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불’의 산실 봉명산 다솔사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자락에 위치한 다솔사(多率寺)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녀 볼거리가 많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일제시대에는 민족독립운동의 거점지였으며 또한 현대 차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다솔사는 한때 우국지사와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처럼 역사속의 흔적이 많이 배어있는 다솔사를 찾아온 이유는 불자로서의 연유보다는 풍수를 보고자 함이다. 부처님을 봉안하고 대자대비를 실천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절집은 대개 그 이름을 불교적인 의미로 짓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솔사의 경우는 사찰의 이름을 절집이 자리한 풍수형국에서 따 와 지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기도 한 이 절은 서기 503년(신라 지증왕 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맨 처음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이름한 이래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아픔과 변화를 겪어 온 절이기도 하다. 다솔사란 이름을 처음으로 얻게 된 것은 사찰 창건후 100년이 훨씬 넘어서 서기 636년(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새로 건물 2동을 짓고 사찰이름을 바꾸면서부터다. 그 후 676년(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 번째로 중수하면서 이번에는 영봉사(靈鳳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절을 손질하여 고쳐 짓고는 절 이름을 원래대로 다시 영악사라 하였다.
그러다가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또다시 절을 중수하면서 다솔사라 다시 이름 짓고, 이후에 수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처럼 많은 변화와 개명 속에 얻은 ‘다솔사(多率寺)’란 이름은 주산인 봉명산에 소나무가 많아 ‘다솔’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보다 절집이 자리한 봉명산의 형국이 장군대좌형이기에 군사를 많이 거느린다는 뜻에서 다솔이라 이름하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오고 있다. 따라서 봉명산의 수많은 소나무들은 장군이 거느린 군사들이 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솔사에는 그 역사와 이름에 걸맞추어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봉명산도립공원이란 간판이 서 있는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머리에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숲이 양쪽으로 도열한 가운데로 호젓한 산길이 나 있다.
다솔사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려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 보다 걸어서 가야 된다.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가락을 들으며 울창한 송림사이 숲길을 얼마쯤 가다보면 오른쪽 길섶에 거북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는데, 앞면에 붉은 글씨로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새겨져 있다. '임금의 명으로 산에 묘를 쓰는 것을 금한다'는 뜻인데 다솔사에서 만나는 첫 번째 전설이다.
표석의 좌측 아래에는 광서(光緖) 11년 을유(乙酉) 9월이라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광서는 조선왕조 최초의 황제였던 고종 12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다. 따라서 광서 11년이면 고종 22년, 즉 서기로 1885년이 된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조그만 사찰의 입구에 황제의 명으로 어금혈봉표를 세우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종황제 당시에 다솔사는 이름의 연유에서 보는 것처럼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의 대명당길지로 알려져 있었다. 어느 해 경상우도 감사가 이 곳에 임금이 날 대명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선친의 묘를 안장(安葬)하고자 하였다. 이는 다솔사의 입장에서는 사찰이 폐허될 위기에 처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감사의 권세를 조그만 사찰이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마침 절에서 참선 수행 중이던 호암과 정암이라는 두 스님이 결연한 의지로 스님들과 신도들의 탄원서를 작성하여 임금께 상소하고자 한양으로 떠났다. 한양에 도착한 두 스님은 때마침 청나라로 가는 사신(使臣)행렬인 동지사(冬至使)를 만나 이 사실을 읍소(泣訴)하게 되었고, 이에 감동받은 동지사는 그 자리에서 지필묵(紙筆墨)을 내어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써 주며 말하기를 “임금께는 내가 직접 이 길로 가서 아뢸 것이니 그대들은 서둘러 내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묘를 쓰지 못 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두 스님은 감읍(感泣)하며 서둘러 길을 내려오게 되는데, 도중에 문경새재에서 우연히 곤양으로 부임하는 신관사또를 만나게 된다. 두 스님의 고(告)함을 받은 신관 곤양사또는 마침 부임 인사차 경상감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니 가서 직접 아뢰어 주겠노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신관사또가 경상감사를 만나 부임인사를 마친 다음 다솔사의 사실을 고하자 이에 감사는 대노하며 임지에 닿기도 전에 직권을 남용하여 상사를 우롱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고 호통을 쳤다.
이때 별안간 신임 곤양사또가 옷소매에서 글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면서 “어명(御命)이요”라고 소리치자 감사는 혼비백산되어 대청 아래 꿇어 엎드리고 사또는 소리 높여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하고 외쳤다 한다.
