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장(印章)이란 ■
출처 - http://artsquare.c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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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옥, 나무 등의 각종 재료에 글씨, 그림, 문양을 새긴후 인주 등을 발라 찍어서 개인이나 단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흔히 도장이나 인감(印 鑑)이라고도 하지만 인(印), 장(章), 도서(圖書), 도장(圖章) 등 명칭에 따라 쪼금씩 차이가 있다. 인장의 역사는 오래 되었는데 우리나라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에서 환인이 그의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하도록 한다는 표시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준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인장은 새기는데 격식과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품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의 주목과 관심을 끌며 감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구리로만든인장 (조선말기) |
▶인장의 재료
인장에 쓰이는 재료는 결이 고운 회양목, 배나무, 침향목이나 금, 은, 동, 철 등은 물론 옥, 마노, 수정, 비취등과 같이 거의 모든 재료가 가능하다. 주로 재질이 견고한 것들로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는 것은 도장의 윗부분인 인뉴(印紐)에 여러 형상들을 조각할 때나 글씨를 새겨넣을 때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고 정교하게 새기기 위해서이다.
▶인장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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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의 바닥에 해당하는 면에는 각종 글씨나 표식들을 새기는데 이를 문(文)이라고 한다. 인장에 새기는 글자는 백문(白文-음각)이나 주문(朱文-양각)으로 나뉜다.
백문은 붉은 바탕위에 서화가의 이름이 하얗게 찍히도록 인문을 음각한 것이며, 주문은 호(號)나 자(字)등이 붉게 찍히도록 양각으로 새긴 것이다. |
▲주문(朱文-양각) |
▲백문(白文-음각) |
▶인장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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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은 사용하는 사람이나 사용 용도에 따라서 여러 종류로 나뉜다. 국가나 왕실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국새(國璽)나 어보(御寶), 관청이나 국가 기관 등을 표시하였던 관인(官印)을 비롯하여 개개인의 표시를 새겼던 성명인(姓名印)이 있다. |
▲대한민국 국세 (國璽) |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편지나 문서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쓰던 봉인(封印), 봉니(封泥)가 있고, 낙관용으로 호(號)나 자(字)를 사용한 아인(雅印), 자인(字印)이 있다. 그 밖에도 수장가들이나 감식가들이 서화를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장을 찍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감정한 사람은 감정인(鑑定印)을, 소장하고 있을때는 소장가인 혹은 장서인(藏書印)을 새겨서 표시하였다. 또 유명한 글귀나 시구를 새겨서 서화의 빈 공간에 날인하는 한문인(閑文印)등도 많이 사용되었다.
■ 조형예술로써의 전각(篆刻) ■
정병례 - 인천가톨릭대학교 전통종교미술학과 교수
일찍이 동양예술은 詩 書 畵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인간이 지구에서 생활하며 기록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 알타미라 지방의 라스코 동굴벽화나 또는 아래 그림 1 에 나타낸 우리나라의 저 울진 반구대의 암각화에서 보듯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또는 대상의 실체를 관념적으로 그리거나 또는 도구를 사용하여 돌을 쪼아서 표현해 놓은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에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에서는 시 서 화와 더불어 각(刻)의 분야가 깊이 연구되어 왔으며, 일본의 경우도 많은 진전을 보여 오늘날에도 하나의 전통예술 장르로 굳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畵나 書, 拓本 등의 공간에 印이 찍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동양의 독특한 관습으로 작가의 落成款識 즉, 감상이나 수장이나, 탁본을 했을 때의 표시로서의 인이지만, 이는 인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인정하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또, 印이 서나 화의 아름다움 속에 존재하여 한층 더 효과를 돋보이게 하는 까닭은 인이 예술의 한 분야로써 이들과 훌륭히 조화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인은 단독으로도 감상되지만 주로 다른 예술작품의 공간에 존재해서 한층 공간의 미를 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것 같지만 때로는 주객이 바뀐 느낌을 줄 때도 있어 결코 小技라고 함부로 얕볼 수는 없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전각이란 소기로서 머물고 있는게 아니며, 보기엔 단순한 것 같지만 한 없이 깊은 것이다. 작가의 미의식이나 感興, 情意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빛나는 것, 그것이 또한 전각인 것이다. 愛印趣味라든가, 金石趣味는 작가의 예술적 저력이 되어 깊이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중국의 金冬心이나 吳昌碩같은 이는 篆刻家라기보다 오히 려 시인 화가로서 더 유명하지만, 이것은 전각의 깊이를 아는 사람의 폭넓음이 한층 詩, 書, 畵 등을 깊이 있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작가들 은 하나같이 전각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며, 훌륭한 예술가가 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 전각을 단순한 技術的 藝術로서만 얕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석기 후기 및 청동기에 걸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오늘날 전각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독특한 암각화 문화가 번창 발전하였으며, 그 맥을 오늘날의 전각예술에서 엿볼 수 있겠으나 전통예술의 한 장르로의 역할은 커녕 서예의 한 분야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바다 깊숙히 잠긴 빙산과 같이 숨겨진 부분이 많은, 퍼내고 퍼내도 다할 줄 모르는, 그야말로 동양의 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篆刻藝術의 世界를 여기서는 단순한 평면예술만이 아닌 조형예술로써의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예술로써 篆刻의 일반적 내용과 더불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 전각의 정의 및 역사 ■
■ 전각의 정의
전각은 돌, 나무, 옥, 금속 등의 작은 공간면에 글자를 조형적으로 배열하여 칼을 대어 새기는 것으로 印이라는 한정된 세계에 사람의 정성을 조각하는 동양예술의 극치이자 독자적 장르인 순수예술을 말한다. 이러한 전각은 서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금석학에 대한 지식을 기본으로 하는데 대부분이 한자 서체 중의 하나인 전서를 주로 새긴다. 이는 전서가 조형성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전서(篆書)를 새긴다(刻)는 뜻으로 전각이라고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은 문자의 대상을 한정하지는 않는 즉, 동서고금의 각종 서체는 물론 다양한 문양 및 인간의 폭넓은 감성을 새겨 나타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전각의 역사
⊙인의 역사
전각의 역사는 먼저 인(도장)의 역사와 같이 할 수 있는데 인장의 사용은 아주 오래전인 신석기시대의 질그릇에 문양을 찍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문양의 성격이 강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기준으로 한다면 일반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오천년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되어 고대 오리엔트, 유럽 및 아시아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문명의 발상지를 기준으로 한 각처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여기서는 간단히 우리보다는 앞선 중국과 우리나라의 인장의 역사를 빌어 전각의 역사를 살펴보자.
