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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에는 마한의 영지였으며 백제시대에는 당초 물아혜군 면주라했으나 신라 경덕왕 16년(757)무주의 무안군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혜종원년(944)에 물량군, 성종 10년(991)에 나주목의 무안군, 명종 2년(1172)에 무안현, 공양왕 3년(1391)무안감무가 성산 극포권농방어사를 겸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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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태종13년(1413) 전라도 무안현으로 현감을 두어 오다가 고종 32년 1895년 5월 26일 나주부의 무안군으로 개칭하고 고종건양 원년인 1896년 2월 3일 지도군 설치로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군의 11개 도서관할을 하였으며 고종건양원년 1896년 8월 4일 전라도 무안군으로 되는등 관할구역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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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9월 12일 목포진이 개항되어 통상사무를 관장하는 감리서를 개설하고 무안군이 부로 승격되어 청사를 목포로 이전하고 부윤이 감리겸임 무안읍지가 외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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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광무7년인 1903년 7월 3일 무안부가 다시 무안군이 되고 목포감리서를 별도 설치하였으며 1906년 9월 24일 무안군이 부로 승격되고 목포감리서가 폐지되어 부윤이 업무를 관장하는등 숱한 변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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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이후 1957년 11월 6일 면성면을 무안면으로 개칭하는등 행정구역 변경을 거듭하였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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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31일 법률 제2059호로'신안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되어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군되어 무안군은 육지부 8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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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28일 무안읍 성동리 712번지에 현 청사를 신축 준공하므로써 바야흐로 무안군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1979년 5월 1일 무안면이 읍으로 승격된후 1980년 12월1일 일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 운남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면서 현재까지 2읍 7개면의 행정구역에 103개법정리 363개 행정리로 운영되고 있다. | |
망운면은 원래 영광군에 속해오다가 조선시대 인조때에 감목관 설치로 영광군 목장면이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목장면으로 부르다가 이 지역의 날씨가 청명, 온화, 건조하여 년중 강우량이 적은 지역으로 농사짓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특히 여름철 지내기가 어려워 강우량도 적고 안개일수도 년중 7일 정도밖에 안되는 지역으로 건조한 날이 많아 비가 아니면 구름이라도 많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望(바랄망) 雲(구름운)으로 부르던 것에 이름이 유래되었다. 1910년에 목장면이 망운면으로 개칭되어 40개 리를 관할 하다가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어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82년 서부지역 5개 리를 분리하여 운남면으로 하고 현재는 목동, 목서, 피서, 송현, 탄도 리의 5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기본현황으로는 총면적 21.3㎢, 자연마을은 21개마을이다.
위치는 무안군청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10km지점이며, 동쪽은 무안읍과 청계면, 남쪽은 운남면, 서쪽은 신안군 지도읍, 북쪽은 해제면과 현경면에 접하고 있으며, 자연환경으로는 서남단이 突出하고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해발 100m 이하의 저지대로 주산물은 양파, 마늘이며, 특산물은 단감이 유명하다.
(옛날에는 망운 고구마가 그 맛이 밤과 같다하여 밤고구마로 유명하였고, 톱머리 단감은 그 맛이 진기하여 일제시대부터 진상품으로 손꼽혀왔다고 한다.)
자연발생유원지로 톱머리, 조금나루가 있으며, 도지정문화재로 곰솔 3그루가 있다.
