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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땅 걷기 - 산과 강 원문보기 글쓴이: 與利 (윤진삼)
드라마 '연개소문', 中 동북공정과 한 판 대결
이환경 작가 "두고두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으로 남을 것"
우리 역사가 잊고 있던 고구려 영웅 연개소문이 1,400년만에 드라마를 통해 부활한다.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이환경 극본, 이종한 연출)'은 4년여의 제작기간, 40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 매회 70분간 100회 방송이라는 양적 수치 뿐 아니라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논란인 동북공정에 대한 저항이 드라마의 중심 축이다. 28일 경상북도 문경시 오픈세트장에서 열린 '연개소문'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제작진와 출연진은 이 드라마가 단지 한 편의 사극에 그치는 것이 아닌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라며 의의를 밝혔다. 특히 동북공정의 맞대응임을 재차 강조할 때는 드라마 제작발표회가 아닌 역사 학술대회를 연상케 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이날 행사에는 이환경 작가와 이종한 PD를 비롯해 연개소문 역의 유동근, 당태종 서인석과 장항선(장손무기 역), 최종환(고건무 역), 황인영(연수정 역), 이태곤(청년 연개소문 역) 등 주요 출연진이 함께 했다. 배우들은 모두 드라마 속 고구려 의상을 차려입고 나와 생생함을 더했다. 이환경 작가 "동북공정, 이 드라마로 무색해질 것" 10여년간 '용의 눈물', '태조왕건' 등 굵직한 사극을 선보여 온 이환경 작가는 "조선의 문을 연 태조 이성계(용의 눈물)와 고려의 문을 연 왕건(태조 왕건)을 거쳐 이제 그보다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잠자고 있던 고구려의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면서 "동북공정이란 말이 이 드라마 한 편으로 무색해질 것이고 이 드라마가 두고두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으로 남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종한 PD 역시 "역사 속에 숨어있던 고구려인의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드라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배우들의 기대도 출연진 못지 않았다. 제작발표회 이전부터 여러 차례 "고구려 역사를 한 계단, 한 계단 찾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각오를 밝혀 왔던 유동근은 장장 5개월간 촬영해 드라마 1, 2회에 등장하는 안시성 전투신을 거론하며 "고구려의 전쟁이 어떠했는지 생생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연개소문과는 피할 수 없는 경쟁자였지만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당태종 이세민을 연기할 서인석은 "오랑캐로 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영웅과 영웅의 한 판 대결로 보면 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2번째 드라마 출연이자 첫 사극 도전인 이태곤 역시 방영 중인 드라마 '하늘이시여'의 왕모를 잊고 "한 청년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지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
연개소문 (淵蓋蘇文 ; ? ~ 665)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서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 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한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 손으로 써놓은 연개소문의 사적이 전혀 없음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아래 글은 연개소문에 관해 빠진 부분인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 1. 연개소문의 출신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기록한 사초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맞아 대접했다는 단 한줄만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역사서에서 채록하여 전재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은 모두 연개소문의 적이었던 당 태종 군신들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믿을 만한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서부 소속의 귀족이다.(연개소문이 서부 또는 동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성씨인 '연(淵)'을 서부인 연나부와 연결하여 그가 서부출신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북한의 손영종 교수가 쓴 '고구려사'에서도 역시 서부출신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으로 구당서 고려전에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영주도독 장검의 표문을 인용하여 그를 동부대인으로 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출신이며 집권 전에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하였고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귀족세력으로 보았다.)