① 중국
春秋 戰國 중국에서 인의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미 전국시대 초기에 많은 예가 보여 다량의 고새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全國期는 제후의 治亂興亡과 상공업의 급속한 발달의 시대로 화폐 및 인장은 유통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주례에 이르기를 『화회(畵繪)에는 인장을 사용한다』라고 하였으며, 『인은 집정하는 바의 믿음이다』라고 되어있다. 즉 인은 자신의 신용을 나타내며, 권리와 의무를 나타내는 소유표장으로써 오늘날까지 사용되어 왔다.
秦漢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 조직이 완성되어 모든 제도가 개혁됨에 따라 관인의 제도가 제정되었다. 황제가 사용한 인을 「새(璽)」, 신하가 사용한 것은「印」이라 칭하고 「璽」만이 玉이나 金으로 만들었다. 印은 진이전에는 관인 사인을 불문하고 「 」또는 「 」로 쓰였는데 후에는 璽로 바뀌어 전국기 6국의 古文印을 古 라고 부르고 전진 즉 진 제국의 것은 秦印과 구별하고 있다.
한대에는 관직제도가 더욱 정돈되어 官爵의 높낮이에 따라 材質, 式, 綬色 등을 구별하여 신분제도를 명확히 하였으며 제작은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어 문서는 오로지 木簡이나 竹簡에 쓰고, 簡牘을 말아 만든 손잡이 부분의 위에 점토를 입혀 검인(鈐印)하고 개봉을 금하기 위한 封檢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봉니(封泥)라고 한다. 한인(漢印)이 거의 백문(白文, 음각)인 것은 점토에 찍으면 거꾸로 문자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봉니는 전후한대가 최고의 전성기로 삼국시대 무렵까지 사용되어 후한에 발명한 종이의 보급에 의하여 남북조시대부터 종이에 주문인(朱文印, 양각)으로 변한 것이다.
西晋무렵은 아직 한인의 풍경이 남아있지만 東晋남북조대립과 각국의 흥망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관인의 권위의 붕괴, 그 제작도 고정화 치졸화하여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대에 성행한 사인은 관인이상으로 정교다채한 미를 전개했지만 봉니의 소멸과 함께 사인의 용도도 종식하여 일시적인 공백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隋 唐 수대에 들어서면 관직인이 폐지되고 관서인만이 남게된다. 당대에는 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커다란 주문인으로 수 당 특유의 인이 출현하였다.
宋 송의 관인은 唐印을 모방하여 당대에 싹트기 시작한 九疊篆이 宋代에 완성되었 다. 金代에 들어서면 대인이 되고 元 明 靑의 후대까지 계승된다. 宋 元期에는 민간잡용의 私印, 花押印이 발생하였으며, 원대에는 몽고문자 특유의 특이한 체가 나타났고, 명대(明代)에는 이로부터 변형된 합동인사인이 나오게 되었다. 당대에 발생한 收藏印, 堂 印 등의 사용은 서화와 함께 감상의 대상물이 되었으며, 더욱이 元代에 들어서부 터는 靑田石이 발견되어 문인이 스스로 인을 새기게 되었다. 또 明代에는 壽山石이 채굴되는 등 전각이 예술로써 발전해 가는 단서가 되었다. 명말 청초에 일어난 고증 학은 금석취미의 흥미를 고취시켰으며, 전각도 고전복귀의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명 인들이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淸代의 금석학, 문자학의 발전에 의하여 고인이외의 전서작품의 새로운 취미가 전개되어 전각의 예술적 내용은 더욱 충실해지게 되었다.
