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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송한 부분입니다. 바로잡아주심이 필요합니다.
어제 그 질문을 잘 하셨어요. 어느 스님이 질문을 하셨는데 조금 모순이 있는 것 같에서 그래서 부분을 명과 실 명과 실 명실입장에서 말할 참, 마음을 그때는 심이 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명칭이 되고 공적영지하는 적지의 지는 실체가 되기 때문에, 규봉스님이 물이라고 하는 것은 名稱이고 물의 축축한 습성은 젖는 액체 습성은 體가 된다라고 했지요?
그와같이 마음이라고 하는것은 하나의 명칭이니까 명이 되고, 그리고 마음의 실체가 뭐냐? 바로 적지 적지기때문에 그래서 그때는 공적영지하는 그 적지가, 지는 실체가 되기 때문에 에.. 물로 비하면은 물의 습성과 같다는 말이고 그리고 또 마음을 체와 용으로 보면은, 체용관계로 보면은 공적이 영지보다는 앞서 본체가 되고 체란 말은 본체라는 뜻이요. 체가 되고 또 공적영지라고 하는 적지의 지는 본용이 된다. 본용이라는 말은 자성이어요.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제 [유마경]에 나온 17page, 17page 끝으로 셋째줄에 [정명경]은 [유마경]이라 했죠? 일체법이 무주로서 근본을 삼는다. 무주라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의 제팔식 마음이 바로 무주다. 제팔식 마음도 무주요 여래장도 무주요 모든 법이 무주아닌것이 없다.
그래서 이 마음이 머무름도 없고 본래 근본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일본은 무동, 일본은 무본이라고 했지요 잉? 그래서 무주의 근본으로부터서 일체법을 세웠다라고 하는 거, 그거 인자 [능엄경] 칠권에 보면은 그 말이 나와있어요. [유마경]에도 나와있지만은 [능엄경] 제칠권에 보면은, 제칠권에서 뭐라고 했냐면은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본차무주하여」이 무주에서부터 무주를 근본으로 해서 本此無住하야, 무주라는 게 그야말로 우주만법의 본체죠? 이 무주에서 근본했단 말은 무주를 근본으로 해서, 무주에서 무주가 내나 일체유심이라고 하는 유심자리죠? 무주가. 이 무주에서 근본해서「건립세계와 극제중생이라」모든 중생을 건립했다 건설했다 그말요. 그러니까 세계나 중생이나 모두 무주로 건립했다 건설했다 그말요. 그러니까 無住가 가장 根本이죠.
보조국사는 지리산 상무주라고, 높은곳에 있다해서 上無住라고 하죠 위 上字 상무주. 그 절에서 암자 쪼그만한 그 절에서 공부하다가 눈이 밝아지고 깨쳤죠 보조국사! 고려때 송광사 16국사중에 첫 번째 제일조죠. 그래서 보조국사는 상무주가「周天下 第一之地라」고까지 했지요. 그것도 상무주도 내나 상자만 더 붙었지 절 이름이 무주아뇨? 무주. 상무주가 보조국사 칭찬이지.「주천하 제일지지라」보조국사 거기서 도가 밝아지고서 도가 열리고서, 周天은 온천하에 첫째가는 땅이라.
실지 가보면은 나도 몇 번 가봤는데 보조국사가 말한 것처럼 100%는 아닌것 같어. 상무주보다 더 좋은 절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보조국사는 상무주 그 절에서 도가 열렸기 때문에 周天下, 주천하라는 것은 온천하 두루「주천하 제일지지라」제일 첫째가는 땅이다라고. 그래서 상무주는 지금까지도 절이 비지 않고 스님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공부하는 도량으로 있죠. 향곡스님 그 밑에 상좌가 누가 지금까지도 계실꺼요. 영원사하고 가까운 곳이요 잉. 높은 지리산 한 중턱쯤 되는 중봉쯤 있어요.
오늘은 19page 첫째줄입니다. 진도가 빨리빨리 나가야되는데 아무리 해도 한시간에 한 장밖에 못하는 꼴이 됬으니 석장밖에 못했잖아요 여지껏. 내일 석장이요 오늘은 쪼금 더해야겠는데
事廓恒沙며 理標精實이라
여기는 理와 事로 말하죠? [화엄경]에 이법계 사법계가 나오고, 불교에서는 진리를 꿰뚫어 잘 아는 사람보고 理判이라고 하고 판독방하는 판이요 판. 판이란 말은 이룬다는 판자요. 이런 판자가 있지요? 변호사 변자처럼 이렇게 생긴 발음을 이렇게 판으로 했지.
