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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과 Saga의 땅 아이슬란드(2015.07.01-10)
7월1일 수요일
일찍 기상하고도 꿈지럭거리다가 10분 늦게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우리가 중간 정도는 되는 듯하다.
등산반 멤버들은 생각보다 젊은 편이었다. 4-50대가 주축인 듯하여 우리가 오히려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것 같다.
공인회계사회 등산반은 매년 해외 기획산행을 추진하고 있었다. 따로 가보기 힘든 곳으로 잘
준비하여 법인에 있을 때도 한 번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공회에 근무하게 되었으니 공무의 의미도 일부 있겠다는 생각에 참가를
신청하였다. 뒤늦게 신청을 하였는데도 받아주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한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이슬란드에 관심을 보이던 아내까지 권유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초면이라 잘 지낼 수 있을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10시 20분 헬싱키행 핀에어(AY 042편)에 탑승하였다. 핀에어 기내식은 나름대로 특색이 있어 봐 줄만 하였으나 이어폰 성능이 엉망이라 기내 영화는 포기하고 말았다. 눈이 피로하여 독서도 만만치 않고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이코노미석은 만석으로 옴짝달싹하기 어렵다. 그래도 8시간 남짓 걸리는 헬싱키행 항로는 유럽으로 가는 여행경로로 손색이 없다. 아내의 권유로 헬싱키공항 면세점에서 티셔츠를 하나 구매했다. 원래 가격표에 정가가 159유로로 되어 있으나 30% 할인 행사에 부가세 면세까지 하고 나니 90유로가 조금 안되었다. 그래도 적지 않은 가격이나 아내의 강권에 카드를 꺼내고 말았다. 헬싱키 공항은 지난 11월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사 중이다. 아이슬란드로 가는 연결 항공편은 헬싱키발 AY 6817편으로 15:35분에 출발하였다. Icelandair가 운항하고 핀에어가 코드쉐어 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이어폰이 아예 제공되지 않고 (각자 지참한 이어폰이 있으면 기내 영화는 관람할 수 있다), 소프트 음료 외에는 간단한 스낵도 요금을 지불하여야 한다. 시장끼가 느껴져 바케트에 치즈를 끼운 빵을 6유로 주고 사서 아내와 나누어 먹었다.
현지 시간 15:55에 레이캬비크에 도착하였다. 케플라비크(Keflavik) 공항은 비좁고 수수한 편이었다. 그래도 오가는 인파는 많다. 이곳이 유럽과 북미의 중간 정도 되는 위치라 여기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여행객도 꽤 있는 듯하다. 우리 앞줄 좌석의 미국인 가족도 미국행 연결편을 이곳에서 타는 눈치였다. 한국에 돌아가자 마자 바로 그 일요일에 뉴욕으로 출장 갈 일을 생각하니 레이캬비크에서 바로 가는 일정을 수배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아이슬란드 트래블의 전홍필사장이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전사장은 45세라고 하는데, 아직 싱글이고 머리를 짧게 밀어 젊어 보인다. 여행 가이드 출신으로 아이슬란드에 꽂히어 직접 여행사를 차렸고, 자칭 최초의 아이슬란드 전문 여행사라고 소개한다. 우리 일정이 산장에서 머물며 트래킹을 할 계획이라 식사를 직접 해결하여야 하는데, 당초에는 한국에서 요리사를 수배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으로 오지 못하였고, 대신 현지를 여행 중인 여행작가가 우리의 식사 준비를 도와줄 예정이라고 설명을 한다.
공항에서 들어가는 길에 보라색 루핀꽃이
널리 피어있다. 좌우가 화산 용암이 펼쳐진 지역에 이끼만 살짝 덮힌 황량한 벌판이었는데 그 척박한 땅에도
꽃을 피운 루핀은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식물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여름철에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라는 겨울철에만 나타난다고 하여 포기하였고 대신 공기가 깨끗한 이 나라 산속의 숙소에서 여러
날을 보내니 은하수를 볼 수 있겠다고 기대하였는데 해가 지지 않으면 별도 당연히 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첫 일정으로 블루라군(blue lagoon)을 들렸다. 여기는 용암지대에 형성된 거대한
야외 온천장이다. 공항에서 20분 거리라 오며 가며 들리기
좋은 곳이다. 주차장에 차들이 그득하다. 준비해 온 수영복을
입고 입장하였다. 타월은 각자 지참하여야 한다. 락카 시스템이
불편하였다. 손목에 찬 옷장 키를 인지하는 인식기가 공용이라 자신의 옷장 문을 닫자마자 재빨리 자신의
밴드를 인식기에 대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다른 사람의 밴드가 내 옷장 번호를 인식해버려 애를
먹는다. 거금(6만 5천원)의 입장료를 받는 걸 고려하면 락카 시설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푸른빛이
도는 뽀얀 물은 몸을 담그기 적당한 온도였다. 김이 계속 올라오는 온천물을 오가며 노독을 씻기에 좋았다. 맥주도 한잔하고, 머드팩도 하며 느긋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온천에 카메라를 소지할 수 있어서 방수팩이 있으면 핸드폰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6시20분이 지나자 슬슬 일행들이 퇴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이슬란드의 주 산업은 수산물가공업이라고 한다. 대구잡이로 큰
나라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대구잡이에 대한 규제를 피하려고 EU 가입도
포기하였다. 예상외로 관광업은 20퍼센트 정도의 비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전력이 풍부해서 그런지 알루미늄 정제업도 유망한 업종이라고 한다. 전체 32만명 인구에 면적은 남한만한 크기인데, 22만 명이 레이캬비크에 거주한다. 6월까지도 비와 눈으로 내륙지방으로
가는 도로가 폐쇄되고, 올 해도 이런 이유로 트레킹을 포기한 팀이 다수라고 한다.
아이슬란드어로 'Vik'는 '만'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비크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심지어 ‘비크(Vik)’라는
마을도 있다. 레이캬비크도 항만으로 '레이캬'는 '안개낀'이란 의미이고, 따라서 레이캬비크는 ‘안개낀 만'이란
의미가 된다. 200년전에는 불과300명만 거주하였고, 100년전에는 5천명이던 것이 2차대전
이후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은 에이샤산으로 고도는 970미터 정도이고 여름인데도 군데군데 눈이 남아있다. 정상에는 평평한
지형이 20킬로나 이어진다고 한다.