2. 규염객 전
당나라 때 소설인 규염객 전은 당나라 사람 장열 또는 두광정이 저자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장열은 7세기 후반 사람이며 두광정은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 양제 시절 중국 태원에 와서 이정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아내인 홍불지와 의남매가 되었다. 규염객은 중원의 제왕이 되고자 도모하였으나 당국공인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보고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원의 제왕이 되기를 포기하였음을 알리고 부여국으로 돌아와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인 이세민, 이정, 유문정, 양소 등이 등장하는데 단재 선생은 이 규염객이 연개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중국인에게 매우 인기있는 작품으로 규염객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도가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10여년 전 중국무협영화 시리즈 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적도 있다. 내용은 부여인 규염객이 수나라 때 태원에서 이정과 교분을 쌓고 그에게 병법을 전수하였으며, 양현감의 난 등으로 수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정과 함께 거병하여 수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세민이 영걸이란 말을 듣고 그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신선이 되고자 동방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3. 갓쉰동 전
또 다른 중국소설 갓쉰동 전은 단재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캐쉰이라 부르는데 이는 갓쉰동이란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옛날에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나이 쉰에 이르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바쳐 아들을 얻었다. 이름을 갓쉰동이라 하니 '갓 쉰에 이르러 얻은 아이'란 뜻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여 연국혜가 구슬처럼 아꼈으나 7살 되던 해에 어느 도사가 지나가다가 아기가 타고난 수명이 짧아 비범한 재주를 쓰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는 방법은 15년 동안 아이를 버려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연 재상은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란 이름을 새겨넣고 멀리 원주 학성동에 갖다 버렸다.
그 마을의 장자였던 사람 유씨가 꿈에 황룡을 보고 새벽에 바깥에 나갔다가 갓쉰동을 발견하여 데려다 길렀다. 유씨는 내력을 모르는 아이라 글자만 몇자 가르쳐 종으로 썼다. 갓쉰동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기이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검술, 병법, 천문, 지리를 배웠다.
유씨에게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막내인 영희는 그의 비범함을 사랑하여 서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영희는 귀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대장부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갓쉰동은 우리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쳐서 없애는 것이 평화의 근본인 만큼 달딸국을 쳐부순 후에 영희와 혼인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유씨의 집을 떠나 달딸국으로 잠입하였다.
달딸국왕의 가노가 되어 지내던 도중 달딸국왕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죽이려고 가두었다. 달딸국왕과 왕자들이 사냥을 나간 뒤 그는 공주에게 인정에 호소하여 달딸을 탈출하였는데 달딸 왕자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여동생을 죽여버렸다.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고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영희와 결혼하고 마침내 달딸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단재 선생은 연국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이며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는 갓으로 읽고,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어 갓쉰동은 연개소문이라고 생각했다.
4. 사족
우리나라 강화도 일대에는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연개소문은 훗날 북송 때 개혁의 주도자였던 왕안석으로부터 "당태종이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패한 것은 오직 연개소문의 힘이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런 평가에 걸맞지 않게 그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
1. 경극(京劇)의 주인공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당태종에 의해 임금을 시해한 역적, 김부식에 의해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사람, 함석헌 할아버지에 의해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악평을 들었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 민족의 영웅이 어떻게 폄하 되었으며 실제 연개소문은 어떤 존재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대항하여 큰 승리를 거둔 사람들은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성격도 포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격좋고 인물좋고 이름도 정확하게 잘 나온다.
왜 그럴까? 대만에서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극은 원나라 때 발생해서 명나라 때에 형태가 갖추어진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공연이 되어 경극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가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이다.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 가운데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있다는 것은 그가 중국인들에게 강한 기억을 남겨준 사람이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당태종을 거꾸러 뜨린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된 연개소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중앙일보는 대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짧게 보도한 바 있다.
2. 연개소문의 집안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에 대해 연못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연씨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의 잘못이다.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묘지석이 나왔다.
이 묘지석에는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이며, 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를 지낸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족보없는 괴물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이다.
3.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일 것이다. 아군의 병력 손실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한칼에 쓸어버린 세계 전쟁역사상에서도 뛰어난 승전이었다. 고구려는 이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수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묻고 그 위에 승전을 기념하는 경관대탑(京觀大塔)을 세웠다.
