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도 1급으로 행세할 만 했지만 사부 이청산 원장이 2급 판정을 내리고 기원에 명패를 걸었다.
그리고 비슷한 기력의 어른들과 기념대국이 마련됐는데, 3급의 빵굼터와 강성도, 2급의 편의점이 기꺼이 스파링 파트너로 줄을 섰다.
일주일 전 페어 대국 이벤트에 이어 이 번에는 천재소년과의 대국 -
원조 흑백기원에서는 매주 자연스러운 바둑잔치가 벌어져 기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희망아, 아저씨는 최선을 다해 둘 거야. 너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네가 이기면 아저씨가 오늘 맛있는 쵸코 케익을 선물할게.”
내기가 걸리지 않으면 승부 욕이 동하지 않는다는 빵굼터 사장은 은근히 소년에게 승부의 미끼를 던지며 흑 돌을 잡았다.
“최 사장님. 만약 희망이를 이기시면 제가 오늘 우리 회원들 모두에게 빵을 사드리겠습니다.”
이 원장이 제자를 대신해서 내기에 응했다.
어린 희망이는 어른들의 내기가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지켜보는 윤 사범이 임수정에게 속삭였다.
“어항에서 기르던 치어를 강에 풀어놓은 기분입니다.”
“잘 적응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기원이라면 몰라도 이 곳은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서울의 유명한 바둑도장에 유학 보내지 않을 바에야 이 곳밖에 공부할 데가 없습니다. 바둑교실에서는 상대가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임수정은 윤 사범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다시 아들 희망이의 바둑을 지켜보았다.
빵굼터와의 바둑은 초속기로 전개되었다.
네 귀의 정석과정에서 빵굼터는 온갖 변칙 수를 동원해 희망이를 괴롭히려 했다.
그러나 희망이는 아주 간단하게 대응하며 야무지게 돌을 놓고 있었다.
‘과연 희망이가 어른들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
그녀는 아들의 재능을 무한히 믿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바둑교실에서 윤 사범으로부터 예의범절과 바둑의 기본을 단단하게 익히기는 했으나 산전수전을 두루 겪은 어른들과의 승부에서 기량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큰 도박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8천만 원이라는 돈도 적은 게 아니었지만 아들을 프로기사로 키우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 자체가 모험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희망이의 기재가 출중하다며 서울의 유명한 바둑도장으로 빨리 유학 보내라고 성화였었다.
그녀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희망이는 엄마를 떠나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 피부염을 천형처럼 달고 나와 지금까지 고통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희망이 때문에 좋다는 온천이란 온천은 죄다 섭렵했고, 유명한 병원과 용하다는 한의원을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애를 썼지만 아토피는 거의 불치병이라고 봐야했다.
그렇기에 희망이는 가려움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긁어대다 무척 신경질적인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저 상태로 바깥 세상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자신도 견디기 힘들고 타인도 괴로울 게 분명했다.
“프로기사까지는 욕심내지 말아. 희망이가 뭔가에 재미를 붙였다는 것만으로 감사하자고.”
남편은 그렇게 말했고 아직까지도 아들의 바둑을 취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임수정은 달랐다.
희망이에게 주어진 길은 바둑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하거나 온몸을 박박 긁어대는 희망이는 오직 바둑을 둘 때만 긁는 행위를 망각하고 바둑판에 몰두했었다.
아들이 그렇게 평화로운 표정으로 일정 시간 동안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 감격스러워 처음에 그녀는 뒤돌아 서서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었다.
극심한 아토피 증세, 그건 어쩌면 바둑의 신이 희망이에게 내린 암묵의 신호인지도 몰랐다.
빵굼터와 바둑을 두면서 종반에 이르기까지 희망이는 단 한 번도 몸에 손톱을 박지 않았다.
임수정은 반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들의 표정과 동작만으로도 승부는 이미 갈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아 판은 끝났다.
“어이쿠! 꼼짝을 못 하겠네.”
빵굼터가 돌을 던지자 희망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초반에 이미 끝나버린 바둑이었습니다. 네 화점에서 벌어진 정석 과정에서 흑이 다 망했지요.”
원장이 강평을 하자 빵굼터가 선선히 시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정석을 대충 외우잖아요. 그런데 저 아이는 모든 변화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거 같습니다.”
“희망아 네가 복기를 해드려라.”
윤 사범이 소년에게 말했다.
희망이는 반상의 돌들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 백 돌을 쥐었다.
빵굼터가 흑으로 복기를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좌하 귀의 수순에서 흑의 실수가 어떤 것이었는지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짚어왔다.
그리고 설명 없이 흑과 백이 서로 무난한 정석을 주르륵 펼쳐 보였다.
양손에 흑과 백을 한 주먹 씩 쥐고 소꿉장난하듯 수순을 만들어나가는 소년의 재기에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역시 그릇이 다르군요. 아, 갑자기 바둑둘 맛이 안 나네요. 난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빵굼터가 자신의 이마를 철썩 때리며 자탄했다.
다음 상대는 강성도였다.
전 판에서 소년의 기량을 충분히 확인한 강성도는 포석에서 무리하지 않고 중반 이후에 완력으로 전투를 개시하겠다 맘먹었다.
잡념이 없는 어린이들은 고정관념이란 게 없기에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아무리 어려운 수순이라도 줄줄 외우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전체를 보는 눈은 어떨까?
아마도 그 점에 있어서는 어른들의 시야를 당해내기 힘들 것이다.
포석을 완료한 시점에서 강성도는 장고를 시작했다.
희망이를 위해서는 어른들이 독하게 본때를 보여줘야 옳다고 생각했다.
* * * * *
같은 시간 8층 차문환의 흑백기원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대박기원 손님들이었다.
입장료는 단돈 3000원, 그러나 점심으로 짜장면이 무료제공 되었기에 공짜인 셈이었다.
차문환은 대박기원 사람들을 위해 직접 승용차를 운전해 수도 없이 왕복하며 교통편의까지 서비스한 참이었다.
일반 손님들이 쾌적한 환경 속에서 바둑을 즐기는 동안, 응접실에서는 차문환과 고수로 보이는 몇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대형 원탁이 놓인 응접실의 분위기는 포커 판 같았다.
“일단 간판부터 뺏어 와야 합니다. 현행 법률 상 형님이 인수한 기원의 소유권 중에는 분명히 상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거리가 멀다면 몰라도 바로 코앞에서 동명의 간판을 걸었다는 건 영업방해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걸어놓고 동시에 애들을 풀어 깽판을 놔야죠.”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말했다.
“그리고 대박기원 손님들을 일부러 데려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조금 손해보더라도 기원을 방치해두십시오. 인수하기 전 장부와 인수 후의 장부는 재판의 참고자료가 됩니다. 기원을 넘긴 정승원을 사기죄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겁니다.”
“야, 민사소송은 해보나 마나 돈 받기 힘들어. 재판에서 이겨도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지 모르고 또 얼마나 보상받겠냐? 그러는 동안 망하기 십상이지. 급한 건 저 5층 원조 흑백기원 사람들을 끌어오는 거야.”
“그건 우리들이 책임질 테니까 형님은 법적으로 흑백을 가리는 것도 신경 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압박을 해둬야 일이 편해요.”
