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열 셋
불교와 과학, 불교의 매력
The Scientific Approach to Buddhism
The Appeal of Buddhism
Francis Story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박광서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71. Bodhi Leaves No. 55)
차 례
·불교와 과학 5
·불교의 매력 49
·저자 소개 66
* 모든 주는 역주(譯註)임.
불교와 과학
저명한 과학자 버트런드 러셀1)은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물리학이 대체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물리학의 주장대로라면 그 누구도 물리학이 말하는 진실을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 또 설사 알 수 있다 해도 이는 이미 물리학 이외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대로라면, 물리학적 존재로서의 그 어떤 유기체도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어떤 유기체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물리학이 아닌, 보다 빈틈없이 분명한 그 어떤 원칙, 가장 수승한 유추방식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일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발행, 『물리학과 경험』 중에서)
위와 같은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
과학이 우주의 온갖 신비를 다 푸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던 시대에는 생명에 관해서마저 유물론적인 해석이 확고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열쇠를 돌리기만 하면, 다시 말해 원자의 세계를 열어 젖혀 조사하기만 하면 모든 물질적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원칙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리라 믿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과 사고 과정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으며, 따라서 종교와 같은 초자연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은 기계적 인과과정에 불과하며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었다.
물리학의 이와 같은 입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천문학, 심리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 등 여러 분야의 새로운 발견이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자 세계의 속성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만약에 어떤 특정한 순간에 있어서 모든 원자적 단위의 상대적 위치, 방향 그리고 힘(원자력)을 알기만 하면 미래의 시공(時空)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남은 문제는 자료를 모으는 일 뿐이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열쇠는 마침내 돌려졌다. 원자의 구조가 분석된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은 뜻밖에도 원자는 그 자체가 에너지화한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한 가지 형태의 에너지 방출에서 다른 형태의 에너지 방출로 변환하는 과정이며, 전자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멸해 가는 사이클이 원자라는 것이었다. 양자 역학이 발견되자 기존의 엄격한 인과율 체계에 새로운 수정이 가해졌다. 즉 예측률은 원자 집단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당하지만 개개의 원자에 관해서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발견된 것이다.
결정론적 인과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수많은 원자집단을 취급하는 경우에 한해 통계적, 또는 수량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념은 이른바 ‘불확정성의 원리’2)를 위한 길을 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순수 과학자들은 현상을 탐구할 뿐 현상이 내포하는 의미에 관해서는 무관심하여 철학적 관점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불확정성 원리’는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성립될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일체의 예외적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인과율만으로 이 우주가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우주관에서는 자유 의지가 발붙일 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개념이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자신이 견지해 오던 유물론적 이론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이는 과학 그 자체의 성격상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이 실체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 자체를 대하는 과학의 자세에 있어서만은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마음 작용은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현상계를 조사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 자신의 두뇌 활동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기라고 여기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인 것이며, 따라서 그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용이할 리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이 제시하는 우주의 그림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감관을 통해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우리의 감관이 고체, 형상, 실체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물리학은 다만 매순간 생멸하는, 영원토록 변천 상태에 있는 어떤 힘의 배열이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더구나 그 고체적 형상이란 것이 실제로는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3)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소위 물질적 대상이란 것도 그 자체는 주로 공간일 뿐이라고 물리학은 말한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말 그대로의 ‘고체적’인 것과 같은 것은 없으며, 그것은 단지 감관이 제공하는 기만적 자료에 근거한 언어적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외부에 생기는 사건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우리의 감관이며, 따라서 물리학이 다루는 자료들도 이 감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림을 우리는 진실이라 믿어도 좋은 것인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그림은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로 수학적 공식의 문제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 마음이 가장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리학의 우주는 전적으로 정신적 개념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4)의 시-공 다차원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도 그려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이 증명해 주는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물리학자들은 이제 자기 마음이 하는 일도 믿지 못한다. 마음 그 자체가 무언가에 사로잡힌 허구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러셀은 서두에서처럼 “만약 물리학이 밝힌 바가 진실이라면, 그것이 진실임을 확인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혁명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찰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주객관계에 의한 인식 자체가 송두리째 문제가 된다. 가령 마음이 어떤 인상을 입력시킬 때 즉, 흔히 말하는 대로 ‘어떤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보여진 그 대상이 우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과 조금이라도 닮은 어떤 사건이 시공(時空)속에 실제 일어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은 것인가? 이 점에 대해 과학은 어떤 확실한 해답도 주지 못한다.
