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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작가 김인순(金仁順, 1941– )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가이다. 사회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미학과 현실주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한국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예술로 표현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실천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여성의 시대적 가치를 탐색했다. 더욱이 여성이 가진 긍정의 힘과 생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한국의 자생적 여성미술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구축하고자 했다. 2020년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 연구와 미술사적 기록 보존을 위해 양평 작업실에 있는 작품 10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96점과 1980 – 90년대 여성미술 운동을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여성미술분과, 1986 – 95), 그림패 둥지(1987– 89), 노동미술위원회(1990 – ) 등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10점으로 구성된다.
김인순 컬렉션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성 작가들은 1980년대 한국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김인순 작가는 최초의 페미니즘 전시로 기록되는 제2회 《시월모임 – 반에서 하나로》(1986)를 기획했다. 여성미술연구회와 그림패 둥지를 조직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교류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현실을 작품으로 그렸다. 나아가 여성의 고유한 경험 가치를 고민했다. ‘모성’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여성의 존재를 ‘뿌리’에 비유한다. 시대 상황을 예술로 반영하고자 한 민족미술협의회(1985)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인순은 민족주의 여성미술가이기도 하다. 여성민중의 계급 현실을 비롯한 노동과 육아에 관심을 뒀고, 노동미술위원회를 구성해 노동자의 삶을 공감하는 회화를 제작했다. 또한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통일’ ‘산하(山河)’ 등의 주제를 그렸다. 김인순 컬렉션에는 여성미술연구회 연례전 《여성과 현실》(1987 – 94)의 출품작이 포함되어 한국 여성사를 아우르는 한국 여성미술의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 구성
이번 전시 《일어서는 삶》은 김인순이 천착했던 ‘여성’이란 주제의 예술적 실천을 들여다본다. 작가의 여성주의 태도는 여성 존재의 애환에서 시작한다. 그는 여성의 건강한 의지와 생명 에너지가 인류의 평등하고 밝은 미래를 이끈다고 믿었다.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총 20점의 작품과 아카이브가 출품된다.
[1] 첫 번째 섹션 ‘여성이란 이름으로’는 현실과 역사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여성들의 서사를 작가가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2] 두 번째 섹션 ‘움켜쥐는 아름다움’은 역경에 맞서며 결실을 이룬 여성들의 굳건한 모습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을 피우는 자연의 근원적 여성성을 살핀다.
[3] 세 번째 섹션 ‘생명, 빛의 여정으로’는 인류의 축복인 잉태의 기쁨을 민족미술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에서 여성의 우주 창조적 가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살펴본다.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을 통해 한국 여성미술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고 다양한 연구와 논의들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여와 남>
김인순은 남성의 권위주의를 고발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여와 남>은 나체의 여성과 남성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다소 크고 어깨도 더 넓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직된 자세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남성과 그를 뻣뻣한 자세로 곁눈질하며 노려보는 여성 사이에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김인순은 “근본적으로 여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남성이 우선시되는 현실을 반전시켜 여성이 앞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 간 위계질서에 도전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일어서는 여자>
<일어서는 여자>는 한 명의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세상에 꿋꿋이 맞선 작가의 현실 인식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커다란 나무조차 쓰러뜨릴 것 같은 강풍에도 불구하고 곡괭이를 든 채 맨발로 언덕에 서 있는 위태로운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굴뚝이 있는 공장은 이 여성의 삶의 터전을 암시합니다. 휘몰아치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는 여성에게서 생의 의지와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구도와 작은 소재들을 구성하여 하나의 전체 이야기를 조직해 나가는 서사 방식이 돋보입니다. 이후 김인순의 작품에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가정과 노동’ ‘여성의 건강한 아름다움’ ‘나무와 땅 ‘생명과 생산’ 등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는 초기작입니다.
