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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 03. 09
탈해 왕릉의 불편한 진실과 팔각 석 기둥의 비밀
■ 경주시 동천동의 탈해 왕릉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자락에는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공의 탄강지가 있는 표암이 있고 그 옆에는 아이러니하
게도 경주석씨의 시조인 신라 제4대 탈해 이사금(재위 57∼80)의 능이 있습니다.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을 제향한 사당인 악강묘와 표암재(좌), 표암재와 가까운 곳에 있는 탈해 왕릉 이러한 위치도 이상
하지만 탈해 왕릉으로 비정한 마땅한 이유도 딱히 알 수가 없어 항상 의문을 가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모 비각에서 본 표암재와 악강묘(상,좌), 표암재에서 본 경모비각(상,우), 경모 비각 뒤에 자리한 광임대와 경주이씨
시조 발상지 비(하,좌), 광임대 안에 있는 초강지(下, 우) 이는 모두 경주이씨 시조 탄강지 권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금강산 자락 북쪽은 경주이씨 시조 탄강지 권역이며 남쪽으로는 탈해 왕릉과 숭신전이 있어 경주석씨 권역으로 나뉘
게 됩니다.
▲탈해 왕릉(사적 174호) ⓒ야촌
1730년 영조 6년 무렵의 문헌 즉,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지에는 신라 왕릉이 12기만 확인이 됩
니다. 이는 오릉(박혁거세), 미추왕릉, 법흥왕릉, 진흥왕릉, 선덕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효소왕릉, 성덕왕릉, 헌덕
왕릉, 흥덕왕릉, 흥무왕릉(김유신의 묘로 후대 왕으로 추존)으로, 당시 이와 같은 왕릉 비정 또한 신뢰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730년 이후로도 경주박씨 6기, 경주김씨 11기, 총 17기가 증가하게 됩니다. 일단 해당 일족들의 경쟁적인 왕릉 비정
(比定)도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 엉성한 왕릉 비정이 1930년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그대로 인정을 하여
지금까지 사적 지정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왕릉에 보이는 몇몇 오래된 표지석 비는 당시 1931년 전후로 세
운 것들이 많습니다. <참조: '천년의 왕도 천년의 기억' 및 '신라 왕릉' 이근직>
경주김씨 및 경주박씨 일족에 이어 시조 릉 찾기에 돌입한 경주석씨 또한 뒤늦은 20c 초에 현 자리를 비정(比定)하였
고, 이 또한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렇게라도 비정된 석씨왕릉은 박씨, 김씨 왕릉과
달리 탈해 왕릉 단 1기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 석탈해는 어디서 왔는가?
석탈해는 이주한 이민족임에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탈해가 온 곳이 어딘지는 현재 알 수가 없고,
다만 기록에 어디라고 전해 오지만 이 또한 어디인지 특징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즉위했다.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성(姓)은 석(昔)이고 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
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생략)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아직 진위 논란이 많은 환단고기에는,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할 때 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동행하였는데 훗날 고구려 건국의 주역이 됩니다. 그중 한 명이었던 협보가 유리왕 때 고구려를 떠나 서기 3년(유리왕 22년) 남쪽 삼한으로 가서 탈해의 출신지라는 '다파나국'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생략)
“나는 본시 용성국(한편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이 밖에도 일본의 큐슈, 인도, 고구려의 함경도 지역, 울릉도(우산국), 캄차카반도 등 여러 기원설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탈해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나산들 공원에 있는 탈해왕 탄강 유허비, 월성원자력 바로 남쪽 나아 해변에 위치합니다.
아진포는 현재 양남면 하서리 일대로 비정하거나, 경북 경주시 감포(甘浦)의 옛 지명으로 추정한다는 천관우의
설이 있습니다.
1845년 석씨 일족들이 이곳을 탄강지로 지정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나오는 '하서지촌' 지명이
남았는 '하서리'에 비정하지 않고 엉뚱한 양남면 나아리 해변에 지정한 것이 참으로 의외가 아닌가 그런 생각됩니다.
