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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 수필세계 사랑방
영혼에 불을 밝히는 수필가,
변해명 선생님
근황
서설이 내린 뒤끝이라 바깥바람은 찼다. 우리가 탄 차는 바람을 가르며 서울로 향했다. 수필세계 봄호 사랑방 초대석에서는 원로 수필가이신 변해명 선생님을 모시기로 예정되어 있다. 얼굴을 뵌 적이 없는 나로서는 홍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그저 변해명 선생님을 머리로 그려 볼 수밖에 없었다. 수채 물감을 풀었다가 유화 물감을 갰다가 다시 파스텔로 그려 보았다. 왜냐하면 원로 수필가 중에 가장 고우신 분이라고 해서 수채화로 그릴까 하는데 이내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혼이 아름다운 작가라 했다. 그래서 파스텔화를 그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먼 길이어서 약속 시간에 촉박했었는데 이번에는 미리 도착하여 느긋하게 전화를 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약속 장소는 서초구 청진빌딩 수필문우회 사무실이었다. 주차장을 찾아 들어서니 선생님께서는 마당까지 내려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선생님은 둥근 털모자에 남색 코트를 입고 계셨다. 뽀얀 피부에 주름 없는 얼굴 위로 간간이 눈발이 날려 방금 머릿속에 스케치해 놓은 파스텔 그림을 꼭 닮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4층으로 올라갔다. 수필문우회 사무실은 계간 수필 편집실을 겸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무실을 얻어서 이사를 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고 한다.
아담한 사무실 한쪽에는 책상과 잘 정리된 책장이 있었고, 작가들이 모여 앉아 토론회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탁자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워낙 임대료가 비싸 사무실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문학회와 문예지가 영리 사업하는 단체가 아니니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하신다. 그래서 수필문우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회비를 내고 뜻있는 분들의 찬조로 유지한다고 하며 대부분의 문학회가 그런 형편이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간혹 머리 좋은 사람이 있어 좋은 사무실을 몇 개씩 얻어 운영하는 곳도 있다며 웃음을 지으신다. 수필세계는 어려움이 없냐는 물음에 홍 선생님의 대답이 우렁찼다.
―괜찮습니다. 한 서른 평 되는 널찍한 사무실이 있습니다.
옆에서 아니라고 말하기 미안해서 그냥 있긴 했지만 수필세계 사무실이 어디 사무실이던가. 이곳에 비하면 그저 좀 커다란 창고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데 홍 선생님은 호기를 부린다. 그러나 선생님은 금방 알아차리신 듯 광고도 없고 등단자도 일 년에 한둘밖에 안 내는 문예지가 얼마나 넉넉할까 하시며 어려움이 클 거라고 말씀하셨다. 홍 선생님이 얼른 말을 돌렸다.
―축하합니다. 연거푸 큰 경사가 겹쳐서…….
선생님은 지난 연말에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셨다. 홍 선생님이 짓궂게 여쭈었다.
―상금은 많이 주던가요?
―상금은 별로예요. 아주 별로예요. 한국문인협회가 운영하는 상인데 제46회째를 맞아요. 역사가 깊죠. 세 사람 뽑고 서울시에서 상금을 줍니다. 그런데 꼭 수필 장르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예요. 올해는 시, 시조, 수필이 받았어요. 아마 시 부문에 김소엽 씨, 시조 부문에 유자효 씨 그리고 수필에 제가 받았지요. 12월 29일 날 프레스센터에서 시상식을 했구요.
―네, 참 귀한 상인데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예술문화위원회의 문예창작 지원자로 선정되셨지요?