법적으로 흑백을 가린다는 것.
과연 법은 어느 쪽이 진실의 백(白)이라고 손들어 줄 것인가?
“알았다. 내가 구청에 민원을 넣고 아는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할 테니까 너희들이 궂은 일은 맡아서 해. 표시 나지 않게 해야한다. 한 번 인심을 잃으면 아파트촌에서는 장사해먹기 힘드니까.”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리고 오늘밤에 메이저리그 붙여라. 1군 멤버들로 잘 짜 봐. 관리비는 뽑아야지.”
차문환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하우스를 운영하기로 작정했다.
대박기원처럼 날마다 판을 벌이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한 두 번 벌이되 규모를 키워 기원영업의 손실을 상쇄할 계획이었다.
바둑을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공간에서 포커 판을 벌인다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바둑으로 도저히 장사가 되지 않기에 고육지책을 빨리 가동해야만 했다.
흑백기우회의 응집력으로 보아 하루아침에 분위기를 역전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으므로 일단 하우스의 가능성을 타진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 며칠은 신도시 일대의 큰손들을 불러모아 빅 게임을 연출한 뒤 타임 비로 기원의 초기 운영자금을 확보한 다음, 서서히 H지구의 아마츄어 갬블러들을 공략할 작정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 기원에서 하우스를 오래 지속하기는 힘들다.
도박의 생리가 그렇듯 게임을 하다보면 점점 판이 커지게 마련이고,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중상자(重傷者)가 발생하게 마련인 법.
그러다 보면 틀림없이 사고가 터지거나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가 낭패를 당하게 되는 거였다.
차문환은 대박기원에서 놀라운 수완으로 오랫동안 하우스 영업을 해온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 전설의 기록 뒤안길에는 말로 표현 못할 사연들이 많았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하고 자살한 단골의 시신을 직접 거둔 적도 있었고, 멤버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 먹힌 액수를 따지면 거의 아파트 두어 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으며, 주민 신고를 무마하기 위해 파출소와 경찰서에 극비 라인을 개설하는가 하면 동네 주먹들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대가로 꽤 많은 투자를 했었다.
그처럼 풍부한 하우스 노하우를 지닌 차문환 원장의 판단은 간단했다.
특급 하우스를 만들려면 우선 고급기원의 포장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흑백기원의 타이틀이 꼭 필요한 입장이었다.
축 머리 활용법
강성도는 온갖 지략을 동원해 바둑을 난전으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사방에 미완성의 국지전이 발생한 상태인데 그는 계속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끊으며 모든 전선(戰線)에 게릴라를 투입, 총력전으로 확장시켰다.
소년도 덩달아 흥분했는지 초강수(超强手)로 대응하며 기세를 접지 않았다.
도대체 어느 곳이 크고 급한 곳인지 분간하기 힘든 국면.
“강 마귀가 제대로 테스트를 해주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이 쪽이 유리해.”
빵굼터가 논평했다.
그는 은근히 소년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떠받드는 임수정의 자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힘 한 번 못써보고 패배한 상대를 강성도가 꺾을 경우 상대적인 비교가 되기 때문이었다.
백이 두 집을 만들지 못하면 나중에 수상전이 전개돼 귀에 죽어있는 흑돌을 따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밖으로 쭉 뻗어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안쪽에서 몇 번씩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건 고수들에게 치욕적인 수순이 아닐 수 없었다.
바둑은 그 곳에서 우열이 극명하게 가려졌다.
희망이가 크게 실수를 하진 않았으나 편의점이 고도의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 작전으로 교묘하게 좌변을 확보해버린 거였다.
그 후로 몇 수 더 진행되다가 희망이가 돌을 던져 판이 끝났다.
편의점의 명국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바둑이었다.
복기는 좌하 귀의 변화를 놓고 집중적인 검토가 이뤄졌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이 원장이 희망이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희망아. 바둑의 본질은 집을 많이 짓는 거란다. 그러니까 한 수를 둘 때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현재 상태에서 가장 큰 곳, 그러니까 가장 집을 많이 지을 수 있는 곳을 두라는 말이다. 내 집을 짓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집을 삭감하는 것도 중요하지. 내 집 열 집을 짓는 것이나 상대의 집 열 집을 깨는 것은 가치가 똑 같다. 네가 지금 이 바둑에서 진 것은 좌하 귀에 들어온 흑의 특공대를 응징하려다 바깥 쪽 변화를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야. 차라리 귀를 내주고 변과 중앙으로 진출했으면 좋았을 바둑이었다. 네 귀가 깨진 것은 아프겠지만 그래봐야 상대는 고작 두 집을 얻을 뿐이잖니? 바깥으로 움직였으면 흑 집이 불어날 가능성을 지우면서 백 집을 꽤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확정가에서 앞서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끝내기에 돌입할 수 있었을 거야.”
가장 큰 곳부터 둘 것.
이 원장의 훈계를 알아들었다는 듯 희망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끄덕였다.
패배의 아픔은 벌써 잊어버리고 귀중한 가르침을 한 가지를 깨우쳤다는 양 밝은 표정이었다.
“원장님! 강성도 씨 전화 왔는데요. 병 조 리그 마지막 판이래요. 현재 2위권인데 1위하고 35집 차이랍니다.”
미스 홍이 8층 흑백기원의 하우스 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강성도의 전황을 보고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잘하면 우승도 하겠군.”
“준우승 상금도 만만치 않던데?”
“오늘 또 회식하게 생겼네.”
“적진에 침투해 상금을 따올 생각을 하다니 역시 강 마귀는 뭐가 달라도 달라.”
결승전의 해프닝
하우스 리그의 5급 이하 병(丙) 조에 참가한 강성도는 9승 1패의 전적에 도합 382집을 기록, 2위를 달리고 있었다.
1위는 전승에 417집을 기록하고 있는 꽁지머리였다.
강한 3급의 강성도가 병 조에 참가신청을 한 것은 반칙이었지만 실상 병 조에는 3급 바둑들이 수두룩해 그리 괘념할 일도 아니었다.
"흐흐, 강 마귀가 병 조라? 정상에서 나랑 만나겠군."
항공대 비행교관인 장민식 교수가 강성도를 유일하게 알아본 참가자였다.
그 역시 짱짱한 3급, 예전부터 흑백기원에서 강성도의 좋은 호적수였다.
리그 초반에 서로 연승가도를 달린 상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피 튀기는 승부를 피해 화국을 연출했다.
덤을 내지 못한 강성도의 4집 반 패배, 그 판 때문에 전승의 기록이 깨졌으나 미미한 집 차이라 큰 상관은 없었다.
"강 마귀, 우승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내가 알기로 병 조에 우리보다 센 사람들이 두어 명은 숨어 있는 듯 싶어. 내가 2패를 당했잖아. 그 것도 네 방, 다섯 방씩......이게 말이 되냐구?"
장민식 교수는 원조기원이든 대박기원이든 구분하지 않고 찾아 다니는 자유인, 그러나 강성도가 원조 흑백기우회의 핵심인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차 원장이 사람됐나 싶어 들러봤는데 신성한 바둑대회에까지 꼼수를 동원한 것 같아 영 입맛이 쓰네. 갑 조와 을 조에는 선수들이 우글우글거려. 자기들끼리 상황 살펴가며 집 차이를 조절하는 게 빤히 보이잖아. 멋 모르고 참가한 일반인들만 들러리 서고 있는 거지."