큰 방 절에 큰방보고 판독방이라고 그러죠. 그 큰방에서 도를 이룬다고 성판한다는, 그런 도를 이루는 큰 방이란 뜻이요 판독방이. 그런데 판독방 무슨 그 판문점 판자로 쓰면 틀려요. 발음은 비슷하죠 판문점 板字. 판문점 이름도 더럽게 지어졌지. 판자 문때기 판자때기 문이니까 뭐 별수도 없잖아요. 이름도 잘지어야 되는데 이름이 참 더럽게 지어졌어. 그거 삼팔 따라지 그거 삼팔선에 판문점 있는거 별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진리를 잘 알면 理判이라 하고, 또 모든 사법은 잘하는 그러헌 분을 事判이라 그래요. 그래서 참선하고 경을 공부하고 염불하고 마음공부를 하는 스님을 이판승이라 하고 스님 僧字 중 僧字. 포교하고 사무보고 절을 운영하고 하는 교무행정이나 그런 거 하는 사람을 또 사판승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판사판은 불교에서 두 가지에 능란하게 잘 해야 이판사판이지, 두 가지를 다 통달해야 되요. 하나만 안 것보다, 공부를 하다보면은 사무 안 봐도 사무적인 것은 저절로 손바닥 보듯이 다 볼수 있는거요 별것도 아녀요.
마음 하나가 밝아지면 그 마음가지고 매사를 밝게 다 잘 처리할 수 있는거지 뭐. 그래서 이판사판하는데 여기서는 인자, 사와 事는 현실세계 모든 사법 사고 사유 사단 사실 그런거는 다 현실아뇨? 그 사법이 항하 모래수와 같이 많다 그말이죠. 팔만사천법문 못지않게 한량없는 그런 이 속계에 속계법도 말할 수 없이 많으니까 많다는 의미로 恒沙라고 한거요.
그런데 진리는 많은게 아니잖아요? 진리도 뭐 朱子는「而具衆理」라고 많은 이치라고 했지만은, 원칙은 事는 많지만은 理는 단순한거요 사실상은「理一分數라」유교나 도교나 불교에서도 이런 말을 쓰지요. 진리는 하나다! 그 자체가 일태극처럼 일월문처럼
그런데 나누어질때 천차만별로 분리가 될 때 다르다 말이요. 그러니까 일원론에서 이원론 다원론, 일태극에서 음양 오행 만물 만법 그것이 다 分數거든, 천차만별로 갈라지는거. 그러니까 이는 하나고 분은 사라요 쉽게말해서, 사를 일 사자. 사를, 사가 여러 가지 차별되는것을「이일분수」라고 혀요. 진리는 하나지만 여러 가지 사실 사법은 수도 없이 많이 벌어진다. 많이 벌어지는 그 현실을「事廓恒沙」라고 표현했고 그러나 진리는 속 알맹이 精實을 標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무뿌리 둥치는 정실이라면, 그 나무에서 지엽이 가지와 잎이 수천수만으로 이렇게 많이 복잡하게 열리는 것은 그건 사와 같은거죠. 씨 하나 심으면은 많이 나오죠? 씨 하나가 정실이요. 나락하나가 나락 하나를 심어서 삼백개이상 나오죠 엉? 얼마나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먹고 살기 좋지. 나락 삼백개 심어가지고 수확을 삼백개 한다면 그거 별 볼일 없잖아요. 그러니까 理는 속 알맹이 그것이 정실이라. 정과 실은 알찬 열매와 같고 精은 사람에게 그 정기와 같은 음 그렇게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을 정실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거 가장 핵심
理는 정실을 標함이라.
吞滄溟於毛孔이 唯是自因이요
滄溟이란 것은 큰 바닷물이요, 저 태평양 바닷물 같은거. 바다가 푸르고 바다가 깊이가 있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까 컴컴하니까 컴컴할 溟字를 쓴 거죠, 바다 명자 바다 창자. 바닷물을 털구멍에다 삼킨다 그말요. 우리는 그렇게 잘 못할것 같죠? 부처님과 유머거사나 관세음보살은 능히 그렇게 해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건데 우리는 쪼금 그 마음자리가 개발을 잘 못해가지고 그렇게 못한 것처럼 느끼고 있죠.
큰 바닷물을 털구멍속에다 다 넌다 말이요. 나는 바다가서 해수욕하면서 그 생각 해보니까 내몸이 큰 바다속에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정도지, 내 털구멍속에다 바닷물을 다 집어넣는가 하고 내 한번 비교를 한번 해봤어요. 허허허
그러나 과량인들은 불보살이나 모든 시공을 초월한 사람, 시공을 초월한 사람은 바닷물을 털구멍속에다 집어넣어요 삼킨다말이요. 그런 사람을 견성한 사람도 과량대인이라고 하지요? 過量 양을 초월했다. 量이란 말은 하나의 시간성 공간성 질적 양적하는, 그런 하나의 형체가 있는 것을 양이라고 하지요. 질량 형량 도량 궁량 법량 모두 그러헌 양을 벗어나서 양을 초월한 사람을 과량이라 하고, 큰 마음을 깨달아가지고 대인군자가 성현군자가 되신 분들을 과량대인이라고 하지요. [서장]에도 보면은, 이참정이 道깨쳐가지고 대혜선사께서 과량대인이 한번웃는 가운데 百了千當한다고 백가지 알고 천가지 다 줄줄줄줄 사무치는 거지요.
