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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양대에서 활쏘는 사람들 <한량> 원문보기 글쓴이: 未少年
호구의 역사
현재, 검도의 전문 용어로서는 「防具」라고 하는 단어는 없고, 「劍道具」라고 하는 것이 정식 명칭이다. 그러나, 「防具」라고 하는 단어도 관용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防具(劍道具) 도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거기서, 防具(劍道具)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防具(劍道具)라고 하는 용어의 변천에 대해서 분명히 해 두자.
용어의 유래「防具」라고 하는 용어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사용된 흔적이 없다. 그 대신하는 말로서는, 「道具」혹은 「武具·具足·竹具足·竹鎧(죽개 - 대나무갑옷)」라고 한 말이 이를 대신으로서 이용되고 있었다. 처음 「防具」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 것은 메이지(明治) 시대가 되고 나서, 군대 조직을 프랑스식으로 고치려고 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있어 최초로 이용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프랑스군의 군사 고문(軍事 顧問)으로서 “드 빌라래” 와 “큘” 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의 검술·총검술이 일본의 육군에게 지도되었다. 군사 고문단이 귀국한 후, 그 내용을 집대성하여 메이지 22년(1889년)에, 일본 국초(國初)의 「검술 교범(劍術敎範)」(총칙, 第一部 正劍術, 第二部 軍刀術, 第三部 銃劍術)이 제정되었다. 그 중, 총검술(銃劍術)의 「器具를 대별해서 총 및 방구(防具)의 2種」이라 하고, 「防具는 가면(假免)·동(胴 - 垂가 붙어 있는것)·肩當(견당) 및 히갑수(甲手)의 4종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처음「防具」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防具」라고 하는 용어의 시초는 아닐까 생각된다. 즉, 프랑스식 검술·총검술을 일본인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방신용구(防身用具)의 약어로서「防具」라고 하는 단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검술 교범」은, 메이지 27년(1894), 메이지 40년(1907), 1915년에 세 번 개정되어 그때마다 일본식의 道具나 기술로 개량되어 갔다. 세 번째에 개정된 1915년 이후는, 군대 검술용의 도구 중, 양손 軍刀術의 것은 기본적으로는 垂れ, 몸통찌름부가 있지만, 일반적인 劍道用의 道具와 같은 것을 사용해도 괜찮게 되었다. 이렇게, 군대 검술 용어인 「防具」라고 용어는, 반대로 일반적인 劍道의 용어와 같이 이용되게 되어, 쇼와 시대가 되면서, 防具라고 하면 검도의 「面·小手·胴·垂」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전쟁 후도 계속되어져 경기로써의 검도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쇼와 27년(1952), 전일본검도연맹이 결성되었다. 다음 쇼와 28년에 제정된 「전일본검도연맹 시합규정」에는, 용구의 조항에 「防具는面·小手·胴·垂를 이용한다.」라고 하는 조항이 있다. 이 규정에 의해, 「防具」라고 하는 말은, 검도의 전문 용어로서 다시 이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검도의 전문 용어의 단계를 벗어난 일반적인 용어로서의 확대는 없었다. 예를 들면, 모로하시 테츠지 著 「大漢和辭典」(다이슈칸 서점, 쇼와 34년)에는, 「防具」라고 하는 단어는 실려 있지 않다. 이것으로만 봐도 「防具」라고 하는 용어는 분명하게 근대의 造語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신무라 이즈루의 「코우지엔(??苑)」(이와나미 서점)의 초판(쇼와 30년)에도「防具」라고 하는 용어는 실려 있지 않다. 이 「코우지엔」에 「防具」라고 하는 단어가 실리는 것은, 제2판(쇼와 44년)으로부터 로,「劍道에서 머리, 몸통, 팔 등을 감싸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도구」라고 쓰여 져 있다. 