이로써 위기의 도솔사는 구제되었고, 헛된 욕망을 품었던 경상감사는 그 길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예로부터 명당길지에 자리한 사찰자리를 빼앗아 선산으로 사용한 권력자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충남 예산군 가야산 자락의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유명한 남연군의 묘소이다. 남연군은 조선말 안동김씨 세력에 눌려 지내던 왕실의 종친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이다. 무력한 왕실을 복권하고자 대원군은 풍수를 이용한다.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큰 사찰인 가야사의 자리가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할 대명당인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말은 들은 대원군은 가야사에 불을 질러 절을 없애고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한다. 명당발복에 의해서인지는 모르되 어쨌던 그로부터 18년 만에 흥선의 아들이 임금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왕조 최초의 황제 고종이다. 이어 순종까지 2대에 걸쳐 황제가 탄생하였으니 명당발복의 예견은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어쩌랴 가야사를 불지르고 탈취한 악업(惡業)의 댓가는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으니 이야말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겠는가?
다행히 다솔사는 부처님의 가피로 폐사(閉寺)의 위기를 넘겼으나 함량미달의 인물이 하늘이 숨겨둔 땅을 탐한 댓가는 너무도 컸다. 왕조시대에 새로운 임금이 난다는 것은 바로 현 왕조를 뒤집어엎겠다는 역모(逆謀)에 해당한다. 역모죄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이기에 대역모죄라 한다. 더욱이 고종 자신이야말로 가야사를 탈취하여 쓴 조부의 명당 발복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니 임금이 날 자리에 선친의 묘를 쓰겠다는 경상감사의 소식을 듣고, 고종황제가 얼마나 격노했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대역모죄는 삼족(三族)을 멸하는 대죄(大罪)이니 이후 경상감사의 집안은 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참형되었다.
하늘의 섭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풍수언에 ‘유덕지인 봉길지(有德之人 逢吉地)’란 말이 있다.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명당이란,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그것도 우연히 인연따라 얻게 되는 것이 만고불변의 이치이다. 탐욕에 눈이 먼 함량미달의 인간이 억지로 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땅을 탐한 댓가는 오히려 천벌에 의한 참담한 비극의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는 참풍수의 교훈을 말해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경상감사 이후에 그 누구도 다솔사의 명당을 탐하는 자가 없었다 하니 어금혈봉표의 증표가 있는 한 다솔사는 입구에서부터 헛된 욕망을 품은 인간들에게 지엄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금혈봉표를 지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왼쪽으로 난 작은 개울을 건너면 사찰 바로 밑 숲 속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고 그 곳에 어른 키보다 조금 큰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이름 하여 장군바위이다. 남근을 닮아 일명 남근바위라고도 부르는 이 바위는 머리부분이 절단되어 있는데 시멘트로 붙여 떼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또 무슨 사연이 있기에 멀쩡하던 바위가 목이 부러진 상처를 담고 있단 말인가.
다솔사가 자리잡은 주산의 이름은 봉명산(鳳鳴山)이다. 봉명산의 북쪽에 솟아오른 산이 봉암산(鳳巖山)이다. 옛날 봉암산 아래에 서봉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봉암산 봉바위의 정기를 받아 유명한 학승(學僧)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웃한 봉명산 자락의 다솔사는 장군대좌형의 정기를 많이 받아 무승(武僧)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 때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두 절 사이에서 서봉사의 스님들이 다솔사의 스님들을 힘만 쓸줄아는 무식쟁이라고 비아냥거리자 이에 분개한 다솔사의 무승들이 서봉사의 정기를 끊고자 봉암산 정상의 봉바위를 칼로 내리쳐 동강내어버렸고 그 속에서 봉황이 나와 하늘로 날아가버려 서봉사의 정기가 끊어져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변을 당한 서봉사의 학승들이 다솔사의 정기야말로 이 장군바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여 몰려와서는 장군바위를 두 동강 내 버린 것이다.
까닭이야 어쨌든 그 후 서봉사는 망하여 없어지고 폐허만 남아있으며 다솔사는 아직도 건재하니 다솔사의 부처님이 더 영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되 중생이나 수도하는 스님이나 속성은 매한가지라 할 것이니, 수도에나 정진할 일이지 부질없는 알력은 왜 부리는지...... 중생구제를 위하여 참선수행하는 출가불자에게 마음의 수양을 경계하는 흔적이라 하겠다.
