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인편
1. 제자와의 대화
1. 스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부처가 될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근본 마음, 주인공을 철저히 믿고 그에 귀의하라.
나는 수십 년 간 오로지 이 말만 되풀이해 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이 말만 되풀이할 것이다.
나는 그 오랜 시간 이 말을 해 왔어도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고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실로 믿고 있으며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부처로 알고 스스로에 귀의하여 성불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만번을 강조한들 지나치지 않을 가르침인 것이다."
2. 신도들 중에는 스님의 법력에 도취한 나머지 맹목적으로 스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성급하고 미련한 정원사가 있어서
다른 나무에 달린 꽃을 따다가 제 나무에 붙여 놓는다고 하나면 여러분은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위대하신 부처님이나 보살림, 큰스님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 정원사처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어떻게 자신의 불성을 계발하셨는지를 잘 살펴서 그 방법만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나무의 꽃은 내 나무의 꽃이 아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꽃을 피우게 했는지 그 방법을 잘 알아 내 꽃나무에도 그런 방법을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꽃나무에 꽃을 피울 능력이 있으니까 올바른 정원사의 노력을 알아야 한다.
만약 부처님 공양할 줄만 알았지 자기 부처 귀한 줄 모른다면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 뜻과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다."
3. 스님의 가르침을 천금같이 믿고 받드는 이들을 향해 스님께서는 가끔 경책 삼아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죽어 줄 수도, 아파 줄 수도, 먹어 줄 수도, 잠을 자 줄 수도 없고, 대신 배설해 줄 수도 없다.
나를 믿지 말고 자신의 주인공을 믿어야 하느니 나의 말과 행과 마음을 보고 따르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믿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들의 주인공이다."
4. 한 제자가 스님께 법을 묻고자 배알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님을 보시자 그 순간에 준비했던 질문을 모두 잊고 말았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쯤 지나자 스님께서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그 말씀 속엔 그 제자가 준비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었다.
학인들 중에는 스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품었던 의증에 대한 답이 절로 떠오른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신도들 중에는 처음엔 그것이 사량이겠거니 했다가 나중에 스님께서 똑같은 설법을 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말없는 말의 설법인 줄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5. 한 학승이 찾아와 스님께 오랜 시간 여러모로 법에 대해 여쭙고 돌아갔다.
제자들이 내내 문답을 경청하자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이 법이 너무나 광대 무변하여 말로는 형용할 수 없으니 말로써 반을 얘기하지도 못할 것이요
뒤집어 놓고 말로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물으니 답답했을 뿐이고 묻는 경지를 알아도 그러가 보다 할 뿐이니라.
대답을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는 그 도리를 알아야 짜냐 쓰냐, 방편이냐 아니냐, 도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붙질 않는 것이다."
6. 스님께서 하시는 설법은 물론 일체의 사사로운 언행까지도 상대하는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꽃망울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봄날의 따스한 미풍처럼 여겨졌다. 스님께서 학인들을 점차로 성숙케 해 나가는 과정이 그러하셨다.
그래서 스님을 친견할 때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많았다.
7. 한 학인이 스님 앞에 나아가 간곡하게 여쭈었다. "제 마음은 은산 철벽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삼라 만상이 다공한 것이라면 그대 육신도 공한 것이요,
생각 마음 또한 공한 것이니 거기에 무슨 의문이 있겠는가?
공한 세계에 왜 '나' 라는 게 붙는가. 고뇌니 아픔이니 하는 그런 것에 한계가 있던가.
거기에 나가 붙으면 꼬리도 잡을 수가 없으니 곧 바로 들어가라.
그리고 턱 놓아라. 바람이 불고 새가 울고 꽃은 피고 구름은 흐른다."
스님의 가르침은 대체로 이렇듯 자상하였다.
8. 한 신도가 여쭈었다. "처음 몇 년 동안 공부 할 때는 생동감이 있고 스스로 병도 고치는 등 진전이 있었는데
그 후로는 다시 꽉 막힌 듯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길을 가다가 막힌 지점에 이르면 돌아가야 하는 이치가 있듯이
되는 것만이 법이 아니라 안되는 것도 법이니 굴릴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가는 것은 부처님 법이고 뒤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오는 길이 있으면 가는 길도 알아야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안되는 이치에서 또 공부를 해 나가면 꽃이 지고 과일이 익어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게 된다."
9. 한 신도가 여주었다. "고기들이 물 속에서 놀면서도 정작 물을 모르듯이 답답합니다.
방하착 하라는 말씀을 듣고 언하에 깨우치신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잘 되지 않아서 때로는 경을 보았다가
때로는 염불을 하다가 기도를 하다가 그렇게 지냅니다. 차라리 뭔가 구체적인 방편을 주신다면 공부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화두나 염불, 기도에 비하면 맡긴다, 놓는다 하는 게 처음엔 애매하고 막연한 것 같아도
차차 경험해 보면 좁아 보이던 길이 넓어져 마침내는 문 없는 문이 된다.
그러나 특별한 방편을 세우면 우선은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결국은 벽 없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
10. 신도들 가운데는 공부하는 중에 갖가지 특이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때로는 빛을 느꼈다든가, 때로는 안개 같은 것이 뭉쳐 보인다든가 또는 지옥, 극락의 어떤 상을 보았다고 하는 신도들이 있었다.
또 많은 신도가 특별히 슬픔 감정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주인공에 놓는 공부를 하다 보면 빛을 느낄 때가 있다.
간혹 상이 보이기도 하나 그것이 바로 자기가 지은 모습이요 나툼인 것이니 둘로 보아서는 안된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은 업장이 저절로 녹는 것이다."
11. 선원의 상임 포교사가 어느 날 선원 내의 작은 연못 앞에서 스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스님께서 연못 속의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포교사에게 물으셨다. "저 물고기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을 걸어 보라. 예를 들어서 이렇게---.
'용케도 겨울을 잘 견뎠구나, 네게도 사람될 능력이 있고 부처될 능력도 있으니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날 마음을
내보도록 해보렴!' 하고 말이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는 게 바로 방생이다.
미물에게도 마음을 보내고 진실한 자비심을 갖는 게 방생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고 물고기도 대답을 해오게 된다."
상임 포교사는 마침 모 불교 단체의 방생 법회에 법사로 초청되어 막 출발하려전 참이었다.
12. 한 신도가 화장실 앞에서 스님과 마주쳣다.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런데 말이야, 먹으면 꼭 배설을 해야 한단 말아야.
먹기만 하고 배설치 않는다면 될 일이 겠어? 세상 이치도 그래. 보면 본 대로, 들어면 들은 대로 갖게 되면 갖게 된 대로 놓고
가야지 그걸 붙들어 두려고 한다면 먹고 나서 배설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어! 뒤탈이 안 나겠어?
먹으면 배설하듯 그렇게 마음도 편안히 놓고 가야 될 게 아니겠어?"
그 신도는 마침 타인과의 거래 관계로 고심 중이다가 스님께 해결책을 여쭈려고 찾아오던 길이었다.
13. 어느 날 스님께서 한 시자가 스님을 대동하고 목욕을 가셨다. 스님께서 목욕탕문을 막 열고 들어서시면서 뒤따르는 시자
스님에게 불쑥 한 말씀 던지셨다. "이 문으로 아주 들어가랴?" 시자 스님은 그만 말문이 꽉 막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말았다.
며칠을 끙끙 앓던 끝에 시자 스님은 불현듯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큰스님께 고했다.
스님께서는 "그래, 그래--"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실 뿐이었다.
14. 스님께서 한 제자와 거리를 지나시다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을 파는 사람을 보시고는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어쩌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불편한 몸으로 신문을 파는 저 사람이 보살의 화현인지도 모른다.
높다랗게 앉은 스승이 참 선지식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버림받고 누추한 사람이 꼭 누추한 게 아니라
짐짓 보살이 그렇게 몸을 나투셨는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뜻은 크고 커서 크다는 모습조차 갖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작아 보이는 수가 있다. 오히려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찬란하지도 않고 평범해 보일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손 없는 손으로 중생을 교화하시기 때문에 그 뜻에 응하면 풀잎이 대군이 되기도 하고
그 뜻을 받들면 어린아이가 대장군이 될 수도 있다." 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심이 대개 이렇하였다.
스님께서는 어느 때나 막힘 없는 설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쳐 주시곤 하셨다.
15. 스님께서 어느 때 제자들과 함께 공양을 드시려던 참에 한 제자에게 불쑥 질문을 던지셨다.
"그래, 밥은 잘 먹었는고?' 질문을 받게 된 그 제자는 채 한술 뜨기도 전인지라 순간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얼마 후부터 그 제자는 싱글벙글 즐거워하였다. 곁에서 보고 그 사연을 묻자 하는 말이 "우리 큰스님께서 그토록 자별하시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였다.
16. 스님께서는 어느 날 원행 길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떼를 보시고는 한 제자에게 넌저시 물으셨다.
"어떻게 해야 저 소에게 이익을 줄 수 있겠느냐?" 그 제자가 아무 말씀도 사뢰지 못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픔 없이 옷을 벗으라고 무주상으로 마음을 냈을 때는 소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한마음이 되는 법이다.
그리되면 그 마음 마저도 없어지고 소의 몸은 도끼로 내려칠 때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몸을 벗는 순간
인간으로 환생하는 도리가 있으니 보지 못할 뿐이지 진실이다." 하시니 나중에 대중 설법을 하면서 그광경을 보신 심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 해도 어미와 새끼가 죽음의 이별을 슬퍼하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차마 두루 볼 수가 없다. 내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찢어질 듯하여 차라리 이 몸을 가루로 만들어 뿌려서라도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어느 날이고 눈물 안 흘릴 날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애착일 터이지만 그러므로 일체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할 때가 오기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17.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깨우침을 얻어 만법의 기능을 활용케 할 수
있는 법은 어떤 것인가 하고 수십 년 간 무척 사모해 왔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재료를 다 연구하여 수억 겁을 거쳐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 왔다. 그리되면 여기가 우주 개발국으로 손색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욕심이라고 하겠지만 육신통의 성능을 갖춘 컴퓨터라면 안될 것이 없다. 어느 천년에 인공 위성을 띄우고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의 재료를 다 모을 수 있겠는가. 육신통의 컴퓨터라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18.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알게 되면 대천 세계, 중천 세계, 소천 세계를 두루 종합해서 알아지기 때문에
이 지구에관한 것도 세세생생이 알고 지구와 내 몸이 같은 줄도알게 된다."
