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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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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
연 |
丁 |
庚 |
丁 |
乙 | |
丑 |
申 |
亥 |
卯 |
85 |
75 |
65 |
55 |
45 |
35 |
25 |
15 |
5 |
戊 |
己 |
庚 |
辛 |
壬 |
癸 |
甲 |
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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卯 |
辰 |
巳 |
午 |
未 |
申 |
酉 |
戌 |
일간 경금이 연간 을목보다는 약간 강하므로 이 명식에서 정화는 희신. 이 희신을 생하는 을목도 희신이 된다. 그러나 을목이 습목이기 때문에 귀물(鬼物)의 역할도 하게 된다.
만약 시간 정화가 없다면 을목 정재는 오히려 기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적천수(滴天髓)<재덕론(才德論)>
財勝德者, 用顯多能之象(재승덕자, 용현다능지상)
으로 일주와 재(財)의 관계가 일주와 관살의 관계보다 좋으면 용신 가능데 재능이 있는 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이 명식에서 보면 일주 경금에 보면
월간 정화는 희신이지만 약하다.
연간 을목은 희신이고 강하다.
라고 하였을 때 간의 관계는 庚-丁가 庚-乙의 관계보다는 좋다. 그러나 강하냐 약하냐를 보았을 때는 을목 정재가 이 명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희신 정재 을목이 강하므로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재능력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현대 그룹을 이끈 수장이 된 것이라고 본다.
청소년기에 재운이 와서 사업 수단이 좋아져서 돈을 벌기 시작하게 된다.
[적천수(滴天髓)<형상론(形象論)>
全象喜行財也, 而財神要旺(전상희행재야, 이재신요왕)
로 내격(內格)으로 재운을 좋아하는 경우 재(財) 또한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 희신을 약하게 하고 일주 경금을 강하게 하는 운이 되는 불미하게 된다.
이 명식에서 65세 대운에 해당하는 경(庚)운부터는 일주를 강화시켜주고 희신의 작용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심리적이 면에서 보면 이재능력이 감소를 하게 되고 고집스런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신강(身强)하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명성에는 불미한 일이 생기게 된다.
75세인 기(己)대운 때는 경(庚)-정(丁)-기(己)의 조합이 유화유로(有火有爐)화련진금(火鍊眞金)의 관계가 되어 외부적으로 명성이 탐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기토가 경금을 생하는 가로(假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85세 대운이 되면서 무(戊)대운에 일명을 떨치게 된다.
[적천수(滴天髓)<질병론(疾病論)>
忌神入五臟而病凶(기신입오장이병흉)
라 하여 기신이 오행을 해치게 되면 그 오행이 대표하는 오장의 병이 심하게 된다. 그래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85세 대운이 戊대운에 들어서자 2001년 辛巳년에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나이 87세로 사망했다.
이것은 무토가 일간 경금을 생하게 되면서 경금을 강하게 한다. 그런데다 신사년에서 신금은 을목과 정화에 대한 패(悖)의 관계이다. 신사의 지지인 사화는 월지 해수와 합을 하여 을목의 작용을 약하신킨다. 그래서 이 명식에서 기신 역할하는 경금을 강하게 하면서 이것이 속하는 오행 금행(金行)의 질병이 생기게 되어 일명을 떨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출 신 (出 身) :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경력경력 리스트
1998 ~ 2001 현대건설 대표이사명예회장
1994 ~ 한국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 이사장
1992 壬申년 77세 ~ 1993 제14대 국회의원
1987 ~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2 丁卯년 67세~ 1984 제27대 대한체육회 회장
1977 ~ 1987 제13,14,15,16,17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73 ~ 현대조선중공업 설립
1950 庚寅년 36세 ~ 현대건설 사장
1946 丙戌년, 32세 ~ 현대자동차공업 대표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 2001년 3월 21일)은 한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호는 아산(峨山)이며, 현대그룹의 창업자 겸 명예회장이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에 편승하여 건설사업을 추진,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권을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 회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정주영은 2000년 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입원해있던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후 자택에서 요양중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나이 86세로 사망했다.
1931년(17세, 辛未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으로 시작해서 그는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서는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1932년 세 번째 가출 때는 부친의 소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선친에게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네 번째 가출한 때는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1934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배달원으로 취직하여 일하였다. 이 일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장부를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신임을 받았다.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 하여 쌀가게 주인은 가게를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물려주었다. 1938년(24세, 戊寅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 중일전쟁으로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후 고향으로가서 땅 2천 평을 아버지께 사드리고 결혼을 하였다.
일제말기인 1941년에는 빚을 내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다행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과 아이들 모두 스물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는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였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동생 정인영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편집] 현대그룹 경영
[편집] 창업 초기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편집] 경제건설사업 참여
1970년(56세, )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는데 현대건설은 공정의 2/5를 담당하였다. 이해에 고리 원자력발전소1호기를 착공하였다.1972년에는 현대조선소를 기공하였고, 이듬해에는 울산조선소 1호선을 기공한 후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8년(64세)에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한국도시개발공사(현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돼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7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78년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 (서울)을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0년(66세) 신군부에 의하여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편집] 금강산 개발
그러나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에 발맞춰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1998년 10월 27일 북으로 가고 있는 소 1000마리와 트럭 50대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이름 붙인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고, 2차로 1998년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1998년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대북사업을 위해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북한과 소련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했었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계적인 기업가 된 정주영은 시대가 만든 경제영웅인가 ? 아니면 그의 사주 내에 있는 무한한 재물적인 에너지가 분출하여 만든 운명적인 대기업가인가? 이를 사주를 통하여 분석 해보고자 한다. 한국 경제 발전사와 그 맥을 같이 해온 현대그룹을 이끌었던 그에게 창조적인 예지력, 적극적인 의지, 강인한 추진력과 애국애족을 생각했던 큰 원동력은 과연 사주의 어디에서 분출 되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