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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11.3간 삼각등산동호회의 지리산 산행 이야기.
06.11.1일자 06시 50분 발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해 용산역에 06시 30분까지 도착하라는 삼각등산동호회 산행 지침에 따라 송기오씨는 도봉산역에서 05시 27분차를 타야 하니 자기 집에서 04시30분에는 기상하려고 자기 핸드폰 알람벨을 04시 30분에 맞췄지만 무슨 일인지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잠을 설치는 우를 범했다.잠을 푹 자지 못해서 찜찜한 기분으로 기상해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치고 준비한 배낭을 챙겨 메고 송기오씨가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06시 40분경이었다.
위동환씨 윤순섭씨 이희섭씨 고중경씨 정형기씨 송기오씨 김승남씨해서 모두 7명의 일행이 용산역에서 06시50분발 남원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싣고 출발하자 맨 먼저 위동환씨가 자기 배낭 속에서 누룽지 튀긴 것을 먹으라고 꺼내 일행들에게 돌렸고 다음에는 김승남씨가 귤 사온 것을 먹으라고 돌리기도 했다.
남원역에 도착한 일행은 남원시내 강가에 있는 성춘향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시외버스를 타고 남원시 인월면 소재지에 도착해 약 4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다시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들어가는 버스로 갈아탔다.백무동 들어가는 버스가 남원시 인월면 소재지를 출발해 함양군 산내면 삼거리에 도착하니 길은 다시 벽소령 및 백무동쪽으로 가는 길과 노고단 및 백사골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는데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좌측 길인 벽소령 및 백무동 길 쪽으로 향했다.벽소령 및 백무동 쪽 길로 들어선 버스가 한참을 더 달려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도착하니 길은 다시 우측의 벽소령 길과 좌측의 백무동 길로 갈라졌고 일행이 탄 버스가 좌회전해서 백무동 입구에 도착하니 도로변 우측 풀 숲에 약 1미터 크기의 시커먼 표지석에 “백무동”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띠었다.
11.1일 15시경에 백무동에 도착한 일행은 “지리산 펜션”에 여장을 풀었다.“지리산 펜션”은 2층 양옥집인데 콘도식으로 부엌,화장실,거실 겸 방,다락방으로 구성되고 내부가 아주 깨끗했다.백무동이라는 조용한 계곡에는 초현대식 화려한 펜션들이 즐비해 있지만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띠지 아니하고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16시경부터는 배정 받은 “거실 겸 방”의 베란다에 버너 2개를 설치해 삼겹살을 구어 술잔치와 잡담으로 소일하다가 저녁을 지어 먹은 뒤 백무동 도로변을 따라 산책도 하고 거실에서 tv도 시청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2층 “거실 겸 방”에서 1박을 한 위동환씨 정형기씨 윤순섭씨는 이튿날인 11.2일 새벽 03시 12분 경부터 잠에서 일찍 깨어나 도란 도란 이야기를 하더니 새벽 03시30분경부터는 아예 tv까지 켜놓고 시청했다.
2층 다락방에서 1박을 했던 김승남씨 고중경씨 송기오씨는 아래층 “거실 겸 방”에서 들려오는 tv소리와 도란 거리는 말 소리가 공명효과를 일으켜 어찌나 크게 들리는 지 이들은 좀더 자고 싶었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tv 볼륨 좀 낮추라고 얘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불편해 하다가 04시 30분이 되자 아예 잠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일행이 05시부터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커피까지 한 잔씩 마시고 나니 시간은 05시 30분이었다.06시에 출발 예령이 떨어졌다.이미 배부된 산행 도면에는 우리 일행의 산행코스가 백무동-하동바위-참샘-장터목 대피소-제석봉-천왕봉-중산리 순으로 기록돼 있지만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이런 코스명이 전혀 감이 잡히질 아니했다.
