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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백정혜
『詩와 意識』, 『수필문학』 수필 천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여성문협 회원 제10회 대구문학상, 제4회 영호남수필문학대상 수상 『수필집 『기억으로 흐르는 江』, 『아침이슬』, 『쫓겨난 남자』 현재 대구동중학교 교장
│대표 작품│
곱창집 불독 외4편
백 정 혜
짐승을 두고도 면식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불독을 봤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줄잡아도 오 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던 남의 집 개를 첫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무엇으로도 나를 알아볼 리 없는 짐승이었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건 반가움 때문이었다. 한길가 집 문지방에 걸쳐 누운 개는 섭생인 양 바깥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지만 경계의 빛이라곤 아예 없었다. 다가앉는 낯선 여자를 그저 멀뚱히 쳐다만 봤다.
잔등이며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입 안에서 빙빙 도는 말을 계속 응얼거렸다. 반 십 년 소식 모르다가 만난 사람이었다면 나눌 수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절친한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개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변모를 헤아리려고 재빨리 상대를 훑어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축 처진 양 볼과 깊은 주름에 묻혀 있는 납작한 코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바닥에 늘어진 배와 허옇게 불어 있는 젖꼭지를 보고서야 그 개가 암컷임을 처음 알았고 몇 배의 새끼를 낳았으리란 짐작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불쑥 ‘늙은 암캐’하려던 말을 얼른 삼켜 버렸다. 마른 손바닥에 쓸리는 내 뺨에도 까슬한 세월이 남겨져 있었으니. 이제 그 개가 무엇을 지키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고 조금은 추저분해 보였다. 갑자기 늙은 불독이 매여 있는 처지가 궁금했다.
한 쪽으로 밀쳐 둔 유리문에는 갖가지 음식 이름들이 선명한 페인트 글씨로 쓰여 있었다. 길가에 내놓은 철판 화로에서는 막 붙여 넣은 연탄 연기가 파랗게 피어 올랐다. 군때 오르지 않은 선홍색의 글씨와 은회색의 광택이 남아 있는 함석 식탁. 불독의 임자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이집 주인인 듯했다.
그 때, 인기척에 돌아다본 등뒤에도 내가 분명 알아볼 수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빙긋 웃었다. 지난날 그가 길거리에서 구두를 수선하고 내가 단골이었을 적에는 진즉 없었던 일이었다. 젊은 날의 야치와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떨쳐버린 남자는 보기 좋게 몸이 일어 있었다. 그 웃음은, 길거리에서 그를 보지 못했던 동안 그와 그의 생활에 찾아든 여유라는 것을 감지하게 해 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십 수년 전이었다. 내가 시장 동네로 이사를 오고 달포나 되었을까, 길목 노른자위에 자리를 잡은 그들 내외를 보게 되었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차린 노점으로는 그들 나이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벼랑까지 밀려난 궁박한 사람들일 거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남편의 장사 밑천이라고는 접는 의자 하나에 구두 수선에 쓰이는 구지레한 도구 몇 개가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옆자리의 아내에게는 낫게 투자한 물증이 드러나 보였다. 새로 마련한 리어카 화덕에서 어묵 국물을 우려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그래선지 맺힌 데 없이 밝기만 했다.
한창 나이의 부부가 매달린 일치고는 나이가 시답잖다던 나의 생각은 잠시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꿋꿋한 시작에의 의지는 마치 마지막 사투같이 보였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삶의 격전장에서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만만찮은 젊음이었음을 알았다.
나의 직감이 정확했다면, 그들은 어두웠던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뒤늦게 만난 사람들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강퍅한 적개심을 내보이던 남자와 해납작한 얼굴에 헤픈 웃음을 흘리고 있는 여자가 그런 선입견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주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딱 버티고 있는 불독이었다. 우긋한 안짱다리를 세우고 맞보기 민망할 정도로 못생긴 개는 오히려 그 낯바닥 때문에 순종일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감별에 밝은 애견가라면 심상히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은 구두 수선공의 불독은 누가 봐도 버금찬 경우였다. 투견판에서 돈을 물어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맹렬히 지켜야 할 무엇이 그들에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처음엔 나 역시 아닌 척 곁눈질로 그들을 지나치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를 따라붙는 그의 눈길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종아리가 뻣뻣해지곤 했다. 그러나 그가 뒤쫓아 본 것은 나의 각선미가 아니라 단지 갈아대야 할 구두 뒤축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머지않아, 그 남자의 는정거리는 눈길을 피하기보다는 내가 그들의 손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사과 궤짝에 앉아 구두창을 갈거나 흠실흠실한 어묵을 먹으면서 가까이에서 본 내외는 훨씬 더 젊어 보였고 곧잘 어울렸다. 어찌 보면 천잡한 몸치장에 쉼 없이 나다분거리는 아내. 그 여자가 사랑스러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남편. 그들은 이미 거친 가난의 물살을 사랑이라는 거룻배를 저어 반쯤은 거슬러 오른 사람들이었다. 내가 무슨 사치냐고 했던 능준한 불독은 그 남자가 검질기게 지켜 온 자존심이란 걸 그때쯤 알게 되었다.
