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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11. 10
■ 경주 약사(略史)
본 글은 시인 김대원(瑞耕)님의 글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경주는 먼 옛날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 BC 57∼AD 4)가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 명칭을 <사로국>으로 부르다 제4대 석탈해 왕 9년에는<계림국>으로 불리었다.
물론 역사서엔 그전 (15대 기림이사금 289~310) 10년에도 국호가 언급(言及) 되었지만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때 나라의 중심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지증 마립간(437~514) 시절에 가라국과 합병한 후 가라국(伽羅國AD42~526)의 문물제도를 흡수하여 <새가라>라 호칭하다.
23대 법흥왕(514~540)때 비로써 정식으로 나라 형태를 갖추고 <신라(新羅)>라 칭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왕의 호칭(呼稱)을 처음으로 가락국 처럼 왕호를 왕(王)이라 칭하였다. 그렇게 불리든 이 나라가 국호를 정식으로 신라라 칭하게 된 것은 법흥왕(514~540)때다.
그 전에는 국가원수의 칭호를 <혁거세>니 <마립간>이니 <차차웅>이니 <이사금>이니 하고 불렀다. 가락국이 건국 초기부터 국왕의 칭호를 왕이라 칭하였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런 측면으로 살펴보면 신라보다 가야가 먼저 건국된 문화선진국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문화나 대륙문화를 신라보다 가라국이 백 년 이상 앞서 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역사서엔 신라보다 가락국이 늦게 건국된 것으로 기록, 서력 42년에 김수로왕(金首露王 42∼199)이 세운 것으로 밝혀놓고 있다. 법흥왕이 국명을 신라(新羅)로 개칭한 이곳은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현 한국 카톨릭 대구교구 성동천주교회가 세워진 이곳 명칭을 처음으로 경주(慶州)라고 정한 때는 고려 태조가 신라와 합병한 935년(태조18년)이다.
그 후 경주는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慶州)가 되었다.
충렬왕 13년(1308년)에는 계림부(鷄林府)라 하여 부윤(府尹)을 두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 팔도(八道=京畿 忠淸 慶尙 全羅 江原 風海 平安) 영길 체제를 확립하고 계림부가 경주부로 개칭 되었으며, 1519년(중종 14년)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경상좌도 감영을 경주부에 두었다.
1601년(선조 34)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경주부는 경주군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하면서 17면을 관장 하였다.
1896년 칙령 제36호에 의해 전국의 23부가 13도로 정비되고 이를 다시 7부 1목 331군으로 나누어 경주는 경상북도 대구부 소속이 되면서 외남면(두동 두서)이 언양군으로 이속되었다.
1906년(광무10년) 1월 19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동해면이 장기군으로 기계면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북안면이 영천군으로 이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후,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1913년 12월 29일에 공포된 것을)발령 부군면을 폐합 장기군의 양북 양남 2개면이 편입되어 경주군은 경주 강서 강동 외동서 양북 양남 내동 내남 산내 현곡 천북 12개 면으로 구성 되었다.
1931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 130호(1930년12월 29일) 공포로 읍면제 실시에 따라 경주면이 경주읍으로 승격되고
1937년 7월 1일에 양북면 감포, 외 八개리가 분리 감포읍으로 승격 2읍 11면으로 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1949년 5월 20일 대통령령 제 99호(5월 7일 공포)로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 3읍 10면으로 구성되었다.
1955년 9월 1일 법률제 370호(1955년 8월 13일 공포) 경주읍과 내동면과 천북면의 황성 동천 용광리와 내남면의 탑리를 편입하여 경주시로 승격되어 동부, 서부, 북부, 성동, 노동, 노서, 성건, 사정, 황남, 교동, 인왕, 탑동, 충효, 서악, 효현, 광명, 동방, 도지, 남산, 배반, 구황, 보문, 황성, 용강, 동천, 평동, 조양, 시동, 시래, 구정, 마동, 하동, 진현, 천군, 신평, 덕동, 암곡, 황룡동 39개 법정동을 관할하였고, 기존 경주군의 명칭을 월성군으로 개칭하여 감포 안강읍 양북 양남 외동 내남 산내 서면 현곡 강동 천북 2읍 9면으로 구성되었다.
1963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131호(1963년 3월 12일 공포)로 덕동과 불국사에 경주시 출장소를 설치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1973년 3월 12일)로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천포. 송선.신평.용명. 대곡.화천.모량. 방내.금척.조전리 등 11개를 분리하여 건천읍으로 승격, 월성군은 3읍 9면이 되었으며 동일자로 천북면 청령리가 안강읍에 편입되었다.