과량대인은 창명을 모공에다가 삼킬수 있어요.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유마거사나 모두 그런분들은「唯是自因이요」그것이 뭐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이요. 오직 자인이라 그말요 자인뿐이라고. 자기 자심의 정인에서 자심의 원인, 자인이란 말은 자기의 본인에서 된다 그말요.
因이란 말은 본인도 되고 정인도 되고 근본이 에.. 인이죠? 불교에서 인자는 근본 핵심을 본인이라고도 하고 그 마음자리를 정인이라고 하죠. 자인이 바로 自字를 덧붙여도 되는데, 자인이 본인 정인 그런 뜻이요.
그리고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자리를 불교에서는 인지라고 합니다 因地. [초발심]에서 닦을때 나중에 성불할때는 비유로 과지라고, 꽃이 피어가지고 열매가 맺는 것처럼 성불할 때 果地 인지 과지. 그것을 상식적으로 알아두시면 이 문제가 해결이 잘 됩니다.
오직 이 자인에서 되고
卷法界於塵中이 匪求他術이라
우주법계 무궁무진한 제망찰해와 같은 그러한 모든 법계를 먼지 속에다 다 말아넣어요. 콧구멍속에다가 담배 말아넣듯이 엥, 담배 잘 피우는 사람은 담배 이만한 말아진거 콧구멍속에다 넣고도, 연기 안피워도 내나 그렇게 하면 상대방한테 연기도 없이 좋을껀데 그렇게는 또 안하데. 어디가서 꼭 연기를 붙여가지고 담배를 피우데. 담배 피우고 싶으면 그 담배꽁초를 콧구멍속에다 넣으면 될 거 아뇨? 그것이 그것이지 허허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없잖아요.
그와같이 담배꽁초를 콧구멍에다 넣듯이, 무궁무진한 광대무변한 세계 법계를 一微塵 그 조그마한 먼지속에다 말아 넣는다 말이요 마를 卷字요. 그것이 다른 술책을 구할게 없어. 자기능력으로 다 法如是 법이 본래 그와같은 능력을 무한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다른 무슨 방책 다른 술책을 구할게 없다 그말요. 구하지 않는다 아닐 匪字죠?
「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나오죠? [법성게]에. 한 자그마한 분자속에 광대무변한 수미산도 그 속에 다 들어가고 모든 세계가 다 들어간다고 [화엄경]에 나오죠? 그걸 [법성게]「일미진중함시방」이라, 하나의 미진속에 시방세계를 다 포함한다.
몇천년 전에는 그걸 잘 이해를 못했죠. 그런데 요즘에 어.. 과학이 발달되어가지고 과학자들은 이걸 충분히 이해를 하잖아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보다도 불교철학을 불교를 굉장히 아조 참 호기심으로 우러러 보고, 엄청난 세계 우주적 종교 철학이라면 철학이 있다면 바로 불교철학이요. 아인슈타인도 우주적인 종교는 오직 불교라고, 그런 분도 과학자가 그렇게 표현했죠?
그것은 조그마한 미진속에도 분자속에도「일미진중에 함시방이라」十方이란 말은 광대무변한 넓은 세계, 여기서 말하는 법계와 같은 말이죠. 그게 별것이 아뇨. 그래서 과학자들이 감탄한거요. 불교가 참 대단하다고 어떻게 3000년전에 저런 말씀을 했는지 기가 차잖아요. 기가 차고 뇌가 차고 순사가 칼을 차고 (하하..) 기찰 일이지.
그러면 기가 되게 차면은 기가 칵 막혀! 말도 못하는거요. 말도 어느정도 숨이 통해야 말도 하는거지 숨 콱막혀서 기가막히는 소리라. 그야말로 참 불가 불가사의지.
首楞嚴經에 云
[수능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眾生이 迷悶하야
衆生이 迷하고 답답해서, 중생이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고 꽉 막혀서
背覺合塵일새
覺을 등지고, 覺은 본각이요 본래의 각성 본래의 마음자리를 부처의 마음자리를 등지고 塵에 合할새. 塵이란 말은 허망한 외계 육진경계요. 色聲香味觸法
그러니까 자기 내심은 망각하고 내심을 완전히 배치해서 등져버리고, 외계 허망한 생멸이 있는 그러헌 육진경계에 따라가기 때문에 합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이요. 부루나장에서 부루나에게 부루나장이 4권에 나오죠? [능엄경]
故發塵勞하야 有世間相이어니와
그러므로 塵勞를 發하야 世間相이 있거니와, 진로라고 하는 것은 육진경계에 마음이 끄달리고 거기에 견물생심으로 오염되고 거기에 더럽히면은 마음이 피로하는거요. 그래서 피로할 勞字를 쓴거요. 진로는 다른 말로 하면은 번뇌라고도 해요 煩擾惱亂 번뇌를 발해서「유세간상이어니와」그래서 세간상이 있어 중생들은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걸 다 벗어나서 출세간의 법을 통달했기 때문에 세간상이 있을 리가 없지.
