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허씨의 무대는 동북아시아였다(1) 산내 운주산 허궁실과 사직골은 허씨 왕족의 은신처인가?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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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허씨 족보 사진. 족보에 정읍 삼산동 음성부락이 옛 소유지로 되어있다. 칠보에서 산내에 가는 구둘재 포장도로 중간에 오르면 태인허씨 선산이라는 비석이 있다. 옛날에 행단마을에서는 그길로 오르면서 굿을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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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면 허장군봉의 허옥보 굴은 허장군이 천하통일을 이룩한 신화와 나라의 신을 모시는 사직골이 그 명칭이다.
태인(시산, 태산)허씨의 왕족이 정읍사를 가무외교로 활용하여 고려현종이 거란 침입시 나주 피난 길에 태인 왕림마을에서 정박할 때 고려현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태인허씨 세력인 이자겸, 이자의 등이 집권하여 송나라 사신을 직접 교류하다가 이의방, 허승 세력의 숙청으로 이성계의 선조도 이를 피해서 함경도로 망명하였다.
고려 현종이 나주피난 시에 정박한 태인 왕림마을에서 두명 왕비가 이자겸후손으로 바뀐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때 왜병의 정읍.고부.태인현 방화사건으로 이성계는 군사를 몰아 왜병을 물리치고 지리산 황산전투에서 승전하여 다시 세력을 되찾은 것이다.
이세력이 조선 단종, 연산군 시대의 유자광까지 이어져 정읍사를 지켰던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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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장군봉. 허궁실뒷산이며 칠보면 복호마을 뒷산으로 허장군의 굴이 있으며 허장군이 굴안에서 도를 닦는다고 한다. 일본서기 내용과 유사한 허왕굴 역사내용 상상도 필자의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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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가야의 허세신 일족이 백제로 귀화해서 태인 허씨 시조되다
삼한과 삼국시대는 모계사회로 토템(동물)신앙시대다. 허황후, 유화, 소서노가 여왕인 것을 석가, 공자의 불교, 유교식 남성 위주의 고려말기 풍속으로 말미암아 김수로, 주몽, 온조 등 남자왕으로 바꿔진 것이다.
선진국 인도에서 온 허황후의 가야는 철기무기등 강력한 국가로 신라국 경주에 인접한 경북 청도군까지 점령하여 서라벌을 급습한 경력이 있다. 가야는 백제땅도 지리산 남원까지 점령했다.
여기서 놀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군을 지원받아 가야를 멸망시켰다. 가야는 허세신(許勢臣)이라는 사람이 백제와 친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칠보면 시산리 장군봉에 복호라는 마을이름은 일본시조 탄생설화의 반호(磐戶)란 이름과 위치가 유사하다는 점이 478년 일본서기에 대산성 반란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야 패망후에 반 신라 가야부흥군 세력 후손으로 보이는 허세신(許勢臣) 부족이 백제에 귀화해서 토착화하여 시산(태산)허씨가 되었다. 시산군(詩山君)이란 태산군 명칭의 호로 대대로 호족이 되어 통치하다가 백제마저 망하자 통일신라시대 서남해안의 위도, 선유도, 인천해안의 해상을 떠돌다가 동진강과 섬진강의 교통 중심지 태산(정읍 칠보)과 지리산에서 유격대로 잠적한 세력으로 보인다.
백제 패망후 시산 허씨, 서남해안 떠돌아
그 세력이 백제저항군 흑지상지장군의 세력과 연계되어 당나라 측천무후의 군사력으로 흡수되게된다. 당나라 3대 고종의 후궁 측천무후의 잔혹한 정권 찬탈과 독재정치가 장기간 지속된 것은 노예 서민등을 막론하고 과거 등용을 철저하게 능력과 책임으로 실시하여 민심을 얻은 결과다. 여기에서 고선지, 이정기, 왕모중등이 벼슬을하여 패망한 고구려 백제의 유랑인들이 당나라로 몰려들었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에 현종의 심복이 된 왕모중(고구려인)은 선왕 중종을 위씨황후가 독살하여 왕권을 차지하려 하자 고구려사람 왕모중이 급습하여 위씨황후 일파를 숙청하고 현종 황제를 옹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모중이 당나라 궁중을 장악하여 세력이 커지자 환관들이 시기하였다. 당나라 환관들은 미녀 양귀비를 등장시켜 미인계로 현종을 이간시켜서 왕모중을 숙청하고 이어서 또 안록산을 숙청하려다 755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후부터는 당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반란이 계속되다 망했다.
통일신라 때 정읍호족 허이기, 당에 건너가 위기의 당 현종 도왔다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을 양귀비 세력이 제거하려고 하자 안록산이 알고 반란을 이르켜서 중국을 장악하고 황제라고 칭하였다
고구려 백제계 왕모중의 세력이였던 태인허씨 허이기등 선유도군수아들 최치원, 장보고, 김원웅, 이정기, 이사도등 대륙을 정복한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이사도(고구려 장군 이정기의 손자)와 장보고의 진영에 도우러 찾아간 통일신라의 정읍 호족 허이기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피난한 호남성 장사현 (장가계 근방)로 찾아가서 풍전등화의 당나라 현종을 도왔다. 이에 당나라 현종황제는 천하 제일로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감사의 글을 허이기에게 써주었다.
여기서 허이기는 왜 당나라 현종이 망하기 직전인데 위험하게 구출하러 갔을까 의문이 든다. 그것은 허이기가 백제, 고구려인의 세력을 밀어낸 안록산의 정적이기에위험한 양자강으로 돌아서 찾아간 것이다.