19.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맛을 보면 물러설 수가 없느니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마큼 좋으니라.
찰나의 살림살이가 그만하면 뜻뜻하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속에서, 이 중생 속에서 벗어났으니 수억겁을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20.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알고 가면 가고 옴이 없이 오가는 반면 말없이 말을 듣고 말없이 말을 한다.
설사 미국과 한국간이라도 같이 말할 수 있고 같이 볼 수 있고 같이 들을 수 있으니 뼈 속까지 다 알 수 있고,
유명을 달리한 사람까지도 그 족보를 낱낱이 알 수 있다."
21.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공부해 나가다 보면 너무 광대하니까 어떤 때는 입을 딱 벌리고 하늘을 보며 껄껄 웃지
않을 수도 없고, 또 너무 어마어마해서 산하 대지를 내려다 보고 한번 울지 않으면 안되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22.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안다면 대통령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니, 앉은 자리에서 이승 천자, 저슨 천자가 될
수 있는데 어찌 심부름꾼이 되어 애를 쓰려 하겠는가. 한 주먹 안에 이승 천자, 저승 천자가 다 들어 있다."
24.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도리를 알면 시시각각으로 법계를 주름 잡을 수 있기에 물 한 방울 탁 튀기면 다른 곳에 비가 쏟아지는
수가 있느니 지금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거늘 여러분들이 모를 뿐이다."
25.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공 없는 도리를 알면 조금도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재할 수 있으니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모름지기 한 생각 일으켜 자루 없는 도끼로 기둥 없는 기둥을 깎아 세워 하늘을 받일 수 있는
불기둥이 되기를 바라노라."
26.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낚싯대로 만강에 비친 달을 한 번에 다 건져 손아귀에 쥘 수 있어야 한다." 또 말씀하셨다.
"날아 다니는 새들의 말을 들을 수있고 풀 한 포기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죽은 사람과도 마음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
27.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위 아래를 한 주먹에 쥐고 들이고 내며 베풀고 조절할 수 있어야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 말씀하셨다. "유-무생의 만물이 항하사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도 한 주먹에 가지고 들 수 있느니라."
29.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삼천 대천 세계의 소용돌이를 한 번에 녹일 수도 있고 한 생각에 억겁 년을
끄달리면서 돌아갈 수도 있다."
30.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 천체가 하나인 줄 깨닫고 우주적 입장에서 살아간다면 무엇이 넘치고 무엇이 모자라겠는가.
우주 전체가 나 아닌 게 없으니 이 세상이 내것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하니 무엇을 더 가지려고 싸울 것인가.
자기가 자기 것 빼앗는 사람이 없듯이 그냥 쓸 뿐이나 쓴다 해서 줄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31.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다니는 것이 바로 다니는 게 아니니 머리에다 신을 이고 다닐 줄 알아야 양면을 다
무불 통지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만 매달려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분별을 일삼는다면 죽은 세상엔 어떻게 가서
신을 거꾸로 신고 다닐 수 있겠는가?"
32.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기가 천개 만개 있다 해도 한 사람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이니, 설사 미사일이 일만 개나 떴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그것을 모두 자재할 수도 있다."
33.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열 명의 군사가 있고 상대 편에 백 명의 군사가 있다고 할 때, 열이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로 인해 나라가 무너진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때는 한 발 내려 딛어서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한생각 냈다 하면 법신이고 화신인 것이다.. 물론 법신의 능력이 있어야 내려 디딜 수도 있다."
34.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독수리가 무수히 덤벼드는데 내가 독수리가 되어야 완화가 되지 맞서서야 싸움밖에 더 되느냐.
살아 나가는 이치도 그와 같으니 영계의 문제나 세균의 문제나, 유전성, 업보성 문제도 대동소이하다.
거기에 치이느냐 운전을 잘 하느냐는 문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35.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공부를 하면 이 세상에 나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시간과 공간이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되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그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발은 평발이 되어서 한 발로 딛었고 손 없는 손이 온 우주에 아니 닿는 게 없고, 한 눈으로 어디 아니 보이는 데 없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예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36.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안에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배가 있음에도 밖으로 헤매며 보배를 찾는다 하니,
설사 소원대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의 보배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작은 것이다."
37.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 뱃속 문을 열고 자기의 육신을 문을 열고 나오니까, 또 지구의 문을 열어야 되느니
우주 전체를 알고자 하면 너무나 문 없는 문이 많다."
38.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이 있음으로써 유생이 있는 것이지 유생이 있어서 무생이 있는 게 아니다.
무생은 바로 귀신 방귀 씨와 같은 것이다. 이 씨는 없으면서도 여전히 있고 여전히 있으면서도 그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도록
심봉을 딱 꽂아서 조금도 어김 없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39.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 천하가 그대로 큰 불바퀴, 작은 불바퀴 둘이 아닌 줄 알았을 때 부처님께서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말씀하시고 계심을 보게 된다."
40.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굴려도 떨어지지 않는 법바퀴를 타고 다니면서 불바퀴, 물바퀴를 굴리고,
용이 되어 들고 나며 수많은 물고기를 다 먹이고 남기며, 꽃 피고 새 우는 가운데 앞뒤 없이 뚫린 피리를 부니
얼마나 멋지고 좋은가. 그러나 체험 없이 이런 말을 한다면 모두 한대로 떨어진다."
41.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몸은 살려 놓은 채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죽은 사람이 사는 도리를 다 알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면 산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없고, 바로 행할 수도 없고, 바로 에너지를 베풀 수도 없다."
42.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용을 한다고 할 때 만약 어디를 간다 하면 몸은 여기에 놓아두고 화신이 가는 것이니,
어떤 모습으로든, 예컨데 군인의 모습으로 할 수 있고, 대장으로 용왕으로 고기로 가재로 할 수도 있고 파리의 모습,
버러지의 모습으로도 할 수 있으니 환경에 따라 여건에 따라 바뀌게 되느니라."
43.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밝으면 보현이 된다. 앉은 자리에서 화하여 직통으로 왕래를 해보라.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을까 하겠지만 마음은 빛보다 더 빨리 왕래할 수 있으니어찌 있을 수 없다 하겠는가."
44. 스님께서 지방 나들이 중에 땅이 메말라 등성마루가 허옇게 벗겨진 산을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저 땅 믿에 사는 생명들은 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인즉,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뜻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니
너희는 너무 더운 곳의 기운을 들어다가 저 곳에 닿게 하는 일이 가능한 줄 아느냐?
부처님 품안에는 모든 게 다 있으니 그게 가능한 일이라, 높은 데는 좀 누르고 앝은 데는 올리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모든 게 다 부처님 손아귀에 들어 있다."
45. 30년 가까이 스님 회하에서 불법 공부를 해온 한 신도가 불법의 이치를 다시금 여쭈었다. 스님께서말씀하셨다.
"나는 버스 노선을 여러분께 가르쳐 주고 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그렇게 해오고 있다.
버스를 타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이니 세세하게 가르쳐 주어도 자꾸 묻기만 할 뿐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 냄새만 맡고도 이치를 알아 내는 사람도 있다." 그 신도는 그 이상 여쭙지 못하고 물러났다.
46. 한 제자가 불법의 교문과 선문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문이 선문이고 선문이 교문이라 따로 있지 않다.
말이 없다가도 속에서 말이 나와 말을 하게 되듯이 전부가 융화된 것이다."
47. 한 신도가 여쭈었다. "스승을 참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 하려하니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스승으로 하라 한 적이 없다. 잘난 부처보다 못난 네가 낫느니라. 네 자신, 참 주인공을 스승으로 하라!"
48. 한 신도가 여쭈었다. "어느 것이 참 불법입니까?" 스님이 옆에 있던 물을 주시며 "이것을 먹으면 시원할 테지?" 하니,
잠자코 있다가 또다시 묻기를 "어느 것이 참 불법입니까?" 하였다. 스님께서 옆에 있던 물 한 그릇을 마저 건네셨다.
49. 한 작가가 '문학이란 도를 느끼게 하는 방편으로서 강점이 있다' 고 말하고 스님께 도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문학이 도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고 도와 문학이 이외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 법이다,
문학이다, 과학-철학이다 하는 모든 것도 모두 이름으로 분류된 것뿐이지 따로따로가 아니다. 도 안에 문학도, 과학, 철학도
다 계합되어 돌아간다. 예컨데 봄이 오면 절로 꽃이 피는 것처럼 마음에 봄이 오면 거기서 문학도 나오고 철학도 꽃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문학에 대해 모르지만 봄이 오는 것, 꽃 피는 것, 바람 부는 것, 낙엽 지는 것을 안다.
그걸 가지고 도라고 일컫는 것이지 어디 도가 따로 있겠는가."
50. 어느 때 한 신도가 "불성이 무엇이오니까?" 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그렇게 묻는 놈은 누구이더냐?" 하실 뿐이었다.
51. 한 신입 신도가 공부할 마음을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르침은 가르침이고, 생활은 생활이니 양립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스님께서는 들어시고 말씀하셨다. "생활과 불교가 둘이 아니라, 불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며 말하고
돌아가는 자체가 교이니 생활이 그대로 불법이다. 결코 따로따로 생각할 게 아니고 그대로 근본이며 진리요
인간들의 법인 줄 알라."
52. 어느 신도가 여쭙기를 "흔히들 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예까지 오는 동안에 한 발짝씩 옮겨 놓을 때 그 횟수를 세면서 왔는가, 아니면 그 발자취를 거둬 가지고 왔는가?