한편
경주시 조례 제469호 공포(1973년7월 1일) 39개 법정동을 통합하여 22개 행정동으로 조정하였다
성내동은 동부, 서부 북부동을 통합 하였고
중앙동은 노동 동 노서동을 통합하였고
인교동은 인왕동 교동을 통합 하였고
탑정동은 탑동 사정동을 통합 하였고
서현동은 서악 효현동을 통합하였고
도동동은 도지동 동방동을 통합하였고
배남동은 배반동 남산동을 통합 하였고
보황동은 보문동 구황동을 통합하였고
용황동은 용광동과 황성동을 통합하였고
정래동은 구정동 천군1동 시래동을 통합하였고
불국동은 하동 마동 진현동을 통합 하였고
덕황동은 덕동 황룡동을 통합하였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7호(1975년 9월 23일 공포)로 월성군 내남면 율동 1, 2, 3리 배리1, 2,리를 경주시 탑정동애 월성군 천북면 북군 1.2리, 손곡리를 경주시 천군동에 월성군 양북면 범곡리일부 외동면 신계리 1부를 경주시 불국동으로 각각 편입시켰다.
이로서 경주시는 43개 법정동에 22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에 대통령제 10050호(1980년 10월 21일공포)로 월성군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어 월성군은 4읍 8면으로 구성되었다.
1984년 9월 1일 경주시 조례 제1136호(1984년 9월 1일공포)로 불국사 및 덕동 출장소를 페지하였고, 1986년 5월 1일 경주시 조례1219호(1986년 4월 20일공포) 행정동을 통폐합하여 16개 동으로 조정, 선도동은 충효 서현 광명동 통합된 동이고 도동동은 배남동의 남산동과 삼성동의 평동이 통합된 동이고 보황동은 배남동 배반동이 통합된 동이고, 정래동은 삼성동의 시동 조양동이 통합된 동이고 보덕동은 천군동 덕황동 암곡동이 통합된 동이다.
1987년 1월 1일 대통령제 12007호(1986년 12월 23일 공포)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1부를 양남면 나아리에 월성군 금장리 일부를 경주시에 각각 편입 하였다. 경주시조례 1241호(1986년 12월 31일)공포로 금장리를 석장동으로 개칭 44개 법정동으로 구성하였고 그 석장동을 성건동에 편입하였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1988년12월 31일) 월성군 명칭을 경주군으로 개칭하다가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1994년 8월 3일) 공포로 경주시와 경주군을 통합 경주시로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 경주시가 되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이 4읍 8면 16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이어 5월 27일에는 경주시 조례 300호(1998년 11월 14일 공포)발령으로 성내동과 중앙동을 통합하여 중부동으로 하였고 인교. 봉황. 도동을 통합하여 월성동으로 불국 정래동을 통합하여 불국동으로 조정하여 지금현재(2005년)경주시 하부 행정 구역은 4읍 8면 1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2005년 慶州市의 행정구역 지방의 실태(實態)와 현황(現況)을 개관하면 경주시 [慶州市]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있는 신라천년의 문화유적이 산적해있는 관광도시다. 그 면적은 1,323.7㎢, 인구는 28만 1662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213명/㎢(2003.10현재) 이다.
그리고 2005년 현재 경주시 관할(關割) 행정구분은 4읍 8면 13동으로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 및 양북면·양남면·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과 중부동, 성동동, 황오동, 성건동,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황남동, 보덕동, 월성동, 탑정동, 불국동, 선도동 으로 가구 수는 10만 384세대(2003.10)요, 시청 소재지는 경주 동천동 800번지에 있다.
