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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음과 상황 - 2014년 4월호
예레미야 29장은 주전 597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를 담고 있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이들 중에 있던 거짓 선지자들이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고 선동한 반면,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권면을 한다.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만나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6).
포로 생활이 금방 끝나리라 헛된 기대를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 것처럼 정착하여 살아가라 권하는 것이다. 정착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권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하게 한 그 성읍의 평안(‘샬롬’)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바벨론 땅에 오래 머물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곧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 기도를 위 구절에서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성읍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읍이 평안하지 않으면 거기 몸붙여 살고 있는 유다 포로들도 평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읍의 평안이 없는 개인의 평안이 가능하지 않음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다시 말해 평안이 없는 망해 가는 사회에서 나 홀로 평안하고 감사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이 붕괴되는데 홀로 평안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오늘 우리가 전하는 바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다. 특히 마태복음은 4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 땅에 임하는 새로운 역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은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만,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일러 “천국 복음”(4:23; 9:35; 24:14, 직역하면 ‘그 나라 복음’)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역시 ‘하나님 나라’였다(행 8:12; 19:8; 28:23, 31; 롬 14:17).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라고 말씀하신 맥락일 것이다. 여기서의 “권세”는 단순히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통치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촉구하신 회개는 단지 ‘죄악에서 돌이킴’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합당치 않은 삶에 대한 애통함과 하나님의 통치로의 돌이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분명치 않으면 우리의 모든 회개는 그저 도덕적 완전을 향한 추구가 되어 버리고 우리 마음 속의 별의별 생각들에 대한 맥락 없는 비우기 추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라’(kingdom)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예수의 선포는 개인 윤리에 불과하게 된다. ‘나라’의 복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신앙을 우리와 우리 주위의 개인사로만 제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주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종교의 영역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하곤 했다. 그들은 종교를 개인의 성품을 연마하고 인간의 내면적인 고뇌와 번민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여겨 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지배했던 것은 주자학이었으며, 송시열로 대표되는 주자학의 주된 초점은 ‘예학’(禮學)이었다고 한다(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예학은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주어진 체제를 전제하고 인정한 채로, 그 틀 안에서 쓸모 있고 규율을 지키는 사람을 세우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런 식의 학문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틀과 구조, 사회의 문제를 결코 건드리지 않은 채, 오로지 개인과 개인의 바른 윤리, 개인의 바른 실천에만 몰두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이 ‘개임 윤리’에 국한될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사회 제도와 구조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개인 윤리는 많은 경우 불의의 첨병이 되어 버린다. 우리 하나님이 사회에 가득한 불의를 개의치 않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개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일까? 우리가 듣고 배운 복음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 만들기일까? 자칫 우리 신앙이라는 것이 ‘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 만들기 시합’이 되어선 안된다. 이야말로 행위를 의지하는 삶 아닌가.
구약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한, 정치적이며 공적일 수밖에 없다. 구약을 공적으로 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 그래서 정의와 공의에 대한 말씀들을 배제하거나 모른 체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구약은 착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한 사람을 만들고, 힘들어도 하나님 은혜를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는 좋은 말들의 모음집,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의 모음집, 지금은 지키지 않지만 한때 꽤나 의미 있던 율법들의 모음집이 된다.
칼뱅을 비롯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같은 데서 구약 율법을 셋으로 구분(이른바 ‘시민법’ ‘도덕법’ ‘제의법’)하여 폐지와 존속을 말하는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구약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한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구약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적 차원, 달리 말해 구약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부족한’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전체를 파괴하고 뒤흔들어버리는 ‘그릇된’ 읽기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차원의 상실이 성경을 격언 모음집이나 영적 비밀 모음집으로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해 온 성경 해석은 이미 이단 사이비 종파의 출현을 배태하고 있다.
틀과 구조를 둘러싼 공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 윤리에만 집중할 때 생겨나는 폐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학살을 수행한 아이히만(A. Eichmann)일 것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나치의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은 부지런하고 꼼꼼하고 철저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여, 무수한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게 했다. 나름대로 유대인 추방을 위해 애썼던 활동을 보건대, 그의 유대인 학살은 못되고 간악한 성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 명령이 내려진다면 자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동일한 절차로 진행했을 것이라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볼 때, 성실하고 충성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개인적 차원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며 공적 이해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공적인 이해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산술적 합을 넘어선 사회 전체의 틀과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며, 성경 말씀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국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히만과 같은 존재의 출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성읍의 평안’을 구한다는 의미
그렇다면 한 성읍의 평안을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도 선포하였고(렘 50?51장), 멸망 선포의 근거는 교만으로 대표되는 바벨론의 죄악이었다(렘 50:31). 그렇다면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그저 바벨론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구하는 기도일리는 없다. 바벨론이 교만하다면 평화는커녕 패망과 재앙이 닥쳐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말라고 강하게 이르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들이 심히 악하기 때문이었다(렘 7:16?20). 예레미야가 해야 할 것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일이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 7:4~7).
평화를 비는 것은 그저 주문을 외우듯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평화를 구하였으나 그 길과 행위가 바르지 않았기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살아가는 곳의 평안을 빈다는 것은 그곳 가운데 평화에 합당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에 합당한 일의 핵심은 위에 인용한 7장 본문에 따르면 “정의”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미슈파트’이다. 이 표현은 종종 ‘공의’로 번역되는 ‘쩨다카’와 함께 쓰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스라엘의 올바른 삶의 기준으로 널리 쓰인다. 위 구절에 따르면 ‘정의는 나그네, 고아, 과부와 같은 이들을 압제하거나 억울하게 피 흘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서도 확인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겔 45:9~10).