제3판(쇼와 58년)으로부터는, 「검도나 펜싱 등으로 머리, 몸통, 팔 등을 감싸, 상대의 공격을 막는 도구」라고, 펜싱이 더해지고 있다. 어쨌든, 쇼와 40년 전후에 「防具」라고 하면, 검도의 도구라고 하는 인식이 일반적으로도 인식이 넓어져 가는 것으로 알고 있자. 그 후, 쇼와 54년(1979)에 「검도 시합 규칙·검도 심판 규칙」이 큰 폭으로 개정되어 시합 규칙의 제8조에 「劍道具는, 面·小手·胴·垂를 이용하고, 복장은 연습복(稽古着)·하카마 라고 한다.」라고 정해진 이후, 「防具」라고 하는 말은 이용되지 않게 되고 「劍道具」가 정식 명칭으로서 이용되게 되었다. 덧붙여서, 「연습복(稽古着)」이라고 하는 말도, 1995년「검도 시합·심판 규칙」으로부터, 「劍道着」라고 하는 용어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검술의 道具→防具→劍道具 등의 온 용어의 변천을 염두에 두어 두면서, 防具의 변천을 이해하자. 防具의 발생검술의 防具의 발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호레키·메이와 년간(1751-72)이다 라고 말해져 왔지만, 이 시기에 갑자기 발생해 온 것은 아니다. 유파 무예(류派 武藝)가 완성한 관영·연보 년간(1661-81)무렵부터, 이미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어용 기구가 부분적이라든지 궁리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적힌 사료를 소개하면서 방어용 기구의 발생에 대해서 말해 가기로 한다. 다만, 이 시기의 사료는 매우 부족하여 상세하게 논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 중에, 하나의 사례를 들면, 야마가 소코의 수필 「철 이야기(綴話)(자만 치조우년·지간분 원년)」(히로세 유타카편 「야마가 소코 전집·사상편 제 11권」이와나미 서점, 1940년)에는「죽도 검술의 작법도 ····고는 도구를 입고, 철의 면(面)을 대어, 마음껏 수련할 수 있었다」라고 쓰여 있으며, 간분 삼년(1663) 2월, 紙屋傳心賴春(지옥전심뢰춘, 직심류 원조) 라는 자가 大澤友右衛門(대택우우위문)이란 사람에게 보낸글 중에 「다른 유파에서는 수련시에 피구족(皮具足)과 얼굴에는 여러 가지 도구를 쓰고 수련을 한다」라고 기록되고 있듯이 이직심류 이외의 다른 유파에서는 이미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벌써 에도 시대에 방어용 기구를 사용해 왔음을 뒷받침하는 예도 있다. 또한 에도 초기(1682), “히시카와 모로노부”이 그린 「천세의 우학」에는 끄트머리에 솜뭉치를 장착한 창을 든 젊은이와 면(面)과 수(垂)가 달린 동(胴)을 착용하고 도(刀)를 가진 젊은이가 시합을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사진 1 참조). 이 그림이 그려진 년대가 17 세기 후반, 에도시대 중기에 상당한다. 또, 이 그림에 방구(防具)를 보면 면구(面具)에 면포단 이나 돌수가 없이 다만 안면만을 덮고 있는 정도이다. 또한 수(垂)가 달린 동(胴)은 죽제품처럼 보이므로 후에 죽구족(竹具足)과 같은 것과 같다. “히시카와 모로노부” 는 그 후에도 같은 그림을 「부세속(浮世續)」(에도 초기의 연호4년-1684년)에도 그린 것을 보면, 이른 에도 시대 시기에도 이미 유파에 따라서는 벌써 이런 防具를 사용하는 유파가 있던 것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槍術用의 防具(창술용의 방구)그러면, 검술과 창술 중 어느 쪽이 먼저 防具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下川湖(시모카와조수)는「검도의 발달」(대일본 무덕회 본부, 1925년)에서 “참격(斬擊)을 주로 하는 검술과 자돌(刺突)을 주로 하는 창술은 그 기술을 생각해도, 또한 연습 상 어느 쪽이 위험한가를 생각해 보아도 면(面)이나 동(胴)과 같은 防具는 창술 연습에 쓰여 지던 것이 검술에도 응용되었다.” 는 창술용 防具의 “검술 유용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시대 초기의 무렵의 무예는 벌써 검술이나 창술에 분화해, 단독으로 유파를 이루기는 했지만, 교습의 과정에서는 “外物(외물)”이라고 하여 창술이라면 검술을 상정한 연습을 반드시 행하고 있어 반드시 창술이 검술 보다 먼저 그것을 유용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검술이 먼저인가, 창술이 먼저인가 하는 의논은 관계 하지 않고, 창술의 防具의 변천과 특징만을 말해 검술용의 防具와 비교하기로 한다..