중국인들게는 수치였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하늘에 떠있는 두개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 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수군사량관으로 양제의 침입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
626년 또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다시없는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돌궐, 설연타, 아사나 등은 다시 중원을 공격했다.
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역사와 전설의 혼합 끝)
오히려 영류왕은 624년 당에 조공을 바쳤고 도교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사신들이 와서 경관대탑을 부수고 수나라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아무 대가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전국을 돌며 군사시설을 정탐했고 왕은 이를 방치했다.
젊은 조의선인들은 분노했다. 왕은 이들이 두려웠다. 그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631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여 조의선인을 징발했다. 그리고 아까운 국력을 낭비했다.
역사상 만리장성이건, 천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 국방에 도움이 된 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정체와 안일의 상징일 뿐이었다. 왕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서부대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반대했다. 왕을 옹호하던 기득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연개소문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서부대인의 자리를 허락했다.
642년 연개소문과 조의선인들은 당의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정탐하는 것의 중지, 631년 파손시킨 경관대탑의 복원과 을지문덕의 복권, 국력낭비인 천리장성의 축조 중단을 요구했다. 왕은 연개소문을 중앙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전방인 천리장성 축조 감독관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고구려는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하거나,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왕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왕들이 이런 이유로 죽거나 쫓겨났다. 고구려는 유교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 전 열병식을 열고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08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왕(보장왕)으로 옹립했다.
4. 영류왕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연개소문의 영류왕 제거는 좀 늦은 감이 있다. 626년 당의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즉위한 뒤 16년 동안 고구려의 동맹세력인 북방민족들을 제압하고 이정,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을 등용하여 내정을 착실히 다졌다. 그 유명한 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리는 황금시대의 기초를 닦았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광개토태왕 이래 200여년간 고구려의 강력한 동맹세력이었던 돌궐, 설연타, 유연, 고창, 거란 등 북방민족들이 이세민에게 제압되어 당의 세력권 안에 편입되었는데 특히 돌궐의 복속은 고구려에게는 군사상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동돌궐은 중원국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측면을 견제하는 세력이었으며 서돌궐은 전력의 빈틈을 노려 장안과 낙양을 공략하는 후방의 견제세력이었다.
암울한 군주 영류왕으로 인해 고구려는 동맹세력이 모두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중대한 문제를 방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원국가들과의 전쟁 때 고구려군의 전력으로 동원되었던 북방민족들이 거꾸로 고구려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고구려가 수문제, 수양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던 이유는 거란, 말갈 군대를 동원해 수나라를 선제공격하거나, 북방민족을 견제세력으로 활용하여 고구려를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더라도 직접 전력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들인 이세적을 비롯하여 설필하력, 아사나두이, 설인귀 등이 북방민족 출신 장수들이란 점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영류왕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제 고구려는 동맹세력없이 당과 일대일로 붙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수문제가 30만 대군,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고구려가 불과 30년만에 겨우 10만의 병력으로 공격가능한 세력으로 약화된 것이다.
5. 연개소문의 활약
1) 내정 안정
연개소문을 정권을 잡자마자 영류왕을 추종하던 집단을 일소했다. 그리고 당의 내정을 정탐하기 위한 사자를 파견했다. 흔히 연개소문이 당에 사자를 보내 처음 도교를 수입하였고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교를 처음 수입한 사람은 영류왕이다. 영류왕 본기 7년 조에 영류왕은 당고조에게 도사파견을 요청하여 도교강의를 듣도록 한 기록이 나와 있다. 어쨋든 대당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은 왜 도교 수입을 시도했는가?