망운면 소재지는 원목동, 목남, 목서, 목북 마을의 4개리로써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 망운 초등학교, 교회 등 주요기관이 밀집되어 있으며, 특히, 유일한 교육기관인 망운 초등학교는 1920년도에 개교하여 77회에 걸쳐 6,392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유서 깊은 학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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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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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목동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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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山申씨 6호, 光山金씨 6호, 密陽朴씨 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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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설치된 망운목장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목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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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雲牧場監牧官善政碑(10基, 牧東里 506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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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2리(압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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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씨 6호, 晋州姜씨 4호, 務安朴씨 3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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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마을 앞까지 갈매기 떼가 많이 모여드는 지역이라하여 '鴨唱'이라 불러왔으나 현재는 '押倉'이라 부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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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3,4리 주교(하주교, 상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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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雲 동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마을 앞이 바다여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하여 '배달이' 舟橋라 칭하였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농경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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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5리(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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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形이 울퉁불퉁하여 '밤까시'라 불리기도 하고, 또 밭에 인접된 갯마을이란 뜻에서 '海洞'이라 부르다가 '海東'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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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6리(목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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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대에 설치된 望雲牧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牧南'이라 칭하였다.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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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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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1리(목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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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씨 15호, 慶州李씨 7호, 密陽朴씨 7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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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西라는 지명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편성과정에서 편의상 牧內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는 망운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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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군나무, 10-20-21, 수령 42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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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2리(내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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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변이 큰 수풀로 우거져있다 하여 원래는 '德林'이라 불렀으나 1936년경 '內德'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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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3리(대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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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씨 10호, 全州崔씨 4호, 河東鄭씨 3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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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마을은 학이 날개를 펴는 모습이고, 마을 앞에는 蛇穴과 우렁껍질과 같은 오강도 섬이 있어 이는 마치 학 앞에 뱀과 우렁이가 있는 형세이다. 地勢가 학 같은 모양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한실' 또는 '大谷'이라 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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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4리(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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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州宋씨 30호, 晋州姜씨 7호, 淸州韓씨 3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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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변이 수풀로 우거졌다하여 '德林'으로 불리 우다가 1936년경 德林을 內·外德으로 분리하여 外德으로 불리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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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5리(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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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목서 마을과 같은 마을이었으나 1992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분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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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6리(장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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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마을의 서남쪽에 위치한 장재 마을은 望雲面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있어 '장자'로 불려오다가 이를 '壯才'라고 부른다 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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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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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1리(용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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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다리부근이었는데 근처에 방앗간이 있었다하여 '沃橋'라 불리우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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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2리(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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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마을 가운데에 산이 있고 그 산속에 절이 있어서 경관이 훌륭하다하여 '造山''栗里'이라 하였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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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3리(정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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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때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해방이 되자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곳을 1.4후퇴 후 1957년 피난민 입주지역으로 선정하여 난민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定着'이라 칭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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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4리(톱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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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km의 백사장이 펼쳐진 해수욕장으로 매년 관광객이 많이 찾아 오고있으며, 망운면의 특산물인 톱머리 단감의 재배단지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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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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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1리(두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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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가 비옥하여 보리가 많이 生産된 지역으로 마을근처에 송현 조금나루가 있어 國稅를바칠 때 각처의 大麥 斗牟로 가지고와 말소작하였다 해서 말'斗'자 보리'牟'자를 합해서 '斗牟'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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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군나무, 10-20-22, 수령 300여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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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2리(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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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형태가 龍이 S자 모양을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용골'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龍洞'으로 부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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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3리(원송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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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나루라 불리우는 곳에 큰 소나무(해송) 한그루가 있었는데 이 소나무는 크고 위치가 좋아서 어느 곳에서나 이 소나무가 보인다 하여 소나무 松字, 고개 峴字를 써서 '松峴'이 되었다. 현재는 소나무가 없어졌는데 일제시대 송진을 내기 위해 뿌리를 잘랐다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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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4리(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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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면 두곡마을 형태가 쪽제비 형태이고, 성동마을은 쥐가 숨어있는 형태라 하여 '鼠인 洞'이라 불리우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들이 부딪치면 빛이 난다고 하여 里자를 써서 '星洞'이라 하였다.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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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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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리 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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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50여년전 성씨불명의 사람이 정착하면서 '여울도'라 칭하다가 그후 숯이 많이 나는 섬 이라하여 '炭島'라 칭하였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