\n\n덧붙여 전술한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그림(사진 1)에는, 죽제(竹製)로 생각되는 面에서, 면포단 이나 돌수가 없이 안면만을 가리는 面具가 그려져 있다. 또, 팔뚝(小手)은 붙이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히시카와 모로노부”가 그린「부세속(浮世續)」에서도, 팔뚝(小手)은 그려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 메이와5년(1768년) 판, 상연유의(相淵有儀)의 「예술무공론」에 그려진 정목류(正木流)의 창술 방구는, 「철호면」에 두부·인후부를 보호하기 위한 포단(布團)을 붙인 面과 수(垂)가 달린 죽개(竹鎧), 겨드랑 밑을 보호하는 防具, 허리를 보호하는 면호요(綿護腰)가 그려져 있다.(사진 2 참조). 이 100 년간의 걸쳐서 面은 철제의 강고한 것으로 개량되고 인후부를 보호하기 위해 튼튼하고 폭이 넓은 돌수(突垂)와 면포단이 부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에도 막부 말기의 「風?流槍一切道具圖」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인후부에 대해서는 대나무 도구나 가죽을 이용한 돌수(突垂)를 만들어 붙어 있다.(사진 3 참조). 「風?流槍一切道具圖」(풍전류창일절도구도)은 에도 막부 말기의 사본(年미상)이기 때문에, 面이나 竹具足와 달리, 짚으로 만든 팔뚝(小手)과 정강이 보호구의 그림도 그려지고 있다. 팔뚝(小手)은 검술용 일 것이고 정강이 보호구는 체도(?刀)용일 것이다. 즉, 창대창의 시합뿐만 아니라 검술이나 체도(?刀)-일본식 長刀 등 이종의 시합도 생각해 防具가 궁리되어 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타류 시합이 번성하게 되는 에도막부 말기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n\n한편, 에도시대 후기가 되어도 돌수(突垂)에 대해서는 모든 유파가 사용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文化 9년(1812)에 그려진 「일신관무예계고도·창술」(사진 4 참조)에는 돌수(突垂)가 붙어 있지 않은 面具를 사용하여 서로 연습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 그려진 유파가 아이즈번에 전해진 오우치류, 보장원류, 일지류의 삼류 중의 어느 유파인가는 모르지만 창술의 연습에 두어 방어용 기구를 착용하고 탄포창(끄트머리에 솜뭉치를 장착한 창)을 사용한 것을 알수 있다. 이상 이러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왠지 팔뚝(小手)의 보호구가 그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 것을 알수 있다. 아마, 이는 창술의 연습은 맨손으로 함으로 창술용의 防具에는 팔뚝 보호구(小手)가 없었던 것일까도 모른다. 창술에도 팔뚝이 보호구(小手) 등장해 오는 것은 에도막부 말기가 되고 나서고 검술에서는 에도시대 초기의 무렵부터 팔뚝(小手)을 사용하고 있던 것을 보면, 팔뚝(小手)는 검술용의 것을 창술이 유용 했다고도 생각된다. 어쨌든, 양자가 서로의 防具의 결점을 보완해 가면서 점차 현대의 것에 가까운 형태에까지 개량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검술용의 防具검술용의 防具에 대해서, 전술한 下川湖(시모카와조수)는「검도의 발달」에서는「직심영류(直心影流)에서는, 산전평좌위문광덕(山田平左衛門光德)는 형태 연습의 형식에만 구애되어 기세가 결여된 연습을 보고, 치고 들어가는 연습(打?み稽古)에도 위험이 없는 防具를 궁리해 정덕3년에 이르러 완성했다고 쓰여 져있다. 이하는 下川湖(시모카와조수)의 설을 실증하면서 검술용의 防具의 변천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한다. 직심영류는 초대 杉本備前守政元(신음류神陰流)로부터 5대 神谷?心??光(直心流), 6대 高橋?正左衛門重治(直心正統流), 7대째를 이은 山田平左衛門光?(야마다히로시 사엔몬 고우토쿠)가 자칭한 유파명이다. 이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으로부터 시작하는 직심영류의 “병법 전기주해(兵法?記註解)”에 의하면 후에 직심영류를 자칭하게 되는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은, 18세 때 목검에 의한 시합으로 상처를 입어, 그 후 검술을 한때 중단하고 있었지만, 32세 때 ?