我以妙明不生不滅로 合如來藏호니
나는, 나는 석가모니 자신이 자신을 가르키는 말씀이요. 나는 妙明, 진로와 무명의 반대말이 묘명이죠?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밝아지면은 묘명이죠? 묘하게 밝은 거. 근본 무명을 완전히 소멸해서 근본 무명이 없어져버리면 묘명이라요. 妙覺 묘각이라고도 하지요. 깨달을 覺字. 성불하면 묘각을 이룬다라고 합니다.
묘명의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러한 불생불멸을 가지고 불생불멸로써 如來藏에 合했다 말이요. 무슨 육진경계 합하는게 아니라, 부처님은 여래장에 떡 거기에 부합되어 버렸어. 여래장과 합치가 돼서 하나가 된 거죠. 그러니까 이 여래장이
而如來藏이 唯妙覺明이라
그러므로 如來藏이 오직 妙覺明뿐이라. 부처님을 묘각이라고도 하지요 대각이라고도 하고, 묘각명이 각자 하나 더 넣어서 그렇지 묘명이 내나 묘각명 아뇨? 응 똑같은 말이요.
圓照法界 새
나는 그래서 [원각경]에 말한 원조, 여기도 말하는 원조 해가지고 이름은 覺性이라고 하고 호는 圓照라고 해봤어요. 내 하고자 하는 내 이상을 이름에다가 담아놨지. 원조각성 그런데 각성으로만 알지 원조는 모르고 있잖아요 모두 사람들이
각성은 내 처음에 행자때 우리 은사스님한테 나는 각성으로 하겠습니다 해가지고 내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 보통은 은사스님이 이름을 지어 주시는데, 너는 계 받을 때 사미계 받을 때「이름을 어떻게 할거냐?」「저는 절에 들어온 목적이 각성입니다.」그때는 이룰 成字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의미로 그러다가 몇 년 그렇게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사미를 떠나가지고 성품 性字로 바꿨어요.
옛날 그 병자호란때 벽암각성처럼, 벽암각성이나 똑 같에요. 그래서 그러니 내가 남한산성 갔드만 장경사 주지가, 옛날 그 각성스님이 성을 쌓잖아요 남한산성, 그래서 알고 그러는지 상당히 대우를 극진히 하데. (하하하..) 내가 옛날에 남한산성가서 그 남한산성 서울 남쪽에 그걸 쌓는지 이름이 똑같았어. 법계를 원조요. 法界를 원만하게 두루 비치게 때문에
부처님의 그 십현문 도리, 事事無碍의 도리를 여기서 밝힙니다.
是故로 於中에 一為無量하고 無量이 為一하며
是故로 그 가운데 하나가 한량없는게 되고 한량없는게 또 하나가 되.「일즉일체다즉일」바로 [화엄경] 십현문 그야말로 사사무애의 도리라
小中에 現大하고
작은 小中에 큰 걸 나타내고, 아까 털구멍 조그만한 데서 어.. 바닷물도 다 집어넣고 또 조그만한 그 겨자씨속에다가 큰 수미산을 집어넣는 것처럼, 그것은 좀 어렵죠? 大中에 現小는 좀 쉬운편이죠 보통 사람들은
大中에 現小하며
큰 것 가운데도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不動道場하고
그리고 道場에서 움직이지 않고 도량에서 까닥하지 않고 그대로 보리수 나무밑에서 가만히 정각을 이룬 다음으로는, 다른 경에는 다른 곳에 가서 설법을 하신다라고 나오죠? 그러나 [화엄경]은 보리수 나무를 안떠나고 여러곳에 천상이나 다른 곳에 가서 설법하신다라고 나오죠? 텔레비전방송같은것도 그렇잖아요. 그 안떠나고 여러 방방곡곡 여러 그 안방에다 다 비쳐주죠 응? 요즘은 뭐 그런 기계가 나왔으니까 뭐 알기 쉽지 뭐. 도량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現十方界하며
十方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게 뭐여 이게. 흐흠. 벌이 와서 눈하고 뽀뽀할라고 그래. (허허허허)
身含十方無盡虗空하며
석가모니 몸에서는 十方의 끝없는 虛空을 다~ 포함혀. 허공이 젤 크잖아요? 수억만의 세계도 다 허공속에 들어있어서 허공이 다 감싸고 있죠. 그런데 부처님의 법신은 시방세계도 별것도 아니고, 시방세계의 그 끝없는 허공까지도 다 그속에다 몸에다가 포함한다 말이요.
아까 그 부에 심부에 말했던 것을, 경을 들어서 증거를 대기 위해서 [능엄경] 말씀을 갖다가 설명을 하는 겁니다.
