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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南陽洪氏)당홍계(唐洪系) 가계도
시조 홍은열(洪殷悅)
2세 홍동주 (洪東周);子 의(毅) 란(蘭)
3세 홍 의 (洪 毅) ; 子 호(灝) 복(復)
4세 홍 호 (洪 灝) ; 子 덕승(德升) 덕성(德成)
5세 홍덕승 (洪德升)
6세 홍 관 (洪 灌)
7세 홍지유 (洪至柔) ; 子 원중(源中) 윤서(倫敍) 연(演)
8세 홍원중 (洪源中)
9세 홍사윤 洪斯胤) ; 子 진(縉) 예(裔)
10세 홍 진 (洪 縉)
11세 홍 규 (洪 奎) ; 첨의중찬 고려 충혜왕의 모후 명덕태후 아버지
12세 홍융 (洪 戎) ;삼사사 子 주(澍) 언박(彦博)언유(彦猷)언수(彦修)
13세 홍 주 (洪 澍)
14세 홍 징 (洪 徵)
15세 홍상부(洪尙溥)
16세 홍 지 (洪 智) ; 사재감직장
17세 홍경손(洪敬孫) ; 첨지중추부사
18세 홍윤덕(洪閏德) ;봉상시부정
19세 홍계정(洪係貞) ;예문관대교
20세 홍춘경(洪春卿) ; 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 子 천민.성민.일민
21세 홍천민(洪天民)
22세 홍서봉(洪瑞鳳) ;대제학. 영의정. 문정공
21세 홍성민(洪聖民) ; 대제학. 호조판서. 문정공
22세 홍서익(洪瑞翼) ;병조판서 子 명구(命耉) 명하(命夏)
23세 홍명구(洪命耉) ; 평안도관찰사
24세 홍중보(洪重普) ; 우의정 충익공.子득기(得箕)득우(得禹)득주(得周
25세 홍득우(洪得禹) ; 강원도관찰사
26세 홍치중(洪致中) ;영의정 충간공
27세 홍제유(洪濟猷) ; 참봉
28세 홍익빈(洪益彬 ; 부사 子. 상윤(相胤)상찬(相纘)
29세 홍상윤(洪相胤)
30세 홍원섭(洪元燮) ;참의 子.현규(顯圭)집규(集圭)승규(勝圭)치규(穉圭)
31세 홍현규(洪顯圭)
32세 홍종원(洪鍾遠) ;부호군 子.순경(淳敬)순목(淳穆)
33세 홍순목(洪淳穆) : 영의정 문익공 子 만식(萬植)영식(英植)
34세 홍영식(洪英植) : 우의정 갑신정변 주역
國 婚
부 마(駙 馬) 임금의 사위
해(海) ; 당성위(唐城尉) 숙신옹주(淑愼翁主)(太祖 二女)
상(常) ; 당양위(唐陽尉) 명숙공주(明淑公主)(德宗 一女)
우경(友敬) ; 당원위(唐原尉) 정인옹주(貞仁翁主)(宣祖 四女)
득기(得箕) ; 익평위(益平尉) 숙안공주(淑安公主)(孝宗 二女)
익돈(益惇) ; 唐恩(僉)尉 淸瑾翁主(莊獻世子 一女)
당은(첨)위 청근옹주(장헌세자 일녀)
海 唐城尉 淑愼翁主(太祖 二女)
홍 해 洪 海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조부는 홍융 부(父)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홍언수(洪彦修)이다. 태조의 사위로 후궁 화의옹주(和義翁主) 김씨 소생 숙신옹주(淑愼翁主)의 남편이다
봉호는 당성위(唐城尉)이시다
처음에는 홍구해(洪龜海)라 하였는데 구(龜)자를 없애고 해(海)자로 고쳤다.
