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53 가을 여행 후기 1 >
** 하루를 함께 지낸 건 2000겁의 인연 **
발걸음 가볍고 살짝 마음 설렌다.
오늘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수덕사 가는 날.
종합운동장엔 이미 ‘보성53’이란
무지갯빛 머리띠 두른 애마가 반기듯 깜박거린다.
오전 9시 현재 기온 15도. 하늘 날씨 찌뿌둥.
구름문 제치고 해님 나타나자
비로소 가을다운 가을 날씨 소리 없이 열린다.
머나 먼 곳 화성에서 올라오는 강전덕 사진작가 기다리느라 쬐끔
늦겠노라는 안내 방송에 어느 누구도 불평 낫싱.
하늘 같이 넓고 바다 같이 깊은 친구들의 가슴이 돋보이는 대목.
80여년 살아왔는데 그깟 25분쯤이야...
손잡고 눈 맞추고 이바구 날리며 웃는 면면이 정겹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 모임’에서 자주 보는 얼굴들이니
어찌 살갑지 않을쏘냐.
쉬지 않고 달리길 2시간여.
나이 들어 여행할 때 가장 힘든 건 뭐니 뭐니 해도 몸무게 줄이는 것이렷다?
평택휴게소에서 ‘실장님’께 인사하는 게 급선무.
(여기서 실장님이란 화장실을 뜻하는 걸 알란가 모를란가?
나들이 첫 번째 주점부리는 오정일이 내놓은 따끈한 호두과자.
월백회 때마다 싱싱한 과일 내놓는 김상규가 마련한 건
달콤 고소한 고급 초콜릿.
이 또한 얼핏 작은 것 같지만 배려와 봉사의
‘보이지 않는 큰손’ 아니겠는가?
부디 그 어여쁜 마음 변치 않기를....
“나라 밖에선 이스라엘이며 우크라이나가 전쟁중인 터에
우리는 히히 킬킬 이처럼 편한 여행 중이니...“
뒷좌석 멋스런 구레나룻 김홍수의 말소리가 귓바퀴에 꽂힌다.
아, 역사의 뒤안길은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을.
처음 들른 곳이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처음엔 병영성으로 쌓았다가 일반적인 읍성이 됐다는 특이한 경우.
얼기설기 쌓은 돌담이 방금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불안해 보인다.
문루에 들어서자 ‘살아있는 천사’ 유태전 부부가 해바라기 꽃처럼
활짝 웃으며 우리 일행을 맞는다.
장거리 걷기 힘들어 하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
휠체어 불편 무릅쓰고 떨쳐나선 것.
이곳 특이한 것 중 하나가 300년 된 회화나무일 터.
천주교 신자들을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는 슬픈 역사를 지닌 때문일까?
석회석으로 몸을 지탱해야 하는 무고한 형벌 받는 모습이 처연하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문루의 붉은 색 글자가 눈에 박힌다.
‘皇明弘治四年辛亥造’ 무슨 뜻일까?
저마다 나름의 해석을 해보는데 올곧은 똑똑이 유재석이
상식적 판단을 내린다.
황명은 명나라 황제, 홍치는 연호인 듯하고....
그렇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답은
‘명나라 효종 4년(1491)에 이 성을 지었다’였다.
먹고 걷고 싸고 나면 또 먹어야 하는 건 인간의 슬픈 숙명.일 터.
그렇지 않아도 12시를 훨씬 넘겼으니 출출할밖에.
‘4대를 이어온 80년 전통의 대통령의 맛집’
‘笑福갈비집’.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찾았다는 곳,
자랑삼아 걸어놓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의
퇴색한 캐리커처가 연륜을 말해준다.
왁자지껄 손님들로 붐빈다.
“이곳은 한우 암소갈비가 유명하대” “나 찐 맛있게 먹었어.”
지나치는 사람들의 음식평 소리가 벌써부터 침샘을 자극한다.
‘지글지글 보글보글’ 김은 모락모락...
갓 구어낸 양념갈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헐. 살살 녹는다.
입 안에 살살 육즙 퍼지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가효(佳肴)엔 미주(美酒)라 했던가?
안주 좋으면 술 생각은 절로 나는 법.
‘Maker’s Mark’ 켄터키 스트레이트 버번위스키.
최종일이 자기 집 창고에 둘 곳 없어 가져왔다는 술.
와, 엄청 큰 용량에 놀랐고 맛 또한 죽여줘서 감탄했다.
아, 이런 호강 자주자주 했으면 좋으련만...
배 두드리며 식당문 나서자 장성근과 최희태가
친구들 보고 싶어 왔노라며 우리를 맞는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
거기에 덤으로 “집에 갈 때 허전하지 않았으면 해서 마련했다”며
고장명물 호두과자를 1인 1박스씩 안겼겠다?
불원천리 불편한 몸 이끌고 온 것만도 고마운 일일진데....
장성근 총장, 고맙고 또 고마운지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고마운 친구 최희태의 ‘친구 사랑’ 역시 우리의 귀감이겠다.
서로 스쳐가는 정도의 짧은 순간도 1000겁의 인연이라는데 오늘 손잡고
마음 주고 받았으니 아니 그러한가?
식후엔 관광이 제격. 목적지는 천년고찰 수덕사.
우리나라 신여성, 시인이며 수필가인 金一葉이 여승으로 있던 곳으로 유명한 곳.
하지만 한 때 뭇 사람의 관심은 이광수와 썸씽 관계였는데
확실한 건 一葉이란 필명을 이광수가 지어줬다는 것.
헌데 아이러니한 건 목사의 딸인 그녀가 말년에 승려가 됐다는 사실이다.
햇빛 없고 바람 없어 나무그늘 아래 걷기에 안성맞춤.
인적 드문 경내를 멋쟁이 할배들이 휘젓고 다녀도 눈총 주는 이가 없다.
이곳의 볼만한 것이라면 신라 때의 삼층석탑과 고려 때의 대웅전이겠는데
목조건물인 대웅전의 단청이 퇴색해 있어 을씨년스럽다.
왜일까? 왜 이처럼 귀중한 문화재인 건물을 방치해 두는 것일까?
마침 3존불을 모신 대웅전에 있던 스님에게 이유를 물었다.
채색을 하려면 고증이 필요한테 어느 문헌에도 그런 기록이 없단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무작정. 헐.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5시가 가깝다.
이럴 땐 온천 목욕이라도 하면 피곤이 풀릴 법도 한데...
귀가 시간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이를 어쩐다?
의견 조율 끝에 만장일치로 목욕 패스, 서울로 직행.
아, 또 이렇게 좋은 하루가 가는구나.
내일도, 또 다른 내일도 오늘처럼 계속되면 좋으련만....
오늘 함께한 친구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도
다른 날에 우리 수다 떨며 다함께 즐기기를 기원하자.
즐거운 마당 마련해준 회장단과 성금 쾌척해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큰 박수 보낸다.
내내 건강하소서.
박동진 드림
202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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