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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따②] 고짜라라는 영역에서의 반전
소크라데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였을 때, ‘너 자신’은 ‘고짜라’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저는 봅니다. ‘고짜라’의 양 극단에 <한 쪽에는 심의식이라는 것들이 있고요, 다른 한 쪽에는 법(法, 담마)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위치하는데> 그 중간의(=둘 사이의) 영역이 바로 ‘너와 나, 혹은 우리들’입니다. 절대로 심의식이 <‘너와 나, 혹은 우리들’인 것>이 아닙니다. 심의식은 ‘사기’입니다. 사기. 양파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까도 까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고 아예 알맹이가 없는 것이 심의식입니다.
다만 심(心)의 경우가 좀 ‘청정한 경향이 있어서’ 약간 인정하는 것이지 <심(心)도 생겨난 것이고 얼마든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예 설명도 하지 않으셨어요. 언급은 하셨는데, 심의식을 싸잡아 ‘변덕쟁이’라고 하신 것이 전부입니다.[☜실재로 ‘변덕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제가 해당 경문을 이해하기로는 그렇다는 말.]
반면에 ‘법(法, 담마)’에 대해서는 <너무 친절하시고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단 심의식은 ‘자기 자신’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하기는 법도 마찬가지인데 ‘법(法, 담마)’에 대해서는 특별대우를 하는 이유가, 고짜라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니까야에는 <‘법(法, 담마)’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나고 이렇게 하여 사라진다>는 것만 설해집니다.
그 어떠한 ‘법(法, 담마)’이든 간에 그것이 생겨나거나 사라질 때는 ‘인(因)과 원인(原因)과 집(集)과 연(緣)’을 갖추어 그러한다고 설해집니다. 여기에서 <불선법이 생겨날 때 언급되는 것들>을 살펴봅니다.
Sanimittā bhikkhave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dhammā, no animittā. Tass'eva nimittassa pahānā evaṃ te pāpakā akusalā dhammā na hontī ti.[AN. vol.1. p.82]
비구들이여, 相(nimitṭa)이 있기에 ‘악하고 不善한 法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이 생겨나고 相(nimitṭa)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相(nimitṭa)을 버림으로서 악하고 不善한 法들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어지는 경문에서는 위 인용경문에서 ‘相(nimitta)’ 대신에 ‘nidāna(原因), hetu(因), saṅkhārā(行), paccaya(緣, 조건), rūpa(色), vedanā(受), saññā(想), viññāṇa(識)’을 대체해가며 경문들이 이어집니다. 항상 ‘相(nimitta)’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이어서 <hetu(因), nidāna(原因), 집(集, samudaya), paccaya(緣, 조건)> 대신에 <nidāna(原因), hetu(因), saṅkhārā(行), paccaya(緣, 조건)>의 순서로 설해집니다.[☜여기에서 ‘집(集, samudaya)’과 ‘saṅkhārā(行, =3행)’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음.] 이어서 행을 제외한 오온이 거론됩니다.
위 관련경문의 순서는 다른 경문에서도 그 순서가 흩어지지 않고 설해집니다.
Idh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dukkh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Uppannaṃ kho me idaṃ dukkhindriyaṃ, taṃ 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dukkhindriyaṃ uppajji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so dukkhindriyañ ca pajānāti, dukkh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dukkh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Ka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m jhānam upasampajja viharati, e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dukkhindriyassa nirodhaṃ tathattāya cittaṃ upasaṃhāsi.[SN. vol.5. p.213]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며 지내는데 苦根(dukkhindriya)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苦根이 생겨났다. 이것은 <相이 있기에(sanimittaṃ), 原因이 있기에(sanidānaṃ), 행이 있기에(sasaṅkhāraṃ), 緣이 있기에(sappaccayaṃ)> 생겨나는 것이지, <相이 없다면(animittaṃ), 原因이 없다면(anidānaṃ), 행이 없다면(asaṅkhāraṃ), 緣이 없다면(appaccayaṃ)> 苦根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꿰뚫어 안다. 그는 苦根을 꿰뚫어 알고, 苦根의 集을 꿰뚫어 알고, 苦根의 滅을 꿰뚫어 알고, 그는 이미 생겨난 苦根이 남김없이 사라짐을 꿰뚫어 안다. 어디서 이미 생겨난 苦根이 남김없이 사라지는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들(kāmā)로부터 벗어나고, 不善法들(akusala dhammā)로부터 벗어나고서, ‘①심사(vitakka)와 숙고(vicāra)를 갖춘 ②벗어남(viveka)에서 생겨나는 기쁨(喜, pīti)와 즐거움(樂, sukha)이 있는’> 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여기에서 이미 생겨난 苦根이 남김없이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를 두고서 苦根의 滅을 여실하게 아는 자라고 부른다. 그는 心을 그와 같은 상태로 이끈다.