원래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중국 한족출신이 아니다. 이연은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 왕가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그는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노자는 성이 이씨임. 그러나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은 이씨성을 하사하는 관례가 많았다. 그 결과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점유하는 것이 이씨라고 한다)
연개소문은 이점을 노려 도교를 수입한다는 명분으로 당의 긴장을 풀어놓으면서 당을 정탐하는 한편 신속한 국내 안정을 추진했다. 국력 낭비가 심했던 천리장성 쌓기를 중지하고 조의선인들을 요하전선에 배치하고 양만춘, 추정국,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 등을 발탁하여 지휘를 맡겼다. 또 요하전선의 방어거점인 백암성, 오골성, 부여성, 안시성, 비사성 등을 수리하여 당의 침략에 대비했다.
2) 이세민의 침략 격파
이세민은 뛰어난 무장답게 연개소문의 집권 3년도 채 안되는 시점에 공격을 단행했다. 김춘추의 요청을 받은 그는 고구려 정복을 확신하여 정국공신 이정 등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직접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했다. 고구려 주변의 동맹세력을 모두 제압한 뒤였으므로 그는 10만의 병력만으로 고구려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그는 침략길에 나서면서 웃기는 조칙을 내렸다. "제하(중국 역대왕조)의 원수를 갚고, 임금을 시해하여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 연개소문을 징벌한다". 제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수긍해 줄 수 있으나 연개소문 보다 더한 짓을 자기 친아버지와 친형제에게 자행한 사람으로서 뻔뻔함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수준이다.
어쨌든 664년 11월 강하왕 도종을 앞세워 탁군을 출발한 침략군은 요택(요하일대의 늪지대 약 80km에 달함)을 넘어 이듬해 4월부터 6월 사이에 고구려의 서쪽 방어선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수나라 60만 대군의 공격을 묶어놓아 을지문덕 장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도록 만들었던 요동성 마저 함락되었다.
당군은 안시성으로 밀려왔고 성안에는 3만명의 주민과 병력이 있었다. 당군은 성을 포위한 뒤 충차(발석거라고도 함, 큰 돌을 쏘아대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무기), 당차(아름드리 통나무를 수레에 장착하여 성문에 충돌 파괴하는 공성무기), 운제(구름사다리, 수레위에 망루를 세워 성벽높이에서 성을 공격하며 돌진하여 성벽에 이르면 사다리를 놓아 군사를 침투시키는 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양만춘 장군과 성민들은 끄떡없이 방어했다.
이세민은 강하왕 도종을 시켜 안시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게 하여 고구려 군을 공격했으나 부실공사로 인해 흙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양만춘은 지체없이 돌격부대를 편성하여 흙산을 점령해 버렸다. 화가 난 이세민은 흙산 책임자인 부복애를 참살하고 앞장서서 안시성과 흙산을 공격하였으나 그의 황금투구와 황모일산을 알아챈 고구려 철궁부대(저격수 부대)의 화살에 눈과 무릎을 잇달아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강하왕 도종은 몸을 날려 아버지인 이세민을 덮었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종은 부대를 10리정도 후퇴시켰으나 이세민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 소식은 전선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에게 곧바로 전달되었고 연개소문은 묘도(발해만 묘오타이 제도)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을 진황도로 발진시켰다. 진황도를 거쳐 어양(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상륙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도종은 이세민을 대신해 패잔병력을 이끌고 요택으로 후퇴하는 한편 장안으로 사자를 보내 이정에게 구원군을 보내도록 했다. 때는 음력 9월이라 요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양만춘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추격에 쫓겨 달아나던 당병은 요택의 늪지대에서 고구려 기병에게 죽음을 당했고 만승천자라고 자랑하는 이세민은 한쪽 눈을 잃고 무릎에 고름이 차오르며 열에 시달렸다.
도종은 변변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입으로 상처에 난 고름을 빨아내며 만리장성 입구인 우북평으로 달아났다. 이정의 구원군과 패주하는 이세민 부대 그리고 양만춘의 추격군과 고구려수군은 어양 일대에서 맞닥뜨려 일전을 치뤘다.
이세민의 구원이 목적이었던 이정은 이세민과 도종이 퇴로를 확보하여 장안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하자 어양 외곽으로 후퇴했다. 연개소문은 이때 어양 일대에 24개의 고구려 성을 쌓았고 보급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요동에서 어양까지 군량대를 만들었다.