숙소인 Center Hotel Klopp에 먼저 체크인(206호)하고 짐만 던져 두고 바로 나와 도보로 식당(Kol)으로 향했다. 식당은 유명한 할그림스키르캬(Hallgrimskirkya) 교회 바로 앞에 위치한 곳이었다. 겉에서 보기엔 작고 허름해 보이나 일단 들어가니 꽤 넓고 나름 엣지가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하층으로 안내되었는데 우리는 마침 바로 주방이 보이는 좌석에 앉아 요리를 준비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스탭들의 모습을 즐겁게 관찰할 수 있었다. 개방식 주방이라 신경을 쓰는지 쉐프들이 주방을 나름 깔끔하게 정리해가며 분주히 움직인다. 어떤 요리는 가스불로 음식에 직접 총을 쏘듯이 가열한다. 저녁식사는 5코스 요리였는데 내가 주문한 대구보다 아내가 선택한 양고기가 맛이 나았다. 라이빵은 기대보다 별 맛은 없다. 10명이 앉은 우리 테이블은 우덕기 회계사가 와인을 사는 바람에 모두들 기분 좋게 와인을 곁들여 저녁을 즐겼다. 등산회는 2000 년부터 해외산행을 해오고 있었다. 진행할수록 오지여행 쪽으로 가고 있는데 벌써 내년 산행을 고민하길래 우즈베키스탄과 터키 등을 추천해 주었다. 김광만 회장은 산장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을 테니 일행이 술만 축낼 테고, 그러니 과연 술을 얼마나 장만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저녁 후 각자 산책을 하였다. 우리는 먼저 할그림스키르캬 교회를 둘러보고 그 교회로부터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니 레이캬비크의 중심가(Laugavegur)와 만나게 된다. 중심가를 따라 더 내려가니 1990년대까지 총리 집무실이었던 건물(Government building)이 나오고 멀리 Harpa 건물과 항구가 보인다. 10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낮과 같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관광객이 다수 보인다. 길 양 옆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와 바가 보이고 관광용품 가게는 문을 닫았다. 레이캬비크 중심가는 걸어서 약 10여분 정도면 오갈 수 있는 작은 규모였다. 간단한 산책으로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사진을 보며 상상한 것과 달리 외관은 온통 콘크리트로 건축된 건물)와 문화와 공연센터 하르파도 건지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교회 앞에는 콜롬부스 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였다는 레이뷔르 에이릭손의 동상이 자랑스럽게 서있다. 시차에 빨리 적응할 욕심에 최대한 버티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7월2일 목요일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은 깨었으나 좀더 침대에서 버티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4시이다. 그때부터 침대에 누워 뒤척거렸다. 창 밖은 벌써 파란하늘이 보이는 게 이미 대낮 같다. 7시에 조찬을 하였다. 건강하고 거친 음식을 중심으로 차려진 아침이다. 식사 후 중심가를 다시 한바퀴 산책하였다.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한 도시답게 골목이 들쑥날쑥 하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돌기둥과 바닥들을 살려 새롭게 시가지를 정비한 곳이 많다. 시가지 곳곳에 조각품이 서 있고, 건물의 한쪽 벽면에 벽화를 그려 넣은 곳도 있어 제법 다채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살짝 쌀쌀함이 느껴지는 청명한 가을 날씨로 스웨터가 필요할 듯하다. 벌써 발이 무겁다
버스가 9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우리가 사탕과 쵸콜렛, 껌 등을 내놓으니 총무가 반가워해서 내 마음도 기뻤다. 오늘은 이곳의 최대 관광지 골든써클을 여행하는 날이다. 먼저 싱벨리어(Pingvellir, 아이슬란드어 알파벳 중에 ‘p’와 ‘b’를 합성한 듯한 글자가 있는데 영어의 ‘th’와 유사한 발음을 한다고 한다) 국립공원을 방문하였다. 이 공원은 레이캬비크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었다. 아이슬란드에는 870년부터 노르웨이인을 중심으로 스코틀란드인들도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이주지에는 왕도 없었고, 이곳을 지배하려는 인근 국가도 없는 자유지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체적으로 법과 규율을 정할 필요가 자연스레 생겨났다. 이런 문제들을 논의를 하기 위하여 주민대표들이 일년에 한차례 모여 회합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930년경부터 시작된 아이슬란드의 국회가 있었던 장소가 바로 싱벨리어로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국회라고는 하나 여름에 2주 정도 한 장소에 주민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교류도 하는 일종의 주민 회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인공암벽을 병풍처럼 쭉 세워 놓은 것 같은 화산절벽이 계속되다가 그 앞쪽으로 둥그런 반원을 그린 장소가 나타나는데 바로 거기가 국회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자연의 혜택을 듬뿍 받은 아이슬란드에 좋은 장소가 수없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런 장소에서 회합을 가졌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한 학생그룹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앉아있다. 이곳 국민들에게는 성스런 장소가 될 것 같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여기에 거대한 두 개의 지각판이 갈라지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유라시아판과 아메리카판이 만나고 갈라지는 곳이 이곳이었다. 지금도 매년 2 센티미터씩 두 판이 갈라지고 있다는데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어떤 상황이 될는지 궁금하다. 대륙과 바다를 떠받치는 지각판을 움직이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할 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지각판이 갈라지는 위로 눈 녹은 물이 호수를 이루고 거기에서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는 데, 거기가 어딘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동안 달려도 들판에 가축이 거의 없다. 광활한 평야에 가끔 말 몇 마리에 양도 서너 마리 정도이다. 개울이 흐르는 지대로 진입하자 목장다운 풍경들이 나타난다. 아이슬란드 국토의 5 퍼센트 정도만 목초지가 가능한 대지라고 한다. 초지 지대도 목초지 정도가 형성되어 있고 곡식을 재배하는 곳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점심 예약이 11시라고 하여 서둘렀다. 식당은 싱벨리어에서 25분 가량 걸리는 게이시르 관광센터 내 카페테리아이었다. 메뉴는 야채를 넣은 양고기 수프와 빵으로 간단한 식사였다. 이것이 아이슬란드의 일반적인 점심이라는데 무척 소박한 식단이다. 그래도 이 지역 맥주를 곁들이니 먹을 만 하였다.
식당 건너편에 유명한 간헐천 게이시르(Geysir)가 있었다. ‘Geysir’는 원래 이곳 언어로 ‘Gusher’를 의미하는 단어이었는데, 이곳의 간헐천이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이제는 세계적으로 ‘geysir’가 ‘간헐천’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 되어버렸다. 게이시르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7-80 미터까지 솟아 올랐었는데 지금은 2-30 미터 정도로 솟는 높이가 줄었다. 게이시르가 어떻게 솟아오르는지는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기반이 되는 바위에 길고 좁은 파이프 구조가 형성되고 거기로 유입된 물이 대지의 열기에 끓는 점까지 도달하고, 그런 물들이 웅덩이 부분에 충분히 축적되면 일정 시점마다 분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가서 멋진 장면을 사진에 담으려고 기다렸으나 아쉽게도 제대로 된 사진은 건질 수가 없었다. 간헐천은 불규칙적으로 자주 터지는 편이라 좀 더 끈기 있게 기다리면 누구나 좋은 작품을 얻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게이시르에서 20분 거리에 굴포스(Gullfoss)가 있었다. 폭포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엄청난 규모의 수량에 숨이 막힐듯하다. 굴포스의 장대한 모습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버금가는 듯하다. 굴포스는 34 미터로 낙차는 큰 편이 아니지만 폭이 상당히 넓어 여름철에 초당 2-3백 입방미터의 물이 쏟아지는 규모를 자랑한다. ‘foss’는 ‘폭포’를 의미하는데 여름철에 아이슬란드에는 foss라 할 수 있는 물줄기는 실로 수 천 곳을 넘을 것 같다. 굴포스는 황금 폭포라는 뜻이다. 폭포 바로 옆에 돌출된 커다란 바위가 있어 마치 테라스처럼 안성맞춤으로 관광객들에게 최적의 관망장소를 제공한다. 늘 물에 젖어 있는 테라스에 올라서면 폭포를 바로 옆에서 숨죽이며 바라볼 수 있다. 빙하가 녹은 물의 규모가 엄청나다. 여기서는 누구나 물보라인지 빗방울인지 뒤섞인 물방울의 세례를 받으며 걸어야 한다. 계단위로 올라가니 폭포에서 멀어지지만 전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멀리 산 위에 쌓인 빙하가 그 너머 다양한 색상의 하늘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저 빙하가 호수까지 내려오는데 40에서 8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젖은 몸도 말릴 겸 인근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하였다. 이 동네는 화장실이 드물고 대부분 유료이어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화장실 꼭 이용해야 한다.
3시 10분 산장을 향해 출발할 무렵 다시 해가 나왔다. 약 30분 간 다음 쇼핑(주류 및 생필품)을 위해 잠시 정차하였다. 이 동네에 버섯이며 채소를 지열로 키우는 온실이 있었는데 낮에도 백열등을 환하게 켜 두었다. 슈퍼마켓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게였는데 대구포를 팔고 있는 게 특색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최초의 야외 온천, Secret lagoon을 잠시 둘러 보았다. 이 온천은 아담한 규모에 작은 간헐천도 있고 주위 풍광도 뛰어나서 많은 멤버가 블루라군 보다 낫다고 평한다. 끓는 간헐천을 보며 마켓에서 계란을 사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숙소인 홀라소구르 산장(Holasogur Hut)에 도착하여 보니 우리팀은 산장의 1 층을 사용하게 되었고, 2층에는 스웨덴인 20명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침실은 아래에 일인용 침대 두 개가 마주하고 위에 가로로 1-2인용 침대가 놓인 unit이 한쪽에 4개씩 총 8개가 마련되어 있다. 2층을 1인이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총 24인 자리가 있는 셈이라 마지막 한 분, 강순석 회계사는 보조 침대를 놓아 겨우 자리를 채웠다. 우리 부부는 안쪽 두 번째 아래칸에 자리를 차지하였고 2층에는 최관 교수를 모셨다. 가운데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식탁을 겸하였다. 문제는 샤워실과 화장실이 각각 남녀 한 개씩뿐인 점이다. 샤워는 트래킹 후 온천을 들려 해결하면 어느 정도 되겠으나 화장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층에는 화장실만 달랑 하나 있으니 20 명의 스웨덴팀도 틈만 있으면 아래층 화장실을 노릴 것이 분명하였다. 여기서 어떻게든 4일밤을 버텨야 했다.
산장은 남쪽으로 눈 덮힌 헤클라(Hekla) 화산을 마주하고 서있고 뒤편에 나즈막한 화산암 벽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으며 더 뒤로는 넓고 평평한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다. 바로 앞으로는 나소 낮은 지대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이 고여있었다고 한다. 가옥이 들어선 위치로 보자면 앞쪽에 낮은 지대를 바라보고, 뒤에는 암벽이 바람을 막아주는 명당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2백미터 우측으로 흰색 마굿간이 있어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 한 떼의 승마체험팀이 돌아오고 있었다.