■ 석탈해의 즉위와 석씨 8대왕
석탈해는 57년 신라 제4대 이사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신라 2대 남해 차차웅은 장녀를 시집보내 탈해를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신라 3대 유리 이사금은 탈해가 왕위를 잇도록 유언합니다. 박혁거세의 아들과 손자인 남해와 유리 두 왕을 섬기면서 결국 왕위에 즉위했다는 것은 그만큼 박씨 일가와 친분이 두텁고 크게 신망을 받는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박혁거세와 탈해, 그리고 김알지는 이주해온 이주민이라는 것에 대해 견해가 없고, 아마도 선진문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실과 밀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박혁거세 왕실에서 후계자로 지명한 탈해,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태자로 삼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던 김알지...
그렇게 된 공통점은 바로 '이민족'이자 가지고 온 '선진문물'에 그 열쇠가 있다고 보입니다.)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57년 09월(음) )
34년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신료들에게 말했다.
“탈해(脫解)는 몸이 왕족과 연결되고 지위가 보필하는 신하의 자리에 있어 수없이 공로와 명예를 드러냈다. 짐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게 한참 못 미친다. 내가 죽은 뒤 [탈해를] 왕위에 즉위하게 하여 나의 유훈을 잊지 않도록 하라.”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즉위했다.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성(姓)은 석(昔)이고 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생략)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고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39년 되는 해였다.
이때 해변의 노모가 줄을 가지고 해안으로 당겨 함을 열어 살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할미가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신장은 9척이고 풍채가 훤하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생략)“이 아이의 성씨를 알 수 없는데 처음에 함이 도착했을 때 까 치 한 마리가 날아 울면서 이를 따랐으니 마땅히 ‘작(鵲)’자에서 줄여 석(昔)으로 씨(氏)를 삼아야 한다.
그리고 둘러싼 함을 열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아 어미를 공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생략)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다. 이곳은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왕은]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제 4대 탈해 이사금 재위 57년 ~ 80년 (석씨) 국호를' 계림국'으로정함, 지증왕때 '신라'로 정함.
제 5대 파사 이사금 재위 80년~112년 (박씨)
제 6대 지마 이사금 재위 112년~134년 (박씨)
제 7대 일성 이사금 재위 134년~154년 (박씨)
제 8대 아달라 이사금 재위 154년~184년 (박씨)
제 9대 벌휴 이사금 재위: 184년~196년 (석씨)
제10대 내해 이사금 재위: 196년~230년 (석씨)
제11대 조분 이사금 재위: 230년~247년 (석씨)
제12대 첨해 이사금 재위: 247년~261년 (석씨)
제13대 미추 이사금 재위: 261년~284년 (김씨, 김알지 6대 손)
제14대 유례 이사금 재위: 284년~298년 (석씨)
제15대 기림 이사금 재위; 298년~310년 (석씨)
제16대 흘해 이사금 재위: 310년~356년 (석씨)
석씨는 8명이 왕위에 올랐고, 도합 171년간을 재위했습니다. 이후 석씨 가문에서 신라왕은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탈해 이후 5대 파사, 6대 지마, 7대 일성, 8대 아달라 이사금을 지나 104년이 지난 10대 벌휴 이사금때 다시 왕위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나 연속 집권을 이루다가 13대에는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 이사금(재위: 261년~284년)이 경주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후 72년 후인 제17대 내물 마립간(재위: 356년 ~ 402년)이 즉위하고 912년 박씨 왕조의 신덕왕이 즉위하기까지 장장 556년간의 경주 김씨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신라 상고기에는 이주민 세력 수장이 왕족과 친분을 맺고 왕이 되거나 그 후손이 왕이되는 특수한 경우가 특징적으로 보여집니다.
■ 석탈해의 기이한 행적
■ 소나무 숲 사이로 잘 보이지 않으나 탈해 왕릉 남쪽 숭신전이 있습니다.
석탈해의 기록을 보면 기이한 행적이 많습니다. 그의 신비한 탄생 설화와 살아생전의 기이한 행적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아있습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이해 처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이를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고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39년 되는 해였다.