<엄마의 대지>
<엄마의 대지>는 울산 공업단지를 배경으로 힘겹게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공업단지와 그 아래로 연결된 지하 배관은 산업화로 훼손된 대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검붉게 묘사된 땅 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힘겹게 버티는 여성의 모습은 ‘엄마 노동자’의 강인한 모성애와 고된 삶의 현실을 동시에 환기하며, 강인한 눈빛은 여성의 힘과 의지를 드러냅니다. 지하 배관에서 흘러나와 여성 앞쪽까지 이어진 노란 불꽃은 척박한 땅에서 산업화의 불꽃을 키워낸 여성노동자들의 생명력을 은유합니다. 불꽃 끝에서 피어난 푸른 새싹은 대지의 생명력과 여성이 탄생시킨 생명으로 변화할 미래 희망의 상징을 나타냅니다. 김인순은 이 작품을 <뿌리>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생명을 키워내는 여성의 능력과 모든 생명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순리를 연결한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새싹을 피워내는 대지의 자정 능력과 고된 삶 속에서도 아이를 길러내는 모성이 갖는 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
생명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힘에 주목해온 김인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나무’ ‘뿌리’ ‘대지’에 비유했습니다. 초기 <뿌리> 시리즈가 여성과의 존재적 일체감에 집중했다면, 2000년대는 메마른 환경에서도 영양분을 찾아내는 실뿌리를 강조하며 황톳빛과 초록빛이 채워진 물기 가득한 숲 풍경을 제시합니다. <긴 이야기>는 폭우로 흙이 쓸려 내려 밑동과 뿌리가 밖으로 노출된 나무가 비탈 귀퉁이에서 간신히 대지를 움켜쥐고 위태롭게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랜 고초 속에서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뿌리는 흙덩이를 부여잡고 길게 뻗어나갑니다. 푸른 들풀이 자라난 물기 머금은 대지는 뿌리와 함께 숨 쉬며 잠재적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김인순은 땅을 식물 뿌리와 줄기, 잎, 꽃이 숨 쉴 수 있게 하는 생명의 어머니로 인식했고, 여성은 자연의 리듬과 질서를 몸에 담아 생명을 길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무너진 언덕에서 흙덩이를 부여잡고 다시 풀이 자라 새롭게 뿌리내리는 유기체의 순환을 통해 한 생명의 굴곡진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엄마! 엄마!>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를 살펴본 김인순은 도시 빈민층 여성의 삶과 노동에도 관심을 뒀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은 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어린 두 자녀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검붉은 공간에서 날아오르는 집기들은 위기감을 조성합니다. 미술평론가 민혜숙은 이 작품을 “생계 대책으로 꾸려가던 자신의 노점상이 철거시책으로 압수당하자 망연자실해 있는 엄마와 아이들을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실제 1992년 강경한 노점상 관리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김인순은 급격한 도시화가 초래한 빈민계층의 증가 속에서 불완전한 상황에 부닥친 빈민층 여성의 고충을 공론화하고자 했습니다. 겁먹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달래면서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 근심하는 여성을 포착한 이 작품은 여성의 이중 노동의 고충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빈민층 여성과 가정의 불안한 환경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울음도 서러워라>
<울음도 서러워라>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한 《갑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위해 제작한 작품입니다. 붉은 땅 위로 온갖 수탈에 시달리는 힘겨운 삶을 참고 견디다 봉기한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학살된 처참한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상처로 일그러진 비통한 표정의 여성은 넋을 잃은 채 황량한 산을 맨발로 헤매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은 혁명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농민군과 남겨진 가족의 비통함을 마주하게 합니다. 여성 민초가 흘린 눈물은 굵은 빗방울이 되어 산 능선을 타고 오른쪽 끝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는 죽임당한 흰옷의 농민군이 누워있습니다. 그 위로 불꽃 형상의 영혼이 승천하고 들꽃이 태양을 뚫고 피어나 사방으로 광채를 발산합니다. 동학혁명 횃불을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희생을 기리는 이 작품은 기록되지 않은 여성 민초가 견뎌온 힘겨운 삶을 증언하는 역사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단의 눈물>
<분단의 눈물>은 남북 군사분계선을 따라 흐르는 사천강 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곳은 한국전쟁의 포로 교환 이후 남북한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993년 8월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을 개최하기 위해 김인순은 작가들과 6월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사전 답사하며 장소에 새겨진 비극적 역사를 담아냈습니다. 7월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다리 입구를 지키는 총을 든 미군 보초들과 안내판의 성조기는 강대국 주도로 정전협정을 맺은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과 여전히 휴전 종식이나 통일 문제에서 주체적일 수 없는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드러냅니다. 젊은 여성 사진이 놓인 관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나이 든 여성은 오랜 분단으로 겪는 이산가족의 가슴 아픈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왼쪽에는 이기형의 시 <잔인한 세월>의 시구가 쓰여 있습니다. 김인순은 남북 분단 상황을 미국 대 한국 또는 남성 대 여성이라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이미지로 제시하는 동시에 통일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정열은 이어지고>
사회적 생산의 주체이자 생명을 생산하는 여성의 힘에 주목한 김인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의 모성 능력과 거대한 자궁으로서 ‘어머니 대지’의 원형적인 생명 창조력 사이의 유사성에 이끌렸습니다. 그로부터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더욱 강화한 본질주의적 여성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뿌리>와 <생명> 시리즈는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뿌리’와 ‘대지’에 비유했습니다. <정열은 이어지고>는 낙엽과 마른 식물이 수북이 쌓인 땅 위에 메마른 줄기에서 작은 연둣빛 새싹이 잎을 틔우고 붉은 실뿌리 한 덩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면의 가운데로 모여진 형상은 대지, 나무, 뿌리, 자궁의 모티브가 점진적인 합일 단계로 이미지화되며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역동적 힘과 대지의 생명력을 담은 공간을 함축합니다. 척박한 환경에도 축축한 흙에서 영양분을 찾아 생명을 이어가는 실뿌리의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민주화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정열 또한 사그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은유합니다.