1417년(태종 17년) 당성군(唐城君)이 되고 이듬해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가 되었다. 1419년 내금위삼번절제사(內禁衛三番節制使) 1446년 숭덕대부(崇德大夫) 1448년 충청도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 등을 역임 하였다.
슬하에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홍덕생. 홍형생.홍이생 딸은 평해황씨(平海黃氏) 황계조의 처(妻)이다,[문헌]태조실록. 국조인물고
常 唐陽尉 明淑公主(德宗 一女)
홍 상 洪 常
1457년(세조 3년)~1513년(중종 8년) 조선조 덕종(德宗)의 부마(駙馬)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강(子剛) 시호는 소이(昭夷) 증조(增祖) 홍덕보(洪德輔) 조부는 한성부윤 홍심(洪深) 부(父)는 좌의정(左議政) 홍응(洪應) 모(母)는 부호군 이발생(李發生)의 따님 정경부인 안성이씨 이다.
友敬 唐原尉 貞仁翁主(宣祖 四女)
홍우경 洪友敬
1590년(선조 23년)~1625년(인조 3년) 조선 선조(宣祖)의 사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경부(敬夫) 이조참판(吏曹參判) 홍식(洪湜)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년) 선조의 딸 정인옹주(貞仁翁主)와 혼인하여 당원위(唐原尉)에 봉해지고 계(階)가 여러차래 올라 봉헌대부(奉憲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검소하여 부마(駙馬)에는 저택을 하사하는 관례가 있었는데도 이를 굳이 사양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폐모론이 일어나 245명이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하였으나 이에 끼이지 않는 36명 안들었다. 이이첨(李爾瞻). 한찬남(韓纘男) 등의 음모를 성토하다가 10간(奸)으로 몰려 관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관되었으며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시다 [문헌]성종.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좌간집. 명윤록. 월사행장. 청백당기사
得箕 益平尉 淑安公主(孝宗 二女)
홍득기 洪得箕
1635년(인조 13년)~1673년(현종 10년)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남양(南陽) 增祖는 가평군수 홍서익(洪瑞翼) 조부는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 부(父)는 우의정(右議政) 홍중보(洪重普) 모(母)는 吏曹判書 이현영(李顯英)의 따님 한산이씨 이시다.
1649년(인조 27년) 당시 세자이던 효종 둘째딸 숙안공주(淑安公主)와 혼인하여 익평부위(益平副尉)에 봉해졌다가 같은 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익평위(益平尉)로 진봉되었다.
益惇 唐恩(僉)尉 淸瑾翁主(莊獻世子 一女)
홍익돈 洪益惇
당은첨위(唐恩僉尉)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숙빈(淑嬪) 임씨(林氏) 사이의 소생 淸瑾縣主)이 있었는데 홍양유(洪亮猷)의 아들 홍익돈(洪益惇)에게 혼인 현주(縣主)는 세자의 서녀(庶女)에게 주는 위호(位號)인데 후에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으로 청근현주(淸瑾縣主)는 그뒤 위호가 옹주(翁主)로 바뀌게 되었다. 첨위(僉尉)는 세자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든 자에게 내리는 위호로 당은(唐恩)을 근거지로 하여 봉하였기 때문에 당은첨위(唐恩僉尉)라 한다
王 妃
淑嬪洪氏 文宗 益16 洪深 女
생몰년 미상 조선 문종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 한성부윤(漢城府尹) 홍심(洪深) 女 좌의정(左議政)의 홍응(洪應)의 누님이시다
문종(文宗)이 세자로 있을 때 후궁으로 세자궁에 들어 갔다가 1431년(세종 13년)에 같은 후궁인 권씨. 정씨,등과 함께 승휘(承徽)에 봉해졌다. 두 차래 세자빈을 페한 사건이 있은 뒤 권씨가 세자빈에 올랐으나 일찍이 죽자 홍씨는 내궁을 주관하게 되었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는 귀인(貴人)에 올랐다.