이때 해변의 노모가 줄을 가지고 해안으로 당겨 함을 열어 살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할미가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신장은 9척이고 풍채가 훤하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탈해 또한 가락국의 수로왕, 고구려의 시조 주몽,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같이 알에서 태어 난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난히 많은 우리 역사의 시조 난생설화! 한마디로 하늘이 내려주신... 즉 천손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태어난 알은 태양을 상징한다는 의미로도 보이고 그만큼 일반 사람과 다른 신비한 존재임을 부각하여 차별화를 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성장한 탈해는 우리 역사에 흔한(?) 9척 장신이라는데 대략 213c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특히 왜소한 신장으로
'왜'라는 이름을 가진 왜국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바다와 연관된 내용이 많은 것을 보면 바다에서 세력을 키운 해상 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탈해 왕릉 북쪽에는 경주이씨의 표암재와 악강묘가 지척에 보입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海尺]의 모(母)였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 가” 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신라의 입장과 가락국의 입장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가락국 김수로와의 연결고리는 공통적으로 보입니다.
삼국유사 탈해왕조에서는 가락국이 호의를 베푼 것으로 나오나, 가락국기에는 수로와 탈해가 한판 격돌하며 수로왕은 탈해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항복하고 돌아가는 탈해를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대군을 풀어 감시할 정도이니... 아무튼 한반도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토착민들과 맞게되는 일종의 통관의례였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아마도 이주한 박혁거세의 조상도, 김알지의 조상도 토착민과의 대결 또는 융합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탈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BC 전후로 고조선의 멸망과 한나라 건국, 흉노의 몰락 및 전한의 멸망과 15년 천하 왕망의 신나라 등장, 후한의 건국 등 격동기에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이주민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수많은 이주민족들 중 그나마 정착에 성공한 것은 김해 김씨, 경주 박씨, 경주 석씨, 경주김씨의 일부 일족들만 성공(이주민과 대립 및 융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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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다.
이곳은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三日月]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동자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동자의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삼국사기에는 토함산에 올라 길지를 알아보고 그곳을 차지하여 훗날 월성이 되었다는 다소 드라이한 내용만 실렸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그 길지를 어떻게 손에 넣었나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져 있습니다.
현재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명백한 부동산 사기(?)라 할 수 있는 일이고 비난받을 일입니다만, 탈해 다음의 박씨왕인 4대 파사왕이 금성에서 월성으로 왕궁을 옮겨 지금의 월성이 되었다는 것은 호공으로부터 빼앗은 월성 분지를 왕실의 재산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숫돌과 숯, 그리고 대장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철기를 다룰 줄 아는 세력으로 읽혀집니다. 당시의 철기 기술은 현재의 반도체 기술만큼이나 최첨단 기술이지요! 아마도 그런 바탕에 탈해가 박씨 왕족과 서로 윈 윈 하는 관계로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왕위에도 오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정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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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올리려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로 인하여 그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하여 “이후로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후에야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요 내정(遙乃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 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 ‘내가 바로 탈해다.’라고 하며 소천구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라 부른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삼국유사에는 탈해의 기이한 기행이 자주 언급됩니다.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탈해는 당시 주변인들과는 행보와 행실이 남다르고, 가락국의 수로왕과 대립할 정도의 전술,전력가라는 말로 들려집니다. 이 모두를 요약하면 탈해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철을 다루는 첨단 기술을 가진 해상세력에 전략. 전술에 능한 신체도 현지인보다 우월한 사람 그리고 죽은 후에도 신라 왕조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라는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석탈해의 토함산 요내정 우물은 어디인가
[김유경의 '문화산책'] <32> 경주의 우물 ③ 김유경 언론인
▲블로그 이웃님의 흥미로운 요내정 관련 포스팅입니다.
경주 토함산 요내정이라 알려진 포수우물 과 석탈해왕 이야기
경주 토함산에는 불국사와 석굴암도 있지만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탈해왕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져......
/m.blog.naver.com
■ 탈해 왕의 사망과 탈해 왕릉에 관한 불편한 진실
왕이 죽다 [80년 08월(음)]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가을 8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丘)에 장사지냈다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23년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川丘) 속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 신(神)이 명령하기를 “내 뼈를 조심스럽게 묻어라.” 했다. 그 두개골의 둘레는 3척 2촌이고 몸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나 되었다.
