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상12:1 <북쪽 지파들의 배반(대하 10:1-19)>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왕상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왕상12: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상12: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왕상12: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왕상12:6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왕상12: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상12:8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
왕상12:9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왕상12: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왕상12: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왕상12:12 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삼 일 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상12:13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왕상12: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왕상12:15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왕상12: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왕상12: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왕상12: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왕상12: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왕상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왕상12:21 <스마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다(대하 11:1-4)>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왕상12: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12: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상12: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왕상12:25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12: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왕상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왕상12: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12: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12: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왕상13:1 <벧엘 제단 규탄>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왕상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왕상13: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왕상13: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왕상13: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왕상13: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왕상13: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왕상13: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13: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왕상13: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왕상13:11 <벧엘의 늙은 선지자>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하신 말씀도 그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왕상13:12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왕상13: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왕상13: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왕상13: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왕상13: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13: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왕상13: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13: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왕상13: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왕상13: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왕상13: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왕상13: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왕상13: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왕상13: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왕상13: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왕상13:27 이에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안장을 지우매
왕상13:28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왕상13: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왕상13: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왕상13: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왕상13: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왕상13:33 <여로보암의 죄>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왕상13: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열왕기상 제 12장
=====12:1
이는 '여로보암'(Jeroboam)의 이름의 뜻은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하소서'인 것
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때문에 이러한 두 이름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이 이름들을 다
같이 백성의 권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명칭으로 보는 시각도있다(Maclean). 한
편 르호보암(Rehoboam)은 암몬 여인 나아마(Naamah)의 소생으로 솔로몬의 독자였다
(14:21,31 ; 대하 12:13). 따라서 솔로몬 사후 당연히 아비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11:43). 르호보암이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는데 그때로부터 그
는 17년간 통치하였다(14:21).연대문제는 복잡 난점이 따르기는하나 대략 B.C.930-913
년 (솔로몬의 즉위를 B.C.970년으로 보고) 기간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이다.
세겜 - '세겜'( , 쉐켐)은 '등성이', '비탈'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이 세겜
(Shechem)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곧 그리심 산과 에발산 사이의, 사방으로 통하는 교차 지점이다. 그래서 세겜은 예로
부터 이스라엘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Reed). 또 이곳은 에브라임에 속한 지역이기
도 하다(수 20:7;삿 9;1이하).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수 17:7 주석을 참조하라.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 여기서 '온 이스라엘'( ,
콜 이세라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가 아닌 북쪽의 열 지파를 말한다(Bahr,
Hammond).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이 열 지파만을 일컫던 전례 없지않다.(삼하
2:9, 10, 17, 28). 한편 이스라엘 열 지파가 세겜에서 르호보암의 면담을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백성들의 승인이 이스라엘 왕의 즉위에 있어 필
수 요건이였기 때문이다(1:39;삼상 2:15 ;삼하 2:4; 5:3 ;대하 29:22). 2 그 동안 소
외되었던 북쪽 지파의 권리를 호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4절).
=====12:2
얼굴을 피하여 - '얼굴을 피하여'( , 바라흐 미프네)는 어떤 불쾌
한 이유로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피함을 말한다(시102:2 ; 겔39:23). 한편 이와 유사
한 표현이 성경에 간혹 나오는데 '반하여 얼굴을 드는 것'은 적대감의 표현이며(렘
21:10),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우호적인 영접의 의미(민 6:25)이다(Dentan).
애굽에 있는 중에 -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0:2에는 '애굽에서 돌아오매'로 되
어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대하의 번역이 더 타당한 둣하다. 아히야의 예언
(11:31,35,37,38)을 잊지 않았을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사망 소식(11:43)을 듣고 귀국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70인역(LXX) 및 수리아역(Peshitta) RSV, NIV, 그리
고 공동 번역 등은 본절을 '애굽에서 돌아와 있었는데'(returned from Egypt)로 번역
하고 있다.
=====12:3
무리가...저를 불렀더라 - 본절로 보아 북쪽 지파들의 반란(16-20절)이 표면화되
기 이전부터 여로보암은 저들의 지도자격이었던 것같다. 이러한 사실은 여로보암이 북
쪽 지파 중 유력한 지파인 에브라임의 지도자 가문 출신인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11:26, 28주석 참조. 물론 본시점에서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을 거부하기로 결정짓고
있었던 것은 아직 아니다(4절). 단지 유동적인 형편에서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의 대
변자(代辯者)가 되어 줄 것을 부탁받은 것일 뿐이다(Lange).
본절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1절과 마찬가지로 북쪽 열 지파를 가리킨다. 한
편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모두 남쪽 지파에서만 배출되었다(사울은 베냐민, 다윗
과 솔로몬은 유다). 그런데 이들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남쪽 지파는 물론 북쪽 지파
들의 승인을 얻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본절은 북쪽지파들이 르호보암에게도 마찬가
지 절차를 밟게 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점은 분열 왕국 이전
에도 북쪽지파와 남쪽지파 사이에는 일종의 구별 의식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이다.
회중 - '회중'에 해당하는 '카할'( )은 신명기 기자가 온 이스라엘의 국민적
종교 집회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이다(한글개역 성경은 대개 '총회'로 번역하
고 있음. 신 5:22;9:10;10:4;18:16등). 이에 관하여서는 민 16:2 주석에 상세히 설명
해 놓았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12:5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 이처럼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에 즉각 승락하지
아니하고 대답을 삼 일 뒤로 미룬 이유는 다음 두어 가지로 추정된다. 1 역대 왕들과
달리 선뜻 왕위 승인을 얻지 못하고 난관이 있자 이를 숙고할 기한을 가지려 하기 위
함이다. 2 예루살렘 (세겜에서 약 58Km 떨어진)에서 상의할 모사(謀士)들을 소집할
시간을 얻으려 하기 위함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세겜까지는 그 거리로 보아 나귀를
탄다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Hammond).
하매 백성이 가니라 - 르호보암의 요청에 순순히 말을 듣는 백성에게서 아직까지
그들에겐 반역의 의도가 없었음을 본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서 그들의 요청(4절)이 진
지한 것이었음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이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을 예비
했다는 견해(Bahr emd)는 성립하기 어렵다.
=====12:6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 본절에서 '노인'( , 자켄)은 단순
히 연로한 자를 지칭하기보다 국가 행정에 직 , 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던 장로들을 의
미한다. 출3:16 주석 참조. 이들은 솔로몬의 성공과 실패를 몸소 체험했던 바 통치의
묘(妙)와 백성의 섭리에 익숙한 노련함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중에는 솔로몬의 행
정 구역을 담당했던 원로대신들도 있었을 것이다(4:2-6).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이
스라엘 지역 사회의 문제를 근접한 데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인물들이다
교도(敎導)하여 - '교도하여'( , 이와아츠)는 '충고하다'는 뜻으로 특히 아
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겸손히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즉 여기서 이는 왕인 르호보암
에게 원로들이 진언(進言)하는 것을 가리킨다.
=====12:7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 장로들의 이 직언(直言)은 여호와 신
앙에 입각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이고도 이상적인 군주관이 반영된 말이다. 즉 왕은 백
성들에게 봉사할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실제에
있어 왕은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인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으로 표현된다(신 17:
14-20). 즉 왕의 권력은 무제한한 것이 아니고 율법에 담긴 민사법과 전통의 규정들에
의해 규제되었다(삼하 11:1 이하;16:4;24:14 등). 그런데 왕에게 이와같은 법의 정신
과 의무를 일깨워 주는 역할이 장로들에게 있었다(삼상 10:25;삼하 5:3;왕하11:17).