현상적 우주에 대한 과학적 관점은 이런 문제점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이 국면을 좀처럼 타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주의 모습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마음 그 자체가 현상계의 전개 과정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하며, 일체의 주객 관계 내지 인과의 영역을 떠난 초월적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리학이 아닌 어떤 것을 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까지는 과학이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우리가 불교 원리인 무상·고·무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 설명하는 우주의 모습이 불교 철학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무상하기 짝이 없는 전개모습[諸行無常]이라든가, 물질의 실체가 본질적으로 공허하다[諸法無我]든가 하는 등은 불교의 기본 요체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리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선정(禪定) 과정을 통해 실제로 관찰,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 전개 과정을 ‘자아’라고 착각하기를 멈춘 마음, 즉 불교 용어로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5)을 여읜 마음에게는 원자의 구성 요소들이 보이고 느껴지며, 그것들이 생멸하는 고[諸行皆苦]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본래 불교의 출세간적 지혜는 과학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불교는 궁극의 진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제반 발견이, 오늘날 보듯이 불교의 지혜를 일일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현상이 부질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은 범어의 ‘마야(māyā)’라는 단어로 포괄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보통 환영(illusion)이라고 번역되지만 반드시 정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야란 말이 뜻하는 범위는 ‘상대적 실재’란 말의 범위와 같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수준에서는 실재이지만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어떤 차원, 혹은 어떤 파장 선상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한 고체는 오관을 통해 나타난 모습대로의 단단한 덩어리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식에게 그 고체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며 어쩌면 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원자의 집합체로 보일 것이다. 그 때 이 ‘고체’라는 대상은 주로 공간으로 보일 것이며, 그 공간 속에 원자 성분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넓게 퍼져 있고, 또 우주의 온갖 행성계들이 인력과 척력에 의해 서로 유지되고 있듯이 이 요소도 오로지 전기적 인력과 척력에 의해 각기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어떤 법칙의 작용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차원의 의식에서 보면 그것이 비존재(非存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공(空) 또는 무위법(無爲法)6)일 뿐이다. 그 차원은 인과율의 영역 밖일 것이며, 시공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을 의식 대상으로 하는 보통의 마음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일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그것이 생도 멸도 없는 저 열반(涅槃)이라는 궁극적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서는 현상적 지각의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는 초월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여읜,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체가 점차 다른 모습으로 지각되어 의식 수준이 올라갈수록 이전보다 점점 더 비물질적으로 보이게 되는 이런 현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범주처7)와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사범주처에 이르면 의식은 조잡한 물질의 환영으로부터 해방되며, 물질 대신 그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성을 인식하게 되고, 궁극에 가서는 ‘물질’이란 그 법칙의 표현에 불과하며 이 표현 방식은 다양한 인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 제각기 달리 나타남을 알게 된다고 한다. 욕계(欲界)의 식(識)에게는 루빠(rūpa), 즉 색(色)은 단단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차원에서는 나타나 보이는 그대로가 존재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을 얻은 식에게는 연기법(緣起法)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색 대신에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존재의 세 가지 특징이 인지되게 된다.
지성의 차원에서 보면 인류는 발전의 종착점에 이른 듯한 징후가 보인다. 즉 물질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 관한 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물질의 궁극적 비밀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작용하는 인과의 영역은 이미 다 밝혀냈지만 마음이 탐구해 내지 못하는 세계가 저 너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다음 발전 단계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 위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간과 인간의 거주처인 이 지구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존 관념을 우주적 모형에 맞춰 완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그 동안 발생하였으며, 여태껏 판치던 정령숭배나 유물론적 견해에 비춰 보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우리의 이성도 빙글빙글 맴돌기만 한다. 개념적 사유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하는 주체인 ‘자아’와 관찰되는 객체인 ‘생’의 전개 과정을 구별해내겠다는 부질없는 헛고생을 하느라 끝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집착을 불교에서는 유신견이라 부르며 인간의 향상을 가로막는 가장 기본적인 장애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 생의 전개 과정 이외에 따로 ‘자아’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단지 문법적인 인습에 불과한 것이다. 사유의 전개 과정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언어를 쓰지 않고도 표현해 낼 수 있다. 이 점은 버트런드 러셀이나 그 밖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에 상응하는 것이 심리학에도 있다. 정신적 과정을 분석함에 따라 여태껏 미지의 영역이었던 많은 정신 활동들이 밝혀졌으며, 마음의 의식층과 무의식층 간의 분명한 인과관계가 작용한다는 것도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개인이 쌓아 온 경험을 저장하고 있는 무의식은 심리적 경향(Tendencies)을 마련해 주며, 이 경향은 의식적 활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어떤 상태의 의식과 그 다음 의식 사이에 일종의 연결체 역할을 하는 유분(有分)8), 즉 생명 연속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9)는 의식이 점(點)과 같은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세운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그는 이런 점적 순간(point moment)들이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지속하는 실재처럼 인식되지만, 실제 그것들은 단지 연속물을 이루고 있는 극미 단위들에 불과하며 각각은 몇 분의 일 초 동안 존재하다가 후속물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것들은 사실 필름 감개에 감긴 수천 장의 정지된 사진과 같은데, 영사기를 통해 돌리면 하나의 활동사진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각각의 그림을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야 겨우 지각할 따름이다. 이러한 까닭에 점적 순간(point moment)은 왕왕 사멸점(death spots)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이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은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이러한 순간은 인과율을 따라 생기(生起)하기에 각각은 그 앞의 순간에서 발생 동기를 찾을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별도의 연결 고리는 없다. 심리학에서 우리는 생각, 정신적 인상 그리고 인지의 모든 분야를 한결같이 관통하고 있는 인과적 전개 과정과 지속적 유동 상태를 보게 되는데 어디서도 이들 연속 사항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항구적 실체는 찾아낼 수가 없다. 결국 여기서도 물리학에서처럼 우리는 다만 인과적 관계성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아비담마의 분석은 모든 분야에서 그 타당성을 견지함을 알 수 있다.