지금에 있는 스님들이야 장군바위의 교훈을 알고 있는 터이기에 모두 훌륭한 스님만 있을 것이라 생각 하며 경내를 들어서니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찰 입구의 백팔계단을 아래부터 둘러싸듯 늘어선 오래된 단풍나무가 다솔사 전체를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내리는 비에 젖어 선홍빛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지 않은가.
순간 백팔번뇌를 일순에 벗어버리고 불국정토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토록 황홀하게 아름다운 풍광이 사바세계에 있었더란 말인가.
늦은 가을 다솔사의 붉은 단풍이 초록빛 편백나무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황홀경에 도취된 채 발길은 어느 새 자연석을 깔아 만든 백팔계단을 오르며 용화세계를 들어서고 있다.
백팔계단 옆에는 붉은 단풍 빛에 둘러싸인 채 오랜 역사를 묵묵히 간직한 대양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1758년 조선 영조34년에 세운 이래 1914년 12월의 대화재에도 불타지 않고 건재한 유일의 건축물인 대양루는 맞배지붕을 얹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육중한 건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에 해당하는 적멸보궁을 바라보는 왼쪽에 팔작지붕형태의 요사채가 있다. 일제시대 한국 근대문학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가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은 1934년부터 다솔사에 초등과정의 광명학원(光明學園)을 세워 그 인근의 농민자제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김동리는 강사활동을 하며 농촌계몽운동을 펼쳤고 여러 불교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많은 작품들을 구상하고 또한 집필했다.
일제 강점시대 다솔사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을 비롯하여 김동리의 형이며 불교철학자인 김범부(1897~1966), 김법린(1899~1964)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만해와 주지 효당스님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주지스님이 만해에게 묻기를 “우리나라에도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 하고 물었다. 이에 만해는 “우리나라에 그런 예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고, 중국에는 그런 예가 있습니다.”하며 중국의 분신공양 이야기를 하였다. 중국의 어떤 이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을 하였는데 이에 사람들이 금을 입혀 금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김동리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것을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다가 후일 소설로 발표하니 이것이 ‘등신불’이었다.
사찰의 가장 안쪽이자 중앙에는 주건물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자리잡고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원래는 대웅전이라 하여 불상을 모셨는데 1979년에 만해가 수도했다는 응진전의 아미타여래 불상에서 사리 108과가 나옴으로 해서 대웅전을 다시 지어 이름을 적멸보궁으로 바꿨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뒤편에 대형 부도를 만들어 봉안하고 적멸보궁 안에는 열반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을 모셨다. 그리고 와불 뒤쪽 벽에는 창을 내어 사리탑이 보이도록 개방해 놓았다.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다솔사의 주건물인 적멸보궁도 명당의 혈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에서 대양루 지붕너머로 보이는 주산인 봉명산은 박환이 잘 이루어진 육산이다. 금체형의 둥그런 산정에 양쪽으로 흘러내린 청룡과 백호는 혈장을 감싸고 수구를 완전히 관쇄하여 명혈을 이루었다.
청룡자락은 일자로 밋밋하게 뻗어내려 생기가 부족하다 하겠다. 장군대좌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군의 시신이다. 충남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묘소가 장군대좌형이다. 이곳에서도 청룡자락이 죽은 사람의 시체처럼 생기없이 밋밋하게 일자로 뻗어내렸다. 이 경우 이것은 전쟁에서 아군에게 죽은 적군의 시체로 본다.
백호자락은 반대로 준거하지 못하고 청룡보다는 생기가 넘친다. 다솔사의 풍수형국은 기세가 매우 강하다. 이렇게 드센 기운을 받았기에 학승보다 무승이 많이 나왔나 보다.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다. 이판과 사판을 합친 말인데 원래는 사찰용어이다. 절에는 두 종류의 스님이 있다. 하나는 절에서 수행에만 정진하는 수도승인데 이를 절집용어로 이판승이라 한다. 또 하나는 절의 살림을 맡아 일하는 스님으로 이를 사판승이라 한다. 이판승은 수도하는 스님이기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수행을 한다. 하여 떠돌이 스님이 이에 속한다.