―그래요. 수필 지원금은 한때 없어졌다가 2009년 10월부터 다시 나왔지요. 문협 수필분과장인 정목일 선생의 힘이 컸어요. 아마 이리저리 쫓아다니시고 국회까지 찾아가서 간담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리고 뭐가 문제냐 하면 수필 부문 심사할 때 시인이나 평론가가 들어오는 거예요. 이건 안 되는 일이죠. 그래서 수필의 독창성과 독립성을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작가가 수필가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문학성을 중심으로 뽑는다는 말을 해요. 그러나 이청준 같은 사람과 어떤 수필가를 비교할 때 문학성을 어떤 잣대로 매길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건의를 했지요. 올해는 수필 부문에 세 사람이 올라 있고 천만 원씩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문학과의 인연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종로구 적선동 세종문화회관 자리가 제 집입니다. 덕수초등학교를 다녔지요. 그러다가 6․25가 일어나서 시골 외가로 가게 되었어요. 외가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로 첩첩산골이에요. 이곳에서 줄곧 살다가 대학 갈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중고등학교 10대에 자연과 함께 살았죠. 그것이 모두 제 글의 소재가 되었고 그래서 제 글은 자연을 쓴 것이 많아요. 수필 산처럼 사노라면, 달맞이꽃, 강물 소리를 들으며 이런 작품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작품이에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하는 선생님은 6․25 때문에 사람 구실을 했다며 웃으셨다. 사람은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완성된다는 말씀이었다. 전쟁터에 돌아다니면서 죽은 군인을 수도 없이 봤고 그것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죽음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들이 철학적 사고를 가지게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엉뚱한 소녀였다. 6살 무렵 담 밑으로 기어가는 개미를 몇 마리 죽이고 나서 개미의 눈에 보일 나와 신의 눈에 개미처럼 보이는 나를 비교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월미도로 소풍을 가서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배를 보고 우리 인생도 가까이 지낼 때는 화려하지만 결국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지워진다는 글을 써서 학생들 앞에서 낭독한 일이 있었다.
―외가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남궁억 선생님이 세운 한서중학교가 있었고, 언니가 그 학교의 교사였고 나는 학생이었어요. 6․25 때 피란 온 대학교수가 있었는데 음악과 국어를 가르쳤어요. 그래서 어린 나이에 오페라와 연극 등등 고급 문화 예술을 다 경험할 수 있었지요.
그 시절 국어 선생님이 내가 쓴 시 부엉이를 신춘문예에 냈는데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 신춘문예가 뭐예요? 하고 물어보았지요. (크게 웃으심) 후에 그 작품이 전국학생문예작품공모에서 큰 상을 탔어요.
선생님은 중학교 때 문학적 소양을 거의 닦으셨다. 옥파일 , 민천기 등 여러 선생님의 자극이나 자연환경 이런 것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중학교 때 책을 많이 가지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선생님 방에 가서 책을 거의 다 읽었다. 대학생이 읽는 책까지 다 읽었으며 세계 문예 사조사까지 읽었다. 대학교 가니까 그 책을 가지고 수업을 했으니 중학생 때 이미 대학교 교재를 다 공부한 셈이었다.
또, 문예반 반장을 맡아 신문을 만들 때 회원이 가져온 시를 자신이 막 고쳐서 냈는데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까 김소월 시였다며 크게 웃으셨다.
―외가에서 읽은 많은 책들과 일기 쓰기가 문학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버려진 일본 책을 주워 와서 행간에 글씨를 심었죠. 그리고 고콜(벽난로)을 만들어 그 불빛으로 책을 읽게 했어요. 또, 우리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읽는 것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첨삭했고요. 종일 일기 쓸 거리를 기억하고 저녁에는 어머니 앞에서 일기 읽는 시간을 가졌지요.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날마다 옛날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동생들에게 들려줬는데 연속극처럼 동생들이 궁금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매일 연속극 쓰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그것이 글 쓰는 바탕이 되었고 상상력이 된 것 같아요. 이 버릇은 대학 다닐 때까지 이어져 대학 때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그 집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재미있는 것은 그 집 아이들 친구가 그런 책이 어디에 있냐고 사 보겠다고 난리를 친 해프닝이 있었어요.
그때 책을 읽고 300편 가까운 독후감을 썼는데, 그것이 외가 어디에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대학 졸업 때까지 많은 일기장이 있었는데 일기 속에는 반드시 일일 일문-영어, 우리말, 책에서 본 좋은 글, 명상록-을 꼭 쓰고 외웠어요. 또 글을 한 편씩 썼고요. 명문을 제목으로 하고 쓴 글은 일종의 수필이었지요.