십오 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그들 구이집 단골이 되었다. 구두 뒤축을 따라오던 눈길 대신 웃음을 보이는 그는 이제 불독을 향해 날붙이의 퍼런 기합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손님이 권하는 낱잔에 체면이 풀리면 말추렴도 붙여 오지만 나는 꺼리지 않았다. 응달진 골목에서 시작해 구이집 간판을 올리기까지 그들의 ‘성공’이 안겨 주었을 피곤을 내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던져 주는 곱창에도 식욕을 잃고 누워 있는 불독, 그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던 늙은 개는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번잡한 일상에 허둥거렸던 시절, 내가 화려한 구두로 지키고 혹은 숨기고 싶었던 소망과 아픔은 무엇이었을까. 곱창집 목로판에서 구이 한 점과 소주로 한저녁을 때우는 날이면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술시중을 드는 주인 남자가 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고달팠던 나의 지난날들이 그리워지는지.
우리가 닿은 소망의 강가에 정박된 젊음의 거룻배. 그 배로 건너는 왔지만 결코 되돌려 탈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까닭에 그리움은 슬픔과 함께 있을 뿐이다.
남편의 가방
안방 문갑 사이에 검정 가방 하나가 이 년째 놓여 있다. 부피나 높이가 그 공간에 꼭 맞아 오래 전에 자리잡은 집기처럼 느껴진다. 눈여겨보는 이라면 목각이 세미한 가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내방한 손님이 거치적거릴 것을 염려해 구석에다 끼워 둔 듯한 가방은 남편의 것이다. 남편도 손님이 자신의 물건을 들고 내 집을 나서듯이 손쉽게 가방을 들고 날 수 있도록 거기에 놓아둔 것만은 틀림없었다.
가방은 부드러운 내피가 일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채워져 있다. 물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남편 혼자서 챙겨 두었다. 여행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여벌옷 없이 한 철은 족히 날 만한 물건들이 들었음 직하다. 그 가방을 볼 때면 여행과 가방이 무슨 연관이 있기는 한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식구들조차 가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길 떠날 사람이 꾸려 둔 듯한 가방을 보았다면 속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았겠는가. 그랬다면 한바탕 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긴 남편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 이상으로 차근히 챙겨 두었다.
가방을 여닫을 때마다 남편은 계면쩍어 했고 나는 빈정거리기를 거듭했다. 남편의 정성에 비하면 옷가지들은 너무나 허술했다. 바닥이 미어진 양말과 품이 줄어든 윗도리, 기장이 댕강한 운동복이 고작이었다. 어느것도 걸치고 나서기에는 점잔찮은 입성이었다. 만류하는 내 손을 피해 남편은 언제나, ‘다시 운동을 하게 될 때 땀과 먼지를 받아내는 데 아깝지 않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들고나기 수월하게 굳이 머리맡에 두기를 고집했던 가방은 한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안락한 수면을 위한 무슨 방폐인 양, 남편은 짬이 나면 가방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만 청할 뿐이었다. 궁상맞은 가방을 냉큼 치워 버리겠다는 으름장에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땐가, 내 잔소리가 스스로 시들해질 즈음 남편의 가방도 더 부풀려지지 않았다. 남편은 운동할 시간보다 잠을 자야 할 때가 더 많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편을 향한 나의 타박이 어찌 타박만이었을까. 땀에 절어 돌아온 남편이 쏟아 붓는 세찬 물소리에서 싱싱한 일상을 느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작은 손가방을 챙겨 남편이 출장을 떠난 날 밤, 나는 벽을 지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하릴없이 밤을 솔솔거리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이제 남편을 따돌려 놓고 하고 싶을 만큼 감질낼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인가.
남편이 없는 자리가 덧달아 낸 방처럼 넓어 보였다. 어느새 눈길은 검정 가방에 머물렀다. 저만치 그 어디에 남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당당하고 약여했던 남자가 힘부치게 넘는 쉰 고개. 창문을 흔드는 소삽한 바람소리에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일거리를 장만한 듯 가방을 들춰냈다. 옷가지를 해찰하는 손끝에서 남편의 일상을 죄여드는 고달픔과 피곤이 느껴졌다. 남편에게는 가방을 들고 나서기가 근사한 여행을 떠나기보다 어려웠을지 모른다. 내 안에서 연민을 넘어선 아픔이 차 올랐다. 차라리 비싼 운동기구를 푼푼하게 사들였더라면 이렇듯 속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끼던 ‘선수단’ 가방이 자리를 잡을 무렵, 남편은 툭 불거진 데 없이 잦은 불편을 털어놓았다. 무쇠 같던 몸에도 서서히 제동이 걸리고 있었다. 일에 매달려 외곬으로 달려오는 동안 젊음은 모래알처럼 빠져 나간 뒤였다. 문득 군살 붙은 허리며 반백의 머릿결을 보며 남편은 씁쓸한 웃음을 삼켰을 것이다.
나는 한때 돌아누우며 사리는 남편의 신음을 엄살이라고 덮어씌우고 많이 밉살스러워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적군처럼 으르렁거렸던 날들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작은 행복과 윤기 흐르는 사랑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앞으로도 가방은 붙박이처럼 놓여 있을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가방이 있었던 기억마저 지워 버리면, 남편은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욕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을는지.
