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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한자) | 안축(安舳) | 본 관 (한자) | 죽산(竹山) | 자 (한자) | 해빈(海賓) |
호 (한 자) | 둔암(鈍庵) | 생 몰 년 대 | 1500년(연산군 6) 12월 2일 ~ 1572년(선조 5) 1월 11일(음력) | ||
출생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출생지), 솔뫼마을(거주지) | ||||
주 요 경 력 | ●1531년(중종 26)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ˑ진사 양시에 합격 ●1542년(중종 37) 임인(壬寅)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로 과거에 급제 ●병조 좌랑(曹曹佐郞) ●호조 좌랑(戶曹佐郞) ●1546년(명종 1) 형조 좌랑(刑曹佐郞) ●1547년(명종 2)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548년(명종 3)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영광 군수(靈光郡守) ●1553년(명종 8) 나주 목사(羅州牧使) ●1557년(명종 12) 남원도호부사 겸 춘추관 편수관(南原都護府使春秋館編修官)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보성읍지(寶城邑誌)》 ●《가정 10년[중종 26년] 신묘 8월 방목(嘉靖十年[中宗二十六年]辛卯八月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죽산안씨족보(1994년)》 | ||||
기 타 | 묘소는 전남 보성군 노동면 감정리 감정동에 있고, 화암재(華巖齋)에서 후손들에 의해 매년 제향되고 있다. | ||||
자료제공자 | 18대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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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자료)
1.《보성읍지》 인물 편
안축(安舳)
秀崙子。司馬兩試。文科亞元。屢除臺侍。皆不就。與金河西獜厚, 林石川億齡, 優遊物外。時人謂之, 湖南三高。號鈍菴。官至羅州牧使。
안수륜(安秀崙)의 아들이다.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문과(과거)에 아원(2등)으로 급제했다.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직을 여러 차례 제수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과 함께 세상을 초탈하여 한적하게 노닐었으므로 ‘호남삼고(湖南三高)’라 일컬어졌다. 호는 둔암(鈍菴)이고, 관직은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이르렀다.
2. 《죽산안씨족보》(1994)
안축(安舳)
자(字) 해빈(海賓)
호(號) 둔암(鈍庵)
생(生) 연산 경신(庚申, 연산군 6, 1500년) 12월 2일
관(官) 中宗辛卯, 中司馬兩試。與成大谷運, 徐花潭敬德, 金河西麟厚, 白休庵仁傑, 鄭林塘惟吉, 同榜。滿朝聳動。時人稱六賢榜。以學行, 企齋申文簡光漢薦。于中廟任寅, 文科, 登廷試第二。授承文院正字。歷拜兵戶禮佐郞。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 掌令。皆稱疾呈辭。力請補外。除靈光郡守。得免乙巳士禍後。累拜內職 。及星光二州牧使, 不就。甲寅, 除羅州牧使, 春秋館編修官。旋除南原府使。爲親赴任旣歸。與金河西麟厚, 林石川億齡, 優遊外服。世稱, 湖南三高。
중종 신묘년(1531) 사마 양시(생원진사시)에서, 대곡(大谷) 성운(成運),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등과 동방(同榜, 같은 해에 합격)으로 합격한 것이 온 조정에 알려져 육현방(六賢榜, 같은 해에 합격한 뛰어난 6명)이라고 불렸다. 학행(學行)으로 문간공(文簡公)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천거로 중종 임인년(1542) 정시(廷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병·호·예조의 좌랑(兵戶禮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장령(司憲府持平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칭병하고 정사(呈辭, 조선시대 관원이 사정으로 말미암아 국왕에게 사직·휴직·휴가 등을 청하는 문서)를 올려 보외(補外, 조선 시대 인사 관행의 하나로, 중앙 관청의 고관을 지방의 수령 등으로 좌천시키는 것) 되기를 힘껏 청해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제수 받아 훗날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를 피해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성주(星州)·광주(光州)의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갑인년(1554)에는 나주 목사(羅州牧使)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이어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제수 받고 부임했으나 나이든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그만두고 귀향하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함께 우유자적(優遊自適)한 삶을 살아 사람들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하였다.
나주읍지/ 선생안을 보면 계축년(癸丑, 1553년 7월) ~ 갑인년(甲寅, 1554년 4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냈다.
남원읍지 / 선생안을 보면 병진년(丙辰, 1556) ~ 정사년(丁巳, 1557)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졸(卒) 선조 임신(壬申, 선조5, 1572년) 1월 11일 享年(향년) 73세
향(享) 寶城華巖祠
보성의 화암사(華巖祠)에서 향사되고 있다.
배(配) 淑夫人 康津金氏, 父生員保閑堂若晦, 祖生員希尹, 曾祖司正潤孫, 開國功臣懷鍊后。外祖吏判礪原君礪山宋演孫。
숙부인 강진 김씨(康津金氏)는 아버지가 생원 보한당(保閑堂) 김약회(金若晦), 조부는 생원 김희윤(金希尹), 증조부는 사정을 지낸 김윤손(金潤孫)이며 개국공신을 지낸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이다. 외조부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증 이조판서를 지낸 여원군(礪原君) 송연손(宋演孫)이다.
묘(墓) 寶城蘆洞面甘丁洞子坐合窆
묘소는 보성군 노동면 감정동에 있다.
○孫參議贈吏判邦俊撰遺事。淵齋宋文忠秉璿撰墓碣銘。
공조참의로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된 손자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유사(遺事)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3.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물사전
안축(安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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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해빈(海賓)
호 둔암(鈍庵)
생년 1500(연산군 6)
졸년 1572(선조 5)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죽산(竹山[新])
활동분야 문신
부 안수륜(安秀崙)
[관련정보]
[문과] 중종(中宗) 37년(1542) 임인(壬寅) 정시(庭試) 을과(乙科) 1위(2/4)
[생원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1등(一等) 2위(2/100)
[진사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46위(76/100)
[상세내용]
안축(安舳)에 대하여
1500년(연산군 6) 12월 2일~1572년(선조 5) 1월 11일.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해빈(海賓)이고, 호는 둔암(鈍庵)이다. 본관은 죽산(竹山[新])이고,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이다.