장 교수는 7승 2패의 호성적을 냈지만 누적 집 수가 고작 108집이어서 이미 우승권에는 거리가 있었다.
기분이 상해 기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강성도를 응원하느라 끝까지 남아 있는 거라고 했다.
모든 조(組)에서 현격한 집 차이로 탈락자들이 속출하면서 기권패를 몇 집으로 잡아주느냐에 관해 논란이 일었다.
차 원장이 기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이미 수백 집 씩 부도를 낸 패배자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잔여게임을 아무렇게나 두고 있었다.
기획은 그럴듯 했으나 '하우스 리그'는 애당초 바둑의 본질에서 벗어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갑 조에서 최초로 우승자가 결정됐다.
깔끔한 용모에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민남오 아마 6단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의 집 수는 266집.
갑 조의 참가자들 모두 강 1급들이라서 그 정도의 수확을 거둔 것은 대단한 기록이었다.
2~3급들의 을 조와 강성도의 병 조 결승전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강성도와 꽁지머리의 마지막 결정국.
35집의 덤을 안고 싸우는 꽁지머리는 예상대로 단단한 소목 정석을 들고 나와 안전운행을 거듭했다.
강성도는 당연히 들개처럼 송곳니를 드러내고 싸움을 걸 수밖에 없었다.
중반까지 완력을 겨루어 본 결과 꽁지머리의 기력은 최소한 2급이 충실한 바둑 같았다.
아무리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도 교묘하게 전투를 회피하며 실리를 챙기는 스타일이 너무 얄미웠다.
그렇게 판이 진행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35집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을 성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꽁지머리가 을 조 결승국을 슬슬 훔쳐보면서 장고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승기를 잡은 바둑인데 왜 장고를 하는 것일까?
강성도는 동물적인 후각으로 그의 속셈을 간파했다.
벽에 붙은 전적표를 보니 을 조 1, 2위가 395집, 356집이었다.
그러니까 꽁지머리는 모든 조를 통털어 최다집 수를 올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MVP 상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거였다.
또 을 조의 결승국은 초반부터 난타전으로 전개돼 어느 쪽이 이기든 상당한 집 차이가 날 것처럼 보였다.
꽁지머리는 그 판을 힐끔거리며 여차하면 모험을 걸 작정으로 전단을 모색하고 있었다.
강성도도 그와 함께 장고하며 덫을 준비했다.
꽁지머리보다 세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차피 질 바에야 큰 기술을 한 번 걸어봐야 할 터였다.
강성도는 치밀하게 수를 읽은 끝에 하변 꽁지머리의 울타리 한복판을 쑤시기 시작했다.
밑으로 막으라는 강요였다.
물론 위로 막아도 되지만 그러면 젖히고 끊어서 복잡한 싸움이 벌어진다.
하변은 꽁지머리의 안 마당, 그러므로 사방에 원군이 가득했으나 만에 하나 전투에 실패하면 보가(寶家)가 송두리 째 날아가고 말 것이다.
물론 강성도의 도발을 응징하면 바둑은 일거에 그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다.
을 조의 바둑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꽁지머리가 마침내 위로 위로 투망을 쳤다.
그렇게해서 삽시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꽁지머리의 세력권이어서 침입수는 동강난 채 양곤마로 쫒기기 시작했다.
꽁지머리가 신바람을 내며 두 마리 토끼를 쫒기 시작했다.
강성도는 열심히 이쪽 저쪽 번갈아 두며 탈출을 감행했다.
이런 국면으로 전개되리란 예상은 충분히 하고 있었던 터.
그가 노리는 것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유인계.
이 쪽이 양단된 것처럼 꽁지머리의 세력도 양분되었기에 한 쪽이 미생마였다.
얼핏 보면 4선에 가즈런히 축대를 쌓아 탄탄한 건물로 보였지만 착암기를 들이대면 단번에 와르르 무너질 가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꼭 고수가 아니라도 조심성 많은 사람이라면 그 부분의 취약점을 눈여겨 보고 당장 보수하겠지만 지금 꽁지머리는 살육의 피냄새에 취해 자신의 안전 따위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언제든지 수상전으로 가도 몇 수 빠르다는 고정관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강성도는 바깥 곤마의 수를 최대한 늘려놓고 마침내 빗장걸이를 시도했다.
흑백 두 곤마의 수가 10여 수를 넘고 호구와 되따는 수들이 범벅돼 있어서 좀처럼 우열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이 번에는 을 조의 결승대국자들이 바둑을 멈추고 이 쪽의 진행상황을 컨닝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수상전의 외길수순이 차례대로 이어졌다.
꽁지머리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딱딱 수를 메웠다.
'이봐, 이건 자네가 안되는 싸움이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포기하시지!'
그는 그렇게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수를 다 읽어둔 상태이니 제발 겁을 먹어달라는 강요였다.
그러나 강성도가 마주 보는 곳의 1선으로 돌을 내리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따라 내려야 하는데 그러면 자충으로 한 수가 줄어드는 거였다.
그렇다고 다른 곳을 두면 1선에서 징검다리로 뛰어 강성도의 수가 한 없이 늘어나게 된다.
꽁지머리가 장고를 하며 끄응 신음을 토했다.
무려 15 개의 돌이 즉사 판정을 받았다.
돌만 죽은 게 아니라 20여 집 이상이나 확보했던 진영이 풍지박산 됐으니 어마어마한 손해를 본 거였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반면을 살펴 보면 흑백 간에 큰 차이는 없었다.
강성도가 하변에서 포인트를 획득했지만 덤 35집을 감안하면 바둑은 이제부터라고 해도 좋았다.
그 때부터 꽁지머리의 놀라운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류처럼 빠른 감각으로 큰 곳을 선점해가면서 야금야금 전투의 손실을 채워가는 거였다.
끝내기는 단연 꽁지머리의 독무대였다.
이제 그는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을 조 결승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판에 신경쓰다 크게 한 칼을 맞았기 때문에 일단 병 조 챔피언 상금을 따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스무 집 차이죠? 하하 덤 35집 아니면 꼼짝없이 질 뻔했네."
한 집 끝내기 몇 개가 남았을 때 꽁지머리가 완벽하게 집 수를 계산하고 강성도에게 물었다.
자신이 스무 집을 졌지만 35집의 덤이 있기 때문에 우승이 확정적이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35집 차이가 덤이 아닙니다. 덤은 18집이예요."
"네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스무 집을 이기면 그 쪽에서 마이너스 스무 집을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더블로 마흔 집 차이가 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35집을 넘어선 겁니다."
"뭐라구요?"
꽁지머리가 비명을 지르며 전적표를 보았다.
아주 간단한 계산을 그는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가를 하기 위해 공배를 메우는 꽁지머리의 안색은 거의 사색에 가까웠다.
"에이, 미친 놈! 더블로 계산되는 걸 잊어 먹다니......이러고도 내가 무슨 바둑을 둔다고!"