그뒤 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한 뒤에는 숙빈(淑嬪)에 봉해져 단종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딸이 하나 있었으나 1444년 4살의 어린나이로 죽었다[문헌]세종.문종.단종실록 燃黎記述
淑儀洪氏 成宗 南16 洪逸童 女 完原君遂 四男
朝鮮 第九代 成宗大王의 후궁 淑儀洪氏
남양홍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홍일동(洪逸童)의 딸이다.성종 연간에 소용에 봉해졌다가 다시 숙의로 승격 되었다. 소생으로는 완원.희산.진성.익양.경명.운천.양원군 등 아들 7명과 혜숙.정순.정숙.옹주들 딸 3명이 있다.
숙의홍씨의 아들 들은 연산군 시절 국문을 당하고 유배를 당하는등 고초가 많았다.
淑儀洪氏 中宗 海安君希 二男
조선 제 11대 중종대왕의 후궁 숙의홍씨
숙의홍씨는 조선 제11대 중종대왕의 후궁으로 1511년(중종 3년) 중종의 서(庶) 二男 해안군(海安君)을 낳았다.
洪逸童 成宗大王 후궁 淑儀洪氏의 부친(父親)
1464년(세종 10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일휴(日休)호는 마천(麻川) 주(澍) (南陽君派 祖)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징(洪徵)이고 부(父)는 절도사 홍상직(洪尙直)이며 모(母)는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熙嬪洪氏 中宗 南19 洪景舟의女 錦原君怜 三男
금원군영 1513년(중종 8년)~1562년(명종17년) 조선 중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 이름은 영 자는 앙지(仰止) 중종의 아들 모(母)는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의 딸인 희빈(熙嬪洪氏)이다.
貞嬪洪氏 宣祖 南21洪汝謙女 慶昌君 주 九男
경창군 1604년(선조 37년)~1654년(효종 5년) 조선 중기의 종친 본관은 전주 이름은 주 부(父)는 宣祖 모(母)정빈홍씨(貞嬪洪氏)이다.
憲宗妃 孝定王后 洪在龍의女
효정왕후 헌종의 繼妃이다 정식 시호는 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
명 헌숙경 예 인 정 목 홍 성
純貞徽孝定成皇后 徽號 ; 明憲淑敬睿仁 正穆 弘聖 章純 貞 徽 王
순 정 휘효 정 성 황 후
大妃殿下 大妃殿下
돈영부사(敦寧府事) 홍재룡(洪在龍)의 女 ; 明憲王后로 부른다.
▶ 홍 씨 (洪 氏)
홍씨(洪氏)는 고려(高麗) 조선(朝鮮)시대의 1000여 년의 영화(榮華) 권좌(權座
를 누린 우리나라 285성씨(姓氏) 중 10대 문벌(門閥)에 손꼽히며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8학사(學士) 천하(天河)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의 요청으로 동
래(東來)한데 연원(淵源)을 둔다.
후손 중 은열(殷悅)이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귀화하여 홍씨대종(洪氏大
宗)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당홍계(唐洪系)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고려 고종
(高宗)때의 명신 선행(先幸)을 시조(始祖)로 삼는 토홍계(土洪系)로 대별(大別)
되어 있다.
南陽 洪氏(남양홍씨)
▶ 唐洪系(당홍계)
당홍계(唐洪系)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조선 때에 문과 급제한 329명과 한 가
문(家門)에서 9대(代)에 걸쳐 빠짐없이 대과급제의 영예(榮譽) 간직하고 있는
명문 거족(巨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천하(天河의 후손으로 명기(明記)되어 있다.
그후 삼한통일(三韓統一)이 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천하(天河)의 대공
(大功)을 기리어 당성백(唐城伯;南陽)에 봉(封)하였고 신무왕(神武王) 때 태자
태사(太子太師),효소왕(孝昭王) 때에는 당성후(唐城侯)에 봉록(封錄)된 것에 연
유(淵由)되어 고려때의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과 태사(太師)를 역임한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본관을 남양(南陽
唐城)으로 삼아 오늘에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명문(名門)이 되었다.