마침내 프로이드(Freud)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마음의 의식적 행위는 그에 선행(先行)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며 어떤 생각도 임의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그는 그의 저서 『일상생활에서의 정신 병리학』에서 증명해 보였다. 그는 의식 속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찾아보았다. 연구를 해 나감에 따라 그는 대부분의 소위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던 잠재의식의 결과라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즉 잠재의식은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그런 사건을 꾸며낸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놓고 그 후 많은 연구가들이 분분한 논쟁을 벌여 왔지만 프로이드는 프로이드대로 자기 이론을 뒷받침해 줄 방대한 자료를 모아놓았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 진실은 될 수 있다 하겠다. 어떤 개인이 지어 온 업력이 점점 쌓여서 마침내 그 개인의 경향(傾向)과 소인(素因)을 이루게 되고 이 경향과 소인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의 무의식층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개인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사건이나 경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 그 부분(무의식)의 활동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적 마음이 그 사건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다만 유분(有分)의 성질을 가질 뿐으로 과거의 습관적인 사고에 의해 지배되는 흐름에 불과할 뿐 의지(意志)의 자질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자질은, 의식적인 마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인 것이다. 다만 ‘우연적 사건’과 같은 것은, 무의식의 마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업에 알맞은 경험을 겪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기능을 기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지게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Mano 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모든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 마음은 주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10) 프로이드가 실수한 점은 잠재의식에 있어서의 인과과정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탓으로 이것을 의지 행위로 오해한 것뿐이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매우 성공적인 실험을 하고서도 끝내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불교에 접근은 하지만 마지막 문을 열 열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 하겠다.
유물론자들은 마음이나 정신 상태가 물질적 기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단언하는 반면에, 유심론자들은 물질은 오로지 마음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마음은 단지 뇌의 생산물에 불과한데 이 뇌는 물질적 실체라는 것이다.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대상은 눈, 귀, 코, 혀, 피부에 이어진 신경 통로를 통하여 접촉된다. 그 접촉의 결과로 생기는 감각은, 복잡한 물질적 신경 중추인 뇌가 그렇게 얻어진 자료들을 모으고 연관 짓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뇌가 손상되면 감각은 불완전하게 작동하고 뇌가 파괴될 경우 감각은 아무 기능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요소들에 의존하는 하나의 인과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타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정신적 과정이 순전히 기계적인 것이어서 물리적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물리적 원인은 다시 그 근원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하고 또 엄정한 인과율에 매여 있을 뿐이라면 자유 의지가 작용할 여지는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진화는 미리 결정된 자동적 과정이 되고 말 것이며 그럴 경우 갖가지 대안을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없어진다. 하지만,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자유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특수한 진화 형태의 출현은 대개 자연스런 선택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가령 마스토돈, 뇌룡, 익룡과 그 밖의 멸종된 종들의 경우 그들의 형태는 특정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발전의 결과였는데, 환경이 다시 바뀌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나치게 특수 진화해 버렸던 것이며 환경의 변화에 재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의 진화에서 자동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일련의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성공의 경우 못지않게 실패의 경우도 많다. 바로 인간도 이런 실패의 사례 중 하나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리적 힘은 나날이 증대시키면서 이에 상응한 정신적 진화는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멸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H. G. 웰즈11) 같은 사람은 2천년도 훨씬 넘는 옛 불교도 아쇼카 왕에게서 계명 통치의 극치를 보면서, 인간은 그 후 발전은커녕 정신적으로 퇴화해 왔으며 마침내는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진화를 통한 부단한 진보라는 생각은 이미 과학에 의해 폐기되었으며, 현재의 진화 이론들은, 개개인의 향상에 관한 이론들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진화는 옳고 그른 행위 중에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업(業)이 좋은 것과 그른 것 중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진보 또는 퇴보가 있게 되며, 업의 개념은 전적으로 자유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때때로 오해되는 것처럼 숙명론이 아니다. 전생의 업은 금생에 겪어야 할 경험과 상황들을 결정하지만, 그런 상황들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그 개인의 개성적 경향의 문제인 것이며, 이 경향은 그 개인이 쌓아 온 의지적 행위들이 형성해 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우연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학에서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는 개개의 원자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예에서 보듯, 미지의 원인들이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을 놓고 볼 경우, 우리가 그 사람의 특징적 경향을 잘 알고 있다면 어떤 주어진 상황 하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다. 정직한 사람도 환경의 압박이나 또는 잠재업의 경향으로 인해 부정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며, 용감한 사람이 겁쟁이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인간성이 왜 일관성이 없고 곧잘 모순성마저 띠게 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항상 정확하게 ‘성격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개성이란 순간순간 바뀌는 유동적 구조물이며 이를 지배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행(saṅkhāra - 축적된 성향 또는 습관 형성력)에 해당되는 다소 광범한 원칙들뿐이다.