② 우리나라
우리나라 전각의 역사는 일찍이 고대 신시개천(神市開天) 시대인 환웅(桓雄)의 천부인(天符印) 삼방설(三方設)에서 비롯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만 육천년 전의 일이므로, 중국의 은 주(殷 周)시대와 비교하여 보더라도 만 삼천년을 거슬러 오르는 시대였다. 이와같이 우리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인장을 사용했던 국가임은 물론 당당한 문화민족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전각예술은 우리의 것이 거꾸로 고대 중국으로 유출되어 그 곳에서 제도화하였고 중국의 역사와 함께 발전되면서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전각예술이 전해지는 기록이나 실체가 전혀 없어 하나의 설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우리 땅에서 삶을 영위하던 신석기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진 저 울주 반구대의 암각화만이 일부 그 실체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각이 오늘날의 인장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예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전각역사는 현재로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온 인장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인장 역시 그 용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치민(治民)의 長이 전신(傳信)의 표시로써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 사용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실물이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는 너무나 빈약하여 고대 인장사의 어떤 체계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이다.
고려시대만 하여도 국새 종류는 현존하는 것이 전혀 없고 여러 종류의 청동인들 만이 남아있다. 그 청동인들 조차도 문자미상이 대부분이며, 인의 종류에 따르는 용도나 사용방법, 그리고 사용자의 신분에 의하여 구분되었을 인의 제도나 형식, 또는 심지어 주조방법까지 자세히 알 길이라고는 현재 남아있는 자료만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유물과 기록등 자료가 빈약하나 임란 이후의 것은 논거를 통한 정리가 가능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8 세기를 지나 19세기로 접어들면서는 한국예단에 일대 변혁을 전개시킨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선생과 그의 문도(門徒) 소산 오규일(小山 吳圭一)에 의하여 전각이 상 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1832∼1914), 해관 유한익(海觀 劉漢翼,1844∼1923), 청운 강진희(菁雲 姜璡熙,1851∼1919),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 昌,1864∼1953), 성제 김태석(惺齊 金台錫,1875∼1952) 등의 손을 거치면서 빛을 발하 게 되었다. 특히 오세창과 함께 그 당시 쌍벽을 이루던 김태석의 경우는 중국의 총통 으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38세에 중국의 國務院 비서직에 있게 되면서 玉璽를 비 롯한 수 많은 인각으로 15년 이란 세월을 체류하며 많은 업적을 남기었고, 귀국 후에 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석불 정기호(石佛 鄭基浩), 석봉 고 봉주(石峰 高鳳柱),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회정 정문경( 亭 鄭文卿), 청사 안광석 (晴斯 安光碩)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것이다.
■ 전각의 기법
⊙전각의 기법
전각에는 오래 전부터 중요시 여기고 있는 자법, 장법, 도법의 3법이 있다.
1) 자법(字法) 전각은 篆書 특유의 字例와 독특한 構成, 오묘한 筆致 등 篆書의 서법에 익숙해져 있지 못하면 충실한 인을 새길 수 없다. 전서는 옛 서체이기 때문에 문자의 선택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誤字를 사용하거나 甲骨文과 印篆과 같은 서로 다른 시대의 문자를 혼용하거나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전각은 한자 전반의 광범위한 지식도 필요하므로 정확한 문 자를 여러 권의 篆刻字典, 篆刻字林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장법(章法) 장법이란 인면(印面)에 포자(布字, 글자를 배열함)할 때의 문자 구성 방법을 말한다. 문자의 대소, 소밀의 균형을 꾀하고 각 글자가 서로 호응하여 맥락을 갖는 아름다운 꼴을 갖도록 구성한다. 고전으로써 중요시 여기는 周秦이래의 璽印, 明淸 대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구하여 안목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장법에서 고려하는 몇가지 요소들을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 임고(臨古) : 옛 선인들의 작품 중 좋은 것을 가려서 모각하여 선인들의 작품으로부터 기법 등을 배우는 것이다.
ⓑ 소밀(疏密) : 필획의 굵고 가는 특징 및 획의 다소와 문자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전체적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 경중(輕重) : 문자의 필획을 굵게 하여 무겁게 하거나 가늘게 하여 가볍게 하는 등의 전체적 균형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증손(增損) : 필획이 많은 경우에는 줄여서 간단히 하고 적을 때는 늘여서 복잡하게 하여 공간의 구성을 꾀하지만 이를 너무 무리하게 이용하여 뜻이 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 굴신(屈伸) : 문자의 형태를 변형시켜 활용하는 것으로 필획을 굽히거나 또는 그 모양을 폄으로써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구부리면 안되는 경우나 또는 펴서는 안되는 문자의 획을 무리하게 하면 문자로서의 의미를 이루지 못한 것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나양( 讓) : 문자가 놓여지는 장소를 좌우 또는 상하로 이동시키거나 그 형태를 늘이거나 줄여서 위치를 이동하여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 승응(承應) : 문자의 배치 또는 문자자체 형태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간을 균형적으로 호응시켜 전체적인 강약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문자 서로가 대각 또는 거울 대칭을 이루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 교졸(巧拙) : 교묘하지만 너무 섬세하지 않게 소박하지만 너무 평범하지 않게 변화를 주면서 전체적 구성을 꾀함을 의미한다.
