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1년 황토현동학축제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중국, 독일에 계신 동포를 초청하여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이곳으로 나간 동포나 그 후손들은 다른 지역의 동포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라 일제치하에서 견디다 못해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 건너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의 삶 또한 순탄치 않았으리란 생각에서 이들의 말에 귀기우려보고자 함이었다. 아울러 동학을 세계화시키자는 생각도 겸해서...
박필립! 러시아에서 초청된 네 분 중에 한 분이다. 그가 이틀 전 10년 만에 정읍을 다시 찾았다. 팔순이 넘은 그는 독립운동가 박노순의 아들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독립운동가. 박노순은(1896. 7. 14 ~ 1971. 6. 14) 함경남도 덕원군 당모루에서 출생하였으며, 1918년 노령 하바로프스크에서 적위군에 참가하였고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연해주에서 최 니꼴라이, 백수동, 리금돌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군사부의 활동과 관련을 맺고 있던 ‘다반군대’에 소속되어 항일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까레이스키!!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 연해주 동토의 언 땅을 맨몸으로 일구어 어렵사리 정착 하였건만,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열차에 짐승처럼 실려서 중앙아시아 ~~스탄(~~의 땅)의 황무지에 흩뿌려졌다. 그들은 짐승같이 움막을 파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고 질긴 한국인의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 역사 어디에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런 그의 아들 박필립이 마침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남은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이번에 다시 왔다. 한국에는 아는 사람이나 연고가 없는 그가 기억을 더듬어 10년 전의 인연을 떠올리고 정읍을 찾았다. 이번에 그의 아내와 함께...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 정읍에 정착하고 싶단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 분들께 역사의 빛을 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고 국적을 취득한 부부에게 국가에서는 시골 소형 아파트 한 채도 살 수 없을 정도의 정착금을 준단다. 하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다. 평생을 살아 온 환경과는 다른 낯선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팔십이 넘어 찾아 온 조국!! 정말 오기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음 따뜻한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정촌에서 박필립
박필립의 부친 박노순의 건국포장
첫댓글 환영합니다 ^^ 조만간 회동을 지둘리면서
그동안 몸바쳐온 집안 모든 분들의 노고를 떠올려봅니다
힘내세요 ^^
와~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근데 박선생님 얼굴이 그대로신듯...
계속 건강하셔서 정읍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드카, 빼갈이 어우러진 어깨동무 춤판이 그립습니다.
아 아 그랬었군요...사진은 그때 그대로 얼굴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