여기서 행에 관해 말해 둘 것은 이 행의 개념은 개인의 진화 체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도 일찍이 그 어떤 철학 체계도 이에 대해 합당한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으며 오로지 불교에서만 그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37조도품12) 중의 한 항목인 4정근13)이 가르치듯이 나쁜 성향은 제거하고 좋은 성향을 증강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쌓아나가면 우리 자신의 심리를 이상적으로 주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습관 형성력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대 심리학이 보여주고 있듯이 행(行)의 개념은 관념 연합의 개념과 긴밀히 이어지게 되었다.
파블로프14)는 조건반사에 관한 실험에서, 연상 관념과 신체적 반응 사이의 상관성을 정립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개들에게 종소리나 그 밖의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면 음식의 관념을 연상하도록 훈련시켰다. 개들은 그 특정한 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보거나 냄새를 맡았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개들은 침을 흘렸을 뿐 아니라, 다른 기쁨의 표시도 나타내었는데 이로 보아 개들의 마음속에서는 그 소리와 음식의 관념이 단단히 연합되어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개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에 비해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개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추이와 그것이 신체상에 일으키는 결과를 추적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그것은 거의 조건반사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개의 이성적 능력은 초보적이며 또 하위층의 생물체로 내려갈수록 더욱 더 본능적이고 기계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미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적 단위에 불과하다. 흰개미 집단에 관한 최근의 실험에 의하면, 지령자는 여왕개미이고 개미떼는 두뇌와 신경 중심을 여왕개미에게 온통 맡기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만일 여왕개미가 제거되면 흰개미들은 혼란되어 아무 방향으로나 미친 듯이 달려가 버려 개미 집단의 질서 정연한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미는 그 자체로는 완전한 유기체가 아니며 단지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몸통에 붙은 사지와 같다. 따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꼭 한 마리 동물의 손발 같은 기능을 한다. 그들은 여왕개미로부터 나오는 일종의 레이더 같은 것에 의해 지시를 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왕개미가 죽거나 상처를 입으면 상황은 마치 동물이 두뇌를 다쳐서 미친 것처럼 수족을 함부로 흔들어대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 여왕개미라는 두뇌는 딱하리만치 발전이 제한된 기관이다. 그것은 대대로 여왕개미에게 전수되는 선천적인 경향에 따라서 개미 집단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능만을 수행한다.
그 필요성의 한계 안에서 그것은 완벽한 유기체이지만,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진화상의 한정된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 더 이상 가능한 대안에 대해서 선택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능력을 포기했으며 고정된 자동 기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업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그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 가운데 하나란 것을 표시한다. 그와 같은 의식 세계의 수준에서는 이전에 지은 선행 조건들이 가져온 결과대로 살 뿐, 그 상황을 향상에 도움 되도록 선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각기 정도는 다르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4악취(四惡趣)15)의 공통 특징인 바로 그 의식 형태라 간주해도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아비담마 요론(Abhidhammattha Saṅgaha)』16)의 ‘개체들의 분류’ 절에서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자동적 의식 형태의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바, 권위나 전통 앞에 자기의 독립적 사유 능력을 제물로 바치고 노예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이 개미의 예야말로 적절한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개미 수준의 의식을 기르고 있는 셈이며, 만일 그들이 개미로서 환생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독립적인 선택에 따르는 모험과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손쉽고도 안이한 방법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책무이다. 그러니 책임을 떠맡은 이상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저버릴 수는 없다.
불교는 우리 인간이 서 있는 위치를 우리 안팎의 우주와 관련시켜 정확히 비추어 줌으로써 인성(人性)의 신묘(神妙)한 가능성[佛性]을 분명히 자각하게 만들어 준다. 불교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가장 힘찬 웅변인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색이 불러들인 혼란에 도로 빠져 버려 갈피를 못 잡은 채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도덕과는 전연 무관한 물리적 힘만으로 형성된 우주, 일정한 중심도 없는 불안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헛그림자만 설쳐대는 마술의 환등 같은 무상한 변화를 그 속에서 바라보며 자기 눈에 비치는 것들이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지성적(知性的) 입장은 절망에 찬 영웅이 전개하는 비극적 서사시의 한 편이라고 적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도덕적 가치를 믿어야 할 근거를 찾지 못하게 된 그들은 여러 가지 도덕적 가치가 과연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인류가 만들어낸 집단적 상상의 소산에 불과한지를 의심하게끔 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인생이 ‘한낱 천치가 지껄여대는 이야기, 격렬한 소동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정의, 자비, 지혜 그리고 진리와 같은 중요한 추상적 관념들이 그들에게는 단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라 결정될 뿐인 한낱 상대주의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자연히 윤리적 기준은 약해지고 편법이 판을 치게 되는 추세로 되어 가고 있다.