그런 해프닝으로 병 조의 우승은 강성도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최종 MVP는 을 조 우승자의 차지였다.
연출인지 실제상황인지 분간할 순 없었으나 병 조의 결과를 확인한 뒤 그들의 바둑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한 쪽이 무려 70여 집을 이기면서 아주 간단하게 끝을 내버린 거였다.
차 원장은 강성도에게 상금 50만원을 전달하면서 격려와 호객의 당부를 전했다.
"바둑 두는 걸 보니 참 사연있게 두시더군요. 앞으로 매일 나오셔서 우리 흑백기원 고정 멤버가 돼 주십시오. 고수들이 많아서 바둑도 빨리 늘 겁니다."
강성도는 재빨리 상금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꾸했다.
"하하하 상금 잘 쓰겠습니다. 사실 저는 원조 흑백기우회 멤버라 앞으로 얼굴 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성도가 정체를 밝히자 차 원장의 눈동자가 화락 커졌다.
"갑시다. 장 교수님.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강성도가 항공대 장 교수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건넸다.
"허허 좋지! 막창구이 어때?"
두 사람은 흑백기원의 잔칫상에 통쾌하게 재를 뿌리고 표표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선전포고의 북소리
이 원장과 차 원장의 흑백기원이 같은 시기에 오픈하면서 H지구 네거리는 때 아닌 바둑 열풍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교차로에 대각으로 서 있는 8층과 5층 건물 벽면에 세로로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준 높은 바둑문화의 산실, 흑백기원 오픈기념 -기료 반액할인, 회원 맨투맨 지도>
<기료 할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료가 아깝지 않은 원조 흑백기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아파트 단지에는 날마다 조간신문 간지로 기원 소개 팜플렛이 배달되기도 했다.
모든 업종이 불황의 파고에 시달리는 마당에 양대 기원의 홍보작전은 바둑산업만 독야청청 잘 풀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아무튼 토박이 기객들이 똘똘 뭉친 원조 흑백기원과 원래 자리를 인수한 차문환 원장의 흑백기원 간에 자존심 싸움은 하루가 멀다하고 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참고로 앞으로 두 기원의 명칭은 대박파와 원조파로 명명하겠습니다.)
두 기원의 흥행성적도 엇비슷했었다.
원조 기원은 기존 흑백기우회와 여성기우회를 중심으로 고정고객들이 월정 기료 12만원을 선불로 납입하며 기원 운영에 도움을 주었고, 회원 각자가 자발적으로 고객 1인 추가확보 운동을 벌여 상당한 효과를 올리기도 했다.
반면 차 원장의 흑백기원은 신도시 일대의 바둑마귀들과 하우스 멤버들이 우정출입으로 붐 조성에 단단히 한 몫을 했고 그 덕에 H지구 주민들 중에 새로운 잠재고객들을 발굴하는 소득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신진기객들이 두 기원을 번갈아 출입하며 바둑환경 등을 상대적으로 비교해본 끝에 자신의 스타일에 적합한 곳을 골랐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기원 분위기는 원조파 쪽이 맑고 밝았으나 또 소비자들의 기호나 취향은 다양해서 대박파 쪽을 선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고객은 대박파 쪽이 더 많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맑은 물에 고기가 몰려들지 않는다는 말처럼 승부끼가 농후한 사람들은 원조파의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풍경보다 뭔가 음산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대박파들의 본거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였다.
아무튼 두 계파의 치열한 선의의 경쟁으로 인해 H지구에 일시적으로 바둑 붐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어느 한 쪽이 간판을 바꿔야 되는 거 아니요? 원조 흑백은 뭐고 그냥 흑백은 뭐란 말입니까?"
그렇게 항의한 사람들은 박쥐파였다.
양쪽 기원을 번갈아 다니는 항공대 장 교수 같은 사람들이 박쥐파에 속했는데 이들은 고정으로 기원에 다니는 게 아니라 틈날 때마다 바깥의 친구들과 어울려 드문드문 바둑을 두러 오는 입장이었다.
어느 쪽을 찾아가도 환영받는 건 마찬가지이고 실내환경도 쾌적해서 굳이 가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 박쥐파 손님들의 숫자도 만만치않았기에 그들의 발언은 양 쪽 기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신도시 일대에서 H지구 기원들만큼 활성화된 곳도 별로 없는 듯 보이니 둘 중 한 곳이 한국기원 신도시 지부 간판을 걸고, 다른 쪽이 흑백기원 명칭을 사용하면 서로 불만이 없지 않겠소?"
장 교수가 부지런히 양 쪽을 드나들며 절충안을 제시했다.
장 교수는 심정적으로 원조파에 속했으나 대박파에 친한 지인들이 있어 두 기원이 으르렁거리는 꼴을 보고 견디지 못했다.
그의 중개에 양쪽이 관심을 보여 곧 해빙무드가 찾아올 듯한 기미가 보였다.
어느 날 드디어 장 교수의 입회 하에 이 원장과 차 원장이 만나게 되었다.
장소는 네거리 중립지역의 감자탕 집.
두 노장들은 고수답게 뷸편한 감정들을 전혀 표출하지 않고 최대한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자세를 보였다.
"차 원장님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정승원한테 속아 기원을 인수한 죄밖에요. 저도 기원 밥을 먹은 사람인데 원장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흑백기우회 멤버들과의 견해차이 때문에 새로 기원을 차리게 된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저도 이 원장님께 불만없습니다. 처음에는 계약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젠 다 잊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경쟁원칙에 따라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인데 불만을 가져봤자 의미없는 일이지요. 앞으로 함께 잘해봅시다."
그런 식의 화기애애한 대화로 포석을 시작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길등이든지 금방이라도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간판 문제가 튀어나오면서 치열한 수상전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흑백기우회 이름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거 하나만 차 원장께서 양보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기원을 인수하실 때 이름까지도 재산에 포함된다는 건 알지만 사실 기원보다도 흑백이라는 이름은 기우회 명칭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 곳 기우회 사람들이 애착을 갖는 이름이니 그분들께 돌려준다면 차 원장님을 모두가 존경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원장이 차 원장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있어 차 원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아닙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할 수 있어도 간판명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간판이야 아무렇게 내건들 무슨 상관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자존심과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흑백이란 이름으로 광고와 홍보활동을 시작했고 개업식을 해버린 마당에 새삼스럽게 개명하기는 번거로울 뿐 아니라 먼데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손님들께 혼란을 주는 일입니다. 제가 한국기원 신도시 지부로 등록하는데 도움을 드릴 테니까 그 쪽에서 양보를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이 원장 역시 화끈하게 양보를 할 순 없는 입장이었다.
차 원장이야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지만 이 원장은 흑백기우회 회원들의 뜻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간판 논쟁은 좀처럼 타결되지 않은 채 현란한 논리의 공방전으로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다.
보다 못한 장 교수가 끼어들어 묘수를 제시했다.
"아, 거참 답답한 분들이시네! 까짓 간판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무슨 무협지에서 도장간판 지키는 것처럼 난리들입니까? 두 분이서 자기 주장만 계속한다면 결론이 날리 없습니다. 음, 제가 명쾌하게 해법을 내놓겠습니다. 양 쪽 다 응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말씀드리지요."