사판승은 절집에서 살림살이와 기타 잡무를 보는 관계로 떠돌아다니지 않고 절에 가만히 붙어 있어야 한다. 풍수적으로 절집 가람배치 중에서 좌측에는 이판승들의 공부하는 건물이 자리하고 우측에는 살림살이하는 사판승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자리한다. 이것은 모든 사찰의 공통된 배치방식이다.
풍수에서 좌측은 청룡에 해당한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청룡은 생기가 왕성해야 하므로 떠돌이 스님인 이판승에 해당한다. 반대로 우측은 백호에 해당한다. 백호는 준거해야 하므로 얌전히 머물러 혈장을 지키는 형국을 길격으로 친다. 백호가 날뛰면 이는 사람잡는 짐승이 되기 때문이다. 절집에 머물며 살림살이만을 돌보는 사판승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판사판이라 하면 절집에 기거하는 모든 스님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된다.
다솔사의 형국은 청룡보다 백호의 기세가 드높다. 이는 이판승보다 사판승의 기세가 더 강하다는 의미가 된다. 수도에 정진하는 이판승의 기운이 강해야 고승대덕이 많이 배출된다. 예로부터 무승이 많이 배출된 것은 아마도 풍수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팔계단을 내려와서 해우소를 지나면 봉명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정이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기만 하다.
정상에 있는 봉명정에 올라 앞을 굽어보면 겹겹으로 둘러싼 산들이 장군의 진영에 도열한 병사들처럼 군집해 있다. 주산으로부터 양쪽으로 뻗어내린 용호가 다솔사를 품에 안듯 감싸고 울창하게 숲을 이룬 아름드리 소나무는 장군이 거느리는 병사들이 된다.
백호자락 너머로 펄럭이는 형상의 장군기가 있고 그 옆으로 진군을 알리는 북모양의 봉우리가 있다. 장군대좌형이 분명하다.
수세는 절의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두 개의 물줄기가 장군바위 아래에서 만나 합수를 이룬다. 멀리 수구 바로 앞에 용산못이라는 저수지가 있어 진응수를 이룬다. 1943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며 ‘용산’은 봉명산의 옛이름이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다솔사의 장군대좌형은 기가막힌 명당형국이다. 이 조그만 사찰이 천년을 넘는 세월 속에 그토록 많은 화재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건재한 까닭은 이렇게 훌륭한 명당자리를 차지한 덕분이라 생각해 본다.
다솔사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명물은 절 뒤에 조성한 5천여평 넓이의 녹차밭이다. 이 녹차밭에서 다솔사 특유의 제다법으로 만드는 ‘반야로(般若露)’라는 명차(名茶)가 만들어진다.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차밭이 조성되어 왔다고 전해지는데 1960년경 당시 주지였던 효당 최범술 스님이 나무를 다듬고 새롭게 가꾸어 ‘반야로’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의 차문화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금도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다솔사는 차문화의 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차로 소문나 있으며 이로 인해 다솔사(多率寺)를 ‘다솔사(茶率寺)’ 또는 ‘다사(茶寺)’라고도 부른다.
봉명산 북쪽 백담산 자락에는 천년의 세월을 담고있는 석굴암이 하나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普安庵) 석굴이 그것인데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석굴은 천연동굴이 아니라 암자주위에서 모은 넓적한 판자모양의 돌을 겹겹이 쌓아올려 만들었다. 산세의 지형이 너무 가파르기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가 보안암의 터를 이루고 있다. 조그만 암자를 짓기 위해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암자보다 더 크다. 천년의 숨결을 담은 고찰답게 돌에는 이끼가 많이 끼었으며 어디서 저렇게 많은 돌을 누가 모아서 쌓았는지 성불을 향한 불심공덕이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마다 깊이 새긴 듯 느껴진다.
봉명산(鳳鳴山)은 일명 방장산(方丈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도 부른다.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의 또다른 이명(異名)이니 지리산의 영맥(靈脈)이 남으로 뻗어 다솔사의 대지가 이룩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주산(主山)은 대찰의 영기를 모은 뜻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풍수적으로 봉명산(鳳鳴山)의 기운이 빼어나기에 주인된 산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영험한 기운을 간직한 봉명산의 정기를 다솔사가 고스란히 받고 있다. 역대로 자장율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나옹화상 등 고승 대덕들이 이 절에서 산의 정기를 받으며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한용운을 단장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만당의 본거지가 되어 민족의 울분을 풀어내는 터전이 되었던 다솔사는 불교사의 거목들이 고루 등장하는 사적과 함께 한국불교사의 압축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