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태프트 밀약
[ The Katsura-Taft Agreement ]
요약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시장소목적가입국가
1905년 7월 29일 |
일본 도쿄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적 지위 인정 |
미국·일본 |
목차
- 배경
- 과정 및 내용
- 결과 및 영향
-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성격에 관한 문제
1905년 7월 29일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임시외무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후에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이 됨) 사이에 맺어진 비밀 협약이다. 가쓰라-태프트 협정, 가쓰라-태프트 각서(Taft Katsura Memorandum)라고도 한다.
배경
한반도와 만주를 둔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폭발했다. 많은 국가가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일본이 점차 승기를 잡아갔다. 일본은 머지않아 대한제국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여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의 결과로 맺어진 파리 조약(1898년)으로 필리핀을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아시아에 발을 들인 미국은 필리핀의 안보를 위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을 희망했다. 이에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를 주선하여 거중조정(居中調整)에 나섰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
과정 및 내용
그러던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필리핀을 방문하던 도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기밀 회의를 열어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주요 의제를 논의하였고, 7월 29일에 회의의 주요 내용을 담은 합의 각서를 작성했다. 태프트는 이 합의 각서의 내용을 곧바로 당시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Elihu Root)에게 전보로 알렸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그 내용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태프트는 8월 7일 가쓰라 총리에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하였음을 알렸다. 가쓰라 총리는 다음날 러시아와의 강화협상 전권대표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 있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외상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로써 일본과 미국의 합의 과정이 완료되었다.
이 밀약의 내용은 서명된 문서나 조약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합의를 기록한 각서로만 존재하며, 그 내용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가(外交史家)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서들을 연구하다가 태프트가 엘리후 루트에게 발송한 전보 문서를 발견했다. 이 전보 문서에는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기밀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타일러 데닛은 이를 미국과 일본의 비밀협정으로 보고 《커런트 히스토리(Current History)》 지에 발표하여 논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필리핀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에게 맡긴다.
둘째, 극동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상호 양해를 형성한다.
셋째, 미국은 러일전쟁의 결과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가쓰라 총리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폭넓은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면 다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므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임의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태프트 특사는 사견을 전제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protectorate)으로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동의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정리하자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필리핀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종은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곧 강화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명시된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는 내용에 따라 미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시도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고종의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했는데, 그 배경 중 하나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체결이 있다고 이해된다.
결과 및 영향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일본은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에게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해 러시아에게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대한제국을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시켰으며, 1910년 8월 29일에는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즉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성격에 관한 문제
한편 미국의 역사학자 에스더스(Raymond Arthur Esthus)는 타일러 데닛이 발견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정식 협정 문서가 아니라 대화록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양국의 정식 서명이 없고, 밀약이라고 하기에는 1905년 10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가 일본의 기관지에 실렸으며, 문서의 내용은 미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원하는 바를 대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의 안보를 보장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하였다는 필리핀-한국 교환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주장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기본 입장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참조항목
대한제국, 일본
역참조항목
포츠머스조약, 국권피탈, 을사늑약의 배경, 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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