치아[齒]는 서로 붙어 마치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이는 소위 천하에 당할 자 없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이것을]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 안에 안치하자 신이 다시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영을 내려 그 곳에 모시게 하였다 한편 돌아가신 이후 제27세 문호왕(文虎王)대인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문무왕의 오기)의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 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 ‘내가 바로 탈해다.’ 라고 하며 소천구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라 부른다.
三國遺事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야촌 / 2009년 4월 5일 11 : 40
탈해 왕릉 측면에 바짝 엎드린 쳐진 소나무가 있었고 꽤나 유명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탈해왕을 장사 지낸
양정구(삼국사기) 및 소천구(삼국유사)의 정확한 지명은 알 수가 없으나 동천동 산자락 아래의 현 탈해 왕릉은 아
무리 봐도 지형의 구조 상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丘(언덕)이라 볼 수가 없습니다.
탈해 왕릉이 실재 존재하더라도 많은 학자들은 기록에 의한 고증 조차도 이곳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소천구의 릉을 파묘하여 뼈를 추려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으
므로 아마도 탈해 왕의 릉은 그때 당시 이미 사라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여집니다.
이외에도 탈해왕릉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경주 석탈해 왕릉 도굴 유물 한점 없어 범인 3~4명 추정 [뉴스]경향신문 1975년 01월 01일(수요일) 경주 석(昔)씨의 시조 신라 제4대 석탈해 왕릉이 30일 밤 도굴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31일 상오 10시 왕릉 감시원 노봉구(44) 씨에 의해 확인, 경찰에 신고 되었는데, 도굴범들은 왕릉 동북쪽에서 높이 2m 너비 85m. 4.4m 까지 파내려갔었다. 문화공보부 정재윤 경주 사적관리사무소 소장과 정양모 박물관장이 도굴 현장을 확인했는데 시체 안장실에는 유물이 하나도없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이 왈릉이 이장된 것으로 밝혀내고 본래 왕릉 안에는 유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 왕릉은 높이 10m. 밑지름 15m로서 경주시 동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경찰은 도굴범이 3~4명이며 이 왕릉의 특징을 모르는 원정 도굴꾼의 소행으로 보고 조사중이다. 탈해 왕릉은 이미 1974년 12월 30일(월요일) 도굴 당하여 익일 신고되었고 이후 긴급 조사를 한 결과 그 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
탈해왕보다 더 후대의 제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1년~284년)의 릉 구조는, 대릉원에 위치하고 미발굴 고분이지
만 천마총과 같은 적석목곽분으로 거의 추정되고 있습니다.
미추왕보다 72년 전에 죽은 탈해의 고분 양식(돌방무덤)보다 더 전대의 것으로 판명 난 이상 아무래도 탈해 왕릉의
고증은 분명한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안타깝지만 탈해 왕릉이 아닐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탈해 왕릉이 부정되는 이유 '요약'
1) 양정구(삼국사기) 및 소천구(삼국유사)의 정확한 위치를 특징할 수가 없다.
2) 현 왕릉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언덕(丘)이라 볼 수가 없다.
3) 릉을 파묘하여 뼈를 추려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안치했다는 기록으로, 릉이 있을 수 없다.
4) 도굴된 탈해 왕릉의 구조가 6세기 이후의 것으로 밝혀져 탈해 왕의 시대 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다.
■ 탈해의 사당 옛 숭신전 터와 현재의 숭신전(崇信殿)
숭신전(崇信殿)은 대한제국 시절인 광무 2년(1898), 경주 군수 권상문이 탈해 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제안하여
경주 석씨 후손 석필복(昔必復)이 월성(月城) 안에 세웠습니다.
▲월성 내부에 지금도 남아있는 숭신전 옛 터의 모습.
숭신전 옛 터의 동편, 서편의 모습! 동편에 계단이 확인되어 동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8년 뒤인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숭신전(崇信殿)’이라는 이름으로 사액
되었습니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친히 내리던 것입니다.
