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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폭풍 전야
제1장 유신과 저항
10. 농민운동
「쌀값 보장하라」 가농.기농 농민운동 주도
눈뜬 농심 부단위까지 조직확대 가동
부당농지세.수세 거부 통해 농정 질타
유신정권, 크리스천아카데미.오원춘납치 사건등 용공매도 탄압
가농이 중심이 돼 전국적 농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함평고구마사건은 유신에 저항한 반독재투쟁과 농민운동의 접목으로 한차원 더 높게 발전된다.
가톨릭종교의 틀안에서 머물고 있던 농민운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독교계로 확산되다가 80년대 이르러서는 종교를 추월한 변혁운동으로 자리매김이 이뤄진다.
특히 농민운동은 5.18을 통해 반독재 농민운동의 근본문제를 깨닫고 미국의 대한경제정책의 시각을 확인하면서 가농, 기농에 의하기보다 농민 스스로의 자주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이같은 시각아래 전남에서는 80년대 중반 함평, 무안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농우회 조직에 나선다. 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농민운동은 전국적 통일운동에 영향을 외국 농산물수입반대, 수세투쟁등으로 진전을 거듭하면서 급기야 90년 들어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결국 농민들의 정치투쟁도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전국농민회 전남도연맹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광주.전남의 농민운동은 72년 전국단위로 출발한 한국가농의 산하 조직형태로 함평 서경원 노금노, 무안 배종렬 박석면, 구례 최성호, 해남 정광훈 윤기현 홍영표, 강진 장영근 등이 군단위조직을 이끌어온다.
기독교계 운동가들은 이와 함께 74년 강원룡목사가 만들고 이우재 전민중당공동대표가 이끈 크리스천아카데미의 농촌사업부 활동에 나서던중 함평 고구마사건 이후 가농측과 협의, 기독교농민회 조직 결성에 나서면서 농민운동의 세력확장을 꾀한다.
기독교학생운동출신 나상기 현 농민문제연구소장이 76년부터 기농조직화를 주도하고 가농의 기독교신자 배종렬 전국농민회의장, 정광훈 현 광주.전남연합상임의장(수감중), 윤기현 전국농민회부의장 등이 이때부터 기농에 배치돼 할동한다.
2년후 개신교쪽으로선 역시 전국 최초로 전남기농이 발족한다.
배종렬 정광훈 윤기현 나상기 김규식(전농사무국장) 김정순(강진농민회사무국장) 최병상 무안농민회장(한국기농 사무국장) 김홍재(무안) 황연자(여.해남)등이 주 멤버.
그무렵 농민들은 고구마사건을 해결한 후인 78년 10월 쌀값보장운동과 11월 쌀 생산자대회에 매달리며 쌀생산비조사활동, 농협민주화 등을 촉구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진다.
11월 27일 쌀생산자대회가 끝나고 크리스천아카데미활동이 79년 1, 2월중 마을별로 10여차례 열려 농민교육이 활발해진다.
크리스천아카데미의 교육은 이미 75년부터 시작, 이대까지 23기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3월 5일 농민들이 수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던중 중앙정보부가 들이닥쳐 농민운동가 등 2백여명이 끌려가 탄압을 받는다.
중앙정보부는 4월 16일 크리스천아카데미간사 6명이 불법지하용공서클을 구성, 크리스천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 근로자, 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간집단 이론강의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실현을 획책했다고 발표한다.
크리스천아카데미 사회교육원간사 이우재 한명숙 등 6명, 한양대 조교수 정창렬등 모두 7명이 반공법위반 혐의으로 구속기소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이다.
농민의식화과정에서 비롯된 이사건은 유신세력대 반유신세력간의 싸움으로 번진다.
70년대 농민운동의 이론적 지도부로서 역할을 맡던 크리스천간사들이 반공법에 연류돼 재판을 받으면서 중앙정보부의 고문사실등이 폭로되는등 유신정권은 일대 타격을 입게 된다.
유신이 이처럼 극에 달한 79년 5월.
경북 청기면이 78년 다수확품종 「시마바라」라고 속여 농민에게 유상공급한 벼종자가 불량종자여서 공급량의 80%가 싹이 나지않아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이에 항의중이던 한 농민이 5월 5일 납치돼 16일만에 나타나는 오원춘납치사건이 또 터진다.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에 연류시켜 도처에서 농민회 간부와 회원들에 대한 불법연행, 심문, 가택수사 등이 저질러지고 이 만행을 규탄하는 항의가 전국으로 번진다.
수사당국은 그러나 오원춘이 꾸며낸 조작이라며 오와 농민연합회 총무 정재돈, 연합회장 권종대 등을 긴급조치위반으로 전격구속해 버린다.