증조부는 안민(安民)이고, 조부는 현감(縣監) 안범(安範)이며, 부친은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 안수륜(安秀崙)이다. 외조부는 거창신씨(居昌愼氏) 군수 신난동(愼蘭同)이고, 처부는 강진김씨 생원(生員) 김약회(金若晦)이다.
1531년(중종 26) 신묘 식년시에 생원‧진사로 합격하였고, 1542년(중종 37) 임인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좌랑(曹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1546년(명종 1) 형조좌랑(刑曹佐郞), 1547년(명종 2)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548년(명종 3)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역임하였고, 1553년(명종 8)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으며, 1557년(명종 12)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끝으로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솔뫼[松山]로 물러나와 빙호정사(氷壺精舍)를 축조하고 배회정(徘徊亭)을 지어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내다 73세로 세상을 마쳤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함께 세상을 초탈하여 한적하게 노닐었다하여 사람들에 의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일컬어졌다.
아들로 안중관(安重寬), 안중홍(安重洪), 안중돈(安重敦)이 있고, 사위는 광주이씨 이유창(李惟昌)이다.
묘소는 전남 보성군 노동면 감정리 감정동이 있고, 화암재(華巖齋)에서 후손들에 의해 매년 제향되고 있다.
4. 안축의 《사마 방목(司馬榜目)》
안축(安舳)
[생원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1등(一等) 2위(2/100)
[진사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46위(76/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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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해빈(海賓)
호 둔암(鈍菴)
생년 경신(庚申) 1500년(연산군 6)
졸년 임신(壬申) 1572년(선조 5)
합격연령 32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이력사항]
타과 중종(中宗) 37년(1542) 임인(壬寅) 정시(庭試)
양시 양시(兩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안수륜(安秀崙)
관직 : 학유(學諭)
[처부]
성명 : 김약회(金若晦)
본관 : 강진(康津)
[출전]
《가정 10년[중종 26년] 신묘 8월 방목(嘉靖十年[中宗二十六年]辛卯八月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5. 안축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문과] 중종(中宗) 37년(1542) 임인(壬寅) 정시(庭試) 을과(乙科) 1위(2/4)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548CD95FFFFU9999X0
자 해빈(海賓)
호 둔암(鈍菴)
생년 경신(庚申) 1500년(연산군 6)
졸년 임신(壬申) 1572년(선조 5)
합격연령 43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생원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1등(一等) 2위(2/100)
[진사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46위(76/100)
[이력사항]
전력 생원(生員)
관직 목사(牧使)
타과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
성명 : 안수륜(安秀崙)
관직 :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
[조부]
성명 : 안범(安範)
[증조부]
성명 : 안민(安民)
[외조부]
성명 : 신난동(愼蘭仝)
본관 : 거창(居昌)
[처부]
성명 : 김약회(金若晦)
본관 : 강진(康津)
[손]
성명 : 안방준(安邦俊)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6. 규장각 소장『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안축
출처 : 규장각 소장『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태학사) 00(태조~광해) p.356
1984년 태학사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국조문과방목을 영인본으로 간행한『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1권 p.437 중종 37년(中宗 壬寅, 1542) 안축(安舳,1500~1572)의 문과방목
海濱 父秀崘 祖範 外愼蘭仝 邦俊祖 竹山人 牧使 号鈍庵
생원 안축(安舳)