르호보암이 의논한 장로들 중에도 이와 같은 역할자가 있어 본절과 같이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들은 율법의 정신과 규정에 제한당하는 것을 싫
어하였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이스라엘의 왕들 뿐아니라 오늘날 교회나 사회의 지도
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즉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
들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무리들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도리어 섬기고 헌
신하는 자세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해야 마땅한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
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마
20:28).
섬기고 - '섬기고'에 해당하는 '아바드'( )는 '봉사하다', '일하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자주(290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는 그만치 구약이 담고 있는 굵직한 정신
의 일맥(一脈)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사물과 사람 및 하나님
모두를 향해 사용된다. 즉 이 단어는 사람이 자연을 경작한다든지 종이 주인에게 봉사
한다든지 또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하는 모든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창
2:5;29:15;렘 22:13;신 15:19;삿 9:28;삼상 11:1등). 그 가운데서도 본절에서 이 단어
는 왕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행동의 본질적 성격이 곧 '섬김'(serve)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자는 섬기는 자라는 성경의 정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눅
22:25, 26).
좋은 말 - '좋은말'( , 드바림 토림)은 본래 상대방으로 하
여금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하여 승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장로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요구(4
절)를 들어주도록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
=====12:8
버리고 - '버리고'( , 아자브)는 주로 선한 것, 마땅한 것을 저버리는 경우
에 사용되는 말이다(신 28:20;31:16;삿 10:10;렘 1:16). 즉 본절에서 르호보암은 율법
의 정신으로 뒷받침된 장로들의 진언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본 문맥에서 '아
자브'는 '무시하다'는 뜻이 강하다. 이것은 단순히 아둔함에서 비롯되는 불찰이기보다
는, 탐탁치 않은 감정과 나란히 가는 의도적인 배제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오만한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렇게 볼때 르호보암은 부친 솔
로몬의 생애 중 후반부의 어두운 면을 물려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즉 당시 솔로몬은
부강함에 집착한 나머지 율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짓을 곧잘 벌였던 것이다(11:1-13)
그 앞에 모셔 있는...소년들 - 이들은 현재 르호보암의 신하로서 6절의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즉 현재는 원로가 된 솔로몬의 신하들과 대비된다
이러한 본문이 전하는 사건의 한 측면에는 르호보암 내각 내부에 존재하던 신 . 구 세
력간의 대립이 은연(중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대립과 갈등은 곧 이어 완연히
드러나고 만다(10, 11절).
자기와 함께 자라난 - '함께 자라남'이 시사하듯, 이들 소년들은 르호보암과 같은
경험을 통해 사물과 인간에 대해 같은 관점, 같은 경향을 갖게 된 부류라 하겠다. 즉
이들은 하나의 '파당성'(派黨性)을 가진 무리인 것이다.
소년들 - '소년'에 해당하는 '옐레드'( )는 '낳다', '태어나다'는 뜻의 '얄라
드'( )에서 온 말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연령에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41세 때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40대의 동년배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14:21). 왜냐하면 이들은 르호
보암과 함께 자랐다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소년'은 왕성한 활력
로서의 젊음을 내포한 긍정적인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6절의 '노인'과 날카롭게 대
비되어, 경험이 불충분하고 사려깊지 못한 부정적 면이 강조되는 젊음으로서 '소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르호보암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힘을 추종(追從)하되
책임의 면을 고려하지 않는 '힘 지향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용렬(庸劣)함은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는 강경책을 진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10, 11절).
=====12:9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 장로들이 충고를 무시해 버린 르호보암의 오만으로 미루어
(6-8절) 백성들의 간청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인
르호보암에게 있어선 자신의 무제한한 욕구 충족을 위해서 백성들의 굴종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들이닥친 백성들의 요구(4절)는 그의 야심에 타격을 주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르호보암의
심사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12:10
나의 새끼 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 이 수사학적 표현을 분석하면 다
음과 같은 두 대비(對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1 굵기의 비교로서, 신체 중 가장
가는 부분인 새끼 손가락과 가장 굵은 부분인 허리가 대비된다. 2 내적 의미 연관의
비교로서, 새끼손가락이 표상하는 바 손끝의 간릉(幹能)한 재주 정도와 허리가 표상하
는 바 힘의 근원지(사 45:1;시 69:23)가 서로 대비된다. 결국 이말은 르호보암이 부
친 솔로몬보다 훨씬 능력이 많다는 의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실상 이는
르호보암의 능력에 대해 과장된 찬사를 보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다. 원로들의 충정
어린 자문이 노련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운 것이었음에 반해, 소인배들의 조언은 아
첨으 로 가득찼으며 젊은 왕의 혈기를 충동질하기에 적절하였다. 만일 왕이 원로들의
조언을 따랐다면, 불만을 품은 백성들은 반역의 구실을 잃게 되었을 것이고 르호보암
자신은 왕국 분열을 조장하는 범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 주
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유혹을 해온다. 르호보암은 왕직을 수행하기에 앞서 일종의
테스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막 1:12,13)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통일왕국이라
는 큰 그릇을 소유하기에 부적격자로 판명되었다.
=====12:11
더윽 무겁게 할지라 - 원래 '무겁다'는 말( ,카베드)에는 '가혹하다' 외에도
'슬프다'는 뜻도 들어있다. 사실 가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슬픔을 안게 마련이다.
아무튼 본절은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더 혹독하게 속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처사가 백성들의 슬픔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채찍 - 본절의 '채찍'에 해당하는 원어는 '쇼트'( )로, 죄를 징책하는 의미의
'채찍', 즉 '네가'( )와는 구별된다(삼하 7:14;시 89:32). 다시 말해 이는 단지
문자 그대로의 '채찍'을 가리키는바 여기서는 통치상의 가혹함과 잔인성을 표상해 주
는 말이다.
징치(徵治)하였으나 - '징치하다'는 말( ,야사르)은 종종 '징계하다'로도 번
역되는 단어이다(신 8:5;시 38:1;잠29:17).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 이 '야사르'는
대개 인간의 변화 및 회개를 겨냥한 긍정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혹독하
게 말해서 솔로몬의 '야사르'는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백성을 쥐어짠
것일 뿐이다. 4절 주석 참조.
전갈 - 대개의 학자들은 본절의 '전갈'( , 아크랍)을 동물(전갈은 곤충이
아니라 절지 동물)로서의 전갈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채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
다. 즉 앞서의 채찍이 단순히 가죽으로 된 끈인데 본절의 '전갈'은 이 가죽끈에 쇠조
각을 박은 채찍이란 주장이다(H.Austel, Gates, Patterson, Montgomery). 한편 전갈
(scorpion)은 꼬리 끝에 독침이 있어 이에 쏘이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동물이
다. 그러기에 계시록에서도 전갈은 극도의 고통에 비유되었다(계 9:5).
=====12:12
모든 백성 - 1절의 '온 이스라엘'과 동일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
조하라.
이는 왕이 명하...하였음이라 - 백성들이 아직까지 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재
차 특기(特記)하고 있는 구절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때까지 백성들은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후에 벌어진
파국은 르호보암의 불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13-20절). 그런데 르호보암의
잘못이 갖는 성격은 우둔한 강압책이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율법 정신에 투철치 못한
데서 찾아야 한다(7절).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니 이스라엘 남북 분열과 대
립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임이 분명해진다(21-24절).
