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1절)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절)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 메이던 긴긴날에 꿈이였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실연한 20대 부산총각 고향 그리며 밤새 만든 노래
1976년 무명가수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
일본서도 음반 100만장이상 팔려‘한류바람’
대중가수 조용필(56)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기 대중가요다. 지난해 일본에서 우리나라 드라마 ‘겨울 연가’ 출연탤런트 배용준을 좋아하는 ‘욘사마’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벌써 20여 년 전에 가수 조용필의 인기를 반영한 ‘조요삐루’바람이 분 것.‘한류바람’이 1980년대부터 일본에 상륙한 셈이다.
4분의 4박자 고고리듬으로 멜로디가 흥겨워 누구나 부르기가 쉬운 까닭이다. 음의 높낮이도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어서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몇 번만 듣고 따라 부르다 보면 배울 수 있는 가요다.
황선우 씨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건 1976년. 음반에 담겨 본격 히트한 건 6년 뒤인 1982년이다. 만 26살 때 노래를 발표했던 조용필은 그 무렵만 해도 무명가수였다. 그러나 33살 때 나온 제4집 음반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알려지면서 인기대열에 올랐다.
조용필의 다른 노래들이 그렇듯 ‘작은 거인’의 혼이 담긴 생명력 긴 작품이다. 더우기 29년 전 무명가수였던 조용필이 일약 유명가수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부터가 흥미롭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실연의 아픔을 겪었던 20대의 한 부산총각이 만든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탄생사연은 이렇다.
부산출신으로 1970년대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황 씨는 음악 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고교졸업 후 작곡·작사가를 꿈꾸며 서울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시장이 좁고 여건이 좋잖아 성공하기란 힘들 것으로 보고 상경한 것이다.
객지생활을 한 그는 음악 일을 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부산서 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첫사랑의 또래 여학생이 시집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부산시 영도구 태종대 바닷가 고향집 부근에 살았던 그녀는 중학교 졸업 후 전라도 쪽으로 시집을 가버린 것이다.
황 씨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의 병이 심했던 어느 날 그는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고 벗들과 술을 마셨다. 술자리를 끝낸 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울적한 마음에 기타를 잡았다. 지난날 고향생각에다 그녀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태종대 집 앞 바다에 펼쳐진 부산항과 멀리 보이는 오륙도, 동백섬, 갈매기, 연락선 등 고향의 모습들이 눈에 선했다. 밤새 기타를 치며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고 악보도 만들어갔다.
날이 훤히 밝으면서 노래는 거의 완성됐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형제 떠난 부산항에…’로 시작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손질을 거쳐 그 때만해도 무명가수였던 조용필에게 넘겨져 취입됐다.
“1975년 10월 밴드로 활동하던 중 <너무 짧아요> <생각이 나네> 두 곡을 앨범녹음준비를 하고 있었죠. 어느 날 절친하게 지냈던 이회택 선배(전 프로축구팀 전남 드래곤즈 감독)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취입을 권했습니다. 녹음 뒤 앨범편집 때 보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두 번째 곡으로 올라와 있더라고요. 음반사에 순서를 밑으로 내려달라고 했죠. 록음악을 하는 사람이 트로트 부른 걸 자랑스럽게 내걸기는 좀 그렇잖아요. 사실 그 노래가 그렇게 뜰 것이란 생각을 전혀 못했습니다.”
전주곡의 기타도 직접 치며 노래를 부른 조용필의 회고담이다. 음반이 나오고 방송을 타면서 이 노래는 히트곡이 됐다. 조용필의 가창력도 뛰어났지만 시대흐름과 맞아떨어진 점도 히트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제목과 노랫말이 말해주듯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노래다. ‘가깝고도 먼 이웃’일본은 우리와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시절인 1983년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모국방문이 줄을 이으면서 일본은 우리 곁에 한발 성큼 다가왔다. 이국땅으로 끌려갔다가 죽음을 앞둔 나이에 부산항에 도착한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목놓아 불러댔다.
때마침 부산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가라오케 바람도 이 노래를 히트시키는데 한몫 했다.
해운대, 송도 등 바닷가술집과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유흥업소 등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단골가요로 불려졌다. 가라오케에 담긴 이 노래는 복고풍의 트로트 리듬으로 나와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일본노래가 많은 가라오케에서 일본 여가수 이츠와 하유미가 부른 <고히비토요>가 마음대로 불릴 때 일본선 그 보다 더 위세를 떨친 우리가요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여가수 이성애의 <가슴아프게> 뒤를 이어 일본시장에 진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을 일본사람들 우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1983년 NHK주관으로 일본 전국순회공연을 가진 ‘조요삐루’(조용필)는 10대에서 50대까지 폭넓은 가요팬들을 확보하며 엔카열도를 흔들었다. 후원회가 만들어지고 팬클럽도 결성됐다. 조용필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싱글음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만 1백 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일본가수 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일본음반회사들은 자기나라 가수를 동원, 유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내놓기까지 했다.
만 26살 때 이 노래를 첫 발표했던 조용필은 무명가수였다. 그러나 1982년 제4집 음반에 실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뜨면서 인기대열에 올랐다.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조경구 씨와 김남수 씨 사이의 3남 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울 경동중·고를 나와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록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한 후 올해로 데뷔 37년째 노래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