많은 분들이 ‘인드리야(indriya, 근, 능력)’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시는데, 괴로움을 느끼는 능력인 苦根(dukkhindriya)도 ‘인드리야(indriya, 근, 능력)’입니다. 그러한 ‘인드리야(indriya, 근, 능력)’가 ‘相이 있기에(sanimittaṃ)’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해집니다.
만약 <‘相이 없다면(animittaṃ)’ 苦根(dukkhindriya)이라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꿰뚫어 알아야 한다고 설해집니다. 그렇다면, 심해탈 중에 無相心三昧라는 것이 있는데 <왜 불교는 그 無相心三昧를 강조하지 않는 것일까요?>
…katamo nu kho animitto cetosamādhīti. Tassa mayhaṃ āvuso etadahosi. 'Idha bhikkhu sabbanimittānam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m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animitto cetosamādhī' ti. So kho ham āvuso sabbanimittānam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m upasampajja viharāmi, tassa mayhaṃ āvuso iminā vihārena viharato nimittānusārī-viññāṇaṃ hoti.[SN. vol.4. pp.268~269]
…어떠한 것이 無相心三昧인 것입니까? 벗들이여, 그 당시 나는 ‘비구가 一切相을 作意(manasikāra)하지 않음으로서 無相心三昧를 성취하는데, 이를 두고 無相心三昧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벗들이여, 그래서 나는 一切相을 作意하지 않음으로서 無相心三昧를 성취하였는데, 그 때에 나는 그러한 상태에 머물고는 있었지만 ‘相을 쫓는(=相에 따르는, =相에 수반되는) 識’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위 경문은 <‘니미따(相, nimitta)’와 ‘작의(作意, manasikāra)’의 관계>와 <‘니미따(相, nimitta)’와 ‘식(識)’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관계의 차이점을 아는 것이 ‘니미따(相, nimitta)’를 아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경전이 ‘니미따(相, nimitta)를 파악한다’라고 말하는 것임. 엄청 어려우므로 주의하여야 함.]
먼저 별 것 아닌 <니미따와 식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識이 ‘色相 · 聲相 · 香相 · 味相 · 触相 · 法相’[이라는 六相(cha-nimitta)]을 住處로 삼고[SN. vol.3. p.10]
식(識)은 <六相(cha-nimitta)을 거주처로 삼고, 六相(cha-nimitta)에 매이며, 六相(cha-nimitta)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신행(身行)을 증장시켜 색신(色身, rūpakāya)을 결합시키는 것’이고 결국엔 육식신(六識身)을 연기시키는 것인데, 일단 그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중요한 점은 <‘色相 ․ 聲相 ․ 香相 ․ 味相 ․ 触相 ․ 法相’이라는 六相(cha-nimitta)>이고, 식(識)이 그 육상(六相)을 대상으로 어떠한 지랄발광을 하더라도 실은 별 것 아닙니다. 문제는 <식(識)이 왜 그 육상(六相)을 대상으로 어떠한 지랄발광 하느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意)도 <‘色相 ․ 聲相 ․ 香相 ․ 味相 ․ 触相 ․ 法相’이라는 六相(cha-nimitta)>을 경험합니다. 이때가 문제입니다. 전오근과 전오경을 통하여 포착한 ‘그 六相(cha-nimitta)’을 의(意)가 경험하면서 ‘그 六相(cha-nimitta)’에 대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작의(作意, manasikāra)하는 순간 <천 길 만 길의 낭떠러지 지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빠삐만의 미끼에 걸려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먼저 ‘빠삐만이 가장 싫어하는 사띠(sati)’가 사라집니다.