=====12:13
포학(暴虐)한 말 - 원문에는 단지 '포학하게'(harshly)로 되어 있다. 그런데 '포
학하게'는 '난폭하다', '고집이 세다'는 뜻을 지닌 '카솨'( )에서 온 말이다. 이
'카솨'는 본래 무거운 멍에에 짓눌린 소를 참기 어려운 정도로 혹사하는 농경의 한
장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카솨'는 그 행위의 주체에는 완고함이, 그 행
위의 객체에는 참기 어려움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거 애굽의 노예생활시 바로가
히브리 노예에 대해 그러했다(출1:14;6:9; 신 26:6). 또한 훗날 이스라엘인들의 바벧
론 포로 생활 역시 '카솨'로 인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사14:3). 결국 '카솨'란 단어
에서 발견되는 르호보암의 마음가짐은 애굽의 바로가 그랬드이 고집세고 강퍅한 바로
그것이다(출 7:3;13:15).
노인의 교도 - 6,7절 주석을 참조하라
=====12:14
내 부친은...징치히리라 - 본절은 르호보암이 앞서 소년들의 충고 내용을 그대로
읊고 있는 장면이다(11절). 본절은 그 수사학적 표현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
용상의 우둔함과 무자비성이 가리워지지 않는다. 대신 표현상의 뛰어난 기교는 도리어
르호보암의 악함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강경한 대
답은 3일 동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백성들(5절)의 마음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였
다.
=====12:15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것이라 - 인간 만사(萬事)를 주장하시는 분은 정녕
만유(萬有)의 주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시
103:19;단 4:34,35). 아무튼 본절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바는 바로 백성들의 요청에
대한 르호보암의 거부 사실이다(12-14절). 다시 말해 본절은 남북 분열의 파국으로 가
는 전환점이 바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빚어졌음을 지적해 준다. 한편
여기서 '이 일'에 해당하는 '십바'( )는 '사태.운명의 전환'(a turn about of
fate)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르호보암의 운명을 전환
시키셨음을 증거해 주는 셈이다(Montgo-mery).
실로 사람 아히야 -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이다. 11:29 주석 참조.
응하게 - '응하게'에 해당하는 '쿰'( )은 어떤 결정이 유효한것으로 확정,확
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그 순간
(12-14절)이 곧 하나님의 심판 판결(11:35,36)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2} $6 은 이스찌웰. 1절과 마찬가지로박스라옐박라는 명칭이 북쪽 지파에 한해 사
용된 대표적 구절 중 하나이다(삼하2} 뚜 17)3#췌 #>41)조} 1 패냐하면 "온 이스라엘
'(# ##%이라는 표헌에도 불구하고 이는 17절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과
는 뚜렷하게 구별되기 떼문이다. 할뙨 북왕국이멸망한 이후에는 녀스라엘'이란 용
어가 남왕국을 가키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사5}7) 미결정적으로 다왹 왕조와 결별올
결심하게 된것이 바로 이 슨간임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대답혀여. 이에 해당하는 원문
(겨3뻑...3 3밭.,야쉬부#귄바르)욘 '말을 보내다'는 뚱이다.이로 보아 아마도 북쪽
지콰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롤 왕에게 보내 자신들의 결의 사항올 전달한 둣하다. 다욋
꽈...이새미 아빠[게서 업(8)이 없도다 이 말윤 반록올 피혀기 위한시적인 대귀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그의미상같은 내용이 각기 다른 말로 표헌되고 있다.그럼으로써 다
왹 왕조에 대한 반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중폭(빤#6시켜 준다. 다시 말해 본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욋'이 '이새의0>들'로. '관계"(?50, 할라]-욍래 '영지','영토"란
뚱이다)7) '업'(#랏0), 나할라-왼래'유산', "상속'이란 뜻이다)으로 바뀌어 있윰을알
수 있다. 이것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헌으로1 반복의 강조 효과률 내용상 거두면서도
계반복이 가져 올 단조로옴은 표헌의 변주(땋쾰)틀 통해 끽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다왹 왕조로부터 아꾸 혜택받올 게 없는데 무엇때문에 층성을 하겠느냐는 의미이
다. 그런데이러한 구호는 다욋 가문에 대적한 반란 때마다의쳐져 왔었던바#암하 ##
찧) 이스라엘의 뿌키깊은 지파의식의 발로이다. 어쌨든 본절에는모인 무리들의 타락한
신앙 상태가 잘 암시되어있다. 그들이 다욋콰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다욋과 맺은 하
나넘의 언약올 저버린다는 것이나 진배없기 패문이다. 이렇둣 일시적 고충을이겨내지
못하고 지파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넘의 영원한 언약마저 거스리는 모습은, 지악으로말
미암아 패곡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룰 여실히 입중하고 있다. 너줴의 장맣으로 들
아가찌. '돌아가라'는 말은 왼문에 없는 첨가어(&$01년1다. 그러나 단지 '너회의 장막
으로'(1#4 논11 )라는 말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라"(1 $%1)는 뚱이 된다(#%백74). 한
편 여기서 시대의 변화에도 블구하고 '가윽'이란 말대신 '장막'(5#8, 오쉘)이 사용돤
것은옛 유목 생활에서 발생혀여 굳어진 관습적 표헌이다. 8} W 주석 참조. 네 집이나
듬아보리.'집'에 해당하는 "바이트'(2"3)는 '족속'으로
=====12:16
온 이스라엘 - 1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북쪽 지파에 한해 사용
된 대표적 구절 중 하나이다(삼하2:9,17;3:10;19:41:20:1). 왜냐하면 '온 이스라엘'
(all Israel)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는 17절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
손'과는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한편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란 용어가 남왕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사 5:7;미 3:1).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 북쪽지파가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것이 바로 이 순간임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대답하여 - 이에 해당하는 원문( ... ,야쉬부...다바르)은 '말을 보내
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북쪽 지파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자신
들의 결의 사항을 전달한 듯하다.
다윗과...이새의 아들에게서 업(業)이 없도다 - 이 말은 반복을 피하기 위한 시적
인 대귀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그 의미상 같은 내용이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
다. 그럼으로써 다윗 왕조에 대한 반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폭(增幅)시켜 준다. 다시
말해 본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이 '이새의 아들'로, '관계'( , 할라
크-원래 '영지','영토'란 뚱이다)가 '업'( , 나할라 - 원래 '유산', '상속'이
란 뜻이다)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으로 1 반복
의 강조 효과를 내용상 거두면서도 2 반복이 가져 올 단조로움은 표현의 변주(變奏)
를 통해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 다윗 왕조로부터 아무 혜택받을 게 없는데
무엇 때문에 충성을 하겠느냐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호는 다윗 가문에 대적한
반란 때마다 외쳐져 왔었던바(삼하 20:1)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지파의식의 발로이다.
어쨌든 본절에는 모인 무리들의 타락한 신앙 상태가 잘 암시되어있다. 그들이 다윗과
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다는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시적 고충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파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
원한 언약마저 거스리는 모습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 '돌아가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첨가어(添加語)이다.
그러나 단지 '너희의 장막으로'(To your tents!)라는 말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라'
(Go home!)는 뜻이 된다(Montgomery). 한편 여기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옥'
이란 말대신 '장막'( , 오헬)이 사용된 것은 옛 유목 생활에서 발생하여 굳어진
관습적 표현이다. :66 주석 참조.
