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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편, 『회고사.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변종길 교수 은퇴 기념 논문집. 『개혁신학과 교회』 35a,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2021), pp.19-31.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고려신학대학원에 부임한 지 벌써 30년이 되어 정년 퇴임을 앞두고 회고사를 쓰게 되니 감회가 깊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많지만,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나는 수업이나 설교 시간에 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뭔가 말해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그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는지 간단하게 회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진술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
나는 1957년 1월에 부산 적기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아버지는 그곳에 있는 보급부대에서 하사로 근무하셨다. 제대 후 부산에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잘 안 되어서 고향인 밀양으로 오시게 되었다. 그때 나는 다섯 살쯤 된 것 같다. 할머니 댁 대문 앞에서 조그만 화물차에서 짐을 내리는 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밀양군 산내면 가인리의 아름다운 산골에서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곧 경북 경산군 자인면으로 가서 5일장을 다니면서 옷 장사를 하셨다. 만 여섯 살이 되자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자인으로 가서 자인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큰 길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길거리에서는 뜻을 알 수 없는 “새드 무비 ~”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학년 담임은 여선생이었는데 손바닥을 매로 세게 때려서 무서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가까이의 숲에 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4학년 때 담임은 인상이 좋은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특별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떤 청년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그 제자 중 한 사람에 의해 배신당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어느 나라의 누구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상이 아주 좋은 선생님의 얼굴과 함께 오래 기억되었다.
그러다가 4학년 2학기 때 큰 일이 생겼다. 당시에는 장사를 하면 계를 들어서 필요할 때 돈을 타 쓰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계주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여러 사람이 망하게 되었다. 우리 집도 월세방 하나에 살고 있었는데 빚쟁이가 와서 아버지의 시계마저 풀어갔다. 결국 쫓겨서 청도의 외갓집을 거쳐 밀양의 할머니 댁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4학년 말에 산내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여기는 산골이라 학교에 가려면 3, 40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산골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은 재미있었다. 방학이면 할머니 댁의 소를 먹였는데 아침 일찍이 소를 산에 갖다 놓고 와서 아침을 먹었다. 동네에서 한참 놀다가 점심을 먹고 나면 산에 가서 놀다가 저녁에 소를 몰고 왔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소를 먹였는데 방학 때면 늘 할머니 댁에 와서 소를 먹이며 지냈다. 강에서 멱을 감기도 하고 산에서 전쟁놀이와 온갖 놀이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다가 소나기가 오고 나서 동쪽 산에 무지개가 서면 참으로 신기하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자연은 무언가 신비하고 고마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부모님은 밀양읍 삼문동에 자리를 잡으셔서 나는 5학년 말에 밀양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하루는 동네 아이들이 몰려오더니만 교회로 가자고 하였다. 따라가니 교회 바닥에서 풍선 굴리기 게임을 하고 사탕을 주었다. 아마도 성탄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고 교회로 가자는 사람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제대로 공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매일 시험이 있었는데 담임 선생이 엄청 무서워서 엎드려 뻗쳐 해 놓고서 틀린 문제 한 개당 몽둥이 한 대씩 때렸다. 덕분에 성적은 잘 나왔다. 그러나 담임 선생이 중학교 입학 원서를 써 주지 않아서 아버지께서 고생을 하셨다. 여러 번 선생님을 찾아가서 만난 끝에 부산의 개성중학교로 타협을 보았다.
그래서 온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부산은 신발 공장, 내의 공장 등이 생겨서 시골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나에게도 도시 생활은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를 먹이며 산골에서 지내던 시절이 자꾸 그리워졌다. 그러다가 방학 때 할머니 댁에 가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자연은 나를 품어 주는 어머니처럼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였다. 뭔가 아름답고 신기하고 고마운 것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공부에 집중하니 성적이 쭉 올라서 졸업식 때에는 교장상을 받았다.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뭔가 낭만적인 것을 찾고 싶었다. 처음에는 미국 영화와 서양 문학작품에 빠져들기도 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영어 잡지와 시사 주간지를 사서 읽기도 하고 남포동에 가서 영어 소설을 사서 읽기도 하였다. 1학년 겨울 방학 때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영어 원작으로 읽었다.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100여 페이지가 넘어가자 서서히 내용에 빠져들었는데 나중에는 밤새워 다 읽은 적이 있었다. 또 팝송을 좋아해서 녹음기에 녹음해서 많이 들었다. 특히 카펜터스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담임 선생에게 불려가서 “너는 머리에 비해 성적이 안 나온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가 2학년 2학기가 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낭만은 뒤로 미루고 우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고 공부에 집중했더니 꾸준히 성적이 올라서 3학년 말에 대입 원서를 쓸 때에는 담임 선생님이 “너는 네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다.