ⓘ 의기(宜忌) :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과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을 가려서 적용한다. 즉, 필획이 많은 경우는 정연하고 느긋한 형으로 만들도록 적극적으로 행하며, 변화가 많은 형태의 문자를 섬세하게 하려고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 변화(變化) : 동일한 꼴의 문자가 중복되어 사용되는 경우에는 어떠한 변화를 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문자의 연속상태와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충분히 생각하며, 자획의 경중 및 공간을 크게 또는 작게 하는 등 세밀한 검토를 해야한다.
ⓚ 반착(盤錯) : 문자꼴은 대부분 세로로 길고 필획이 많은데 이를 네모진 인에 넣고자 할 때 문자의 일부를 굽히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 변화시키는 것이다.
ⓛ 이합(離合) : 필획의 집중과 분산을 적절히 활용하여 전체적인 구성을 하는 것으로 필획이 많아 문자 꼴이 옹색하게 된 경우는 필획을 분산시켜 여유있게 하고, 반대로 필획이 적어 문자의 형태가 흩어져 있으면 필획을 집중 통합시켜야 하는데, 이러한 집중과 분산도 무리하게 꾀하면 전체적 흐름을 해칠 수 있다.
ⓜ 계획(界 ) : 네글자로 구성된 인의 경우에는 문자들 간에 열십자(+)등의 경계선이나 가로 또는 세로의 경계선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는 것을 말한다.
ⓝ 변연(邊緣) : 테두리를 적절히 설정하여 전체의 구성에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두 곳은 좁게 그리고 두 곳은 넓게 하거나, 세 곳을 좁게 하고 한 곳을 넓게 하는 등의 방법을 적절히 이용하여 구성한다.
3) 도법(刀法) 도법이란 운도(運刀, 칼을 운용함)의 기법이다. 「세심낙묵 대담주도(細心落墨 大膽奏刀)」라는 옛 선인들의 말처럼 포자는 주의를 기울여 섬세하게 하고 칼로 새길 때는 대담성이 필요한 것이다. 옛부터 '도법은 전하기 어렵다'고 한다. 활기차고 힘있는 선을 새기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전각의 미는 도법에 의하여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옛 선인들의 새김 방식 및 明 淸의 명인(名人)의 각인(刻印)을 참고삼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① 入刀法: 쌍입도법은 한 획의 양면에 각도를 넣는 방법이다. 미리 돌위에 씌여진 문자를 충실히 새겨나간다. 이는 문팽(文彭)이래 옛부터 행해진 기법으로 단입도법이 유행하고는 대체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② 單入刀法: 획의 한 쪽 면에 각도를 넣어 한 획을 만드는 법이다. 칼이 지나지 않는 다른 한 면은 자연의 허물어짐에 맡겨지기 때문에 많은 경우 문자를 쓰지 않고 刀意에 따라 새겨나간다. 명나라 때의 하설어(何雪漁)로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때의 정경신(丁敬身)에 이르러 기법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印)의 작성법
1) 인고(印稿)의 작성 인고는 새기려고 하는 인이 완성된 상태를 가정하여 종이에 원고를 만든다. 먹과 주묵을 사용하여 원하는 상태가 되기까지 수정을 가하며 작성한다. 인고용 종이는 빳빳한 엽서정도 크기의 종이가 적당하다. 인고의 작성순서는 먼저 종이에 먹을 칠하여 검게한다. 먹이 마르면 인재를 종이에 대고 연필로 인의 크기를 정확하게 옮긴다. 음각의 경우는 주묵을 사용하여 붓으로 문자를 쓴다. 그리고 수정은 먹과 주묵을 번갈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완성해 나간다. 반대로 양각의 경우는 종이를 주묵을 사용하여 붉게 칠한 후 먹을 사용하여 문자를 쓴다. 여기서 실제 인면에 포자할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고를 작성할 경우 처음부터 문자를 면에 가득 써넣으면 수정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답답한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인면의 안쪽으로 수 밀리 정도의 여백을 두어야 할 것이며, 그 여백의 정도는 인재의 크기 또는 원하는 정도에 맞게 조정한다.
2) 인면(印面)의 손질 시판하고 있는 인재는 표면에 두터운 왁스를 입혀 놓았거나, 면이 거칠게 절단되어 있기 때문에 사포를 이용하여 인면을 손질한다. 이 경우 사포는 평탄한 유리판 위에 놓고 사용한다. 손질할 경우는 네면을 골고루 번갈아 쥐면서 손질하여 인면을 평평하게 한다. 사포는 처음에는 거친 면을 사용한 후 최종적으로는 고운 면을 이용한다.
3) 포자(布字) 음각을 새기려고 하는 경우는 인면에 주묵을 이용하여 골고루 짙게 칠하고 마르면 인고를 기준으로 하여 거울대칭의 글자(거꾸로)를 먹을 이용하여 쓴다. 반대로 양각의 경우는 인면을 먹으로 글씨를 주묵으로 쓴다. 이 때 대칭글자는 OHP 용 투명필름을 이용하여 인고를 복사한 후 뒤집어서 이를 보면서 글씨를 써내려 가면 된다. 또는 복사가 어려운 경우는 처음에 작성한 인고를 거울에 비추어 거울상에 비치는 거꾸로 된 글씨체를 보면서 글씨를 써내려 갈 수 있으며, 최근에는 판박이형 전사용지나 전사액을 이용한 KIT를 사용하여 한층 더 손쉽게 인면에 작성할 수 있다. 인면에 직접 포자할 경우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수정하면서 원하는 형태를 얻을 수 있도록 작성한다.