중학교 때 책도 만들었어요. 동생은 그림을 그렸고 나는 글을 썼어요. 푸른 하늘 은하수라는 책이지요.
선생님은 20대에는 시를 써서 신춘문예 입선을 한 적도 있다. 68년에는 소설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갔다. 그 후 시 소설에서는 손을 뗐고 교육부에 들어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만드는 업무에 참여했다. 그 무렵 수필을 만났다. 그때는 수필 시 소설이 똑같이 인정을 받았었다. 짧은 글에 모든 의미가 들어 있는 수필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수필을 쓰게 되었다. 길 건너 건물에 계시는 김동리 선생을 만난 것도 수필을 하게 된 계기다. 그때 산처럼 사노라라는 수필을 썼다.
―명문, 내가 봐도 명문이었죠. 원고지에 써서 김동리 선생을 찾아갔고 1975년 2월 한국문학에 실리면서 등단이 되었어요. 김동리 선생님이 평에서 문장이 물이 흘러가듯이 기가 막혔지만 수필답지는 않다. 그러나 워낙 문장이 좋아서 뽑아 준다고 했지요.
문인들과의 만남
내가 등단할 당시에는 수필가가 드물었어요. 당시에는 중앙 일간지에도 신춘문예에 수필이 있었지요. 이정림, 오창익, 윤모촌 씨 등 신춘문예 출신 빼고 수필가가 몇 없었어요. 1975년인가 지금 현대수필을 만드는 윤재천 선생이 처음으로 수필가들을 모았어요. 그때 한 70여 명이 모였지요. 이것이 수필 모임의 첫 역사예요.
한국수필가협회에서 활동하시다 작고하신 서정범 선생님과는 대문을 맞대고 살았어요. 대문 건넛집에 서 선생님이 살았지요. 당시 선생님은 경희대학교에 근무하셨어요. 서 선생님이 조경희 선생을 소개를 해 줬어요. 그리고 윤재천 선생을 만났지요.
피천득 선생님 아들과 막냇동생이 친구였어요. 그 인연으로 피천득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선생님으로부터 편지 같은 것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요. 피 선생님 댁 서가에는 책은 많이 없지만 때 묻은 책 몇 권이 꽂혀 있었어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지만 사람에 대한 정이 대단했던 분이에요. 남이 보내 준 카드 엽서는 모두 모아 두셨어요. 커피포트가 모두 있는 시절에 노란 주전자에 물을 데워 커피를 먹었어요. 방석도 사모님이 손수 뜬 방석이고 책상 하나가 전부였어요. 피 선생님만큼 재물에 탐욕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추석과 설에 늘 세배를 갔었지요.
40대 초반에 김태길 선생을 만났어요. 수필문우회 첫 모임이었지요. 김태길 선생과 함께 수필문우회 창단 멤버예요. 결국은 이름난 문인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지요.
책상 위에는 계룡산 금수장여관에서 제1회 합평회 때 찍은 기념사진이 크게 확대되어 놓여 있었다. 사진에는 대구의 정혜옥 선생님 모습도 있었다.
선생님의 작품 세계
선생님께서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책은 소년․소녀 소설인 집 없는 천사라고 했다. 아예 책을 외웠다고 했다. 삶의 꿈을 갖게 한 책이었는데 대학 때 그 글을 바탕으로 글을 써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삶을 끊임없이 희망적으로 써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언어의 내면성, 함축성, 이중적 구조에 힘을 실어요. 그리고 인간 영혼의 문제, 삶의 정점, 그 사람의 인생관을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요. 어떤 소재 이야기를 쓴다 해도 결국 나의 인생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세속적인 것보다 영혼의 세계를 지향한다.