여행사 전사장이 산장의 상황이 예약 시 예상한 것과 다르다고 사과했다. 산장에 수용 가능한 인원이 25명이라고 하여 참여자를 제한하기 까지 하지 않았던가? 와서 보니 산장의 2층까지 모두 빌려 아이슬랜드에 오고 싶어하던 모든 분들이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모두들 탁자에 둘러앉아 식전주가 벌어졌다. ‘酒光’스님을 자처하는 박성근 대표가 노련하게 분위기를 주도한다. 모두들 집행부가 수고하셨노라고 격려를 한다.
저녁은 전사장과 서울서부터 함께 온 백경하대표, 그리고 여행작가(강은경) 셋이서 닭조림과 도리탕을 기반으로 하여 한식으로 준비하였다. 아내가 준비한 볶음고추장이 빛을 발했다. 밑반찬이 부족하고 다소 어설퍼 보이는 식단이었지만 여럿이 함께 하니 제법 즐거운 저녁이 되었다. 저녁 후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틈을 봐서 간단히 세면을 하였다. 5-6 명 핵심 주당들이 술자리를 밖으로 옮길 때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10시가 넘었는데도 대낮같이 밝다. 잘 봐주어 오후 4-5시쯤 되어 보인다. 방 그득히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먼저 잠드는 수밖에 없다.
7월3일 금요일
얼핏 눈을 뜨니 2시 22분. 창 밖을 보니 아직도 해가 서편하늘에 걸려있다. 마치 해가 뜬 후 1시간 정도 지난 즈음 같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으나 빗방울 속에도 테라스로 나가 사진 몇 장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보냈더니 아들이 즉각 반응한다. 백야가 멋있다고.
3시에 다시 누워 잠을 청해도 한번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질 않는다 옆의 아내는 잘도 자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뒹굴다가 5시에 일어났다. 제각기 기상시간이 달라서 의외로 샤워장과 화장실이 사용할 만 하다. 20명이 사용하는 남자화장실 보다 5명이 쓰는 여자화장실이 이용하기 편리하다. 머리까지 감고 나니 개운하다. 이제는 대부분 기상하여 분주한 분위기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인장이 불통이라던 wifi가 이제는 작동된다고 엄기영 회계사가 좋아한다.
7시가 채 못되어서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부인들이 서빙을 도왔다. 노석미 총무가 새벽부터 아침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빵과 햄, 토마토, 애플주스 등 훌륭한 아침식사였다. 우리가 가져온 카누커피와 김연아 커피믹스도 인기가 있었다. 식사 후에도 9시로 예정된 출발시간까지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다. 내일은 한 시간 먼저 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버스가 예정보다 일찍 와서 10 분 먼저 출발하였다. 아침에 바람도 강하고 쌀쌀하여 두껍게 입었는데 기온이 빠르게 상승하는지 버스를 탈 무렵에는 많이 온화하여진다. 하늘에 구름은 있으나 햇살이 강한 쾌청한 날씨로 마치 한국의 가을날씨와 같다.
란드만날라우가(Landmannalaugar)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데 절반은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한다. Sigolduvirkjun수력발전소 댐을 지나자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이 도로가 열린 지 겨우 열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 길이 다져지지 않아서 돌이 많고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 좌우로 화산암만 널려있는 황량한 풍경이 마치 외계 혹성 영화를 위한 세트장처럼 보인다. 그 틈에도 작은 식물이 간혹 보이고 아주 가끔 분홍색 꽃도 피어있다. 매우 작은 꽃잎이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군데군데 잔설이 보이는데 7월인데도 몇 미터씩 두터운 상태이다. 일부는 가파른 절벽에 붙어있는데 어찌 저런 상태로 남아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어느 모퉁이를 돌자 멀리 란드만날라우가 캠핑장이 보인다. 버스가 그리로 접근하자 작은 시내가 나타나는데 일반 차량은 건너지 못하여 시내 이쪽에 주차하였고 차체가 높은 버스들만 시내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런 시내를 지나려면 바퀴와 함께 머플러가 높아야 하는 게 필수였다. 우리 버스를 비롯하여 Inland용 버스는 마치 탱크처럼 튼튼해 보인다. 캠핑장은 황량한 돌밭에 군데군데 텐트들이 서 있고 아직 기온이 낮아 썰렁해 보인다. 주위를 흐르는 시냇가에 노란 민들레 같은 꽃들이 흩어져 있다. 관리사무실이 있는 건물과 함께 샤워장을 겸하는 화장실 건물이 보인다.
산행을 간단히 준비하고 11시로 예정된 출발을 대기하는 동안 멤버들 표정에 긴장감이 살짝 돈다. 란드만날라우가는 해발 590 미터에서 위치하고 있는데 Laugavegur를 비롯하여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많은 하이킹 트레일의 시작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여기서 출발하여 쏘르스목(Porsmok)까지 가는 3박 4일짜리 트레킹 코스가 유명하다. 우리도 당초에는 이 코스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의 산장을 예약하기 어려워 대신 홀라소구르 산장에 베이스 캠프를 차려놓고 주변의 당일 코스를 세가지 다녀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뒤에 알려졌지만 쏘르스목으로 가는 트레킹 코스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서 그리고 갔던 등반팀들이 모두 구조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현지 가이드 욘의 리드를 따라 출발하자 마자 가파르게 오르더니 'lava'라고
하는 화산용암지대를 통과한다. 이 지대는 1480년대 화산폭발시
용암이 분출되어 형성된 곳으로 아직도 식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노천수가 라바지대에 스며들며 덥혀져
캠핑장 부근에서 노천 온천탕을 형성한다. 중턱에는 수증기만 분출하는 마른 온천도 있다. 눈이 덮힌 지대를 통과하고 가파르게 올라 붉은빛이 도는 산, Brennisteinsalda정상에
오르자 바람이 세다. 이 산은 해발 881 미터 높이에 유황봉우리라는
별명이 있는데 실리콘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이 섞여 여러 가지 독특한 빛깔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산장에서 챙겨 온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본래 건너편에 검은빛이 도는 더 높은 봉우리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그 봉우리에는 눈이 많이 덮힌 게 우리에게 힘들 것으로 보였는지 현지 가이드(욘과 아우스디스)가 다른 코스를 권하니 이들의 권고대로 코스를 조정하였다. 일단 라바지대 옆에 형성된 평지로 내려오자 아내는 거기서 야영장으로 하산하겠다고 나선다. 아내의 등산 실력으로 보아서는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온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올 봄에 실내 자전거를 좀 타더니 그나마 다리 근력이 증강된 덕분인 것 같다. 마침 다른 두 부인들도 내려가겠다고 하여 세 여인은 먼저 하산하였다. 평야지대에는 눈 녹은 물이 여러 갈래 시냇물을 이루어 내려가는데 이들을 통과하려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건너야 했다. 그런데 물이 너무 차가워서 처음에는 발이 굳는 듯하다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차 마비가 되는 느낌이 든다. 발바닥은 날카로운 돌들이 사정없이 찔러대고 중간쯤에서는 저길 어떻게 건너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간신히 시내지대를 통과하자 바로 가파른 비탈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등산에서 가장 힘든 부분 중의 하나가 애써 높은 지대에 올랐다가 일단 내려온 다음 다시 다음 번 봉우리를 오르는 것인데 오늘이 바로 그런 식이었다. 선두그룹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따라가도 욘은 무척 빨리 앞서 간다. 주위에 식물도 거의 없고 날카로운 돌들만 미끌대는 능선 코스를 계속 걷는다. 거의 다른 혹성을 걷는 느낌이다. 그 척박한 틈에도 아주 작은 보랏빛 꽃을 피운 녀석이 있어 이름을 물으니 람그라스라 하고, 꽃잎을 따서 차로 다려 먹으면 혈액 생성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양들이 좋아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봉우리를 수없이 오르고 돌다 보니 마침내 저 아래 평야지대가 보이고 라바지대 끄트머리에 캠핑장이 반갑다. 그러고도 꽤 능선을 따라 진행한 다음에야 하산하기 시작한다. 역시 하산은 힘겹다. 한참을 내려오니 무릎 근육이 신호를 보낸다. 어느 중턱을 지나는데 갑자기 산에 홀로 앉아 있는 서양여자가 나타난다. 그것도 비키니를 입었는지 상반신은 거의 드러내고. 옆을 지나자 인사말도 건낸다. 아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이슬란드의 요정인가? 전사장 설명이 아이슬란드 사람들 중 50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데. 하산길은 빨랐다. 순식간에 도로까지 도달하였다. 길가에 앉아 쉬면서 어느 방향으로 프레임을 잡아도 모두 그림 같은 풍경이다.