어쨌든 안시성에서 다친 후유증으로 4년 뒤 649년 이세민은 52살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전 고구려 원정군을 해체하면서 아들 治(당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아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우리가 고구려를 치지 않은 한 고구려도 우리를 칠 힘은 없다."
이세민은 맏아들 승건태자가 반란을 모의하였다 하여 644년 그를 죽였다.
이세민은 젊은 나이에 먼저 죽은 장손왕비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그의 오라비인 외척 장손무기을 주장을 받아들여 넷째아들인 치를 16살의 나이에 태자로 삼았다.
착한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유언을 충실히 지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착하고 유약하여 아버지의 후실이었던 무씨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정권을 맡김으로써 측천무후의 전횡을 초래했던 사람이다)
3) 사수(살수)대첩
649년 당의 군주가 된 치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한편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침략군과 싸운데다가 이 싸움이 전과 다르게 고구려군 단독으로 당의 연합세력과 진행된 관계로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게다가 당태종을 사로잡지 못해 당의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신라는 이세민의 유언내용을 듣고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원정군을 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백제는 이틈을 타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줄기차게 공격을 단행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전술을 바꾸었다. 대규모 원정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주변 민족들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자주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고구려는 입술이 없는 이빨과 같은 처지가 돼가고 있었다.
654년 김춘추는 신라왕이 되었고, 655년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에게 사신을 보내 백제원정군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13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를 공략토록 하였고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의자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당은 요동방면에도 중규모 부대를 보내 고구려 국경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이때 연개소문은 병으로 누워있었다는 설들도 있음)
660년 겨울, 백제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소정방은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했다. 660년 12월부터 큰 눈이 내려 소정방 군은 군량미 조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10만의 병력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향해 출발토록 하였고 신라에는 10만 대군의 군량미를 조달할 것을 요구해 신라의 김유신은 67살의 노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군량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연개소문은 작전의 핵심을 방효태 군에게 맞췄다. 방효태 군을 격파하면 소정방 군은 고립무원이 되고 군량을 수송하는 신라군은 전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찰병을 통해 방효태가 평양 동쪽을 공격하기 위해 패수의 상류 쪽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3만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병중에도 직접 눈보라를 뚫고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이동했다. 사수((살수)는 강폭이 좁은데다가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연개소문은 발석거를 대거 동원하여 사수 양쪽으로 부대를 나누어 매복했다. 사수에 도착한 방효태 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통상 종대로 도하하는 병법을 어기고 횡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방효태 군의 대부분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연개소문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은 양쪽에서 발석거로 큰 돌을 강을 향해 쏘아댔다. 바위가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방효태 군은 강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요행히 강변으로 달아난 당군은 매복하던 고구려 군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한나절 뒤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10만 대군 모두 전멸당하는 참담한 패전을 당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사수(살수)대첩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연개소문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대해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
방효태가 전사한 후 평양성에 도착한 신라군으로부터 소정방은 군량을 조달받아 황급히 퇴각했고 신라군은 아무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다.
6. 남생, 남산, 남건 3형제의 불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왕은 연개소문을 따라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삼았다. 3형제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서로 협력하여 고구려를 잘 지켰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의 현황을 시찰하러 나간 사이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이 남산과 남건을 꼬드겼다.
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보장왕을 시켜 남생을 소환토록 했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당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장했다. 남생은 말갈과 거란부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 당은 667년 그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형제를 이간시킨 신성이란 중을 이용하여 평양성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산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신성의 협력을 받은 당군에게 포위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포로로 사로잡혔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남생 3형제와 비슷한 경우가 고구려 10대 산상왕때에 있었다. 산상왕은 둘째였는데 형 몰래 왕명을 받아 10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를 뒤늦게 안 형 발기가 노하여 왕성을 공격하였다. 힘이 모자라자 그는 요서의 공손씨에게 몸을 의탁했고 공손씨는 3만 병력을 그에게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산상왕은 막내인 계수를 불렀다. 계수에게 지휘권을 맡겨 마침내 요하에서 계수와 발기가 맞붙었다. 전투개시 전에 발기는 계수를 불러내 말했다.