아버지는 수륜(秀崘), 조는 범(範), 외조는 신란동(愼蘭仝)이고, 방준(邦俊)의 조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목사(牧使)을 지냈고, 호는 둔암(鈍庵)이다.
7.《국조방목(國朝榜目)》- 안축
출처 : 국회도서관 영인본 국조방목 02(성종~중종) p.223 (규장각 소장)
1894년(고종31) 간행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국조방목(國朝榜目)』6권 중종 37년(中宗 壬寅, 1542) 안축(安舳,1500~1572)의 문과방목
生員 安舳
德實 牧使 : 해빈(海濱)을 잘못 기록함
父秀淪 祖範 外愼蘭同 邦俊祖 竹山人 : 수륜(秀崙)을 잘못 기록함
생원 안축(安舳)
자는 해빈(海濱)이고, 관직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아버지는 수륜(秀崙), 조는 범(範), 외조는 신란동(愼蘭同)이고, 방준(邦俊)의 조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6. 안방준(安邦俊,1573∼1654)의 문집『은봉전서(隱峯全書)』:「안축(安舳,1500~1572)의 유사(遺事)」
손자 안방준(安邦俊,1573∼1654)이 할아버지 둔암공(鈍庵公) 안축(安舳,1500~1572)에 관해 지은「둔암부군유사(鈍庵府君遺事)」가 은봉전서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둔암부군유사(鈍庵府君遺事)
公諱舳。字海賓。號鈍庵。生而有異。幼不嬉戲。年三十二辛卯。俱中司馬兩試。年過四十。尙未登第。以學行著名。企齊申公光漢薦于中廟。未及擢用。登壬寅文科廷試第二名。授承文院正字。以疾沈滯數年。安命世。遞注書。尹元衡謂宋判書世珩曰。海賓爲人。當今第一。況與我爲故舊。於令公爲姻姪。注書之任。無過斯人。判書公亦贊之。還謂公曰。彥平大監以君爲故舊。擬望注書。幸甚。公曰。余年將五十。始得科名。理宜歸田。以畢餘生。而至今未果者。欲得一縣奉養老母而已。注書之任。非衰鈍者所可堪。若不得免。明日便當南歸。判書公曰。余豈知君固辭至此乎。言于元衡。以孫弘績代之。公因歷拜兵,戶,禮佐郞。司憲府持平,掌令。司諫院正言。臺侍則公皆稱疾呈辭。元衡又謂判書公曰。海賓之心。吾不可測。前薦注書。固辭而免。今又歷拜臺侍。終不隨行。吾欲相見問其心事。一不來訪。幸爲我傳之。判書公以其言言于公。又勸使往見。公不得已嘗以暇日至其家。元衡曰。海賓何無故情至於此耶。公曰。我於大監。非無故情。本以鈍質。衰病日深。從仕一事。其勢極難。又出入宰相家。非吾本心。元衡曰。君之心。我所熟知。頗有喜色。公於是知有大禍。因判書公力請補外。除靈光郡守。元衡與公爲故舊。李芑卽公之外族。林百齡妻。是公之妻從兄。判書公。公之妻舅氏也。皆欲引用。公終不肯。人以避禍勉之。公曰。死生有命。禍福在天。死生禍福。非人所爲。未幾。尹潔,安命世,孫弘績皆被禍。公獨得脫。人皆以公爲生佛。後數年。自靈光罷歸于寶城村舍。築精舍於松竹林。扁以氷壺。又作徘徊亭。優游經史。若將終身。後累拜內職及星,光二州牧使。公皆辭疾不赴。甲寅年。除羅州牧使。最後又除南原府使。到官數年。以疾載歸寶城。壬申正月十一日。終于氷壺精舍。享年七十三。蓋公之免禍。判書公以其父爲明廟師傅。文定特加恩寵。一時權勢。判書公居元衡之次故也。時公與金河西麟厚優游外服。林石川億齡解官還鄕。時人謂之湖南三高。宋企村純嘗與吳二相謙。語及辛卯司馬榜中。吳相歷數成大谷運,徐花潭敬德,金河西麟厚,白休庵仁傑,鄭林塘惟吉而不及公。企村曰。公不知其榜中亦有賢者乎。因擧公姓名。吳相大驚曰。余不知鈍庵爲此榜人也。一榜中何多賢者耶。公自幼勤學。三四歲。卽知讀書。日夜不撤。父兄憂其氣弱止之。不聽。十餘歲。與儕輩讀書山寺。凡所讀朝夕各有遍數。雖進食必滿遍數。然後乃食。冬日則或羹冷而凍。寺僧請再煖。公慮其弊不許。寺僧尤心服焉。儕輩欲與同戲。公輒避之。空閣懸板。終日讀之。至今寺僧不去其板。因名曰安某讀書板。平生喜讀周易。坐起不釋手。不好交遊。從仕時罷衙。則卽還于家。杜門獨處。惟洞中年少輩日來問學而已。不喜音樂酒色。居靈光,羅州,南原十餘年。一不設妓樂。自少至老。不近女色。其貞固如此。嘗爲考官時。有同鄕人以優等入格。公坼封見之曰。此非其所作黜之。其至公如此。
(번역문)
둔암부군유사(鈍庵府君遺事)
공(公)의 휘(諱)는 축(舳)이요 자는 해빈(海濱)이오 호(號)는 둔암(鈍庵)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라서 어려서도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삼십 이세 신묘(辛卯)에 사마양시(司馬兩試)[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입격(入格)하고 사십이 지나서도 급제(及第)하지 못했으나 학행(學行)으로 저명(著名)하여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공이 중묘(中廟)에 천거(薦擧)하여 임용(任用)되기 전(前)에 임인(壬寅) 문과(文科) 정시(庭試)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질환(疾患)으로 수년(數年) 침체(沈滯)되었다가 안명세(安命世)가 신임 주서(注書) 추천으로 윤원형(尹元衡)을 대신(代身)하여 판서 송세형(宋世珩)에게 “해빈(海濱)은 사람됨이 지금에 제1(第一)이오 하물며 나와는 옛 친구요 영공(令公)에게는 인척질(姻戚姪)이 되니 주서(注書)의 적임자(適任者)는 이보다 나을 사람 없다.”하니 판서공(判書公)도 찬성(贊成)하므로 돌아와 공(公)에게 “언평(彦平)[원형(元衡)의 자(字)]대감(大監)이 그대를 우정(友情)으로 주서(注書)에 천거(薦擧)한다 하니 다행(多幸)이다.”하자 공(公)이 “나의 나이 오십(五十)에 등과(登科)하니 의리(義理)로 귀농(歸農)하여 여생(餘生)을 마침이 마땅할 뿐 아니라 지금(只今)에 나의 못다 한 일은 한 고을을 얻어 노모봉양(老母奉養)할 일 뿐인데 더욱이 주서(注書)의 임무(任務)는 나와 같이 쇠약(衰弱)하고 우둔(愚鈍)한 자(者)는 감당(勘當)하지 못할 일이므로 만약 면(免)할 수 없다면 명일(明日) 곧 남녘으로 돌아가리라”하였다. 판서공(判書公)이 “나 어찌 그대의 굳이 사양(辭讓)함이 이같을지 알았으리요.”하고 원형(元衡)에게 말하여 손홍적(孫弘績)으로 바꾸었다.