헌 옷 갈무리가 끝난 남편의 가방을 이제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누리게 될 한유한 날의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낡고 남루한 옷가지 대신 우리가 닿는 곳의 풍정과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새물로 갈아넣을 것이다. 그 속에는 남편을 십 년 젊게 보일 만한 호사한 셔츠도 반드시 있으리라.
그때쯤은 서로 말없이 흔들리며 참으로 편안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이상적인 남자가 될 수 없듯이 아내도 지극히 생활적인 여자라는 것을 일찍이 용인했어야 옳았다. 별러서 먹었던 음식이 세 끼 밥상에 오른다면 얼마나 느끼하고 식상할까.
여행을 떠나자며 덥석 가방을 들고 나서는 나를 보는 남편의 표정이 궁금했다. 상상만 해도 시물시물 웃음이 흘렀다. 쓸쓸했던 ‘남편의 가방’이 감쪽같이 ‘우리의 가방’으로 둔갑한 속을 헤집어 보이며 함께 웃을 날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바람 재우는 부채
단오라며 절기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나에게 친구는 큰 방구 부채 하나를 선물로 보내 왔다. ‘단오부채’는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주고받았던 옛 어른들의 지혜로운 발상에서 유래되었다. 친구 역시 ‘여름 생색은 부채’라는 세시 풍속을 어설프게 따라 본 것이리라.
흐벅진 연꽃을 연상시키는 선면(扇面)은 은옥색 생깁을 발라 투명하리 만큼 화사했다. 거기에 선두를 여며 접은 선미(線美)의 황록은 밝고도 은은했다. 빼어난 선공(扇工)의 수작은 아니었지만 옥색과 황색의 대비는 창포 한 송이의 방향이 그대로 묻어날 듯했다.
부채에 얽힌 세시 풍속도 잊혀지고 때와 장소에 따른 부채의 풍류나 법도도 퇴색된 지금, 윙윙거리는 냉방기의 진동음을 들으며 나는 그 부채로 활활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채 선물을 받고 보니 생급스러운 마음에 여기저기 간수했던 부채들을 한자리에 꺼내 보았다. 모양새가 각각인 부채들은 색깔이며 용도 또한 조금씩 다른 것들이었다. 그간에 꽤나 많은 부채들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중 몇 점을 제외하고는 전부 선물로 받아 보관해 온 것들이었다. 고양된 안목이 아니더라도 탐심 할 만한 수준의 작품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러나 거의가 여행지의 풍물을 담고 있거나 유행상품으로 판매되는 흔한 부채들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느 하나 내 손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 소용되거나 소홀히 내돌린 적은 없었다. 모두가 내게 처음 왔을 때의 모양과 빛깔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각각의 부채를 전해 받을 즈음마다 우연찮게 내 안에서 불어왔던 ‘바람 잠들지 않는 바람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문갑에 깊숙하게 넣어 두었던 쥘부채는 가장 먼저 내게로 왔고 그만치 오랜 동안 귀하게 지녀 온 선물이었다. 죽절(竹節) 열두 마디가 촘촘한 변죽에는 낙죽(烙竹) 무늬가 호사롭고 고고한 천품(天稟)과 장수를 빌어 주는 봉황과 선학이 번갈아 넘나든다. 닥종이 도침질한 선면에는 인연의 덧없음을 적은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시 한 수 있으니…….
기억에 새길만한 선물로도 처음인 듯한 그 부채는 내가 이십대 초반을 막 넘어설 무렵에 받았다. 그 시절, 나는 사람과 사랑에 목말라 방황하고 바람처럼 떠돌았다. 끝내 나를 붙잡아 두지 못한 그 사람은 부채 하나 건네주고 ‘평안 도사’가 되어 떠나가 버렸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여자였는지 모른다. 부채를 펼치면 목살 사이로 보이는 먼 인연의 뒷모습이 한 세월을 돌아와 다시 바람으로 일렁일 줄이야.
흔하게 볼 수 없는 무선(舞扇)도 내 눈길을 잡는다. 어느 무녀의 손아귀에서 펼쳐지고 접혀지면서 영검 있는 명두(明斗)를 얼마나 불러왔던지, 까뭇한 손때가 묻어 있다. 두루마리 풀리듯 펼쳐지는 접선(接線)에는 하나 둘도 아닌 해와 달과 꽃과 나비 떼의 난무가 현란하다. 현기증이 이는 원색의 그림은 보고만 있어도 광란의 불길이 지필 것 같다.
요령을 흔들고 주술을 외며 작두날을 타고 길길이 치솟았다가 휙휙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는 내 영혼의 무기(巫氣). 나는 전생에 오갈 데 없는 선무당은 아니었던가. 꼭꼭 여며 접은 부채를 넘겨주며 ‘땅 위에 발붙이고 안주할 부적’이라 하셨던 그분도 잠들 날 없는 내 안의 바람을 걱정하셨을 것이다.
장롱 서랍에 접어 두었던 백선은 근간에 받은 것이다. 흠절 없는 갓죽과 속살의 노란 대껍질은 분명 인가가 드물고 햇볕 잘 드는 대밭에서 온 것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종잇장처럼 얇은 대살이 그보다 더 얇은 한지를 받치고 있는 합죽선은 깃털처럼 가볍고 융처럼 부드럽다.