그냥 무심으로 걸어 왔듯이 그와 같이 고정됨이 없고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53. 한 제자가 여쭈었다. "스님의 밑에는 바늘 하나도 못 들어갈 정도로 견고해 보입니다만 그렇게까지 믿기 위해서는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던져야 하는데 그게 용이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도 그럴 터이지만 누구든 그렇게 하여야만 하느니, 그것이 영원히 사는 법이요, 영원히 자유로운 법이거늘 어찌 진리가
그와 다르다 하겠는가."
54. 어느 날 한 부인이 스님을 찾아와서 눈물로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남편의 구타가 지심하여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 살 수
없노라고 하소연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모든 게 다 주인공의 일이니 잘잘못 따지지 말고 마음에다 맡기라."
그 말씀을 듣고 한 신도가 말했다. "스님, 때리는 사람의 주인공에 맡겨야지 왜 맞는 사람의 주인공에 맡기라 하십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쪽 주인공과 저쪽 주인공이 따로따로가 아니다. 그렇게 둘로 보면 그르치게 되느니 눈앞에 전개되는
그 어떤 경계도 둘로 보면 그르친다. 자기 주인공에 간절히 맡긴 것과 같다. 마음의 향기가 전달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그 부인이 스님께 찾아와 남편이 정색을 하며 사죄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스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그것이야말로 참된 에너지다. 그런 에너지 때문에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진화를 하게된다."
55.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 사랑 하지만 주인공의 참사랑 맛이란 정말 말로 하기 어렵다. 털어주고 닦아주고 어루만져 주기를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하는지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얼울할 것이다. 변소엘 가도 따라와서 뒤를 씻어 주는 그런 사랑,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그런 사랑이다."
56. 한 신도가 의아심을 가지고 스님께 여쭈었다. "문제가 밖에서 일어났는데 내 안에다 맡겨서 되겠습니까?
밖에서는 지금 치고 받는 험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마음을 거두어 맡긴들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험악한 일을 같이 나서서 싸운들 무슨 일이 되겠는가. 설사 자기 뜻대로 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일 뿐이다.
자기 뜻대로 되었다면 분명 저쪽 사람에게는 불만스러운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또 저쪽이 만족하면 이쪽에서 불만일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 싸움을 싸움으로 대하는 한 그 원한과 싸움의 고리는 끝없이 계속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잘잘못을 논하기 이전에 주인공에 맡기라는 것이다. 불법을 믿는 참된 수행자라면 양보는 이미 양보가 아니다."
57. 한 신도가 "스님의 가르침이야 말로 생활 불교다." 하는 말을 들어시고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생활 불교란 무엇이겠는가.
아침 저녁으로 염불-독경을 착실히 한다 해서 생활 불교는 아닐 것이니 불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하루를 부처님의 뜻 가운데서
편안히 엮어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게 바로 생활 불교이다."
58. 스님께서 어느 때 말씀하셨다. "6-25 때 보니까 불상 지고 가는 사람 하나도 없더라. 평소에 그렇게 매달리더니 한결같이
제 먹을 것, 옷 보다리만 챙겨들고 피난길에 나서길래 '왜 부처님을 지고 가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어떻게 지고 가느냐며
꽁무니 빼는 걸 보았다."
59. 신도들 중에는 수행의 방법과 가르침의 체계게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 대해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로 여러분들이 살아 숨쉬고 사는 삶, 그 자체가 바로 불법이고 진리이며 참선이요
길이다. 따로 체계가 있고 수행의 방법과 단계가 있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그 자체 속에
불법의 체계와 수행 방법이 있다. 불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삼천 대천 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일체의 소리가 가르침이다. 산새가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낙엽지는 소리도 다 부처님의 청청 법음이다.
문자화되지 않은 설법이다. 다만 중생들이 미혹해서 그것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60.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삼계가 다 부처님의 나툼 아닌 게 없으니 부처 중생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근본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실제 벌어진 양상에서는 깨달은 분이 있고 미혹한 중생이 있다.
수행법은 이 중에서 후자에 관한 것으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주는 것이다.
나는 일체 경계를 주인공 자리에 몰락 놓으라는 것을 수행법의 요체를 삼는다."
61. 한 신도가 여쭈었다. "스님께서 해오신 바처럼 목숨 떼어놓고 들어가지 않고 오직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 놓는 것만으로도
세 번 죽기가 가능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주인공을 일심으로 믿는다면 누구나 가능하다. 놓고 또 놓아 나가면 더불어
돌아가는 도리를 알게 되고 만물이 둘 아닌 줄 알게 되고 둘 아니게 나투며 돌아감을 알게 된다.
62. 스님께서 어느 때 법당에 들어가셔서 정례를 하지 않으신 일이 있었다. 한 제자가 그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눈이 있나 없나를 보느라고 그랬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형상에 붙으면 절을 해야 마땅하겠지만,
내 안에 불바퀴로 뭉치면 하나이니 그때는 어디다 대고 절을 해야 하는가. 부처님 형상에 서려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내 마음을 둘로 보아 절을 하는 것이나, 둘로 아니 보면 내 마음을 다 붙여도 두드러지거나 줄지 않으니 쫓아다니며 절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도리를 모르면서 절을 안 하는 것은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63. 어느 해 사월 초파일 행사를 마치시고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셧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서 봄철에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듯하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허무주의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부처님은 오히려 크나큰 기쁨과
긍정을 가르치셨다. 아마도 허무주의를 가르치러 오셨다면 쓸쓸한 가을 이나 황량한 겨울에 탄강하셨을지도 모르나 봄철에
오셨다는 게 그 가르침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돌려 긍정하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였고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믿는다. 불교는 세상을 저버린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새상을 참답게 보고 참답게
사랑하도록 이끄는 종교인 것이다.
64. 한 신도가 깨달음을 얻는 법에 대해서 여쭈었다. 그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봄을 찾아 길을 떠났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 뜰 매화나무에 꽃이 벙글러져 있더라고 했다. 찾으러 가면 찾아지지 않고 오히려
지금의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면 그 자리에서 꽃이 피고 향기가 나오는 이치이다.
깨달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달음으로 꽃피어나는 것이다. 내일 내일, 부처 부처, 깨달음 깨달음 하지 않으니
깨달음에 대한 잡착도 집착이기 때문이다. 수평선이란 따라가면 또 그만큼 멀어져 언제나 저 만큼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오늘, 여기를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언제나 내일, 저기, 그 언젠가, 그 어떤 곳에 뜻을 두고 그리워하나 우리가 사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니요 오늘뿐이며, 저 곳도 그 곳도 아닌 여기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애닯게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작다 말고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사실 그토록 따라가려던 그 수평선이란 바로 자기가 탄 배의
밑바닥인 것이다."
65. 한 학인이 스님을 뵙고 어떻게 하면 도력을 이룰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도력을 잡으려 말고
당신을 잡으라. 당신의 마음이 곧 주인이니 당신의 마음은 태양보다 더 크다." 학인이 다시 여쭈었다.
"어떻게 해야 자기를 찾습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일체를 마음의 주처에 놓고 나가야 한다."
66. 한 신도가 여쭈었다. "삭발을 하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입산까지 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들어 갔으면 나올 줄 알아야 하고 나왔으면 다시 들어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 반복하는 이치를 길게 끌지 않으려고
그대로 제 한 몸 불사르고 들어간 것이다."
67. 한 신도가 여쭙기를 "스님처럼 그런 고행을 꼭 깨달아야 깨닫게 됩니까?" 라고 말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꼭 고행을 겪어야 무언가 깨닫는 줄 아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느니 모든 것이 생각에 달려 있다.
한 순간에 십 년을 고행할 수도 있고 십 년 고행이 한순간에 무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아는 게 없어서 오래 떠돌았지만 여러분들은 현명하니까 생각을 바로 가지고 꼭 성불하기 바란다."
68. 한 제자가 스님께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고 생사에도 걸리지 않는다' 는 중도행의 도리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말씀하셨다.
"생사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이는 곧 얽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누가 이 말에 대해 내게 묻기를
'바로 지금 네가 또는 네 자식이 죽게 되어도 그러하냐.' 한다 할지라도 나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억지가 아니라,
수없이 죽고 또 죽어 보았기에 꾸밈 없이 하는 말이다. 죽는 이치도 알고 사는 이치도 알기에 죽는다 산다에 얽매이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9. 한 제자가 스님께 "생각이 끊어진 자리가 부처라 했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끊어지긴 왜 끊어지는고?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끊어짐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운행되는 것이니라."
70. 한 학인이 찾아와서 스님께 여쭙기를 "이제 비로소 자성의 자리가 말고 깨끗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그 학인에게 이르셨다. "말고 깨끗한 게 청정이 아니다. 더럽다,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이 둘 아니게 관할 때가 청정이다.
무엇인가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제 원통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다."
71. 스님께서 미국 뉴욕에 가셔서 담선 법회를 여시는 중에 한 신도가 여쭙기를 "먹기 위해서 삽니까,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하였다. 스님께서 웃으시면서 되물으셨다. "목이 마를 때 냉장고 문을 열고 음료수를 꺼내 먹는데
그때 '이걸 살려고 먹나, 먹을려고 사나' 하는 생각을 했느냐?" 그 신도가 대답하였다. "목 마르면 그냥 따라 먹고 볼 일이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다. 그래서 풀 한 포기라도 불법 아닌 바가 없다. 벌레 하나도 불교 아닌 게 없다."
72. 스님께서 어느 때 미국 교포들을 상대로 설법하시는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생활이 분초를 다투듯이 바쁜 걸 보니
그대로 참선인 게 여실하다. 차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빵으로 요기를 하고 카세트를 듣고 치장하고 하는 걸 보면서 여러분에게
누가 아침이면 주문 외워라, 좌선해라, 백팔배 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이 공부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생업에
바쁘고, 가난 해서 더욱 짬이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승화하지 못하는 말이된다. 한생각에 먹고 마시고
부지런히 뛰는 생활 속에 참선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여유가 있고 내가 앉고 싶다고 했을 때 앉아야 참된 좌선이 된다."