於一毛端에 現寶王剎하고
한 털 끝어리에 寶王刹을 나타내고, 보왕찰이란 말은 불국토요. 장엄전 불국토를 보왕찰이라 합니다. 왜 보왕이라 했냐면은, 정말 불국토는 칠보로 장엄전 그냥 시시한 저 흙이나 돌로 된것이 아네요. 칠보 보석 가장 아름다운 금강보나 칠보나 또 수능엄보나 능가보나 그러헌 보석으로 된 세계라고 해서 모든 불국토를 보왕의 세계라고 세계 찰자요 여기서는, 사찰하는 절 찰자가
그런 불국토를 다 털끝어리에서 수많은 불국토 칠보로 장엄전 불국토를 나타내고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이라하시니
微塵은 지극히 작잖아요?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분자처럼 지극히 작은 미진의 속에 앉아서 大法輪을 굴린다 그말이요. 대법륜은 큰 법의 바퀴를 굴린다 말이요. 법의 바퀴를 잘 굴려야 불보살이고 돈을 잘 굴려야 대재벌이고 그렇죠? 굴려야 되죠. 우리도 경을 잘 보는 사람은 경을 잘 굴린다라고 합니다. 轉經한다고 그래요. 옛날 사람들 경을, 경에 대해서 경을 잘 사무쳐 아는 사람은 경을 막 굴리는 거요.
만공스님 그 토굴에 서해 바닷가에, 이렇게 전월사라고 전월암인가 전월산가? 달도 바다에 비치는데 서해바다 달을 그냥 보는게 아뇨. 마산에 가면 안월동이 있지요? 달을 구경한다. 그게 달도 굴리는거요 轉月寺 멋지죠 잉. 만공스님은 그 절이름을 전월사라고 했어요 달을 굴리는. 달이 잘 보이는데 달을 보고만 있는게 아니라 달을 그냥 볼적에 다 굴려부러, 쳇바퀴굴리듯이. 옛날 사람 쳇바퀴굴린 이야기도 나오죠?
불공할 때 꼬마가.. 꼬마가 인자 행자꼬마가 산중에 자기 스님하고 같이 계시는데 스님이 어데 가시고 절을 비웠거든, 그런데 인자 그 어떤 신도가 쌀 되나 가지고 와서 옛날 산골에 불공하러 왔어. 근데 주지스님은 없고 조그마한 꼬마가 나와서는 밥을 한그릇 지어가지고는 부처님한테 떡 올리고는 쳇바퀴를 가지고 부처님앞에서 삥삥 돌리고 몇 번돌리고는 불공 다했습니다하고 그런거요. 그러니까 얼마나 싱겁고 얼마나 허전했던지, 내가 잘못왔구나 말여 잉 그렇게 후회를 했어. 주지스님 없을 때 오니까 불공을 저렇게 형편없이 허술하게 해준다고, 그런데 가다가 인자 동구에서 동구밑에서 가다가 자기 그 주지스님을 인자 만났어 그 신도가. 그래 붙잡고 스님 어디갔다 오셨냐고 스님이 없어가지고 내가 불공하러 왔는데 그 꼬마가 밥만 해놓고는 그냥 쳇바퀴만 몇 번 돌리고는 불공 다했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그 저 좀 마음이 허전하고 안됬던지 그렇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 스님이 손발이 맞어야 되거든, 도둑질도 해야 할라면 손발이 맞아야되고 그 스님이 참 걸작이라.
하 그 꼬마가 몰라서 그랬구나 그 말이요. 적어도 쳇바퀴 굴릴라면은 큰 불공, 요즘 말하면 몇천만원 몇억이나 내놓고 큰 수륙재나 무슨 큰 큰 재를 할때 쳇바퀴를 굴리는데, 가가 몰라가지고 말야 쪼그마한 쌀 되가지고 왔는데 쳇바퀴를 굴려줬다고 막..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참 불공 잘했거든 (하하...) 아까는 불공 잘 못했다고 했는데 그래가지고 가서 생남도 하고 소원빈것 다 되어부렸어.
그래 사람이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산다고, 그것도 다 일체유심이지 뭘라고 쳇바퀴 굴렸다고 그렇게 안좋게 생각을 했냐말요. 주지스님 말 한마디에 그냥 살아났어 죽은사람이. 그렇잖아요? 기분이 죽었든 사람이 살아났어, 그와같이 굴리는거요. 대법륜을 굴려요. 부처님이 나오시면은 법륜이 나타나요. 그런말도 [아함경]에는 나와요.
금륜왕이 나타나면 금륜이 나타나고 은륜왕이 나타나면, 금륜왕은 사주세계를 통치하고 은륜왕은 삼주세계를 남주 인자 북주 뭐 서주 사주세계는 동주까지. 동륜왕이 또 나타나면 동륜이 나타나고 그렇다고 하죠. 그러고 법왕이 나타나면은 법륜이 나타난다고 부처님이 법왕아뇨? 그런말까지도 있어요 비유겠지.
요즘에는 금메달 금륜이고 동메달은 은메달은 은륜이고 은륜왕 금륜왕 뭐 동륜왕, 동메달까지는 인자 철메달은 치지도 않죠 金銀銅鐵할 때. 하~! 그러나 원래는 여러 가지 다 해요. 금메달 금탑 은탑 또 동탑 그 다음에 목탑, 훈장도 목탑 훈장 목탑도 있죠? 철탑도 있고 다 있는데 메달따는데는 세가지밖에는 못따요.