11.2일 05시 50분경에 일행이 배낭을 챙겨 메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빛났고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은 보이질 않해 각자가 가져온 후래시를 꺼내 들고 산행을 시작했다.일행이 백무동 매표소 앞에 도착했으나 매표소 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어 일행은 매표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일행은 각자 가져온 후래시를 비추고 사뿐 사뿐 등산로 돌길을 걸어 올라갔다.맨 앞에는 김승남씨 윤순섭씨가 걸었고 맨 뒤에는 이희섭씨가 걸었다.11.2일 06:10분쯤에 하동바위를 통과했다.하동바위를 통과할 때는 후래시를 껏어도 물체와 길을 식별할 수 있었다.하동바위 앞에는 “올라가면 천왕봉과 장터목대피소 및 참샘으로 가는 길이고 ,내려가면 백무동이며,이곳은 하동바위로서,해발 900미터입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어서 일행들은 그곳이 하동바위인 줄 알았다.이것을 본 송기오씨는 “해발 900미터를 통과했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하동바위는 약10미터 정도의 암갈색 암벽이 절벽처럼 90도 각도로 우뚝 서 있는 바위였고 이 바위앞에는 철제 출렁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다리를 통과하자 좌우측으로 출렁거리면서 통과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공포심을 주기도 했다.
하동바위를 지나자 눈앞에 능선이 엎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앞서 걷던 정형기씨가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했으면 “가도 가도 끝이 없네”라고 말하자 뒤따르던 위동환씨가 “허허 여기가 관악산이나 북한산인 줄 알아,지리산이야 ”라고 응수하기도 했다.해발 약 1100미터 지점에서 일행은 두 번째 휴식을 취했는데 그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들은 낙엽이 모두 떨어진 채 앙상한 가지들 뿐이었다.
11.2일 아침 07시 30분쯤에 일행은 해발 1125미터 지점의“참샘”이란 곳에 도착했다.잘 닦아진 등산로 옆에는 “올라가면 천왕봉과 장터목대피소이고, 내려가면 백무동이며, 이 지점은 해발 1125미터의 참샘입니다.”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우리 일행들에게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참샘은 지리산 중턱에 있는 우물이었다.널다란 공터가 있고 이 공터의 서쪽에는 약 1미터 높이의 축대를 쌓았는데 그 축대 중앙에 설치된 고무 파이프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렸다.이 물이 참샘이었다.일행은 이 참샘에서 세 번째 휴식을 취하면서 참샘물로 목을 축인 뒤 배낭속 물통에 든 물을 모두 비워버리고 그 대신에 참샘물을 가득 받아 채우고 산행을 계속했다.
11.2일 아침 07시50분 경에 일행은 해발 약 1300미터 지점의 능선상에 올라서서 네 번째 휴식을 취했다.이렇게 일행들이 쉬고 있는 순간에 이 능선 북쪽 고사목에 달라 붙은 무슨 새 한 마리가 고사목을 쪼아대는 데 그 쪼아대는 소리가 똑똑 똑똑 하고 요란하게 들리자 일행중 송기오씨가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을 불러댔다.“남산에 딱딱구리는 통나무도 뚫는데 우리집 저 멍텅구리는 뚫린 구명도 못찼네,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읊어대자 좌중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고 위동환씨는 자기 배낭속에서 쪼코리트를 꺼내 1인당 대여섯개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일행이 “올라가면 장터목대피소 내려가면 백무동이며 ,여기는 해발 1312미터의 소지봉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 일대에 도착하자 이 일대는 온통 키가 약 1미터 내외의 산죽 나무 군락지가 전개되었다.이 산죽 나무 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걸으니 온 몸에서 힘이 솟구치는 듯한 상쾌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1.2일 08시 20분 경에 일행은 “올라가면 천왕봉과 장터목대피소이고, 내려가면 백무동이며,이곳은 해발 1460미터 지점의 망바위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 일대에서 다섯 번째 휴식을 취했다.약 4-5미터 정도의 갈색 절벽 바위를 왜 망바위라고 부르는지 그 내역이라도 기록되어 있으면 좀더 정감이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08시45분경에 일행은 해발 약 1480미터 지점에서 여섯 번재 휴식을,09시경에는 해발 약 1500미터 지점에서 일곱 번째 휴식을 취하면서 지리산 일대에 가득히 쏟아지는 햇빛을 배경삼아 단체 사진을 한판 찍었다.
