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야상곡(夜想曲) - 회상
글 김덕호
폭염 특보가 10일째 발령중이다. 열대야 현상도 예년에 비하면 이미 3배가 넘는다.
한여름의 복병인 폭염으로 열사병, 일사병으로 인한
실신과 사망이 어느 해보다 증가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오늘도 노약자 2명이 폭염으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지구촌도 도처에 물난리와 불난리로 고난의 8월을 보내고 있다.
지금 당장 지구 온난화라는 큰 명제보다는 개개인이 폭염 대비 몸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무더위 속에서도 진료와 경영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한주가 마무리되는 토요일 저녁,
내 고향 영주의 인애가의료복지타운을 혼자서 조용히 둘러보고 싶었다.
한여름 낮 36℃ 폭염으로 달구어진 지열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이어폰을 끼고 제일 위쪽 “이당원 웰빙숲”을 향했다.
경사로를 올라가는 도중 마침 라디오에서 펠릭스 멘델스죤의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희극의 ‘서곡’과 ‘결혼행진곡’이 흘러나와 감상하게 되었다.
‘서곡’은 상당히 오랜만에 듣게 되었다.
대학시절 여름 어느날 자주 들리곤 했던 청계천 레코드판 가게와 헌책방으로 가서
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레코드 원판과 해설집을 찾아 다녔던
기억과 ‘녹턴(nocturne)'이라는 야상곡을 밤늦게 즐겨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의대생으로 공부하랴 봉사하랴 학술활동하랴 늦은 저녁시간까지 잠시의 짬도 없었다.
하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성가와 더불어 녹턴을 들으면서 리-크리에이션 시간을 갖곤 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열대야였다.
걸어 올라가는 도중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기야 금년 8월은 유난히 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9월까지 간다고 했다. 금년 장마는 강수량이 적은 마른장마였다.
8월이 되더니 연일 전국이 폭염으로 달아올랐다.
폭염경보지역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기상학자와 한의학자들은 여름은 여름다워야 한다고들 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렸해야 살기 좋다고 옛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황제내경 등 한의학 문헌을 근거로 보아도 그 말이 옳다.
사계절의 계절변화에 따른 순응이 건강관리의 기본이다.
때론 익숙해왔던 여름이 난데없이 저온화가 되면 동, 식물 뿐 아니라 인체도
생체리듬의 변화로 평형상태를 잃게되고 건강 적신호가 여기저기 생기게 된다.
여름은 더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업, 어업, 보건 등 여러 분야에 문제가 따른다.
물론 더위를 이기기 힘든 사람들이 냉방기를 많이 사용하여
생기는 에너지 소비와 노년층의 더위 저항력 약화로 다소 사망률이 높아지긴 하지만 크게 보면 그렇다.
따라서 여름이 싫어도 적응하는데 힘써야 한다.
순응의 유익을 깨달을 나이가 되어서는 1년 중 여름 끝자락인 8월이 중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8월 달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극기하면서 여름이라는 환경을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월은 숫자적으로 중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8월이 지나면 1년이 금새 가는 것 같아 8월을 꽉 잡으려고 했었다.
폭염이 있다 해도, 열대야가 계속되어 밤을 지새운다 해도, 쳐진 몸을 이끌고 일을 보더라도.
시립병원 쪽을 내려다보았다. 뭉개 구름사이로 한여름밤의 석양 노을 흔적이
막 지워지는 때를 맞추어 전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진료와 문병객 차량들이 뜸해지고 하늘에는 구름사이로 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별을 보고 꿈을 꾸었던 한 시골 소년이 그 자리로 다시금 돌아와
그때와 같은 별을 보면서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사이에 흘렀던 30여년 이상의 긴 시간들을 떠 올렸다.
“오래 산다”는 뜻의 장수면, “별고을”이란 뜻의 성곡리를 중심으로 보냈던
어렸을 적 한여름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나는 어릴 적 여름에 대한 느낌이 성장해 가면서 달랐던 것 같다.
성곡에서 태어나서 잠시 유아기를 보내다가 아버지를 따라 9살까지 영주시내
관사골이란 곳에서 보내는 동안 집과 100m정도 떨어진 우물가의 추억과 영주 대홍수가 생각났다.