대법륜을 굴린다고 [능엄경]에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是知背境觀心애 自然大明相含하야
이 알거나 육진경계를 등지고 본래의 본심을 관찰함에, 自然이 저절로 大明相含이라. 큰 밝은 자리하고 서로 대명이 대명을 상함하야 서로 포함해서. 대명이 아까말한 묘명입니다.
不為物轉하고
만물에 굴름이 되지 않고, 만물에게 굴림을 받지 않는다. 무루가(?) 되었기 때문에
亦如芥納須彌等이니라
또한, 개자씨는 지극히 작죠? 담배씨보다 더 작아요. 개자씨 저 냉면먹을때 개자 갈아가지고 그 매홈한거 먹지요 잉? 참 작아요. 그 개자씨 작은 개자씨속에 큰 수미산을 넣는거와 같다. 수미산은 산 중에 제일 큰 산이요. 수미산 안 보이죠? 보통은 수미산을 옛날 사람들은 히말라야산이 산중에 제일 크고 높으니까 히말라야산을 수미산이라고 그렇게 하는 사람 있는데 그건 맞지 않는 말이요. 불경속에 수미란 말은 묘고라고 번역을 하죠 妙高한.
그런데 요즘에는 과학이 천문학도 발달되고 과학이 발달되어서 모든 그 학자들이 나름데로 인자 말을 하는데, 중국이나 저런 저 어디여 티벳트나 대만이나 그런데 인자 불교학자들 말도 그렇거니와 내가 보기도 그렇고, 저 은하계위에 그쪽 그 우리가 가보지 못한 그런 산이 있는걸로 봐야 되지 저 히말라야산은 별것도 아뇨.
그런데 불경에 보면은 해와 달이 수미산 중턱으로 다니고 꼭대기는 제석천왕이 산다라고 했는데 히말라야산 어데 히말라산에 해와 달이 중턱에 다니는 데 없잖아요. 운행안하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본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엉 산악대원들이. 그래도 뭐 제석천왕 안 보이죠. 제석천왕이 없어 그러니까 그 산이 수미산은 아뇨. 은하계에 우리 인간이 잘 가보지도 못한 그러한 이상의 세계와 같이
지리산 청학동에 뭐 신선들이 산다라고 하는, 삼신산에 신선이 산다고 하는 그런 신화와 같은 그러헌 산으로 봐야 되겄죠.
百門義海에 云
[백문의해]란 책에서 말하기를
且如見山高廣은 是自心이 現作大요
유식의 도리에서 말한거요. 百門이란 것은 오의백법, 백법을 주로 밝히는 그런 책인데, 대장경속에 나와있어요. 보니까 상당히 복잡하드만.
불교학을 다룰라면은, 어떻게 알것도 많고 볼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어떻게 많은지 평생해도 다 못할 것 같어. 지금같은 내가 볼수 있는 정도로 한 몇백년 보아야 다 볼까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 천태학이고 뭐 기타 화엄학이고 유식학이고 인명학이고 뭐 구사학이고 그런것은 그냥 보통 학계에서 많이 공부하지만, 그 외도 부처님의 경전이 무궁무진한 거요.
[백문의해]에도 복잡하게 그 설명한 게 나와요.
또한 저 산을 산이 높고 넓은 것을 보는 것은, 이 자기마음이 큰 산 넓고 큰 걸로 나타내 만든거라 말이요. 눈 감으면 암것도 안 보이잖아요. 눈 뜰때 眼識을 통해서 높고 큰 산도 보는거죠? 안식도 내나 자기마음에서 나온것 아뇨? 눈으로 보는 시각작용도
그것 보면은 하나 보면은 다 알수있어요.
今見塵小時에도
지금 먼지가 작은 것, 미진이 작은 것을 볼 때에도
亦是自心이 現作小라
또한 이 자기마음이 에.. 작은 것을 나타내 지음이라.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서 흘른 물을 밤엔가 새벽인가 볼때는 마실때는 굉장히 좋게 마셨잖아요. 나중에 그 이튿날 아침에가서 어디가 그 있는가하고 보니까 공동묘지 뭐여 해골바가지에서 흘러내린 물이라. 그때는 막 구역질이 나오죠. 언제는 뭐 해골바가지가 달콤하게 감미롭게 좋은 걸로 나타난 것도 아니고 아침에는 변해서 더러운 그 오물로 변한것은 아니거든, 내나 원효대사 마음이 그렇게 좋게도 보였고 나쁘게도 보였고 좋게 보았고 나쁘게 본거요 쉽게말하면.
그래서 일체가 유심이라 삼계유심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이 거짓이 아니라하고 중국에 공부하러 가는 것을 그만 둬버리고 거기서 깨쳐버렸죠? 그래.. 그래가지고 의상대사만 가고 원효대사는 다시 신라에 돌아와가지고 포교하고 그랬죠? 그것도 원효대사의 마음장난이요. 마음이 그렇게 만든거요.