<생산의 땅>
여성민중의 삶에 관심을 둔 김인순은 1980년대 농축산물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성을 보며 여성농민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모내기 장면과 잠시 쉬고 있는 여성농민의 모습을 담은 <생산의 땅>은 여성미술연구회의 주요 관심사인 ‘일하는 여성의 건강함’을 여성농민의 생산하는 노동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농민을 주체로 부각하고, 힘들지만 강건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기층 여성의 힘과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모내기로 채워지는 초록색 논과 노란색 머릿수건의 강하고 밝은 색감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농작물 생산을 위해 힘쓰는 여성 노동의 긍정적 가치와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당대 민중미술 계열 작가들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불거진 농촌 문제와 농경 가치를 공유했습니다. 그러나 김인순은 주체가 ‘여성’이고 ‘여성의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그 결을 달리합니다. ‘생산’과 ‘땅’ 이미지는 1993년 이후 여성 고유의 생명성과 대지의 생명력을 연결하는 작업 흐름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림패 둥지, <맥스테크 민주노조>
<맥스테크 민주노조>는 그림패 둥지의 구선회, 김인순, 최경숙이 맥스테크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을 바탕으로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입니다.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위장폐업으로 대응했던 사건을 발단으로 여성노동자들이 54일간 전개한 농성 과정과 폐업철폐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림패 둥지는 노동자들에게 투쟁 상황을 직접 듣고 현장을 파악하고자 농성장을 찾아갔습니다. 김인순은 혹한의 날씨와 열악한 환경에서 결연하게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보며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여성운동을 발전시킬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이 직면한 냉혹한 현실과 더불어 현장에서 느낀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둥지 작가들은 사건 전개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여성노동자 대다수가 안경을 낀 모습은 하루 열 시간 이상 컴퓨터 작업을 하며 시력 감퇴라는 직업병을 얻은 노동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88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맥스테크 노동자들에게 수여한 ‘올해의 여성상’ 수상 기념식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림패 둥지, <숨쉬며 살고 싶다>
<숨쉬며 살고 싶다>는 그림패 둥지의 구선회, 김영미, 김인순, 최경숙이 1988년 6월 4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개최된 ‘공해추방을 위한 시민 한마당’을 위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입니다. ‘숨쉬며 살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당시 행사에서는 공해 피해자들의 증언과 공해 실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하는 문화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둥지는 경제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무분별하게 수입된 공해산업이 초래한 심각한 도시 오염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의 현실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제3세계 국가들이 GNP성장을 위해 선진국의 공해산업을 수입하게 되는 글로벌 산업구조의 자본주의 이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흰 머리띠에 마스크를 쓰고 공해산업으로 인한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외치는 여성 시위대와 “진폐증 진단서”를 들고 있는 의사의 모습은 공해 문제를 둘러싼 시민의 적극적 행동을 촉구합니다. 또한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환경을 둘러싼 여성들의 행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투쟁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1988년 10월 공해추방운동연합이 발행한 잡지 『생존과 평화』의 창간호 표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땅에는 천의 여성이>
<땅에는 천의 여성이>는 수북이 쌓인 마른 낙엽 위에 다양한 여성상이 등장하고, 그 사이로 작은 야생화와 풀들이 움튼 모습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중앙에는 작가가 관매도에서 만난 할머니가 있습니다. 작가는 밭을 일구며 자식을 걱정하는 그 모습에서 생명을 생산하고 길러내는 인류의 어머니를 느꼈습니다. 왼쪽 방향으로는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해방춤을 추었던 무용가 이애주, 엄마 노동자 홍성애, 전통복을 입고 춤추는 인물, 위안부 피해 여성 모습이 보입니다. 김인순은 이들의 모습을 땅 위에 중첩함으로써, 수많은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터가 되어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04년 ‘땅·물·살-중심의 동요’를 주제로 개최된 《조국의 산하》 전시에 출품되었습니다. 중심을 동요하게 하는 주변 존재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 이 전시에서 김인순은 중심의 바깥에 위치하지만, 생명을 생산하는 강인한 힘을 지닌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땅과 함께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척박했던 대지는 여성들이 가진 생명력으로 회복한 듯, <뿌리> 시리즈는 이후 작품에서 야생화와 초록빛 생명이 약동하는 숲속 대지로 변화합니다.