공(公)은 이로부터 병호예조(兵戶禮曹)의 좌랑(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대시[臺侍, 대간(臺諫)으로서 임금시측(侍側)]에까지 제수(除授)되었으나 다 칭병사퇴(稱病辭退) 하였다. 원형(元衡)이 또 판서공(判書公)에게 “해빈(海濱)의 마음을 나는 측량(測量)할 수 없다. 먼저는 주서(注書) 천거(薦擧)를 고사(固辭)하여 면(免)하더니 이제 또 여러 차례 대시(臺侍)에 까지 임명(任命)하였으나 끝내 수행(隨行)하지 아니하고 내가 만나서 그 심사(心事)를 물어보고 싶으나 한 번도 찾아오지 아니하니 나를 위(爲)하여 내 뜻을 전(傳)해 달라”하여 판서공(判書公)이 그 말대로 공(公)에게 말하고 또 찾아가 보도록 권하여 공(公)이 부득이 틈을 타서 그 집에 갔더니 원형(元衡)이 “해빈(海濱)은 어찌 그다지도 무정(無情)한가“하였다. 공(公)이 ”나는 대감(大監)에게 옛 정(情)이 없는 게 아니라 본래 우둔(愚鈍)한 천성(天性)에 병약(病弱)이 날로 심(甚)하여 벼슬살이에는 지극히 곤난(困難)할 뿐더러 재상가(宰相家) 출입(出入)은 나의 본심(本心)이 아니라.” 하였다. 원형(元衡)이 “그대의 심정(心情)을 나는 잘 알고 있다.”하며 자못 기뻐하였다.
공(公)은 이에 큰 화(禍)가 있을 것을 알고 판서공(判書公)을 통(通)해 외직(外)職을 청(請)하여 영광군수(靈光郡守)에 제수(除授)되었다. 원형(元衡)은 공(公)과는 옛 친구(親舊)요, 이기(李芑)는 즉(卽) 공(公)의 외족(外族)이오, 임백령(林百齡) 처(妻)는 바로 공(公)의 처종형(妻從兄)이오, 판서공(判書公)은 공의 처외숙(妻外叔)이다. 끌어다 쓰고자 하는 처지(處地)이나 공(公)이 끝내 사람만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음으로써 화(禍)를 피(避)하는데 힘입었다.
공(公)은 [사생(死生)은 명(命)에 있고 화복(禍福)은 하늘에 있으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사람이 마련한바 아니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윤결(尹潔) 안명세(安命世) 손홍적(孫弘績) 등이 다 화(禍)를 입었으나 공(公)만은 홀로 피(避)할 수 있었으니 사람들이 공(公)을 생불(生佛)이라 하였다.
그 뒤 수년(數年)에 공(公)은 영광군수(靈光郡守)를 그만두고 보성촌사(寶城村舍)에 돌아와서 정사(亭舍)를 송죽림(松竹林)에 짓고 빙호(氷壺)라 편액(扁額)하고 또 배회정(徘徊亭)을 지어 한가롭게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벗삼아 장차 종신(終身)하려 했으나 그 뒤에 누차(累次) 내직(內職)과 성주(星主) 광주(光州) 두골 목사(牧使)에 배명(拜命)되었어도 다 칭병사퇴(稱病辭退)하였다. 갑인년(甲寅年)에는 나주목사(羅州)에 제수(除授)되고 최후(最後)에 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제수(除授)되어 부임(赴任) 수년(數年)에 질환(疾患)으로 보성(寶城)에 돌아와 임신(壬申) 1월 11일 빙호정사(氷壺亭舍)에서 종세(終歲)하니 향년(享年) 73이었다.
대범 공(公)의 면화(免禍)는 처외숙(妻外叔)인 판서공(判書公)이 그 부친(父親)은 명묘(明廟) 사부(師傅)요 문정왕후(文正王后)의 특별(特別)한 은총(恩寵)을 입어 일시권세(一時權勢)가 원형(元衡) 다음 가기 때문이었다.
당시(當時) 공(公)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시골에서 한가로이 자적(自適)하였으며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벼슬을 그만두고 환향(還鄕)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호남(湖南)의 고결(高潔)한 삼인(三人)이라 하였다.
기촌(企村) 송순(宋純)이 일찍이 우상(右相) 오겸(吳謙)과 더불어 말하는 가운데 오상공(吳相公)이 신묘(辛卯) 사마방(司馬榜) 중에서 대곡(大谷) 성운(成運),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들을 세어갔으나 공(公)의 언급(言及)이 없으므로 기촌(企村)이 [공(公)은 그 방중(榜中)에 또 현자(賢者)있음을 모르는가]하고 공(公)을 거명(擧名)하니 오상공(吳相公)이 크게 놀라 [나는 둔암(鈍庵)이 이 방중인(榜中人)임을 알지 못했다. 한 방중(榜中)에 어찌 현자(賢者)가 이다지 많은가]하였다.[세칭육현방역자주(世稱六賢榜譯者註)]
공(公)은 어려서부터 배움에 부지런하여 3~4세에 벌써 독서(讀書)를 알아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부형(父兄)들이 그 기운(氣運) 약(弱)해질까 염려(念慮)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10여세에 또래들과 더불어 산중(山中) 절간에서 독서(讀書))하는데 대개 조석(朝夕)으로 읽는 편수(遍數)가 있어 비록 식사 때가 되어도 반드시 편수(遍數)를 채운 뒤에 식사(食事)를 했다. 겨울날 더러 갱(羹)이 식어 얼 때가 있어 절 중이 다시 데우기를 청(請)해도 공(公)은 그 폐(弊)를 염려(念慮)하여 허락(許諾)하지 않으니 중들이 더욱 심복(心腹)하였다. 또래들이 같이 장난하려 하면 공(公)은 문득 피(避)하여 빈집 현판(懸板, 걸어놓은 판자가 아닌 듯)에서 종일(終日)토록 읽곤 하였다. 지금도 절 중들이 그 판자(板子)를 치우지 아니하고 이름하여 안모독서판(安某讀書板)이라 한다.