"나는 장자로서 당연히 왕위계승권이 있는데 밤에 둘째인 연우가 왕위를 가로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의롭지 못한 연우를 도우려 하는가?"
계수가 말 위에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작은 형이 왕위를 가로챈 것은 부당하며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민족에게 빌붙어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큰 형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사욕을 위해 제 나라를 치는 놈을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발기는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계수는 공손씨를 토벌한 뒤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과 같은 예우로 장례를 치뤘다. 산상왕은 신하들이 계수의 행위를 성토하였으나 산상왕은 계수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남생은 아들의 말을 따르긴 했으나 개인의 안위를 위해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점이 고구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인터넷"http://www.history21.org"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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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살았던 연대: (603~665)
2.연개소문이 살았던 연대에 있었던 일
<안시성 싸움>
(1). 당의 중국 통일
건국초기: 고구려와 화친 정책(수와의 전쟁 때 생긴 포로 교환)
당 태종: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 -> 고구려 압박
(2). 고구려의 대응
당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요하 주위에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정권 장악: 강경한 대외 정책으로 신라와 당에 대항
(3). 당 태종의 침입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 육군과 수군으로 공격
안시성 싸움(645): 몇 차례에 걸친 당의 대규모 공격 격퇴
(4).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 승리
배경: 잘 훈련된 군대,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 체제, 탁월한 전투 능력, 요동 지역의 철광 지대 확보, 굳센 정신력
의의: 수, 당의 아시아 패권 야욕 격파 -> 민족적 위기 극복
(고구려는 수,당과의 싸움에서 한반도를 보호하여 민족의 방파제 역활을 했다.)
(5)644년 당나라 태종이 신라와의 화해를 권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거절하자 격노한 태종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임금(영류왕)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학살하였으며, 신라와의 화평을 권한 자신의 요구를 묵살하였으므로, 그 죄를 다스리겠다는 구실을 붙여, 645년에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의 대군은 고구려의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안시성에서는 오히려 고구려군에게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안시성의 60여 일 동안의 공방전은 실로 역사상 유명한 혈전이었다. 안시성은 주변이 험준한 천연의 요사로서 당나라 군사 10여만이 집결하여 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참으로 용맹스러웠다. 이 성의 성주 양만춘은 매일 6, 7회 정도 당나라 군사와 접전을 치르면서도 안시성을 잘 지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사에는 연개소문과 더불어 빛나는 공을 남긴 양만춘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고 야사에만 전하고 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찬 바람이 불고 군량미의 수송이 어려워지자, 당나라 태종은 60여 일 동안의 싸움을 끝내고 기진 맥진하여 전군을 철수시켰다. 이 안시성 싸움이야 말로 역사상 유수한 큰 싸움의 하나이며, 최고 지휘자로서의 연개소문의 이름을 드높여 준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싸움에 패한 당나라의 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사신을 보내어 사과했으나 당나라 태종은 연개소문의 사과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당나라에서는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647년, 653년, 655년, 658년의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고구려 군사들은 굳세게 저항하면서 당나라 군사를 물리침으로써 번번히 그들의 목적을 좌절시켰다.