시(市)의 꽃은 개나리 시(市)의 나무는 소나무, 시(市)의 새는 까치이고, 경주시의 문화재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ICOMOS(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국제 기념물 유적회의)를 통해 2000년 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으며 2005년 현재 국보보31점, 보물 74점, 사적 74점, 사적 및 명승 2점, 천연기념물 3점, 중요민속자료 16점을 포함한 국가지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29점, 무형문화재 2점[참조: 교동법주(배영신) 누비장(김혜자) 2점, 외 도 지정무형문화재 경주 인물로 가야금 병창 주영희 가극 박기자 등등이 있습니다만 이들은 유명기술인물 유명 문화인물이지 문화재라 칭함은 온당치 않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기념물 18점, 민속자료 4점, 문화재자료 40점 여기에다 최근에 박제상 관련 치술령 망부석등이 지방 민속 문화재로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북동쪽으로는 포항시, 서쪽으로는 영천시·청도군,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동쪽으로는 동해에 이르게 된다.[주석(註釋)란 참조; 후반부 25쪽~ 27쪽] 2005년 현재 행정구역은 4읍 8면 13동의 그 중심으로 경주시 동천동 800번지에 경주 시청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경주시 지역(地域)은 대부분 경상분지지체(慶尙盆地地體)에 속하고, 양북면 어일리·범곡리와 천북면 등의 일부 지역은 포항분지지체에 속한다. 경상분지 지역은 경상계의 퇴적암층을 뚫고 관입한 불국사관입암층(佛國寺貫入岩層)으로, 화강암과 반암이 주로 분포한다. 포항분지는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지층으로 화성암·수성암·역암·사암·응회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동부 해안 지대는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산지가 이어진 동대산계(東大山系)를 이루고, 서부는 단석산(斷石山:829m)을 중심으로 단석산계를 형성해 낙동강 유역과 형산강 유역의 분수계를 이룬다. 양 산계의 중간을 형산강과 그 지류가 흐르면서 안강·건천·내남 등 3대 평야를 형성하여 비옥한 농업지대를 이룬다.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으로 나누며, 내륙지역은 연평균기온이 14℃, 1월 평균기온이 -0.3℃, 8월 평균기온이 26.6℃이고, 연평균강수량은 998.2mm이다. 춥고 더운 차이가 심하고 강수량이 적은 남부내륙형 기후를 나타낸다. 해안지역은 동해의 영향을 받아 연 평균기온온13.3℃, 1월 평균기온 0.6℃, 8월 평균기온 25℃, 강수량 1,028.6mm로, 따뜻하고 습한 남부해안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자주 지나간다.
경주시의 농수산 경지(耕地) 경주평야 [800*600, 148kb ]면적(面積)을 보면 전체 면적의 19.3%이고, 임야가 68.7%를 차지한다.
주로 논농사 중심이다. 농산물로는 쌀·등 작물 외에 사과와 각종 채소류가 생산된다. 이밖에 양송이·산수유·표고버섯·약초·밤·대추 등도 생산된다.
축산은 한우·젖소·닭의 사육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은 어항인 감포읍을 중심으로 주로 꽁치·오징어·가오리 등의 어획과 함께 어류 양식업도 행해진다. 경주시의 광공업으로는 1989년 이후 안강읍과 외동읍 및 구(舊)경주시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포항시와 울산광역시 사이에 있는 관계로 기계·비금속·식료품 등의 업체가 많이 들어서 있다. 2003년 현재 산업단지로는 외동지방·건천1지방·건천2지방·석계지방·화산지방 산업단지에 37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농공단지는 안강농공단지에 9개 업체, 건천농공단지에 5개 업체, 외동농공단지에 5개 업체, 내남농공단지에 4개 업체, 서면농공단지에 16개 업체가 들어서 있다. 산업단지와 농공단지의 주요 업종은 자동차부품과 섬유 등이다.
주요 광산물로는 고령토·불석·규조토·납석 등이 생산되며, 고령토는 해외로 수출된다. 경주시의 관광업으로는 민속 공예촌. 경주 공예촌[800*600, 134kb] 등지에서 전통 공예품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판매하고 있다. 또한 숙박업으로는 국제적인 관광도시로서 특급호텔 6개, 1급호텔 2개, 2·3급 호텔 5개, 가족호텔 1개, 콘도미니엄 3개 업체를 비롯하여 많은 숙박시설과 관광기념품 판매점 및 관광 음식점이 있다.
이러한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2,376명이나 된다. 2001년에는 외국인 관광객 49만 9000여 명을 포함하여 약 674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특히 경주시는 철도와 도로교통의 요충지이다. 철도는 동해남부선(포항∼부산)이 통과하며, 중앙선(경주∼서울 청량리)의 기점이다.
중앙선은 영천에서 갈라져 대구선을 통해 경부선과 연결된다. 도로교통은 경부고속도로 외에 국도, 지방도, 시·군도가 이어져 있다.
경주 일대는 신라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이 도처에 있고 자연경치가 아름다워 대부분 국립공원(國立公園)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관광지는 불국사, 석굴암, 국립경주박물관, 대릉원(大陵苑), 분황사(芬皇寺), 첨성대, 계림(鷄林), 황룡사지(皇龍寺址), 임해전지(臨海殿址:안압지), 포석정지(鮑石亭址), 남산, 김유신장군묘, 태종무열왕릉, 오릉(五陵), 문무대왕릉, 기림사, 경주읍성, 양동민속마을, 옥산서원(玉山書院), 보문관광단지(普門觀光團地) 등이 있다.