4) 운도(運刀) 운도는 앞에서 설명한 전각의 3법 중 도법을 활용하여 전각도를 이용하여 새기는 방법을 의미하며, 칼끝에 힘을 주어 잡아당김으로써 인면을 새기는 방법과 밀어 새기는 두 종류의 활용이 가능하다.
5) 印을 새김 인면에 그려넣은 형상을 실제로 새겨나가는 것으로 운도하기 편하게 인재의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새기는 것이 좋다. 선이 단조롭지 않도록 새김에 있어서도 강약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칼맛을 내도록 새겨나간다. 칼날을 약간 세움으로써 터져나가는 맛을 내거나 칼날을 조금 눞혀 새김으로써 매끄러운 맛을 내는 등의 변화를 주면서 운도의 다양성에 따른 더욱 색다른 새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 수정(修正) 새김을 끝낸 작품은 한 번 검인을 하여 결과를 보면서 불완전한 부분은 보도(보도)를 가하여 수정한다. 인영의 부분에 수정액을 칠하거나 인면의 먹을 넣어 살펴본 후에 수정을 하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윤곽이 너무 매끄러운 경우에는 칼날로 약간 두드려 변화를 주기도 하면서 인을 완성한다.
7) 검인(鈐印) 인주는 인면에 골고루 가볍게 뭍힌 후 인면의 전체에 골고루 힘을 주어 원하는 위치에 조심스럽게 찍어낸다. 이 경우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다시 수정과 검인을 반복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인(印)의 종류
1) 관인(官印) : 하 은 주(夏 殷 周)시대의 인은 관인이나 사인 모두 새(璽)라고 칭하였으나, 관인은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제도를 정립하고 난 후에 관서(官署)에서 사용한 인을 말하며, 이에 대응하는 것을 사인(私印)이라고 한다.
2) 성명인(姓名印) : 개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것으로 음각이 널리 사용된다. 이는 진한이래의 관사인을 음각으로 사용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 법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며, 인장의 경우와 같이 양각을 사용하기도 한다.
3) 당호인(堂號印) : 당대(唐代) 이후부터 사용되었으나 특히 원대(元代) 이후 문인들은 실명(室名)을 가지고 있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점에서 유래하였다. 실명인(室名印)이라고도 하며, 재관인(齋館印) 및 별호인(別號印)이라고도 한다.
4) 자호인(字號印) : 자호란 자(字)와 아호(雅號)를 의미한다. 특히 자는 그 사람의 덕의를 나타내므로 표자(表字)라고도 한다. 아호인은 성명인과 나란히 찍는 낙관(落款)인이다. 한인의 경우에는「印」이라는 글자를 함께 넣은 경우도 더러 보이고 있지만 자인과 마찬가지로「印」이라는 글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5) 다면인(多面印) : 오래전에는 거의가 성명 또는 성명과 자를 새긴 일면인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에는 한 면에 성명을 새기고 한 면에는 남자의 경우는「臣○」여자의 경우는「妾○」라고 새기기도 하였다. 또 한 면에는 성명을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길어를 새기거나 새, 동물, 벌레, 물고기 등의 초형을 새긴 것도 있으며, 이 밖에 다섯 면, 여섯 면을 모두 활용하여 새긴 것도 있다.
6) 음 양각 혼합인(陰 陽刻 混合印) : 인의 좌우에 음각과 양각의 문자를 새긴 것을 말하며, 한인(漢印)에서 엿볼 수 있다. 획수가 적은 쪽을 양각으로 획수가 많은 쪽은 음각으로 새기기도 하며, 음각과 양각 글자의 수를 달리하여 새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음각은 백문(白文)이라고 하며, 양각은 주문(朱文)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을 종이에 찍었을 때 글자를 나타내는 부분이 음각의 경우는 흰색으로 양각의 경우는 붉은 색으로 글자가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문 백문 상간인이라고도 한다.
7) 초형인(肖形印) : 인물이나 조수 등을 새긴 것으로 참신한 재미가 있으며, 전국시대의 고새 및 한대의 착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편지의 봉인이나 자신의 사인대신에 사용하면 재미를 더할 수 있다. 이는 초생인, 화상인, 상형인, 도상인(肖生印, 畵像印, 象形印, 圖象印)이라고도 한다.
8) 서간인(書簡印) : 진대와 한대에 조정내외에서 정부의 공문서 인을 하나 찍어 공문서임을 표시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육면인이나 자모인 등에서 보이고 있다.
9) 수장인(收藏印) 및 감상인(鑑賞印) : 서화나 골동품 또는 서적의 소장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거나 또는 예술작품으로써 감상하고자 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10) 길어인(吉語印) : 상서로운 의미의 좋은 뜻을 가진 어구(語句) 등을 새긴 것으로 장수, 축복, 행복, 즐거움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 대부분이며, 성어인과 유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1) 성어인(成語印) : 풍류의 시구 명언 등을 새기는 것으로 작품으로써 발표되는 것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인수인, 유인(遊印) 등도 여기에 속한다.