73. 한 신도가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을 때 여쭈었다. "저도 불법과 인연이 있습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그건 점이지 법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묻도록 하라. 자신의 마음이 나침판이다."
74. 한 수행자가 스님을 뵙고 말씀 여쭈었다. "오랫동안 간경을 수행으로 삼다가 어느 선사로부터 '이 뭐꼬?' 화두를 받아
정진하고 있으나 아직도 한 맛을 모릅니다." 스님께서 되물으셨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뭐꼬?' 를 찾고 있느냐?"
수행자가 대답했다.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 만법을 주인공 자리에 맡겨두고 가라.
그리하여 무심이 되어야 하느니 그렇게 되어야 사랑을 하고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먹어도 먹은 사이가 없고,
주었어도 준 바 없으며, 죽어도 죽은 바가 없다."
75. 스님께서 수행을 위해 특별히 어떤 방법을 강조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화두 참선이나 좌선에 익숙해져 있던 학인들이
찾아와서 굳이 한 방법을 일러 달라고 조를 때라도 오로지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놓으라고 하실 뿐이다.
스님의 가르침은 이렇듯 간단 명료하였다.
스님께서 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과학 문명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 곧 바로
들어가야지." 하셨다.
76. 한 신도가 스님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느 때는 말을 잘 하는데 스님만 뵈면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배추, 무만 사다 놓았지 양념을 해서 맛있게 버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말없이 말하고 가고 옴이 없이 오가는 공부를 하기 위해 수련하는 과정이니 모든 것을 놓고 공부해서
또 보임을 해 들어가야 한다."
77. 한 신도가 스님에게 여쭈었다. "양면을 다 놓으라고 하심은 중간을 취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다 놓으면 허전해서 공부하는 것 같지를 않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인공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본래 중생이 아니라 부처이다. 우리의 중생심, 곧 나라고 하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 잠시 인연화합으로 모인 뜬 구름일
뿐이니 정법으로 직시하면 머지 않아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 뒤에는 넓고 맑고 푸른 하늘이 있다.
염려하지 마라. 다 놓아도 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놓고 나면 영원하고 무한한 진실,
마음 든든한 무한의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주인공, 우리의 본래 모습인 줄 안다면 망설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78. 스님께서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한 믿음을 중시하시고 가끔 개별적인 실험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있었다.
한 신도가 말하기를 "부처님 법은 광대 무변한데 어찌 생활 속의 자잘한 실험을 권하시느냐." 고 하였다.
스님께서 이에 언급하셨다. "자기 생활을 스스로 업신여기고, 자기 몸을 자기가 업신여기고, 제 마음을, 제 주처를 또 업신여기고
어디 가서 불법을 찾으려느냐? 허공에 대고 아무리 이름을 불러 보아도 대답 없는 허공이요 대답 없는 이름일 것이니
아무리 이론이 높다 해도 말뿐이라, 설사 부처님이 면전에 계신다 해도 높이 보지 말 것이며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라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
79. 스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화두라고 하셨다. "육신 생긴 게 화두요 네 마음이 화두요 네 생활이 화두이니
화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라고 강조햐셨다. 스님께서는 그 말씀을 후렴처럼 되풀이 하셨다.
80 스님께서 대중 법회 중에 말씀하셨다. "모두가 나 아닌 다른 곳에서 태초를 두고, 나 아닌 다른 곳에서 화두를 두고,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염원하니 이 일을 어찌 하는가? 남의 집 아버지는 위대해 보이고 자기 집 아버지는 우습게 보이는지
자기 집의 부처는 모르고 달마 선사, 무슨 선사 하며 스승으로 모시니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죽은 부처 만 개가 있다 하더라도
산 부처 하나만은 못한 것이다. '그때 그 시절 그 나무의 열매가 익어서 그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맛을 아는가?'
그때 그 열매가 익어 아무리 맛이 좋았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지난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이야기 하고 듣고 하는 것이
그때와 둘이 아닌 것이다. 자기한테 나오는 것을 자기에게 모두 맡겨 놓는다면 어느 때인가 콧숨 한 번 쉬는데 이 만법이 모두
나오게 되리라." 스님께소 또 말씀하셨다. "말 없이도 먹을 수 있고 말이 있어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떡을 자기가 스스로
먹어 보지 못했기에 진짜 보이는 떡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81. 한 신도가 여쭈었다. "오고 감이 없다 함은 정지를 뜻하는 겁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찰나로 너무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이것을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니 오고 감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한순간에도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에 생명이
수만 가지로 생기고, 한생각이 일어났다가 금방 다른 생각이 나는데 어느 것을 고정되었다고 하겠는가."
82. 한 제자가 스님께 수행의 공덕에 대해서 여쭙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를 이루어 도인이 되려 함이 아니니라.
문제도 내 안에 있고 대답도 내 안에 있은즉, 내 마음 안에 있는 영원한 보배, 그 보배의 참 맛을 아는 이라면 도인으로 불리든,
큰스님이라 불리든, 산 부처나 보살이라 불리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칭찬과 경배가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거늘, 오직 마음의 샘, 진리의 맛만이 목마름을 적셔줄 뿐이다. 전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라는 크나큰 안식처 뿐이다."
83. 한 신도가 부처님 전에 회향하는 이치를 여쭈었다.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흙에서 나왔고
갈 때도 흙으로 돌아간다. 그와 같이 나올 때도 한 구멍에서 나왔고 갈때도 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 나옴과 죽음이
둘이아니다. 그 둘 아닌 곳, 그 한 구멍에 만사를 돌려놓는다면 그것이 최상의 회향이다. 나는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이 감사한 마음을 이루 다 말로는 못하겠구나, 당신이 따로 없고 내가 따로 없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의 깊고 크나큰 맛을
무엇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니 어떻게 그 은혜를 갚으리까.' 하고 느낀다.
'단 하나 그 길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받아서 그 백분의 일, 일천분의 일이라도 갚는, 아니 갚는다기보다는
내 몸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영원히 이 길을 걸어리다.' 하는 생각, 이것뿐이다."
84. 한 신도가 여쭈었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시겠다 하시고 한편으로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 하셨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인과도 붙을 자리가 없다고 했거늘 어찌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붙겠는가. 그 말씀은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스스로 구하라는 말씀이다. 부처님도 또한 길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85. 한 제자가 인과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인공으로부터 열쇠 꾸러미를 받는게 해인이자 인가라,
그때에 비로소 이 곳간, 저 곳간을 마음대로 열고 부릴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주권을 가진 것이니 예를 들어 말한다면
아래로 명령하고 위로 상응할 수 있고 각을 이룬 사람끼리 한자리에서 회의를 가질 수 있느니라.
그 자리에는 늙고 젊고가 없고, 애 어른이 없이 돌아간다."
86. 한 제자가 부동심에 대해가르침 주시기를 청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설사 부동하다 하는 것까지도 '부동하다' 해도
아니되고 '부동치 않다' 해도 아니된다. 항상 나투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에 부동치 않는 게 있다면 부동한 게 있고
부동한 게 있다면 부동치 않는 게 있게 되느니 이 또한 둘로 봄이라, 모든 게 항시 나투며 돌아가기에 가만 있으면 부처요
생각 냈다 하면 법신이요 화신이라 하지 않는가."
87.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장갑이 더러워지면 벗어 버리듯이 이 모습도 한찰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러므로 늙어 허망하다 할
것도, 젊어서 뽐낼 것도 없다. 오로지 꾸준히 닦아 나가야 한다. 내가 온 자리를 알아야 갈 자리도 알수 있게 되니 이 도리를
알아 차원이 높아지면 몸이 없어진다 해도 세상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자재권자가 될 수 있다."
88. 한 신도가 마음을 낸다는 의미로 용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상 생활이 그대로 용이요
천만 가지로 새록새록 변하여 돌아가는 게 그대로 용인데 그것을 어떻게 용이다, 아니다 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리 많은 벌레가 제 다리 움직이는 걸 의식한다면 발 하나 움쩍 하지 못할 것이니 '용이다' 생각하면 이미 걸린 것이다.
나를 버려야 용이 아닌 용을 할 수 있다."
89.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입력해 놓고 단추 한 번 누르면 자료가 백방으로 전달되기도 하듯이
한생각이 한 번 빙그르르 돌면 전체가 같이 돌아간다. 세 번 죽고 나면 그 도리가 생기니 그대로 하면 그뿐이다."
말씀을 듣고 한 신도가 여쭈었다. "그것은 서산 대사께서 붓대를 던진 도리와 같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붓을 붓으로 보면 안된다. 그것은 만법을 굴리는 주장자라, 그 솔이 수만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모두가 한마음에서
벌어지는 것을 표현함이다.
90. 한 신도가 어느 스님으로부터 전생의 죄가 무거우니 지장경을 오백독 하라는 말을 듣고 고민 끝에 스님께 여쭈었다.
"생업에 쫓겨 하루 두 번 보기도 어려운데 언제 오백 독을 하오리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장경이라는 글자에 신통력이
있는 게 아니니 그 속에 들어 있는 원리를 파악하여 그것을 마음에 새겨 수행하면 지장보살이 그대와 함께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경을 욀 뿐이라면 천독을 하든 만독을 하든 닦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한다."
91. 한 여신도가 스님께 시뢰기를 "제 남편이 보신에 좋다고 뱀탕을 즐겨하는데 그 업보를 이루 다 어찌할지 걱정이옵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억만 마리를 잡아먹었다 하더라도 업보가 되지 않으니 둘 아닌 도리만 알면 그러하다.