▲동천동 숭신전의 홍살문과 영녕문(永寧門), 좌측에는 '신라석탈해왕비명'의 비각인 모우각'(慕虞閣)
원래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 성역화 작업으로 인하여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82년 동안 있었던 자리를
떠나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까지 봄. 가을에 춘추 행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동전동으로 이전한 신위를 봉안한 숭신전(崇信殿), 월성의 옛 터는 바로 이 건물의 자리였습니다.
앞에 정료대가 보입니다.
석탈해왕의 후손 석(昔) 씨 대종회 석진환 회장 설명에 따르면 숭신전의 역사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월성의 숭신전 모습을 대략 추정해 볼 수 있고, 또한 그간의 고충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8각 기둥을 지나 안쪽 본전으로 들어가는 경엄문에 이르는 바깥마당에 이 우물이 있어 숭신전에서 사용했다.
조선 태조 임금 이성계가 월성 터를 석씨 문중에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해 종중이 계속 받들던 것이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 때 모두 일제에 몰수됐다.
1979년 월성 전체가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면서 정부가 숭신전을 월성에서 없애기로 결정, 종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신전 전체를 현재의 동천동 터로 이건하였다. 이때 8각 문기둥은 이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두고 왔다.
동천동에는 대신 홍살문과 영녕문이 들어서고 비석은 비각 안에 모셨다.
숭신전 터의 우물은 경주 석씨 숭신전지에 의하면 1938년 820원의 비용으로 관리실 5칸을 짓고 우물을 설치하
였다는 기록이 한 줄 있는데 설치가 어떤 규모의 공사를 말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숭신전이 처음 세워질
때 우물이 먼저 있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월성 숭신전 우물과 8각 돌기둥 <프레시안 2016.05.28>
▲2014년 2월 월성 숭신전 옛 터에 한 쌍의 팔각 석주 모습. 주변이 그나마 정비되었을 때의 모습이다.
위 석진환 회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 팔각 돌기둥은 입구의 개념으로 현재의 모습처럼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여기를 지나 삼문인 경엄문과 숭신전 사당이 담으로 둘러졌을 것입니다.
돌기둥과 경엄문 사이에는 5칸의 관리실과 그 동쪽에는 신라 석탈해왕비명비와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기둥을 중심으로 보면 숭신전은 남향을 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실
제 이 돌기둥에서 보면 숲 사이로 동향한 숭신전의 측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월성에서 동천동으로 북북동 쪽 2.3Km로 1980년 이전하게 됩니다.
1980년,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조치였지만 당시는 엄혹한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신군부가 다시 집권
하던 독재시대였으니, 아무리 자존심 높은 석씨 일족이라 할지라도 무력하게 이전에 응했음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경주에는 의미 있는 일족의 사당이 아직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경주 박씨 시조의 숭덕전(崇德殿), 경주
석씨 시조의 숭신전(崇信殿), 경주김씨 시조의 숭혜전(崇惠殿)및 육부촌장이었던 경주이씨 시조의 악강묘(嶽降廟)
가 있으며 1992년에는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김유신의 숭무전(崇武殿)이 있습
니다.
역대 시조들을 모시는 사당에 ‘숭(崇)’자와 ‘전(殿)’자가 들어간 이름은 신하의 건의 아래 임금이 직접 내린 경우가
많습니다. 즉 아무나 ‘숭(崇)’자와 ‘전(殿)’자를 쓰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임금이 내린 현판(편액)은 사액(賜額)이라 하며 왕이 직접 쓰거나 당대 최고의 명필을 천거하여 쓰게 합니다.
또한 왕이 내린 사액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하며, 왕이 직접 쓴 글씨는 전서체로 어필(御筆)이라 글 옆에 작
게 새겨집니다.
▲경주 석씨의 영역 숭신전과 탈해 왕릉, 경주이씨의 영역 표암재(瓢巖齋)와 악강묘(嶽降廟)
■ 옛 월성 숭신전 터의 팔각석 기둥의 정체는.....
▲2011년 12월 월성 숭신전 옛 터의 석주 모습, 이때는 주변에 대나무와 잡목이 무성한 정비 전 모습이다.