원장들은 장 교수의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쭈삣쭈삣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소룡이 나오는 정무문이라는 영화를 보면 간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국의 국기 쿵후 도장의 명예를 실력으로 지키는 장면은 감동적이지요. 우리도 기원 간판 따먹기 실력대결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무예도장이나 바둑기원이나 다를게 없잖습니까? 양 쪽의 정예멤버들을 추려 5:5나 7:7 혹은 집단 편 바둑같은 승부로 결정하자는 이야깁니다. 아주 재미있는 시합 아닐까요? 소문이 나면 신도시 바둑인들 사이에 화제가 될 거고 두 기원의 공동 이벤트라는 점에서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장 교수가 제시한 수에 두 고수들이 솔깃한 표정을 보였다.
"실력대결이라면 우리야 언제든지 오케이죠. 다만 선수 선발의 기준이 엄격해야겠죠?"
차 원장이 선수를 뽑아 응답했다.
"그거야 저처럼 양쪽에 공히 친분있는 중립인사들이 공정하게 입회해서 양 쪽의 조건을 균등하게 맞춰주면 되지 않겠어요? 각자 돌아가서 회원들과 의논해보시고 적정한 규모와 조건 등을 저한테 알려주십시오. 이 대회가 성사되면 승패를 떠나 한국바둑사에 전례가 없는 간판 따먹기 기원대항전으로 기록될 겁니다."
"차 원장께서 동의하신다면 저도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규정과 형식을 잘 조율해서 대회를 치른다면 우리 회원들도 아마 제 결정을 지지할 겁니다."
"좋습니다. 떡을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오늘 쇼부를 보도록 합시다."
차 원장이 옷소매를 걷어부치며 전의를 불살랐다.
장 교수의 희한한 중재안이 먹혀들어 그 자리에서 양대기원의 총수들은 선전포고문에 도장을 찍고 있다.
* * * * * * * *
"흐음- 흥미로운 제안이긴한데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요. 대박파에는 마귀들이 득실거리는데 우리 쪽엔 진정한 아마추어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원장으로부터 전후사정 이야기를 들은 윤세창 씨는 신중론자답게 우려를 먼저 표명했다.
바둑에서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나 간판을 걸고 희대의 내기바둑을 벌인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편 대박파는 멤버 절반이 1급이요, 하나같이 방내기의 맹장들이며, 바둑계의 마당발인 차 원장이 다급하면 초절정의 고수를 영입해 용병으로 기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반면, 원조파는 어떠한가?
윤세창 씨와 이 원장을 빼면 1급 몇 명이 있긴 해도 선뜻 그런 대회에 출전시킬 정예멤버를 선발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편의점과 강성도가 승부사 기질은 넘치지만 맞바둑으로 진행될 대회의 성격을 감안하면 오더에 이름을 올리기엔 함량미달이었다.
"윤 사범님과 제가 확실하게 2승을 책임져야겠지요. 그리고 대박파의 출전선수 명단을 보고 서울대생 홍영표 6단을 선발하면 3승은 굳힐 수 있을 겁니다. 그럼 5:5 단체전으로 붙었을 때 우리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이 원장이 구체적으로 백지에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했다.
"그거야 최종안이고......저 쪽에서 만약 7:7이나 그 이상의 참가자를 주장한다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 만큼 선수 층이 얇은 우리가 불리하죠."
"일단 시합을 하기로 한 거니까 소수정예의 승부로 제안해보겠습니다."
"하하하 원장님이 동의한다면 붙어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윤세창 씨가 소년처럼 맑게 웃으며 원장의 뜻에 힘을 실어주었다.
"저도 저 쪽의 전력을 잘 몰라서 솔직히 불안하긴 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기원 두 개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영업을 할 것이 분명한데 언제까지 티격태격 감정대립으로 틀어져 있을 일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화해하거나 아예 전쟁을 벌여 간판의 소유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수 있다면 기우회 회원들도 우리 뜻을 따르리라 생각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지더라도 이런 승부 멋지지요. 하하하 모처럼 큰 승부를 맛보게 될 수 있겠군요. 오늘부터 당장 선수를 선발해서 훈련을 시켜야겠습니다."
뭐든 하기로 맘먹으면 시원하게 밀어부치는 인물이 또 윤세창 씨였다.
윤 사범과 이 원장이 양대기원 실력대결 소식을 전하자 흑백기우회 회원들은 흥분했다.
물론 대박파의 악명과 잠재력을 익히 알고 있기에 모든 회원들이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원장과 사범, 두 고수가 흑백기원의 명예를 위해 최전선에 자원출정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감격했고 또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흑백기우회는 그 자리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선수 선발과 대회규정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위험대결
희대의 한판승부를 매치시킨 장민식 교수는 양 쪽 기원을 오가며 끊임없이 절충안을 가다듬었다.
예상대로 대박파는 10 : 10을 들고 나왔고, 원조파는 5 : 5를 주장했다.
선수 숫자 뿐만 아니라 대회 형식에 있어서도 논란이 많았다.
대박파는 이긴 사람이 계속 다음 상대를 맞아 싸우는 승발제(농심 배 스타일)로 진검승부를 벌이자고 했다.
승발제도 제대로 붙으면 묘미가 만점인 형식이었다.
과거 진로 배 국가대항전에서 서봉수 9단이 홀로 9연승을 올리며 일본, 중국의 강호들을 물리쳤던 쾌거가 바로 승발전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인 거였다.
원조파에서도 승발전에 관해 신중한 장고를 거듭했었다.
선수 층이 상대적으로 얇을 뿐이지 최소한 3명의 강자가 있어 그리 겁낼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박파의 전력을 알 수 없는 상태라 아무래도 단체전 단판승부가 편할 것 같았다.
사실, 장민식 교수의 갑작스런 제안에 원장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승부에 동의했지만, 기원끼리의 대항전은 친선이 아닌 바에야 무리가 많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아마추어들의 천국, 하수들의 천국을 표방한 원조 흑백기원 아니던가?
장민식 교수가 대박파들과 만나고 온 뒤 최종협상 카드를 제시했다.
"칠대 칠까지는 양보하겠답니다. 대신 승발전으로 하자는데 어떻습니까?"
"허허, 그 쪽이 인원을 양보한다면 우리도 양보할 수 있소. 그러나 대회의 형식은 일대 일 단체전이어야 합니다."
"아이 참 원장님이 1번 타자로 나가서 전부 날려버리면 되잖아요."
"제가 알기로 저 쪽에는 나 정도 두는 사람이 열 댓 명도 넘는다고 해요. 애당초 붙어서는 안될 체급이었던 거죠. 장 교수님 제의에 덜렁 응하긴 했지만 막상 진행하려니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네요. 아주 요 며칠 잠이 안올 지경입니다. 8층에 가셔서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이 황당한 승부에 우리가 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쪽이 엄청나게 많이 양보한 거라구요."
"왜 승발전을 한사코 피하시죠?"