Rūpaṃ dis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Saddaṃ sut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Gandhaṃ ghāt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Rasaṃ bhot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Phassaṃ phussa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Dhammaṃ ñatvā sati muṭṭhā, piyanimittaṃ manasi karoto …
[SN. vol.4. pp.73~74]
색(色)을 보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의(意)에 새기면[=작의(作意)하면] 사띠(sati)가 사라진다.
성(聲, 소리)를 듣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
향(香, 냄새)를 맡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
미(味, 맛)을 맛보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
촉(触, 접촉)을 감촉하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
법(法)을 알고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을 ….
위 경문에 언급된 ‘희락상(喜樂相, piyanimitta)’이라는 것도 ‘니미따(相, nimitta)’입니다. 이미 ‘작의(作意, manasikāra)된’ ‘니미따(相, nimitta)’입니다. 그래서 <고짜라에 위치하게 된 ‘니미따(相, nimitta)’>입니다. 이 ‘니미따(相, nimitta)’는 매우 위험한 ‘니미따(相, nimitta)’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천 길 만 길의 낭떠러지 지옥으로 향하게 하는 ‘니미따(相, nimitta)’>입니다.
<‘니미따(相, nimitta)’와 ‘작의(作意, manasikāra)’의 관계>는 <고짜라에 위치하게 된 ‘니미따(相, nimitta)’> 때문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작의 집(集)은 법의 집(集)”이어서 먼저 ‘불선법들의 뿌리가 되는’ <탐진치라는 법들>이 생겨납니다.
Tassa subhanimittaṃ a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rāgo uppajjati, uppanno ca rāgo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 ti. ……
‘樂相(subhanimitta)’을 ‘올바르지 않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貪(rāga)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貪은 증대되어 점점 광대하게 된다.
Tassa paṭighanimittaṃ a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doso uppajjati, uppanno ca doso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 ti. ……
‘有對相(paṭighanimitta)’을 ‘올바르지 않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瞋(dosa)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瞋은 증대되어 점점 광대하게 된다.
Tassa a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moho uppajjati, uppanno ca moho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 ti. ……
‘올바르지 않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癡(moha)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癡는 증대되어 점점 광대하게 된다.
Tassa asubhanimittaṃ 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rāgo n'uppajjati, uppanno ca rāgo pahiyyatī ti. ……
非樂相(asubhanimitta)을 ‘올바르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貪(rāga)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貪은 사라진다.
Tassa mettaṃ cetovimuttiṃ 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doso n'uppajjati, uppanno ca doso pahiyyatī ti. ……
慈心解脫(mettācetovimutti)을 ‘올바르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瞋(dosa)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瞋은 사라진다.
Tassa 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moho n'uppajjati, uppanno ca moho pahiyyatī ti. …… [AN.1, pp.200~201]
‘올바르게 作意(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癡(moha)는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癡는 사라진다.
복잡합니다만, 공식은 <A相+올바르지 않은 作意=탐>, <B相+올바르지 않은 作意=진>, <올바르지 않은 作意=치(癡, moha)>입니다.
기본적인 니미따(相)는 ‘6相’ 뿐입니다만, 그 ‘6相’이 意에 새겨질 때(=기억 될 때), ‘A相’으로 새겨지면 <그렇게 새겨지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作意’여서 ‘탐’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말임. ‘B相’도 역부여시.
意에 ‘A相과 B相 등’을 새기고 있으면, ‘탐과 진’ 때문에 ‘6相’이 복수형으로 바뀌고, 그 결과로 ‘까마(kāma, 慾)’가 생겨나고요, ‘까마(kāma, 慾)’가 생겨나면 오욕락(五慾樂, pañca kāmaguṇa, 감각적인 쾌락을 즐김)을 즐기는 생활을 하게 되고 ‘禪’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탐진치→까마’의 과정을 피하여 ‘禪’으로 나아가려면, 相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결국 相들을 파악하지 않으면 ‘원시불교가 이야기 하는 四禪’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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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의 후반부는 <이미 올려 져 있던 글>을 다시 끌어 온 것임. 평범한 육상이 작의 되는 순간 대 반전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임. 운명을 결정짓는 대 반전.