12) 염승인(厭勝印) : 상서로운 말을 새겨서 주문(呪文)으로 허리에 차서 사악한 영 을 쫓는 목적으로 사용하므로 벽사인(酸邪印)이라고도 한다.
13) 인수인 압각인(引首印 押脚印) : 그림 글씨등의 오른쪽 어깨 및 왼쪽 아래부분에 찍어서 나타내는 것을 말하며, 각각 수인 및 낙관인이라고도 한다.
14) 주지인(住址印) : 주소인을 말하며, 작품, 서체, 형태는 각자의 기호에 맞게 새길 수 있으나 너무 치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15) 자모인(子母印) : 대인, 중인, 소인을 조합하도록 되어 있는 인장으로 투인(套印)이라고도 말한다. 두 개가 한 조로 된 것이나, 세 개가 한 조로 된 것이 있다. 주물로 만들 동물상의 인에서는 큰 인은 동물의 어미를 작은 인은 동물의 새끼를 조합한 것도 있다.
16) 수전인( 篆印) : 고대의 무기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검은 철이나 일반적으로는 문자의 필획에 금실로 상감한 것이다. 이 경우 문자는 검은 철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17) 사령인(四靈印) : 성명인에 외곽에 도안이나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을 말하며 사령으로는 기린, 봉황(麒麟, 鳳凰), 거북, 용(龍)이나 청룡, 백호, 주작, 현무(靑龍, 白虎, 朱雀, 玄武) 등을 새기며, 관인에는 예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사인이다.
18) 납봉인(蠟封印) : 간결, 세련, 명쾌하며, 생동감 넘치는 창작과 표현기술을 겸비 한 납봉에 새겨진 것을 말한다.
19) 화압인(花押印) : 문양 모양의 화압이 들어간 것으로 성명과 화압을 동시에 새기며 성명은 문자를 약간 흘려서 쓴 것이다. 서압인(署押印)이라고도 한다.
20) 봉니(封泥) : 종이 발명 이전에 죽간(竹簡)이나 목찰(木札)에 옻을 사용하여 글 씨를 쓰고 죽간이나 목찰을 끈으로 묶은 다발에 발송할 때에 특제의 점토를 사용하여 봉한 후 인장을 눌러 찍은 것으로 오늘날의 봉납(封蠟)과 유사하다.
⊙인측관(側款)
측관은 인의 측면에 문자를 새기는 것으로 관지(款識), 변관(邊款), 인관(印款) 또는 널리 방각(傍刻)이라고도 한다. 이는 문자의 측면에 새기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경우 새겨지는 문자는 관(款)을 의미하는 음각과 지 (識)를 의미하는 양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관지라 고도 하는 것이다 .
측관은 원대의 趙子昻과 宋雪齋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명대 말기에 이르러 文彭과 何震 두 사람이 이를 이어받아 확대하여 인의 측면에 새기는 문자의 범위를 넓혔다. 이들은 石碑의 문자를 각하는 방법을 본떠서 먼저 인의 측면에 먹으로 문자를 쓴 후 글씨를 새겨냈다. 그러나 그 글씨는 겨우 몇 자에 불과했으며, 긴 문장을 새기는 일은 없었다. 淸代 초기의 정경은 처음에 먹으로 글씨를 쓰지 않고 손의 움직임에 맡겨 각도로 직접 글씨를 새기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소박함이 더했으며, 이후에는 측관의 각법이 크게 변하여 시문을 각하거나 새긴 문자나 문장의 출전에 대하여도 새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측관은 글씨를 먼저 붓으로 쓰고 난 후 다시 이를 칼로 새기는 방법과 직접 손의 움직임에 맡겨 글씨를 새기는 두 가지 방법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각에서는 서예의 붓 대신 칼 종이 대신 돌이라는 말에 답하듯이 효과적인 각법을 연구하여 단순히 인면을 새기고 난 후 인의 측면에 낙관하는 정도의 부수적인 것을 떠나 훌륭한 독자적 작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측관이 가능한 것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며, 이런 연유에서 오늘날에는 돌 위에 칼로 직접새기는 단입도법이 더욱 그 가치를 발휘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각의 연구에는 앞에서 살펴본 印面의 刻技와 병행하여 側款의 技法도 공부해야 할 것이다.
1) 側款의 위치
『治印雜設』을 비롯해서 전각입문 관련서 거의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冠署에는 일정한 면이 있는데 한 면의 경우는 인의 왼쪽에 새긴다 양면에 새길 때는 인의 뒤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에서 끝낸다. 삼면인의 경우에는 오른쪽, 뒤쪽, 왼쪽의 순서로, 그리고 사면일 때는 앞, 오른쪽, 뒤, 왼쪽의 순서로, 그 이상일 경우는 사면의 순서로 하여 앞면에서 끝나도록 한다." 이상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원칙이지만, 실제로 다면에 새겨진 명인들을 보면 왼쪽부터 새겨나간 경우가 의외로 많다. 異例로서 알아둠직한 것이다.