예레미야의 구절은 개인을 향한 명령이지만, 에스겔의 구절은 통치자들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삶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준행해야 하는 핵심적인 사항이면서 모든 이스라엘이 그들의 일상 가운데 실천해야 하는 사항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단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전체와 연관된 공적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에스겔의 구절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공정한 저울과 에바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개인의 양심과 자선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상거래의 올바른 질서와 틀을 세울 것을 제시하고 있는 이 구절은 거룩의 구체적인 양상을 공정한 저울과 추라고 선언하고 있는 레위기의 진술과도 통한다(레 19:35?36). 나아가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람의 아량과 자비가 아니라, 아예 노예와 종들을 쉬게 하는 제도로서의 안식일 선언(신 5:12?15), 가난한 자의 수확을 위한 배려로서의 안식년 선언(레 25:1?7), 그리고 개인의 부지런함이나 성실과는 무관하게 제도적으로 모든 이의 땅과 몸의 자유를 회복하도록 되어 있는 희년 선언(레 25:8?55)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개인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규정하는 틀과 제도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
정의와 공의 실천,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삶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명령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었으며, 이 명령은 아브라함 개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살아가는 자식과 권속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창 18:19). 통치자들을 향한 명령과 아브라함을 향한 명령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삶이 세상에서 왕과 같은 삶으로의 부르심임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이 점은 창조 때부터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점에 이미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아담과 하와 이래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왕적 통치를 감당할 자들이며,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언급(삼하 8:15)은 그가 하나님이 지으시고 부르신 사람의 본보기와 같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이야말로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시 33:5; 89:14; 97:2; 사 5:16; 33:5)는 점은, 사람이 행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삶임을 보여준다. 참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본받는 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은 단지 현실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씀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시 72:2).
정의와 공의로 가난한 이들을 재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계속해서 시편 72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으리로다”(72:4).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72:12~14).
[참고]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이상의 본문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재판이라는 구약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세상 다스리심과 연관하여 하나님을 왕이시면서 재판관이라 고백하는 구절에서 보듯(사 33:22), 재판 제도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행동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본받는 왕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재판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공적 틀로 구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통치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왕이라 할지라도 불의를 행한다면 무용지물이고 악할 뿐이다(욥 34:18). 그러한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욕심으로 된 것일 뿐이다(호 8:4). 흔히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웠으니 순종해야 한다지만, 구약의 근본적인 선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왕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모든 이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되, 왕의 통치를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실제 현실에서 다윗 가문의 왕이든 일반 백성이든, 정의와 공의의 삶은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이며, 모두 그에 따라 심판 받는다. 그에 비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통치자는 정의와 공의에 따라 통치한다(렘 23:5). 그리고 그것은 그 땅에 임하는 평화와 직결된다.
“그 정사와 평강(‘샬롬’)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그러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읍의 평화를 빈다는 것은 단순한 중보 기도가 아니라, 그 성읍 가운데 정의와 공의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벨론 땅에서 살아가며 바벨론의 관리가 된 다니엘 역시 세속 군주인 바벨론 왕을 향해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과 동일한 실천사항을 촉구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아람어 ‘찌드카’〓히브리어 ‘쩨다카’]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6~27).
나라의 견고함과 평안이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데 달려 있다는 다니엘의 충고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권면을 이방 나라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에서 곧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거짓 희망을 부추겨, 바벨론에서의 삶을 덧없고 오래 가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의 세월이 70년이라 선언한다(렘 29:10). 여기서 “70년”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따라 그때가 충만하게 차게 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당장 떠날 사람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오래 머물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고 있는 성읍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처한 현실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공의의 열매가 평화일진대(사 32:17), 성읍의 평안을 위한 포로 된 이들의 기도는 그 땅의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텅 빈 복음
아브라함의 삶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다. 왕으로서 아브라함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삶은 근본적으로 정의와 공의에 기초한 공동체로 나타난다. 이것은 구약의 일부분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의가 요구되었고, 다윗은 그것을 행하였다. 시편과 예언서들은 정의와 공의의 중요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으며, 레위기를 비롯한 오경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욥기와 잠언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정의와 공의로 채워지는 나라’라는 공적 차원에 대한 말씀은 기껏해야 주변적 요소의 하나로 다루어질 뿐이다. 대신,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축소되고 여럿 중의 하나이면서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되었고, 이제부터 종교는 내면을 치료하고 위로하며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참으로 현실의 왕들에게 위험한 사상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왕들은 종교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부분에 집중하게 한다. 구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구약을 축소하게 한다. 구약이 축소될수록, 신약이 ‘영적’으로 해석될수록, 교회는 현실에 무관심해질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의 눈물은 더욱 커져 갈 것이다. 아울러 왕들의 권세는 더욱 견고해져 갈 것이며, 사람들은 이 모든 슬픔으로 인해 더욱 ‘영적’이고 내면적인 위로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교회와 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며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개인화는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복음을 뒤틀어 버린 것이다. 복음을 이 세대의 왕들이 기뻐하는 형태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문제는 사회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있지 않다. 구제의 부족도 아니고,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의 부족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이 지닌 공공성을 놓쳐 버리면서 실제로 복음 자체를 잃어버려, “텅 빈 망토”(N. T. 라이트)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느헤미야 팟캐스트 1: 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공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