보문단지에는 보문호를 중심으로 주위에 호텔, 골프장 등 각종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앞에서 밝힌바 유네스코에 석굴암과 불국사가 등록되므로 경주는 명실 공히 국제적 관광 특구가 되어있다. 또한 최근(2005~6년)에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 국책사업 확정되어 앞으로의 서라벌 경주는 향후 30년간 4단계에 걸쳐 3조 2천 800억원의 사업비를 도시계획, 문화유산, 도시경영, 관광 등 전 분야에 투입하기로 하였다.
제1단계(200~2009년)로 기반조성 및 착수 도심고분군 공원화, 월성해자, 경주읍성, 남고루 정비, 황룡사복원(신규사업) 제2단계(2010~2014년)로 도시 생동성확보를 위한 인프라 구축을 하고 제3단계(2015~2024년)로 역사문화 도시정체성을 확보하며 제4단계(2025~2034년)로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여 경주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완성할 것을 확정했다.
구체적 사업내용은 황룡사,일정교,월정교,월성해자,읍성복원과 세계역사도시문화관건립, 교촌 한옥마을 조성하고 또한 경주관람홍보를 위해 지난 2005. 4월부터 매주토요일 20:00~21:30에 안압지경내 특설무대에서 안압지 야간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
그리고 흥무공원, 왕경 숲 조성 등 친환경 도시 조성하여 서천해 남천해 북천해 3대 하천을 개발하여 자전거도로, 조깅로, 인라인스케이트도로와 자연생태학습단지 조성, 시민과 관광객들의 휴식을 겸한 운동공간으로 활용하여 웰빙문화를 선도하고, 쾌적한 녹지공간 및 꽃길조성, 사적지 주변 대단위 꽃 단지 조성사업, 흥무공원, 왕경 숲 조성 등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체육인프라를 구축하여 각종 체육대회 유치하고자 천년 잔디구장 8개, 골프장9개, 국민체육센터건립, 축구공원 및 생활체육공원을 조
성하여 각종체육 인프라 구축, 전국단위 체육대회, 동·하계 스포츠 전지훈련을 대거 유치하여 전국제일의 스포츠 도시로 부상시켜가고 있
다.
□테마형 관광상품 개발하여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 및 서라벌 광장 조성사업 추진, 사적지 경관조명 설치사업을 비롯한 안압지 야간
상설공연장 개장,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비롯한 시민, 관광객이 참여하고, 체험하는 문화관광 축제를 개발하여 현재 시행 실천해 가고있
다. 앞으로 우리 경주는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 피웠던 역사의 고장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지붕 없는 노천박물관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
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하여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지, 등 산성지구를 포함하는 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
산으로 등록 되었으며, 시내 안압지를 비롯한 사적지에 야간경관조명을 설치 하여 야간에도 추억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여 고대와
현대, 주간과 야간이 조화를 이루는 위대한 경주의 문화도시의 시대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최근(2005년 11월 2일 )에 경주에 방페장(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유치하게 되었다. 이를 유치하기위해 우리 천주교협
회공동대표 성동성당 허용요셉 신부님을 비롯한 상임공동대표 경주시의회 전 의장 이진구, 동대표 경주상공회의소 회장 황대원, 공동대
표 불국사 회주 이성타, 공동대표 기독교연합회회장 이장희, 공동대표 여성계대표 윤위분 등이 백상승 경주시장님과 이종근 시의회 의장
님 등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한 결과 경주시민을 이해시켜 결국 그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주민투표(2005년 11월 2
일) 결과 98% 이상이 찬성하여 경주에 그를 유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얻어지는 국고지원금 등 천문학적 숫자의 막대한 자금이 경주지역에 유입되게 됨으로 이제 우리 경주는 국제관광도시 경주’라
는 틀을 뛰어넘어 관광과 첨단과학이 조화를 이루는 미래지향적인 국제도시가 될 것이다.
경주(慶州) 문화의 뿌리 <<아리랑>>
제언(題言)
어떠한 문화이든 그 문화는 그 시대의 사람이 누리고 산 흔적이다.
그 흔적들이 오늘날 소중한 사적 자료가 되어 문화의 재산으로 남는다. 이것이 소위 문화재(文化財)이다.
재산(財産)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정신적 재산이요. 또 하나는 물질적 재산이다.
재산의 가치는 그 재산이 어떻게 쓰여 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쓰여 지는 성질의 용도를 유용성이라 하는데 이 재산의 유용성(有用性)의 많고 적음은 곧 인간의 욕구를 만족 시키는 만족의 량의
많고적음이다. 새 가치(價値)란 새로운 값을 창조해 낸 것을 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