3.연개소문의 권력의 힘이 보여주는 예들:
(1).자신을 제거 하려는 대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642년(보장왕 1) 평양성 남쪽성 밖에서 부병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처치한 뒤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2).644년 (보장왕3), 고구려를 지켜 보던 당나라의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했으나, 연개소문은 태종의 요구를 물리치고 당나라 사신을 감금하는 등 강경책을 썼다. ->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는 진실
4.연개소문과 김춘추
642년(선덕 여왕 11년), 백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대량주(지금의 합천)를 침공해 왔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크게 패하여 하루 아침에 40여 성을 빼앗기고, 마침내 '대야성'까지 함락이 되었다. 이 때,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자 부인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은 슬픔에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당장 백제로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신라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김춘추는 어떻게 해서든지 원수를 갚을 궁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원군을 청한다는 것은 백제를 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 하면 신라는 고구려와 싸워서 한강 유역의 땅과, 마목현(지금의 문경)과 죽령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울분을 삼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심을 굳힌 김춘추는 선덕 여왕께 아뢰었다.
"대왕 마마, 소신을 고구려로 보내 주십시오. 제가 고구려에 원군을 청해 보겠습니다. 제가 고구려에 원군을 청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백제를 완전히 무찔러, 한을 풀고야 말겠사옵니다."
그러나 선덕 여왕은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당치 않은 말이오. 백제도 우리의 적이지만, 고구려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런데 그대가 홀로 고구려에 가겠다니 그런 무모한 일이 어디에 있겠소."
그것은 사실이었다. 김춘추가 홀로 고구려에 간다는 것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왕 마마, 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사옵니다. 기필코 성사시켜 오랜 동안의 한을 풀겠사오니, 부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대의 뜻이 그토록 절실하니 어쩔 도리가 없구려. 부디 몸조심하여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오."
마침내 선덕 여왕의 허락을 받은 김춘추는 그 길로 김유신을 찾아갔다. 김춘추의 이야기를 듣고 김유신도 적지않이 놀랐다.
"유신 공, 그대와 나는 한 마음으로 이 나라의 손발이 되어 왔소. 만일 내가 고구려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반드시 내 말의 발굽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짓밟을 것이오."
김유신은 김춘추 앞에서 단단히 다짐했다.
"고맙소. 그대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오."
김춘추는 김유신의 다짐에 더욱 결심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했다.
"60일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하나, 그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다시 보지 못하는 것으로 아오."
김춘추는 두 달 이내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고구려로 떠났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신라의 사신 김춘추를 극진히 대접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고구려에 온 까닭을 물었다. 이에 김춘추는
"백제가 우리 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공하여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바, 귀국의 군사를 빌려 함께 백제를 공격했으면 합니다."
라고 말했다. 연개소문은 용감하고 당당한 김춘추의 태도에
'김춘추는 역시 보통 인물이 아냐. 이 사람을 살려 두면 장차 나라에 큰 피해라 되겠는걸.'
이런 생각을 하고 보장왕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김춘추는 원군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치기 위해서 정세를 염탐하러 온 것이옵니다."
만약 김춘추가 정말 염탐하기 위해서 왔다면 살려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보장왕은 자기가 직접 살펴보기 위해 김춘추를 불러들였다. 글고 이렇게 떠 보았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당장 돌려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소."
"그것은 어려운 일이옵니다.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저는 신하된 자로서 그뜻을 감히 따를 수가 없사옵니다."
김춘추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무엇이라고? 여봐라, 당장 저 자를 옥에 가두어라!"
김춘추는 뜻을 이루지도 못한 채 옥에 갇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 곳을 빠져 나가야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김춘추는 문득 신라에서 가지고 온 청포 300보에 생각이 미쳤다.
'그레 ... ..., 그것을 이용하자!'
김춘추는 아무도 모르게, 보장왕의 사라을 받고 있던 신하 선도해에게 그 청포 300보를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선도해는 음식을 차려 가지고 김춘추를 찾아왔다.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부렵, 선도해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김춘추 공, 그대도 일찍이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셨겠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 말이 토끼의 간이 효혐이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바닷속에 무슨 토끼가 있었겠소? 그래서 거북이가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에 나와, 토끼에게 용궁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속여 산채로 데려갔지요. 그런데 토끼의 꾀가 한 수 높아서, 자신은 오장을 꺼냈다 넣었다 할 수 있는데, 오늘 마침 간을 씻어서 바위 밑에 두고 왔다고 말했지요. 그 말을 들은 용왕은 간을 가져오라고 거북이는 딸려 토끼를 다시 육지로 돌려 보냈지요. 육지에 도착한 토끼가 거북이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어리석은 놈, 세상에 간을 마음대로 뺐다 끼었다 하는 놈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했다오."