2) (도장꼭지)와 印面의 관계
측관의 위치는 앞, 뒤, 왼쪽, 오른쪽이라고 했지만 유가 있는 인재는 어느 쪽을 머리로 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 『治印雜設』은 "鼻 瓦 인 경우는 구멍의 양측을 인의 좌우로 한다. 거북이나 사자모양의 등은 꼬리가 있는 쪽을 인의 하변으로 할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자칫 『治印雜設』을 잘못 이해하여 '꼬리 내지는 짐승의 등쪽을 인의 상변으로 할 일이다.' 라는 속설이 통용하고 있으나 古印의 制로 말하더라도 전자가 정확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엄격히 따지자면 동물이 몸을 향한 쪽을 상변으로 할 일이다. 머리가 어느 쪽을 향했던 몸의 방향으로 따르는 것이 古印 이래의 제도인 것이다.
3) 側款 기본획의 刻法
여기서는 앞에서 살펴본 刀法 중 單入刀法을 써서 새기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자.
① 丁敬身에서 비롯된 浙派는 절도법을 많이 썼다. 측관을 새기는 법도 칼을 돌에 대고 그것을 끈다기보다 칼을 눕혀서 잘라 나가는 기분이다. 이것이 刻款하는데 편리한 切刀法의 기본이 것이다.
② 원칙적으로 돌은 돌리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문자도 布字하지 않는다. 西 家 의 한 사람이 황소송은 칼을 쥔 채로 움직이지 않고 돌을 회전해서 점획을 만들었다 하나 이는 특수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③ 점(點)은 칼을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해 강한 힘을 가하거나 또는 오른쪽 아래에서 왼편 위쪽으로 잘라 올리는 방법도 쓴다. 이 두 방법은 문자의 부분에 따라 적당히 나눠 쓰인다.
④ 일자(一字)의 가로획을 만들자면 起筆부분에 약간 힘을 주어 비스듬히 칼을 넣은 후 그대로 오른쪽 방향으로 자르듯이 끌고 나가 末筆 부분에서 힘을 주어 떼면 삼각형 모양의 끝 부분이 만들어지며 완성된다.
⑤ 수획(竪)은 기필 부분을 우선 만든 후에 아래 방향으로 잘라 내리거나(順 筆), 아래쪽에서 살며시 칼을 넣어 위 쪽으로 밀어 올리듯 잘라나간 후 끝 부분에서 힘을 약간 넣어 머리부분을 만든다(逆筆).
⑥ 수구(竪鉤)는 수획을 잘라내린 끝에서 칼 끝에 힘을 주어 죄측으로 튕겨주면 삼각형의 갈고리가 된다. 그러나 정경신(丁敬身, 1695∼1765)과 같이 다시 오른쪽아래에서 왼쪽 위를 향해 작은 점을 찍듯이 하기도 한다.
⑦ 별은 견획의 기법을 왼쪽으로 기울여 아래방향으로 잘라 내릴 뿐이지 만 때로는 약간 구부러질 경우가 있다.
⑧ 날(捺)은 단입법의 경우 작가의 거의가 오른쪽으로 삐쳐내지 않고 긴 점의 양식을 취한다. 오른쪽으로 삐침은 새기기 힘들고 효과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점은 점의 기법의 제2의 방법을 취한다.
⑨ 사구(斜鉤)는 왼쪽 위에서 잘라 내린 획 끝에 오른쪽 위에서 작은 점을 더 한다.
이와 같이 우선 기본의 점획을 조합하면 대개의 문자는 만들어 질 것이다. 측관의 경우에는 인면이상으로 書의 소양이 드러나게 마련이니 충실히 연습해야 할 것이며 여기서는 이상의 방법을 참고로 하여 한가지 예로 永자를 나타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전각이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통속적인 이름인 도장으로 선비들이 애환하는 예술품이자 동시에 황실과 고관대작은 물론 보부상에 이르기까지 신표 곧 믿음의 표지로 널리 사용된 일상용품인 까닭에 고급문화인 전각의 아취가 대중용품으로 쓰이는 도장의 품격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통시대 때도 전각은 "은일의 예술(隱逸의 藝術)"에 속했다. 모필 대신 철필로 끌을 쓰는 전각은 전문 영역이기보다 모필에 기대는 화가나 서예가의 겸업 영역이기 쉬웠다. 그래서 전각 전문예술가로서만 이름이 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고작 근대 중국화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齊白石의 경우처럼 그림 또는 글씨와 함께 전각에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정도로 전각은 은일의 예술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금세기 초반 전각에 능했던 위창 오세창, 성제 김태석 역시 전각가로 보다 오히려 서예가로 더 잘 알려져 있음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전각의 예술적 향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조선 5백년 예단의 최고봉이라 추앙 받는 추사 김정희선생의 예술에서도 전각은 빛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추사의 도장을 많이 새겼다고 하지만 도장에 새길 도안 곧 도장의 원고인 인고는 선생이 직접 제작한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음에서 추사는 우리의 전통 전각예술을 이어준 큰 고리였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침탈당하자 전각 같은 전통예술도 도매금으로 무너지면서 예술적 전각과 일상용품인 도장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생겨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오세창, 김태석, 그리고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기호, 고봉주, 이기우, 정문경, 안광석 선생에 이르는 분들이 끊임없이 전각의 전통예술 혼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 모두가 전각가이기 보다는 오히려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우리에게 있어 전각이 얼마나 도외시 당하고 있는 분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월간미술이 발행한 『한국미술 1998년』에 소개된 내용에는 의미있는 중요 기획전과 그 성과로 1997년 12월 16일부터 1998년 1월 18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한 『전각 초서의 오늘전』은 한국서예의 새로운 전망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본질 분야를 재해석함으로써 그 용량을 넓히고자 한 기획전이었다는 평과 함께 특히 방촌의 세계인 전각은 그 해석을 확대하고 연출을 시각적 볼거리로 끌어들인 의미있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림41에 나타낸 필자의 <풍어제, 豊漁祭>를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작배경에는 만선을 기원하며 울려퍼지던 징소리, 꾕과리 소리와 紫, 綠, 靑, 黃, 黑 등 화려한 빛깔로 나부끼던 풍어제의 깃발. 그리고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온 마을을 휘감던 어머니의 장 달이는 냄새가 당산나무에 걸린 풍어제의 깃발과 함께 박제되어 있다 .
