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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골로새서 개론주제 :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2:19)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2:1)이라 말씀한 대로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4:18)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기록하게 된 동기는 골로새 교회에서 온 에바브라(1:7)를 통해서 교회 내에 이단(異端)이 침투했다는 긴급한 보고를 받게 됩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보낸 서신이 “골로새서”입니다.
이러한 골로새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구절(句節)이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붙잡고 있기만 한다면 견고한 신앙이 되어 이단에 미혹될 염려가 없다 하겠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심
① 첫째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1;18상)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의 주제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이라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기독론”(基督論)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인가?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이요”(1:18), 즉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란 떨어질 수도 없고, 떼어놓을 수도 없는 연합(聯合)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 이에 대한 예표를 아담에게 배필을 지어주시는 방도(창 2장)를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라는 특이한 방도로 배필을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1, 23), 즉 자신의 몸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 그런 후에 성경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聯合)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즉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둘이 한 몸을 이루는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되게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표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머리와 몸, 남편과 아내, 포도나무와 가지”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머리와 몸의 관계이기 때문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2)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밀(엡 5:32)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연합교리”의 신비입니다.
② 그런데 두 번째로 중요한 말씀은, 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2:19상) 하는 점입니다.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은 한마디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붙들지 아니하고 지엽적(枝葉的)인 것들을 구원의 조건인 양 내세웠던 것입니다.
㉠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2:8) 한대로 십자가의 도(道)보다는 세상의 철학을 더 내세웠고,
㉡ 할례를 행하고(2:11),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2:16) 등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 천사숭배(2;18)와 같은 신비주의요,
㉣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2:21) 등의 금욕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2:23) 하고 단언합니다.
이 두 구절,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과,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는 말씀은 골로새 교회에 있어서 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교회냐, 거짓 교회냐를 분별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말씀이요, 현대교회에도 더욱 적실성이 있는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함
그렇다면 교회의 “머리를 붙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③ 첫째는 그 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바른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친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하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당신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 당신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는 분, 당신은 38년 된 병을 고쳐주신 분”이라는 답변 등은 머리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면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합니다. 빌립보서의 표현대로 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시라는 말씀입니다.
㉢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1:15-16) 하고 창조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러한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불신자들이란 이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④ 머리를 붙든다는 두 번째 의미는 이러한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 “그의 십자가의 피로”(1:20상)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죽어주셨는가?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하) 하고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 1:22절에서도,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1:21)하게 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죽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怨讐)가 되었던 너희”(1:21)라고 말씀합니다. “원수”를 위해서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롬 5:10)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만해도 듣기 싫어하고 미워하고 안색이 변하는 사람들, 이것이 “마음으로 원수”된 상태입니다. 그러했던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행해주신 일입니다. 이를 믿는 것이 머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증서를 찢어버리심
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證書)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2:14-15) 하고 선언합니다.
㉠ “의문(儀文)에 쓴 증서(證書)”란 채무증서, 죄 값에 팔린 노비(奴婢)문서와 같은 것입니다. 이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하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철저하고 강조적입니까? 이는 온전히 청산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해방이 되고 자유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2:20-21) 하고, 붙들고 있던 머리를 놓친 저들을 책망합니다.
이점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 4:9) 하고 말씀합니다.
⑥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2:16) 하십니다.
㉠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2:1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의문(儀文)들은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에 의하여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림자, 모형, 예표” 등으로 보여주셨던 것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1: 26), 즉 실체로, 실물로, 성취로 “밝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머리를 붙들고만 있다면 이러저러한 일로 “폄론”(남을 비평하는 말)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기”(갈 5:1) 때문입니다.
⑦ 그러면 “머리”를 붙들고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1:23), 이것이 머리를 붙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이것이 머리를 붙들고 승리하는 삶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
⑧ 여기 경이로운 말씀이 있는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充滿)이 육체로 거하시고”(2:9) 합니다. 그 다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充滿)하여 졌으니”(2:10)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빈 깡통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련한 모습을 하고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고 있는데, 성경은 “충만하여 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여졌단 말인가?
㉠ 이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가 “모든 충만”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몸도 충만해졌다는 말씀입니다. 머리만 충만하고 몸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 시편에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1-2) 합니다.
㉡ 대제사장인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이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즉 손끝 발끝까지 흘러내립니다. 이 그림자를 통해서 대제사장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으심”이 몸의 모든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흘러내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머리에게 되어 진 모든 일(죽으심과 다시 사심, 고난과 영광)은 동일하게 몸에도 되어진 일이라는 것이 연합교리의 진수입니다.
⑨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2:3) 합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2:6)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란 “충만”(充滿)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보화”를 소유한 부요(富饒)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하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3)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몸인 교회도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란 절대적으로 안전(安全)합니다.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榮光) 중에 나타나리라”(3:4)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낮은 몸도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영광스러움이란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
⑩ 그렇다면 교회가 담당해야할 사명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1:28상) 합니다. “전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1:28하) 합니다.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能力)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 하고 말씀합니다. 복음 증거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어 그를 종으로, 도구로, 의의 병기로 사용하여 증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몫입니다. 이것이 그의 몸 된 지체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 마지막으로 다시 상기시킵니다만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는 말씀은 골로새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현대교회가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철학과 세상 초등학문으로 설득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 축복을 “십자가”보다 더 많이 말하고 있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 기사와 이적과 방언이나 신유 등을 대속이나 칭의 교리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면 이는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⑪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3:12) 합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 합니다. 이점에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동시에 기록이 된 서신인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는 대목을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형제여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말씀에 의하여 마음과 생각, 몸과 영이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머리를 굳게 붙드시다. 그리고 말씀 충만, 상령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