공(公)은 평생(平生) 주역(周易) 읽기를 즐겨 자리하면 손에서 놓지 않았고, 사람들과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재관시(在官時)에도 관아(官衙)가 파(罷)하면 곧 집에 돌아와 두문(杜門)하고 홀로 있으며 오직 동중(洞中) 연소배(年少輩)들이 날로 와서 글을 묻곤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음악(音樂)과 좋아하지 아니하여 영광(靈光) 나주(羅州) 남원(南原) 재근(在勤) 10여년에 한 번도 기악(妓樂, 기생의 풍악)을 베풀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색(女色)을 가까이 않았으니 그 정순(貞純)함이 진실(眞實)로 이 같았다.
일찍이 고관[考官,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동향(同鄕) 사람이 우등(優等)으로 입격(入格)하였으므로 공(公)이 개봉(開封)해보고 이는 그의 소작(所作)이 아니다 하여 물리쳤으니 그 지극(至極)히 공평(公平)함이 이 같았다.
손증이판방준찬(孫贈吏判邦俊撰)
7.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문집 『연재집(淵齋集)』: 안축(安舳,1500~1572)의 묘갈명(墓碣銘)
1907년 간행된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연재집(淵齋集)』34권에 둔암공(鈍庵公) 안축(安舳, 1500~1572)의 묘갈명(墓碣銘)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둔암안공 축 묘갈명 병서(鈍菴安公 舳 墓碣銘 幷序) 330_150a
湖南。古有三高之稱。鈍菴安公。卽其一。尙氣義。重名節。卓然爲時人所推焉。公生有異質。三四歲。能知讀書。父兄止之。猶不撤。及長。嘗捿山寺。至忘寢食。同學有欲戲。輒避空閣懸板之上。終日讀之。又喜看周易。坐起不釋手也。嘉靖辛卯。中司馬兩試。時成大谷,徐花潭,金河西,白休菴,鄭林塘。同參一榜。榜中得賢之盛。往古罕有者也。企齋申公光漢。薦于朝。未及擢用。登壬寅文科。授承文院正字。尹元衡方用事。使宋世珩。誘以美職。公固辭歸鄕。拜兵,戶曹佐郞。司憲府持平,掌令。司諫院正言。皆不就。元衡見公曰。何無故舊情耶。公對以出入宰相家。非其志也。力請補外。除靈光郡守。李芑林百齡。與公爲姻戚。相欲引用。公終不肯。人爲之懼。公曰。死生有命。禍福在天。未幾。尹潔安命世孫弘績諸公。皆被禍。公獨免焉。自靈罷歸寶城。築冰壺亭。優遊經史。若將終身。連除星,光,羅三州牧。不赴。又拜南原府使。不得已之任數年。載疾歸鄕。萬曆壬申正月十一日。告終。距其生弘治庚申十二月二日。爲七十三歲。葬于寶郡蘆洞之甘丁直子原。鄕人建祠俎豆焉。公諱舳。字海賓。竹山人。胄于高麗侍中文惠公元衡。有孫挺生。直提學。始仕本朝。至參軍民。光廟朝。立慬於施愛之亂。贈主簿。子曰範。縣監。孫曰秀崙。學諭。是爲公之考。居昌愼氏。郡守蘭同女。其妣也。齊康津金氏。父生員若晦。壼範貞淑。克配公德。墓用魯禮。有三子一女。重寬僉樞。重洪參奉。重敦司馬。女適李惟昌。僉樞男邦善校尉。邦俊遺逸參議。諡文康。爲司馬后。參奉男邦說。曾孫孝立宣敎郞。悌立判官。忠立郡守。信立主簿。校尉出也。泂。邦說出也。厚之贈承旨。愼之,審之,益之,逸之。皆宣敎郞。文康出也。文康學問氣節。克趾其美。嘗錄公遺事。後孫成煥。袖而謁銘。圖示久遠。余不敢以不文辭。遂按而爲之說曰。國朝屢更士禍。至於乙巳而極矣。公知微知彰。優游林泉。遵養時晦。是公高潔之致。而遠姦之明。貞固之操。尤豈非好惡之得其正耶。昔蔡邕銘郭有道。以爲無愧。余於公亦云。銘曰。
猗嗟公兮。剛潔其志。審機進退。不屈權利。遠禍高蹈。名完一世。凡厥風儀。永垂無替。
(번역문) ; 국역은봉전서 : 안동교 번역
둔암(鈍庵) 안공(安公) 묘갈명(墓碣銘) 병서(竝序)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지음
옛적에 호남지방에는 「삼고(三高)」[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그리고 둔암(鈍庵)을 당시 사람들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불렀다.]라는 호칭이 있었는데, 둔암(鈍庵) 안공(安公)이 그 중의 한 분이다. 공은 기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명예와 절개를 중시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인품으로 추앙을 받았다. 공은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 3,4세부터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간혹 부형(父兄)이 (기가 쇠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글을 읽지 못하도록) 제지하더라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점차 성장하여 산사(山寺)에 머물면서 (책을 읽느라) 침식을 잊어먹기도 하였으며, 동학(同學)이 장난을 치려들면 곧장 빈 누각의 현판[절에 스님들이 그 현판을 ‘안모독서판(安某讀書板)’이라 부르기도 했다.] 위로 피하여 종일토록 글을 읽었다. 또 『주역(周易)』을 보기를 즐겨하여 앉으나 서나 손을 떼지 않았다.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신묘년(1531)에 공은 사마(司馬)[고려와 조선조 때의 과거제도의 하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뉨. 생진과(生進科), 감시(監試), 소과(小科)라고도 함.] 두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대곡(大谷) 성운(成運),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등의 이름이 함께 방(榜)에 나붙었다. 이처럼 많은 현인들이 함께 합격한 것은 고금에 매우 드문 일이었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공을 조정에 추천하였으나 발탁되지는 못했다.