<일기>
여성의 삶과 노동 문제에 집중한 김인순은 집에서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일터에서 고된 노동을 병행하는 ‘엄마 노동자’의 현실을 주제로 작업했습니다. <일기>는 피코노동조합 사무장 홍성애의 이야기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두 아이 모습과 “한 아내로, 어머니로 세상 걱정, 집안 걱정, 자식 걱정, 남편 걱정”과 같은 구절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면서도, 임금노동을 하며 현실과 맞서는 여성노동자의 고된 삶을 말해줍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은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철수했던 한국피코의 지사장이며, “농성장” 팻말은 사측을 상대로 한 여성노동자의 농성을 상징합니다. 노동과 육아라는 고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여성은 다부지고 강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 우리의 생활은 밑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현실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여성노동자의 일상 모습과 조응합니다.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꿈 많고 욕심많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하면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한 아내로 어머니로 세상 걱정, 집안 걱정, 자식 걱정, 남편 걱정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 우리의 생활은 밑에서 맴돌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홍성애 작, 엄마 노동자 중에서 1992. 김인순 |
<태몽 09-3>
김인순은 2008년부터 여성의 생명력을 우주 에너지로 확장해 <태몽> 시리즈에 담아냈습니다. <태몽 09-3>은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새로 탄생할 생명의 희망찬 미래를 염원한 작품입니다. 탱화의 군도식 구도와 민화의 대칭구도를 결합하여 화면을 구성한 균형미가 돋보입니다. 당산나무처럼 신성하고 영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나무는 땅 밑으로 수많은 뿌리를 내려 대지를 지탱하고, 땅 위의 짙은 녹음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며 우주적인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나무뿌리와 함께 누워있는 여성은 대지의 자궁 안에 누워있고, 만물을 생성하는 어머니인 대지의 근원적 힘을 상기시킵니다. 화면 하단에는 고대 중국 모계신화의 창조신인 복희와 여와가 등장합니다. 두 신 가운데에는 민속의례에서 액막이용으로 사용되는 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생명의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은 음양의 조화로운 기운을, 주변의 나비와 새, 구름 도상은 길상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태몽 09-5>
<태몽 09-5>는 수목이 우거진 초원에 모인 군중이 해방과 생명의 춤을 추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밤과 낮이 공존하는 듯한 풍경 속에 서로 손을 부여잡고 환희에 찬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형상은 밤과 낮 구분 없이 발산되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생명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작가에 따르면, 남녀의 춤추는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기쁨이 뭔가를 형태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해에서 나와 하늘로 퍼져가는 오방색 무지개는 생명 탄생이 우주를 뒤흔드는 사건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놓인 무수히 많은 별자리는 우주 기운이 땅 기운과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야생화가 초원을 가득 채우면서 자연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며, 풀숲에 자리 잡은 원앙 한 쌍은 생명을 위한 화합과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생명 생산의 우주적 힘과 인류의 원초적 에너지를 태몽으로 연결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민화를 수집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미 형식을 고민해온 김인순은 <태몽> 시리즈에서 우주 기운과 결합한 생명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완성했습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sema.seoul.go.kr)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318233&glolangType=KOR&fl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