"대박기원 사람들을 속속들이 안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이제 오픈한 기원인데...그렇다면 차 원장이 과거의 대박 멤버들을 끌고 올 게 분명하잖습니까. 하나같이 부정선수나 마찬가지인데 어떤 고수를 끼워넣을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용병들과 겨루는 사실도 찜찜한데 승발전이라면 연패를 당했을 경우 우리 쪽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기원대항전이라면 순수하게 손님들 중에서 비슷한 급수끼리 짝을 지워 기량을 겨루는 게 보기 좋지요.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십대 십 아니라 백대 백이라도 콜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부정선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며칠 전부터 회원명단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새로 가입한 사람들은 참가할 수 없습니다."
"하하하. 이미 마귀들이 회원가입을 했을 거 아닙니까?"
장민식 교수는 이 원장과의 마지막 협상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다시 8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 * * * *
"그 친구들 참 겁도 많네. 그렇게 쫄아서 뭔 놈의 승부를 보겠다고!"
차문환 원장이 투덜거렸다.
응접실에는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대박파의 출전선수들이었다.
"어휴, 단체전이든 뭐든 후딱 붙자 그러세요. 어떻게 붙어도 형님이 이깁니다."
누군가 보채자 차 원장이 대답했다.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작신작신 밟아주려고 용을 쓰는 거다. 이 대결에서 기를 꺾어놔야 흑백기원의 정통성은 물론이고 앞으로 장사하는데도 편해진다."
차 원장은 실제로 원조기원과 대결을 약속한 이후로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있었다.
어떤 방식의 대결을 해도 그는 사실 자신만만했다.
대박기원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방내기의 마귀들 중에서 아무나 턱턱 골라서 엔트리 멤버에 넣어도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파악하기로 원조 흑백 멤버는 이청산 원장과 윤세창이란 고수 두 명을 빼면 기원 1급으로 쳐줄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개업식 날 강성도라는 젊은 친구가 재를 뿌리고 사라졌지만 여러 경로로 확인해본 결과 겨우 3급에 불과했었다.
그러니 저 쪽은 5 : 5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다섯 명의 선수를 고르는데도 무진장 애를 먹을 것이었다.
그런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차문환은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승발전을 주장한 거였다.
승발전이라면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대박 멤버들이 한 두 번 실수한다해도 무난하게 이길 것이고, 아예 선두타자가 전승으로 게임을 마감할 수도 있는 거였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간판 따먹기 위험대결을 하려면 차 원장님이 좀 더 양보를 하셔야겠습니다. 흑백기우회 사람들도 이 쪽 분위기를 나름대로 읽고 있거든요. 칠대 칠의 승부도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장 교수가 응접실에 들어와 협상상황을 보고했다.
"아니, 그럼 그들은 양보한 건 하나도 없잖아?"
"하하하,이 게임을 들어온 것만 해도 엄청 양보를 한 거 아닙니까?"
장 교수가 껄껄 웃었다.
차 원장도 피식 웃었다.
사실 이 번 이벤트는 우연히 기획된 것이아니라 두 사람의 공모(共謀)에서 비롯된 합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장 교수는 차 원장의 사람은 아니었다.
차 원장이 장 교수에게 접근해 메신저 역할을 부탁한 거였다.
장 교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어쩐지 대박파의 음모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중재 역을 맡았다.
흑백기원도 이런 담금질을 통해 자생력을 갖츨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또 기원 대 기원의 위험대결을 꼭 보고 싶은 그의 호사가적 취미도 적잖이 작용했었다.
* * * * *
우여곡절 끝에 위험대결의 최종 설계도가 확정되었다.
7 : 7 단체전.
가운데 3번 타자는 여성기우들의 시합을 끼워 넣기로 양 측이 합의했다.
그 아이디어는 장 교수가 내고 차 원장이 적극 동조한 거였다.
구색을 맞추는데도 좋고 여성기우들이 꽤 많은 흑백기원으로서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대박파의 8층 기원에서 여성들을 보기는 힘들었지만 개업식 행사 때 몇 명의 여성기우들이 찾아 왔었다.
신도시 전체 여성기우회의 임원들이었다.
어쨌거나 기원에 들어와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면 회원이 되는 것.
차 원장은 위험대결에 여성 엔트리를 끼워 넣은 것도 다 여러 가지 복선이 있는 묘수인 셈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원조파는 군소리없이 여성 엔트리 아이디어에 동의했다.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여성기우로 오더의 한 칸을 채우면 그만큼 선수선발의 고민이 덜어지는 거였다.
나를 밟고 간판을 달아라!
격전을 앞두고 H지구 네거리 바둑가의 풍경은 태풍전야처럼 고요했다.
대회는 일주일 후 주말 이틀에 걸쳐 치르기로 합의된 상태였다.
점심 무렵이면 기객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인근 식당가로 내려가곤 했는데 양대기원의 대회전 일정이 결정난 뒤로 대박파나 원조파의 모습을 길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양대계파가 암중모색으로 전력을 비축하는 동안 이 조그만 동네의 이색 바둑대결의 소문은 바둑계의 중원으로까지 전파되고 있었다.
한 동네 두 기원의 라이벌 대결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바둑계에 알려졌고, 그 바람에 월간 바둑지와 인터넷 바둑사이트 타이로(Tyro)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취재요청을 해왔다.
특히 타이로 사의 콘텐츠 총괄 정웅진 이사는 수시로 두 기원에 전화를 걸어 준비상태를 확인했다.
얼마 전에 유료화로 전환하면서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머리를 쮜어짜고 있던 정웅진 이사에게 흑백기원 정통성 대결에 관한 소문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바둑 팬들에게 프로기사들의 소식도 중요하지만 동네기원의 아이템도 굉장히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뉴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기원 친선대결이 아니고 간판을 걸고 진검승부를 벌인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로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법적분쟁의 소지가 다분했는데, 양 측이 화끈하게 바둑대결을 통해 자웅을 겨루고 승자 쪽에 정통성을 부여한다니 꼭 무협지에 나오는 스토리 같았다.
<신도시에 피어오른 포연, 간판 쟁탈전>
<나를 밟고 간판을 달아라!>
<서든데스, 7 : 7 단체전>
정 이사는 매일 신도시 H지구 바둑대결 뉴스를 특집기획 기사로 다뤘다.
그의 예상대로 바둑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침 중국에서 한, 중, 일 프로 단체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 소식보다 조회 수가 높을 정도였다.
정 이사에게 실시간으로 H지구 기원들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주는 취재원은 다름아닌 장민식 교수였다.
장 교수는 타이로 회원으로 사이트 게시판을 주름잡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게시판에 H지구 소식을 올린 것을 계기로 정 이사가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타이로는 동네기원 이색대결 이벤트의 후원사를 자처하며 푸짐한 상품을 제시했다.
승리 팀 기원에 타이로 제휴기원 로고를 발급하고 출전선수 전원에게 평생무료 회원 혜택과 사이버머니 5천만원을 주기로 한 거였다.
아무튼 타이로 사의 개입으로 흑백기원 양대문파의 7 : 7 대결은 전국 바둑 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 * * * * * * *
하루 아침에 화제의 중심에 서게된 원조 흑백기원의 분위기는 납덩어리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뜩이나 대회전을 앞두고 비세를 극복할 묘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특집이다 생중계다 해서 바둑잡지와 사이트에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누구보다 부담을 느끼고 있는 주인공은 이청산 원장이었다.
"허어, 장 교수 그 사람이 나를 아예 잡을 심산인 모양이네요."