말을 마친 선도해는 껄껄 웃었다. 김춘추도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는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김춘추는 선도해가 돌아가고 난 뒤, 곧 글을 써서 보장왕에게 올렸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왕께 청하여 반드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한편, 김유신은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각지에서 용감한 병사 3천여 명을 뽑아 고구려를 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김춘추 대감이 적국에 잡혀 있다. 비록 우리의 수는 적으나, 한사람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 싸우면 백 사람을 당해 낼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고구려로 쳐들어가 김춘추 대감을 구하자!"
드디어 김유신 군대가 고구려 국경에 도착했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 주겠다는 다짐도 받았고, 또 김유신이 고구려로 쳐들어오려고 한다는 보고를 듣고 보니, 더 이상 김춘추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서 풀려나 김유신이 진을 치고 있는 국경에 이르렀다.
"오, 김유신 장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기에, 보장왕이 나를 풀어 준 것이오. 고맙소."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한 뒤, 국경까지 배웅해 준 고구려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백제를 칠 원군을 청하려고 왔으나, 대왕이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였소. 그러나 그것은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내가 지난번에 써서 보낸 글은 단지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장왕께 전하시오."
그 뒤,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5. 연개소문과 관련된 재미있는 헤프닝
집권 후 국내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칼을 5섯개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진실은...
≪翰苑≫ (卷 30, 蕃夷部 高麗)을 보면, 고구려의 일반 남자들은 누구나 몸에 칼 다섯 자루와 숫돌까지 차고 다닌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면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찼다는 것은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었다는 면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다만 그는 고구려의 보통 남자들이 하는 대로 그렇게 했을 따름이다.
또 고구려의 일반 남자들이 칼을 많이 차고 다닌 것은 여러 용도의 칼을 차고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는 초기 산악지대에 입지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수렵을 통한 육식이 많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사냥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사냥후 이루어지는 짐승의 분배나 조리등에 필요한 칼이 보통 2~3종으로 볼때 일반적인 고구려 남자들이 차고다니는 칼 5자루는 전투용 칼 2~3(공격1, 방어1, 기타-투척용 혹은 예비)자루와 사냥이나 기타 다른 목적의 칼 2~3종으로써 충분히 5자루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추측컨대 그 종류로는 마상 전투용 장검(흔히 말하는 서양의 long sword,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환두대도 등으로 잘 알려진 大刀종류)1자루, 백병전용 단검 1~2자루 등을 들 수 있다.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고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을 밟고 오르내려 백성들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 기본 토대가 중국의 기록임에 따라 중국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볼때 위의 기사는 唐 태종 이세민에 의한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한 여론조작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당시 연개소문의 국권 전횡과 이에 따른 태종의 고구려 침략에 앞선 정보 활동인 것이다.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다니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고, 명예나 권위를 상징하는것은 아니었다. 또한 연개소문에 대한 여러가지 비방성 기록들은 당시의 고구려 남자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헤게모니 장악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보여준 잔인함 등을 연개소문 개인의 인간성에 대해 여론을 조작한 당태종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에서 보여지는 잔인한 행동이나 공포 분위기는 비단 연개소문만의 것이 아니다. 당태종의 경우만 들어보아도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위해 골육상쟁을 벌였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일반 남자일뿐이고,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역사서를 남긴 唐에 적대했다는 이유로 잔인무도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만약 고구려의 역사서가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그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히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해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리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든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지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ꥥ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팔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으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있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려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드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