▲근년에 주변이 정비된 월성 숭신전 옛 터의 석주 모습, 숭신전 터는 숲 너머에 있습니다.
팔각 석 기둥 너머 비석대와 우물, 우물의 덮개석은 아마도 신라시대 석불좌상의 사각대좌의 상대석 또는 하대석을 재 가공하여 사용 한것으로 보입니다.
보물 제 8호 여주 고달사지 석불 대좌를 참고하면 그 본 모습이 확인 될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팔각기둥은 애초에 이렇게 세워져 입구 초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석진환 회장의 증언을 보면 옮겨질 때 팔각기둥은 그대로 두고 경엄문(현재 내삼문)과 사당(숭신전), 비 만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동천동으로 옮겼을 때 비로소 내.외삼문을 갖추고 홍살문을 세워 사당의 격식을 갖춘 것이라고 합니다. 비석 받침은 두고 비만 옮겼고, 옮겨지면서 새로 비석 받침 그리고 비각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비와 비각의 높낮이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팔각 기둥을 두고 간 이유는 아마도 홍살문이 대신하게 되어 필요 없어진 까닭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장초석 개념으로 외삼문에 사용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 외삼문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영녕문(외삼문)은 동천동으로 옮겨진 후에 새로 생겼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설사 장초석(실제 사당 건물 또는 비각 등에는 장초석이 많이 쓰임)으로 외삼문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높이가 너무 높아 삼문의 비율에 잘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홍살문의 장초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없지만, 그 상태로 세우기 힘든 구조이며, 홍살문 또한 동천동으로 이전하여 세웠다는 증언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현재의 모습처럼 세워져 '숭신전의 입구(외삼문)'라는 상징적 격식만 갖추고 사용된 듯 보입니다.
실제 그 정도 높이의 홍살문 장초석이 이용된 예가 거의 없고 충북 괴산 칠충각 홍살문 장초석이 이와 높이가 비슷하나 홍살문을 지탱해야 하는 구조상 장초석에 깊은 홈이 패어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즉! 현재의 팔각 석주의 모습으로는 홍살문에 아예 사용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팔각기둥은 그 쓸모를 다하고 이전하였을 때는 큰 의미가 없어 두고 간 듯합니다. 애초에 이곳에 사용될 석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경주에 그 흔한 신라시대의 석재가 아닐까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다 보니 불현듯 숭신전 건물을 세울 때 사용하려 어디선가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아래는 팔각 석주가 사용된 예입니다.
▲불국사 대웅전 및 극락전 앞 석등, 국립경주박물관의 미술관 뒤 경주읍성 석등
신라시대의 석등 석재는 경주 일대에 무수히 많습니다. 조선시대 민간인의 집(교동최씨 고택)에도 정원 장식용으로 가져와 세워 둘 정도입니다.
특히 팔각의 석주는 석등의 간주석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월성의 팔각 석기둥을 석등의 간주석으로 본다면 너무 높고 지름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단석,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까지 더한다면 상당한 높이의 규모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2기나 되는... 따라서 석등의 간주석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옥산서원의 정료대, 신라시대의 석등 간주석과 상대석을 재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사당에 흔한 '불 그릇'을 올려 밤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가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는데 그렇게 사용하기에도 높이가 너무
높아 사용하기에는 불편하여 구조적으로 실용적이지 않다는 점도 있습니다. 불을 붙이거나 불 그릇을 올리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이지요
(실제 경주 일대의 정료대는 보통 석등의 간주석과 상대석(하대석), 심지어 석탑의 옥개석과 조합하여 설치 한 예가 많습니다.
동천동의 숭신전 앞에도 한 기의 정료대가 확인됩니다. 이 또한 석등의 것으로 보입니다)
▲감은사지의 계단 석주와 망덕사지의 계단 석주
또 다른 추정은 신라시대 건물로 올라가는 석계단의 석주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감은사지의 계단 석주와 망덕사
지에 묻혀있는 계단 석주가 좋은 예가 됩니다. 이 또한 그런 용도로 사용되기에는 지름이 너무 크고 높이가 필요 이상으로 높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월정교 남북누각 앞에 배치된 팔각 석주와 사자상
복원[중창]된 월정교에는 남북에 각 한 쌍의 팔각 석주가 누각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석주를 유심히 살펴보면 발굴된 옛 석주 석재를 사용하여 세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은 일정교지의 발굴에서 실제 이러한 석주가 발굴되었습니다.