6세손(世孫)과 관(灌)이 고려 인종(仁宗)때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10세손
(世孫) 진(縉) 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
르렀고 충선왕(忠宣王)때의 판쇼ㅏㅁ사(判三司) 규(奎) 찬성사(贊成事) 선(詵).
조선시대의 개국공신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오른 길민(吉旼) 세종(世
宗) 때 판서(判書) 여방(汝方) 세조(世祖) 때의 우의정(右議政) 역임 후 예종(睿
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오른 윤성(允成) 등이 문중 중
흥(中興)에 주초(柱礎)가 되었다.
이외에도 좌의정(左議政) 달손(達孫) 영의정(領議政)에 인우(仁祐) 지중추부
사(知中樞府事) 희남(喜男) 대제학(大提學) 성민(聖民) 영의정(領議政) 서봉(瑞
鳳) 특히 인조(仁祖) 때 대사성(大司成) 명일(命一) 현종(顯宗)의 영의정(領議政
명하(命夏)는 문중의 대표하는 선현(先賢)이다.
태사공(太師公)의 묘(墓) 문화재로 지정
월간 남양회보 2010년 9월 25일 호
시조(始祖)고려태사 홍은열의 묘 (高麗太師 洪殷悅의 墓)
황해북도 토산군 매봉리<홍묘리에 있는 재사고의 묘소 공식명칭 - 홍묘리 무덤>가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 1013호로 지정된 사실이 확인이 되었다.
이는 우리 홍문(洪門에서 경축해야 할 자랑스러운 광영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문화재 공식명칭이 고려태사 홍은열의 묘(高麗太師 洪殷悅의 墓)라는 설명이 표시되지 못하고 다만 홍묘리 무덤 이라고만 표시되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태사공(太師公) 묘소에는 신도비. 망두석. 상석. 등이 설치되어 있고 봉분이 웅장하여 왕릉과 같고 주변에는 수백년 된 소나무가 웅장하다고 한다.
홍묘리라는 마을 이름에 대하여는 홍씨의 묘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홍묘리라 하게 되었고 이 마을에 사는 홍씨들을 일러 홍묘리 홍씨라고 한다고 한다.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휘(諱) 은열(殷悅
태사공 휘 은열 자(字) 유(儒)게서는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이시며 선시조 10세(世)이신 휘 몽주(夢疇)와 목산김씨(穆山金氏) 사이에 시조(始祖)
殷悅一云無殷字 高麗匡翼 效節 獻襄 定難 弘濟 溝庸 亮采 保乂 經濟 功臣 三重大
은열일운무은자 고려광익 효절 헌양 정난 홍제 구용 양채 보예 경제 공신 삼중대
匡 太師 配 金交夫人(乙未譜 云 金交夫人 金氏 父 沙贊元甫公 南母
광 태사 배 김교부인 을미보 운 김교부인 김씨 부 사찬원보공 남모
史寶夫人 一云 福夫人 祖 沙贊禮千 曾祖 德山村主 外祖 賢平卿 墓 兎山 西面 吹笛
사보부인 일운 복부인 조 사찬예천 증조 덕산촌주 외조 현평경 묘 토산 서면 취적
峰 丙坐(봉. 병좌)
시호 해설 ; 고려초 왕업 창시에 크게 공헌 본받을 충절을 다해 국난을 평정케 하여 빍은 도리로 많은 재앙으로부터 인명을 구제하는 덕을 베푼 경제민의 공신이다.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정 1품 벼슬 태사(太師) 삼공(三公) 태사(太師)대부(大傅) 태보(太保) 삼공중 하나로 왕의 자문관
주(註)고려시대 계급(階級)은 정1품으로 하고 그 밖의 문무백관의 계급은 종1품으로 했으나 개국초에 향직(鄕職)에 정일품을 주었는데 실무에 종사 하지는 않앗다.