네 집이나 돌아보라 - '집'에 해당하는 '바이트'( )는 '족속'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수 17:17;삿 1:22;10:9;삼하 19:20등). 그러므로 본절은 다윗 가문은 자기의
속한 지파, 즉 유다 지파나 통치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달리 말해 다른 지파에
대해서는 왕노릇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 북쪽 지파들은
더 이상 다윗 왕조의 왕권을 인정치 않겠다는 전갈을 한 것이다.
=====12:17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 - 단순히 유다 지파라 하지 않고 좀더 포괄적으
로 '유다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기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는 유다
지파가 아니면서도 르호보암에 동조하여 유다 지경(地境)에 머무른 사람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이들이 유다의 '성읍'(cities)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앞서 솔로몬이 벌인 활발한 국제
무역(10장)은 이스라엘 사회상에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그중 하나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한
지파 의식을 약화시키고, 도시의 재력(財力)과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한 도시 주민들
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도시 주민 중에는 비록 북쪽 지파 출신이지만, 농경 중심의
북왕국이 갈라져 나가는데 동조하기 싫어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Morgenstern).
=====12:18
역군(役軍)의 감독 아도니람 - 개역성경 및 영어 성경에 아도니람(Adoniram) 또는
하도람(Hadoram, eogk 10:18)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 '역군의 감독'아름은 실상 원문에
'아도람'( )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이 아도니람은 본래 선왕(先王) 솔로몬의
주요 관원 중 한 명이다(4:6). 그런데 그가 다윗 시대의 '아도람'과 동일 인물인지
는 분명치 않다(삼하29:24). 어쨌든 본절의 아도니람은 강제 노동의 감독관으로 상당
히 이골이 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
닐 수 없었다. 한편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 때문에 10지파가 이탈하겠노라고 선언
한 판국에(16절) 르호보암이 아도니람을 그들에게 파견한 것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강압정책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표시였다. 따라서 10지파는 아도니람을 돌로 쳐죽일 뿐
아니라 르호보암의 신변마저 위협할 정도로 분노하고 말았다.
급히 - '급히'에 해당하는 '아메츠'( )는 '힘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르호보암이 달아나는 일에 힘을 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12:19
오늘날까지 - 이 말은 남북 왕국의 대치 상태를 전제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열왕기
의 최종 기록 연대는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의 시기(B.C. 561~537년)이다.
본서 서론, '기록 연대' 참조. 아마도 이러한 사태는 본서 저자가 왕국시대 당시의 어
떤 사본 내용을 그대로 차용(借用)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본
은 유다 왕국의 실록과 같은 문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기록 내용이
상당히 다윗 왕조에 우호적인 성격(북왕국의 행동을 '배반'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띠
고 있기 때문이다.
=====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 이는 세겜에서 르호보암과 북쪽
지파가 대면하는 데 줄곧 여로보암이 동행했다는 앞서의 기록과 모순되는 듯한 구절이
다(3, 12절). 그러나 본절의 '온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의 온 백성으로 이해하고,
앞서 세겜에 갔던 '온 이스라엘'은 북쪽 지파의 대표자들만을 지칭했던 걸로 이해하면
별로 무리가 없다(Bahr,Hammond).
공회(公會) - '공회'( , 에다)는 '지정하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개 약속
된 모임과 무리(congregation)를 동시에 지칭한다. 한편 본절에서 여로보암은 북이스
라엘 10지파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공회'에 초빙되어 왕으로 추대되고 있다.
왕을 삼았으니 -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즉위하는 장면이다. 르호
보암의 어리석음(12-19절)은 이처럼 북쪽 10지파로 하여금 다윗 가문으로부터 분리해
나가는 당위성을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망명자 여로보암의 초빙(2, 3절)과 그에
따른 왕위 등극은 북쪽 지파의 민의에 따라 공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다윗-솔로몬 치
하시 자신들의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민주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선민 이스
라엘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를 생각할 때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 즉
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주의적 산물이라 하겠다. 한편 본서 저자는
이후 열왕의 즉위를 기록함에 있어 남과 북에 차이를 둔다. 즉 남왕국 왕들의 즉위시
에는 르호보암의 예에서 보듯, 1 즉위시의 연령, 2 통치기간, 3 모친의 이름 등이 공
식처럼 언급된다(14:21;15:1, 2, 9, 10;22:41, 42). 그러나 북왕국의 왕들의 경우에는
즉위 연령, 모친의 이름이 생략된다(15:25, 33;16:8). 아마도 이러한 구성의 특징은
본서 기자가 여러자료를 참조하는 가운데 자기 격식에 맞춰 본서를 기록했던 데서 생
긴 특징일 것이다( Szikszai).
=====12:21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 - 베냐민 지파가 르호보암의 편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상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는 이후 줄곧 다윗 왕조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삼하 2:15;3:7 이하;16:5 이하
;20:1,2). 혹자는 이 문제를 수도(首都) 예루살렘이 유다와 베냐민 경계선 위에 있었
던 사실(수 18:28)에서 해결한다(Hammond). 즉 유다와 분리될 경우에 생길 예루살렘의
상실을 베냐민 지파가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공동의 이해 관계가 옛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지파의 연합을 이루게 한 셈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상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왜
냐하면 벧엘, 길갈 등과 같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북왕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29절).
싸워...돌리려 하더니 - 이처럼 무력과 강경 일변도인 르호보암의 모습에서 '힘-지
향적' 특성을 읽을수 있다(14, 18절).
=====12:22
스마야 - '스마야'( )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그런
데 성경에서 스마야(Shemaiah) 선지자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다음 세가지 뿐이다. 1
본장에서 르호보암의 군사 행동을 중지시킨 일(23,24절). 2 애굽 왕 시삭(Shishak)의
예루살렘 침입 때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일(대하 12:5). 3 역대기 저자가 르호
보암의 기사를 종결하면서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을 인용한 사실(대
하 12:15). 이로 미루어, 스마야는 르호보암 당시 남왕국 유다에서 활약한 선지자로
서,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하 12:5-8).
=====12:23
유다 왕 - 본절에서 처음으로 '유다 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비록 본절의
시점이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해 북진을 준비하였을 때(21절)이지만 이미
왕국 분열은 기정 사실이었다(11:29-39). 따라서 반쪽만의 왕이기를 자존심 상해하는
르호보암에게 본서 저자는 냉정히 '유다 왕'으로 호칭하는 직절(直節)함을 보이고 있
다. 이로 보아 본서 저자는 왕국 분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24절).
그 남은 백성 - 여기서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면서 유다 성읍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
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절 주석을 참조하라.
=====12:24
형제 - 본절에서 '형제'( , 아흐)는 공동 조상에게서 나온 광범위한 후손을 모
두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북왕국 이스라엘도 남왕국 유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며 형제이다. 이와 같이 민족 공동체의 단일성을 나타
내는 경우 '형제'란 말은 보통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과 병행되어 등장한다(레
25:46-48;신 3:18;24:7 등).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이스라엘 남북 분열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북부의 선지자 아히야나 남부의 선지자 스마야가 모두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11:31-33). 15절주석 참조.
=====12:25
세겜을 건축하고 - 새로이 수립된 북왕국의 체제 정비에 있어 여로보암이 첫번째
로 한 일은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Dentan).그리하여 그 수도는 븍쪽 지파들의 정치.
종교적 중심지인 세겜(Shechem)으로 결정되었다(1절). 본절은 이제 이와 관련 여로보
암이 수도 세겜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의 건설 작업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1절 주
석 참조.