야외 온천물이 온도가 낮다고 하여 온천 목욕은 포기하고 샤워만 하였다. 샤워장에 비누나 샴푸가 없고 동전 500 크로네를 넣으면 그 순간부터 5분간 더운물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비누가 없어도 5분 동안 온 몸으로 더운물을 받았더니 훨씬 개운하다.
산장으로 돌아오자 바로 저녁상이 차려졌다. 어수선한 사이에 샤워실로 가서 머리까지 감고 나니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아내도 샤워를 하느라 저녁상에 늦었다. 오늘은 대구탕이 주메뉴인데 어쩐지 간과 양념이 어설픈 것 같다. 시원한 맥주 한모금이 하루의 피로를 덜어준다. 민병수 회계사는 맥주 마니아다. 심지어 아침식사 때도 어디선가 맥주를 찾아내어 올려 놓는다. 내일은 가볍게 2시간 걷는 정도라니 기대가 된다. 오늘은 주당 규모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등산회 고참들만 모여 왕방울 목소리로 등산회 발전방안에 대하여 갑론을박하고 있다. 가능한 버티다 11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7월4일 토요일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게 2시 조금 지나서였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5시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수면량에 비례하여 어제보다 훨씬 컨디션이 낫다. 로비에는 늘 일행 중 누군가 나와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어제 새로 들어온 위층 서양팀으로부터 조용히 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받아 든 아침메뉴는 카레라이스였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는 언제나 맛스럽다.
예정된 2시간 관광코스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회원들이 있어 버스팀과 워킹팀으로 나누기로 하였다. 워킹팀은 숙소부터 걸어간다. 버스팀은 9시 10분 출발에 대기하는 동안 오늘의 기사 아우스디스가 자신이 53세라고 밝히니 모두들 놀란다. 오늘은 버스가 숙소 뒷편 고지대로 올라간다. 황량한 들판에 비포장도로를 터덜거리며 간다. 10분쯤 가니 먼저 출발한 워킹팀이 저만치 앞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걷는 게 실증이 났는지 모두 버스에 올라탄다. Haifoss에서부터 3-4시간 걸어내려 가는 길이 있어 거길 가기로 했단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려 조금 나아가니 계곡이 나오고 엄청난 수량의 Haifoss가 나타난다. 주 폭포는 두 개이고 실 폭포도 세 개가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하이포스는 높이가 110 미터에 이르는 좁고 길게 떨어지는 폭포이다. 이런 황량한 벌판 안에 이런 비경이 숨겨져 있다니! 폭포는 5십 미터 전에서도 그 존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춰져 있는 구조라서 그야말로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지역을 쏘르사르다루르(Pjorsardalur) 계곡이라 한다.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바닥을 가늠해 보려고 언덕 끝까지 다가 가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고도차가 높은 폭포이나 여름 한철만 접근이 가능하고 내륙에 있어 일반 관광코스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비장의 폭포이다.
전망포인트만도 여러 개라서 옮겨 다니며 정신 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워킹팀 19명은 저멀리 내려다 보이는 평원지대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하고, 황인근, 조남석 그리고 우리 부부만 남아 서로 커플사진을 찍어주며 마치 허니문을 온 듯한 분위기로 느긋한 시간을 즐겼다. 일반인이 잘 들르기 어려운 비밀보석을 얻은 듯 뿌듯한 마음을 안고 내려와 산장에 들렸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여 커피와 지열로 구운 라이 브레드도 맛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산장은 하이포스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뒤로 돌언덕이 바람을 막아주고 앞으로 낮은 지대가 있는 좋은 위치였다. 앞의 저지대는 다른 계절에는 물이 차서 승용차로는 못 들어 온다고 한다. 큰길에서 하이포스까지 모두 비포장인데 이 나라에서는 왜 자갈보험 옵션이 필요한지 이해가 된다.
다음 방문지는 스튕(Stong)이었다. 이곳은 10-11 세기 초기 이주민들의 가옥을 재현한 곳이다. 건물은 돌로 쌓은 기초 위에 흙이나 얇은 돌을 여러 겹 쌓아 올려 두터운 벽을 형성하였고 그 위에 지붕을 얹어 사용하였다. 또 한 채의 재현 건물은 지붕에 흙을 붙이고 잔디를 심어놓았는데 이런 양식은 지금도 농촌지역을 지나다 보면 가끔 만날 수 있다. 한파를 막는 데는 흙이 가장 효과적이었나 보다. 최초에 정착했을 당시에는 아이슬란드에도 목재가 많아 건축에 통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빙하도 지금보다 좁은 면적이 있었으나 1300년대 작은 빙하기를 거치면서 빙하가 확대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숲 속 길을 10분 정도 가니 또 하나의 폭포(Gjarfoss)가 나타난다. 멀리서는 별 거 아닌 듯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병풍처럼 주상절리가 둘러싼 폭 쌓인 지형에 2개의 폭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 지역은 Gjain이라 불린다. 두 개의 폭포와 주상절리 병풍이 노란 꽃이 피어난 주변과 어울려 마치 인공으로 조성한 정원처럼 아기자기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규모도 있으면서 전체 지역이 무척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풀도 없는 황량한 벌판 속에 요정들이 숨겨놓은 무릉도원이 아닐까 생각이 들 지경이다.
폭포아래 시내를 건너야 하는데 시내는 제법 깊은 급류이고 물 위에 작은 돌이 띄염띄염 드러나 있다. 징검다리도 이렇게 위태로운 다리가 없다. 간격도 불규칙하고 일부는 밟아도 신발이 그대로 물에 잠길 것 같다. 어떻게 건너나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아우스디스가 갑짜기 자신의 신발을 벗어 내 어깨에 척 걸치더니 아내를 등에 업어 물을 건내 준다. 서방인 내가 할 일을 대신해주니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혼자 위태로운 돌들을 건너 뛰는데 고도로 집중해도 살짝살짝 물에 빠지기 일수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젖지 않고 건널 수 있었다. 버스가 기다리는 언덕에 올라 가인 지역 전체를 내려다 보니 너무 아름다워 정신 없이 카메라를 누른다.
버스에 오르니 점심시간을 알린다. 밖에는 파리떼가 달려들 것이 걱정되었지만 과감히 차에서 내려 부근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조남석 회계사가 불러 그 집이 준비한 자리에 함께 앉았다. 황인근, 기영석 회계사가 모여들고 보드카도 등장하니 바람이 상쾌한 풀밭 위의 상큼한 피크닉이 되었다. 아이슬란드 국화라는 흰꽃이 풀밭에 넓게 피어있다.
아이슬란드는 분명 유년기 지형인데 차로 이동하면서 보면 대부분 넓고 평평한 평원지대가 많고 산이나 언덕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1천년 이내 화산이 폭발하였다는 곳도 머리를 빡빡 민 사람 머리처럼 둥그런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지학 시간에 배운 상식으로는 유년기 지형은 온통 뾰족한 봉우리들만 가득할 것 같은데 실제로 와서 보니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역시 죽은 지식이다. 현장을 경험해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틀 전에 들렸던 야외온천 The Secret Lagoon을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로 삼았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곳은 아담한 규모에 주위도 무척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고, 수온도 알맞아 최적의 온천환경을 제공한다. 오히려 블루라군 보다 나은 것 같다. 가족단위 손님이 많다. 우리 일행이 들이닥치자 락카가 부족하여 한 개의 락카에 세 명씩 옷을 넣어야 할 지경이다. 이 동네 온천장은 항상 락카가 문제이다. 그래도 물에 들어가니 따스한 온기에 피로가 절로 풀리는 것 같다. 모두들 부추키니 김광만 회장과 기영석 회계사가 계란과 도구를 들고 주위에 있는 온천출구로 간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란을 삶노라니 우리 멤버들은 물론이고 현지인들도 호기심으로 쳐다본다. 어떤 아줌마는 다가와서 어디서 왔느냐? 묻고 사진도 찍어준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계란이 마침내 익자 기회계사가 계란을 들고 오니 모두 몰려들어 맛을 본다. 반숙으로 잘 삶아져서 특히 맛이 좋다. 이런 엉뚱한 장난을 하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주 유쾌한 오후이다.