삭제된 댓글 입니다.
허~~ 반갑습니다. 반가워~~~~~~~ㅋㅋ.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5근과 5경이 심의식과 부딪치는 영역(고짜라)에서 반드시 니미따가 일어나고, 이때 마노가 사띠를 잊고 작의하면 탐진등의 불선법이 일어나고, 그때 마노가 사띠를 챙겨서 니마따를 작의하면 일어난 불선법은 소멸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노에서 6가지 니미따를 작의할 때 니미따를 탐진으로 작의하면 까마(慾)가 생기고, 오욕락을 즐기는 생활을 한다. 이러면 禪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러면 禪을 얻기 위해서는 그 시작이 마노에서 사띠를 가지고 6가지 니미따를 비락상과 자심해탈로 작의해야한다. 그러면 까마와 오욕락을 즐기는 것을 사라지게하고 막을 수 있어서 禪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런 말씀이네요. 이렇게 경전에서 엑기스를 뽑아 폴어주시니 고맙습니다...^^
‘6相’이 意에 새겨질 때(=기억 될 때), 수바나 빠띠가니미따로 새겨지는 것 자체가 비여리작의로 탐진의 발생이라는 말씀..
그렇다면 예쁜 여자거나 시체거나 보고서 의에 새길 때, 아수바로 새겨지도록 여리작의하여 탐을 없애고, 미운 놈이거나 부처님이거나 보고서 의에 새길 때, 자심해탈로 새겨지도록 여리작의하여 진을 없앤다는 말씀...
‘6相’이 意에 새겨질 때(=기억 될 때),
마노에 sati가 있으면 단지 여자, 시체로 작의할 뿐입니다. 그럼 탐진이 일어나지 않아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sati를 놓치면 내입장에서 보고 예쁘다, 밉다로 마나시카라되고 탐진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탐진도 마노의 대상(법)이므로 다시 그것을 현재의 마노에서 sati하면 더 이상 탐진이 확장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탐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탐진을 못 알아차리면 탐진에 의한 行으로 발전하여 업유와 생 노사의 순환을 돌린다고 합니다....
해맑은님~~~ 해맑은님은 오랫동안 불교공부`수행하신 분 같은데요. 저는 다니는 절도 수행센터도 없고, 3년전에 니까야를 통해 처음 불교를 접했답니다.(가족들이 모두 기독교라 교회행사있으면 축하차 가끔 교회나갑니다. 저도 세례를 예전에 받았었고요.) 모든 종교인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불교신자들도 자기가 처해있는 입장에 따라 많은 선입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니까야를 통해 불교를 알았기 때문에(잘 아는 것도 아니고 니까야도 제대로 읽은 적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한국에 전통적으로 있는 선불교나 대승에 대해서 왜곡된 시각으로 본 적도 있었고요.
여하튼 현재까지 저의 입장은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니까야를 읽을 때 요리사경을 보고 사띠와 니미따 삼매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띠만으로 다 된다면, 니미따를 왜 말씀하셨겠습니까? 현재까지 저는 여리작의는 사띠와 직접 연관이 되고 니미따는 삼매(자나)와 관련이 되는데, 어떤 니미따인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미따와 산냐 그리고 빤냐띠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자다 남자다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해맑은 님은 예쁜 여자(남자)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농담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첫 부분의 말씀에도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고, 부처님은 우선적으로 될 수 있으면 여자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남자입장에서)는 말씀을 하신 경이 있는 것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아수바와 여자를 비교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 경험에 의한 것인데요, 여자의 알몸을 니미따로 삼매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대념처경의 신수관에서 왜 그렇게 많은 분량을 더러움이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어디서 본 기억으로는 어느 아라한이 되신 분은 어느 여자의 웃는 입 속의 이빨을 보고 아라한이 되셨다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요..대념처경에서 묘지에 버려진 시체 9단계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직접 묘지에 가서 시체를 볼 필요 없이, 상상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벌레가 우굴거리는 시체를 보고 나의 몸을 거기에 빗대어 보는 것이 핵심이 아닌가요? 여자의 웃는 이빨을 보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여자의 알몸을 보면서도 그런 측면에서는 삼매에 들 수 있겠네요...