부느엘 - 한글 개역 성경에 '브누엘'(Penuel, 삿 8:8)로도 번역되어 있는 '부느엘'
은 '브니엘'(Peniel)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은 세겜 맞은 편, 그리고 요
단 강 동편 얍복 강가에 위치하였는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하여 붙
여진 지명이다(창 32:30). 아마도 여로보암은 수도인 셰겜의 동쪽 방어를 위해 이곳에
요새를 세웠을 것이다.
=====12:26
나라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 비록 세겜을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여로보암의 마음을 불안케하는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다윗 이래로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능 때문이었다(27절;삼하 6장). 신 12:4-14 강해. '예
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 참조. 그러므로 여로보암에게는 남왕국과의 철저한 분리를
위해서도 어떤 종교적 구심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 우상 숭
배(28-33절)의 발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은 경건한 신앙인
들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왔으니 그들 중 상당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대탈출을 시도하였다(대하 11:13-16).
=====12:27
올라가면 -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볼때 예루살렘이 실지로는 아랫쪽 남방임에도 불
구하고 '올라가다'( , 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변두리가 중심 지역
에 대해 갖는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말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의 예루살렘
의 지위와 중요성을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북쪽
지파들에게도 명실상부한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6-8장).
그 주 르호보암 - 문자대로라면, 여로보암도 르호보암이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내
심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Wordsworth). 왜냐하면 르호보암의 앞에 '주'(
, 아돈)라는 호칭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를 옹호하는 본서 저자가
여로보암의 행동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용한 호칭임을 잊지말아야 한다(Hammond).
따라서 본절의 표현 그대로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을 정통 왕으로 인정했다고 보기 어렵
다.
=====12:28
이에 계획하고 - 여기서 '이에'는 26, 27절의 음습(陰濕)한 동기를 가리킨다. 그러
로 26, 27절은 28-33절의 원인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개획하고'( , 이와아츠)
는 '의논하다'는 뜻이다. 즉 여로보암은 그가 염려하는 문제를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의
논한 것이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 이처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의도는 물론 북왕국 백성
들을 차단하여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단순히
본절의 금송아지를 이방의 우상 숭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사실 성전 순례를 원하는
백성들은 그야말로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만일 여
로보암이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멸의 길이다. 이렇게 볼때 금송아
지는 적어도 시초에는 오히려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그 무엇이었던 것같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여호와의 발등상으로서의 상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Gray).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이러한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1 소의 형상은 여
호와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이었다는 점(Dentan). 2 비록 중심적인 지위
는 갖지 못했어도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소의 형상은 발견된다는 점(7:25). 3 예후, 엘
리야 등이 바알제의를 공격할 때에도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
(Cobern).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형상은 과거 모세 당시처럼 우상으로
사용될 위험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출20:4-6).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금송아지 형
상은 상징으로 머물지 않고 우상화된 적이 종종 있다(호8:5이하;12:11;13:2). 본절에
서의 여로보암의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어지럽히는 이방 종교
와의 혼합을 낳았다. 더구나 본문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참된 제사의 동기를 갖지않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 것이다(15:30,34;16:2,19,26).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 이는 출 32:4에서 언급된
말로서,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자체를 거부케 하려는 의도가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다. 즉 과거 시내 산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
자로서의 모세를 인정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여호와의 언약
도 거부하였다(출32!1-6). 그런데도 본절에서 여로보암은 모세 당시의 패역했던 상황
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도록 종용하
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솔로몬 말기의 부패상과 르호보암의 폭정 등을 경험하였던 백성
들 중 대다수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라 주장한 여로보암의 궤
사(詭詐)한 말이 그럴듯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마저
팔아버리는 행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마 26:14-16;27:3-10).
-8).
=====12:29
벧엘에 두고...단에 둔지라 - 이처럼 여로보암이 북왕국의 예배 중심지로서 특별히
벧엘(Beth-el)과 단(Dan)을 택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이 두 장소는
전통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즉 벧엘은 과거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은곳이며(창 12:8;13:3, 4;28:11-19;31:13;35:1) 사사 시대에는 언약궤가 오랫
동안 이곳에 있었다(삿 20:26). 그리고 단은 그 자체의 신당과 제사장을 소유했던 곳
으로서 그 제사장직이 모세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었다(삿 18:30, 31). 2 벧엘
은 북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지역에(수 18:13), 단은 북방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바(수
19:47) 북이스라엘의 전백성들에게 거리상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
은 실로(sHILOH)대신 단이 선정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즉 실로는 여러 면에서 단보다
더 예배 중심지로 적합하였으나(수 18:1;삿 21:19;삼상 1:11) 벧엘과 마찬가지로 남방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피택되지 않은 것이다.
벧엘 - '벧엘'( )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12:8). 이곳은 예루살
렘에서 북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현재의 베이틴(Beitin)이다. 본래 지명은 루스
(Luz)로서(창 28:19)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선상이면서 동시에 남북 왕국의 경
계선상이기도 한 능선에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좋은 샘이 많이있어 일찍부터(B.C 3500
년경?) 성읍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랜 예배 중심지이기도 하다
(Jamieson).
단 - '단'( )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팔레스틴 최북단의 도시로서 두로와 다
메섹을 잇는 무역로를 굽어 보며 서있다. 이러한 단이 벧엘과 더불어 제2의 성소로 선
정된 이유는 북왕국에서도 북쪽에 거주하는 백성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Hammond).
그런데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두로와 잦은 교류를 하는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형상은
아무래도 위험했다(White).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 '이 일'이 지칭하는 바는 여로로암이 금송아지 형상을 벧
엘과 단에 둔 일이다(29절). 그런데 이 일이 죄로 판단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이는 십계명을 어긴 행위이기 때문이다(출 20:4). 2 이는 하나님이 선택
하신 성소(예루살렘)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신 12:5). 3 그 결과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이는 백성들이...숭배함이더라 - 본절의 해석에 대하여선 학자들마다 제각기 의견
이 분분하다. 그러나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백성들
이 '하나같이' 숭배했다"로 보는 입장(Ewald). 2 "백성들이 '한 무리는 벧엘로 한 무
리는 단으로' 숭배하러 갔다"로 보는 입장(Rawlinson 등). 한편 이와 유사한 설명으로
"백성들이 두 곳으로 갔는데, 그 먼 단에까지 숭배하러 갔다"는 해석도 있다(Bahr). 3
초기에는 백성들이 단으로만 숭배하러 갔다고 보는 입장(Hammond). 이상의 세 견해 중
비교적 타당한 것은 두번째 견해인데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단에까지 이르는
전백성이 숭배하였다"는 신축성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2:31
신당을 짓고 -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훼방하기 위해 여로보
암이 취한 조처 중 하나이다. 즉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백성들이
주로 산당에서 예배하였는바(3:2;삼상 9:12) 이제 여로보암은 다시금 백성들로 하여
금 그같은 산당에서 예배하도록 회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산당들은 성전과 달
리 언약의 법궤도 임재의 보증도 없는 곳이다(Keil). 이러한 산당에는 가나안 종교의
우상 숭배 의식과 결합할 가능성 및 유혹이 늘상 있어 왔다. 이에 관하여선 삼상 9:1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보통 백성 - 우리말에서 '보통'이 갖는 순한 어감(語感)과 달리 원문의 '미크초
트'( )는 '황폐하다'는 뜻으로 좀 냉소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통'이란
말은 '아무나 마구 되는 대로' 정도의 비웃음 띤 표현이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레
위인들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출 28:1-4). 그런데도 여로보암이
레위 사람들 대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결과 레위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
키기 위하여 대거 남왕국으로 남하하고 말았다 (대하 11:13-17). 이러한 사실이 암시
하는 바는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율법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의 고
유 사명이 여로보암에 의해 훼손된 점이다(Hanke). 민 35:1-8 주석 참조.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의 불법성을 두드러지게 증거해 준다.