임인년(1542)에 공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간신 윤원형(尹元衡)이 바야흐로 국사를 장악하려고 송세형(宋世珩)을 시켜 미직(美職)[윤원형은 송세형[둔암과는 인질(姻姪) 간이었다]을 시켜 ‘주서(注書)’ 벼슬로 유혹했다.]으로 유혹을 하였지만,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후 병조 좌랑(兵曹佐郞), 호조 좌랑(戶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원형이 공을 보고 “(우리 사이에) 어찌 옛 정이 없겠는가?” 하니, 공은 “재상(宰相) 집에 출입하는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 외직(外職)에 임명해주기를 힘써 청하자 마침내 영광 군수에 제수되었다.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은 공과 인척이 되어 서로 공을 끌어다 쓰려고 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두려워 하였지만, 공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재앙과 복은 하늘에 달려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오래지 않아 윤결(尹潔), 안명세(安命世), 손홍적(孫弘績) 등이 모두 화를 당했으나 공만 홀로 면하게 되었다.[이러한 선견지명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공을 ‘생불(生佛)’이라 불르기도 했다.] 영광에서 임기를 마치고 보성으로 돌아와 「빙호정(氷壺亭)」[‘빙호정사(氷壺精舍)’를 말하며 공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을 짓고 느긋한 마음으로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읽으며 생을 마치려 하였다. 성주, 광주, 나주의 목사(牧使)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남원 부사(府使)에 임명되어 부득이 몇 년을 봉직한 뒤 병든 몸을 이끌고 귀향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연호.] 임신년(1572) 정월 11일에 숨을 거두니 향년 73세이다.〔태어난 해는 홍치{弘治, 명나라 효종(孝宗) 황제의 연호.} 경신년(1500) 12월 2일이다.〕보성 노동의 감정동(甘丁洞) 직자원(直子原)에 장사를 지냈으며 고을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을 드리고 있다.[화암사(華巖祠)에 모셨다.]
공의 휘는 축(舳), 자는 해빈(海賓),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고려조에 시중(侍中)을 지낸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의 후예이다. 문혜공의 손자 정생(挺生)은 직제학(直提學)이었는데 처음으로 본조(本朝)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낸 민(民)은 광묘조(光廟朝)[조선조 제 7대 임금 세조(世祖)를 말함. 그의 묘소를 광릉(光陵)이라 한다.]에 이시애(李施愛)의 난리를 토벌하다 숨을 거두어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범(範)은 현감(縣監)이었고, 손자 수륜(秀崙)은 학유(學諭)였으니 이 분이 공의 아버지요, 거창신씨 난동(蘭同)의 따님이 그의 어머니이다. 부인 강진(康津) 김씨는 생원 약회(若晦)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범절이 뛰어나고 성품이 정숙하여 공의 덕망과 매우 잘 어울렸다. 묘소는 노례[魯禮, 옛적에 노나라의 예〔魯禮〕는 합장으로, 위나라의 예〔衛禮〕는 쌍분으로 모셨다.]를 사용하였으며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다.
중관(重寬)은 첨추(僉樞), 중홍(重洪)은 참봉(參奉), 중돈(重敦)은 사마(司馬)였으며, 딸은 이유창(李惟昌)에게 시집보냈다. 첨추의 아들 방선(邦善)은 교위(校尉), 방준(邦俊)은 유일[遺逸,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추천에 의해 재야의 덕망있는 유학자를 관직에 등용하는 것.]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시호가 문강공(文康公)인데 후에 사마공(司馬公)의 양자로 들어갔다. 참봉의 아들은 방설(邦說)이다. 증손에 효립(孝立)은 선교랑(宣敎郞), 제립(悌立)은 판관(判官), 충립(忠立)은 군수(郡守), 신립(信立)은 주부(主簿)이니 모두 교위공(校尉公)이 낳았고, 형(泂)은 방설이 낳았다. 후지(厚之)는 승지(承旨)에 증직되고 신지(愼之), 심지(審之), 익지(益之), 일지(逸之)는 모두 선교랑(宣敎郞)이니 문강공이 낳았다.
문강공의 학문과 기절(氣節)은 둔암공의 아름다운 학덕을 이었는데, 일찍이 공의 「유사(遺事)」를 기록해 두었다. 후손 성환(成煥)이 이를 소매에 넣어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여 오래도록 공의 학덕을 기리고자 하니, 나는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결국 「유사」를 근거로 하여 다음처럼 말하려 한다. 조선조에 여러 번 사화(士禍)를 겪었으나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참혹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공은 그 기미(機微)를 밝게 통찰하여 관직을 버린 채 한가롭게 자연에서 노닐면서 성정(性情)을 기르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공의 고결한 뜻이며, 간사한 무리를 멀리하려는 밝은 지혜이며, 곧고 굳은 지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좋아하고 미워하는 판단이 정도(正道)를 얻은 것이 아니랴? 옛날에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지으면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無愧]”{동한(東漢)의 문학가인 채옹(132-192)이 곽태(郭太, 자는 林宗, 일명 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나는 많은 비명(碑銘)을 지었으나 모두 참덕(慙德)이 있었다. 그러나 오직 곽유도의 비문에는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고 했다. 이는 곽유도가 당시의 정인군자(正人君子)였기 때문에 그의 비문을 지을 때 조금도 악한 일을 적는 일 따위를 꺼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 곽태전(郭太傳) 참고]}고 말했는데, 나 또한 공의 비문을 지으면서 그처럼 말하고 싶다.
이어서 명(銘)을 기록한다.
아! 공은 猗嗟公兮
굳세고 조촐한 그 뜻으로 剛潔其志
기미를 잘 살펴 진퇴를 결정하고 審機進退
권력과 사리에 굽히지 않았네 不屈權利
재앙을 멀리하려 자취를 감추고 遠禍高蹈
명예롭게 한 세상을 마쳤으니 名完一世
크나큰 그 가르침과 모습은 凡厥風儀
영원토록 잊히지 않으리라. 永垂無替
8. 전라도 나주읍지 / 환적(宦蹟) 중에서
안축(安舳)은 1553년 7월부터 1554년 4월까지 나주목사을 지냈다.