길이 257cm, 지름 41cm의 상당히 길이가 긴 석주였습니다. 받침 석과 하반신만 남은 팔각 석좌에 조각된 사자상도 함께 발굴되어 현재의 월정교 복원에 그 모습이 참고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사자상의 파손을 우려하여 손닿기가 쉽지 않은 높이에 사자상을 세웠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복원된 월정교의 석주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를 토대로 월정교의 팔각 석주가 복원되었다고 봅니다.
월성 내 숭신전 터의 팔각 석주(서쪽 석주)는 높이가 대략 168cm 정도 지름은 하단의 둘레 150cm를 π로 나눠 지름을 확인하면, 48cm 정도, 같은 방법으로 상단 130cm로 지름 41cm 정도 나오게 됩니다. 하단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7cm 가량 좁아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름은 일정교의 것과 비슷하지만 높이가 턱없이 낮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월정교, 일정교의 석주가 발굴되었고 그 실체가 확인된 바, 이곳의 석주가 옮겨진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월성과 월정교 및 일정교는 매우 가까운 곳이라 월성의 팔각 석기둥이 그곳에서 옮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앞서 거론한 것을 요약하지면 ...
1) 삼문과 같은 건물(홍살문 포함)의 장초석: 건물과의 비율 및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
2) 석등의 간주석 및 정료대: 일반적인 석등 간주석 비해 지나치게 크고 높다.
3) 석 계단의 석주: 석 계단 석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굵고 높으며 주변 조화가 잘 맞지 않는다.
4) 월정교 및 일정교의 다리 앞 사자상 석주: 일정교지 발굴에서 이미 확인되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팔각의 형태를 가진 석기둥의 용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앞서 거론한 것들이 아니라면 이 팔각 석기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팔각 석기둥의 형상만을 가지고 추정해 본다면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릉의 이것입니다.
□'화표석(華表石)'
신라 제38대 원성왕릉[괘릉]은 신라시대 왕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완벽한 능 묘제 양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화표석은 인도의 아쇼카 석주의 영향을 받은 중국 남조의 황제 릉에서 당나라로 이어지고 신라가 받아들여 원성 왕릉에 처음 세운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화표석은 능역 경계의 최전방으로 신도의 입구를 명확히 알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지요!
<신라 왕릉, 이근직>
원성왕릉(괘릉)의 화표석, 얼추 월성의 팔각 석주와 높이가 비슷한 감이 있습니다. 화표석 상단에는 돌기가 보이는데 이는 무엇인가
를 올려 끼워 고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흥덕왕릉의 화표석
제38대 원성왕과 그의 손자인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의 릉은 공통적으로, 봉분 둘레에 12지신 상을 새긴 호석, 릉을 감싸는
석 난간과 그 릉을 사방에서 지키는 석 사자상 4기, 문.무인상 각각 한 쌍, 릉 초입에는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갖춰져 있었는데 이는
신라시대 통틀어 가장 완성된 능묘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성, 헌덕, 흥덕왕릉은 거의 같은 능묘제 모습을 유지하였으며, 따라서 화표석도 이 3곳의 릉 에만 있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야촌
※(신라헌덕왕릉 → 경주 헌덕왕릉)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종목 : 사적 제29호
◇명칭 : 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수량 및 면적 : 18,007㎡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시대 :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경주시
헌덕왕 릉, 현재 12지신 상 중 5기만 남아있고, 상석과 난간석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북천의 범람으로 북천변의 현덕 왕릉은 몇 번이나 초토화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고 현재 현덕 왕릉은 12지신 상 중 5기만 남긴 채 거의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상석을 포함 호석 일부 및 난간석의 대부분은 새로 복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사자상과 문.무인 상 및 화표석은 유실되어 현재는 없어진 상태입니다.