고로 남편을 원망하고, 그 업보에 휘감겨서 가환이 든다고 생각지 말고 남편의 몸이 건강치 못해 부처님의 공덕으로
그 짐승들이 바쳐졌다고 생각하라. 우리도 부처님께 마음을 바치게 되어 있거늘, 서로 둘이 아닌 까닭이니라." 그러자
그 신도는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갔는데 며칠 후 다시 찾아와서는 "제 남편이 이제는 안 먹겠다고 스스로 말하더라." 고 하였다.
92. 시장에서 닭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 온던 한 사람이 하루는 공부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동안의 무수한 살생 때문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직업상 그런 일을 하더라도 진심으로부터 살생이 아니게끔 하는 도리도 있느니라.
따지고 보면 죽는 쪽도 불쌍하고 죽이는 쪽도 불쌍한데 어느 한 쪽만을 지탄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양쪽을 다 건져야 한다.
만약에 내가 그일을 죄라고 자리 매김 한다면 말이 법이 되어 평생을 무거운 짐에 눌려 지내야 하거늘 부처님의 자비스런
가르침이 어찌 그러할 수 있겠느냐."
93. 스님께서는 누가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경우라도 '업장이 두터워 그렇다.' 는 말씀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셨다.
하루는 어느 분이 하소연을 하는 가운데 웬 스님으로부터 '업이 무거워 그렇노라.' 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들의 하소연을 듣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예 가슴이 텅 빈
듯한데 누가 그대들을 보고 업이 무겁다고 하는가. 자식을 위해서 오는 사람, 육신이 병들어서 오는 사람,
가환에 짓눌려서 오는 사람---, 그렇게 불쌍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너는 업보가 많아서 그렇다' 고 누가 말하는가.
왜 그대들에게 업보라는 무거운 짐을 덧붙여 주려는가. 오죽 답답하면 부처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잡으려 하겠는가. 그런 이들에게 짐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잘못된 일이니 나는 한생각 되돌리면 업도 붙을 자리가 없다고
말할 뿐이다."
94. 한 신도가 신통력의 정체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신통력도 도가 아니지만 여지껏 수억겁을 거쳐 내려오면서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이 해 내려온 이치를 알고 보니까 모든 정보가 들통 난 것이라, 알기 때문에 둘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중생의 종문서만 아니라 지구의 족보, 지수화풍의 족보까지 밝혀지니 타심통이다, 숙명통이다 하는 말을 하게 될 뿐이다."
95. 스님께서 순회 포교차 미국을 다녀오신 후 어느 날 대중 법회에 나오셔서 말씀하셨다.
"진작에 안방에 앉아서 전 세계를 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오신통이 그대로 생활 가운데 실현이 되고 있다.
부처님 말씀대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고 모습 없이 화해서 천백억 화신으로 들고 나는 모습이 그러하다.
따라서 이 시대의 불법 공부는 마땅히 이론이 아닌 생활 속에서의 행으로 되어야 한다.
만법을 응용할 수 있고, 우리가 만법을 바로바로 찍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공위성을 띄워서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 인공위성을 띄우는 그것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96. 한 신도가 보시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건만 자신을 위함이니
그럼으로써 마음이 편할 뿐 아니라 모든 마음이 한데 모여 시공 없이 돌아가니 어찌 너, 나가 따로 있겠는가."
97. 비교적 넉넉한 신도가 약간의 보시금을 내어 놓으면서 스님께 조상 천도를 부탁 드리자 스님께서 이를 물리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리 방생에 인색한가. 모든 이가 당신 네들의 자식이고 형제이고 부모인 줄 모르는가.
억겁을 거쳐 오면서 서로 자식 노릇, 부모 노릇, 형제 노릇을 수없이 했거늘, 내 형제 자매 부모를 위한 일에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으로 방생이 되는가." 하셨다. 스님께서 그와 유사한 경우에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간법에도 물건을 살 때 돈을 주고 사는 게 도리이거늘 어찌 방생에 인색하랴.
닥아오는 문제를 어떻게 제 손으로 다 해결 할 수 있다고 믿는가. 마음을 너그럽게 쓰야 하느니라."
98. 한 신도가 살림 형편이 어려워 평시에 시주를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곳을 여느 절처럼 생각하지 말고 공부하는 강당으로 알라. 이 선원을 운영하려면 오고 가는 차비도 들고 먹고 자는
비용도 있어야 하겠으나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할 뿐이니 시주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진심으로써 공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게는 그렇게 좋은 도반일 수가 없다." 그런 다음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뜨겁고 성서러운 뜻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날 지경인데 그 광대 무변한 뜻을 저잣거리에 물건 팔듯 판다 하면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것인즉, 살고 먹고 입는 데 쓸 요량으로 절을 운영해서는 천만번 부당한 일이 되느니라."
99. 한 신도가 부처님 전에 부지런히 공양을 올리면서 복짓기를 염원하였다. 그것을 보고 한 제자가 기복 행위라고 탓을 하였더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사 기복이라 할지라도 그기에는 부처님을 향하는 믿음과 감사의 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어찌
탓하겠느냐. 비록 겉모습에 매여 그렇게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그것을 공덕행으로 감싸서 무심으로 안으면 되느니,
양쪽이 까막눈이면 그냥 겉돌 뿐이다."
100. 어느 신도가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문제로 고심하던 중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제사를 모실 때는 벽에다가 절하지 말고 너 자신 속에 위패를 모셔 놓았다
생각하고 절을 하라는 말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니 제사를 모시는 일뿐만 아니라 매사가 그러하다.
왜냐하면 삼계가 모두 내 마음의 뿌리에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밥을 먹으면 삼라 세계의 모든 생명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된다.
거기에는 나를 아끼는 좁은 중생으로서의 나의 의미는 없다. 상하 좌우가 툭 틔어 허공 같은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이면 모든 행위가 다 보살 행이요 공덕이다."
101. 한 신도가 여쭙기를 "사람이 죽으면 무서운 사자가 온다든가 천사가 와서 마지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떠합니가?"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컴퓨터에 다 입력이 되어 있으니 착하게 살았으면 착한 보살이 올 것이고 악마처럼 살았다면 마구니가
잡아갈 것이다. 그게 다 자기 자신의 보살, 마구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신도가 다시 여쭈었다. "사후에 까치 집이 적멸보궁으로
보여 그리로 들기도 한다는데 아무데도 안 들어갈 도리는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주인공에 놓아라.
믿음이 깊어지면 천만금을 가지고 와서 좋은 것이라 해도 욕심이 일지 않는다. 살고 죽는 것은 전부 주인공에 일임하라.
적멸보궁이 거기에 있다."
102. 한 신도가 여쭈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덜 배타적이고 포용력이 큼으로서 다른 종교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생각이 다를 뿐이지 어찌 진리가 둘이겠는가. 왜들 이름을 가지고 싸우는지---.
같은 불교 안에서도 실은 사람마다 다른 식으로 믿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다른 종교를 믿는 셈이라,
서로 이름이 다른 종교라도 진리가 하나인 줄 알면 같은 종교를 믿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불교가 옳다,
기독교가 옳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내가 맞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겸손해질 터이니 너와 나, 나와 세상,
나와 우주, 나와 삼라 만상이 더불어 좋은 게 도이다.
그 도에서는 네 종교 내 종교 따위의 이야기는 한 점 먼지와도 같다고 하겠다."
103. 스님께서 미국에 가셨을 때 오하이오 주립 대학 석-박사 과정의 학생 80여 명을 위해 법문을 설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한 기독교 신자가 스님께 부활절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초 초마다 부활절이다.
여러분이 없다면 부활절도 없을 것이나 여러분이 한생각 한생각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초 초마다 그대로 부활절인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 초 일 초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104. 한 카톨릭 신자가 스님께 종교의 차이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물건을 사려는데 어디 가게가 하나 둘이고,
상표가 한둘이더냐. 불은 영원한 생명이요, 교는 생활 그 자체이니 카톨릭교, 기독교, 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105. 한 노부인이 스님께 찾아와서 며느리의 병에 대해 하소연하면서 며느리가 기독교 신자라 함께 뵈려 오지 못한 것을
송구스러워했다. 스님께서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가셔서 이렇게 말해 주세요. 네 주가 네 마음 안에 있으니 마음 안에 대고
'심주여!' 하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훗날 노부인이 다시 찾아와 말씀대로 일러주었더니 며느리 말이 '참 편리해서 좋다.'
하더라고 아뢰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 안으로 심주를 부르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도 버리지 않으면서
한마음 닦는 도리도 되지 않겠는가."
106. 어느 스님이 '예수, 공자, 석가모니가 모두 큰 도둑' 이라고 한 말을 듣고 한 신도가 스님께 의견을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분들을 크다고 전제한 말인데 도둑이라 하기 이전에 자기 능력 없어서
도둑질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내 몸뚱이 하나 실오라기도 걸치지 말고 다 내놓아 나 아닌 게 없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된다. 둘 아닌 도리를 알아도 둘 아니게 나툴 줄 모른다면 설익은 도둑에 그치고 만다."
107. 신도 중에는 말법 시대, 종말론, 인류의 장래 따위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 신도가 마침 그점에 대해 여쭙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의 이법은 자재한 것이므로 예정된 미래란 없다. 그리고
그 자재법은 중생 누구에게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 이법을 성취한 사람은 이 세계의 흐름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천 세계, 말법 세계도 다 예정된 바가 없다. 예언이란 것은 작은 바가지 안에서 계산하고 예측한 것에 불과하다.
그 바가지 밖에서 그 바가지를 통째로 움직이는 이법을 모르는 소치이다. 또한 설사 말세가 닥친다 해도 하등 염려할 바가 없으니
끝 세상이 곧 처음 세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세를 부르는 것도 나요,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나이므로
오직 나의 근본 자체를 알면 그 모든 의문과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108. 스님께서 어느 때 한 신도의 청을 받아 계룡산 쪽으로 나들이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 신도가 말하길,
"계룡산에는 산신이 셋이 있다 하더라." 고 하엿다. 스님께서 이를 들어시고는 말씀하셨다. "둘로 보지 않는다면
산신과 둘이 아니요, 나무를 보면 목신과 둘이 아니요, 물을 보면 수신과 둘이 아니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공부할 때 간혹 '나는 아무산 산신이다, 나는 무슨 보살이다, 대사다.'하고 별의별 게 다 성화를 부리기도 하지만
그게 다 자기로부터 나온다는 걸 모르고 속으니 탈인 것이다. 그러할 때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나오는 대로 삼켜 버렸다.
