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관계자 및 함안조가들에게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조성래 합장
함안 군북 하림 출신 조태래(1955년생), 조성래(1959년생), 조병래(1953년생)의 5대조인 조사식(趙司植, 매동) 할배의 족보번역
지금(2020년)으로부터 약 120년 전, 조선말에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조사식(趙司植)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조태래(1955년생), 조성래(1959년생), 조병래(1953년생)의 5대조 할배이고, 함안조가 25대이다. 우리는 이 할배를 매동 할배라고 부른다. 택호가 매동댁이었다. 이 할배는 지금의 항렬이 나오기 직전의 할배로서 족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함안조가 25대 감찰공파 조사식(趙司植, 1818-1896, 79세亡)
조사식은 조지상(趙泜祥, 1791-1851, 61세亡, 우리 집에 양자로 들어옴. 생부는 시현始賢이고, 친형은 치상治祥이다)의 외동아들이고, 슬하에 조성주, 조성가, 조성곤 등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조사식(趙司植) : 자(字)는 무첨(茂瞻)이고, 스스로 지은 호는 녹계(祿溪)다. 모친에게 효성을 다해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아침이면 잘 주무셨는지를 살피는 것을 더욱 부지런히 했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충성심[忠충]과 어짊·자비·사랑[仁인]의 마음을 후손들에게 잘 전해주었다. 고향 지방의 현판과 주련 글씨를 보는 순간 다 해석하여, 그 지방에서 현판 글씨를 가장 잘 해석해내는 분이었다. 물러난 뒤 노년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지냈다.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핵심을 꿰뚫어보았고, 아침 저녁으로 더욱 학문에 힘썼다. 1818년에 태어나서 1896년 5월 26일 79세에 별세했다. 이 족보의 언행록(言行錄) 편을 보면, 거기에 생전에 써서 남겨 놓은 원고가 있다. 묘는 대수곡(군북면 수곡리에 소재)에 있는 부친의 묘소 맞은 편 앞 산[案山안산]에 있고, 신좌(辛坐) 방향이다.
부인은 진양강씨이고, 그녀는 1811년에 태어나서 1859년 2월 28일 49세에 별세했다. 친정 부친은 강우채(姜宇彩)이다. 부인의 묘는 처음에는 마륜내동에 모셨다가 뒤에 이장하여, 남편 묘소의 오른 쪽에 쌍분으로 모셨다.
(조사식의) 묘비명은 진성(眞城)이씨 이중철(李中徹)이 지었다.
(한문 원문)
趙司植(조사식)
字茂瞻(자무첨) 自號祿溪(자호녹계) 推孝慈闈(추효자위推 밀 추, 慈闈(자위) = 어머니) 定省愈勤(정성유근定省(정성)= 昏定晨省(혼정신성)) 紹先貽後(소선이후이을 소, 받을 소, 전할 이) 於忠於仁(어충어인) 一解鄕額(일해향액현판) 退老無悶(퇴노무민) 喫緊庸學(끽긴용학緊긴 줄임,요긴함,핵심. 용=중용. 학=대학) 昕夕旃勉(흔석전면새벽 흔, 昕夕(흔석)=아침과 저녁. 旃(전)은 오기인 듯함. 勉 힘쓸 면) 純祖戊寅生(순조무인생) 高宗丙申(고종병신)五月二十六日卒(오월이십육일졸) 享年七十九(향년칠십구) 見言行錄(견언행록) 有遺稿(유유고) ○墓大藪谷(묘대수곡)考墓案山(고묘안산)辛坐(신좌) ○配(배)晉陽姜氏(진양강씨) 父(부)宇彩(우채) 辛未生(신미생) 己未二月二十八日卒(기미이월이십팔일졸) ○墓馬輪內洞(묘마륜내동)上馬項(상마항) 乾坐(건좌) 後移公墓(후이공묘) 右雙墳(우쌍분) 墓碑銘(묘비명)眞城李中徹撰(진성이중철찬)
22대 중린(仲麟), 23대 시주(始周), 24대 지상(泜祥), 25대 사식(司植), 26대 성주(性胄), 성가(性家), 성곤(性坤), 27대 종규(鍾奎), 대규(大奎), 정규(廷奎)
1) "祿溪(녹계)"는 '녹봉(祿俸), 즉 봉급으로 시냇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慈闈(자위)는 남에게 자기 어머니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 闈(위)는 대궐 작은 문 위이다. 3) 愈(유) 더욱 유. 4) 定省(정성)은 "昏定晨省(혼정신성)"의 준말이다.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아침이면 잘 주무셨는지를 살핀다는 뜻이다. 5) 紹(소) 이을 소. 잇다. 받다. 6) 貽(이) 끼칠 이. 끼치다. 남기다. 전하다. 7) 額(액) 이마. 현판. 一解鄕額(일해향액)은 '보는 순간[一] 고향 지방[鄕]의 현판[額]들을 다 해석[解]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8) 庸(용) 떳떳할 용. 쓸 용. 여기서는 "중용"의 의미다. 9) 이 족보의 盺(흔)은 昕(흔)의 오기임. 昕(흔) 새벽 흔. 昕夕(흔석) 아침과 저녁을 아울러서 이르는 말 10) 旃(전) 깃발(旗) 전. 모직물. 어조사. 이(this)
(족보 해설)
1. 조사식 (매동)할배의 묘는 함안군 군북면 수곡리(넙실)에 있던 것을 2010년경에 군북면 하림리 외야골로 이장했다.