아이슬란드는 대지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이라서 광활한 들판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 많다. 그런데 가끔 느닷없이 나타나는 주택이나 산장들은 어쩌면 그리 외진 곳에, 하필이면 저기에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위치에 지어진 집들이 많다. 황량한 곳에 단독으로 서있는 집은 식수며 전기는 어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온천 후 내일 저녁 바베큐용 재료를 구입하는 동안 아우스디스에게 선물할 양초 두 개를 샀다. 오늘 아내에게 점퍼도 빌려주고 시냇물을 엎어서 건너 주는 등 우리 부부에게 무척이도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간단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Inland 지방을 차로 달리다 보면 호수를 많이 만나게 된다. 특이한 점은 호숫가에 풀과 꽃들은 많은데 동물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눈 녹은 물로 형성된 호수에는 물고기나 수중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조용하고 깨끗한 호수이고, 생명력이 제거된 세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리라도 몇 마리 보이지 않으니 적막하기 까지 하다.
산장에 막 도착하면서 뒤를 보니 왠 붉은색 탱크처럼 생긴 버스가 뒤를 바짝 붙어서 들어온다. 버스 하나에 그득한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 팀이다. 그러지 않아도 샤워장과 화장실이 난리도 아닌데 이리 많은 투숙객을 또 받다니! 규정상 산장의 정원은 65 명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화장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가 보다. 1, 2 층을 통틀어 3 개뿐인 화장실로 어찌 65 명이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프랑스인들은 저녁을 늦은 시각에 들었다. 그 바람에 우리와 샤워장 등을 사용하는 시간이 엇갈렸다.
저녁을 먹고 로비에 몇몇이 앉아 있는데 우리 식사를 도와주고 있는 강은경 작가가 합류한다. 50 정도 되어 보이는 분인데 원래는 희곡 작가였으나 여행작가로 전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67일을 예정으로 아이슬란드에 왔고, 뒤에는 25 킬로의 배낭, 앞에는 작은 보조 배낭을 메고 다닌다. 이동은 히치하이킹으로 하고 식사는 주로 얻어 먹는다고 한다. 아마도 캠핑장에서 만난 다른 여행객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준비하여 먹는 모양이다.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에어쿠션을 깔고 침낭 안에서 잠을 잔다는데 두 달이 넘는 기간을 어떻게 풍찬노숙을,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는 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아프면 2-3일 텐트에서 쉬는 방법뿐이라고 한다. 아내의 말처럼 다른 별에서 온 여자인가 보다. 우리 일행과 대화가 시작되자 바로 메모장을 꺼내 드는 품이 전문가의 자세가 묻어난다. 우리의 여행도 좋은 소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우리의 말을 열심히 적었고, 쏘르스목에서의 바비큐 파티도 열심히 사진으로 담았다.
7월5일 일요일
아침에 보니 프랑스팀은 다시 짐을 차에 싣고 있다. 단 하룻밤만 산장에서 자는 계획이었나 보다. 천만 다행이다. 우리와 생활리듬이 다른 것인지 오늘 새벽에도 샤워실과 화장실 사용에 전날과 별 차이가 없었다. 프랑스인들이 허세를 부리느라 우리 앞에서 화장실을 참고 버틴 것인가?
본래 Hekla 화산을 트레킹할 예정이었으나 화산 쪽에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폐쇄되어 트래킹이 불가능하였다. 부득이 목적지를 쏘르스목(Porsmork)쪽으로 변경하였다. 최초의 일정상으로는 란드만날라우가에서 쏘르스목까지 트래킹할 계획이었으니 이 동네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단지 오늘은 란드만날라우가 트레킹 코스가 끝나는 곳에서 거꾸로 일부 구간을 올라가는 방식이다. 원래 이 곳도 유명한 트래킹 코스여서 쏘르스목에서 출발하여 에이야팔라 빙하(Eyjafjallajokull)를 옆으로 보면서 핌뵈르두할(Fimmvorduhals)까지 넘어가는 1박 2일짜리 코스로 설계된 곳이다.
쏘르스목 산장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거칠었다. 당연히 비포장도로로서 수많은 시내를 통과하여야 하는데 시내 바닥이 패여서 커다란 웅덩이 수준으로 변한 곳이 많았다. 차체가 높은 버스이었는데도 좌우로 크게 출렁이는 게 불안감을 자아낸다. 강물줄기가 매년 바뀌어 철제 다리에 바퀴를 달아서 이동식으로 운영하는 구간도 있다. 도로를 보수할 것인가를 두고 개발론자와 환경론자의 논쟁이 한창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고 오는 등산객의 불편을 생각하면 보도는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상태이지만 환경론자들은 그냥 두어야 자연도 보존되고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강가의 낮은 풀들이 허리가 크게 휠 정도로 누워있다. 바람이 심한 날이다.
버스에서 내려 등산장비를 챙기는 모습들이 긴장한 눈빛이다. 난이도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하려고 하였으나 산책팀을 지원하는 사람이 우리 부부밖에 없자 아우스디스가 일단 함께 출발하자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일행의 끄트머리에 따라 나섰다. 유년기 지형이라 시작하자 마자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다. 낮은 능선에 오르니 바람마저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일부 구간은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용암 능선을 두고 위태로운 외길을 세찬 바람 속에 지나야 했다. 예상대로 아내가 힘들어 한다. 점차 일행으로부터 처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만 돌아서 내려가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내가 봐도 더 이상 진전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아우스디스가 조금만 더 가면 편한 곳이 나오니 거기까지만 가자고 몇 번을 달래어 간신히 일행이 점심을 위해 정지한 곳까지 갈 수 있었다. 그곳만 해도 벌써 고도가 상당하다. 에이야팔라 빙하가 바로 건너편에 보이고 우리가 지나 온 강은 까마득히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샌드위치를 먹는데도 간간히 강풍이 몰아친다. 소지품이 바람에 날아간다.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 일행이 산행을 서두른다. 우리는 여기서 내려가기로 하였다. 더 이상 오르는 것은 무리이고 일행에게 폐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우스디스와 함께, 그리고 우리와 같이 내려가기로 한 Mrs. 황과 함께 하산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내려가는 길은 쉽고 빠르다.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전망이 좋은 곳 몇 군데에서 풍광을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산장으로 내려와 아우스디스의 친구에게 커피도 얻어 마시고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이곳 샤워장은 백 크로네 짜리 동전 4 개를 넣으면 4 분 동안 더운물이 쏟아지는 방식이었다. 샴푸 하나를 들고 시작하였는데 4 분에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던 것은 기우였다. 샤워기가 고장 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도록 더운물이 나왔다.
4시가 가까워지자 아우스디스가 숯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오늘은 아우스디스와 욘이 아이슬란드식 요리를 선보이기로 한 날이다. 내가 도울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지시가 떨어진다. 바나나의 배를 반쯤 가르고 그 틈에 쵸콜렛을 밀어 넣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단순하지만 나도 요리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즐겁기까지 하였다. 숯불이 달아 오르자 쿠킹호일에 싼 양다리 여러 개를 굽기 시작한다. 2 시간 정도 구워야 한다. 부인들에게는 샐러드 준비를 부탁한다. 이곳에서는 귀한 채소와 아보카도를 듬뿍 넣고 샐러드를 준비한다. 아이슬란드식 요리는 단순한 것 같다. 바비큐한 양다리에 샐러드, 그리고 볶은 버섯이 전부였다. 디저트로는 내가 준비한 바나나가 제공되었다.
저녁은 캠핑장의 공동 취사장에서 하였는데 이곳을 우리가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4 개의 테이블을 예약한 것이었다. 식사시간이 다가오자 여러 팀이 취사장으로 몰려오는데 테이블을 보존하는 것도 일이었다.
6시가 다 되어서 비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일행이 돌아왔다. 위에는 바람이 엄청 세게 불어 당초 예정 보다 조금 일찍 하산하였다고 한다. 모두들 우리가 먼저 하산하기를 잘했다고 위로한다. 시장끼가 심했는지 모두들 샤워도 하지 못하고 남은 빵이며 요깃거리를 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하고, 한 켠에서는 라면을 끌이기 시작한다. 구운 양다리가 날라져 오고 욘이 썰기 시작한다. 허기진 일행들에게 부지런히 날라주고 어느 정도 식탁이 마련되자 나도 식사를 시작하였다. 양고기를 나르는 과정에 특유의 양고기 냄새도 많이 맡았지만 양다리 바비큐는 맛이 좋았다. 거부감이 있는 사람을 위해 준비한 소고기 스테이크 보다 양고기가 더 맛이 좋다. 내가 준비한 바나나도 맛있게 익었다. 모두들 잘 먹는다. 내가 거의 최초로 시도한 요리치고는 잘 된 것 같다. 가끔 비장의 레시피로 써 먹어도 될 것 같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도 많았다. 한국에서 등산을 하면 세네 시만 되면 하산을 서둘러야 한다. 꾸물대다가 조난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여름은 해가 지지 않으므로 이론상 조난을 당할 염려가 없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길만 놓치지 않으면 환한 길로 내려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10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하였는데도 아직 서편하늘 높은 곳에 걸린 해 덕분에 그다지 늦지 않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7월6일 월요일
드디어 산장을 떠나는 날이다. 낮은 높이의 위층 침대에 아내가 수없이 머리를 들이 박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나흘이나 머물던 곳을 떠나려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비슷한 생각들이 있었는지 산장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산장이 텅 빌 것 같았다.