주(註) 배위(配位) 김교부인(金交夫人)이란 김교(김천군의 옛 이름에 안치(安置)된 부인이란 뜻으로 추측건데 태사공보다 먼저기세 하셔서 김교에 안장된 데서 유래된 것인데 그 기록이 후세에 김교군 부인으로 변하면서 관적(貫籍)으로 오인되게 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김씨중에 김교김씨(金交金氏)란 없다 다만(을미보 고증록 (즉 족보 기록의 검증)을 보면 덕산촌주(德山村主)의 증손녀(曾孫女)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씨족 사회에서의 관습(慣習)이 유교적 혼습(婚習)과는 너무 멀어서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한 사고 방식으로 개작(改作) 표기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주(註) 고려시대 부인의 게급은 부(府) 원(院) 부인 삼한국(三韓國) 부인 군(郡) 부인의 세종류가 있는데 부(府) 부인은 왕실의 후궁들을 의미하며 삼한국부인은 공신의부인이고 기타 귀족(貴族)은 군부인 인데 군부인의 앞에는 그 출신 씨족의
관적(貫籍)을 표시하고 있다.
홍 유 洪 儒
?~936년(태조 19년) 고려 초기의 무장 초명은 술(術)시호는 충렬(忠烈) 의성부(義城府) 출신 본래는 후백제 궁에(弓裔)의 치하에서 있었으나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왕건(王建)을 내세워 고려를 세웟다. 일등개국공신(一等開國功臣)으로 대상(大相)에 오르고 예산현(禮山縣)을 개척 유민(流民) 500여 호를 모아 살게 하였고 계속해서 후백제를 정벌하는 싸움에 나가 공을 세웟다. [문헌] 고려사
홍은열(洪殷悅)은 원래 이름은 홍유(洪儒)였는데 태조(太祖) 왕건이 은나라 부열(傅說 은나라 고종때의 명재상)과 같다하여 이름을 은열(殷悅)로 하사 했다고 한다.
2세(世) 태부경공(太府卿公) 휘(諱) 동주(東周)
殷悅의子 東周-云東固太中大夫 太府卿-云太府小卿 配金氏 父 雜
은열 자 동주 운동고태중대부 태부경 운태부소경 배김씨 부 잡
干奈興 或云奈興 子 欣方丞 或云 太師公 弟 札之 子 配尙興房
간내흥 혹운내흥 자 흔방승 혹운 태사공 제 찰지 자 배상흥방
주(註) 태부경(太府卿)의 휘(諱)자가 고려시대 문과방목록(文科房目錄에 홍덕성(洪德成) 5세(世)의 증조로 명기 되어 있다. 그 밖에는 이렇다할 기록이 없다.
3세(世) 복야공(僕射公) 휘(諱) 의(毅)
東周의子 毅 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 配 漢南郡夫人房 父書
동주 자 의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 배 한남군부인방 부서
史 儒令元要
사 유령원요
祖大匡貞儒 外祖南平村 主 綠朱郞墓 晉州 廣濟山 洪池洞 辛坐 夫
조대광정유 외조남평촌 주 록주랑묘 진주 광제산 홍지동 신좌 부
人墓 未詳
인묘 미상
英祖乙巳得片碣丙午 改築瑩域立表石 二十三世孫 致中撰表記禹
영조을사득편갈병오 개축영역입표석 이십삼세손 치중찬표기우
傳書二十四孫 啓宇篆丁酉建 洪池洞 祠宇 墓下 三十代孫 鍾凡 撰
전서이십사손 계우전정유건 홍지동 사우 묘하 삼십대손 종범 찬
樑頌
량송
陟 正甫 蘭 改諱 鸞副正戶 配 永川李氏父得芬 祖進士 大榮 七彬
척 정보 란 개휘 란부정호 배 영천이씨부득분 조진사 대영 칠빈
內丞(내승)
주(註) 3세조 복야공 휘 의(毅)께서도 특별한 문헌(文獻)이나 전기는 없다. 태부경(太附卿) 공(公)과 마찬가로 5세(世) 휘(諱) 덕성공(德成公)의 문과방목에 조(祖) 의(毅)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족보의 기록과 집안에 전해지는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해설하려 한다
주(註)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고려시대 초기에는 정3품의 계급칭호 이다 1356년~1362년에는 정2품 상계에 해당) 고려시대에는문관의 최고 품계를 종 1품게로 정하고 있었으므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즉 상서성(尙書省)의 우복야란 벼슬이 이조 때의 우찬성과 같으나 조선조 계급이 고려 때 보다 일품게씩 상향조정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적정한 게 사직이 일치된 기록이라 하겠으며 대개 상서령은 문하시중(영의정)이 겸직이며 복야(僕射
는 6성(省)의 상서(관서)를 지휘하는 위치로 현 체재에서 부총리 격이라고 할수 있다.