그 와중에 경찰이 교구청에 난입, 천주교안동교구 사목국장인 정호경신부를 연행하는 사태가 잇따른다.
천주교가 유신정권의 종교탄압에 맞서 농성에 들어가고 정치쟁점화 된다.
서경원은 9월 10일 당시 농민회 전남연합회장으로서 전주 중앙동 성당, 전동성당에서 동시개최된 오원춘사건 항의기도회에 참석,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된다.
9월하순 박정희정권은 가농의 용공성여부를 수사하라고 전국 검찰에 지시를 내리고 공화당도 지역별로 활동한다.
그때 신민당은 유신세력의 술수에 휘말려 내분결과 제기된 김영삼총재의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이 법원에 의해 받아 들여져 무기력한 상태로 힘을 못쓴다.
이에앞서 8월엔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YH여공 수백명이 신민당사를 점거, 경찰과 대치중이던 김경숙이 투신한다.
79년 10.26사태가 터지기 직전, 10월 9일.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
유신정권은 이재문 등 78명을 구속한다. 가농의 이강 교육부장, 조계선 조사부장, 홍영표 해남회원 등도 끌려간다.
전남의 농민운동은 좌경, 용공으로 몰리면서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나상기는 70년대 농민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농민운동은 70년대 초반과 중반까지는 가농의 주도아래 후반기들어서는 기농의 참여로 저변확대에 나섬으로써 6.25를 거치며 헤체됐던 농민운동이 복원되는 과정으로 돌입한다.
농민이 경제에 눈을 뜨고 지역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는 형태로 나타난 농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예를들면 농협의 강제출자거부, 비료 조별판매반대, 노풍(벼품종)피해보상, 경지정리피해보상, 부당농지세시정, 부당수세시정, 쌀생산비조사 등으로 압축된다.
종교의 틀안에서 시작돼 이같이 70년대를 거쳐온 농민운동은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변혁운동의 한 영역을 맡게된다.
그리고 90년대엔 정치투쟁 형태로 발전해간다.
10.26과 12.12, 서울의 봄을 겪은 농민들은 열린 공간속에서 투쟁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보다 조직을 확대한다.
가농과 기농 YMCA농촌 사업부로 나뉘어진 조직을 결합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전국 농민대회를 80년 4월 11일 대에서, 농민헌법공청회를 서울 전경련회관에서 각각 개최한 이래 이지역 농민들은 확산되는 민주화열기에 달아올라 5월 10일 결정,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비상계엄이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확대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학생들이 계엄군에 무자비하게 끌려간다.
이렇게 5.18이 터짐으로써 전남농민대회는 결국 무산되고 만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향한 강진 고흥 구례 함평 무안등 여러지역 농민들이 공수부대원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는다.
일부 농민들이 군단위 항쟁을 주도한다(5.18기간중의 이지역 농민들의 항쟁은 이 시리즈 제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 군단위 농민운동가들이 상당수 삼청교육대로 끌려간다.
기농과 가농이 이른바 「빨갱이」로 몰렸기 때문에 80, 81년엔 정체된다.
결국 5.18이후 농민운동은 성격변화를 맞게된다.
민주화운동이 반미성향을 띠고 통일운동을 지향하는 변혁운동으로 발전하고 농민운동도 가농.기농의 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농민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82년부터 마을단위 농민회 조직이 건설된다. 다시 농지세, 수세투쟁이 시작된다.
충북 음성군 부당농지세 시정투쟁은 5.18이후 가혹한 탄압을 뚫고 나온 최초의 대중적 지역투쟁으로 대중성 확보를 통한 조직정비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된다.
농협민주화 1백만 서명운동이 82년 중반까지 전개되고, 83∼84년 미국 소 가잉도입으로 인한 소값폭락에 따른 피해보상,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투쟁 등이 이어지면서 농민운동은 대중조직운동으로, 뿌리를 내린다.
소값투쟁은 85년 4월 23일과 24일 기독교농민회원들이 주도한 미대사관 진입시위라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고 전국적으로 7, 8월까지 계속된다.
가농은 이때부터 군농민회 조직을 건설하고 86, 87년엔 기존의 경제투쟁단계를 뛰어넘어 군부독재타도를 농민생존권에 결합시키는 변혁운동으로 농민운동을 자리매김시킨다.
수입개방저지 미국예속정권 타도를 부르짖은 86년 4월 19일의 무안지역투쟁은 농민운동 최초의 정치투쟁 형태로 다른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같은 투쟁을 거치면서 농민운동은 자주적 대중조직에 나서 87년초 전국농민협회가 창립되고 89년 2월 13일엔 여의도 대집회를 치러내며 역량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90년대부터는 쌀값. 수매량.수입개방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군농민회를 중심으로한 전국농민회가 결성돼 변혁운동의 면모를 드높인다.
<배승화 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