장보고의 등장...중국 정세 불안해지자 청해진에 살면서 해상권 장악
그리고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장가계 지방으로 한나라 장량의 후손 장씨의 아들로 입적한 장보고를 이사도의 산동반도에 합류시켜서 그 힘으로 난을 평정했다. 이사도는 고구려 연개소문 같이 '국토회복의 야망'으로 돌아서서 낙양성을 함락하고 중국통일의 기반을 완성했다.
이때에 이사도의 군사령관 유오가 이사도를 암살하여 야망은 수포로 끝났다. 염장의 장보고, 안두희의 김구 암살수법은 여기의 기록을 그대로 모방한듯 하다.
무정부 상태인 이 시기에 장보고는 속마음으로는 이사도와 같은 연합군으로 임하였고 양다리 외교로 임하다가 이사도 암살로 종전이 되고 중국 상황이 불안해지자 신라 청해진(완도)에서 살면서 신라의 왕족에 접근하며 강력한 한.중.일.해양을 장악한 활동을 하였다.
장보고 수하는 대부분 태인허씨계의 인천 이씨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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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 이자겸과 이의방...고려시대 궁중세력인 인천이씨는 태인허씨 후손으로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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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보고가 암살되었고 대부분 이씨들인 그 부족들은 계속 일본에 왕래하며 반항한다. 이씨들은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계속 반란을 기도하자, 이창진 등이 일본에 파견한 청해진의 무역선과 그 책임자였던 이충(李忠) 등에 대해서 염장(염문)은 이소정(李少貞) 등을 일본정부에 보내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 청해진 시대에 이창진, 이충, 이소정 등 이씨들이 중심이 된 것을 보면 그들은 태인허씨 계의 인천이씨 부족으로 이기, 허도등의 친족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부하들이 대부분 이씨들이란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 이사도 군사에서 활약한 태인허씨계 세력이 대거 장보고 세력에 참여한 결과로 보인다. 태인허씨와 양천허씨가 주로 남해안 지방에 많이 사는 이유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장보고 세력, 신태인 벽골군으로 강제이주..김제 부량은 부안장씨 집성촌
염장의 재토벌로 장보고 유민들이 일본에 살았고 그후에 장보고 유민을 모두 신태인 지역과 같은 군이였던 벽골군(碧骨郡)에 851년(문성왕 13) 강제 이주됐다. 따라서 부안 장씨는 부량면이 집성지로서 장보고 후손이다
장보고는 중국 장사현(장가계 근방)에서 허이기를 따라간 노예로서 장가게지방의 장씨호족의 성을 받아 장씨가 되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거의 이씨(이창진, 이소정 등등)이므로 견훤도 이들 후손으로 서남해안세력으로 보인다.
견훤은 이씨로 태인허씨 후손 아자개의 양자
견훤이 태인허씨 후손 아자개의 양자로 있었다. 산내면 운주산은 이사도의 "운주'자사와 관련이 있는지 운주산에 견훤이 세웠다는 왕박암 굴이 있고 중국으로 보내는 토기에 말 돼지 소등에 안장을 달아 보냈다는 유물과 전설이 있다.
운주산 밑의 국가신을 모시는 사직골과 허궁실이란 이름과 일본서기, 삼국사기의 기록인 '기생반숙조의 대산성반란사건'이 남았다.
당나라 운주(산동성)자사 이사도의 친족으로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신라의 최고 요새지 산내면 운주산 아래 사직골 허궁실에서 한때 왕궁으로 칭했던 부족국가 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후백제 견훤은 광주사람으로 성씨가 이씨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옹칠내(옹동-칠보-산내)지역에서는 후백제 견훤은 지내, 최치원은 금돼지가 그 조상이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도 도강김씨는 도깨비, 권씨는 돼지가 조상이라고 심하게 놀려대는 풍속이 있다.
전주이씨로 보이는 고려 무신정권의 주장 이의방은 태산군사람이다. 그리고 이의방을 죽인 정중부 부자를 태인 허씨 허승이 죽인 사실이 있다.
이자겸/이자의-이의방-송승래/송인-송현수-유자광따라 이어져 온 정읍사의 맥
후백제 견훤의 이씨를 왕건이 몰락시켰고 이자겸, 이자의가 궁중세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를 이의방이 계승하여 고려 강종까지 이어지다가 몽고침입시 입암산에서 송군비 장군이 승전하여 군사를 장악해서 송송래, 송인 등 삼벌초 진압세력이 고려말에 이 지역의 임씨, 홍씨, 이씨를 등용시켰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송현수 내각에서 유규의 아들 유자광은 음악, 군사에 능숙한 세력으로 중종반정까지 삼국시대의 궁중악을 정읍이란 이름으로 남게된다.
당시 서민은 궁중악을 모르고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었다. 정읍사를 수천개에 이르는 한국민요중 한 개로 보는 풍토가 정읍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정읍의 애향인과 청년학도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 답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공개한다.
미래의 길고 지속된 연구계승에는 확실한 해답이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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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이자겸이 송나라사신을 정읍사 궁증악으로 맞이한 태인허씨 선산이 있는 곳.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중국 사신의 왕래가 유일하게 계속된 가무연향하던 곳. 논을 못으로 복원한 합섬사진 가운데 섬의 산이 있었다. 이 마을을 기로회의 뜻 "자로'라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