안축(安舳)
癸丑七月到任。甲寅四月罷職。
안축(安舳)은 계축년(1553) 7월에 부임하여 갑인년(1554) 4월에 파직되었다.
9. 전라도 남원읍지 / 부선생(府先生) 중에서
안축(安舳)은 1556년부터 1557년까지 남원도호부사를 지냈다.
文。丙辰丁巳年間。
안축(安舳)은 문과(文科)에 급제, 병진년(1556)부터 정사년(1557)까지 부사를 지냈다.
10.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록
●明宗 6卷, 2年(1547 丁未 / 명 가정(嘉靖) 26年) 9月 19日(丁卯) 2번째기사
○大司憲安玹、大司諫李蓂、司諫尹仁恕、執義鄭惟吉、掌令尹釜ㆍ洪曇、持平柳堪ㆍ尹玉、獻納魚季瑄、正言安舳ㆍ沈守慶啓曰: “頃者逆類定罪之後, 脅從罔治者, 國家冀其悔罪革心, 而近日邪論飛騰, 至以兇悖之辭, 筆之於書, 至爲驚愕。 臣等以耳目之官, 不能趁時聞見以啓, 至於有罪在官者, 亦未及論啓, 大失言責, 不可在職。 請遞臣等之職。” 答曰: “邪論飛騰, 臺諫以耳目之官, 非欲掩置不啓也, 欲細知言根而啓之也, 勿辭。”
●明宗 6卷, 2年(1547 丁未 / 명 가정(嘉靖) 26年) 閏9月 16日(甲午) 5번째기사
○以韓景祿爲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成祿大夫淸原府院君, 尹金孫爲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坡城君, 丁玉亨爲推誠定難衛社功臣崇祿大夫錦川君, 閔齊仁爲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驪原君, 申光漢爲推誠定難衛社功臣崇政大夫靈城君, 崔演爲推誠定難衛社功臣資憲大夫東原君, 金光準爲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正憲大夫吏曹判書上洛君, 尹元衡爲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正憲大夫禮曹判書瑞原君, 洪暹爲資憲大夫知中樞府事, 〈李〉萬年爲推誠定難衛社功臣正義大夫寶城君, 宋世珩爲推誠定難衛社功臣嘉義大夫壺山君, 宋麒壽爲推誠定難衛社功臣嘉義大夫德恩君, 許磁爲推誠協翼炳幾定難衛社功臣崇祿大夫判中樞府事陽川君, 朴漢宗爲推誠定難衛社功臣嘉義大夫密城君, 丁應斗爲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吳謙爲嘉善大夫全州府尹, 南宮淑爲承政院左副承旨, 沈通源爲同副承旨, 崔彦浩爲推誠定難衛社功臣朝奉大夫繕工監僉正, 柳堪爲司憲府持平, 安舳爲司諫院正言, 柳潜爲弘文館副修撰, 李純孝爲承政院注書, 李潤慶爲星州牧使, 李元祐爲嘉善大夫行龍驤衛大護軍, 林九齡爲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折衝將軍行義興衛副護軍。
●明宗 6卷, 2年(1547 丁未 / 명 가정(嘉靖) 26年) 10月 3日(庚戌) 3번째기사
○大司諫李蓂、司諫尹仁恕、獻納魚季瑄、正言安舳ㆍ沈守慶啓曰: “岏爲宗社之賊, 故朝廷請誅, 而自上特施私恩, 不明示王法, 使之自處, 已爲失刑甚矣, 而卽命復職禮葬, 使若無罪者然, 物情極爲未便。 此雖殿下友愛之至情, 宗社之賊, 不可以死生而異其法也。 請亟還收成命。” 答曰: “不允。” 憲府亦啓, 不允。
●明宗 7卷, 3年(1548 戊申 / 명 가정(嘉靖) 27年) 1月 23日(庚子) 1번째기사
○庚子/以尹元衡爲吏曹判書, 任權爲議政府左參贊, 金光準爲右參贊, 沈連源爲禮曹判書, 李世璋爲弘文館典翰, 尹仁恕爲議政府檢詳, 安舳爲司憲府持平。
●明宗 16卷, 9年(1554 甲寅 / 명 가정(嘉靖) 33年) 3月 27日(丁卯) 2번째기사
○傳曰: “南原府使姜昱加資, 海南縣監南延慶、長興府使韓蘊, 各給表裏一襲, 褒其字恤賑惠之意。 羅州牧使安舳不謹救荒, 先罷後推。 本道癘疫熾發, 救藥、醫員下送可也。” 因救荒御史金弘度狀啓也。
같은 내용이 문집에 남아있기도 하다.