그 부채에는 오욕과 애증의 바람목을 겨우 돌아서고 있는 여자에게 청량한 날들을 맞으라는 축복이 깃들어 있었다. 접면 갈피갈피에 숨어 우는 바람은 내 안에서 삭여야 할 인종의 울음인지도 모른다. 고개 들면 보일 듯 다가서는 지명(知命)의 여울을 그렇게 바람처럼 건너라는 말씀이었을까.
따로따로 간직했던 부채들을 한데 모아 대통에 꽂았다. 젊은 날의 방황과 갈증이 쥘부채에서 떨어져 내린다. 현란한 무선에서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의 무기가 잠시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지명의 합죽선은 인생의 한 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고단한 여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 모두를 한 손안에 쥐고 훌훌 부쳐댄다면 어떤 바람의 회오리가 휘몰아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회오리를 맞버티어 선다 해도 더는 내 안에서 잉걸처럼 타오르는 허욕의 불씨는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람이 오히려 바람을 막아 주는 정일한 고요로 나를 지켜 줄 수 있다면 그만한 은혜가 다시 있을까.
거기에 천궁의 향내를 머금은 단오부채 하나를 더 보태었다. 여러 부채의 바람을 한꺼번에 막아 줄 듯이나 턱 버티고 있는 양이 흡사 나를 닮았다. 끊임없이 나를 몰아쳤던 사랑과 일과 글쓰기의 바람 한 점 맞받아 잡지 못하고 허울 좋게 서 있는 자신을 보는 듯했다.
비록, 날림 부채 같은 모습일지라도 창포빛 생깁에 얼룩지는 번민과 갈망의 바람은 더 일지 않기를 절절히 빌어 본다.
그믐 등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와 꼬장꼬장한 자태에 못지않게 칼칼한 성품이시다. 평생 남의 손을 빌어 단장해 본 적이 없다는 머리는 언제나 참빗으로 빗은 듯 쪽을 찌고 있다. 삼단 같았다던 머리숱도 이제는 머리 밑이 훤히 드러나고 밤알만한 머리말이의 비녀가 무거워 보인다. 깨끗한 살결과 단아한 이목구비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엔간한 미색을 지녔을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열 살이나 밑인 다른 노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가 된다. 펑퍼짐한 체구에 걸맞게 성질 또한 느리고 눅다. 깨끔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와는 달리 만사가 태평이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떤 관계로 인연을 맺고 사는지 짐작이 쉽지 않았다. 둘은 어느 때 어디서건 그림자처럼 함께 있기 때문에 따로 호칭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하게를 하는 윗노인에게 하대를 쓰는 아랫노인이 불손하다고 느껴질 때면 가늠은 더 어려웠다. 다만, 오랜 세월 막역하게 함께 살아온 사람들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군색한 살림살이를 이어 가는 두 할머니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를 통해서였다. 큰할머니가 털어놓았다는 그들의 관계는 본댁과 작은댁 사이였다. 딸만 내리 여섯을 낳은 정실이 남편의 심중을 헤아려 차마 못할 노릇을 자청한 결과였다. 소원했던 아들을 입덧 한번 없이 생산한 작은댁의 유세에 안방을 내주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진작에 알고 있었던 말씀을 하시면서 시어머니는 시종 나의 안색을 살피셨다. 아직도 생속으로 보이는 며느리가 행여 부정하다거나 기이하다는 내색을 할까 봐 염려했을 것이다. 딸아이가 얼씬거리면 그때마다 이야기가 끊어지곤 했다. 그 나이에는 들어서도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딸아이만했을 때 그러신 적이 있었다. 점을 보고 오신 날이면 형제들은 궁금증에 몸이 달아 어머니 곁에 다가앉아 점받이의 말을 전해 들었다. 장래의 일들을 미리 들려주는 어머니도 반쯤 점쟁이 같아 보였고 신기가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다가 내 얘기에 이르면 번번이 흐지부지 끝을 맺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내가 족두리를 두 번 쓰지 않으면 남의 소실 노릇 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거였다.
점쟁이의 말이 틀렸는지, 살아오면서 액땜을 했는지 나는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그것이 다행이라든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불행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어떻게든 주어진 인생을 아니 살 수는 없을 터이니까.
시어머니의 말씀 이후, 나는 노인네들의 궁핍한 살림이 몹시 측은해 보였다. 두 사람이 지고 온 저승빚이 얼마나 무겁고 질기기에 피붙이라곤 없는 집에서 한 몸처럼 살아가는가. 그들에게서 이제는 애간장을 녹였던 정실의 회한도 대를 이은 소실의 유세도 찾아볼 수 없었다. 툽상스런 아우와 어진 언니의 투정과 후정만이 여생에 남겨진 정복이었다.