일상적 삶의 욕망이 아니고 궁극적 인간의 목표가 영혼의 세계예요. 그것은 죽음과 연관이 있지. 한마디로 일출과 일몰은 동일한 빛을 갖고 있어요. 태어남과 죽음은 같고 결국 이것은 하나의 무예요. 결국은 모두 무예요. 이것을 표면에 드러내면 건방질 것 같아 표현은 안 하는 편이지요. 인간은 무엇을 하기 위해 살고 있나?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유한성이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문학이예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요. 모든 예술의 정점은 무예요.
―내가 주로 사용하는 소재는 자연이며 그 중에 나무, 숲이에요. 우리 인간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사물을 애호하지요.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는 다 벗어요. 나무는 한없이 재생 부활하지만 인간은 일회성이에요. 일회성을 어떻게 부활하여 영원성으로 만드느냐가 과제예요. 자기로부터 변화 탈피로 거듭나는 방법 밖에 없겠지요. 나는 가장 낮은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글을 시작해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우주를 갖고 있어요.
선생님이 학교에 근무할 때 한 학생이 부활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교복을 일주일에 몇 번 빨아 입니? 때 묻을 때마다 갈아 끼우지. 그러면 새롭지? 그것이 부활이다.
―선생님은 쉽게 이야기하는 글에 진실이나 본질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을 쓸 때는 꼭 본질이 담겨 있어야 해요. 양파를 샀어요. 제일 못생긴 것을 덤으로 달라 했더니 할머니가 사람도 미련하긴 더 달라 하면서 그리 못생긴 걸 고르나. 좋은 걸 갖고 가라.고 했어요. 그 할머니 미소가 본존불의 미소였어요. 이렇게 삶의 진실을 통해 본질을 말해야 해요. 글은 쉽고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 좋은 글이지요.
―선생님의 많은 작품 중에 서너 편만 고르라면 어느 작품을 뽑으시겠어요?
―음, (한참 생각 후에) 빨래를 하며, 섬인 채 섬으로 서서, 달맞이꽃, 십 년 후 이런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선생님의 수필관
선생님의 수필관을 들어 보았다.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수필이 왕성해지고 독자들과 접촉도 잦게 되었다. 요즘 독자들은 긴 글을 읽는 것을 회피한다. 시도 소설도 수필화되어 가고 있어서 수필은 앞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우리 수필은 중국의 문체에 속하고 있다. 짧은 글에 문학성을 강조한다. 외국에서는 문학성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적인 정서를 발전시켜야 한다. 수필문학 인구가 많아지고 있다.
―수필 인구가 5천 명에 가깝다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필 신인으로서 갈등을 느끼며 질문했다.
―압구정에 가면 성형외과 간판뿐이에요. 성형외과 의사가 육만이 넘는다고 해요. 그러나 실력 있는 의사만 인정받아요. 수필가가 아무리 많은들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을 독자가 알아서 받아들일 것이니까 많아서 걱정될 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수필가가 많다는 것은 교양 있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므로 문학 확산에 좋아요. 다만 수필가라면 전문성이 있어야지요.
수필은 도를 닦는 작업이에요. 자기를 드러내고 덕을 갖춰야 해요. 사람 공부가 우선이지요.
언어 구조가 그렇죠. 소설은 주인공을 내세워 여러 가지 역할의 말을 하지만 수필은 자기 목소리밖에 안 되잖아요. 속된 말 쓸 수 없고 품격을 갖춰야 하죠. 격이 없는 수필은 수필이 아니예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해요.
수필이라는 것은 몸에 아름다운 옷을 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있는 것을 다 벗고 발가벗고 서는 것입니다. 수필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운 작업이에요. 체험이라는 것은 지혜고 깨달음이죠. 일상의 나열이 아니라 아, 인생이라는 것은 뭐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수필이지요. 경험은 소재입니다. 그릇에 불과하죠. 채워 넣는 것에 불과해요. 수필이 체험한 것을 쓴다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쓰라는 뜻이에요.
수필문우회와 계간 수필
수필문우회는 수필의 질을 향상시켜서 수필문학의 위상을 높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정기 모임으로는 월 1회 월평을 하고, 석 달에 한 번씩 작고 문인 집중 조명 시간을 가지며, 십 년 주기로 국제 세미나도 열고 있지요. 1991년과 2001년에 개최하였고 수필문우회 창립 30주년이 되는 내년에도 국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2004년부터 수필아카데미를 시작했고 사무실을 옮겼으니 3월에는 수필창작대학도 개설합니다.