9살 때 홍수로 인해 물의 위력과 재난에 미리미리 대비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서 그 이후로 모든 일에 준비하는 삶에 적용해 왔던 것 같다.
몇칠 앞서 앞집 초가집에 화재가 났을 때 어린 나이에 우물물 나르기를 밤새도록 하면서
불장난을 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다시 겹친 것이다.
영주 서천의 뚝이 터져 수면보다 저지대인 시내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다.
가재도구와 신발, 옷가지들, 오물덩어리와 나뭇가지들이 둥둥 떠다녔다.
당시는 통신, 교통이 불편해 생사를 연락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대가 높은데 살던 나는 처음에는 신기하게 느꼈다.
큰 널빤지가 떠다니길래 친구들을 불러내어 그것에 의지해 잠시 시내를 다니다가
서둘러 돌아오려는데 목표물이 없어 두려웠다.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멀리 보이는 영광중고등학교 건물이 보이길래 목표를 삼았다.
둥둥 떠다니는 노트 몇 권을 집어 들고 돌아와서 햇볕에 말린 후
골목입구 문방구 아저씨에게 돌려 준 기억이 생생하다.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만이 방향이 잡히고 의지가 생기며 마음이 안정된다는 좋은 경험을 얻었다.
당시 태풍으로 인한 홍수피해가 전국에서 영주가 가장 컸기에
당시 박정희 의장이 순시를 내려왔다고들 소문이 돌았다.
늘 범람위기에 있었던 뚝방을 옮겨 쌓는 등 정부의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홍수 나던 해 말에 할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우리 가족은 다시 성곡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성곡 본가는 오래된 기와집으로 뒤로는 소백산 기슭의 얕은 주마산에 인접해있고
양옆은 야산으로 싸여있는 깡촌이었다.
“달리는 말”의 뜻이 담긴 뒷산의 정기를 마시고 성장해서 그런지
지금껏 달려오기만 했던가? 당시 쥐꼬리 잘라오기, 송충이 잡기, 싸리나무 씨 훑어오기,
농촌 가정학습, 퇴비 만들기 등 농촌의 학창시절 각종 캠페인이 이곳을 배경으로 벌어졌었다.
환경의 중요성과 담력, 근면과 창의력 같은 의식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셈이다.
여름방학은 7월말에 해서 9월초에 개학하다보니 8월 한달 여름방학은 참으로 금쪽같은 시간들이었다.
방학숙제로 방학생활이라는 책자를 보고 공부하는 것 외에도 과제물로 곤충채집, 식물채집이 있었다.
과제물을 완성하기위해 잠자리채를 만들고 포로말린과 채집통을 사야했다.
신문이나 헌책 갈피에 식물 종류대로 크기대로 끼워넣어 압박하기를
한달 내내 거의 매일 바꾸어주는 일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
들로 산으로 나가 곤충을 쫓아가다가 논에 빠지거나 발을 헛디뎌 소(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뿌리가 다칠새라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제를 주신 선생님이 한편 미울텐데도 당연히 선생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선생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기대감으로 최선을 다했다.
결국은 이때의 집념이 내게 유익이 되어 지금의 나로 만들어 주었다.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적응했고 이겨냈다.
단지 부모님의 문제로 일어나는 고통은 예외였지만. 중고등학창 시절 여름은 등교는 없지만
대신 심부름을 자전거로 하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져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8월은 타작을 끝낸 보리로 지은 보리밥과 찐 감자, 삭혀서 만든 감자떡과
막 따서 찐 옥수수를 먹으면서 보리고개를 막 넘어온 달이다.
또한 피기 시작한 벼를 바라보면서 언제나 이밥(쌀밥)을 먹을 수 있으려나 기다려졌던 달이다.
동네 호미씻이(흔히 풋굿이라 하여 농가에서 김매기를 끝낸
음력 7월경에 동네마다 날을 받아 하루를 쉬며 즐겁게 노는 동네잔치)날을 기다리는 달이기도 했다.
돼지도 잡고 전도 굽고 떡도 마련하고 계장국도 실컷 먹는 달이었다.
저녁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밤하늘의 별에 관심이 많았다.