한 집안의 내력과 품격을 말해주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콩으로 메주를 빚고 길일을 정해 온 정성으로 재료를 조율하듯, 篆刻은 단순한 서화의 소도구가 아니라 여러 요소가 合一된 동양예술의 정수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전각을 동양예술의 꽃이라 하였으며, 청나라 때는 吳昌石과 함께 劑白石도 결국 전각이 제일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서예, 그림은 알고 있으나 정작 전각에 대해서는 비예술로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아직 전각이란 단어조차도 생소하리만큼 미 개척분야인 것이 지금의 현실인데, 이는 전각에 종사하는 몇 되지 않는 先人과 현재 남아있는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전각문화 창달이라는 대의명분을 주장하기에 현실적으로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위에 필자는 전각이 서, 화와는 또 다른 독자적 장르임을 세계에 보여주고,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 존재하는 미적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豊漁祭'를 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각이 일반적으로 일제 이후 金石學적 근거나 예술성과는 무관하게 行政的 사무용으로 인감도장이나 또는 書·畵人들이 쓰는 낙관용 인장으로 사용되어 왔 으며, 技工들에 의해 전각의 3요소라 할 수 있는 子法, 章法, 刀法에 맞지 않게 새겨 졌거나 몇몇 서예가들에 의해 서예의 부속물인양 많은 후학들에게 잘못 오도되어 온 점도 인정된다. 그러나 전각은 글씨, 그림, 조각이 合一된 종합예술이기에 그러한 장 점을 보다 극대화하여 읽는 전각이 아닌 보고 느끼며, 살아있는 예술품으로 끌어올리 고 지금까지의 평면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입체적 공간이용을 통해 조형예술로 탈바꿈 시키고자 우리 전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선인들의 암각화를 인용, 재구성하여 紫, 綠, 靑, 黃, 黑의 오색 한지에 탁본함으로써 반입체적 효과를 꾀하였다.
한지의 5색은 과거 신분계급에 따른 인장의 끈과 매듭의 수술 색깔을 응용해 한지의 면으로 처리했고 그 위에 금박기법을 인용하여 색상과 문양을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다. 좌대에는 황동 거울을 부착시켜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마치 '메주'와 같은 전각은 인면이 비춰지는 효과를 내었다.
그리고 탁본되어 있는 여러 색상의 문양은 상하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여 메주와 같이 매달린 측면의 그림 문양과 부분적으로 요철같은 짝을 이루어 평면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평면으로 동시 이동하는 음양의 법칙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림 42 는 문예진흥원 전시실에서 전시된『책 판화 예술제』의 출품작으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모양을 형상화하여 나타낸 전각작품을 평면이 아닌 움직이는 면 위에 나타낸 것이다. 이 같은 구상은 영화영상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필름의 동작이 정지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이에 떨어져 있는 부분도 殘影에 의한 錯視현상으로 연속되어 보인는 영화영상의 특성을 응용. 영상물들을 이처럼 부분동작으로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움직임을 갖게 하고, 평면적인 정지상태에서 입체적 생동감을 갖는 조형적 시각효과를 노렸다.
또한 그림 43 은 『전각 초서의 오늘전』에 전시되었던 근원 김양동(近園 金洋東) 의 <刻의 始原>으로 작가는 고대 동이족들의 태양숭배 사유의 원형을 그리고 있다. 신석기시대 토기의 빗살무늬는 신에 대한 상징부호가 틀림없을 것이라는 새로운 전제 를 처음으로 내리고 그와 같은 기초 해석을 바탕에 깔고서 제작에 임한 작품이라 한 다. 이러한 무늬가 새김을 통한 조형세계의 시원이라는 점에서 한국미술의 원형질 이자 모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이 모태적 조형감각이 한국미술의 특질로 지적되 는 선의 예술로 확장되어 전통적 문화현장에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 이다. 본 작품은 이와 같은 논리에서 한국문화의 원형을 탐구하고 한국미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의도에서 제작했다고 하는 새로운 시도를 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