11.2일 09시 25분경에 드디어 일행은 그 유명한 해발 1653미터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장터목대피소는 네갈래 길이 갈라지는 길목이었다.백무동 쪽 길을 기준으로 해서“백무동 쪽에서 직진하면 중산리와 음수대 가는 길이고,우측으로 가면 세석대피소 가는 길이고,좌측으로가면 천왕봉 가는 길이며 ,이곳은 해발 1653미터의 장터목대피소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이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장터목대피소는 규모가 상당히 큰 2층 양옥집이었다.우리 일행은 장터목대피소 내부에 들어갈 일이 없어서 내부 구경은 못했지만 이 대피소 남쪽으로는 상당히 널다란 마당이 있었다.이 마당에서는 족구 정도는 할 정도로 넓었다.초가을인데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서 그런지 날씨는 상당히 쌀쌀했다.손가락이 얼어서 손으로 메모하기도 힘들었다.일행은 이 대피소 건물 동쪽 벽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도 찍고 여넓 번째 휴식을 취한 뒤 좌측 길로 들어서서 천왕봉쪽으로 향했다.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험악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 가는 길에 반드시 경유하게 되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제석봉이었다.이 제석봉 일대는 마른 풀 사이 사이에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죽은 주목 고사목 줄기가 여기저기에 꼭 뼈다귀처럼 서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십년생 미만의 살아 있는 주목 나무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띠었다.황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등산로 옆에 서 있는 안내 표지판 설명에 의하면 이곳 제석봉 일대는 30년전까지만 해도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였는데 도벌꾼들이 도벌한 뒤 그 흔적을 없애고자 불을 질러 태워버렸는데 지금은 이 일대에 식목을 해도 식재한 나무가 죽어버려서 이렇게 종래의 자연이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제석봉 정상 바로 밑에 있는 등산로상에는 “직진하면 천왕봉 가는 길이고 ,남쪽으로 가면 장터목대피소이며,이곳은 해발 1808미터의 제석봉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일행은 이곳에서 아홉 번째 휴식을 취했고 시간은 09시 50분경이 되었다.
눈앞에 건너다 보이는 천왕봉을 향해서 일행은 산행을 계속했다.등산로는 굉장히 험악했다.돌밭길과 철재 사다리 등을 조심 조심해서 걸었다.오전 10시 15분경에 일행은 천왕봉 직전에서 열 번째 휴식을 취했다.날씨는 굉장히 쌀쌀하고 추었다.인천에서 혼자 산행을 왔다는 통이 큰 20대 아가씨가 소지봉 일대에서부터 우리 일행과 동행을 했는데 이 아가씨는 이곳에서 자기 배낭속에서 삶은 계란을 꺼내서 일행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열 번째 휴식을 끝낸 일행은 또 계속해서 천왕봉을 향해서 걸었다.천왕봉을 목전에 둔 등산로변의 바위돌에는 “通天門 ,柳永郁 ”이라고 새겨진 글자 있었다.유영욱이라는 개인이 지리산 천왕봉은 하늘로 통하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새겨둔 것 같았다.다른 글자들도 새겨져 있었지만 글자가 작고 마모되어 육안으로는 해독할 수가 없었다.이런 곳에도 국립공원관리당국자의 이름으로 자세한 설명판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아쉬워하는 일행도 있었다.
일행이 천왕봉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50분 경이었다.그리고 천왕봉 정상에서 열 한 번째 휴식을 취했다.천왕봉 정상은 온통 바위돌 투성이었고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가로 세로가 약 5미터에 10미터 폭은 될성 싶은 공간이었다.이 바위돌 투성이의 정상 부분 중앙에는 높이 약 1미터 폭이 약 0.5미터 정도 되는 돌에 “智異山 天王峰 ,1915 미터”라고 검은 글씨가 각인된 비석이 동쪽을 향해서 서 있고 그 뒷면에는 “韓國人의 氣像,여기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바위돌 투성이의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3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는 상당히 넓은 마당 같은 공간이 있었고 같은 방향의 약 20미터 지점에는 조그만 바위돌을 다닥다닥 붙여서 만든 헬기장 같은 공간도 있었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일대 마을과 교량 및 집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정남쪽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희미한 고산 준령뿐이었다.서남쪽으로는 고래등처럼 펼처진 능선과 봉우리들 뿐이었는데 이 방향이 바로 노고단과 반야봉 방향이라고 다른 등산객이 설명해 주기도 했다.북쪽으로는 단풍이 상당히 곱게 들어 있는 능선과 골짜기가 이어졌고 그 끝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관내의 어떤 마을들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동쪽으로는 산청군 대원사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침엽수들로 덮혀 있었다.일행중 송기오씨는 말로만 듣던 지리산 천왕봉이 이것이구나 하는 허탈감도 가지면서 좀더 자세히 꼼꼼하게 안내판과 비교해 가면서 동서남북의 산야를 조망하고 싶었지만 벌써 같이 온 대부분의 일행은 중산리쪽으로 하산을 시작하고 있으니 정상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형편을 한없이 아쉬워하면서 천왕봉을 떠났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산리 쪽으로 약 500미터쯤 내려오니 “올라가면 천왕봉이고 내려가면 중산리와 법계사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과 “이곳은 남강 발원지인 천왕샘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이 있었다.그런데 천왕샘은 샘물이라기에는 너무나 적은 양의 물이 바위틈에서 흘러내렸다.그야말로 병아리 눈물만큼씩 흘러 내려 조그만 웅덩이에 고여 있었다.그래도 일행은 옆에 놓인 바가지로 떠서 한 모금씩 마셨다.그런데 여기서부터 정형기씨는 다리를 약간 삐끗했다면서 걸음을 잘못 걸었다.따라서 일행들의 하산 속도는 상당히 지체되기도 했다.