‘물리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서의 보다 높은 지혜가 갖추어야 할 여러 요소 중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 요소-그 밖의 모든 요소를 각기 제자리 잡게 하여 완벽하고도 명료한 형태를 갖추도록 해 줄 그 요소-는 불교만이 마련해 줄 수 있다. 붓다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세상을 바라볼 경우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일찍이 알려진 어떤 수준보다도 높은 수준에서 재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재어 보고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경험 요소들을 분석해 보도록, 그래서 도그마의 울타리를 치거나 선입관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불교는 우리를 격려해 주는 것이다. 붓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엄격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도록 가르치신 현재 겁(劫)17)에 있어 최초의 종교적 스승이셨으며, 이러한 그 분의 말씀은 2천5백년 전이나 다름없이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생생하게 울려 주고 있다. 우리는 그 분의 가르침을 비단 긴 세월 동안 보존되어 온 불법을 통해서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 과학의 제 발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 분의 가르침에는 어쩌면 후기의 해석자들이 첨부시킨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치신 핵심적 진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늘날의 사상가들이 놓치고 있는 결정적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에 넉넉하다. 오늘날 사상가들이 발견한 것들을 불교의 교의에 덧붙이면 그 전체상은, 합리적 마음이 음미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완벽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의 영역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보다 높은 불교의 선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확인해 보는 도리 밖에 없다.
지금 인류는 기껏 자신을 파괴할 힘을 얻기 위해서 우주의 비밀을 캐내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우려에만 그칠 수 없는 실재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대세에 일대 변화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의 과학 그 자체가 많은 그릇된 생각의 기반을 제거해 냄으로써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를 깨닫는 쪽으로 우리를 접근시켜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의 제목을 ‘불교와 과학(원제목 : ‘불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The Scientific Approach to Buddhism’)이라 붙인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의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불가항력적으로 불교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정신적으로 ‘자꾸만 커져 가는 고통’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제 곧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일상적인 종교적 도덕적 신조의 기반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거부해야 하는 고통을 치르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정의, 진리 그리고 자비와 같은 보편적 원칙들에 대한 신념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체계적 연구에 근거한 보다 높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지금은 인류가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고 믿어마지 않는 사람들도 그 때에 가면 그들이 한 가닥 실낱처럼 막연히 걸어보던 미래에 대한 전망이 활짝 트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침내 무지와 미망의 족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열반이라는 저 궁극적 목표의 의미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불교의 매력
1958년 6월 1일, 세일론[스리랑카] 라디오 방송국의 ‘불자 토론회’에서 불교로 개종한 분들에게 “불교의 어떤 점이 가장 내 마음을 끄는가?” 하는 주제로 발표 요청이 있었다. 다음은 프란시스 스토리(법명 : 재가수행자 수가타난다 Anagarika Sugatananda)씨가 발표했던 방송 내용이다.
제가 불교도가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로 14세에서 16세 사이의, 무척 어렸을 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저로 하여금 불법의 진리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무엇보다도 윤회(환생)와 업, 두 가지 사실들이었습니다. 제가 ‘사실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많은 비불교도들 사이에서도 이제 윤회는 증명된 진실로 잘 알려져 가고 있으며, 일단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업이 실재한다는 것도 함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두 가르침은 인생에 있어서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을 모두 해명해 줍니다. 그 교의들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일견 불공평한 일들, 세속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는 그런 일들을 설명해 줍니다. 이들 교의는 또한 우리 인간의 개인적 삶이 속절없이 허망하며, 만족스런 모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해명해 줍니다. 사실 무한한 영원으로부터 한 생애를 떼어놓고 볼 때 인생은 분명 무의미하기만 하며 미해결의 문제점과 불완전한 설계로 충만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근래에 많이 보도된 한 소년의 예, 인간의 과학으로도 신의 자비로도 구할 수 없었던 레드 스켈튼씨 아들의 비극적이고 짧은 생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고 또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기형아, 정신박약자와 정신병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가련한 상태는 분명코 이 생에서 저지른 그들의 과실 탓이거나 또는 인간의 사회 조직이 지닌 개선 가능한 결함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과학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결코 이러한 재난들을 온전히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학 때문에 신용이 떨어져 버린 종교 쪽에서도 더 이상 위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 진보가 고통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억울하게 불운을 당한 희생자들이 이 생에서 지은 도덕상의 문제야 어떻든 간에 내생에서는 무슨 특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익한 짓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정의감이 유별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까닭과 그리고 그 일들의 배후에 숨은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신(神)의 정의(正義)’가 