오늘부터는 관광일정이라는 전사장의 설명에 다소 안심이 된다. 어제 등산하지 못한 헤클라 화산의 안내판이 서있는 곳에 잠시 정차하였다. 해발 1491미터의 이 화산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의 하나이다. 가장 최근에는 2000년에도 화산 폭발이 있었다. 화산 폭발이 잦자 아이슬란드 정부는 경고용 app을 개발하여 화산활동 신고도 받고 화산 인근에 있는 관광객에 대한 경고 메세지 발송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화산재로 형성된 밝은 황색에 물에 뜨는 가벼운 돌을 아우스디스가 소개하자 너도나도 몇 개씩 기념품으로 챙긴다.
첫 관광지로 셀라란즈 폭포(Seljalandsfoss)를 방문하였다. 이 폭포는 높이가 65 미터로 그다지 큰 폭포는 아니나 자태가 아름답고, 폭포의 뒤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폭포 뒤로 들어가자면 물보라 세례를 감수하여야 한다. 아이슬란드의 모든 자연 관광지의 특징 중 하나가 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 특별한 시설물도 없다. 셀라란즈 폭포를 도는 길도 자연 그대로의 거친 바위들을 그대로 밝고 가야 한다. 물보라로 덮혀 미끄럽기까지 한 바위를 오르내리며 이렇게 그대로 두는 것이 다소 의도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관광객을 다소나마 제한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셀레란즈 폭포 옆으로 백 미터 정도 가면 실폭포가 두 개 더 있다. 왠만한 곳 같으면 이 정도 폭포만으로도 관광자원으로 엄청 홍보할 만한데 여기서는 이름도 없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지경이다. 폭포 앞쪽으로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저 멀리 아담한 헛간이 한 채 외로이 서있다. 점점이 흩어져 자라난 노란 꽃들과 어울려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아이슬란드어로 셀라란즈의 ‘Sel’이 작은 헛간을 의미한다고 하니 이름에 제대로 어울리는 농가가 마치 연출이라도 하듯이 거기에 서있다. 폭포 주차장에서 빠져 나오는데 욘이 갑짜기 길에서 차를 멈춘다. 자세히 보니 왼편 언덕으로 여우가 한 마리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주 드문 광경이라고 뒷차가 클락숀을 울려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충분히 구경할 시간을 준다.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니 아이슬란드의 간선도로인 1번 도로와 만난다. 이 도로는 아이슬란드를 일주하는 소위 ‘Ring road’라고 불리는 중요한 도로이다. 1번 도로에서 동쪽으로 달리면 우측으로 바다를, 좌측으로 거대한 절벽이 이어져 서있고 절벽 밑에 점점이 농가들이 흩어져 있는 지대를 지난다. 농가에서부터 도로까지, 그리고 일부 구간에서는 도로를 지나 바다 쪽으로 조금 더 목초지가 펴져 있다. 여름철인 지금에는 그린 일색이고 이 지대에는 양과 말 등의 가축이 많이 보인다. 대부분 낮은 펜스를 두른 곳이지만 상당 부분은 그냥 트인 평야이고 여기를 예닐곱 마리씩 무리를 지은 양들이 어슬렁거린다. 가끔 정신 없는 녀석들이 1번 도로에 올라와 우리의 가이드이자 기사인 욘이 클락숀을 멀리서부터 눌러대야 천천히 길을 내어준다. 여름에는 전형적인 유럽의 농촌 풍경이지만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계절에는 이 지역에서 어찌 지낼지 궁금하여 진다.
어느 절벽을 한 굽이 돌자 스코가 폭포(Skogafoss)가 나타난다. 폭포 뒤쪽 멀리 어제 우리 일행이 올랐던 빙하가 보인다. 스코가 폭포는 핌뵈르두할까지 넘어가는 1박2일 짜리 트레일 코스의 시발점이 된다. 1번 도로에서 바라볼 때는 폭포가 빙하를 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 멋진 그림이 되었는데 버스가 폭포 쪽으로 다가가자 아쉽게도 폭포와 빙하를 한 프레임에 담을 수가 없었다. 60 미터 절벽에서 떨어지는 스코가 폭포는 정갈한 자태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폭포 옆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을 만들어 폭포 옆까지 접근하기 용이하게 하여 놓았다. 중턱까지 오르자 아래 보이는 폭포에서 무지개가 피어난다. 양쪽 뿌리까지 완벽하게 반원을 그린 무지개이다. 모두들 무지개가 핀 폭포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폭포를 품고 있는 거대한 절벽에는 수많은 갈매기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 갈매기들의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점심은 검은 모래해변 카페에서 해결하였다. 간단한 스낵을 파는 곳이었는데 유일하게 더운 음식이 수프였다. 우리 점심 메뉴도 수프에 빵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애플파이가 추가되었다. 수프는 양고기 와 생선, 두 종류였는데 카레를 넣은 생선 수프도 먹을 만 하였다. 카운터에 20 세 전후로 보이는 키 큰 총각이 혼자서 28 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맞아 쩔쩔매고 있었는데 우리의 해결사 아우스디스가 나서 식수도 수배하고, 애플파이에 크림도 뿌려준다. 고마운 마음에 ‘네가 슈퍼우먼인 것 같다’고 칭찬해주자 웃으면서 자신도 그런 거 같다고 답을 한다.
검은모래해변(Reynisfjara)은 작은 자갈들로 형성된 해변이다. 해운대보다 훨씬 넓은 해변에 동쪽으로 커다란 주상절리 암벽과 촛대바위 두세 개가 보이고, 멀리 서쪽으로는 코끼리 절벽(Dyrholaey)가 보인다. 폭이 30 미터가 넘을 것 같은 주상절리 암벽만 해도 훌륭한 볼거리겠지만 주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주상절리는 무심한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족하고 있다. 아이들은 하여간 계단과 같은 것을 보면 무조건 올라가고 본다.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촛대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뽐낸다. 해변에 어떤 중년의 사내가 삼각대 위에 커다란 망원렌즈를 세워놓고 작품을 만드느라 열심이다. 코끼리 바위는 거대한 절벽이 바다까지 이어진 끄트머리에 바위로 아치 형태의 터널을 형성하고 있는 게 마치 몇 년 전 프랑스 몽생미셀 가는 길에 보았던 코끼리 바위와 흡사한 모습이다.
동쪽으로 잠시 가다가 비크(Vik) 마을에 정차하였다. 비크는 절벽 사이로 난 도로를 완만히 내려가다 해수면 레벨에 도달하면 나타나는 200 가구 정도되는 작은 마을인데 여기에 아웃도어 매장과 주유소가 있어 많은 관광버스가 몰리는 곳이다. 마을 앞 언덕 위에 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교회가 얌전히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호텔도 보인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우리 부부지만 달리 기념품이라도 살만한 곳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 둘러보기로 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즐겨 입는 스웨터에는 특유의 더블유 모양의 문양을 넣는데 그런 문양을 넣은 털모자를 아들과 딸을 위하여 하나씩 구매하였다. 겨울이 긴 지방이라 보온용 의류가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반가웠던 것은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가졌던 문제가 여기서 단숨에 풀려버린 것이었다. 나는 늘 왜 벙어리 장갑은 가죽으로 만들지 않을까 궁금했었다. 사실 손가락을 끼는 장갑보다 벙어리 장갑이 훨씬 따뜻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판매하는 벙어리 장갑은 꼭 털장갑, 그것도 홑겹의 장갑뿐이었다. 아 그런데 바로 여기에 양질의 가죽으로 만든 벙어리 장갑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안에는 모피까지 넣어 무척 따뜻할 것 같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바로 집어 들었다. 상당히 값은 나갈 것 같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동쪽으로 상당히 달려니 바트나 빙하(Vatnajokull)가 나타난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이 빙하는 경상도만한 면적을 자랑한다. 그러니 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계속 이 빙하의 다른 모습을 접하게 된다. 가는 도중에 상당히 큰 루핀꽃 평야를 지났다. 버스로 10분 가까이 달리는 동안 계속되었으니 실로 상당한 면적일 것이다. 루핀은 멀리서 보기에는 보랏빛 꽃이 나름 좋아 보이는데, 실은 무척 생명력이 강하고 루핀이 핀 지역에는 다른 식물이 거의 식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곳 사람들의 골치거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한국의 아카시아처럼 사랑과 경원의 대상이 동시에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까이 보면 꽃이 상당히 억척스러워 보인다.