2. 위의 족보 내용을 보면 "조사식 할배는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언행록을 보면 다른 분의 언행록보다 지면이 2~3배 더 많이 할애되어 있다. 그에게 글을 가르쳐준 치상(治祥) 할배의 언행록이 8줄인데 비해 사식 할배의 언행록은 20줄이다. 언행록에는 "그는 관대하고, 후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우애가 돈독하고, 성실했으며, 효심이 지극했고, 온정이 많았다", "그는 부친 및 앞선 성현들을 삼가함을 다해 추모했다", "그는 배운 것을 실천하는 분이었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행록 중 "공선속문(公善屬文) 일해향액(一解鄕額)"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사식 할배가 글을 잘 짓고, 고향 지방의 현판과 주련 글씨를 잘 해독했다는 뜻이다. 언행록을 보면 이 할배는 시도 잘 짓고, 경전에 대한 논문도 잘 썼으며, 서예 글씨도 잘 해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재주를 그의 큰 아버지[백부]인 치상(治祥) 할배한테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상 할배는 함안조가 24대이고, 감찰공파의 조장래, 조직래 등의 선조이다. 치상 할배의 동생이 지상(趙泜祥, 1791-1851, 61세亡) 할배이다. 지상 할배는 강동 할매(조장래, 조직래의 조모님) 집에서 우리 집의 양자로 들어왔다. 지상 할배의 외동아들이 사식 할배다. 그러니까 조사식 할배의 후손들은 다 강동 할매 집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다. 진짜 혈족으로 보면 조장래, 조직래 등과 조태래, 조성래, 조병래, 조증래(조웅제의 자) 등은 12촌 간이다. 그러나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족보에는 다른 계열로 되어 있다.
족보 속에 있는 조사식의 언행록이다
이 족보에 언급되어 있는 조사식 할배의 모친은 분성허씨(盆城許氏=김해허씨)이고, 이 분성허씨 할매의 부친은 종8품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허겸이다. 분성허씨 할매는 1790년에 태어나서 1871년까지 82세의 수(壽)를 누렸다. 사식 할배의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 모친은 20년을 더 사셨다. 그 때 사식 할배가 효성을 다해 모셨다는 말이다. 사식 할배의 부친은 61세까지 사셨고, 모친은 82세까지 사셨다. 그리고 사식 할배는 79세까지 사셨다. 그 당시로는 세 분 다 장수한 것이다. 환갑을 넘긴 것은 다 장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식 할배는 1859년 42세에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뒤 돌아가시기까지 37년 동안 홀아비로 사셨다. 홀아비가 된 뒤 25년 동안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는 말이다.
사식 할배는 진양강씨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3녀가 있다. 그 세 아들은 조성주(性胄, 조태래의 고조부), 조성가(性家, 조성래의 고조부), 조성곤(性坤, 조병래의 고조부)이다. 사식 할배는 22살 때, 즉 1839년에 큰 아들인 조성주(趙性冑, 1839-1923)를 낳았다. 조성주는 창령조씨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가 있었다. 그 외동아들이 조성주 할배가 40세 때 낳은 조종규 (宗奎,1878-1959, 도무실, 도움실) 할배다.