주(註) 묘(墓)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홍지동(晉州市 鳴石面 桂垣里
洪池洞 기록에 의하면 영조 을사(1725년에 비석조각을 발견하여 공(公)의 묘 임을 확인하고 당시 영의정이던 북곡공(北谷公) 휘 치중(致中)게서 앞장서서 묘역을 개축 하시고 비갈(碑碣)을 찬(撰)하셨으며 경상관찰사를 역임 한 바 있는 구만공(龜灣公) 휘 우부(禹傅)게서 글씨를 썼고 구만공의 당질 되시는 생원공 휘 계유(啓宇)
게서 전각(篆刻)하였으며 지금은 경상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홍지사는 1777년 정조 원년 정유년에 세웠다고 한다.
복야공게서는 마지막 덕산촌주(德山村主)를 습봉(襲封)하여 덕산에 사시다가 고려 4대왕 공종(光宗)때 혁신적인 노비속량령(奴婢贖良令)에 따라서 집안의 모든 노비를 풀어 양민으로 해방을 시켜 주면서 할머니(房氏)에게 집안 대소사를 직접 살피라고 하셨다
나라에서 이소식을 듣고 공이 작고하고 난 후 현재 유택 자리를 왕명으로 점지 하였던바 산역일이 우연히도 속량(贖良)된 옛 노비들이 유택(幽宅)의 산하에 모여 살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그 어른의 산역이라면 우리가 하겠노라 고 자진하여 어른을 이자리에 모시게 되었는 과연 그 곳은 천하 명당이라서 지금도 우리나라 8대 명당중 하나로 일컫는다
복야공 께서는 4형제가 있는데 그중 셋째 난(蘭)은 재신공파(宰臣公派)부게홍씨는 1974년 합보 와 파조(派祖)가 되셨다.