5시가 휠씬 지나서 요쿨살론(Jokulsarlon)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은 빙하가 내려오다가 호수를 이루었고, 다시 유빙이 바다로 흘러나가 바닷가에도 널리 유빙이 흩어져 있는 곳이다. 빙하가 호수까지 흘러내리는데 80년 가까이 걸린다고 한다. 바다로 흘러간 유빙은 파도에 부딪혀 다시 바닷가로 밀려와 쌓인다. 우리는 먼저 해변으로 내려갔다. 검은 해변에 푸른빛이 도는 유빙들이 흩어져 대비를 이루고 있다. 바다 가까이 내려가니 바람이 상당하다. 얇은 오리털 파카를 포함하여 네 겹의 옷을 껴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진다. 전사장이 보드카를 한 병 들고 와서 유빙에서 캐어낸 얼음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빙하를 체험한다는 사실이 모두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빙하 호수를 관광하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작은 매표소 안에서 기다리다가 두 대의 수륙양용차로 나뉘어 관광에 나섰다. 차는 육지에서는 버스처럼 바퀴로 달리다가 호수에 들어가면 보트로 변신하였다. 해변에서 추워서 무릎담요까지 꺼내 왔지만 호수는 의외로 바람이 없어 온화하였다. 보트는 유빙 사이를 한바퀴 돌면서 관람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니콜라스라는 훤칠한 총각이 설명을 한다. 주광스님은 어느틈에 니콜라스와 친해져서 연락처를 주고 받는다. 호수 가운데 보트를 세우더니 빙하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지구온난화와 바닷물에 포함된 소금의 영향으로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추세라면 약 80 년 후면 빙하가 완전히 녹아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 아이들은 서둘러야 빙하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빙하가 푸른빛을 띠는 것은 물이 오직 블루만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닷물이 푸른색인 것과 같은 이유라고. 우리 보트를 따라오던 고무보트가 커다란 빙하 얼음 한 조각을 니콜라스에게 건낸다. 니콜라스는 이를 다시 잘게 쪼개 천 년의 맛을 보라고 권한다. 멀리 보이는 빙하와 푸른빛을 띠는 유빙, 더 푸른빛의 호수가 어우러져 카메라만 되면 작품이 나올 지경이다.
빙하 호수 관광시설로 들어가는 길에 유난히 새가 많았는데, 작고 하얀 몸집에 머리는 검은색이고 부리는 빨간 모습의 Arctic tern이었다. 북극에서 이곳까지 번식하기 위하여 1만 7-8천 킬로미터를 날아온다고 한다. 작은 몸 어디에 그런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는지 경이롭다. 이 녀석들은 길 옆 풀밭에 둥지도 없이 알을 낳아 기르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관광객이 쉬지 않고 드나드는 이런 길목에 왜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 놓고는 자신들의 영역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이다. 우리 버스가 지날 때 마침 병아리 두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차도 바로 옆에 까지 진출한 모습이 보였다. 관광객 두 명이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데 어미 새들은 안절부절 부근을 날아다닌다.
숙소로 이동할 즈음에는 시간도 늦었고 피로도 몰려왔다. 아침부터 혓바늘이 돋았는데 이젠 본격적으로 머리가 묵직하다. 중간에 잠시 들린 슈퍼마켓에서 아내가 비타민을 한 병 사더니 바로 들기를 권한다. 피로에는 비타민 B의 섭취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 다른 마을로 숙소를 조정하여야 한다고 전사장이 설명한다. 이곳의 형편이 이런 식인데, 갑자기 28 명의 숙소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아우스디스가 자신의 회사(Exetreme Iceland)와 연락하여 해결을 하였단다. 역시 슈퍼우먼이다.
원래 예정보다 동쪽으로 30 분 정도 더 간 곳에 있는 호픈(Hofn) 마을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그나마 게스트하우스와 통나무 산장, 그리고 아파트로
나뉘어 묵어야 했다. 통나무 산장은 캠핑촌에 있었는데 여기에 3 명이
투숙하였고, 네 부부를 포함한 10 명은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주로 주당으로 구성된 나머지 일행은 단독주택 두 채에 나뉘어 투숙하였다. 방에 짐만 두고 마을 중심에 있는 호픈 호텔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2 층
넓은 홀에 여러 팀이 공유하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메뉴는 트리오라고 하는 세 가지 생선이 나오는 담백한
요리였다. 이 저녁이 사실상 모두 함께 하는 마지막 저녁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집행부가 나서서 돌아가면서
여행소감을 이야기 하도록 유도한다. 최관 교수가 화이트 와인을 한 턱 내시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손주를 보신 턱이었다. 11시경에 마무리된 저녁 후에 서둘러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여전히 훤한 길이 초저녁 같은 기분이 들게 하였다.
7월7일 화요일
오늘은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이다. 아침식사를 하러 호텔로 가는 길에 바닷가 쪽으로 걸었더니 우측 바다 건너편에 바트나 빙하가 화려한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어제는 흐려서 보이지 않던 빙하가 투명한 아침햇살을 받아 은색의 광채를 쏟아낸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빙하의 모습은 전사장도 처음이라고 감탄한다. 인적이 거의 없는 한적한 해안길을 천천히 걸으며 다시 보기 힘든 빙하의 투명한 모습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이런 마을에 집을 한 채 빌려 한동안 푹 잠길 수 있다면 모든 세상의 찌든 흔적도 지울 수 있을 것 같다. 예약 차질로 호픈 마을까지 오게 되었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오늘의 유일한 관광 일정은 빙하트레킹이다. 숙소를 출발하여 이제는
서쪽으로 달린다. 중간에 트래킹 장비를 버스에 실으려고 Hof
Hotel에 들렸다. 호텔 아래 편에 옛날 교회가 있었는데 전통양식에 따라 흙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다음 지붕 위에 흙은 바르고 잔디를 심어 놓았다. 교회 건물 옆 마당에 묘지도
몇 개 조성되어 있다. 1884 년에 지어진 이 교회는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교회 중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욘의 처가가 이 부근에 있다고 한다.
어느 주유소 광장에서 빙하트레킹 준비를 하였다. 준비는 개인용으로 지급되는 크레펠을 각자의 발 싸이즈에 맞추는 일이었다. 크레펠은 거대한 아이젠과 같은 것인데 강한 톱니가 얼음을 파고 들어 절대 미끄러지는 일이 없었다. 거기에다 도끼처럼 생긴 피켈도 나누어 준다. 핼멧까지 쓰고 피켈을 드니 백동관의 표현대로 광산노동자의 모습같다.
우리가 탐험할 빙하는 스비나펠스 빙하(Svinafellsjokull)이었다. 멀리 알프스 봉우리처럼 생긴 설산(Hrutfjallstindar, 1852 m)이 보이고, 양 옆 두 개의 봉우리 사이 비교적 좁은 골짜기를 가파르게 내려오고 있는 빙하였다. 욘의 선도로 빙하에 들어섰다. 여름이라 숨겨진 크레파스 위험은 없는 것 같다. 겨울철에는 빙하 위에 눈이 덮혀 있어 무척 조심하여야 한다고 한다. 빙하를 가까이서 보니 화산재가 뒤섞여서 다소 지저분한 느낌도 들고, 반쯤 녹은 얼음 덩어리 위를 걷는 느낌이 들었다. 표면을 자세히 보면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엉겨 붙은 모습이다. 피켈로 파내면 얼음이 쉽게 부서진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아이슬란드의 빙하 위에서 찍었다고 하는데 영화 속의 장면이 생각이 나고 이런 곳에서 촬영하면 그렇게 나오겠구나 상상이 가면서도 실제 모습은 그다지 감동적인 느낌을 주지 못한다. 크레펠이 위력을 발휘하여 걷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참여 여부를 한참 망설이던 아내도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처음 주어진 휴식 포인트에서는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바빴었지만 한 시간 가량 비슷한 길에 변함없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다소 지루한 감마저 들었다.