어느 날, 바람같이 집을 나간 대주와 두 노인을 봉양할 형편이 못 되는 아들이 그들을 묶어 놓은 동아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손(孫)을 얻어 가문의 체면은 세웠다지만 본댁의 애끓는 세월과 미욱한 작은댁의 일생을 차마 지켜 줄 수 없어 가출을 택해야 했을까. 쳐다보고 매달릴 데 없으면 서로 기대고 살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일없이 툴툴거리고 속없이 웃으며 날을 지새는 두 할머니가 며칠씩 떨어져 있을 때가 있었다. 달마다 그믐께면 큰할머니는 곱게 치장하고 원행에 나선다. 제때 보내 오지 않는 생활비를 받으러 여섯 딸과 아들네 집을 한차례 돌아오는 일이다. 버젓한 자식 하나 없어 손 내밀기가 죽기만 하다면서도 길 나서는 할머니의 모습은 마냥 고왔다.
배웅하는 할머니는 빨리 다녀오라고 채근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혼자 남은 시간이 무료도 하겠지만 큰할머니의 마음 고생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는 외가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같다. 대문간을 서성거리다가 골목길을 나서 보지만 마음은 딴전이다. 한나절 엎드려 배게 난 푸성귀를 솎아내지만 혼자 먹는 밥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런 며칠이 지나면 ‘세금 무서워’ 밝히지 않던 대문간 전등이 켜진다. 오래 같이 사는 사람의 체취는 바람결에도 느낄 수 있는 걸까. 으슥하고 쓸쓸하던 골목에 노란 백열등이 켜지는 밤이면 나는 슬픈 전설 한 편을 읽는 듯한 감동에 젖는다. 어쩌다가 그믐치라도 내리면 우리 집 외등으로 밝기를 보태었다. 그믐에 더욱 밝게 비치는 그 등은 혼자 남은 할머니의 간절한 기다림이며, 말로 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정의 표현이었다.
언젠가, 큰할머니의 원행을 대신할 때가 오면 문간 등을 밝혀 놓고 기다렸던 날들이 행복했다는 걸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침술
아침술 마시기는 아침밥 먹기보다 수월하다.
나는 이십여 년 넘게 아침밥을 걸러 왔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시간에 쫓겨 아침밥을 못 먹게 된 것이 이제는 영 귀찮고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날마다 아침밥 대신 아침술로 끼니를 넘기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침술 마시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침술을 마시게 되거나 아침술이 특히 당기는 날이 있기는 하다. 계절로는 여름철에 그 횟수가 잦다. 그것도 아침에 늑장을 부릴 수 있는 날이면 예외가 없다. 눈을 뜨면 페로몬을 쫓아가는 개미처럼 거의 반사적으로 발길은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몇 발자국 안 되는 걸음을 떼놓으면서 마음은 급하고 목은 벌써 심한 갈증을 느낀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한껏 차가워진 서리 바람이 쏴아 하게 끼쳐 오면 흐릿하던 머리가 맑아지면서 전신이 조이는 듯한 탄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최적의 온도로 식혀진 맥주를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켜는 맛이란 쉽게 설명이 되질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아침술로는 특히 맥주를 좋아한다. 맹물에 비할 수 없는 술맛이 있으면서 흔히 다른 주류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없기 때문이다. 주종을 까다롭게 가리지는 않지만 독주는 아침술로 삼간다. 독주는 입 안에서 식도를 지나 위에 이를 동안 움직이는 생물이 빈속을 통과하는 듯한 섬뜩한 자극이 아침 기분에는 상쾌하질 못하다. 그리고 고작 한두 잔 홀짝거리는 양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뿐더러 시원함을 느낄 수 없다는 이유도 그 중 하나다.
더러는 걸쭉한 막걸리로 횡재하는 때도 있다. 여름에 세상을 떠나신 시조부님 덕분이다. 시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시아버님께서 생전에 그리도 막걸리를 좋아하셨다며 다른 어떤 술도 제주로 쓰지 않으신다. 음복 뒤에 남은 술을 휴지 마개를 쳐서 술쥐의 설거지감으로 남겨 두시는 것이다.