=====12:32
팔 울 곧 그 달 십 오 일로 절기를 정하여 - 솔로몬 성전의 절기는 7월15일(유대
력)이었다(8:2). 창세기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이 절기는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로서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이다
(8:2, 65;9:25).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 절
기의 날짜를 8월 15일로잡은 것은 자의(恣意)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쪽전통의 복원(復
元)이다. 즉 북쪽은 원래 남쪽에 비해 수확이 한달 가량 늦어졌던 것이다(Bahr,
Keil). 그러나 여로보암의 진정한 목적은 절기의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다. 다
만 이는 백성들이 7월의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여로
보암은 이로써 체제경쟁에 있어 나름의 종교적 정통성을 구색(具色) 갖추려 했던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절기를 7월로 통일되게 지키도록 한 율법과 상반되는 것이다(레
23:34). 따라서 이 역시 죄악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와같은 절기의 분열은
곧 통일 왕국의 정치적 분열에 이어 종교적 분열도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이 행하여 - 이는 곧 남왕국 유다에서 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제사 의식을
흉내냈음을 말한다.즉 절기 때의 제의(祭儀)는 단지 한 장소(벧엘)에서, 왕이 친히
집전(執典)한 것이다(Hammond, 8:62-66;9:25).
=====12:33
자기 마음대로 정한 - 원문은 "그의마음( , 레브)에서 궁리해 낸( , 바
다)"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바다'는 나쁜 의미에서 무엇을 궁리한다는 부정적 어감이
실린 단어이다.
분향(焚香)하였더라 - 원래 '분향하다'에 해당하는 '카타르'( )는 분향 뿐 아
니라 모든 번제를 지칭할 수 있는 전문적 용어이다. 그러나 그 문맥상 부정적인 이교
제사와 연결되는 경우에는 대개 '분향하다'로 번역되고 있다(대하 25:14;28:4;렘
1:16;18:15;44:17;호 2:13등). 그대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로 '불사르다'로 번역
된다(출 29:18;레 1:15;3:16;4:19등). 그런데 본절에서 여로보암의 제사는 그 부정적
의미가 채택되어 '분향하다'로 번역되었다. 여로보암에 대한 열왕기의 부정적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15:30, 34;16:2등).
열왕기상 제 13장
=====13:1
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 , 이쉬 하엘로힘)이란 '선
지자'( , 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비'와 '이쉬 하엘로
힘'간에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으니 곧 전자가 '선지자의 소명'을 강조하는 단어라
면 후자는 선지자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 하겠다
(H.Austel, R.D.Patterson). 아무튼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는 대개 두 가지경우
에 사용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익명(匿名)의 대상을 지
칭하는 경우(삼상 2:27; 대하 25:7). (2)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신 33:1; 왕상 17:18; 대하 8:14 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열왕기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2:22; 20:28; 황하 1:9; 4:7; 5:8;
6:6; 8:2 등).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선 유다 출신의 선지자란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자에 따라선 선지자 잇도(대하
9:29)나(Josephus, Antip, VIII) 스마야(대하 12:15)일 것으로 추정한다(Tertullian).
그러나 잇도나 스마야가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한 선지자들임에 반해 이 '하나님의 사
람'은 본장에 등장, 잠시 활동하다 죽고 말았으니(20-24절) 온당치 못한 주장들이다
(Lange, Pulpit Commentary).
여호의의 말씀으로 인하여 - 공동 번역은 이를 '야훼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띠고'
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인하여'에 해당하는 원어 '비'( )는 '안에'(in)
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
기서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었을 때 그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며 선포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 이처럼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에까지 여행하였다는 것은 유감이 아
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북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선지자들이 없었
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
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일삼았던 점(11-19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여로보암이 ... 분향하는지라 -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절기인 8월 15일을 맞이
하여 벧엘에서 친히 제의(祭儀)를 집전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12:32 주석을 참조하라.
=====13:3
예조(豫兆) - '예조'( , 모페트)는 '이적' (출 4:21; 대상 16:12; 시
105:5,6)으로도 번역되긴 하나 여기서는 전조(前兆), 즉 앞일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
조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이 조짐은 다만 그 앞일을 지시하는 기능으로 한정된
다. 즉 본문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
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기능하고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附隧現像)일 따름이다. 즉 '예조'란 어디까
나 그 이적 자체의 경이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
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되었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이다
(출 4:21; 대상 16:12,13; 시 105:5,6). 특히 여로보암은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경고
의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잠깐 놀랐을 뿐(4절) 곧 완패(頑悖)한 심령으로 되돌아
갔으며, 결국에는 그의 온 집이 멸절당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다(33,34절; 15:27-30).
이는 여호와의 말씀히신 예조라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예조(3,5절)와 예언(2절)
의 관계에 있어 그 강조점이 역전(逆轉)된 듯한 느낌이 있다. 즉 예조 자체가 여
호와의 말씀 내용이요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동 번역은 본절을 '그 말이 야
훼(여호와)께 받은 것임을 보여 주는 한 표적'으로 풀이하여 그 의미 관계를 잘 보여
준다(Living Bible, this proof that his message was from the Lord).
=====13:4
여로보암 왕이 ... 들을 때에 -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극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즉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
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다는 점이
다. 이는 곧 훗날 벧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
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
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돌발성(突發性)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들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막 분향하던 참에 들려온 심판 선포에 소스
라쳐 놀람과 분노의 당혹한 숨결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
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
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순간 손이 말라버렸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
미암은 마비 현상이었던 것 같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하나님께
서는 모든 권능의 근원이 당신께 있음을 입중하였으며,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미리 경고하셨다(욥 12:13; 37:23).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를 늘
보호하고 계신다(시 17:8). 따라서 대적들의 어떠한 핍박도 주의 종들을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단 6:22; 행 16:26).
말라 - '말라'에 해당하는 '야베쉬'( )는 '시들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
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킨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
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한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 15:6; 19:5-7; 렘 12:4; 50:38).
=====13:5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 여기서 '재'는 희생(犧牲) 제물인 짐승을 태우고 난 뒤
남은 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이러한 재는 제사장
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밖 재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그곳에다 버리도록 되어있다
(레 1:16; 6:10,11). 그런데 본절에서 재가 제단에 쏟아졌다는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
로보암의 희생 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음과 그 제사와 제단이 부정(不淨)하다는 사실
을 의미한다(Lahge,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P.204).
=====13:6
네 하나님 여호와 -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my God)으로 부르지 아니하
고 '네 하나님'(your God)으로 말한 사실이 주목을 끈다. 이에 대하여선 학자들이 대
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불법한 여로보암이 감히 자기 하나님으
로 부를 엄두를 못냈다는 주장(Matthew Henry, Wordsworth). (2) 이는 다만 '너를 보
내신 그분께'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주장 (Bahr, Hammond).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후
행적과 그 심령의 완악함을 볼 때 첫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33,34절). 따라서 위
의 견해 중 후자의 설명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Pulpit Commentary).
은혜를 구하여 - '은혜를 구하여'( , 힐라 에트페네)는 문자대로
는 '얼굴을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즉 이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려고 '얼굴'(
, 프네)을 드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는 간청이
다.