대학 시절의 방황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여 관악캠퍼스 1기로 서울 생활을 하니 모든 것이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특히 고등학교 선배들이 찾아와서 짜장면을 사 주면서 “대학 생활을 그냥 어영부영 보낼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말에 솔깃하여 같이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역사 공부인 줄 알았는데 점점 현 사회의 부조리와 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대학 생활은 아니었기에 뭔가 허전하였다. 그래서 불교학생회에 한번 가보았더니 강남의 봉은사로 데리고 가는데(그때는 거기가 숲이었다), 스님이 중국의 시를 써 놓고서 “산은 어떻고 물은 어떻고 ...” 이런 강연을 하였다. 나는 ‘이런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면서 실망하고서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악회에 한번 가보았다. 나는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지에 구두를 신고 갔는데, 따라가 보니 북한산의 인수봉을 오르는 것이었다. 줄을 타고 바위를 오르는데 바람은 불고 춥고 길은 가파르고 하여 순간 줄을 놓쳤다가 다시 잡았다. 만일 줄을 다시 잡지 않았다면 나는 저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을 것이다. 중간에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꼭대기까지 올랐다. 내려갈 때에는 로프를 다리 사이에 감고 폴짝 뛰면서 내려가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서 인수봉을 내려왔다. 그 후로 다시는 산악회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난감하였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들 중에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 가지 않았는데 기독교는 왠지 미신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 정신이 충만했다. 어렸을 때 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자연의 운행 원리를 다루는 과학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2학년 2학기 가을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슬쩍 가보고는 실망하였다. 천하의 수재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하더니만 그들의 도덕적 수준은 형편없구나. 이들이 앞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순수한 곳, 때 묻지 않은 곳은 없단 말인가? 이렇게 한숨을 쉬면서 자취하는 집에 돌아왔다.
그러다가 문득 교회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교회는 어떨까? 마지막 희망으로 교회에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방문을 나서는데, 같이 자취하고 있던 친구가 그 날 따라 “교회 같이 가자”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래. 가자” 하면서 따라갔다. 그래서 간 곳이 서울서문교회였다. 김만우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셨고 대학부 담당목사는 정근두 목사님이셨다.
주 안에서 새로운 삶
교회의 대학부실에 들어서자 나는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다. 밝은 얼굴로 찬양을 하는데 순수하고 좋아 보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의 아는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친숙하게 느껴졌다. 타락한 세상에 그래도 피할 곳이 있다는 게 기뻤다. 마음이 열리니 설교와 말씀이 잘 들어왔다. 어릴 때 나에게 신기함과 고마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그러다가 3학년 겨울 방학이 되자 졸업을 1년 앞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4학년 선배가 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우선 성경을 한번 읽어 보자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림동의 하숙집에서 성경을 집중해서 읽었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내 앞에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 강렬한 임재감을 느꼈다. 그때 받은 인상은 너무나 강렬하여서 온 마음과 몸을 지배하였다. 그런 상태로 한 주를 지내다가 주일 날 교회에 가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게 되었다. 입에서는 성경 말씀이 줄줄 나오고 얼굴은 빛이 나니 친구들이 입을 다물고 할 말을 잃었다.
4학년 1학기가 되어서도 이런 은혜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침 수업이 오후에 시작되어서 오전 내내 성경을 읽고서 학교에 갔다. 학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친구를 발견하면 여기 와서 좋은 말씀을 하나 보고 가라고 하면서 성경 구절을 읽어 주었다. 그러니 다들 어리둥절하였다. 당시에 나는 요한과 바울의 말씀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때 나는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왠일인지 철학과에 가서 헬라어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
여름 방학이 되자 현실적인 고민이 다가왔다. 한 학기만 더 있으면 졸업인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전부터 나에게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 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법학 과목을 몇 개 수강해 보니 딱딱하고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학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크게 실망하셨다. 경제학과에 가서 행정고시를 보겠다고 해서 겨우 진정시켜 드렸다.