아침술로 어중간한 한끼를 때우는 것만으로 내가 아침술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 취한 기분을 더 좋아한다. 더욱이 온갖 감정의 혼류가 가라앉은 아침에 마시는 술은 그래서 흔쾌히 취기에 젖을 수 있다. 주기가 세포 촘촘히 스며드는 것을 감지하면서 한 모금씩 농도를 보태는 감미로움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잔잔한 파도가 쓸리는 모래펄에 맨발을 적시고 있는 듯한 내밀한 쾌감과 쇄신함은 또 어디에 비길 수 있을까. 그 순간 심신의 자유와 행복은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일상의 그물을 걷어 젖히고 세속의 욕심도 벗어 던지면 푸르고 싱싱한 생각과 기억들이 나슬나슬 잘도 풀려난다. 그런 기억과 언어의 보물찾기는 아침술이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때면,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되거나 더는 잃어버릴 것이 없는 넉넉한 가난을 사랑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웬만큼 술을 좋아하면서도 아침술이나 낮술이라면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나처럼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 이야기는 더더욱 붙여 볼 수도 없다. 대개는 술맛이 나지 않는다거나 술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이유를 든다. 모두가 나름의 생각과 기분이니 거기에 이견을 달 필요는 없겠는데, 실상 나는 이해를 못한다. 그러면 나는 여태 술맛도 술의 멋진 흥취도 모르면서 그저 마시는 짓에만 급급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알코올 중독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언젠가 어느 정신과 의사가 제시한 ‘알코올 중독 증상의 자가진단’이라는 설문에 답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오갈 데 없는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로 판정을 받았다. 당연히 의사의 심각한 경고가 곁들여 있었지만 비관하기는커녕 유쾌하게 웃었던 기억밖에는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또 아침술을 마시면서 고맙고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의 생각도 잊지 않는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내력을 주셨고 술의 풍류를 가르쳐 주신 부모님. 아침술을 스스럼없이 마시는 아내를 용인해 주는 남편. 셋집 수도세는 공돈인 양 맥주를 비축해 주시는 시어머니. 나는 가까운 이들의 소중한 보시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한편, 그 모든 은덕이 빚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다. 한 방울 술도 못 하시는 시어머니는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과 업을 쌓았을까 궁금하다. 나에게 엄격해야 할 사람들의 관용으로 나는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 까닭에 때로 술 마시는 여자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되받아 가며 술 마시는 여자의 소문을 흥미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어느 때라도 술을 술로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큰 복으로 생각한다. 술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적잖게 측은해 보인다. 건강이 감당하는 한 술을 끊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깥에서 마시는 술을 줄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번잡하고 부산한 술자리에서 진득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나이에서 오는 피곤 때문은 아닐까. 그 대신 혼자만의 아침술을 즐길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래질하는 아침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아침술은 특별하며 그 즐거움을 오래 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백정혜 작품론│
자기응시를 통한 삶의 재구성
― 백정혜의 수필
윤 재 천 (문학평론가, 수필가)
수필은 진솔한 삶의 문학적 형상화다.
수필작품 안에는 한 인간이 경험했던 삶이 소담스럽게 무리를 이루고 있다. 수필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 이룬 숲이다. 수필은 적당히 갈증이나 적실 정도의 물줄기가 골을 이루고 흘러내리는 냇물이 아니라, 도도한 흐름을 이룬 강이나 바다다.
삶의 가치는 생명에 대한 존재 의미가 인정되고, 그에 대한 확신이 확고할 때 비로소 고양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현재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으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모든 일과 현상들은 생존이라는 바탕 위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십 수년 전 어느 날이었다. 내가 시장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달포나 되었을까. 길목 노른자위에 자리를 잡은 그들 내외를 보게 되었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던 젊은 부부가 차린 노점으로는 그들 나이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벼랑까지 밀려난 궁박한 사람들일 거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의 장사 밑천이란 접는 의자 하나에다 구두 수선에 쓰이는 구지레한 도구 몇 개가 그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옆자리의 아내에게는 낫게 투자한 물증이 드러나 보였다. 새로 마련한 리어카 화덕에서 어묵 국물을 우려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맺힌 데 없이 밝기만 했다.
한창 나이의 부부가 매달린 일치고는 나이가 시답잖다던 나의 생각은 잠시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꿋꿋한 시작에의 의지는 마치 마지막 사투같이 보여지기도 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삶의 격전장에서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만만찮은 젊음이었음을 알았다.
―‘곱창집 불독’ 중에서
구체적인 표현 대상을 설정하고, 작가의 관찰을 표현한 글이다. 이 글의 특징은 작가의 상상적 세계를 동원하여 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그 한 예가 “나의 예측이 정확했다면 그들은 어두웠던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뒤늦게 만난 사람들 같았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강퍅한 적개심이 내보이던 남자와 해납작한 얼굴에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있는 여자가 그런 선입견을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남편이 아끼던 ‘선수단’ 가방이 엉뚱한 자리를 잡았을 때 짐작을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남편은 툭 불거진 데 없이 자잘한 불편을 자주 되뇌기도 했다. 무쇠 같다던 몸에도 서서히 제동이 걸려 왔던 것이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매달려 외곬으로 달려오는 동안 모래알처럼 빠져 나간 젊음, 문득 군살 붙은 허리며 반백의 머릿결을 보며 남편은 씁쓸한 웃음을 삼켰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당장 치워 버리고 싶도록 가방이 보기 싫어졌다. 한편 두려운 생각도 없진 않았다. 그 가방이 있었던 기억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면 남편이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욕조차도 잃어버린 뒤가 아닐는지.
나는 한때, 돌아누우며 사리는 남편의 신음이 엄살이라고 덮어씌우고 많이는 밉살스러워 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적군처럼 으르렁거렸던 날들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작은 행복과 윤기 있는 사랑을 놓쳐 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남편의 가방’ 중에서
한 가정에서 남편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아내라는 생의 동반자와 함께 연출해 내는 사랑의 여러 유형을 ‘가방’이라는 상징적 도구를 통해 구현한 작품이다.
이 글에는 언어의 내포성이나 이중성과 같은 어떠한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작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에 등장하는 ‘가방’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상상하다 보면, 범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방’은 모든 아픔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외면상으로는 전혀 그러한 기색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는 현대인의 실체를 그대로 표상하고 있는 상징적 존재다. “빠른 날에, 쓸쓸했던 ‘남편의 가방’이 감쪽같이 ‘우리의 가방’으로 둔갑한 속을 헤집어 보이며 함께 웃게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 적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유추된 사실의 가능성을 보다 확고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내가 부채에 특별한 천착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흔하지 않는 선물 부채를 몇 차례 받고 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만려한 나의 천성 탓도 있었겠지만 부채를 전해 받을 즈음마다 우연찮게 내 안의 ‘바람 잠들지 않는’ 바람소리가 들려 오곤 했었다.