점심은 인근의 스카프타펠 호텔(Skaftafell Hotel)에서 하였다. 이 부근은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에 속한 지역인데 이 공원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국립공원으로 아이슬란드 최고봉(Hvannadalshnukur, 2114 m)을 포함하여 많은 빙하지대를 품고 있어 각종 트레일 코스도 있고, 빙하를 바로 앞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평야지대에 캠핑장도 운영하는 곳이다. 오늘도 수프와 생선의 메인 요리로 구성된 검박한 메뉴이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 하나는 아이슬란드처럼 검소한 메뉴도 훌륭한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여행사 상품을 따라가면 실질적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하게 여러 가지 음식을 올려서 양은 지나치게 많이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런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여도 여행의 즐거움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이 보여준 것 같다. 오늘 점심에는 내가 와인과 맥주를 한 턱 냈다. 호텔이 선정해 준 화이트 와인도 상큼했고, local beer도 맛이 좋아 모두들 즐거워하는 점심식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본 어떤 나라의 맥주도 한국의 맥주보다는 맛이 나은 것 같다.
레이캬비크로 돌아가는 길은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이었다. 맥주를 배불리 마신 탓도 있어서 두 시간 정도 지나 동쪽으로 가는 길에 들렸던 비크 마을에서 다시 잠시 정차하였다. 여전히 아웃도어 매장을 뒤지는 일행이 있었으나 소득은 신통치 않은 것 같다. 레이캬비크에 접근할수록 주택이며 건물이 증가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시내에 들어서자 희한하게도 번잡한 도시에 들어선 것 같은 갑갑증이 느껴진다. 지난주 이 도시에 진입할 때 느꼈던 황량함과 전원도시 같은 인상과는 정반대의 기분이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스럽다. 일주일 가량 넓은 벌판에서 생활하였다고 벌써 그 복잡한 서울의 거리를 잊었단 말인가?
Hotel Hilton Nordica는 시 외곽에 서 있었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운영하는 호텔답게 현대식의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아우스디스와 욘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였다. 특히 아우스디스는 우리 부부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다. 생활력이 강한 북유럽의 주부가 저런 모습일 거라 상상할 수 있다. 8시가 넘어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양고기 스테이크가 주식이다. 이 나라의 두 가지 주 요리, 대구와 양, 중에서는 단연 양이 인기가 있다. 아직도 밖은 밝지만 내일 새벽에 일어날 생각에 시내로 나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레이캬비크 시내관광을 도착 첫날 해치우길 잘한 것 같다.
7월8일 수요일
4시 20분에 아침식사를 시작하였다. 대형 호텔이라 이런 이른 시각에 조식을 제공하니 다행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비행기가 많고 공항은 비좁아 북새통을 이루었다.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40 분 이상 걸리는 것 같다. 다행히 세금을 환급 받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항공(핀에어와 코드 쉐어, AY 6818)편으로 7시50에 레이캬비크를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출발이 40분 가량 지연되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버스에 중국인들이 많이 탄 것으로 보아 이들을 기다리느라 출발이 지연된 모양이었다. 오슬로에서 연결 항공편까지 불과 55분밖에 없는데 어찌될는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코드쉐어 방식이기는 하나 아이슬란드 항공편을 계속 이어 타는 것이고 우리 일행이 25 명이나 되니 설마 어떤 대책을 세워주겠지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오슬로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버스로 이동하여야 했는데 이런 준비들이 느리게만 진행되었다. 여객동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연결편 항공기 탑승구로 뛰다시피 서둘러 이동하였다. 모니터에 탑승구가 35B인데 현재 상태가 ‘Gate Closed’라고 떠 있는 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35B로 달려 들어가니 텅 빈 탑승구역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 때부터 비상 상황으로 전환되었다. 일이 그리 되려니까 마침 우리 가이드 전사장은 암스텔담을 경유하는 항공편으로 따로 출발한 상태라 우리 일행 25 명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물어물어 핀에어 카운터로 갔다. 앞 서 짜증나게 오래도록 수다를 떠는 두 중년 여인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인내심을 다하여 기다려 카운터 직원과 상의하니 우리의 문제는 아이슬란드 항공이 지연 도착한 데서 발생하였으니 아이슬란드 항공이 책임지고 일정을 재 수배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내 보딩패스에 그런 내용을 적어 주었다. 아이슬란드 항공은 소형 항공사라 자체 카운터가 없었고, 오슬로가 본거지인 SAS가 대행하고 있었다. SAS 창구의 직원들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응대하였다. 조금이라도 독촉을 할라치면 자신들은 아이슬란드 항공의 티켓서비스만 대행할 뿐이라고 싸늘하게 쳐다본다. 참을성 있게 웃으며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이 25 명이나 되니 문제 해결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한참을 기다리다 마침내 SAS 직원이 우리 모두의 보딩패스를 달라고 하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SAS는 여전히 자신들은 아이슬란드 항공에 전화를 하였고 답신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문제를 해결할 자세는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우리 일행은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 각종 스낵과 보드카까지 꺼내어 들고 장기전의 태세에 들어갔다. 집행부가 답답한 마음에 암스텔담에 있는 전사장과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멀리 있는 가이드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공항에서 점심을 한 후 한참을 지나서 SAS에서 우선 호텔을 수배하였으니 그리 가서 투숙을 하고 대표자만 수시로 카운터로 와서 진행 상황을 확인하라고 한다. 함께 있겠다는 일행을 다독여 호텔로 보내고 집행부와 함께 나만 남아서 주기적으로 점검하였다. 마침내 8시가 다되어서 SAS 카운터의 매니저가 새로운 티켓팅 정보를 가지고 나타났다. 다행히 다음 날 출발을 할 수는 있지만 10 명을 제외하고는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뮌헨을 경유하는 항공편으로 나눠서 인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위로하며 마지막으로 가방을 찾는 일까지 마치고 나자 8시 30분에 가까웠다. 일행 중 두 분은 그 날 가방도 찾을 수 없어 불편한 밤을 보내야 했다. 호텔에서 묵는 비용은 아이슬란드 항공에서 부담하였다. 뜻밖에 하룻밤을 오슬로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너무 늦게 문제가 해결되는 바람에 오슬로에서는 그야말로 잠만 자고 떠나는 상황이었다. 공항 건너편에 있는 Radisson Hotel은 나름 깨끗한 비즈니스 호텔로 지낼 만 하였다. 공항 옆에 있는 호텔을 누가 사용하나 늘 궁금하였는데 우리가 오고 보니 이해가 되었고, 호텔에는 투숙객도 제법 많아 보였다.
긴장되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공인회계사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몸으로 회원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사실이 보람도 있는 일이었다. 일행들도 수고하였다고 저마다 인사말을 건낸다. 회비를 낸 보람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까지 있었으니 기분 좋은 일이다.
7월 9일 목요일
우리는 오후 1시 15분 출발 헬싱키행 핀에어를 탑승할 예정이라 느긋하게 호텔에 있는데 갑자기 김광만 회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여 먼저 출발한 뮌헨팀이 문제가 생겨 한 시간 째 체크인을 못하고 있으니 빨리 공항에 가보자고 한다. 서둘러 짐을 꾸려 공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이미 문제는 해결되었고, 당초 뮌헨으로 갈 예정이던 두 부부 중 부인들은 다시 프랑크푸르트행 루프트한자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다시 평온이 찾아오고 우리는 예정대로 헬싱키행 핀에어에 탑승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출발이 25분 가량 지연되는 것이 아닌가? 어제도 이 정도 지연되었다면 우리도 어쩌면 탑승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헬싱키 공항은 이젠 익숙한 곳이 되었다. 면세점에서 스페인 와인을 네 병이나 구매하였다. 귀국 항공기 안에서 여행기록을 에버노트에 차근히 정리하였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에버노트에서 ‘메모리가 부족합니다’라는 사인이 뜨고, 작성 중인 여행 노트가 업로드가 되지 않는 듯하여 불안하였다. 귀국하여서도 업로드 대기 중이라는 표시가 며칠 지속되더니만 그만 최종 메모가 사라져버렸다. 남은 건 3분의 1이 채 안 되는 시점에 업로드된 노트뿐이었다. 잃어버린 노트를 복구하는 데 며칠을 더 투자하여야 했고, 그나마 완전히 기억해 낼 수 가 없었다.
7월 10일 금요일
헬싱키에서 17:30에 출발한 핀에어(AY 041)는 순항하여 예정대로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어제 가방을 찾지 못하였던 차국진 회계사의 짐도 잘 나온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귀국하는 김진후 회계사는 젊은 분이니 알아서 잘 가방을 해결하리라 믿는다.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김광만 회장의 핸드폰이 꺼져 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이야기는 비행 중이라는 의미일 터이다. 오후 5시가 넘어서 김회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문제를 일으켜 3 시간 지연 출발하였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을 그 쪽 팀이 안쓰러웠다.
첫댓글 글을 읽어보니 그때의 감회가 다시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대단히 치밀하십니다
읽는데 한 시간이상 걸렸으니 쓰시는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