이 원장이 윤세창 씨에게 하소연했다.
타이로 사이트에 속속 업데이트 되고 있는 기원대결 뉴스를 볼 때마다 원장의 미간에 갈매기가 그려졌다.
"하하하 재미있잖습니까? 이제 우리도 정식으로 기보를 남기게 됐군요."
평생 바둑고수로 불리면서도 변방의 언저리를 배회해야 했던 윤세창 씨는 이런 사태가 오히려 즐거운 듯 싶었다.
"윤사범님, 저는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세상에 낯을 내놓을 형편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벌이려면 당사자와 의논을 먼저 했어야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떡하겠습니까? 얼굴 밝히기가 껄끄러우시다면 타이로 사에 미리 연락을 해서 막으면 될 겁니다."
"벌써 이름이 소개됐잖습니까. 이청산이 신도시에서 기원을 한다는 소문이 알려지면 골치아파집니다."
그는 진짜로 골머리가 아픈 듯 관자노리를 지그시 눌러댔다.
"하하, 원장님의 과거사를 알 수는 없지만 감추거나 묻어둔다고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 번 기회에 출사표를 내고 야인생활을 청산하시죠. 청산이란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잖습니까?"
90년대 이후 바둑교실에서 공부를 한 신진세대를 제외하고 신도시의 올드 주부회원들 중에서는 신나영이 단연 최고수였다.
차문환은 신나영의 카드를 쥐고 원조파에 여성 멤버의 참가를 이끌어냈고 희희낙락했다.
애초에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고 응원군쯤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가장 확실한 조커였던 것이다.
차문환의 기대대로 신나영은 날마다 여성기우회 참모들을 이끌고 대박파의 흑백기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더구나 유명 바둑사이트 타이로에 연일 뉴스로 소개되자 신나영은 잔뜩 흥분해서 빨리 대결을 벌이자고 성화를 부리곤 했다.
* * * * *
원조 흑백기원 5층 특별대국실.
오희망과 임수정은 색바랜 기보 노트의 한 쪽을 펼쳐놓고 복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못 이겨.”
표현력이 부족한 8살짜리 소년이지만 그렇기에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 지적이었다.
두 모자는 대략 여섯 판의 바둑을 복기하고 있었다.
과거 신도시 여성바둑대회 결승에서 신나영과 만나 두었던 기보였었다.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그 분과 바둑을 두지 않은 공백이 있었는데 엄마 바둑이 그새 좀 늘지 않았니?
“몰라. 아무튼 엄마가 질 거야. 힘이 딸려.”
임수정이 섭섭한 표정으로 돌을 쓸어 담았다.
무뚝뚝한 아들의 예상 평에 맥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나영이 대박파의 용병으로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신도시가 한참 개발되던 초창기에 그녀는 신나영이 이끄는 신도시 여성기우회에서 바둑을 배우고 함께 어울려 다녔었다.
어린 희망이를 입단시키기 위한 장기포석으로.
그래서 신나영과 꽤 많은 판수의 바둑을 둘 수 있었다.
하급자였기에 기력의 진보는 임수정 쪽이 빨랐지만 그녀에게 신나영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산맥이라고 해도 좋았다.
신나영의 기풍은 저돌적이면서 두텁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도사견 스타일이었다.
대회 때마다 그녀의 기풍을 집중연구하고 타개책을 찾아 나섰지만 결승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은 판을 잘 짜나갔지만 꼭 후반에 난타를 당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나영의 모습만 봐도 바둑을 두기 싫을 정도였다.
체중 80킬로에 육박하는 여장부 신나영은 임수정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 * * * *
바둑사이트 타이로 사가 개입하면서 양대기원의 단체전 요강이 짜임새 있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단 1번 타자들의 대결은 여성기우로 오더를 내고, 2차전은 1차전의 결과에 따라 패한 쪽이 오더의 권리를 갖기로 했다.
그러니까 1승을 거둔 쪽에서 어떤 선수가 나오는지 확인하고 1패를 안은 쪽에서 마음대로 대항마를 출전시킬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그래야 7번 승부의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또 양 측의 합의에 따라 일주일 동안 매일 한 판씩 두어지며 출전선수는 하루 전 날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므로 7차전까지 승부가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전날까지 출전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베일을 장치한 거였다.
대박파에서 일찌감치 1번 타자로 신나영을 내세워놓고 기세를 올리는 동안 원조파는 심각한 대책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여성 멤버라면 천상 임수정과 루이 둘 중 하나를 선발해야 하는데 객관적인 전력도 그렇고 지난 번 페어바둑에서 승리를 거둔 임수정이 회원들의 절대적인 추천을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5급 임수정의 기력은 4급 신나영과 한 단계 차이밖에 나지 않으므로 호선으로 두더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리라 보였고, 반면 7급의 루이는 석 점 바둑이라 호선의 대결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루이를 추천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는 논리가 있었다.
“루이 씨와 임수정 회장의 치수는 두 점이지만 호선으로 둬도 임 회장이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당연히 루이 씨가 불리하겠지만 승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루이 씨와 신나영의 호선대결도 생각해 볼만 합니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 18급과 17급이 호선으로 통하고 17급과 16급이 맞둬도 되고 16급과 15급도 그렇고 주르륵 내려오면 18급과 1급이 맞장떠도 괜찮다는 이야기 아냐?”
임수정을 절대지지하는 빵굼터가 일언지하에 루이파의 의견을 뭉갰다.
그런데 뜻밖에도 임수정 회장이 빵굼터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건 아니죠. 저는 루이를 추천합니다. 사실 저는 신나영 회장을 호선으로 이겨본 적이 없어요. 그 분 완력을 견디지 못하겠더라구요. 루이가 7급이라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는 5급에 손색없어요. 또 날마다 조금씩 늘고 있구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담력이 강하고 힘이 좋은 루이가 출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임수정이 양보의사를 밝히자 모든 회원들이 루이를 돌아보았다.
루이는 뜻밖의 추천에 어리둥절한 듯 임수정을 바라보았다.
임수정은 진지한 눈빛으로 루이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서로 응시했을 뿐이지만 루이는 임수정의 진심을 읽어내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제가 둘게요. 사실 출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거든요.”
그녀의 씩씩한 고백에 모두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부담감이 큰 승부바둑 앞에서 한번쯤 사양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냉큼 추천을 따먹는 배짱을 과시하고 있었다.
“희망이와 신나영의 기보를 둬봤어요. 해볼만 한 상대던데요 뭐?”
루이가 계속 기염을 토했다.
아니, 어느 틈에 희망이 방에 들어가 상대의 기보를 연구했단 말인가?
사람들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희망이가 저를 불러 가르쳐 주었어요.”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그럼 희망이는 벌써 루이가 출전하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청산 원장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닥을 잡아주었다.
“하하하 희망이가 상대의 기보를 보고 엄마보다 루이 씨 바둑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장래 프로기사의 수읽기니까 인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윤세창 씨가 마지막으로 말뚝을 박았다.