끝으로 이 부분의 선조들의 연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식 할배의 부친 조지상(趙泜祥) 1791-1851, 61세亡
사식 할배의 모친 분성허씨(盆城許氏) 1790-1871, 82세亡
사식(司植, 매동) 할배 1818-1896, 79세亡
매동 할매 진양강씨 1811-1859, 49세亡
사식 할배의 장남 성주(性冑) 1839-1923, 85세亡
사식 할배의 장손자 종규(鍾奎), 도무실 할배 1878-1959, 82세亡
3. 이 족보의 기록을 보면, 매동 할매가 매동할배보다 7살 연상이다. 나는 우리 집안 족보를 보면서 다음 사실을 알았다.이 시대에는 보통 부인이 2~5살 연상이었고, 남자는 일반적으로 15~16세에 결혼했다. 남자가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 것은 단명(短命)이 많았던 시대에 죽기 전에 빨리 씨를 받아서 대를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20살도 채 못 되었다고 본다.
4. 사식 할배의 비석은 하림 외야골로 이장하면서 함께 옮겼다. 그 산소 옆에 여러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사식 할배의 비석이다. 비석의 외형만 봐도 이 분이 예사 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5. 족보의 이러한 내용을 보면, 사식 할배는 학문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족보를 보면 사식 할배가 차지하는 지면이 다른 분이 차지하는 것보다 2~3배나 더 많다. 이것을 봐도 이 할배가 어느 정도 비중의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좋은 집안 출신이고, 학식(學識)이 높고, 선대에서 이어받은 것을 후손들에게 잘 전해주면서 장수하면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 같다.
함안조가 25대 조사식(趙司植) (매동) 할배 밑에
1. 조성주(趙性冑, 1839-1923, 85세亡 , 조태래의 고조부),
2. 조성가(趙性家, 1844-1906, 63세亡, 조성래의 고조부),
3. 조성곤(趙性坤, 1849-1917, 69세亡, 조병래의 고조부) 등 나이가 5살씩 차이 나는 3형제가 있었다. 맞이는 85세까지 살았고, 둘째와 셋째는 각각 63세, 69세까지 살았다.
조성주는 조태래(1955년생), 조삼래(1961년생), 조상래, 조춘래, 조율래, 조함래 등의 고조부이고,
조성가는 조철래(1956년생), 조성래(1959년생), 조정래(1963년생), 조상래(1966년생) 등의 고조부이다.
그리고 조성곤은 조병래(1953년생), 조욱래(1958년생), 조증래(1947년생), 조일래, 조중래(1958년생), 조경래, 조상래(1957년생), 조재만(1959년생), 조상준(1970년생), 조남준(1972년생), 조동준(1977년생) 등의 고조부이다.
1. 조성주(趙性冑, 1839-1923, 85세亡, 조태래, 조삼래, 조상래, 조춘래, 조율래, 함래등 의 고조부)
조성주 할배는 족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식(趙司植, 1818-1896, 79세亡)의 세 명의 아들 중 장남이다.
함안조가 26대 조성주(趙性冑, 1839-1923, 85세亡)
자는 원행(元行)이고, 호는 우계(愚溪)이다. 품성이 관대하고, 후했다. 평범한 가운데 비범하고도 빼어났다. 근면하고, 성실했다. 검소와 절약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규칙으로 삼았다. 1839년에 태어나서 1923년 7월 21일 85세에 별세했다. 묘는 대수곡의 조부 묘의 오른쪽 산기슭 아래에 있고, 갑좌(甲坐) 방향이다. 부인은 창녕조씨이고, 1845년에 태어나서 1908년 11월 5일 64세에 별세했다. 창녕조씨 부인의 유명한 조상은 조선중기의 정3품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조계익(曺繼益)이고, 외조부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이극념(李克念)이다. 부인의 묘는 진주 지운리 조부의 묘 아래에 있고, 신좌(辛坐) 방향이다.