그런데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았는데 고시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할 마음도 없었다. 마침 대학원 진학 바람이 불었지만 그것은 여유 있는 집 학생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기업들이 중동 진출을 하면서 대졸 초임이 엄청 오르고 신입사원 유치 경쟁이 뜨거웠다. 우리 과 정원이 75명인데 과 사무실로 추천 요청이 들어온 인원이 8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우리 과에서 제일 선호하는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다. 그래서 방학 때 한국은행의 조사부에 가서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었다. 직장에 다니더라도 정말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근무 시간 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대학원을 가든 어디를 가든 복음 전하는 것이 제일 보람된 일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이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을 주업무로 하면 좋은데 실제적인 문제가 많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반대와 실망이 크실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외에도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학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등록금과 학비는 어떻게 마련할지, 결혼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등등. 당시에 이화여대생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신랑감을 조사하니 목사는 이발사 다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신림동의 하숙집에서 이런 저런 걱정을 하면서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꿈도 아닌데 이상한 환상이 나타났다. 캄캄한 밤에 내가 걱정하고 있는데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취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어서 내게로 오너라. 네가 걱정하는 것을 내가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즉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라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나의 걱정하는 것 모든 것을 책임져 주옵소서.” 나는 물론 꿈이나 환상을 믿지 않는다. 오직 성경 말씀만 믿는다. 그런데 1978년 여름에 이런 일이 내게 있었다.
고려신학대학원으로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고 나니 주위 사람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대학부 지도목사이신 정근두 목사님도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하숙집으로 심방을 오셨다. 그 목적은 같이 하숙하는 친구인 강 모 군을 신학교에 가라고 권면하기 위해서였다. 담임목사이신 김만우 목사님은 대학부 학생들 중의 10분의 1을 신학교에 보내기 위해 늘 기도하고 계셨는데, 대학부 지도목사에게 신학교에 갈 청년을 확보하라고 특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참 성실해서 누가 봐도 신학교 가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이 하숙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후 교회에 갔을 때 나는 정 목사님을 만나 웃으면서 대들었다. “목사님, 왜 저에게는 신학교 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정 목사님은 깜짝 놀라 입을 열지 못하셨다. 얼마 후에 김만우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참 잘 생각했다”고 칭찬하셨다. 그때 나는 “총신대학에 가려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고려신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또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에서는 신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대뜸 “고려신학교에 가야지!” 하신다. 그래서 나는 바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순종하였다.
송도로 가는 길
2학기를 마치고 부산에 내려오자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더 이상 말을 안 해도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박성복 교수님을 준비하셔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동래에 있는 귀한 장로, 권사님 댁에 가정교사로 소개해 주셨다. 가정교사로 갔지만 사실 공부는 조금이고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보호받고 지내게 되었다.
또 영주동교회에 소개해 주셔서 1978년 12월 31일에 교육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밤을 보내면서 ‘왜 내가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이 생각났다.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교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다. 결국 무척산기도원에 가서 나흘간 금식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무사히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신학교 입학시험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지원하면 다 합격하였다. 등록금이 문제인데 마침 그 학기부터 한상동 장학금이 생겨서 1년간 받게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에 갔더니 어떤 분이 등록금을 주고 가셨다고 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람을 보내셔서 하신 줄로 믿는다.
화란 유학
1983년 2월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영어도 배울 겸 해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신학석사 과정에서 등록해서 공부했다. 그때 한철하 박사님을 통해 ‘아시아 복음화’의 꿈을 품게 되었다. 그때 갓 결혼해서 경기도 양평의 아신 마을에 잠깐 살았는데 참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아침에는 호수에 안개가 깔려 있고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저녁에 기차를 타고 아신역에 내리면 호숫가의 마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혹 서울에서 늦게 출발하여 버스가 끊어지면 양수리에서 화물차를 세워서 타고 오곤 했다. 당시에 서울영동교회에 강도사로 있었는데 나를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주일만 봉사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당시 서울영동교회는 손봉호 박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그분의 메시지는 당시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절제와 구제 등에 대해 많이 배웠다.