몇몇 밝은 별과 성좌의 이름을 배우기도 하고 별 하나에 꿈 하나씩 소원하면서 밤새 세어본 적도 있었다.
여름 하늘의 별들이 그 어느 계절보다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질 않았다.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던 어린 시절 한여름밤의 꿈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색칠이 더해 갔다.
달이 뜰 때는 글을 읽다가 어느새 노출된 종아리 살갗에 찰싹 달라붙는 악발이 모기 몇 마리와 싸워야 했다.
점차 타들어가고 있는 모깃불 잿더미 속에 알감자를 구워 먹으면서
선친들로부터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갔던 달이다.
낮 동안 달구어졌던 지열이 멍석 틈새로 새어 올라와 땀범벅의 열대야인데도
쏟아붓는 잠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너는 잘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단다.”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누구와 얘기도중 의견이 달라서 조율하다가 너가 원하는 대로 안 되더라도 너가 양보하거라.
양보한 후 누가 널 보고 바보라 해도 상관치 말거라. 설령 바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너는 바보가 아니니까 괜찮다.”
멱을 감겨주시면서 여름날 언젠가 가르쳐 주신 어머니의 따뜻한 교훈이었다.
난 잠자는 신경은 몹시 둔했던 모양이다.
초저녁 잠꾸러기였으나 새벽은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할아버지의 한문 공부 강요 외에는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분이 없었다.
어머니는 더욱이 책을 보고 있으면 간식을 주시면서 몸생각 하라는 충고밖에 안하셨다.
농촌에서의 추억 중 흔히 부주의로 일어날 수 있는 게 뱀에 물리거나 벌에 쏘이거나 식중독이었다.
나는 다 겪었고 게다가 여러번 경험하면서 그 뒤로는 나름대로 방비책을 가지게 되었다.
한의원 일을 돕다가 약 써는 작두에 손가락을 베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졸다가 딴 생각하다가 얘기하다가 그랬다.
무슨 일에서든지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동네 너머 연못에서 물놀이하다가 익사할 뻔했던 일로 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생겨서 그랬는지
물에서 맥주병이 된 것이 큰 아쉬움이다.
한 때는 이래서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
가끔 태풍이 올때 집단속에 동원되면서 긴장해야하는 달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예천군 감천면 유동 외갓집의 원두막에 가서 수박을 실컷 먹고 난 후
빈 껍질로 물고기를 잡으면서 여름방학이 9월까지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던 달이다.
닭과 거위, 칠면조의 먹이를 위해 한여름 작살총을 만들어 개구리 잡던 일,
타작을 끝낸 보리짚으로 여치의 집을 만들어 노래듣던 때도 8월이었다.
개나 고양이와 같이 놀던 일, 교회 앞 넓은 미뚱에서 동네 선 후배들과 자치기 하던 일,
여름사과 서리하다가 혼난 일, 몰래 여자친구에게 깨금열매를 선물로 주어 점수딴 일도 이때였다.
광복절이 가까이오면 할아버지는 밤새 광복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할아버지의 광복 주변 이야기는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 직장에서 해직된 후 서당과 약국과 한의원을 이어 경영하시면서
기울어진 가문과 나라의 독립과 애국을 위해 교육, 진료,
후원을 해 오셨던 터라 광복의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고통당하셨던 일을 얘기하시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어느 해에는 교육의 힘이 최고라고 하시면서 동네주민들을 불러 잔치를 배설하셨다.
춤도 추시고 노래도 하시고 시조도 읊으셨다.
“일제와 북한 인민군 때문에 우리가 고생 많이 했지만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없이 살아도 내나라 내땅을 밟고 사니까 기분 좋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가난하지만 우리 더 열심히 해서 잘 살아봅시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고 뿌리와 얼 교육에 최선을 다합시다.”
덩실덩실 춤추시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간 한복 바지 끈을 위로 치켜 올리시면서
주민들을 향해 호소하시는 모습이 선하다. 이 광경이 농촌식 광복절 행사였다.
10살 소년의 가슴 깊이 애국과 민족의식을 일깨운 모습이었다.
광복은 일제의 만행으로 강탈당했던 국토와 우리의 열을 되찾은 기쁜 날임에는 틀림없다.