인간적인 정의와는 별도로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나 관념은 인간의 기준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적 의미에서 옳지 않은 조건들이라면 그 조건들은 완전히 잘못된 조건인 것이며, 불합리성을 신의 정의라는 말로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의 정의’란 신학자들이 날조한 것으로 불합리성의 마지막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만나게 되면서 저는 제가 그렇게도 구해마지 않던 정의와 목적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저는 마침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 인생의 처절한 모습, 즉 비참과 헛됨 그리고 맹목적이며 비정한 잔인성들로 뒤범벅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다소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업과 윤회는 불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힌두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나의 과학적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제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될 수도 있는 다른 보편적 법칙들과 합치되는 원리라는 뜻입니다. 변화하면서 연속적으로 지속한다는 것은 자연 전반에 공통되는 원리이며 모든 과학적 원리들의 기반이 되는 기본적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무아의 원리로 나타나는데 이 무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윤회의 개념이 원시적 애니미즘18) 수준을 벗어나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아(anattā)는 영혼이 없음(non-soul), 자아가 없음(non-ego), 그리고 자기가 없음(non-self)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전개 과정에 있어 상주하거나 일정불변한 요소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윤회하는 ‘영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전개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체입니다. 한 생에서 나타나는 개성은 지금까지의 존재의 흐름이 지어 온 활동의 결과인데, 그것은 마치 한 특정 순간에 있어서의 물리적인 어떤 현상이 수많은 같은 성향의 일련의 사건들이 차츰 그 현상으로 다가온 최종 결과인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심오한 연기(緣起)의 원리를 숙고함으로써, 무아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저는 불법이 동적(動的)인 우주 질서에 대한 완벽한 계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법은 과학적으로 완벽하니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하등에서 고등까지의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의 생 전부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며, 또 도덕적으로 보아도 완벽하니 이 모든 형태의 생명들을 하나의 도덕적 질서 속에 전부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포용하는 불법의 체계에서 설명되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의 어떤 행성에서 지각력이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해도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의 존재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지구상의 어떤 생명 형태와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의 몸은 다른 화학적 구성물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들보다 훨씬 우수하거나 아니면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똑같은 오온(五蘊)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온은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의 기본적 구성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업의 결과대로 존재하고 또 죽어가야 하니, 무상·고·무아야말로 보편적 원리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상·고·무아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 역시 생명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나 유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의 생물을 위해 따로, 또 어떤 별의 생명을 위해 따로 특수한 창조 계획 내지 구원 계획을 마련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디서도 통용되는 우주적 법칙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불교의 도덕률인 정신적 향상은 어디서든 가장 중요한 도덕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우주의 법칙과 도덕적 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처음부터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 누구를 향해서도 그 사람이 어쩌다 불교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원한 지옥에 가도록 저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후에 고통 받는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그가 지은 악업이 그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쩌다 잘못된 교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어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그 교회의 특정한 신조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반감을 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응보는 필연입니다. 하지만 어떤 신이나 그 신을 둘러싼 특정 신화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하는 따위의 사악한 교의는 윤리적 원칙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지극히 비도덕적이며 아마도 인류 역사상 단일 요인으로 이보다 더 세상에 해악을 끼친 요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불교는 순간적인 죄, 즉 한정된 시간들 내에서 범해진 나쁜 짓에 대해 영원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법은 사람이 스스로 초래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그가 지은 악한 행위의 무게와 정확하게 같으며 더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매우 무거운 악행 때문에 몇 생에 걸쳐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통을 야기한 악이 제 값을 다 치르게 되면 그 고통도 끝이 나야 합니다. 인간이 짧은 한 생애에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식의 잔인한 발상법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 불교에는 형식적인 회개 행위나 또는 사람이 지어낸 그 허다한 신 중에 하필 어떤 특정한 신만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씻게 된다는 따위의 불공평한 교의도 없습니다.