그와같이 큰 것을 보는것도 마음이 큰 것으로 나타내서 만든 것이고, 작은 것도 역시 그렇게 된 거라.
今由見塵이
지금에 먼지를 보는 것이, 먼지는 작은 물체 미진
全以見山高之心으로
온전히 山 높은 그 마음으로써
而今現塵也라하니
지금에 먼지로 나타난것이니라고 그렇게 말미암은 것이라고 [백문의해]에 그런 말씀을 했다. [백문의해] 거까지요.
是故로 即小容大로다
그러므로 작은 것에 卽해서도 큰 것을 용납할 수가 있어. 별것도 아뇨 자기 마음에서 장난이지. 지금은 쪼그만한 computer에다가 팔만대장경도 집어넣죠? 작은 것. 작은 것속에다가 큰 것. 우리 저 머리통도 해골바가지 쪼그만 하거든, 여그다도 뭐 만권 서적을 다 넣을 수가 있죠? 쪼그마한 바가지만한 머리통 대뇌 소뇌속에다가, 또 눈이 얼마나 작어 꼭 큰 포도알만 해요 눈 동공이. 눈 거시기 저 동글동글한거 안구가, 그런데 안구가 저저 광대무변한 하늘이고 땅이고 천지만물을 눈속에다 다 집어넣지요? 신기하지 뭐.
如云萬象은 如須彌요
옛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森羅萬象은 須彌山과 같고, 많고 높고 크고 그렇다 말이요.
淨心은 如芥子라하니
우리 중생들의 청정한 마음은 芥子씨처럼 지극히 작아요. 눈동자가 작아도 큰 물체 다 보고, 신장이 조그만해도 신장속에 동서고금을 다 집어넣잖아요.
여기 저 범어사에 옛날 경허스님이 오셨어요 범어사 보제루에. 글씨도 경허스님이 쓰셨죠 보제루 뭔가 그거. 그래가지고 여기서 詩지은거 나와요.
「탄토원근객이(?)」하늘과 땅 천지를 삼키고 토하는 그 손님이, 경허스님 자기자신을 말하는거요.「金井에 做淸遊라」 금정산 여가 금정산 범어사죠?「금정에 주청유라」맑을 淸字. 맑게 모든 속세를 떠나가지고 나도 청유를 짓는다 경허스님. 경허스님도 그렇게 시를 읊었죠.
내가 말한 건 이걸 말하려고 그런데, 하늘과 땅을 다 삼키고 토하고 뱉어고 막 그래. 하늘과 땅이 얼마나 커 경허스님이 배가 뭐 얼마나 커서 엉?「淨心은 如芥子」그래도 하늘과 땅을 삼킬 呑字 탄허스님 하는 탄자, 토 뱉을 吐字. 하늘과 땅을 삼키고 토하는 그 손이 경허스님 자기 자신이요. 이 금정산에서 청유를 짓다.
여기 금정산에 한가한 시간을 내가지고 여기서 아주 기분좋게 잘 노닐어 노닐면서 시를 지은게 있어요. 경허스님이 시도 잘하시고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하고 참선도 잘하고 술도 잘 자시고 곡차도, 못하는게 없어.「색옥방광 주옥방광 색이겸이라(?)」주색이, 술도 방광을 하고 모든 여색도 방광한다라고, 시를 그렇게 지었죠.
어떤 것은 경허스님이 너머 까발쳐가지고, 쉽게말하면 그렇게까지 풍류를 안해도 될것도 '화반탁출'로 전부다 다 이렇게 두손 다 벌린 것처럼 그렇게 시를 지으신 것도 더러 있지요. 나도 사실은 그 경허스님계통이요 엉?
경허스님밑에 만공스님도 한암스님도 또 탄허스님도 다 그쪽아뇨 엉? 혜월스님이고 누구 저 그런 스님들 다 백용성스님도 경허스님한테 치문책을 배웠다고, 백용성스님께서 경허스님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경허스님께서 저저 나한테 치문배운사람이 있네 그렇다고 아마 한암스님한테 이야기를 하셨던 거 봐. 그러니까 한암스님은 탄허스님한테 말씀을 해주시고 또 탄허스님은 나한테 말씀해줘서 그 사실을 내 들은적도 있지요.
그래서 그 근대 수월스님이고 혜월스님이고 뭐 만공스님이고 한암스님이고 용성스님까지라도 경허스님 그.. 경허스님이 선배로서 스승으로서 대단하신 존재죠.
故云 森羅及萬象이 一法之所印이라
그러므로 삼라만상이 하나의 法으로써 찍어내는 바라고 말했다. 다른 책에는 [법구경]의 말씀이라고 게송이죠? 다섯자 게송. 하나의 법은 일심법이요. 하나의 심법에서 森羅萬象을 다 찍어낸거요 판에다가 찍어낸 것처럼.
即是萬法이 一心이요
곧 이 萬法이 한 마음이요
一心이 萬法이니
一心이 또 萬法이라, 만법이 귀일이지.