―우리 수필문우회에서 만드는 계간 수필은 등단자가 연간 1~2명 내외예요. 광고도 없고 등단자에게 책을 맡기는 일이 없으니 운영하는 것이 어렵지요. 수필세계가 그런 문예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 서울에서도 수필세계를 모두 인정해요. 너무 많은 등단자를 내는 곳도 있어서 내가 몇 번 조언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출판사의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라 이해해야겠지요.
―얼마 전에 수필문우회에 어느 정신 나간 애독자가 무명으로 500만 원을 기증했어요. (모두 웃음) 더듬어 더듬어 알아보니 허세욱 회장님 사모님이었어요. 여기 수필문우회 사람들은 겸손해요. 문학의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요즘 잡지는 문학에 20, 다른 것에 80인 경우가 많아요. 김태길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 책도 좀 팔지요?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된통 야단을 맞았어요. 어떤 잡지는 등단하면 100권을 원칙으로 팔고 있는 곳도 있어요. 이 말을 받아 홍 선생님이 말했다.
―저는 창작반을 운영하면서 3년 이내는 웬만해서 등단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희망하는 곳으로 추천하는데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않고 성향에 맞게 모든 수필지에 골고루 등단을 시켜요. 그 중에 계간 수필이 가장 어려워요. 등단자 80명 중 단 한 사람밖에 없어요.
―편집위원 6명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안 됩니다. 7년 된 사람도 있는데 이번에 또 떨어졌어요. 그분을 딴 문예지로 보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너무 까다롭고 철저하고 그래서 힘들어요. 교수, 극작가, 철학자, 이런 분들도 있는데 이번처럼 뉴욕에서 보내 온 목침 같은 좋은 작품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다른 작품을 보고 고개를 흔드니 안 될 수밖에요.
―계수회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는요. 10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등단자가 40명밖에 안 돼요. 수필세계 등단도 너무 깐깐해요. 신춘문예 나온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어서 약간 기가 죽었어요. 지난 호 책을 읽으면서 참 괜찮은 책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필세계는 꼭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지방에 있는 사람이 서울로 올라와서 책을 만들어 봐야 시간 낭비 돈 낭비예요. 그러니 수필세계에서 빨리 출판 업무를 하여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세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을 생각할 때 수필세계도 출판으로 모든 사람을 안을 만해요.
수필 문단에 대한 당부
―많이 등단시키는 것은 그 동네 여건이라고 이해하지만 분명한 것은 재교육을 시켜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점이에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해요. 산문의 핵이 되는 문학 전반을 공부 시켜야 해요. 그 훈련을 시키는 것이 등단시킨 문예지의 책임이에요.
수필 한 편 고쳐서 등단하고 나면 뭘 할 건데요? 글로써 나를 나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 다음에 등단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등단의 개념이 너무 난발하고 흐려져 있어요. 오죽하면 수필 장르를 빼고 지원금을 뺄까요? 아무나 수필가가 되면 모두 자폭하게 되어 있어요. 수필이 너무 상업적으로 가는 것이 염려스러워요. 어중이떠중이 모두 다 쓰는 것은 수필이 아니고 작가도 아니어요, 아휴.
대담을 마치고 1층에 있는 생선구이 집으로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유명한 식당이란다. 구이로 나온 갈치가 팔뚝만 하다. 음식 맛이 소문을 따라주지 못했다. 우리 문단에도 이렇게 소문은 요란한데 실속 없는 문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며 모두들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올여름 수필세계 세미나에서 뵐 것을 부탁 드렸다. 선생님은 쾌히 시간을 내서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눈발이 날리던 서울과는 달리 남으로 내려올수록 는개 비가 눈앞을 흐렸다. 아침에 올라갈 때의 설렘과 달리 대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숙제를 받아 온 느낌이 든다. 원로 선배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후배에게 크나큰 책임의 채찍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