(한문 원문)
趙性冑(조성주) 字元行(자원행) 號愚溪(호우계) 禀性寬厚(품성관후) 在凡超勝(재범초승) 勤誠儉節(근성검절) 治家規稱(치가규칭) 憲宗己亥生(헌종기해생) 高宗癸亥(고종계해)七月二十一日卒(칠월이십일일졸) ○墓(묘)大藪谷(대수곡)祖墓右麓下(조묘우록하)甲坐(갑좌) ○配(배)昌寧曺氏(창녕조씨)父重麟(부중린)顯祖(현조)吏曹參議(이조참의)繼益(계익)外祖(외조)碧珍(벽진)李克念(이극념)乙巳生(을사생)戊申十一月五日卒(무신십일월오일졸) ○墓晉州池運洞祖考墓下(묘진주지운동조고묘하)辛坐(신좌)
조성주 할배 밑에 조종규(趙鍾奎, 1878-1959, 82세 亡, 도무실) 할배가 있고, 조종규 도무실할배 밑에
1) 청동할배(조용수鏞壽, 1901년생, 조찬제, 희제, 일제, 욱제, 경제의 부친)와
2) 서욱할배(조용삼鏞三, 1909년생, 조태제의 부친, 조영미, 조율래, 봉혜, 함래의 조부),
3) 기산할배(조용정鏞正, 1917년생, 조근제의 부친),
4) 일본할배(조용태鏞泰, 1922년생, 일본으로 건너감. 자 1. 조동제東濟 1950년생 2. 조중제仲濟 1954년생, 일본에서 의사를 함)
5) 조동할배(조용성鏞晟, 1925년생, 조은제, 해제의 부친)
등 5남 2녀가 있었다. 5남 2녀 중 셋째와 다섯째가 여자이다.
장남 조성주(趙性胄) 집은 조성주의 둘째 아들이 10살 때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고, 또 그 다음 대인 조종규(도무실) 할배 대(27대)에서 도무실할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태어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는 갓난아기(조용삼, 서욱할배)를 남겨 두고 별세함으로써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조성주(趙性冑), 조성가(趙性家), 조성곤(趙性坤) 3형제 중 셋째 조성곤(趙性坤, 1849-1917, 69세亡, 신산할아버지의 부친, 조병래의 고조부) 집은 학문에만 몰두하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노력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고, 불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장남 집(조태래의 고조부 집)과 차남 집(조성래의 고조부 집)은 젊은 나이에 사고, 질병 등으로 중심된 인물들이 연이어서 돌아가게 되고[단명短命], 또 조선시대 양반의 학문인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만 숭상하다가 시대에 뒤처지게 되었다.
다음에는 조성가(性家) 할배와 조성곤(性坤) 할배의 족보를 번역해 올릴 계획이다.
*이 글은 다음 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에 실린 글입니다. 형제자매 및 함안조가 관계자들에게 카톡으로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성래 올림
첫댓글 현대식 족보의 전형입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7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족보나 제례의식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현대세대에 맞도록 뜯어 고쳐야 할 것입니다. 조성래 님의 이 노력은 한문 실력은 물론이고 서기 연대로의 변경 등에 대한 높은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선각자이고 모범적인 실천가입니다. 함안조씨와 집안에 대해 잘 환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조우제 아제님, 댓글 감사합니다.
서울에 계시는 나의 9촌 조백제 아제(1938년생)께서 다음과 같은 카톡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 조성래선생, 함조 족보의 역사적기록 감사합니다. 대체로 젊었을때 영제 웅제형님들과 선친과 삼촌들께서 조상님들에 대하여 말씀을자주해 주셔서 개략적인것은 재미있게듣고 알고있으며 , 앞으로 우리들후손 들에게도 교육적인차원에서 들려줄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탄복할것은 옛족보는 요즈음 한자와도 다른 고전한문으로 되어있는 문장의 설명인데 성래조카의 한문실력에 감탄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릴때 부터 매동할아버지부터 후대할아버지들에 대한 위대함을 듣고 무척자랑스런 가문출신의 긍지를 잊지않고 살았습니다. 후예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있습니다. 금시초문은 성곤할아버지 혹은 성가할아버지 집안에서 성주할아버지의 큰댁에 양자를 보낸사실의 추측에대해서는 전혀들은바가없습니다. 또한가지 유명일화로 내가들은것은 성가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조대규할아버지와 혼동이 된것같습니다. 조대규할아버지의 용맹성과 기상이 이조때 태종대왕이니 세조대왕에 버금간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자랑으로여겼습니다. 여하튼 함조족보에관심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각박한요즈음 누가그런일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안녕
위의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신하였습니다.
아제 문자를 보고 조성주할아버지 연세를 +60 하니, 양자 운운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꼼꼼히 읽어주시는 아제가 계셨기에 다행히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육십갑자로 연대를 표기해놓은 것은 까딱하면 60년이 오차납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조카 성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