4세(世) 첨사공(詹事公) 휘(諱) 호(灝)
의(毅) 子 灝 衛尉寺卿 太子詹事追封 銀靑光祿大夫 尙書 右僕射
자 호 위위시경 태자첨사추봉 은청광록대부 사서 우복야
墓 似在 僕射公 墓下而未詳 配 唐城郡夫人 洪氏父少監 涉母 永
묘 사재 복야공 묘하이미상 배 당성군 부인 홍씨부소감 섭모 영
同郡夫人 姜氏 沼一云沼直長 復庚譜復一云福奉卿官禮吏智宗 出
동군부인 강씨 소일운소직장 복경보복일운복봉경관례이지종 출
家 元鴨出家
가 원압출가
주(註) 위위시 衛尉寺)고려 태조 때는 내군이라 했으며 장위부(掌衛部) 사위부(司尉部)라고 했는데 왕궁을 지키는 친위대 조선조 때의 내금위와 같다
위위시경 ; 판사(判事) 다음의 종 3품직으로 친위대 부사령관 격이다 태자첨사(太子詹事) 1060년 문종 때의 관제로서 동궁의 종 3품 고나이다. 이조 때는 태자시강원의 책임관과 같은 역활
상서우복야 은청광록대부 추봉(追封)은 공(公)은 손자 충평공 휘 고나(灌)의 충정 1126년 고려 인종 4년 이자겸 난 때 왕을 호종 하다가 난적의 칼에 맞아 순절을 기리는 뜻으로 3대 추증(追贈)의 결과로 추봉(追封) 상서우복야는 사서령 다음의 위계로서 조선시대의 의정부 좌우찬성 격이다
공(公)의 행장을 알만한 특별한 문헌은 없고 다만 5세(世)휘 덕성공 문과방목록에 부(父) 호(灝)로 기록되어 있는것이 유일한 내용이다. 5형제중 셋째 復(복) 즉 예사공(禮史公)는 남양 홍씨 예사공파 파조이시며 의주(義州) 남원 감주홍씨(監州洪氏)가 이 파(派)의 후손들이다 묘(墓) 진주시 명석동 계원리 복야공 유택 안쪽에있는 산소가 공(公)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5세(世) 감사공(監事公) 휘 덕승(德升)
灝 子 德升 初諱德公 中散大夫 軍器監事 配 大寧郡夫人 海州崔氏
호 자 덕승 초휘덕공 중산대부 군기감사 배 대영군부인 해주최씨
父 司天監事 得興 祖殿中小監 子 廉外祖 戶部尙書 宋融 德成 靖
부 사천감사 득흥 조전중소감 자 염외조 호부상서 송융 덕성 정
宗 乙亥 文科 乙部尙書 德威 兵部尙書 逈招 出家逈天 出家 德容
종 을해 문과 을부상서 덕위 병부상서 형초 출가형천 출가 덕용
雜織令 沾子 程丞 復 子 漢升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府使 上將軍
잡직령 첨 자 정승 복 자 한승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
此 波說見考證錄
차 파설견고증록
주(註) 초휘는 덕공(德公)이시며 중산대부는 정5품 상계에 속하며 군기감사는 군기시에서 감 다음가는 직위이다 배위께서는 대령군 부인 해주최씨이시다 최씨부인의 친정아버지 되시는 득흥(得興)께서 사천감사(司天監事)를 하셨는데 사천대란 천문(天文)과 책력(冊曆) 수리를 관장하는 관서로 오늘날의 천문대와 같다
감사공께서는 유택을 모시지 않고 고려시대에 유행(流行)하던 장의식인 다비(茶毘) 뜻 화장 장으로 모셨기 때문에 규찰(糾察) 적발하여 자세히 살핌) 기관이다
전중(殿中) 서란 기관을 종부시 또느 종정시라고도 했는데 종친들의 실전을 지금의 경기도 노곡리의 당성군 유택 상당 2세조 휘 동주 태부경 단 옆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에 세일제로 모시고 있다.
주(註)공의 두 아우님 덕성 덕위 두 어른이 고려시대 과거가 시행된 이래 우리 홍문에서 처음으로 정종(靖宗 2년) 을해 1035년에 급제 되어 등용 덕성공께서는 공부상서(관서)의 직위에 오르셨고 덕위공께서는 과거급제 병부상서의 직위에 오르셨다.
이 두 분을 시점으로 명실상부한 귀족가문의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참고 ;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4년 958년 중국 후주의 귀화인 쌍기
(雙寄)의 건의에 따라 과거가 시행되었고 조선 고종 31년 1894년에 과거가 폐지 되었다.