여하튼 엄청나게 모자라고 부족한 제 생각을 두서없이 말씀드려 죄송하고 실례라면 용서해주세요. 해맑은님 계시는 명상원 저도 한 번 간적 있어요(빠알리 공부 스리랑카 젊은 스님 강의할 때 딱 한번요). 그 카페 회원이기도 합니다. 잘 들어가지는 않지만요.. 공부많이 하시고 수행에 열심이신 해맑은님께서 가감없이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해맑은님 수행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신 부분을 부처님 말씀에 근거해서 가르쳐주시면 저는 너무 고맙습니다.
대념처경에서 "윈내이야 로깨 아빗자도마나상"부분이 삼매(자나)와 관련된 것으로 저는 알고 있는데요. 아빗자도마나상이 바로 탐`진과 연관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요리사경에서 사띠를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음의 표상(주인의 모습)을 살피지 않으면 삼매에 들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나요? 제가 지금 경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둑카님~~ 저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 이 카페에 들어옵니다. 아위자님의 해설과 다른 분의 생각을 보면서 저도 줄거리를 잡고 싶습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에 근거해서 무엇을 설명할 단계가 아닙니다. 다만 가끔 제 생각도 한 번 내놓고 거기에 대한 다른 분의 생각도 들어보면 왜곡이나 고집에서 벗어나는 길로 가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에 올리는 글들이 불편하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아시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고요, 저는 다만, 해맑은님 말씀이 너무 틀에 박히신 것 같다는 저 나름 선입견이 있어서 저 나름의 선입견을 밝히는 것입니다..해맑은 님과 자주 대화하다 보면 무너질 선입견이라고 보아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진 않으셨으면,, 저는 제 주위의 분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둑카님...^^ 저도 삼매에 관심이 있어 요리사 경을 본적이 있습니다. 먼저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주인의 표정(표상)을 얻지 못하고 ,,, 제 생각에 사띠를 제대로 하는 요리사라면, 항상 현재 자신의 일에 마음이 집중되어있기에 주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펴서 표상을 얻습니다.
그러나 처음 나오는 요리사는 사띠를 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즉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사띠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의 표정(표상)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사띠만 제대로 하면 삼매의 표상을 얻어 삼매에 들고 그 다음 단계인 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부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ㅆ믐을 쓰시는 분은 아닌 걸로 보이거든요..일자무식꾼도 부처님 말씀 듣고 깨닫는 경우 있지 않나요? 당시 외도라고 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아라한들 많이 나왓잔아요.. 하기야 당시에는 모두 다 외도였겠네요..불교의 전문가들이 좀 더 쉽게 일반인들 특히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문을 열어야 한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념처 수행을 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사띠가 제대로 될리가 없습니다. 안 해본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념처 수행이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으로, 사띠를 놓칠 때마다 다시 그것을 사띠해서 현재로 돌아와 몸(身)과 마음(心)을 느낌(受)으로 알아차릴 때 그만큼 사띠하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점차 능숙한 요리사가 되어갈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수행 열심히 하셔서 꼭 좋은 성과 이루시고 제게 아주 쉬운 말로 설명해 주세요.. 왜 제가 자꾸 이런 말씀 드리냐면요.. 지금 하시는 말씀 다른 분들은 잘 못알아 듣거든요.. 여하튼 해맑은님이나 아위자님이나 길따라님 같은 분들이 어려운 빠알리를 잘 번역하시고 쉽게 설명하셔서 많은 분들이 부처님의 복음을 직접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ㄱㄴ데 전 봉행님 같은 분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