◇제38대 원성왕릉: 12지신 상, 석 난간, 상석, 사자 상 4기, 문.무인 상 각 한 쌍, 화표석 한 쌍
◇제41대 헌덕왕릉: 12지신 상, 석 난간, 상석(복원)
◇제42대 흥덕왕릉: 12지신 상, 석 난간, 상석, 사자 상 4기, 문. 무인 상 각 한 쌍, 화표석 한쌍
▲분황사 모전 석탑의 사자상 2기와 경주고등학교 교정의 무인 상
현재 논란은 있지만 헌덕 왕릉과 남서쪽 1Km 거리에 있는 분황사 모전 석탑 모서리에 있는 사자 상 2기가 이곳의 사자 상으로 추정한다는 주장이 있고 꾀나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경주 고등학교 교정에는 홍수 때 휩쓸려 내려온 파손된 무인석상의 일부를 가져와 교정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흡사 원성 왕릉 및 흥덕왕릉의 무인 상처럼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인상은 완벽한 왕릉의 석물이라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무인상 중 좌우 문인 상 한 쌍과 무인 상 1기는 여전히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북천 어딘가에 수장되었거나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월성 숭신전 옛 터의 팔각 석주
남쪽과 북쪽에서 본 모습! 흡사 왕릉의 화표석이 아닐까...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팔각 석주의 상단 모습, 약간 오목한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올려두었다는 의미 일지도 모릅니다.
▲인도 아쇼카 석주.
화표석은 아소카 석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정교지의 발굴 내용과 월정교지의 복원된 석주 모습처럼 아마도 석주 위에는
사자 석상에 올려져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일정교 발굴에서 그 사자상 하반신이 발굴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원명역학연구원 블로그>
그렇다면 헌덕왕릉 화표석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요? 물론 기록에서 증언한 내용처럼 홍수에 유실되었거나 누군가가 옮겨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헌덕왕 릉의 사자상과 석인상과 달리 안타깝게도 화표석에 대한 관심은 크게 없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헌덕왕릉에서 옮겨진 왕릉 석물[추정]들...
앞서 거론한 것을 토대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헌덕 왕릉에서 행방이 묘연한 화표석 한 쌍은, 월성 내 숭신전 옛 터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저의 추론 입니다. 물론 숭신전을 세울 당시 사용하고자 가져왔을 수도 있고 더 이전에 옮겨졌을 수도 있으나 그 옮겨진 시기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유적 보존 의식이 미비했던 조선시대만 해도 흔하디흔한 일이었습니다.(故 이근직 교수의 '신라왕릉. P352' 에, 표암재(瓢巖齋)에는 안상(眼象) 무늬가 새겨져 있는 석재가 확인되는데 이는 헌덕 왕릉에서 옮겨진 것 같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소나무 숲에서 바라 본 팔각 석주
다만 외동의 원성 왕릉, 안강의 흥덕 왕릉에는 화표석의 존재가 확인되니 분명 그곳의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월성과 거리도 가깝고 화표석의 존재도 확실 시 되나,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헌덕 왕릉의 '화표석' 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정해 봅니다.
또한 헌덕 왕릉의 석물들이 홍수 또는 인위적인 이유로 그 일대에 산재하게 옮겨졌다는 것이 확인되니 화표석 또한 그러한 운명 이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마추어인 필자의 생각이고 또한 그러한 가설을 세워 두는 정도까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헌덕 왕릉의 화표석에 관한 관심과 심도 깊은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해 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물론 반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성왕릉 및 흥덕왕릉의 화표석에 비해 이곳의 팔각 석주는 아래보다 위쪽으로 가면서 지름이 좁아지는 즉! 약간의 기울기가 보인다는것 등등 그런 반론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이상으로 석탈해왕과 탈해 왕릉 및 숭신전에 관한 전반적인 탐구를 해봤습니다. 아마도 공신력 있는 연구 기관이 보다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면, 월성 내 숭신전 옛 터의 팔각 석 기둥의 정체가 보다 확연히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아마추어의 가설은 여기까지 입니다. 앞으로 그런 중요한 일들은 미래 사학자들의 숭고한 몫이 되겠지요!
글 우경
필자가 사진 등 일부 자료 편집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