正左衛門重治의 유파가 「面·小手 가 있어 부상이 없이 수련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동류에 입문해, 46세 때에 면허를 얻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에게 면허를 얻은 년도는 1684년이므로 그것보다 수십 년 전부터 高橋?正左衛門重治의 유파에서는 방어용 기구를 사용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高橋?正左衛門重治의 유파가 이용하고 있던 防具는 여기서의 기술이 정확하다고 한다면 “면·장갑” 만 사용한 것이 된다. 동(胴)은 대고 있지 않았던 된다. 이와 같은 신음류 계통으로, 센다이로 전해진 협천신음류가 이용한 방어용 기구가 면(面)과 팔뚝(小手)뿐인 것으로부터 생각해보면 신음류의 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면·장갑”을 이용해 연습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스즈키 쇼오죠(鈴木省三)의 센다이 풍속지『仙台風俗志』에 묘사되어 있는 新陰流의 防具는 面과 小手 만으로 보여지고 있다.(사진5참조)「몸통을 타돌시는, 연습복의 위로 상당히 아프게 되어」라고 진술되고 있다. 高橋?正左衛門重治(直心正統流)는「다른 유파와의 상대는 목검, 죽도시합은 무용지사」라고 전해지고 있으므로, 神谷?心?때는 형태 연습(形稽古) 만으로, 防具를 이용하게 된 것은 高橋?正左衛門重治때 부터 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山田平左衛門)이 다 못 쓰고 남겼다고 말해지는 “병법 잡기(兵法?記)”에는, 「兵法稽古之次第 병법계고지차제」의 「吟味?レ之事 음미란레지사」를 설명한 중에, 「右?勝負ニ至テハ面手袋小具足ヲ堅メ、互ニ遠慮ナク勇?一盃ヲ?シ入?可鍛?者也。」라고 쓰여진 곳이 있다. 이것은 죽도 치고 들어 가는 연습을 표현한 것이므로 타이라 사에몬의 만년에는, 방어용 기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자. 平左衛門이 사망한 것은 享保 원년(1716), 이 해는 正德 6년과 같은 년에 해당되므로 시모카와가 말하는 正德년간에 防具가 완성했다고 하는 설과도 일치한다. 게다가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의 삼남으로 직심영류의 도통을 이은 장소사랑좌위문국향(長沼四?左衛門??)(1688 -1767)의 묘비에는 그에 의해 「목검·피죽도(皮竹刀)」가 개량되어 「면·장갑」도, 「철가면」이나 「면갑박」으로 개량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 ·타이라 사에몬으로부터 유파의 의식을 양보해진 것은 호우에이 5년(1708), 그리고 平左衛門이 사망한 享保 원년까지의 10년 정도의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방어용 기구의 개량에 힘쓴 것일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부터 보면, 신음류 계통으로 이용하고 있던 면·장갑을 개량하고 거기에 동(胴)을 더해 防具로서 완성 시킨 것은, 야마다 히로시 사에몬(山田平左衛門)의 만년, 장소사랑좌위문국향(長沼四?左衛門??)이 도통을 이은 正德 연간(1711 -16)의 일 것이었다고 결론을 지어도 실수는 없을 것이다. 직심영류의 防具다음에, 직심영류의 防具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지를 보자. 현존 하는 직심영류의 防具는 유감스럽지만 본 적이 없다. 그러나 富永堅吾가 쇼와 6년(1931)에 묘사한 「諸流派 무도 도구 그림」에 당시 보존되어 있던 직심영류의 防具의 그림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까지 게재한다(사진 6·7·8 참조). 이 그림을 보면, 面은 죽제이고, 突垂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을 알수 있다. 동(胴)은 평죽(平竹)을 끈으로 짠 것. 소수(小手)은 팔뚝 전완부를 가리는 것. 죽도는 병혁부가 없는 것을 알수 있다. 사진 5의 신음류의 防具와 비교해 보면 면은 면포단이 붙어 있는 것과 동(胴)은 竹胴의 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차이로서 들 수 있다. 어쨌든, 사진 6·7·8의 그림은 장소사랑좌위문국향(長沼四?左衛門??)의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말해지는 防具와 큰 차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防具의 개량직심영류가 防具를 완성시키고 나서 50년 정도 지난 호레키 년간(1751- 64)에는, 일도류의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도 「철가면(鐵假面)을 쓰고 죽도구를 이용한」죽도 수련 연습법을 채용했다. 