=====13:7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제의를 하
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초점을 두고 설명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왕권을 수호키
위해 여호와 신앙의 규례마저 무시한 여로보암(12:27-3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은 가슴 섬뜩한 일이었다(3-6절). 즉 이는 그의 왕권에 대한 백
성들의 의심을 살만한 것으로서, 자칫 국내적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
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의 소리가 신적 권능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
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를 뇌물로 회유시키려 했던 것이다(Bahr).
=====13:8
왕과 ...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 집으로의 초대와 식
사는 우호 및 친교의 표시이다(창 13:1-8; 19:1-3). 따라서 본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여하한 교제도 나누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백
성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우
상 숭배자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요 4: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교제를 금할 대상으로서 탐람하는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討索)하는 자, 분쟁을 조성하는 자 등을 꼽은 바 있다(롬 16:17; 고전 5:11; 살
후 3:6,14; 딤후 3:5; 약 4:4; 요이 10절).
=====13:9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까닭은
귀로의 도중에 여하한 이유로든 벧엘 사람들과 더블어 지체됨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Keil & Delitzsch).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들어간 것은 오직 경고를
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하한 사귐이나 지연이라도 이 경고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감소되기 마련이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 모든 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의 사람이 실수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그는 벧엘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식사 초대에 응하고 만 것이다(18,19절). 향편 본문에서 왔
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벧엘에
들어올 때 취한 길을 나갈 때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10절). (2) 일단 진행한 통로를
여하한 이유로든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16,17절).
=====13: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성공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
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km 지점으로 남왕국 유다와
의 번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2:29 주석 참조. 이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벧엘까지 온 것이 그리 먼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사명은 홀연히 벧엘에 나타나 경고를 던지고는
지체없이 사라지는 데있었다.
=====13:11
늙은 선지자 - 이 선지자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대개 부정적이
다. (1) 자신의 아들들로 하여금 여로보암이 세운 절기 행사(12:32,33)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는 점. (2) 여로보암 치하에서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를 구하는 자들'(대하 11:16)이 대거 남왕국의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벧엘에 남아 있었다는 점. (3) 받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거
짓말한 점(18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늙은 선지자는 이념적으로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
에 동의하고 있던 인물일 것이다.
이날에 ... 고한 말씀도 ... 아비에게 고한지라 - 이처럼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은
아비에게 그날의 사건을 낱낱이 고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람의 저주의 내용과 예조
(2-5절) 및 하나님의 사람이 취해야할 행동 지침(8,9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
든 것을 늙은 선지자가 들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다음 행동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그는 아들들의 얘기를 듣고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13,14절).
=====13:12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 이러한 물음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속박되는
금기 사항(9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미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사람을 꾀일 요량(料量)이 서 있었던 것이다(15-19절).
=====13:13
나귀에 안장(鞍裝)을 지우라 - 도보로 귀로에 오른 하나님의 사람(10절)을 신속히
쫓아가 만나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늙은 선지자의 이러한 신속함과
단호함은 본문의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는 본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어딘가 느슨하고 풀어진 인상을 준다(14,19
절). 한편 늙은 선지자가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겠다는 열의를 보인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 서너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은
자책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책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2) 자신
이 처한 답답한 상황을 호소하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이적을 행한 선지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순수한 열의에
서. 한편 '나귀'는 고대 근둥 지방에 있어서 보편적인 승용(乘用) 동물이었다(삿 1:
14; 10:4; 12:4; 삼상 25:20; 삼하 17:23; 왕하 4:24).
=====13:14
상수리나무 - 원문에는 '하엘라'( ), 즉 ' 그 상수리나무'로 되어있다. 따
라서 이 상수리나무는 어느 특정 장소의 잘알려진 나무였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커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을 걸로 추측된다(Hammond). 한편 상수리나
무(oak)는 크고 단단한 재질을 가진, 높이 20-25m가량의 나무이다. 성경에서 이 나무
는 종종 '힘', '위엄', '장수' 따위를 상징하였다.
앉은 것을 보고 - 커다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다리를 쉰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잘 알려진 장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사명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석연찮다. 저주와 혐오의 장소인
벧엘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사명에 포함된 것이다(8,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서의 성공에 방심한 탓일까 유혹의 가능성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
다. 이것은 경고의 냉혹성을 보여 주어야 할 그의 사명에 아무래도 걸맞지 않는
것이다.
대답하되 그러하다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솔직함과 순진함에서 늙은
예언자의 노회(老獪)함(8절)과 비교된다. 즉 그는 타인이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3:15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 이것은 가히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정면 도
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벧엘의 노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에 정면으
로 위배되는 사항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피곤한 중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앞서 보인 직절(直節)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16,17절). 따라서 늙은 선지
자는 다음 단계의 회유를 준비해야 했다.
=====13:16
이곳에서 - 이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 벧엘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누구와든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한
이유는, 협오스런 금송아지 숭배가 행해지는 장소(12:32,33)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기
위함이다(1-5절). 그런데 아직까지 그가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
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14절)은 어딘가 부주의와 방심의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이미 잘못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Bahr 등).
=====13:17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준행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첫 믿음을 지키는 문제, 거기에 따라 신앙을 흐트러뜨리는 나태
함의 유혹만큼 끈질긴 것은 없다. 본절의 선지자가 받았던 유혹, 이는 현대를 살아가
는 모든 자들이 당면한 밥(물질)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유휵을 물리친 그
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마 4:3,4) 이겨낼 수 있다.
=====13:18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 앞서의 정면 도전(15절)이 저항을 받자 늙은 선지자
가 취한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사람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선지자의 부류에 속함을 밝힌다. 사실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경계 의식을 낮추고 동료 의식을 갖기 쉽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의
자기 신분 표명은 무엇보다도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
다. 즉 '선지자'( , 나비)란 말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자신이 '대변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선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천사가...내게 이르기를 - 여기서 '천사'( , 말라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
언(傳言)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킨다(창 22:11,15; 31:11; 민 22:32; 삿 13:3,16등).
그런데 혹자는 천사가 통보해 주는 말씀의 권위가 개개인의 마음에 확신시켜 주는 하
나님의 주관적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일 거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선뜻 벧엘 선지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
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앞서 받은 계시와 벧엘 선지자의 말 간에
상충되는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서는 심사 숙고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야 했으나 그
러하지 아니하였으니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속임이라 - '속임이라'에 해당하는 '키헤쉬'( )는 '가장하다'는 뜻이다. 그런
데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형태이다. 한편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시험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바 있다(마 4
:1-11).
=====13:19
이에 - 즉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하는 바람에'라는 뜻이다. 비록 하
나님의 사람이 얼른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휴식한 것은 실
수라 하더라도, 실상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은 순진 무구한 유다의 선지자와 거짓말하는 벧엘의 선지자를 뚜렷이 대비
시켜 준다.
