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길었던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린다. 불교에 귀의하려는 누군가가 그럴 때나 군입대를 앞둔 누군가가 그럴 때에도 뭔가 울컥하는 게 있는데, 그 사람이 암에 걸린 상황이라면 오죽할까. 흔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암환자가 머리를 깎는 장면은 머리가 다시 자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즉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그의 상황을 대변하는 장면으로 많이 쓰인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50/50>은 그런 상황을 연출하는 영화다. 한창 젊을 때이고,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인생을 달려온 청년이 악성 종양에 걸려서는 항암치료때문에 머리를 미는데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며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니, 그 이유는 바로 영화가 병을 품을 주인공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었다. 맞다. 하물며 실화인데도, <50/50>은 병에 걸린 주인공을 보며 눈물짓긴커녕 웃음을 짓는다. 다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다. 아픔을 껴안는 웃음이다.
20대 후반의 청년 애덤(조셉 고든-레빗)은 술, 담배도 안하고 아침마다 꼬박꼬박 운동도 챙겨 하며 철저한 자기 관리 속에 미래를 성실하게 닦아 왔다. 그런데 그에게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진다. '말초신경초종양'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암이 그를 덮친 것이다. 결코 암에 걸릴 이유가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왜 그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나, 애덤은 당연히 좌절한다. 그러나 주변상황은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몹시도 긍정적인 절친 카일(세스 로건)은 그의 병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병을 여자 꼬시는 데 활용하기까지 한다. 심리치료 받겠다고 찾아간 초보 심리치료사 캐서린(안나 켄드릭)은 오히려 평안은 커녕 불안감만 조성할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여자친구 레이첼(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은 아픈 그를 두고 바람까지 핀다. 상황만 놓고 보면 이건 완전히 절망의 낭떠러지 위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희망은 반드시 조금이라도 있는 법이다.
<50/50>은 암에 걸린 젊은이의 '투병기'가 아니다. 그저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젊은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을 쓴 시나리오로 젊은 감독과 젊은 배우들이 모여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 어둡고 우울하지 않고 오히려 생기 넘친다. 암환자의 이야기를 오히려 젊고 밝은 에너지로 가득 채워서, 생에 대한 의지는 더 활기차게 빛나고 감동은 어느새 잔잔하지만 오랜 파동으로 다가온다. 영화를 보면 할리우드에서 연기력 면으로 눈여겨 볼 만한 젊은 배우들이 여럿 모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주인공 애덤 역을 맡은 조셉 고든-레빗이 선두에 서 있다. 여전히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에서의 아역 연기가 눈에 선한 그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깊은 연기를 매력으로 떨칠 줄 아는 배우가 되었다. 시나리오 덕도 있겠지만, 그의 연기 덕분에 우리는 영화 속 애덤에게서 아무렇지 않은 듯하지만 속으로는 오만가지 번뇌가 다 들 복잡한 속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와 호흡을 맞추는 친구 카일 역의 세스 로건이 보여주는 코믹 연기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병에 걸린 당사자와는 너무 다르게 태평한 듯 보이는 카일의 모습은 영화가 주는 중요한 웃음 요소 중 하나다. 그런 모습을 세스 로건은 그가 <사고친 후에> 등 기존 코미디 영화에서 보여준 '여자만 밝히는 철부지'의 이미지를 보다 성숙하게 계승함으로써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의 역할은 이 영화에서 단순히 '감초'에만 머물지 않고 영화에 결정적인 에너지와 메시지를 불어넣는 필수 불가결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와 함께 은근 이중적인 모습의 여자친구 레이첼 역을 연기한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 어수룩한 심리치료사 연기를 풋풋하면서도 솔직하게 해낸,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는 어디까지나 벨라의 절친 중 한 명이지만 그 밖의 영화에선 매우 주목받는 젊은 연기파 배우 안나 켄드릭도 눈여겨 볼 만하다. 애덤의 어머니로 특별출연에 가까운 비중이지만 존재감 있게 등장하는 명배우 안젤리카 휴스턴의 연기도 놓치면 아쉽다.