그렇다, 아니다 할 것도 없이 '어 그래?' 하면서 '이걸로도 나오고 저걸로도 나오는 구나.'하고는 그대로 다 내 안에다 되돌려
턱 맡겼더니 그대로 다 없어지는지라, 모두가 둘이 아니기에 또 원통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 또한 나를 죽이는 공부이니 스스로 항복받고 스스로 항복하고 그러는 것이다."
109. 한 무녀가 찾아와 산신각을 정리할 마음으로 상의 말씀을 여쭈었다. 스님께서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불안한 것도 다 당신의 마음 작용일 뿐이다. 걱정하지 말고 모두 태워 버려도 아무 일 없을 테니 태울 건 태우고 담을 건 담고,
거져다 놓은 돈이 있으면 누구를 주려면 주고 쓰려면 쓰고 마음대로 하라. 마음에서 산신 상과 네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 형상을 도끼로 부셔 버려도 된다."
110. 한 신도가 가환을 막아 준다는 부적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세상 살면서 걸리는 게 그리 많아서야 어찌 살려는가? 그대로 무먹 불쑥 내지르고 걸어가라.
나는 오늘 죽는다 내일 죽는다 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낙엽 지듯 떨어질 것이고---,
또 낙엽 진다고 나무가 죽는 게 아니고 봄이 오면 새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그리할 터인데 무슨 팔자 운명을 따지는가.
그런 것이 붙을 자리가 없느니 생각을 하면 붙고, 한생각 돌리면 붙질 않는다."
111. 한 신도가 집을 새로 지어 이사를 가려는데 삼재가 들어서 안된다는 말을 듣고는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재 때문에 아니된다고? 부처님 법이 사람에게 걸리적 거린다는 것인가?
세상 법은 사람의 발을 묶어 불편스러울 때가 많지만 부처님 법은 그 반대이니 무엇이 막는다는 말인가.
내가 선 땅이 곧 법당이요, 내가 마음에 들어서 집 짓는 그 곳이 바로 명당이다.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그 곳에 갇혀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삼재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그래서 나는 법당에다 수많은 부처님,
보살님, 칠성, 산신, 독성 따위를 모셔 두지 않는 것이다. 그 많은 신들이 다 한마음에서 나투지 않는 경우란 없다.
문수 따로 보현 따로, 관음 따로, 지장 따로---. 그래 가지고서는 참 불법을 알지 못한다.
생각 한 번 옳고 바르게 세우면 그 순간 스스로 지은 감옥이 거미줄 녹듯 녹아 버린다."
그 신도는 스님 말씀에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112. 한 신도가 여쭈었다. "삼재가 들어서 그런지 가환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면할 길은 없는지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재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해 주었던지, 그 사람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했을 터이고 너도 모르니까 곧이 듣고 고민하지만
부처님 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삼재가 들어 나쁘다는 그 생각 때문에 나쁠 뿐이다.
사람의 한생각이란 매우 중요한지라 한생각 돌리면 제불 보살이 다 내 한마음에 있으니 내가 이사가는 날이 가장 좋은 날이다.
사람의 마음이 걸려서 걸리는 것이지 진리는 걸림이 없다."
113.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몸 하나 던지면 생사에 구애받지 않고, 계율이 붙지 않고, 욕심이니 착이니 망상이니 하는 게
따를 여지가 없고, 좋고 나쁜 게 없이 남이 웃으면 그대로 여여하게 웃고 남이 울면 또 여여하게 울고, 그렇게 자연스레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내 몸 하나 살리려 한다면 온갖 것이 다 붙어서 여여하지 못하게 된다."
114. 살림 형편이 넉넉한 한 신도가 자녀의 입시 합격 발원을 위해 백일 동안 새벽 기도를 드릴 생각으로 스님께 상의 말씀을
드렸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댁의 가정부가 보살이요, 운전 기사가 큰 부처인 줄 모르는가?
부처님이나 보살님은 깊은 산속의 오래된 사찰이나 높다란 법당에만 계신 줄로 알면 안된다.
불상은 예경의 상징물일 뿐이니 그 불상을 예경할 때에도 불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속으로 관해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 상징물인 불상만 위하고 정작 살아 있는 이웃, 살아 있는 불보살을 섬길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스님께서는 새벽 기도 때문에 고역을 치루게 될 가정부, 운전기사의 마음을 미리 살피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115. 선원의 한 법사가 담선 중에 "다음 생에는 출가를 하겠노라." 고 말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생을 기다린다는 것도,
지나간 것도 없느니라. 지금 현실도 없으니 과거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전생을 볼 줄 안다면 속인도 중이 되었고 중도
속인이 되었고, 비구가 비구니도 되고 비구니가 비구도 되니 도무지 내세울 게 없는 법이다.
지금 여기 앉아서 끝간데 없는 도리를 알아야 부처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
116. 한 청년 신도가 담선 중에 말하기를, "한 여자에게 구속되는 게 싫어 결혼 하지 않겠노라." 고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예를 들어 볏집 단을 세워 놓았는데 볏집 하나하나는 홀로 섰으면서도 같이 선
것이니 그게 삶의 섭리다. 또 이 도리에서 보면 내 아내만이 아내가 아닌 것이니 물질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117.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 지구에 본시 큰 사람이 있었더라면 큰 집이 되었을 텐데 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큰 집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곳에 큰 사람이 있다 해도 믿지 않고, 큰 사람과 더불어 모두가 하나라고 하여도 믿지를 않는다.
일을 할 때 혼자 하는 일을 여럿이 같이 한다면 수월할 텐데 '나' 라고 고집하니 같은 운력을 해 주려고 해도 해 줄 수 없고,
운력을 해 준다는 것이 고작 유령, 악령, 유전성, 세균성 따위이다. 주장자가 없는 빈 집인 탓이다. 그런 까닭으로 고통이 와도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받는다.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이런 말도 들어둬야
나중에 발로가 되었을 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번 봐 보아라! 눈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남들에게 달린 것과
똑같이 달고도 왜 못하는가? 수없이 많은 몸으로, 아니 사는 곳 없이, 내 발 닿지 않는 곳이 없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왜 그렇게
못하는가? 먹고 사는 것이 그렇게 급한가? 얼마나 살 것 같고, 얼마 동안이나 편안하고, 얼마 동안이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숱하게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진실한 사랑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들 살아 있는
자기 부처는 찾지 않고 죽은 불을 스승으로 삼고서 찾고 있으니 이런 기막힐 노릇이 어디 있는가? 살아 있는 내 부처를 알아야
죽은 불(佛)도 나와 둘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118.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에게 빌기나 하고, 이 부처 다르고 저 부처 다르다 하고, 또 부적이나
여기저기 붙이고---. 이게 귀신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꼭 귀신이라야 귀신인가? 귀신 행을 하면 귀신이다. 그러면 살아서
귀신인데 죽어서는 귀신이 아닌가? 오늘 귀신 행을 하면 꿈에서도 똑같이 하고 다니는 것이고 그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과 같이 꿈을 보면 생시에 자기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시에 대상을 둘로 보지 않고 불성을
터득한다면 꿈에서도 아주 역력하고 똑똑한 것이다. 그러한데 우리가 항상 기복으로만 해서야 되겠는가? 기복으로 가르치고,
기복으로 배우고---.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불국토를 이루는가? 불국정토를 입으로 천만법 부른다고 극락정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닦지 않고는 아니된다. 내가 나를 한번 도리켜보고, 내가 공했다는 그 도리를 알면 공한 도리에서 아주 역력하게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119. 한 신도가 염화미소에 대해 여줍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전체가 포괄된 하나, 그 평상심에서 나툼이 있고 열반이 있고
자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니 가섭존자의 미소에 금빛 열애가 익어 한마음이 되었음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학인들은 말귀에
걸려 빗자루를 쥐나마나, 쓰레기를 쓰나마나가 되어서는 아니 되느니 안으로 돌려 그 의미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부처님께서 이러저러하셨고 말씀이 이러저러했노라고만 하면 말씀은 말씀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떨어져
그 가르침이 왜곡 되고 만다."
120. 한 제자가 스님께 말씀드렸다. "영상 회상에서 가섭존자가 웃은 것을 가리켜 '평지풍파를 일으켰으니 두들겨 패서 개에게나
던져 주리라.' 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괴팍스런 트집이다.
꽃을 들었으면 마음에 까닭이 있어서 들었고, 웃었으면 까닭이 있어서 웃으신 것이라 까닭이 있기에 진리가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공생-공심-공용으로 돌아가는 것도 까닭이 있어 돌아가는 것이 거늘 까닭이 없다면 장롱 속에 넣어 놓고 있는 셈이니
성사 될 것이 없게 된다. 가섭존자가 웃은 것을 탓한다면 석존이 꽃을 든 것은 왜 탓하지 않는가.
팔만 사천의 광장설이 평지풍파라 두들겨 패겠다 하는데 팰 것이 어디 있어 두들겨 팬다는 말인가.
그래도 선지식들이 나서서 그렇게라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계발하지도 못했을 것이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121. 어느 신도가 담선 중에 이야기하기를 "예전에 진묵 대사께서 솥 안의 물고기를 다 잡아 먹고 냇가로 가 배설하니
그 고기가 모두 살아 돌아가더라." 고 했다. 스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방편이라,
고기를 수억 마리 먹었어도 먹은 사이가 없고 뱉어도 뱉은 사이가 없다는 뜻이니라. 그러니까 언제나 위와 아래를 함께
거머쥐고서 쓰면 고기 한 점을 먹었어도 소 한 마리를 먹은 게 되기도 하고 소 한 마리를 먹어서도 고기 한 점 먹은 사이가
없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왕 사람이 먹었으면 사람으로 내놓아야지 왜 고기로 내놓는가?"