호전적이던 독일도 이미 항복했는데도 워낙에 일제가 포악무도하고 악바리로 끝가지 끌다보니
연합군으로서는 항복하게 하는 방법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고 긴 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 되었다.
사상자를 엄청나게 낸 원폭투하가 자연 재앙인 폼페이와는 달리
인간이 행한 재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댓가로 한반도가 광복을 맞이했고 세계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제국주의화하려는 탐욕과 반인륜적인 행위로 타국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만큼 되돌려 받았다는 인과의 진리를 되새기면서 말이다.
8월은 광복절이 중간에 있어 참으로 의미 있고 기뻐할 달이다.
나라가 있어 우리가 있고 내가 있다.
당시는 비록 국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방국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았다.
이젠 국력으로 나라를 지키고 얼을 보존해야 할 때이다.
국력은 국민 한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지금 힘들지만 내가 종일토록 한 이 일들이 국력 창출에 직간접적으로 보탬이 된다면
감히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가져본다.
광복과 관련된 기억과 지나간 날 8월 한여름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잘 살아보자는 의지로 8월이면 논두렁, 밭두렁에 무성한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기 위해
마당 한구석에 쌓아놓고 발효시키는 일을 도왔다. 발효된 유기질 퇴비로 옥토를 만들어
산출량을 높이려 했던 것은 당연히 한여름에 해야할 작업이었다.
밭매기, 김매기, 고추따기, 김장배추씨 뿌리기, 소풀 뜯어 먹이기 등 쉴틈이 없었던
그 시절이었지만 8월 15일이 다가오면 괜히 기분 좋고 기뻤다.
이와 같은 현상은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소년의 여름생활이었다.
대학시절 본초(약물) 채집차 친한 동창 5명이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폭우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로 위기대처의 교훈을 얻었다.
8월쯤 고향집의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틈틈이 영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테이프를 들으면서 2학기에 배울 과목을 예습했다.
또한 몇 개의 봉사단체와 교회주체로 가는 하기봉사에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어느 지역을 정해놓고 봉사하곤 했다.
교수시절 국제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여름에도 많이 있는 관계로
긴장의 연속이었고 지도교수로 있는 봉사단체를 이끌고 농어촌이나 해외의료봉사를 나가는 것도
교육의 연장선상이였기에 대부분 바쁜 여름을 보냈었다.
이와 같이 이런저런 경험들이 많은 달이지만 8월은 1년중
남은 몇 개월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고자 결심하는 달이었다.
학창시절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면서 어린 마음으로도 일제강점에서 얻은
해방감과 자유의 가치를 더불어 느낄수 있었다.
6.25 전쟁을 느낄만한 나이도 아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폐허 속에서도
그냥 자포자기하지 않고 잘 살아보자는 선친세대의 의지와 숨은 행복이 느껴졌다.
비록 배가 고프고 변변한 병의원이 없어 아프면 꾹꾹 참아야 하는 시절이었고,
교통도 정보도 소식도 느릿하던 슬로우 사회였던 그때가 내겐 내면의 행복도가 더 높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왠지 그때보다 즐겁고 기대되는 8월이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광복의 기쁨이 반으로 줄고 대신 염려가 생겨났다.
바로 이념분열이다. 종북 ․ 친북 행동이다. 북한 주민의 것이어야 할
생명존엄성과 재산을 철권으로 짓밟고 극도의 인권유린하는 공산당 권력
지배층의 반인륜적인 행태와 비도덕성은 용인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부정하는 이념을 신봉하는 소수의 세력들에 대한 염려이다.
우리는 민족평화통일이라는 길고 험한 숙제를 풀어나가야 할 지금 정치와
사회속에 깔려온 분열증의 심각성을 실감할 때 여간 걱정이 아니다.
도대체 남북을 넘어 글로벌, 나아가 우주시대를 열어가는 마당에 패쇄통치에
새빨간 거짓말과 비인권 비도덕이 진행되는 곳을 향해 아무말도 못하고
따라가는 종북세력이 가진 사고는 어떤 틀일까?
북이 좋고 찬양할만하면 그쪽으로 이사가서 살면 더 좋을 것을 굳이 여기서 살까?
무엇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비판하면서 소위 인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지?