일행들은 아직 점심식사 전이라서 상당한 시장끼를 느끼자 중산리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의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가져온 간식인 모카빵과 백설기 떡으로 요기를 하면서 매실주 술도 한 잔씩 나눠 마셨다.그리고 출발전에 1인당 7만원씩 갹출한 경비가 약간 부족할 것 같아서 1인당 2만원씩을 추가로 갹출하기도 했다.
중산리쪽 하산길에서 약 12시경에 일행이 해발 약 1700미터 지점에 도착하니 “올라가면 천왕봉으로 가고 내려가면 중산리와 법계사로 가며, 여기는 해발 1700미터의 개선문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이 있었다.양쪽으로 절벽 같은 바위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개선문”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였다.
개선문을 통과한 일행이 조금 더 하산을 해서 쉬고 있다가 50대의 어떤 등산객을 만났는데 이 분이 현 시국에 대한 우스개소리 하나를 소개했다. “노씹개나 애개개”라는 말이 무슨 뜻인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노씹개나”는“xxx 이 씹새끼 개새끼 나쁜 놈”이라는 말의 첫 글자들이고,“애개개”는“애새끼들이 개같은 놈을 xxx 으로 뽑아 개판이 된 나라”라는 말의 첫 글자들이라고 해석을 해서 좌중은 실소를 금치 못하기도 했다.
일행이 중산리쪽 하산길에서 13시 경에 도착한 곳은 법계사와 문창천 및 로타리대피소 경내였다.법계사와 문창천 및 로타리대피소는 모두가 같은 영내에 위치하고 있었다.법계사는 지리산 중산리쪽에 있는 사찰이고 文昌泉은 이곳에 있는 우물이며 로타리대피소는 이곳에 있는 산장이었는데 어떤 안내 팜프렛트에는 법계사와 문창천 및 로타리대피소가 별개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잘못 표기된 곳도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같은 영내에 위치하고 있었다.법계사 경내에서 불공드리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문창천과 로타리대피소 일대에 요란하게 울려퍼졌다.문창천 샘물에서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파이프를 타고 졸졸 흘려 내렸고 샘물 정면 벽면에는 “洗心”이란 낱말이 각인되어 있는 바 이곳을 지나는 길손은 이 물을 마시어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리고 가시오라는 뜻으로 해석되니 상당히 의미 깊은 샘물이 아닌가 싶었다.일행은 로타리대피소 앞에 있는 탁자에 앉아 서울에서 싸온 깁밥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로타리대피소 탁자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은 14시 10분경에 중산리쪽 망바위에 도착하니 이곳에는 “올라가면 천왕봉과 법계사가 있고, 내려가면 중산리가 있으며,이곳은 해발 1068미터 지점의 망바위라는 곳입니다”라는 안내표지판이 있었다.이상한 것은 백무동에서 장터목대피소 가는 길목에도 “망바위”라는 명칭의 바위가 있는데, 천왕봉에서 중산리 쪽으로 가는 길목에도 똑같은 명칭의 “망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점이었다.중산리쪽 망바위와 백무동쪽 망바위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서로 다른 형태의 바위지만 그 명칭이 똑같았다.따라서 등산객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곳 지리산에는 2개의 망바위가 있다는 설명판이라도 붙어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일행도 있었다.그리고 백무동쪽에서 올라오는 길목에서와 같이 중산리쪽 하산길의 해발 1000미터 이하 능선상에도 온통 산죽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지리산은 산죽나무 군락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일행들이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16시경이었다. 중산리 버스정류소에서 진주행 버스를 타고 진주로 와서 진주시내 남강변에 있는 풀입궁전이라는 여관에 일행은 여장을 풀고 인근 목욕탕에서 목욕 사우나를 즐긴 뒤 남강변의 은성장어집에서 맥주로 입가심을 한 뒤 장어구이에 소주와 쓸개주로 저녁식사를 즐기면서 피로를 풀었다.