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답사날인 어제(2012. 6. 20) 서울과 경기도의 택시들이 파업하는것을 몰랐다.
왜냐하면.....난 뉴스를 안본다.....그때부터~
행주산성으로 바로가면 적어도 1시간은 늦게 나갈 수 있기에...잔꾀(?)를 부렸는데 오히려 화를 불렀다.
택시가 없어서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버스정류장에서 행주산성 매표소까지 걸어갔다....헉헉....20분이나 늦었다.
일행을 따라잡느라고 헐레벌떡 뛰었더니....바로 몸에서 신호가 온다...진정...진정...하라고,,,
암튼,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곳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권율 도원수가 이끄는 2,300여 민.관.승군이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3만여 왜군을 사투 끝해 섬멸해 국난을 극복한 승리의 현장이다. 이 전투는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무기대신 사용하여 승리함으로써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
행주산성은 고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항쟁을 하면서 쌓은 토성으로 마감처리를 하고 난 뒤 권율 도원수의 사당인 충장사와 행주대첩비, 기념관 등을 건립하였다.
권율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충장사
행주산성에 늦게 도착한 관계로 충장사는 냄새만(?) 맞고 왔다.
충장사는 중장공 권율 도원수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원래는 행주나루터 안마을에 도원수의 사당인 기공사가 있었으나 6.25사변때 소실되고 1970년 행주산성 정상화사업 때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대첩기념관
대첩기념관 안에 들어가면 권율 장군께서 행주대첩때 사용하였던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해 놓아서 안의 사진은 없다.
이곳에는 화차, 총통기, 신기전, 대첩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첩비와 대첩비각
선조 35년(1602)에 세운 것으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1537~1599)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비이다. 비 몸에 금이 가 있고 글씨도 마모가 심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덕양정
대첩비각옆에 덕양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을 땀을 식힌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같은 한강이 흐르로...강이라는것은 어느곳에서나 중요한 지리적 환경이다.강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기고 물류를 운반하고 강을 이용해 군사적 요충지를 만든다.
충의정
행주산성의 영상교육관으로 국민의 호국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덕양산 정상에 위치해 한강과 주위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이곳에서 토성으로 내려갈 수 있다.
행주산성 토성길
권율장군 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번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만취당(晩翠堂)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중에는 전주에서 군사 만 여명을 지휘하여 독산성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선조 26년(1593)에는 서울을 회복하고자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군·관·민이 힘을 합하여 3만의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장군이 선조 32년(1599)에 62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그의 관직을 영의정으로 높였으며, 선조 37년(1604)에는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모셔졌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前)부인 창녕 조씨와 후(後)부인 죽산 박씨가 안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동자석 1쌍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이 마모되어 철종 12년(1861)에 장군의 후손들이 새로 세운 것이다.
행주산성 근처에 살면서 행주산성에는 먹으러나 가는 곳이었지 한번도 산성안으로 들어가본적이 없었다. 참 한심한 나였다. 답사일에는 늦은 관계로 헐레벌떡 하느라고 꼼꼼히 보지는 못한듯 싶어 한번쯤 따로 날을 잡아서 천천히 걸으며 다시 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