“허어, 희망이가 사람까지 볼 줄 아네? 좋은 생각이네요. 바둑이야 임 회장이 반듯하지만 임 회장은 우리 기원 투자자라는 부담이 있어요. 바둑 외적인 요소로 볼 때도 루이 씨가 오히려 부담 없이 싸울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급수 차이 따위는 그냥 사람들이 정한 척도에 불과한 거니까 마음껏 자유롭게 둬보도록 해요.”
그렇게 원조파의 1번 타자는 루이로 결정 났다.
* * * * *
양 측의 오더가 확정되자 타이로는 즉각 선수들의 신상명세와 바둑경력을 입수해 특집기사를 작성했다.
비록 중급자들의 바둑이지만 위험대결의 비중을 감안해서 특별대국으로 선정, 사이트 회원들의 베팅이 가능하도록 했다.
서서히 결전의 날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H지구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이로의 20만 회원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희한한 동네기원 간판쟁탈전 7 : 7 이색대결의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절망의 힘!
새벽 4시 30분.
황유경은 루이라는 아이디로 타이로 사이트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원래 터프한 기풍이지만 오늘따라 바둑의 호흡이 거칠었다.
3승 3패의 전적-
여섯 판 모두 기보에 남기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그런데도 마우스는 계속 대국신청을 눌러대고 있었다.
그 때 쪽지가 날아왔다.
[저랑 한 판 어때요?]
강성도의 아이디였다.
네 점 상수인 그는 호선바둑으로 대국신청을 해왔다.
신나영과의 결전에 대비해 맞바둑 스파링을 자처한 거였다.
고마운 배려였지만 루이는 강성도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엉망으로 판을 짜나갔다.
60여 수를 채 넘기지 못하고 그녀가 돌을 던지자 대화창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무슨 일 있어요? 누님 바둑 같지 않습니다.]
- 남편이 들어왔어.
[그랬군요. 지금 주무십니까?]
- 침실에서......
[얼마만이죠?]
- 한 달 남짓?
[상태는 어떤 것 같아요?]
- 꾀죄죄하지 뭐. 돈 떨어지고 갈 데 없어서 들어왔을 거야.
[빚을 많이 졌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 신용이 바닥나서 자금 끌어쓸 데도 없을 걸.
[누님 마음은 어떠세요?]
-덤덤해.
[역시 누님이십니다. 어쨌거나 누님에게 주어진 운명이니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마 지금 그 분은 누님께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옛날 경마장에서처럼 따뜻하게 안아드리세요.]
-지금은 그런 낭만이나 배짱 같은 거 부릴 여유가 없어. 그만큼 건조해진 까닭도 있지만 그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거든.
[제가 형님을 조만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들어오셨다니 다행이네요. 누님은 내일 결전에 신경 쓰세요.]
-차라리 바둑 끝난 뒤에나 올 일이지 왜 중요한 시점에 나타나서 컨디션을 흐트러뜨려 놓는지 모르겠네.
[하하하. 누님한테는 바둑보다 서방님이 훨씬 중요하지 뭘 그래요. 제 말씀대로 지금 로그아웃하고 함께 주무세요. 지금 누님 상태로 바둑을 두면 독이 될 것 같아요.]
루이는 그의 충고에 따라 바둑을 접고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밤새 달궈졌던 모니터가 뿌슝 작별인사를 건네왔다.
인터넷 중독자들은 모니터를 떠나는 순간부터 다음에 할 일의 우선순위를 찾지 못해 서성이곤 한다.
루이가 그랬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자니 소란스러울 것 같고, 안방의 침대로 향하자니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머쓱하고, 다른 일을 찾자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애꿎은 손만 싹싹 씻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켜려다 말고 일어섰다.
타이로 사이트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강성도가 지키고 있을 것 같아 차마 켜지 못했다.
심호흡을 하고 난 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침대 위에 구겨진 신문지처럼 잠들어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얼굴에 안식의 기운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도대체 그 무엇이 저 사람의 영혼을 앗아갔을까?''''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미움보다 연민의 감정이 앞섰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성격이 못마땅해 미칠 것만 같았다.
번번이 가정의 평화와 희망을 짓밟는 무책임한 남편의 방황을 응징해야 하는데 낯을 대하면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증발하고 마는 거였다.
그가 잠결에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가위에라도 눌린 모양으로 고통스럽게 몸을 떨었다.
루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내 그의 몸이 진정되더니 그녀에게 반 바퀴 굴러 의지해왔다.
그녀가 몸을 누여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가 어린애처럼 콧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오래 감지 않은 머리에서 비릿한 악취가 배어 나왔다.
포옹하니 그런 악취도 다 견딜만한 남편의 냄새였다.
그녀는 그 상태로 남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팔베개를 해준 오른 쪽 팔 안쪽으로부터 뜨거운 액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품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여보"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녀가 손가락대신 입술을 가져가 말문을 막았다.
애벌레처럼 위축되어 있던 남편의 몸이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금술사처럼 시체와 다름없는 남편의 껍데기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미친 듯이 그녀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참으로 슬프지만 두 부부가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섹스였다.
모처럼 남편은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은행에서 퇴직 당한 이후에 제대로 고개 한 번 들어보지 못했던 그의 심벌이 놀랍게도 불기둥처럼 홧홧하고 단단하게 그녀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였다.
그녀도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개방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결혼한 이후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멋진 정사였다.
사랑의 행위를 마치고 루이는 욕조에 가득 더운물을 받아 남편의 몸을 닦아주었다.
돌이켜보니 남편과의 기억나는 섹스의 베스트 텐 중 예닐곱 번이 모두 지금처럼 사고를 치고 돌아왔을 때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돌아온 탕아와 화해하고 용서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의식으로 사랑을 나누었을 때 기쁨의 농도가 강했다는 얘기였다.
''''자꾸 사고치라고 등을 떠밀어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루이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어이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통과의례-
그 한 번의 새벽 정사로 남편은 귀가신고를 했고 루이는 타이로 중독증에서 일시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 *
한편 대박파의 선두타자 신나영은 대회를 하루 앞두고 본격적인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상대인 루이 황유경의 기력을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얼마 전에 흑백기원에서 두어진 페어 바둑의 기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루이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기보는 아니었지만 그 바둑에서 신나영은 상대의 강렬한 승부호흡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바둑이 도대체 몇 급이예요?"
신나영이 묻자 차문환이 7급이라고 대답했다.
"이건 최소한 5급이 충실한 바둑이예요. 루이가 도대체 누구죠? 바둑 잘 두는 여자라면 내가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나도 잘 모릅니다. 대회같은데는 나가본 적 없고 정식으로 바둑을 배운 여자는 아니라더군요. 듣자하니 윤세창 바둑교실에서 조금 배웠고 바둑사이트를 통해 판수를 쌓았나봅니다."
"나는 임수정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찬찬히 뜯어보니까 보통 힘 바둑이 아니네요. 함부로 다뤘다가는 뼈 부러지겠네."
"그러니까 경적필패라는 말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요즘에는 셀프서비스로 바둑을 배운 강자들이 제법 많거든요. 그렇다고 위축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신 회장님 바둑은 신도시에서 최고니까요."
"호호, 이 번에 개망신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녀는 페어바둑의 수순 중 루이가 둔 수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상대의 내공을 정밀하게 측량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강한 바둑은 아니었지만 아마 정상급 고수들 사이에서 루이라는 여자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