=====13:20
저희가 상(床) 앞에 앉았을 때에 - 본장이 전해 주는 이야기의 특징은 언제나 어
떤 사건의 진행 중에 이에 대한 부정(No!)의 말씀이 들려 온다는 점이다. 4절 주석 참
조. 본절 역시 이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즉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이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전(곧 금지된 교제 행위를 완료하기 전)에 이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들
려 오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선지지에게 임하니 - 본장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극
적 요소는 반전(反轉)에 있다. 즉 앞서 여로보암에게 징계를 선포했던 자(2절)가 지금
은 도리어 징계를 선포받게 된다(21,22절). 그것도 자기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한 거짓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13:21
외쳐 가로되 - '외쳐'에 해당하는 '카라'( )는 그 자체로 이미 어떠한 메시
지의 선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메시지를 받는 자의 어떤 응답을 '불
러내는'(call out)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카라'는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
암에 대해 했던 행위이다(2절).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카라'를 받는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다음 사항을 생
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꾼들은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히 3:14; 계 2:10).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전무 후무한 지혜를 소유하였으나 훗날 영적 방만
상태에 빠져 귀중한 은사를 간수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호된 진노를 받았다
(11:3-13).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확신 가운데서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었음
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빌 3
:13,14).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의 능(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고전 15:10). 따라서 주의 일꾼된 자들은 스스로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겸
허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향다. (3)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엄정하다. 즉 하
나님한 때의 업적을 핑계삼아 방만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시는 것이
다.
=====13:22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墓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열조의 묘실, 즉 가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함은 곧 객사(客死)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로 하면 '고향의
선산(先山)에 묻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도 고향과 친척으로부
터 멀리 떨어져 객사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금
기 사항(8,9절)을 어긴 결과 노선지자의 예언대로 객사하여 타관 사람의 묘실에 장
사되고 만다(30절).
묘실 - '묘실'( , 케베르)은 '매장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말에서 '무
덤'이 '묻다'에서 온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묘지는 대개 천연 동굴
이나 인공 동굴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시체에 닿으면 부정하다는 믿음 때문에 묘지
는 보통 성읍이나 마을 바깥에 위치하였다(레 21:1; 민 6:6; 19:13). 그런데 동굴을
묘지로 사용하는 관습은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인들에게서 배운 것
이라 한다(Reed).
=====13: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 한글 개역 성경의 이러한 번역은 좀 애매한 표현이
다. 만일 이 말대로 이해한다면 본절은 '자기(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데리고 온 선지
자(하나님의 사람)'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그러나 본장은 일관되게 '선지자'라는 용
어를 오직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만이 예외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여러학자들의 문법적 분석과 그 결론도 본절이 20,26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Bahr 등). 그렇다면 이 말은 개역 성경과는 달리 '그(하나님의 사
람)를 데려온 선지자(벧엘의 늙은 선지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도보로 다
녔었다(1,10절). 그런 그에게 이제 나귀 한 마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
를 지닌다. (1) 이유야 여하튼, 앞서 왕의 선물을 거절한 그가 벧엘에서 결국 선물 하
나를 받은 셈이다(7절).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준 것
은 친절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자기로 인해 지체된 데 대한 보상 행위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행위에는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생긴 저주(22절)를 시간의 단축으로 해독
(解毒)해 보려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이러한 인위적인 제재(除災) 경향은
이 노(老) 종교가의 특징인 것 같다.
=====13:24
사자 - 사자는 성경 시대의 팔레스틴에 흔한 맹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벧엘의 산
간 지대와 요단 계곡의 숲은 사자의 서식처 였다(왕하 2:24; 렘 49:19; 슥 11:3). 하
지만 이처럼 번성했던 사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13세기경 므깃도(Megiddo)
부근의 레드자(Ledja)에서 죽임당한 후 팔레스틴에서는 멸종하고 말았다.
만나 - '만나'에 해당하는 '마차'( )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연히
맞닥뜨리다'보다는 좀더 능동적으로 '구하다가 마침내 따라잡다' 또는 '찾다가 끝내
발견하다'는 의미를 지닌다(신 4:29; 잠 1:28; 사 55:6; 렘 29:13 등). 14,28절에서의
늙은 선지자의 행동이 바로 이 '찾아가 발견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의 사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덮친 것이다.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성은 본
장면이 지닌 예외성(例外性)에서 드러난다. 보통, 사자라는 맹수는 주리지 않는 한 함
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문 동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한 사자는 그
를 죽여만 놓고 그 시체를 먹거나 어디로 물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희한한 것은 나귀
조차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사자 역시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는 점
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러한 요소들이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에 생각이 미치
게끔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 205).
=====13:25
지나가는 사람들이...보고 -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
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
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왜
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벧엘인과 더불어 음식을 저버리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신들에게 임할 징벌은 실로 엄청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13:26
선지자가 듣고 -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벤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의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
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
었을 것이다(32절).
어긴 - '어긴'( , 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곧
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
어 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1절 주석을 참조하라.
불이시매 - '붙이시매'( , 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
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러
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이다.
=====13:27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이며 동일한 신속함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즉 앞서와는 달리 이제 그
는 전체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
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Montgomery, 민 22:1-24:25).
=====13:28
시체(屍體) - '시체'( , 네벧라)는 '시들다'( , 나벧)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실려 있다. 이처
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거니와 그 자체로
도 하나님의 심판이다. 4절 주석 참조.
길에 버린 바 되었고 - 여타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이다(삼하 2:10이하; 삼상
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신 28:62;
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널브러져 있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신 21
: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
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
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되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
(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리우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받
지 않게 하신 것이다.
나귀와 사자는...찢지도 아니하였더라 -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인한 연출을 계
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진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
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13:29
떠들어 - '떠들어'( , 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이다. 즉 늙은 선지자는
시신을 들쳐 메어 나귀에 실은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연로한
선지자가 손수 치루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반영한다. 26절 주석 참조.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들였
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다.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
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
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이다.
=====13:30
그 시체를...나의 형제여 하니라 - 본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즉 (1)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
로 따르는 요소로서 볼 수 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한다(Hall).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이다
(Hammond, 창 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 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자
신의 묘에 장사했다(마 27:57-60).
오호라 나의 형제여 -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
이다. 그런데 이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 23:2; 삼하
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대하 35:25; 렘 9:16-19; 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KJV, RSV,
그리고 NIV는 본절의 '슬피울며'를 '그들이 애곡하여'(they mourned)로 번역하였던 것
이다.
=====13:31
내가 죽거든...장사하되 - 앞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
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지낸 것이라 한다(Bahr). 그러나 본절은 친척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창조 25:7-10).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 표시'
에 다름 아니다(Bahr 등).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
엘 선지자가 시인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
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 되었다. 즉 약 300년 후 요
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
대지 않았던 것이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
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
만은 아니다(32절).
=====13:32
潁떳 성읍 - '사마리아'( )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
다. 이는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이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인 것이다
(16:24).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Keil, H.J. Austel, R.D.
Patterson). 즉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하겠다. 다시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
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더 넓게 잡혀있다. 이러한 증폭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
가된 것이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절은 '사마리아 성읍
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
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
하다.
=====13:33
이 일 후에도...돌이키지 아니하고 - 본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
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가일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본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
는 이유가 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
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다. 본서 서론 도표,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참조.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주기적으로 부흥했다(Schultz).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다(북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왕국 멸망은 B.C. 568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
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된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
도 남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던 것이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왕국의 왕들은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모면치 못한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말로 북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
리내린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
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왕
국 우상 숭배의 원인균(原因菌)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특히 본절의 '이 일 후에도...'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이다.
보통 백성 -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삼았으므로 - '삼았으므로'에 해당하는 '밀레에트 야도'( )는
문자대로는 '손을 채우다'이다. 이 말은 제사장직 수여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
(Keil). 한편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
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
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이주하지 않
을 수 없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13:34
이 일이...죄가 되어 -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33)등을
의미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이다.
멸망케 되니라 - '멸망케 되니라'( , 솨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
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훗
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만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
년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이다(15:2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