故稱毛吞巨海요
그러므로 터럭이 털구멍이 큰 바다.. 바다를 삼킨다고 말함이요
芥納須彌라
개자씨가 큰 수미산을 어.. 넣는다고 넣을 納字요 넣는다고 말함이라
非干神通變化之力이요
神通과 變化의 힘을, 힘에 관계가 없어. 신통변화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真心에 具德이요
본래의 마음에 한 마음에 그러한 덕을 갖춘것이며, 그러한 공덕을 본래부터 갖춘 거라 말이죠.
法性이 如是이라
법의 성품이 본래 그와같은거라 말이요. 그래서 경전 젤 첫머리에「如是我聞」이 많이 나오죠? 여시 백여시가 되어서는 안되죠. 여시 헤..
如華嚴記에 云
[여화엄기]에 말하기를, [화엄기]는 청량국사가 화엄소를 써놓고 화엄소를 해석한 초가 記라요.
如經의 一毛端中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한 터럭 끝 가운데
一切世界差別性者는
一切世界差別性이라고, 한 터럭 조그만한 털구멍속에 모든 세계가 그속에 다 들어앉아서 천차만별의 세계들이 털구멍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말은, 경전에 그 말을 지금 해석합니다. 해석은 謂一부터 해석이요.
謂一毛端性이 即是一切世界差別性이라
말하자면 한 터럭 털 끝의 성품이 곧 이 一切世界의 差別性이라.
今一切世界가 即事니
지금 일체세계가 곧 事法이란말요. 아까「事廓恒沙라고」하는, 사곽항사란 현실세계가 바로 일체세계가 바로 현실인 곧 사니 사법이니
隨其法性하야
그 法性에 따라서, 법성은 理가 되지요? 理標精實이라는
即一毛端이
하나의 털 끝어리에 卽해서, 하나의 털끝 털끝속에 모든 세계나 법성이 그대로가 하나의 털끝이요 뭐. 털끝이 작다해서 작은 것이 아네요.
以性即毛端이며 諸界가 即性故라하니라
그 性이 법성이 곧 털끝이며 또 모든 세계가 바로 다 법성이기 때문이라. 법성이 세계요 세계가 바로 법성이다 그말요.「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처럼」
任機啟號하고 應物成名하나니
모든 근기에 따를 任字 따라서 이름을 바꾸고, 이름을 여러 가지로 본래 이름이 없는데 그 마음을 가지고 설법을 할때 중생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이름을 많이 붙이잖아요? 어제도 내가 말했죠 이름이 달라지는거요. 할아버지한테 대하면 내가 손자고 아버지한테 대하면 내가 아들이고 아들한테 대하면 내가 아버지고 손자한테 대하면 손자고 또 여자한테 대하면 남자고 남편이고 그렇게 해서 이름이 자꾸 바뀌죠?
「대불동성 위불동설(?)」그 상대에따라서도 달라지고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져 대불이요. 상대방 대할 對字요. 위치에 따라서 달라져, 그래서 이름이 多名 많은 명칭이 있게되아요 多名 별것도 아네요.
그러니까 보리 열반 반야 법성 불성 머슨 기 외에도 원각 무슨 여래장 일심 중생심 뭐 법계 법신 많지요? 이름이
첫댓글 일체법이 무주로서 근본을 삼으며, 於一毛端에 現寶王剎하고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이라하시며 ...即是萬法이 一心이요 一心이 萬法이니........화풍정 님,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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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森羅及萬象이 一法之所印이라...삼라만상이 하나의 法으로써 찍어내는 바라..화풍정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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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羅及萬象이 一法之所印이라 即是萬法이 一心이요 一心이 萬法이니 故稱毛吞巨海요 芥納須彌라 非干神通變化之力이요 真心에 具德이요 法性이 如是이라 _()()()_
삼라만상이 하나의 法으로써 찍어내는 바요, 곧 이 萬法이 한 마음이요 一心이 또 萬法이라, 그러므로 털구멍이 큰 바다를 삼킨다고 말함이요 개자씨가 큰 수미산을 넣는다고 말함이라 신통변화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본래의 마음에 한 마음에 그러한 공덕을 본래부터 갖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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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터럭 끝의 性品이 곧 一切世界의 差別性이고,,,이 現實世界가 바로 곧 一體世界( 色卽是空 空卽是色)!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큰 방 절에 큰방보고 판독방이라고 그러죠
그 부분에서 판독방이 아니고 판도방(判道房)이라고 합니다.
백문의해(百門義海)란 책에서 말하기를 에서
백문이란 것은오의백법이 아니고 오위백법입니다.
색옥방광 주옥방광 색이겸이라(?) 주색이, 술도 방광을 하고 모든 여색도 방광한다라고, 에서 오기가 있습니다.
주혹방광색부연(酒或放光色復然)
탐진번뇌송려년(貪嗔煩惱送驢年)
술 먹어도 방광을 하고 여색도 그러하네.
탐내고 성내는 번뇌는 영원히 보냈다네!
김해 정암사 법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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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