이것은 中西是助의 「일도류병법도포기원」(분큐 원년판)에, 「抑モ中西家ニテ、シナへ打合初リシ濫觴ハ、??年中ノ比」였다고 기록되고, 시로이 토루(白井亨)의 「병법 미지지류변(兵法未知志留?)」(텐포우 4년판)에, 「子定死シ、其子中西子武ニ至リ、勢法ヲ以テ道ヲ?ル事ヲ迂ナリトシ、今天下流布ノ韜袍比較ヲ捷?ナリトスルニ至リ」라고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n\n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가 죽도 수련 연습법을 채용한 이유는, 야스나가(安永) 4년(1775) 12월, 츠가루번 일도류의 山鹿高美가 일도류검술의 득실(得失) 11조항를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에게 문의한 질문서에 대한 답장에 밝혀지고 있다(笹森順造 저 『一刀流極意』一刀流極意刊行?, 쇼와 40년).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는 山鹿高美의 열의에는 감탄했지만 답장에서 1조항만은 도저히 간과 할 수가 없다고 하며, 이 조목만 다음 해 정월 3일부로 답장을 보내고 있다. 그 1조항 이라는 것은, 山鹿高美가 스승인 小野忠喜에게 「목검의 승부, 죽도의 승부」에 물어 온 대답을 그대로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에게도 물어 본 것으로, 오노파 일도류종가(小野派一刀流宗家)의 대답이「죽도의 수련은 비하기에 아이들의 놀이와 같아서 승부의 깊음을 생각하기에 어렵다고 응해」이라고 하는 의견에 대해,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는, 죽도 수련 연습법의 채용에 의해 새로운 방면을 내세우려고 하고 있던 중서충장자무(中西忠藏子武)의 의도에 대한 곡해라며 반론했다. 이 양자의 대립점은 그대로, 그 후의 오노파(小野派)와 나카니시파(中西派)의 일도류 내에서의 세력 소장의 분기점이 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유파에 있어도 죽도 수련 연습법을 채용인가 반대인가 하는 세력 소장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 이 무렵에 다른 유파에서도 지금까지의 組太刀나 목검에 의한 형태 연습법으로부터 죽도 수련 연습법으로 크게 전환하고 갔다. 18 세기 후반부터 19 세기에 걸친 防具의 형태 붙어, 鏃?軒古?(철헌고온)『似匠誤?之弁』(?政六年 사본)에는 「대체로 구족이라고 하면 포 혹은 가죽에 솜을 넣고 단단히 누빈 것에 대나무를 이어 붙인 것이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또, 야마사키 토시수(山崎利秀)『?術義論』(?政3年版)에는 「연습을 시도하기 전에 面, 小手을 착용해 상처나지 않게 함에도 打合도, 勝負의 理는 분명하다」라고 기록되고 있고, 원(園)의 「劍術秘傳獨修行』(?政12年版)에도, 「먼저 두 사람 모두 面·小手·竹具足으로 몸을 감싸 부상이 없도록 조심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죽구족(竹具足)가 꽤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던 것 같다. 에도막부 말기의 防具로서 많은 검도서 중에 있는 「北?漫?」(文化14年)의 그림은 여기서 말하는 竹具足이다(사진 9 참조). 다만, 「北?漫?」에 그려진 防具그림을 잘 보면 왜일까 찌름 垂가 붙어 있지 않음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저번에 직심영류의 防具 그림(사진 6·7·8)에서 지적 했던 대로이다. 찌름垂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 무렵의 검술의 기술에는 찌름 기술이 없고, 面과 小手을 주로 치는 검술인 것일지도 모른다. 찌름 기술에 대해서는, 에도말기의 天保 년간(1830 -1844)에 야나가와번의 大石進가 5자3치의 長竹刀로 에도의 유명한 사범을 찌르기로 죄다 패배시켰다고 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것도, 大石進이 大石神影流의劍術만으로는 안되어 大島流槍術(창술)의 사범으로 부터 창술의 찌름 기술을 응용해 검술용 防具의 약점을 찔러 이긴 것으로 말 할 수 있다 라고 한다. (藤吉?『大石神影流를 말한다.』自刊, 1963년). 이 大石進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이후 長竹刀가 유행했다. 또, 에도 말기의 검술용 防具는 高野佐三?의『劍道』(良書普及? 