●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지퇴당집(知退堂集)』에 수록된 동각잡기곤(東閣雜記坤)○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명종(明宗)을 보면
○丁未(명종2년,1547)九月。副提學鄭彦慤,宣傳官李櫓以一封書入啓曰。臣彦慤女子從夫歸全羅道。送至良才驛。見壁上有書。關重國家。故取來封進。傳曰。此不得志而怨上者所爲也。命招三公尹仁鏡,李芑,鄭順朋及許磁,閔齊仁,尹元衡,金光準等。下彦慤所進書示之。其書以朱寫之曰。女主執政於上。奸臣李芑等弄權於下矣。國之將亡。可立而待。豈不寒心哉云云。仍傳曰。近來災變極多。而又有此事。恐有各別所爲之事問之耳。仁鏡等回啓曰。見此書則非迷劣者所爲也。近來邪論飛騰。此書雖不足取實。然見此則邪論之騰。不虛矣。厥初定罪之日。從輕而不依律。故今有此書。由禍根尙在耳。且以定罪之意。作敎書諭中外何如。仍分等議罪入啓。鳳城君岏,宋麟壽,李若氷一罪。李彦迪,鄭滋極邊安置。盧守愼,丁熿,金鸞祥,柳希春絶島安置。權撥,權應挺,權應昌,鄭惟沈,李天啓,權勿,李湛,林亨秀,韓澍,安景佑遠方付處。宋希奎,白仁傑,李彦忱,閔起文,黃博,李震,李洪男,金振宗,尹剛元,趙璞,安世亨,尹忠元,安馠付處。生員許忠吉言於大學曰。李德應不能忍杖。伏招而已。乃虛事也。豈其實乎。請拿問得情。答曰。依啓。岏今在遠方。只有命脈。不可加罪。大憲安玹,執義鄭惟吉,掌令尹釜,洪曇,持平柳湛,尹玉,大諫李蓂,司諫尹仁恕,獻納魚季瑄,正言安舳,沈守慶等副提學鄭彦慤,直提學元繼儉,典翰閔荃,副應敎沈逢源,校理成世章,南宮忱,修撰柳景深,正字安名世等竝伏閤論列。請殺岏。臺諫至於辭職。乃允之。進士金禧年。以在泮中。喜爲異論。眩亂是非。竄定平。忠吉。三省交鞫。刑訊六次不服。尹仁鏡等啓以此人與金禧年。一樣好爲詭激之言者也。請亦竄遠方。允之。彦慤又獨啓。林亨秀與尹任同里閈。如爪牙腹心。每曰尹元衡當殺。大言於廣衆之中。其與尹任同心。尤可知也。只爲竄謫似歇。慈殿褒之曰。良才壁書。行人見者非一。而爾獨來啓。於臣子職分至當矣。林亨秀罪同罰異。予甚怪焉。命賜亨秀死。梁允溫坐尹任。謫海南。時彦慤爲全羅監司。以允溫出入官舍狀啓。拿來死杖下。彦慤後爲京畿監司。落馬。一脚掛鐙不脫。馬且奔且踢。頭腦及骨節破碎而死。人咸快之。以爲天道有志。
●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 下》 本朝璿源寶錄(본조선원보록) 2의 기록
○丁未(명종2년,1547)九月。副提學鄭彥愨。宣傳官李櫓。以一封書入啓曰。臣彥愨女子。從夫歸全羅道。送至良才驛。見壁上有書。關重國家。故取來封進。傳曰。此不得志而怨上者所爲也。命招三公仁鏡芑順朋。及許磁閔齊仁。尹元衡金光準。下彥愨所進書示之。以朱書之曰。女主執政於上。奸臣李芑等。弄權於下。國之將亡。可立而待。豈不寒心哉云云。傳曰。近來災變極多。又有如此事。恐爲各別所爲之事。仁鏡回啓曰。見此書。則非迷劣者所爲也。近來邪論飛騰。此書雖不足取實。然見此邪論之騰不虛矣。仍列書應罪人。分輕重入啓。且曰。今次書啓。非見此壁書而始爲之也。厥初定罪之時。從輕而不依律。故邪論如此。此由禍根尙在耳。且定罪之意。作敎書諭中外何如。鳳城君岏宋麟壽李若氷一罪。李彥迪鄭磁極邊安置。林亨秀盧守愼丁熿柳希春金鸞祥絶島安置。權應挺權應昌鄭惟沈李天啓權勿李湛韓澍安景佑遠方付處。權撥宋希奎白仁傑李彥忱閔起文黃博李震李洪男金振宗尹剛元趙璞安世亨尹忠元安馠付處。生員許忠吉言於館中曰。李德應不能忍杖。伏招而已。乃虛事也。豈其實乎。請拿問。答曰如啓。岏今在遠方。只有命脉。不可加罪。大憲安玹執義鄭惟吉掌令尹釜洪曇持平柳湛尹玉大諫李蓂司諫尹仁恕獻納魚季瑄正言安舳沈守慶副提學鄭彥愨直提學元繼儉典翰閔荃副應敎沈逢源校理成世章南宮忱修撰柳景深尹潔正字安命世等。並伏閤論列。請殺岏。臺諫至於辭職。乃從之。忠吉三省交鞫。刑訊六次不服。仁鏡等啓。以此人與金禧年。一樣好爲詭激之言者也。請竄遠方。允之。禧年亦以遊館中。托以正士習。眩亂是非。遠竄。彥愨又獨啓。林亨秀與尹任同里閈。如爪牙腹心。每曰。尹元衡當殺。大言於廣衆之中。其與尹任同心。尤可知矣。只爲竄謫似歇。慈殿褒之曰。良才壁書行人見者非一。而爾獨來啓。於臣子職分至當矣。林亨秀罪同罰異。予甚怪焉。命賜亨秀死。梁允溫坐尹任謫海南。彥愨爲全州監司。以允溫出入官舍。狀啓拿來。死杖下。彥愨後爲京畿監司。落馬一脚掛鐙不脫。馬且奔且踢。頭腦及骨節。破碎而死。人咸快之。以爲天道有知。
11. 셋째아들 안중돈(安重敦,1541~1565)의 사마방목 기록
1991년 국학자료원에서 영인한『조선시대 생진시방목(朝鮮時代生進試榜目)』영인본 3권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 3등(三等) 21위는 p.92~93, 진사 3등(三等) 22위는 p.128~129에 있는 안축의 셋째 아들 안중돈(安重敦,1541~1565)의 사마방목 기록을 보면
父 通訓大夫 前行南原都護府使 兼 春秋館編修官 舳
통훈대부의 품계로 남원도호부사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낸 안축(安舳)이 아버지가 된다.
12. 전남 보성군 노동면 감정리 감정동에 있는 화암재(華巖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