122. 어느 스님이 법당에 올라가 삼천배를 해야만 친견을 허락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공부하는 데 그만한 인내와 희생도 필요하기에 방편을 쓴 것이다."
123. 한 신도가 여쭙기를 "삼세심이 불가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은 붙을 데도 없는 것이라 그대로 여여함이니 내 배고프면 밥 먹는 게 불가득이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니라.
저녁에 배고파 먹는다 하더라도 점심이 될 수 있고 새벽에 먹는다 하더라도 배고파 먹으면 점심이지
점심이 따로 저녁 따로이겠느냐."
124. 어느 때 교계에서 수행 방법을 놓고 '돈오 돈수냐, 돈오 점수냐?' 로 설왕설래 중이라는 말을 들어시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핏물, 구정물이 한데 모여 도량으로 흘러내리는데 핏물이다 구정물이다 가릴게 없으니 돈오와 점수가 거기 어디 붙겠는가.
오직 젖을 뿐이니 그것은 방편이라, 말할 바도 못 된다. 높고 낮음이 다 상대적이어서 평등이요 자비일 뿐인데 사람들이
세상살이 중에 보고 들은 것으로 관념을 지어 거기 박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다." 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돈오란 공한 자리에 탁! 한 점 찍는 것이고 점수란 지혜를 닦아 마음과 우주가 합일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거기에 돈오다,
점수다 하는 무슨 광장설이 따르겠는가. 무조건 끌고 물로 들어가듯, 불법을 믿는다면 무조건 믿고 따라서 한 점을 깨달아야
발견할 수 있다." 스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탑의 기단을 쌓아 올리는 게 점수라면 탑 정상에 들어 올려 놓는 게 돈오다."
125. 한 신도가 여쭈었다. "만공, 혜월 두 스님께서 공양을 받을 즈음에 혜월 스님이 '할!' 하셨고 발우를 걷을 즈음에 만공 스님이
또 '할!' 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대중간에 쟁론이 끊이지 않자 한 스님이 입을 놀려 말하고 싶지 않으나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
주지 않을 수 없노라.' 하시며 또 '할!' 하셨습니다. 대중은 더욱 어리벙벙해졌습니다." 스님께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지금 그렇게 말한 것이 그대로 '할!' 이니라. 그것은 말로 하면 잘못 돌아 가기에 '할!' 한 것이니 말하는 입을 떠나 말을 한 것이다.
그 뜻은 판치생모나 간시궐과 같으니 눈깜짝할사이에 알지 못하면 찾을 길이 막연하다."
126. 한 신도가 스님께 '왜 역대 조사들처럼 방, 할을 쓰시지 않았는지'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렇게 어렵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시대는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인데 도가 그렇게
어렵게 생각되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자기 자신이 금방 화해서 나투고 돌아가니 공이면서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라,
믿음 속에 일체를 다 놓고 가다 보면 한두 가지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아' 이렇구나.' 하며 확신을 가게끔 하는 것이다.
이치를 알려거든 바로 지금 자기가 하고 돌아가는 그 자리에서 알라 하는 것이다."
127. 선원의 한 법사가 어느 때 '남전 스님이 고양이 목을벤 도리'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말 한마디 땅에 떨어뜨릴 수 없으니까 베었지만 무명만 쳤지 고양이를 죽인 사이가 없다.
조주 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인 것은 일체 유-무생이 공했기에 고양이마저 나온 사이도 들어간 사이도 없다는 뜻이니라.
그렇게 발은 하늘로, 하늘은 발이 되니 뿌리 없는 나무는 온 누리를 누빈 것이다. 입도 벙긋 안 하고 고양이를 살린 것이다."
128. 한 제자가 부처님의 삼처전심 가운데 곽시쌍부를 예로 들면서 부활의 이치와 다르지 안다는 말을 하자,
스님께서 들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발을 내 보이신 것은 무한의 길, 영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니라.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 안다면그것은 무한의 길을 걷고 있음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소견이다."
129. 어느 때 한 학인이 찾아와 스님께 여쭙기를,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의 소식은 어떤 것입니까?" 하였다.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안으셨다. 다만 옆에 놓인 음료수 한 병을 꺼내 주시며 들기를 권하실 뿐이었다.
그 학인은 말씀이 없자 그대로 물러갔다. 스님께서 좌중을 둘러보시며, "갈라지기 이전이 바로 그 병 안에 있는데 뚜껑을 따고
마실 줄 모르면서 나를 보고 따 달라 하니 그것을 어떻게 말로 하느냐?" 하신 뒤 한 법사에게 "그대에게 물었다면 뭐라 하겠는가?"
하셨다. 그 법사가 대답하기를, "다만 회론일 뿐입니다." 하였다.
130. 한 신도가 담선 중에 역대 성인들을 보살의 10지에 맞춰 누구는 5지, 누구는 7지, 또는 8지에 해당된다는 글을 보았노라고
말하자 스님께서 들어시고는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의 말을 할 것이고, 중년은 중년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말할 것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옳고 어른은 어른대로 옳고, 노인은 노인대로 다 옳은 말이니 7지다 8지다 하는 말이 붙지 않는다.
가령 공자는 유위법을 말해서 그러다 하지만 공자는 화해서 노자가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으니 그분들이 남기고 간 것을
따질 게 아니라 내가 이 도리를 알면 그뿐이다."
131. 한 신도가 돌장승에 소원을 비는 사례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은 그냥 돌로서 가만히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거기에다 대고 너도 나도 빌고 호소하니까 그 비는 마음들이 뭉쳐 집단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돌에다 착을 붙여 마음을 모아 놓았으니 빼지도 끼지도 못하게 된 격이다.
그런데 그 마을의 차원이 낮다 보니까 무엇인가 가져다 놓지 않으면 오히려 불미스런 일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미신을 만들어 놓았기에 두고두고 미신 짓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미신을 거부하면 미신이 없는 것이다."
132. 한 신도가 여쭈었다. "예전에 선사들은 열반하실 적에 앉아서도 죽고, 서서도 죽고, 하다 못해 물구나무 서서도 죽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놓고 잠을 잘 적에 어떤 이는 옷을 차곡차곡 잘
접어 놓는가 하면 어떤 이는 벗어서 홱 던지기도 한다. 그런 것이다."
133. 한 신도가 팔자 운명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 마음에 따라 팔자 운명이 다가 오는 것이니 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러한 것이 붙지 않느니라. 어디에다 그걸 떼고 붙이겠는가. 붙을 자리가 있다면 나는 벌써 옷을 벗었을
것인즉, 수많은 영가들과 한데 휩쓸리고 있는데 오히려 좋기만 하니라."
134. 한 학인이 주역의 팔괘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어시고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한꺼번에 돌아가는데
어찌 팔방으로 갈라놓는가. 이름은 각각일지언정 셋으로만 갈라놓아도 머리 따로, 발 따로가 되니 사람 행세를 어찌하려는가.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있고 국민이 있듯이 셋이 한번에 돌아가야 원만하지 따로 놀아서는 인된다.
135. 마음 공부에 열중인 신도들 가운데 스님을 송신기, 자신을 수신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체널을 맞춰 놓으면 전파가 흘러 소리를 전하듯 잠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설법을 듣는 체험을 맛보게 된다고 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 법계에 설법이 가득해도 통화중이면 벨이 울리지 않는 법이니라."
136. 선원과 잠시 인연 맺게 된 어느 법사가 자신도 이제 공부가 되었으니 법좌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스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법좌는 누가 만들어서 차려 주는 게 아니다. 또 누가 주고 말고 하는 것도 아니다.
공부가 되었다면 형색으로만 보지는 않으실 텐데도 그런 말을 하는가. 법좌에 오를 분이라면 저절로 법좌에 오르게 된다.
누가 오르라 해서도, 자기가 오르려 해서도 아니다. 높다란 자리에서 높다란 이야기로 존경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아만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 그 공부는 방향이 빗나간다. 마음 공부를 구굴 위해서 했던가? 자기에게 좋은 것이니 누가 알아 주든
알아주지 않든, 법좌에 오르든 오르지 않든 마음을 쓰지 말라." 그 법사는 아무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법사는 선원에 발길을 끊고 말았다.
137. 어느 때 종단측에서 성도재일을 앞둔 일주일의 경전 주간 동안의 정진 행사 계획을 작성 통보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한 제자가 스님께 통보할 내용을 여쭙자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원의 신도들은 항상 등을 켜고 항상 정진하고 있기에
성도일이라서 하고 아니라서 안 하고 하는 예가 없노라고 통지하라." 하셨다.
138. 사부 대중이 두루 참여하는 교계의 공식 행사에서 몇몇 신도들이 선원의 입지에 대해 부심하는 것을 보시고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선원의 가족은 승려만도 아니고 신도만도 아니니라. 초목과 금수, 미물까지도 오래 전부터 우리 선원의
가족이거늘 어찌 그만한 일로 마음을 썩이는가. 억겁 전 이래로 모두 여러분들의 벗이었고, 스승이었고, 육친이었으며
억겁 미래까지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139.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유마힐 거사가 병을 앓고 있는데 문수 보살이 병문안을 와서,
'어디가 그리 편찮으십니까?' 하고물었더니, 유마힐 거사는 '중생들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 중생들이 나아야 나도 낙는다.'
고 대답했다. 만약 그 자리에 여러분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만 그 유마힐 거사의 병 뿌리를 빼줄 수 있겠는가 말해 보아라.
그래도 모르겠다면 어떻게 해야 말 그대로 유마힐 거사를 병 문 안에서 병 문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 말해 보아라.
그래도 모른다면 자기한테 물어 볼 일이다. 자기는 작년에도 살았었고 또 유마힐 거사가 살아 있을 때에도, 거기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니 오직 자기한테 물어 볼지어다." 하셨다.