검도 발행소, 1915년)의 삽화에 게재되어 있는 것 같은, 찌름 기술에도 견딜 수 있는 것 같은 폭의 넓은 찌름 垂를 붙인 죽구족(竹具足)가 만들어졌다(사진 10 참조). 에도에서의 유행은 점차 지방에도 퍼져, 이 무렵이 되자 찌름 垂의 것 꽤 폭이 넓은 것이 지방에서도 발견되어 있다. 天保 7년(1836)과 명기되어 있는 南?津郡 伊南村(지명임)에서 발견된 防具는 竹面, 죽구족(竹具足)의 소박한 손수 만들기의 것이지만 찌름 垂는 꽤 폭이 넓은 것이 붙어 있다(사진 11 참조). 伊南村에서는 달리 鐵面의 防具도 벌써 발견되어 있으므로 지방에 있어서 정확히 이 무렵(에도 말기의 연호기)이 竹面으로부터 鐵面에의 이행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이상과 같이, 철면에 머리 부분·인후부를 방호하는 포단이나 찌름 垂를 붙인 面과 흉판이 붙은 동(胴)은 창술용의 것을 검술이 유용 해 검술에 어울리게 개량하고 간 것 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小手에 대해서는 검술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창술이 유용 해 창술용으로 개량해, 유파에 따라서는 다른 한쪽의 어깨를 완전하게 감싸는 小手도 고안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양자가 서로의 결점을 서로 보충하면서 防具를 개량 시키고 가는 것은 아닌가? 어쨌든 여기에 이르러 간신히 오늘의 검도와 같은 突垂가 붙은 面, 小手, 胴, 垂가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 이 이후부터는 防具의 부분 개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에도의 마을에서는 이러한 竹具足나 죽도를 취급하는 가게가 가지바시(鍛冶橋)에서 아타고시타(愛宕下)근처와 시타야 오나리카이도우(下谷御成街道沿)가에 많이 있었다. 牟田高惇「諸?廻?日綠」(『?筆百花苑?第13?』중앙공론사,1979年)에도「日蔭町高崎や江皮どふ?ツ?。金??ニ而?置也.」라고 하는 기술되어 있다. 피동(皮胴)의 가격은 한냥. 죽도는 2백문에서 2백70문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牟田를 지나 日蔭町高崎(히카게 마을 타카사키)와 가지바시(鍛冶橋)부터 토오카이도(東海道)를 지나 서쪽으로 시바구치(芝口)2 - 3번지, 겐스케마을(源助町)·露月町의 서쪽 대로에서 그리고 가까이의 아타고시타(愛宕下)에는 직심영류의 나가누마 도장(長沼道場)도 있는 검술의 번성한 지역이었던 것을 알수 있다. 또 후에, 막부가 츠키지(築地)에 講武所(구무소)를 창건 했던 것도 해안 수비라고 하는 조건과 함께 이 지역이 검술의 번성한 곳으로 防具의 공급지이기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덧붙여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의『?本東都遊』(화본동도유)(享和2年版)에는, 그런 갑옷·도구가게의 점포 앞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 그림안을 보면 竹具足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이고, 검술의 防具는 이것처럼 갑옷·도구가게에서 취급하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사진 12 참조). 에도막부 말기의 防具요시나가 6년(1853), 페리가 우라가(浦賀)에서 개국을 강요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에도 에서는 무기·투구와 갑옷이 날아가듯이 팔려 에도의 마을은 시끄러움으로 한 양상을 나타냈다. 또, 이것에 놀란 막부는, 安政 2년(1855) 츠키지(築地)에 講武所(구무소)코타케소를 만들어 무술의 장려를 했다. 이 막부 직속의 講武所(구무소)코타케소는 이제까지 유파나 도장 마다 뿔뿔이 흩어졌던 防具나 죽도를 통일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講武所(구무소)코타케소」토쿄 시청, 1930년). 그 중에서 講武所(구무소)코타케소의 규칙에 나타난 「창과 검 모두 형태는 정하지 않음, 합동 시합연습에 사용」라고 하는 조항과 「자신이 지참한 道具라도 3척8치 이상의 도구는 사용이 불가.」라고 하는 조항은, 종래의 형태 연습을 바꿔 죽도의 길이를 통일해, 유파를 넘어간 시합 중심의 연습 형태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에 의해 타류 시합은 한층 활발하게 되어 보다 강고하고 운반의 하기 쉬운 방어용 기구가 궁리되어 갔다. 