문갑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쥘부채는 가장 먼저 내게 왔고 그만큼 오랜 동안 귀하게 지녀 온 선물이었다. 죽절 열두 마디가 촘촘한 변죽에는 낙죽 무늬가 호사롭다. 고고한 천품과 장수를 빌어 주는 봉황과 선학이 번갈아 넘나든다. 닥종이 도침질된 선면에는 인연의 덧없음을 적은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시(詩) 한 수 있으니…….
기억에 새길 만한 선물로도 처음인 듯한 그 부채는 내가 이십대 초반을 막 넘어설 무렵에 받았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사람과 사랑에 목말라 방황하고 바람같이 떠돌았다. 끝내 나를 붙잡아 두지 못한 사람은 부채 하나 건네주고 ‘평안도사 임제’가 되어 떠나가 버렸는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여자였을까. 부채를 펼치면 목살 사이로 보이는 먼 인연의 뒷모습이 한 세월 돌아와 다시 바람으로 일렁일 줄이야.
―‘바람 재우는 부채’ 중에서
문학은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집착의 결과이듯 문학도 같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글은 단옷날 선물로 받은 부채를 중심 소재로,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기억을 반추하며, 부채의 삽화로 그려진 그림 안에 들어 있는 상징적 형상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진단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소망만큼의 바람을 자신의 가슴 안에 안고 산다. 그 바람의 부피와 무게만큼 자신을 지탱할 수 있고,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처럼 바람은 한 인간을 철저히 절망시키기도 하고, 그 절망의 늪에서 한 인간을 건지기도 한다
내가 딸아이 나이만할 때 우리 어머니도 자주 그랬던 적이 있었다. 점을 보고 오시는 날이면 늘 그랬다. 형제들은 호기심과 짜릿한 신비감에 몸이 달아 어머니 곁에 모여들어 점쟁이의 말을 전해 들었다. 장래의 일들을 미리 들려주는 어머니가 반쯤은 점쟁이같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어머니에겐 강한 무기가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다가도 내 얘기에 이르면 어딘지 속시원한 말씀을 숨기곤 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내가 두 번 결혼하지 않으면 남의 소실 노릇을 할 팔자라는 거였단다.
딸 가진 부모의 가슴에 그 이상의 비수가 어디 있겠는가. 엄청난 불행의 작은 막음이라도 해보자며 이름을 갈아주셨다. 늦춰 할수록 좋다는 결혼도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게 분명하다.
점쟁이의 말이 틀렸는지 아니면 살면서 액땜이라도 했던지 나는 두 번 결혼도 남의 소실로도 살지 않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다행이라든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니 살 수 없는 인생 아니런가.
―‘그믐 등’ 중에서
휴머니티에 바탕한 예감적 운명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나름의 모색과 결단을 통해 주도하고 영위하면서도 때로는 지극히 소극적인 자세로 일체의 모든 사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수필은 삶을 근간으로 한 일체의 사념을 기술하는 글이라고 할 때, 이 글이 주는 감동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백정혜는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라는 서두를 통해 풀어 나가고 있다. 작가가 이 글에서 화두를 이렇게 제시한 것은 감정을 스스로 절제함으로써 감정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일종의 계획된 수순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어느 날 바람같이 집을 나간 대주와 두 노인을 함께 모실 형편이 못 되는 아들이 그들을 묶어 놓은 동아줄이 되기도 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상의 잔잔한 일에 대한 필자의 허물없는 고백은 때로 인간적 체취가 듬뿍 배인 풀꽃 같은 향내를 우리에게 안겨 줄 때가 있다. 일체의 모든 관념을 일시에 허물어 버리고 보다 순수한 세계의 한복판에 우리를 세워 보는 일이다.
아침술 마시기는 아침밥 먹기보다 수월하다. 나는 이십여 년 넘게 아침밥을 걸러 왔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시간에 쫓겨 아침밥을 못 먹게 된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가 여유가 있어도 아침상을 받는 것이 영 귀찮고 새삼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침밥 대신 아침술로 끼니를 넘긴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침술 마시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침술을 마시게 되거나 아침술이 특히 당기는 날이 있기는 하다.
계절로 보면 여름철에 그 횟수가 잦다. 그것도 아침에 늑장을 부릴 수 있는 휴가 때에 편중된다. 더위로 밤잠을 설치다가 미루적거리며 눈을 뜨는 날 늦은 아침이면 예외가 없다. 페르몬을 쫓아가는 개미처럼 거의 반사적으로 발길은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몇 발자국 안 되는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마음은 앞서 급하고 목은 벌써 심한 갈증을 느낀다.