불교에는 또한 벌을 내리는 인격적인 심판자도 없습니다. 단지 중력의 법칙처럼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은 특히 중요한데 어떤 심판자도 심판을 하다 보면 공정성과 자비로움 중 하나는 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일 냉혹하리만치 공정하다면 자비롭다고 할 수 없게 되며 또 죄인에게 자비롭다 보면 철저히 공정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면 자연의 법칙이 얼마나 비할 데 없이 공정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이 할 일은 자비를 닦는 일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을 닦아 스스로 신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윤회와 고통은 무명과 갈애가 결합하여 일으킨다는 진리는 인간과 동물의 심리 상태와 그리고 생물학적인 진화 과정에서 작용하는 생명 충동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결론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생명체의 진화에 관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보충해야만 되는 요소를 제공합니다. 존재하고,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한 투쟁 뒤에 숨은 원동력은 붓다가 생사윤회의 근원에서 발견한 바로 이 갈애라는 힘입니다. 이것은 무명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맹목적이며 더듬거리고 헤매는 힘이기는 하지만, 한편 복잡한 유기체가 그 단순한 시초로부터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갈애 덕분입니다. 그것은 또한 존재가 정신적 진화의 눈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윤회의 바퀴를 부단히 돌고 있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구경 해탈, 즉 영원불변의 상태인 열반의 증득은 바로 이 두 기본적 결함에 뿌리를 박은 모든 재생의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과 갈애라는 이 두 가지 굴레의 성질을 깨달음으로써 이러한 합리적 신념이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닌 것(asaṅkhata)’, ‘늙지 않는 것(ajarā)’, ‘견고한 것(dhuva)’, ‘죽지 않는 것(amata)’ 등으로 표현하신 이 열반은 ‘조건 지어진’ ‘환영과 같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난 진실한 실재인 것이며, 탐·진·치 삼독심의 불기를 끔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불교에서의 믿음은 이성과 경험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하면 할수록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신앙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불법은 모든 이들이 와서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성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분석을 가하도록 요청하신 유일한 종교적 스승이십니다. 불법이 진실이라는 증명, 붓다의 깨달음이 진실이라는 결정적 증명은 가르침 그 자체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발견이나 마찬가지로 불법의 진리도 실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성과 직관적 통찰에 의해서 그것을 시험하고 증명할 수 있으며, 불교도에게는 이와 같은 지성적 자유의 헌장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은 제가 진리를 찾아 처음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저를 사로잡았던 불교의 특징적 내용 몇 가지를 들어 보인 것입니다. 그 후로도 매력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많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법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 것입니다. 법을 탐구해 나가면 우리의 시야에는 항상 새로운 전망이 열립니다. 진리의 새로운 측면이 계속하여 드러나면서 신선한 아름다움이 펼쳐집니다. 그저 법을 지적으로 즐기기만 해도 그처럼 많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거늘 직접적 통찰, 즉 관법(vipassanā)을 실제로 닦을 경우 어떤 경계를 체험하게 될지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 치고 이에 비견될 만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저의 생각만 밝혀 둘 뿐입니다.
프란시스 스토리(아나가리까 수가타난다 : 1919-1971)
영국출신. 런던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다가 광학 연구로 전환. 비교종교학 공부 도중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 2차 대전 때에 인도에서 군 복무 중 사르나트를 방문하여 마하보디 협회와 연관 맺음.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종교생활에 전념하기 시작. 상가라타나 장로로부터 ‘프리야달시 수가타난다’라는 법명을 받고 재가 수행자가 됨. 1954년 미얀마 양곤에서 불자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다 건강 때문에 스리랑카로 옮김. 골수암으로 투병하다 영국에서 임종. 〈고요한 소리〉에서 이미 번역 출간한 그의 작품으로는 보리수잎 6『불교의 명상』, 보리수잎 25『큰 합리주의』, 보리수잎 46『학문의 세계와 윤회』, 법륜 15『사성제』가 있음.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 13
불교와 과학, 불교의 매력
1989년 03월 25일 1판 1쇄 발행
1993년 09월 05일 1판 2쇄 발행
2006년 12월 04일 2판 1쇄 발행
지은이 : 프란시스 스토리
옮긴이 : 박광서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사)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우 110-300)
전화 : 02)739-6328, 725-3408 ·전송 : 02)723-9804
홈페이지 : http://www.calmvoice.org
E-mail : calmvs@hanmail.net
부산지부 051)513-6650·대구지부 053)755-6035
출판등록 : 제 1-879호 1989. 2.18
ISBN 89-85186-17-5
값 500원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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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 1872-1970) :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평론가. 트렐레크에서 출생.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배움. 수학자로 출발하여 화이트 헤드와 공저로 대저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내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 철학자로서는 물질도 정신도 아닌 중성적인 실재를 상정하는 신 실재론 또는 중성적 일원론을 대표. 정치 교육 인생 등에 관한 다수의 평론이 있음. 1920-1921년 북경대학 교수. 1938년 시카고 대학 강사. 1939년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 1940년 뉴욕 시립대학 객원교수. 1944년 이후 트리니티 칼리지 특별 연구원. 1950년 노벨상 수상. 저서로는 『German Social Democracy』(1896), 『The Problem of Philosophy』(1911), 『Scientific Method in Philosophy』(1914), 『Roads to Freedom』(1918),『The Scientific Outlook』등(1931)이 있다. 본문으로
2) 불확정성 원리 :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기본원리. 원자 등의 미립자 현상에 있어서는 위치와 운동량, 시간과 에너지와 같이 일조를 이루고 있는 물리량, 양쪽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원리. 본문으로
3) 시공 연속체(4차원 공간) : 보통의 3차원 공간에 제4차원으로써 시간을 합친 4개의 차원을 통일적으로 생각한 연속체, 시공 세계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 독일 태생의 미국 이론 물리학자.