사회정의란 가치관을 위해 언론과 법조계가 민주적으로 바뀐지
오래된 한국을 비판하는 이들이 언론과 법이 여전히 폐쇄되어 있고
세계에서 유일무일한 일인독재 우상세습체제인 북쪽을 찬양하는 모습은 분명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
나 또한 평화통일을 기도 제목으로 붙여왔고 남북교류 협력에 적극 동참해 왔다.
북쪽의 인민들도 나의 동포요 동족이다. 경주김가 또한 많이 살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배층이다. 글로벌 시대에 국경도 이념도 허물어지고
시장경제가 주도하는 시대에 이미 낡아빠진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치하고 있는 지배층이 걸림돌이다.
숨기고 싶어하고 공개를 거부하는 사회일수록 반인륜적 비인간적이다.
정의로운 사회일수록 떳떳하게 언론앞에 선다. 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언론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쪽은 어떤가? 언론은 권력의 하수이고 관제언론만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언론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산성 없고 끝없는 이념논쟁으로 가족, 사회, 국가를 분열시키는데 대해
신물이 나서 탈이념 실용주의로 가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이념의 분열 주변에 남북대결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과거사속에서의 잦은 전쟁과 주변 대국들의 이념 대립이 컸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을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있는 사회,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사회의 추구에 핵심을 두어야 한다.
방법이 좀 다르다는 것뿐이지만. 인권보호, 반독재, 반핵을
주요 가치관으로 삼는 것은 보수나 진보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쪽이 이것을 어기고 있는가? 아니면 남쪽인가?
북에서는 가문독재를 위해 3대째 세습에 혈안이 되고 있다.
아들 김정은을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세습을 했던 것처럼 권력을 승계시키려고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백주에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인권문제도 비교해보자.
국제사회 언론보도와 탈북자들의 증언만 갖고도 북쪽의 인권 유린이 어떤지 자명하지 않은가?
숨기기 위해 철통지배를 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수틀리면 핵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고 경거망동하고 있는 쪽이 어디인가?
북의 이와 같은 실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자신은 남한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면서
가치관과 국가관이 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북이 좋다고 세뇌하는가?
무언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 내막에 분명 이중성이 들어 있든지 아니면 사주를 받고 있음이 자명하지 않는가?
이런 감언에 휩쓸리는 남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한심스럽다.
지금 북의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싫어서 그토록 삼엄한 경비의 벽을 뚫고 목숨을 건 탈북이 왜 일어나겠는가?
주체사상에 빠져 월북하는 거야 자유겠지만 남북 사이 에서 이중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그 중에서도 사실 증거를 통해 수긍을 하는 사람들은 선도하면 된다.
하지만 진실조차 왜곡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머리 구조는 어떻까?
그런 사람들은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가나 단체도 개인도 부정적인 사람들로는 절대 성공을 할 수 없다.
긍정적인 사람 몇 명만으로도 어떤 환경도 이겨나갈 수 있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국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과학적 조사 결론이 났는데도
부정하는 사고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선상에서 종북의 입지가 위축되기 때문이 아닐까?
거기에 일부 정치인들과 정당이 동조한 것은 일부는 표의식이고 또는 대립을 위한 대립을 세우고자 함이다.
이 사안은 대한민국의 문제요 국민들의 생존권 문제이기에 심각하다.
제발 국가정체성 문제라든지 국익에 관한 문제는 당리당략을 떠나 하나가 되야 한다.
분명 역사의 심판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이고 참여연대 대표였던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인 개신교 원로 박모 목사가 좌파 이념론자에 대해
몇칠전 침묵을 깨고 일침을 가한 고언(苦言) 내용을 주시해야한다.
"직접 자유주의 선거로 뽑은 정통성 정권에 대해서 불의나 정책대결 면에서 견제 역할을 하는
시민운동을 해야지 친북활동 목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좌파편향적인 행태를 벌이고 있는 집단은 심히 경계해야한다.
김일성 찬양의 궤변에다 북한의 독재우상체제는 비호하고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애써 외면하는 독선적인 사람 모씨는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 사람은 애초부터 얘기가 통하지 않는 북한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폄하시킨 그런 사람은 입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정말 대한민국의 종교인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닌가."
