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부일구(해시계)
앙부일구(해시계)는 조선 초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제작한 최초의 공중시계이다. 광무2년(1898)에 전차궤도를 부설할 때 파묻혔던 양부일구 받침대는 1930년에 발견되어 탑골공원으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세종16년(1434)에 만들어진 최초의 공중시계 앙부일구가 있던 곳
이 터는 조선 초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제작하였던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가 자리 잡고 있던 터이다.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앙부일구는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이 모양은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2가지 종류의 시계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데,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두 가지 중, 큰 것은 17세기 후반, 작은 것은 ‘한양북극고삼십칠도삼십구분십오초’로 새겨 있으므로 18세기 전반에 각각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앙부일구는 조선의 과학기술이 집대성 됐고, 소소한 것 하나에도 백성을 생각해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공중시계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얽힌 이야기
앙부일구의 특별한 외형에 담긴 선조의 지혜
반이 잘려 속이 파인 반구의 모양새를 가진 앙부일구의 모습은 그 당시 조선에서는 새로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6권에 보면 앙부일구의 세세한 모습을 설명해 놓은 기사가 있는데, 조선실록에 나와있는 전문은 이러하다.-처음으로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을 관측하였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이 명(銘)을 짓기를, “모든 시설(施設)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 (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과 오방(午方)이 상대하였다. 구멍이 꺾이는 데 따라서 도니 겨자씨를 점찍은 듯하고, 도수(度數)를 안에 그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요, 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각(刻)과 분(分)이 소소(昭昭)하니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 하였다.
잘못 복원된 공중시계
김슬옹(한겨레, [왜냐면] ‘앙부일구’ 제대로 복원을, 2011.1.22)의 말에 의하면 앙부일구의 복원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앙부일구는 하층민과의 소통을 배려한 공공시계라는 측면에서 한글정신과 맞닿아 있는 세종 시대의 상징물이다. 유감스럽게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 있는 앙부일구는 가장 중요한 시각 표시를 세종 때의 앙부일구와 같이 복원한 것이 아니다.
물론 세종 당대의 앙부일구는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그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하게 남아 있어(1434. 음력 10.2) 복원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세종 때의 앙부일구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배려하여 시각 표시를 동물신 그림으로 나타냈다. 이를테면 새벽 다섯시에서 일곱시까지를 가리키는 ‘묘시’(卯時)는 토끼신으로 나타냈다. 그런데 현대에 복원된 많은 ‘앙부일구’에는 이런 동물신 표시가 없다. 유일하게 한국표준연구소에서 1986년에 복원한 것만이 동물신 그림표시가 되어있다. 이 복원품은 현재 대전의 한국표준연구원 정문 옆에 설치되어 있다. 아쉽게도 이 복원품은 앙부일구의 매우 중요한 받침돌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아 반쪽 복원이 되었다. 세종은 시계뿐만 아니라 받침돌까지도 섬세하게 설계해 1미터 남짓한 받침돌을 두어 키 작은 어린이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낮은 2단 계단형으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1. 한겨레, [왜냐면] ‘앙부일구’ 제대로 복원을, 2011.1.22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60087.html
2. 조선육백년사 http://seoul600.seoul.go.kr/ -문화사적-> 천문관측
3.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 앙부일구 ->세종 66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10월 2일(을사) 4번째 기사
출처:(문화원형백과)
2024-06-12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