 그들이 도움과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기대하고 있다....우리는 들판을 둘러볼 때 익어가는 곡식을 본다. 그 젊은이들이나 한국은 어두움의 시기에 빛을 찾아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일을 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시련을 견딜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4) 교회의 민족적 지도력 발휘와 고난 중의 체험적 신앙 향상
한국교회는 교단조직 자체로 3 1운동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결단에 의해 개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운동 과정에서 민족적 지도력을 발휘하고 고난 중에 깊은 신앙적 체험을 하여 신앙이 향상되었다.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의 정금 같은 신앙}(Gold in Korea)이라는 책의 3 1운동 항목에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내가 이 설명을 하는 목적은 주로 독립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에 세밀한 내용으로 들어가지는 않겠다. 겉으로 보아서 만일 그것을 봉기라고 불러야 한다면 봉기라고 치더라도 그것은 강한 권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부당하게 잡힌 사람의 많은 수가 기독교인들임이 곧 명백해졌다. 이에 대한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사회에서 많은 한국인 목사들의 두드러진 위치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바랬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옆으로 빠지거나 집으로 돌아가기 매우 쉬웠다. 그러나 시위를 이끌고 있는 자들은 쉽게 알려졌고 속히 체포되었다. 어떤 지역들에서는 경찰과 군인들이 기독교인 마을을 급습하여 많은 교회를 불질렀다.
이 훌륭한 항거는 독립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한 열망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그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영향은 적어도 두가지 면에서 좋은 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했을 때보다도 기독교인들을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일체가 되게 하였다.
둘째: 수감되었던 기독교인들은 감옥에서 나오자 모두가 감옥에서 받은 놀라운 영적 축복들에 대해 증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교도관들에게 호의를 받도록 하셨다고 증거했다. 즉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들은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수 있도록 허락 받았고 심지어 그들의 동료 수감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모임을 갖지 못하도록 전 감옥에 흩어 놓았다. 때로는 목사님이 중범자들, 강도들,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감옥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감옥에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수 있었다고 기뻐하며 나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의 거의 장님인 목사 길선주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기에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가능한대로 빨리 서울로 가서 당국에 자진 출두했다. 그는 1년동안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완전히 기도와 성경연구에 자신을 바쳤다. 그는 이 기간동안 성경 전체를 몇 번 읽었고 계시록은 거의 암기하기까지 매일 읽었다. 그가 출옥할 때는 전보다 더욱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되어 있었다. 큰 성경공부반에서 그의 앞에 아무런 교재 없이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는 데 큰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이 시기에 개종한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날 교도관이 우리 모두를 정원에 한 줄로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 했다. 기독교인인 K씨를 포함해서 산골에서 온 어떤 이들은 삼각대에 놓여있는 검은 통이 기관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매우 두려워 했다. 그러나 K씨는 자신의 두려움도 잊어버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아직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이 사람의 용기와 진실함이 나를 너무 감동시켜서 나는 그 때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이 3 1운동에서 한국 기도교인들을 지도자로 내세워졌고, 일반인과 일체감을 갖게 하였으며, 옥중에서 신앙이 단련되고 전도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로교 평양 선교부의 보고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교회의 영적 성장과 수난을 증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점에서 교회는 진보하고 있고,영적 능력에서 건강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저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견뎌낸 박해의 와중에서도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허용되는 곳에서는 교회 출석이 잘 유지되어 왔고,여러 곳에서 새로 교회에 들어온 학습자들이 있었다.
평양시에는 교회를 담임한 목사의 5분의 4가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나머지 목사들도 체포되었으나 조사를 받은 후에 석방되었다. 한 조사는 체포되었고 다른 이는 도피하였으며,13명의 장로가 체포되고 3명이 기소되었으며 수많은 교인들도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는 잘못이 있건 없건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생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성경과 찬송가를 빼앗아 대부분의 경우 없애버렸다.한 사람은 '원치않는 곳' 즉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했다고 하여 체포되었다....교회는 이 운동 배후의 주요 세력이라 하여 공격을 받았다. 교회는 이 운동에 어떠한 식으로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이 사건에 끼여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결단하여 그 운동에 참여하였다.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공식기구로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3 1운동 기간 중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던 제암리교회에 대해서도 1919년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 노블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제암리교회에서는 교인 23명이 학살됨에 따라 생겨난 공포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장면이 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고,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총 334명의 신자들 중 173명이 죽거나 투옥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의 신자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영적 열심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죽음이 어느 날 닥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분에게 진실하겠다."
이러한 자료들은 3 1운동의 박해와 수난 가운데서도 한국교회 내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오히려 성장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몇몇 실례를 들어가면서 3 1운동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과 3 1운동에서 한국교회의 역할 및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들 기독교인들의 3 1운동 참여는 정신구조적으로 민족적 양심에 영향받은 측면과 종교적 신앙심에 영향받은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즉 민족 성원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3 1운동에 참여한 면과 종교적 양심 내지는 애국 애족적 신앙심 때문에 3 1운동에 참여한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외세에 의해 억압을 받는 민족의 성원이었으므로 이 두 측면은 모두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당시에 일제가 폭압적 식민통치를 하면서 종교의 자유까지 억압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이 두 측면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해를 같이하는 것으로, 상보적 관계에서 상승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적 신앙심이 깊었기에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민족의식이 강하였기에 보다 신앙심이 깊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환난 속에서 연단된 신앙이 내외적 기회가 도래하였을 때, 밖으로 표출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신앙적 결단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이를 주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인들의 3 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어 기여하였던 것으로, 기독교인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3 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방 독립을 바래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후의 그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을 이들의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그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나를 실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1천만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가장 앞장서 이끌어 가는 이들도 기독교인이요, 이에 못지 않게 이러한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3 1운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하였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 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이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3 1운동은 정신사적으로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도 미완성인 운동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 1운동의 인식을 통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야 할 것이다.
3 1운동의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다. 그리고 3 1운동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