140. 어느 때 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으셨다. "소동파가 승허 선사에게 법을 묻자 승허 선사께서 할! 하셨다. 그리고는 되묻기를 이
'할' 이 몇 근이나 되는고? 하였다. 소동파는 그만 말문이 막혀 물러났는데 하산 길에 폭포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우쳐 삼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대를 보고 한마디 일러 보라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한 신도가 아뢰기를, "저울이 있어 무게가 있습니까?
무게가 있어 저울이 있습니까? 두두물물이 법이고, 폭포도 법이고 소동파도 법이니 소동파의 눈이 이제야 밝았습니다."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저울이 없으니 달 것도 없으라/ 폭포수 쾅쾅 흘러/ 깊숙이 스며 흘러 도누나/ 봄이 오니 봄 빛은 밝아/ 온 누리를 비추누나."
141. 스님께서 또 어느 때 대중에게 물으셨다. "옛날에 어느 선사께서 아침 죽 공양을 들고 제자들과 함께 들판으로 나가셨다.
'내가 오늘은 배고프지 않고 배부른 도리를 가르쳐 주리라.' 하시며 크다란 체에다 죽을 솥째로 들어부으라고 했다. 그렇게
죄다 쏟아 버리고는 '이제 너희들에게 배고프지 않고 배부른 도리를 가르쳐 주었노라.' 하시며 들어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제자들은 '큰스님이 이제 노망하셨다.' 고 불평이었는데 그중 한 제자가 문득 깨닫고는 '그 죽물은 자비의 방울방울이요
그 방울들은 온 생명을 다 배불리 먹여 주셨네. 내 어찌 배고프다 하랴. 본래 자기가 배고프지 않은 것을 모르고 이렇게 울었구나.
내 울음 소리는 울음 소리가 아니라 온 누리 생명의 그 샛별 같은 비춤일세.' 하였다. 그 스님께서 죽을 쏱아 버린 연유를 아는가?"
한 신도가 이렇게 아뢰었다. "본래로 체와 죽이 둘이 아니니 이미 체와 죽이 서로 다투지 않네. 죽 아닌 죽 먹고 먹어도 줄지
않으니, 아! 귀종 스님 참으로 자비하시어, 여영토록 내집 가난 면케 하셨네. 산은 그냥 푸르고 물도 그냥 흐르니 온천지간에
향기 가득하여라."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길다. 밥 먹었으면 식기를 닦을 줄 알아야 하느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본래로 체와 죽이 둘이 아니어라/ 서로 먹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았네/ 온 천하에 물이 흐르고/ 새 울고 꽃이 피어 스스로 먹고 있네
/ 아! 본래 배고프지 않은 것을/ 배 한번 두드리자 탕! 탕! 탕!"
142. 스님께서 어느 때 대중에게 물으셨다. "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사방 팔방이 불길에 둘러싸여 있다.
어떻게 하면 새끼와 함께 빠져 나올 수 있겠느냐?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더니 이튼날 한 신도가 백지를 봉투에 넣어
스님께 드렸다. 스님께서는 이를 보시고는 크게 웃으시면서 "그렇지, 그렇게 백지를 볼 줄 알아야지." 하셨다.
143.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물으셨다. "옛날 어느 선지식이 수좌들을 데리고 강가에 앉아 쉬다가 짚신 한 짝을 강물에 빠뜨렸다.
그리고는 그 수좌 보고 당장 짚신 한 짝을 가져오라 하였는데 여러분은 그 깊은 강물의 짚신을 어떻게 가져오겠는가?"
144. 스님께서 한 신도의 공부가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마른 땅에서 싹을 틔우느라 애를 쓰다가 진통 끝에
쑥쑥 삐어져 나오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절로 환희심이 인다. 출가해서 몇십 년이 지나도록 싹 틔우지 못하는 중들도 많은데
살림살이하면서라니 참으로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냐.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싱긋이 웃고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145. 한 제자가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눈을 번쩍 뜨고 보면 하루하루가 새로우니라.
귀가 번쩍 뜨이고 보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헛되어 보이느니라. 마음을 모으고 있노라면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마음이 나툴 때에는 우주의 끝이라 해도 이웃집 보다 더 가갑다 할 수 있느니라.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도 맑은 날의 아침 공기처럼 새로우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처님의 상호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또 시집살이를 하는 도리도 있느니라."
146. 스님께서 어느 때 법회를 마치시며 대중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고요한 달밤 아래 어부들은 어디갔노. 고기들은 잠들어 있구나."
147.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참 대장부가 보고 싶노라.
이 넓고 넓은 천지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온갖 것 다 담을 수 있는 참 대장부가 보고 싶노라."
148. 한 신도가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바람 없는데
물결 이르킴과 같다 하였는데 가령 스님께서 오심도 바람 없는데 물결 일으킴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람을 일으킴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는 말이겠으니 파도에 비유한다면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야만 물이 순환되어
고기 떼가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말은 정에 들게 이끌어 주는 것인데 주먹을 쥐었다가 펼 줄 모르면 병신이요
폈다가 쥘 줄 몰라도 병신이다. 사람은 일으킴과 가라앉힘이 동시에 작용해야만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니
파도 일으킴이 곧 선근을 심어 주는 일이다.
149.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이 도량에는 공부 하려는 마음들이 운집해 있고 부처님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니
마음으로 직결되면 마치 충전이 되듯이 통하게 된다. 누가 무슨 말을 해 주고 안 해 주고를 떠나서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며,
하나하나 체험해 가다 보면 길을 가다가도 한생각이 그대로 법이 되기도 한다."
150.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는 것도 없이도 만법을 자재하는 도리는 불법밖에 없을 것이니 따로이 내세울게 없으면서도
찰나에 우주를 왕래하고 모든 생명과 함께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우주를 찰나에 보고도 본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거늘
신통 묘용에 붙잡혀서는 아니되느니 공부하는 과정에서 신통에 집착하면 부처님 등지기가 십상이다."
151.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천 대천 세계를 거울 보듯이, 손가락 보듯이 다 볼 수 있는 반면에 서로 둘 아니게 나툴 수 있으니
나 없는 고장이 없고, 손 없는 손이 어디고 아니 닿는데가 없고, 평발이 되어서 아니 딛는데가 없다."
152. 스님께서 요청을 받고 여러 차례 미국 각지를 도시며 포교 활동을 하셨는데 귀국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은 앞으로 십 년을 내다보고 연구에 열중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주도권을 쥐고 나갈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러분들도 더욱 정진하여 이후 세대들이 어떻게 세상을 끌고 나갈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앞으로 십 년 간 놓고 본다고 해도 우리가 이 도리를 알아 앉아서 모든 것이 법계로 통신이
되며 행을 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 도리에서 보면 법계 전체로 통하는데 아무런 이유가 붙질 않는 것이니 그대로 이것이다
하면 그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153.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외국인 가운데도 마음속에 생산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공부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로 말하면 동양의 조그마한 계란 노른자위인데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정신적인 보물을 여러분들이 쥐어야 하고
그래서 서양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그들의 뒤만 따르며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는가?"
154.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 마음법을 활용치 않고 물질 위주로 하는 모든 활동은 어차피 망상에서 출발한 것이라
공해를 면할 길이 없다.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길은 마음밖에 없는데 마음이라는 게 워낙 광대 무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니 우선 보이는 것부터 생각하게 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법을 알려 주기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우선 가깝게 보이는게 병이니 무위법의 병원을 세우는 게 좋겠다고 느꼈다.
이 공부를 한 사람들이 가운을 입고 의사가 될 수 있게끔 한다면 매우 파격적인 병원, 믿음도 길러 주고 공부도 하고
아픔도 나을 수 있는 불국토의 병원이 되지 않겠는가.
155. "세계가 부패된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염파 때문이니 세계를 안정시키려면 솟은 것은 내리고 가라앉은 것은 올려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그 핵심의 축은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가고 옴이 없는 무심의
축지법으로 모든 사람의 머리가 돼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이론으로 따져 이것이 옳다, 저 것이 그르다 하고 앉아
있을 시기가 아니다. 바로 핵심을 쥐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156.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고 돌아간 것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직접한 것은 무엇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림자 속에서 수만의 보살이 나갈 수 있고 수만의 군사도, 의사도 나갈 수 있으며 순리를 어기지 않고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마음, 한 조상, 한 형제인 인간인지라 사랑-의지- 도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켜가면서 진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인 까닭이다. 가령 인간의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르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생명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계의 힘을 빌릴 수도 있는 것이다."
157. 스님께서 가끔 제자들에게 마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라도 편하고 세계도 편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라의 앞일에 대해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다만 "네 앉은 방석이 편해야 너도 편할 게 아니냐." 라고만 하셨다.
158. 스님께서는 드물게 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가 있었다. 간혹 이를 의하하게 생각하는 신도가 있었는데 스님께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목탁만 두들겨야 하는 게 아니다. 정치가 따로 있지 않아 그대로 마음이거늘, 데모 이야기와 민주화 이야기가 어찌
정치일 뿐이라 하겠는가. 우리 국민의 한 자리가 부처님 자리이고, 전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생명과 마음을 빼 놓으면
무엇이 있겠는가. 머리 깎고 앉아 목탁이나 치고 경이나 잃는 게 중이 아니라 들고 나며 세상을 관하여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하겠구나.' 하고 점 하나 딱 찍어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하느니라."
159. 스님께서 어느 때 승가대학 건립 기금으로 거액을 희사하신 일이 있었다. 그때 말씀하시기를 "마음도리를 배운
승려야말로 한국 불교를 살릴 수있다." 하시며 승가대학에 앞으로 간호학과를 신설하는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하셨다.
스님께서는 평소에도 교계에 병원이 없을 뿐 아니라 의사 간호원의 양성 기관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는데 종단의 움직임에
상관하지 않고 선원의 힘으로 병원 건립하실 뜻이 있음을 밝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