에도막부 말기기에 많이 이용되는 가죽의 동(胴)은 운반에도 편리한 防具로서 개발된 것이다. 竹具足의 경우, 가슴으로부터 배에 걸친 둥그러움은 거의 없게 대나무로 만든 胴이었지만, 皮胴의 경우는 조금 둥그러움을 볼 수 있다. 竹具足에서는 垂가 붙은 胴으로 3매의 垂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요즘은 垂와 胴을 따로 분리되었으며 垂 역시 5매로 변했지만 防具의 기본 구조에 관해서는 거의 변화가 없다. 面은 철면으로, 오늘의 것과 같은 14개의 면금부터 되어,「면찌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세로금과 횡금으로 만들어 졌고, 面布?은 찌름 부위 垂와 거의 같은 길이로 어깨까지 밖에 없고, 오늘의 것과 비교하자면 面布?이 꽤 짧다. 찌름 부위 垂는 꽤 폭넓게 만들어지고 있지만, 안쪽의 內垂는 붙어 있지 않는다(사진 13 참조). 게다가 이 무렵이 되면 竹具足와 皮胴이 일체가 된 동(胴)과 같게 되어, 복부 부분이 둥그럽게 앞으로 나온 오늘의 동(胴)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사진 14 참조). 메이지 이후의 防具메이지가 되어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검술의 명맥을 유지한 것은 擊劍 흥행과 민간의 애호가에 의한 사립 道場이다. 이것에 대해 메이지 정부는, 육군의 군정을 프랑스식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메이지 17년(1884) 프랑스에서 “드 빌라래” 와 “큘” 을 초빙 해 프랑스식 군대 검술의 전습을 했다. 이 때 전해진 검술은 이 후 「검술 교범(劍術?範)」(메이지 22년)로서 제정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防具」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과 동시에, 그 防具도 프랑스식의 것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육군의 군정은 곧 독일식으로 전환해, 메이지 27년에 제정된 「검술 교범(劍術?範)」에는 防具는 일본식, 군도술(軍刀術)은 片手式(편수식)이라고 하는 절충안이 채용되었다. 이러한 군정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군대 검술용의 防具의 개량은 계속되어 「軍刀術?用胴ニ持出胸(小胸トモ云フ)ヲ付ケタルモノアリ. 持出胸ハ明治25?6年頃ヨリ製作セラレシモ ノニシテ、其形?種?アレトモ要ハ腋下ノ防護ニアリ.」에서는 胴胸부위에 가슴판 하단 장식(胴小胸)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또, 동태(胴台)의 둥그스러움도 한층 더 둥그스럽게 되었다(육군 도야마 학교편 「검술용구의 연구」군수 상사, 1919 연간). 大正(타이쇼오) 시대에는 防具의 대량생산이 진행되어 직공에 의한 수제 뿐만 아니라 「미싱」에 의한 防具도 만들어지게 되었다(육군 도야마 학교편 「前?書」). 한층 더 쇼와(昭和)에 와서는, 호완 포단(小手布?)이 밋밋한 통형으로부터 손목부위에서 한번 접히게 되어 손목의 움직임을 쉽게 했고, 면포단도 점차 길어져 양어깨를 완전하게 가리는 것으로 개량되고 말했다. 여기에서 防具의 형태는 완성했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덧붙여서 쇼와(昭和)7년(1932) 「무도구 가격표 武道具定?表」(昌?堂 ?道具店)에 의하면 이 가게의 최고가격의 防具는 한 벌 85엔이며 내역은 面(1푼5리, 면포단 보호부위 가죽사용, 面金은 양은제) 26엔. 小手(1푼5리, 손목 접힘 부위-게라, 가죽 사용) 18엔. 胴(흑염가죽, 가슴판 촉홍은 구름 모양, 가슴판 하단 장식) 24엔. 垂(1푼5리, 구름 모양 장식) 17엔이라고 하는 가격이었다. 가장 싼 죽동식 방구(竹胴式防具)로도 한 벌에 10엔 50전. 皮胴의 것으로 2·30엔이 적당한 가격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치면 오늘의 화폐 가치와 비교해 보면 85 만엔으로 일종의 미술품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던 것일 것이다, 단순한 도구로서는 상당히 고가의 것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비교 위해 유도복을 보면 최고가격으로 2엔 60전, 검도복은 2엔 90전, 죽도는 어린이용은 40전, 좋은 것은 8-90전 정도 했다. 