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원이 형제, 예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아요?”
“신학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기숙사에서 밤을 새워가며 불꽃튀는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감리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웨슬리의 후손인 것 마냥 웨슬리의 교리들을 주장하고, 이 에 맞서 장로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칼뱅의 예정론을 주장하다 보니 토론은 끝날 줄을 모르 고 이어졌다. 그 때 한 사람이 느닷없이 ‘종원이 형제, 예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아요?’라 고 질문하였는데, 한참을 생각해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나로선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날의 경험은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부딪힌 첫 번째 문제의식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충격 적’이기까지 하였던 ‘예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그 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신앙서적을 부지런히 탐독하였다.
그 시절 신학교 1학년인 그의 관심은 온통 ‘진리’, ‘복음’, ‘예수의 형상’에 집중되었다. 그 가 가진 놀라운 집중력과 문제해결을 보기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유감업 싱 발휘되는 시기였다.
“그렇게 6개월 동안을 고민하였는데, 어느 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역사 하신 다’는 것이 깊이 묵상이 되고, 가슴으로 믿어졌다. 머리에서만 머물러 있었던 살아 계신 하 나님이 내 가슴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 깨달음은 그를 더욱 ‘복음’에 집중하도록 인도하였다. 대학 4년 동안 정종원은 학과 공 부보다는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였고, 수백 권이 넘는 신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였다. “정 종원을 만나려면 서점으로 가라!’ 할 정도로 그는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강남의 반포상 가에 있는 서점은 그의 아지트였다. 평균 1주일에 1번은 하루종일 서점을 지키는 ‘지기’이었 다니, 그의 독서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갈증이 컸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 4년을 마무리하려는 즈음에 시작된 고민은 ‘졸업후 무엇을 해야하는가?’이었다.
“임마누엘의 히로인 정종원”
그 때 만난 사람이 이성국이었다. 이성국은 당시 임마누엘 선교단의 총무였는데, 같은 교회 에 다니는 사람에게서 정종원을 소개받은 것이다.
“신학교에서 예배인도를 하는 정종원이란 사람이 있는데, 괜찮은 사람이다. 한번 만나보라 ‘고 권유한 사람은 정종원이 다니던 신학교의 교수였다. 예배인도자를 찾던 이성국은 정종원 을 찾아서 양평으로(당신 학교가 양평에 위치함) 향했다. 정종원을 처음 만난 이성국의 이야 기를 들어보자
“사전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긴 했지만 첫 인상이 특별하였다. 얼굴에서 풍기는 인 상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눈은 맑고 총명했으며, 진지 하고 깊은 사고가 베어 나오는 말투로 미루어 ‘이 사람 믿을 만 하군’하고 생각하였다”
첫 만남을 가진 이날, 정종원은 이성국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선교단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였는데, 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소박한 모습이 너무 좋아서 ‘잠시만이라도 이 곳에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고 소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1987년부터 정종원은 임마누엘 선교단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임마누엘 선교단 은 체육인교회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경배와 찬양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예수전도단의 화 요모임과 함께 임마누엘 선교단의 경배와 찬양모임은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비전을 주고 도 전을 심어주는 힘이 있었다. 이 힘은 임마누엘 선교단이 1집을 출반하면서 더욱 확산되었 다.
임마누엘 1집은 창작 곡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경배와 찬양앨범이다. 이 최초의 경배와 찬양앨범은 그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과 탁월함, 깊이와 음악성을 두루 갖춘 앨범이었다. 정 종원이라는 사람이 지닌 영적인 깊이와 음악성이 앨범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말씀을 묵 상한 내용을 주제로 해서 만들어진 1.2집과 예배실황을 그대로 담은 4집에서 보여준 임마 누엘 선교단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국곡 일색인 경배와 찬양에 쐐기를 박는 한국경배와찬양을 창작하고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임마누엘의 앨범에서 보여진 영적인 메시지나, 음 악이 외국 경배와 찬양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다는 것이 이 업적을 더 뒤받침 해준다. 그 업적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이 노래들을 만든 정종원이란 사람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그가 계속해서 한국적인 예배 곡들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개척과 '꿈이 있는 자유' 결성
94년, 그는 임마누엘 사역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를 짓누르던 소원과 부담감 을 해결하기 위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94년, 8월 초였다. 그 해에 열린 선교한국대회의 예배인도를 맡았는데, 선교에 헌신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중에 지금까지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직 감하였다. 95년을 기점으로 이 시대에 빛을 발하는 교회를 시작하고 싶은 나의 소원을 주 님께서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
그리하여, 94년 11월에 그는 지금의 인천 계양구에 7명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된 한웅재와 <꿈이 있는 자유>를 결성한 것도 이 시기다. 11월이 되면 효 실 교회는 개척 5주년을 맞이한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을 목회 철학으로 삼은 그는 성도들에겐 어떤 목회자일까? 이에 대해 10여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철순(현, 임마누엘 선교단 단장)은 ‘권위적이지 않고, 너른 성품과 섬세함을 지닌 목회자’라 한다. 정종원 자신 도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목회자가 되어 성도들의 비전을 세워주는 사람이고 싶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또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도록 계속해서 강단에서 숨을 불어넣 어 주고 싶은 것이다. 한 때 그는 음악사역을 내려놓고자 하였다.
“난, 음악가가 아니다.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고민을 깊게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어떻게 쓰임 받든지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통적인 목회스타일을 가지고 음악사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한 때는 그 불가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음악을 내려놓으려 하였으나, 새롭게 마음을 정 리하였다.”
그 새롭게 정리한 마음을 가지고 정종원은 5주년을 기점으로 하여 목회자로서 또 다른 도 약의 길을 준비한다. 그 준비한 길이 전원교회로 탄생할지, CCM사역자들을 위한 교회로 탄 생할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