1905년 물리학 연보에 ‘광양자 가설’, 분자 물리학에 신생면을 개척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 ‘특수 상대성 이론’ 등의 세 논문을 발표. 당시 물리학계의 대가 프랑크의 주목을 받았다.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 1917년 ‘상대론적 우주론’을 발표.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9년에는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장하여 만유인력 및 전자기력(電磁氣力)의 일체를 포함한 ‘장의 통일 이론’을 발표. 그의 연구는 뉴튼의 물리학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옴으로써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었으며, 또한 당시 발전도상에 있던 양자역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평화주의자로서 세계 연방운동을 주창하였다. 본문으로
5)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 인격 주체(personality)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 우리의 수행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를 이룸. 10가지 족쇄 중 첫 번째로, 예류과를 성취할 때 완전히 버릴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가 있다. ① 5온이 바로 그것이란 생각, ② 5온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 ③ 5온과 따로 있다는 생각, ④ 5온의 주관자란 생각. 본문으로
6) 무위법(無爲法) : 무명으로 말미암은 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苦)의 존재를 이루어가는 유위법(有爲法)을 초탈한 법, 즉 무명의 인연 조작을 여읜 법으로 열반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본문으로
7) 사범주처 : 보리수잎·다섯 『거룩한 마음가짐 ― 사무량심』 참조. 본문으로
8) 유분(有分, bhavaṅga) : 아비담마의 해설에 의하면 존재(bhava)의 기초 또는 조건(karaṇa). 강물처럼 흐르는 성질을 가졌음.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모든 인상과 경험이 여기에 저장되어 있으며, 또한 기능하고 있다고 함. 기억 작용, 초과학적 심령 현상, 정신적 육체적 성장, 업과 윤회 등은 이 유분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짐.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subconscious life-stream)’ ‘생명의 암류(暗流, undercurrent of life)’ 또는 ‘생명 연속체(life-continuum)’ 등으로 번역함. 본문으로
9)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 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 기능주의적 경향의 심리학, 프레그머티즘의 창시자. 1890년 미국 심리학의 초석이 된 ‘심리학 원리’ 두 권 저술. 의식의 추이적 성질을 중시, 이것을 끊임없는 유동, 즉 의식의 흐름으로 보고 로크 이래의 정적 구성 심리학에 혁신을 꾀함. ‘종교 경험의 제상’으로 종교 심리학 발전에 기여. 철학에서는 개념적·반주지적·다윈적 상대주의를 주장. 그의 인식론적 저서 『근본 경험론』은 추상주의를 배격, 경험을 그대로 구체적으로 포착, 경험이 즉 실재라고 보고 있다. 한편 그의 실용주의는 듀이를 거쳐 더욱 발전, 심리학뿐 아니라 제반 인문 과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미국의 생활 철학으로 큰 의의를 말해 주고 있다. 본문으로
10) 『법구경』 1 게송. 본문으로
11)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 : 영국의 문명 비평가, 역사가. 켄트 주 출생. 독학으로 이학사가 되었다. 1903년에 페미앙 협회에 가입. 「세계 문화사 대개」, 「생명의 과학」 등을 썼다. 그는 자유롭고 상식적인 영국 지식 계급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문필가였다. 저서로는 『도둑맞은 병원균』, 『공중 전쟁』, 『분노 방지』 등이 있음. 본문으로
12) 37조도품(助道品) : 초기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37가지 수행 방법.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가 이에 해당한다. 37菩提分法, 37覺分, 37道品 등으로도 불리운다. 본문으로
13) 사정근(四正勤) : 37조도품에 속하며 팔정도 가운데 정정진(正精進)의 내용이기도 한데, ① 이미 생겨나 있는 선(善)은 더욱 증대시키고, ②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은 생겨나게 하며, ③ 이미 생겨나 있는 악(惡)은 없애려고 하고, ④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은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四正斷, 四正勝 등으로도 불린다. 본문으로
14)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 : 러시아의 생리학 교수, 페테르부르그 대 졸업 후 독일 유학, 생리학 전공. 타액선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유명한 조건반사 연구에 의해 대뇌 생리학 탐구로 세계적으로 알려짐.
젊었을 때는 췌장을 지배하는 신경, 후에는 심장의 원심성 신경, 그 외에 소화기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04년 노벨상 수상. 저서로는 『심장의 원심성 신경』(1938), 『양반구의 활동에 관한 강의』(1927) 등이 있음. 본문으로
15) 사악취(四惡趣) : 업으로 인해 태어나는 계(界) 가운데 특히 나쁜 네 가지 계로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말함. 사악도(四惡道)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6) 아비담마 요론 : 옛 인도 칸치푸라 성(城)의 고승 아누룻다 장로의 저서로 알려진 아비담마 불교의 요약 해설서. 스리랑카의 나라다 스님에 의해 빠알리-영어 대역본이 BPS에서 간행되었음(1980). 본문으로
17) 겁(劫) :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로 중겁, 아승지겁, 대겁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세로부터 늘어나 무한수에 이르렀다가 다시 10세로 줄어드는 기간을 한 중겁이라 하며 스무 중겁이 한 아승지겁, 네 아승지겁이 한 대겁을 이룬다. 한 대겁은 길이, 폭, 높이가 각기 한 유순(40리에 해당)인 그릇에 가득 담긴 겨자씨를 백 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다 비우는 데 소요되는 시간보다도 길다(『아비담마 요론』에서). 본문에서는 현존 인류의 전 역사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18) 애니미즘(물활론, animism) : 모든 자연물에도 마음 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학설. 본문으로
보리수13(06.12.0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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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법문 잘 들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