2년여의 준비 끝에 1985년 2월에 네덜란드 캄펀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내 마음에는 한국 교회에 좋은 주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신학교 3학년 때 네덜란드에서 온 고재수 선교사를 통해 화란어를 조금 배웠는데 그때 판 브루헌 교수의 글을 읽고 매료되었다. 그래도 먼저 미국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조언에 따라 미국의 신학교에 편지해서 허락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미국 대사관에서 갑자기 한국 목사와 신학생들의 비자를 다 막아 버렸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에 시도해 보았으나 다 막히고 결국 캄펀으로 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곳으로 인도하신 줄로 믿는다.
네덜란드 캄펀에서의 7년은 나에게 꿈 같은 세월이었다. 당시의 캄펀은 아름다웠고 주일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갔다. 신앙이 좋은 친절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있어서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나는 개혁 교회와 신학을 실제 삶으로 배우고 체험하였다. 그런데 신학생들은 개혁주의 신학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합리주의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도를 힘들어하고 경건생활이 약했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들은 아주 존경스럽고 훌륭하였다.
정확하고 자상하신 지도교수님의 지도와 보살핌을 받아 7년만에 석사와 박사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92년 2월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7년간 전적으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영동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재정후원이 큰 힘이 되었으며, 이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화란 캄펀 유학생 중에서 한국 교회의 지원으로 공부한 첫 학생이었다. 그래서 늘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공부하는 모든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한국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두루 읽고 자료를 모았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1992년 2월 7일에 박사학위를 받기 얼마 전에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다른 생각 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귀국하였다. 2월말에 인천에 마련해 주신 집에 도착하여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바로 새 학기를 맞아 강의를 시작하였다. 선배와 동료 교수들이 젊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부산과 인천의 캠퍼스로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강의했는데 피곤도 모른 채 신나게 강의했다. 처음에는 우리말도 잘 안 되고 머릿속에 든 게 정리가 안 된 채로 강의한 것도 많았다. 네덜란드에서 부친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컴퓨터가 없어 손으로 강의안을 써서 복사해서 나누어 주었다. 이 수기 강의안은 나의 30년 사역의 첫 시작이었다.
30년 동안 계속된 나의 교수 생활에 대해 다 적을 수는 없고 그 동안 내가 힘썼던 것들, 특별한 은혜들만 몇 가지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제일 힘썼던 것은 강의안을 만들고 수정보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약하게 시작했던 것이 해마다 조금씩 보완되고 두터워져 갔다. 이처럼 강의안을 보완해 가는 것을 나는 제일 큰 기쁨과 보람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중에 책과 주석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매학기 수업 시간마다 하나님이 주신 영감과 은혜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일부는 출판되었지만 아직 미완성과 미출판의 것들도 많다.
다음으로 수업 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감동될 때가 많이 있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지혜를 주셔서 그 시간, 그 순간에 재치 있는 말, 은혜로운 말이 떠오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 적이 많았다. 학생들은 그냥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감동하신 은혜였다.
이와 관련하여 나에게 가장 은혜로웠던 시간은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새벽(아침)에 교수와 학생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을 받고 힘을 많이 얻었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과 은혜와 힘을 수업 시간에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되돌아보면 이때가 가장 즐거웠던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가끔 하는 경건회 설교와 수요예배 설교, 새벽기도회 설교 때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다.
그리고 30년 동안 나는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가능한 한 다 응하고 정성껏 써 주었다. 글 쓰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새벽에 몇 번 기도하고 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글을 쓰면 이상하게도 글이 잘 되었다. 초고를 쓰고 나면 교정을 보고 또 교정을 보고 하였다.
되돌아보면 책을 많이 출판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주석도 몇 권 쓰지 못하였고 또 논문을 많이 쓰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논문을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 조용하게 연구할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물론 더욱 부지런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나의 한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주어진 일만 하다 보니 벌써 은퇴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계획
은퇴하면 우선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 걷고 등산을 해서 힘을 얻은 후에는 그 동안 미루어 왔던 원고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아서 원래 계획하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이처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도 헛되지 아니하여 그분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실 줄로 믿는다.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10). 물론 바울처럼 많이 수고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제는 이마저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힘주시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변종길 교수의 정년 퇴임 회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