―‘아침술’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이웃하고 사는, 가슴을 의탁함으로써 행복을 절감하기도 하고, 그 행복을 근원으로 하여 자기의 세계를 확대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백정혜의 글에서 소재로 취택된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술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내 눈엔 적잖게 측은해 보인다. 나는 건강이 감당하는 한 술을 끊지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바깥 술을 줄이려고 한다. 술 마시는 자리의 모든 것이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떠들썩하고 부산한 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나이를 느끼곤 한다”고 적고 있는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 소중한 가치를 보다 고양하기 위해, 백정혜는 자신의 당당함을 이 글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백정혜의 글은 어느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술보다는 정서에 몰입하여 그를 가시화하고 자기화하는 데 주력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스스로를 꾸미는 일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으로써 공감의 폭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남달리 자기 벽이 두터운 작가다. 자기를 쉽게 내보이려 하지 않을 뿐, 남의 세계를 자기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에도 인색하다. 다만 자기의 세계를 건강하게 지키는 일에 충실할 뿐이다. 이러한 점은 남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는 점과, 어느 저명인사의 경구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수필을 흔히 중년 이후의 글이라고 하는데, 이는 수필이 인생을 관망할 정도의 경륜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느끼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위치에 따라 얻어지는 정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산의 아랫녘에서 보는 정취와 정상에서의 멋이 다르다.
백정혜는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며, 이를 보완하고 확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작가다.
우리 수필이 지극히 개인사에 그치는 일들을 포장하고 꾸미는 일에 주력한 나머지, 보다 견실한 체모를 갖추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만한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문학적 자전│
나만의 공간
백 정 혜
겨우 열 살의 계집아이 하나가 교무실 복도에서 ‘중대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선생님들의 높고 낮은 언성에 귀기울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 없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께서 경찰지서장으로 근무하시던 면 소재지 시골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해마다 시월이면 인접 시에서 개최되는 종합예술제를 한 달여 앞두고 나를 어느 부문에 참가시킬 것인가를 두고 선생님들의 의견이 상충되었던 것이다.
문밖에서 가슴 조이며 무용 선생님의 압승을 빌었던 나의 절절한 간구는 문예반 선생님의 흔연한 웃음 속으로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다. 무용 선생님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글짓기장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화려한 무대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또한 그날, 연필 깎을 겨를도 없이 시간에 쫓겼던 ‘가을 밤’에 붙들려 오랜 세월 끙끙거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이후, 대학 입학원서에 쓰여진 ‘국문과’ 위에 붉은 선을 긋고 ‘체육과’로 고쳐 쓰면서 화려한 무대를 향한 나의 꿈은 저만치 밀려난 채 이날까지 웅크리고 수필을 써 왔다. 그러다 문득 고개 들어 보니 어느쪽에서나 반거충이로 남아 있는 자신이 애연했다.
그 동안 등단이라는 관문을 거치고 네 번째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별달리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디에서나 원고지를 펼쳐 놓고 글을 쓴다는 얘기같이 들릴지 모르겠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가며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이 될 것이다.
전공 외적인 일에 매달리는 것을 주제넘은 사람이 겁 없이 하는 짓거리 정도로 보아 넘기는 주변의 눈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필의 문학성이나 예술성 자체를 수필가들 스스로가 운위하고 있는 마당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가끔은 노골적인 질문으로 나의 궁한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체육 교사와 수필과의 연관성’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시정거리 내에서 원고지를 메워 나가는 일은 바로 ‘긁적거리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한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도 만족스러운 격려를 받지 못하면서 수필을 써야만 했다. 가사를 칠칠히 치러내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불만의 불티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 붙긴 했겠지만 겉멋을 부린다는 생각이 짙었을 터이다.
다행히 그러한 수모나 핍박이 나의 글쓰기를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주눅이 들기는커녕 내심에선 더 치열한 욕구가 솟아오르곤 했다. 들뜬 땅을 다지고 뿌리의 착생을 위하여 보리를 밟아 주듯이 그들은 나의 웃자란 자만과 건방을 매섭게 잘라 준 훌륭한 전지사들이었으니 도리어 고마워할 일이었다.
그러려니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다른 누구의 관심이나 시선이 배제된, 좁고 구석진 곳이 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나의 일로 해서 어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나름의 전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자리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셋방살이 시절에는 냉장고 옆의 구석이 안성맞춤이었다. 전등갓을 수건으로 가려 놓고 밤새워 일간지에 보낼 원고를 쓰기도 했다. 희붐하게 밝아 오는 창을 바라보며 하품을 깨물면서도 밤이면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있곤 했었다.
이후, 방이 셋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방’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그 동안 허겁지겁 사들인 책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는 책들로 그제는 학교의 빈 공간에 먼지를 떨어내야만 했다.
정말, 방이 넷만 있으면 내 방을 가질 수 있으리란 소망 또한 허물어져 버린 지금, 나는 방 늘리기를 단념하기로 했다. 딸아이의 낮은 화장대든 아들이 비워 둔 방에서든 방석 하나만 펼 수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내 작업을 지켜봐 주는 가족 가운데 있다는 걸 느낄 때면 더욱 그렇다. 불 밝기를 돋워 주거나 선풍기의 방향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릴 때,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비단,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더라도 글쓰기를 위한 준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보이는 대상이 있는 곳,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자리, 한 줄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의자 하나, 가슴의 눈이 뜨여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만의 흡족한 공간이 되리라.
그러다 보면 내가 연모해 온 수필 속에 나도 작은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는지 알 수 있는가. 그때쯤이면 지나친 겸양도 버리고 덧없는 허세도 속속들이 발겨낸 좋은 수필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