앞서 얘기했듯, <50/50>은 암에 걸린 애덤의 '투병기'에 집중하지 않고 다만 병으로 인해 조금 달라진 '삶'을 따라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병의 위력을 실감케 하기보다 그로 인해 변해가는 애덤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하게 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그러하듯이, 영화 속 애덤의 삶 또한 그가 암에 걸렸다고 갑작스럽게 주변 상황이 모두 우호적이고 사람들이 다 숙연해지는 건 아니다. 친구는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여자친구는 성심성의껏 간호해줄 것 같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현실을 잘 보여준다. 카일은 친구라는 놈이 애덤이 항암치료를 위해 머리를 자르겠다니까 징그럽다며 주책맞게 눈을 가리니 마니 하고 앉아 있다. (사실 이 장면이 웃긴 건 그의 책임이 매우 크다.) 여자친구라는 아이는 남자친구가 병에 걸린 상황을 오히려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시기로 여긴다. 심리치료사는 자신의 마음을 좀 잘 어루만져줄 줄 알았더니, 이상한 매뉴얼들에만 익숙해서는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면서, 애덤이 암에 걸렸다고 그의 삶이 비단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방향으로만 변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때론 더 번잡해지고, 때론 더 약오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장되지 않은 삶의 변화 속에서 애덤은 삶에 대한 깨달음 또한 자연스럽게 얻는다. 애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신파적이고 극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암 선고 이후 새롭게 갖게 되는 관계 덕분이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암에 걸렸고, 더 오랜 세월 투병했기에 더 아파할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만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걸 저주처럼 여기기보다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인 것처럼, 자신이 얻게 된 또 하나의 특징인 것처럼 병을 향해 화내지 않고 또 다른 시련처럼 웃으며 삼키고 버티는 사람들. 병마에 위협당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그들을 보며 애덤 또한 깨닫기 시작한다. 앞으로의 삶은 병마에 의해 일방적으로 떠밀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애덤이 카일에게 암 선고를 알리며 생존확률이 50 대 50이라고 하자 카일은 절망에 빠져 있는 애덤 앞에서 실없는 듯 들리는 소리를 한다. '카지노에서는 최고의 확률이잖아!' 애덤은 당연히 '죽을 확률이 50%나 된다'는 사실에서 절망을 내뱉었을 것이고, 카일은 반대로 '살 확률이 50%나 된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가 늘 내일도 살아있을 확률을 100%인 양 생각하지만 실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카일의 이 소리가 마냥 실없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소의 우리 삶보다 생존확률은 높은 셈이니까.
애덤이 암에 걸린 후, 친구는 그를 이용해 연애를 수월하게 하려고 하고 애인은 바람을 피는 등 순탄치 않은 상황이 이어져 마치 애덤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화가 애덤이 품고 있는 병을 우습게 알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것에 대해 품고 있는 지나친 공포, 그로 인해 겪게 될 지나친 좌절의 부피를 줄여주기 위함인 듯 하다. 애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애덤이 품은 암과 거의 동등한 크기로 다루는 영화의 담담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생각해 보자. 애덤은 무거운 병을 선고받았지만, 그뿐이지 그의 죽음을 선고한 것은 아니다. 생존확률은 반반이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애덤의 생각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살지 모른다'는 건 생각지 않은 채. 심한 좌절은 마음에서만 끝나면 모를까 그것이 행동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이다. 그런 점에서 애덤의 병에 큰 무게를 싣지 않은 영화의 태도는 이런 독을 빼내려 한다는 뜻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남의 아픔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구라도 마음의 선택을 잘 한다면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병이 드리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침잠할 것인지, 아니면 잠깐 지나가는 먹구름이라 여기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에 대한 선택 말이다. 누구라도 애덤을 내일 모레 죽을 사람처럼 대했다면,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그만큼 자신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병을 가벼이 여기고, 그걸 버텨낼 자신의 가능성을 더 무겁게 여기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애덤은 침잠하기보다 변화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택했다.
<50/50>은 결국 그 어떤 극단적 상황도 '단정'짓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건 분명 좋을 것이다, 분명 나쁠 것이다라고 단정지으며 그 예측에 흔들리는 것보다, 언제나 반반의 가능성을 놓고 거기서 자신의 선택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존확률이 50%인 병에 걸렸다고 난 죽을 확률이 50%라며 주저앉기에 급급하지 말고, 그저 다음에 뭘 할지 정하라는 것.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나의 선택이 진짜 삶을 보여줄 것이라는 걸 이 영화는 알고 있다. 영화가 주는 웃음과 감동도 거기에 걸맞게 반반씩 어우러져 있다. 웃기지 않더라도 유쾌할 것이고, 눈물 나지 않더라도 뭉클할 것이다.
첫댓글 이 영화 지난주에 봤는데,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맛본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