防具의 비싼 가격이 검도의 보급에는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후(戰後)의 防具전쟁 후, 검도를 할 수 없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요경기(撓競技) - 죽도 경기를 말함」의 防具는 「(1) 防具는 面, 胴, 小手을 이용한다. (2) 面(마스크)은 전면, 측면도 철망으로 제작한 것을 사용한다. (3) 胴(프로텍터)은 布製의 두꺼운 조끼에 견판(철판 혹은 죽제의 것)을 장착한 것을 이용한다. (4) 小手(글로브)은 손목에 긴 견판을 장착한 것을 이용한다.」라고 하는, 팬싱을 흉내 낸 것에서 시작했다 (전일본요경기연맹-全日本撓競技連盟 「요경기-규정의 해설과 기본-」妙義三 출판사, 1951년). 쇼와 27년(1952) 10월에 전일본 검도 연맹이 결성 되어 다음 해 3월부터 시행되었다. 시합 규정에는, 「防具는 面, 胴, 小手, 垂를 이용한다.」라고 요경기와는 다른 전부터의 검도의 防具를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요경기(撓競技)용의 防具와 검도의 防具가 공존 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게 계속되지 않고 쇼와 29년(1954) 3월에 전일본 요경기 연맹과 전일본 검도 연맹이 합병해 새롭게 전일본 검도 연맹이 결성 되면서 점차 요경기(撓競技)는 쓸모없게 되어 가고 자연 소멸해 없어져 버렸다. 그 후, 검도의 防具는 듀랄루민의 胴이 만들어지거나 다섯 손가락의 小手가 제작 되거나 했지만, 防具의 형태를 크게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 죽도에 대해서는 카본 죽도가 쇼와 60년에 팔리기 시작했다. 이 카본 죽도에 대해서는, 쇼와 62년(1987) 3월 18일, 시합 사용해도 가능 한 것이 통지되어 현재는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다. 또, 防具의 개량으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평성9년(1997) 3월에 발매된 「얼굴이 보이는 面」이다. 이 面은 순식간에 보급해 평성 12년(2000) 3월에는, 「검도 시합·심판 규칙, 세칙」의 개정을 해 세칙 제3조는 「규칙 제4조(검도구)는, 제 3 그림대로 라고 한다. 단, 폴리카보네이트 수지 장착 面은, 전일본 검도 연맹이 인정한 것이라고 한다.」( 「월간劍窓」통권 224호, 평성 12년 4월)이 되어,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월간劍窓」의 그림 참조). 防具(劍道具)의 장래防具(劍道具)의 역사에 대해 결말 할 즈음해, 장래의 防具을 조금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선 「防具」라고 하는 용어를 폐지했던 것부터 道具→防具→劍道具라고 하는 새로운 제3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걸음은 카본 죽도의 출현과 함께, 얼굴이 보이는 面을 개발해, 종래의 防具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었다. 다음에 오는 것은 面 및 胴의 끈(himo)일 것이다. 面이나 胴의 끈은 일본인이지만 나비 매듭 등을 할 수 없게 된 요즘 검도의 보급을 생각한다면 큰 장해가 되어 질 것이다. 면끈는 매직 테이프(velcro)로 변하고 동 끈도 매직 테이프 와 같은 착탈 하기 쉬운 것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것과 함께, 문화나 전통으로서 행해지고 있는 검도의 형식도 점차 간소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예법에서 반대의 의견도 있지만 시합 개시·종료 시의 준거(?踞) 등은, 시합 운영상의 합리적 근거라고 하는 점으로부터 보면, 서로 입례를 주고 받고 있는데 왜 준거(?踞)가 필요한 가 의문이 있듯이 조만간에 폐지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준거(?踞)를 하는 의미는 있고 그것이 시합에 필요한 것으로 말하는 점에서는 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승리의 몸짓(포즈)에 대해서 이다. 유도나 스모는 이긴 후 승리의 몸짓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검도는 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허락하지 않는 논거를 명확하게 해 두지 않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보급」과「전통」의 밸런스를 어떻게 잡아 가는 것인가, 검도계가 항상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