민물장어구이를 7인이 5인분을 시켜서 들깨잎과 상치위에 무 생강 마늘 고추 된장 잘 구워진 장어토막을 놓고 움켜싸서 한 입에 털어 넣으니 그 맛이 감칠맛이 있었다.민물장어를 더 시켜 먹기에는 그 값이 너무 비싸 이번에는 바다장어 2인분을 일행은 더 시켜 먹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남강변과 진주교 및 촉석루 야경의 황홀함을 감상하면서 산책를 하기도 했다.밤에 보는 남강의 진주교는 교각 아래서 올려 비추는 조명 불빛을 받아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며 강건너 고수부지에서는 꾕과리 연습 소리가 요란했고 촉석루 입구의 매표소 건물도 야간 조명 불빛을 받아 장관을 이루었다.촉석루 뚝에 서서 남강 아래를 내려다보니 의암이라는 가로 세로 약 5미터 크기의 널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임진왜란 때 논개가 촉석루 망루 잔치상에서 왜장을 유인해 의암까지 데리고 내려가 껴안고 강으로 뛰어내렸기에 그 바위를 오늘날 의암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지금까지 촉석루라는 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내린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고 의암까지 데리고 내려가 뛰어 내렸다고 하니 논개의 왜장에 대한 적의가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강한 적개심으로 불탔던 것을 알게 되니 논개의 애국심이 더욱 돋보이기도 했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때인 1241년에 진주 목사 김지대가 창건후 7차례의 중건 보수를 했으며 예부터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량 영남루가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칭송받으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고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같이 전시에는 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했다.
진주에서 하루밤을 묵은 일행은 이튿날인 11.3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진주성내 산책로를 따라 여기 저기 잘 정비된 진주성 유적지를 둘러본 뒤 섬진강이란 식당에서 숙취해소에는 재첩국이 제일이라는 풍문 대로 재첩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재첩국이란 조그만 조개로 끓인 국인데 이곳에서 먹는 재첩국은 싱싱한 맛이 떨어진다는 게 일행들의 평가였다.그렇지만 김치 채지 마늘 달걀 후라이 가자미 생선구이 콩나물무침 콩자반 시금치 반찬으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이어서 후식으로 커피에 사탕까지 잘 얻어 먹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일행은 여장을 챙겨서 서서히 진주역을 향해서 도보로 이동했다.남강의 진주교 서쪽 끝에서 남강변 일대를 바라보니 남강과 촉석루 및 진주성이 함께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어 보였다.진주역에 도착해보니 생각과는 달리 진주역사는 조용하고 한적한 단층짜리 시골역사 모습 그대로였다.일행은 11.3일 11시 48분발 서울행 무궁화열차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상경길 열차 속에서 먹을 점심을 진주에서 김밥으로 사 갈 것이냐 아니면 열차속에서 도시락을 사서 먹을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김밥은 제작과정을 신뢰할 수 없어 식중독 사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일행은 열차가 동대구역 쯤 가면 열차내에서 파는 도시락이 준비되니 그것을 사서 먹기로 했다.열차가 동대구역에 오니 열차 승무원은 또 말을 바꾸어 도시락은 대전역에 가야 준비할 수 있다고 해서 점심을 건너 뛰었다가 열차가 대전역을 지난 후인 오후 16시가 넘어서야 배달된 도시락으로 일행은 늦은 점심을 때우는 우를 범하기도 하면서 2박3일간의 지리산 산행을 무사히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