과거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현재 시민운동 단체의 한 간부의 염려스러운 말이다.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한 궤변을 미국까지 가서 늘어놓다가 망신당한 일이나
4대강 사업반대나 광우병 촛불시위 주동도 그렇다.
광우병도 진실이 아닌 내용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유리한 대로 이것저것 짜깁기하고 왜곡하여
얼마나 국력 낭비를 했던가? 결과적으로 모 언론사의 좌편향기자들의 행패가 아니었던가?
이 또한 주동자를 가려내어 국가적 손실보상을 책임지워야 한다.
사안 자체에 대한 본질보다는 단순히 대정권 투쟁과 국론분열획책으로 이적행위를 일삼아
결국은 적화통일을 획책하려는 북한의 음모성 지령에 꼭두각시 노릇하는 남한거주 행동대원들이라고
탈북인사들이나 방북외국인, 북한전문 정보관련자들의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건이 생길 때 정당이 다르고 사고가 달라도 소수 집단이나 개인의 불이익이 초래된다 해도
큰 틀에서는 하나로 뭉치는 저 선진 국가를 명백히 보았으면 좋겠다.
이런 정신 없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관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교육자든 간에. 선출직은
이런 가치관을 가진 자들을 가려내어 선출해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왜 북의 폭정을 외면하는가?
왜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가?
이데올로기적 암덩어리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고 흠집을 낸다면
이는 분명 대한민국의 정상세포가 아니고 분명 밖에서 들어온 암세포임에 틀림없다.
항암수술이나 요법이 빠를수록 좋다.
멘델스죤이 젊은 날 읽고 감동한 감흥을 담아낸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 음악 13곡 중 “결혼행진곡”이 오늘 왠지 더 저며 온다.
젊은 남녀 주인공들이 벌이는 이기적이고 즉흥적이고 어긋난 사랑으로 촉발된
가문간 남녀간의 복잡하고 불화한 모든 관계가 결혼을 통해
화해와 용서와 관용을 경험하게 된다는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 때문이다.
제자리로 복귀한 남녀의 진정한 사랑을 알리는 아름다운 결혼식은 둘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가문과 사회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기에 그렇다.
둘이 하나가 되어 출발하는 결혼예식 때마다 울려 퍼지는 웅장하면서도 경쾌하고
낭만적인 멘델스죤의 ‘결혼행진곡’은 익히 들어왔으면서도
왜 우리에게는 이념분열이 하나로 되지 못할까?
일본에 나라를 강탈당해 땅과 가슴을 치며 애통하고 분노했던 날도 100년전 8월이었다.
선배들의 나라사랑에 대한 필사의 애국심으로 해방된 날도 8월이었다.
36년간의 긴 세월 동안 겪은 고난 속에서 건진 해방이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측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노를 관용으로, 원한을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키면서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가 지구촌가족이라는 마음으로 몸소 실천해온 거룩한 우리 한민족의 선배들을 보라.
해방 후세대를 사는 우리들도 선친들로부터 이런 생생한 경험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긍심과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정말 남북이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8월을 만들어 나가자.
교조화된 신념 안에 갇혀있는 이념론자들이여! 이 시간 “결혼행진곡”을 다시 한번 감상해 보자.
셰익스피어와 멘델스죤의 감흥을 갖고 말이다.
우리의 자녀들, 전후세대에 나서 백지상태의 젊은이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뇌속에 그려넣어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고 드넓은 지구촌에서 이념 없이 마음껏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인성과 긍정의 사고를 가르쳤으면 한다.
농촌과 도시, 태어난 지역을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활동하고 있는 무대가 남북을 뛰어넘어
세계 도처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가르치자.
마지막 분단국이 평화통일국가로 가는 그날이 속히 오도록 극렬한 이념 분쟁은 내려놓자.
그러면 하나가 된다.
‘결혼행진곡’ 속에 담겨있는 “화해와 용서”의 터위에“새로운 출발”로 하나가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첫댓글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용기를 주셔서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더욱 반갑습니다.
특히, 관사골이야기와 대홍수 이야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자주 들려 많은 지식와 새로운 정보 익히겠습니다. 언제나 건안하시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