홍씨 (洪氏)
홍씨(洪氏)는 고려(高麗). 조선(朝鮮)시대의 1000여 년의 영화(榮華)와 권좌(權座)를 누린 우리나라 285 성씨(姓氏) 중 10대(大) 문벌(文閥)에 손꼽히며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8학사(學士) 천하(天河)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의 요청으로 동래(東來) 한데 연원(淵源)을 둔다. 후손 중 은열(殷悅)이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귀화하여 홍씨대종(洪氏大宗)인 남양홍씨(南陽洪氏) 당홍계(唐洪系)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고려 고종(高宗) 때의 명신(名臣) 선행(先幸)을 시조(始祖)로 삼는 토홍계(土洪系)로 대별(大別) 되어있다.
남양 홍씨(南陽洪氏)
당홍계(唐洪系)
당홍계(唐洪系)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조선 때에 문과 급제한 329명과 한 가문(家門)에서 9대(代)에 걸쳐 빠짐없이 대과급제의 영예(榮譽)를 간직하고 있는 명문거족(名門巨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천하(天河)의 후손으로 명기(明記)되어 있다.
그후 삼한통일(三韓統一)이 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천하(天河)의 대공(大功)을 기리어 당성백(唐城伯 ; 南陽)에 봉(封)하였고 신무왕(神武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 효소왕(孝昭王) 때에는 당성후(唐城侯)에 봉록(封錄) 된 것을 연유(淵由)되어 고려때의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태사(太師)를 역임한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삼아 오늘에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명문(名門)이 되었다.
6세손(世孫)과 관(灌)이 고려 인종(仁宗) 때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10세손(世孫) 진(經)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고 충선왕(忠宣王) 때의 판삼사(判三司) 규(奎), 찬성사(贊成事) 선(詵) 조선시대의 개국공신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오른 길민(吉旼) 세종(世宗) 때 판서(判書) 여방(汝方) 세조(世祖) 때의 우의정(右議政) 역임 후 예종(睿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윤성(允成) 등이 문중(門中) 중흥(中興)에 주초(柱礎)가 되었다.
이외에도 좌의정(左議政) 달손(達孫) 영의정(領議政) 인우(仁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희남(喜男). 대제학(大提學) 성민(聖民) 영의정(領議政) 서봉(瑞鳳) 특히 인조(仁祖) 때 대사성(大司成) 명일(命一) 현종(顯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명하(命夏)는 문중을 대표하는 선현(先賢)이다.
충평공(忠平公) 취위비도
또한 개성시 송악동 만구러대 서화문터에 있는 충평공 관(忠平公 灌)의 취위비 <공식명칭은 홍관비>는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 1543호로 지정 된 사실로 확인 되었다. 진주 복야공의 묘소에 구비(舊碑)의 형태가 유사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조선향토 대백과) 사년에 기타 지지의 황해북도 토산군편에 실려 있어 확인이 가능 하였다,
홍관 洪灌
?~1126년(인종4) 고려의 명필(名筆) 자는 무당(無黨) 본관은 남양(南陽) 인종(仁宗)때에 수사공상서(守司空尙書)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亂)때 인종을 모시다가 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게 피살되었다. 신라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아 명필로 알려졌으며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김생의 행초서(行草書) 일권을 가지고 가서 그들로부터 왕흐지(王戱之)에 비할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받았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의하면 보문쳥연이각(寶文淸燕二閣)의 서화(書畵)를 홍관이 그렸다고 하며 보전화루(普殿畵樓)의 병풍. 평액이 그의 필적이다. [문헌]삼국사기 고려사 槿城書畵徵
홍달손 洪達孫
1415년(태종 15년)~1472년(성종 3년) 조선 초기의 명신 자는 가칙(可則) 시호는 안무(安武) 본관은 남양(南陽) 치(治)의 아들. 어려서부터 무에를 배워 일찍이 내금위에 들어갓고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도수군첨절제사(義州道水軍僉絶制使)를 지냈다. 1453년(단종 10년) 무과에 급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이어 수양대군에 천거되어 그를 도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몰아내고 정난(靖難)의 공 1등에 채록되어 병조첨의가 되었다. 이어 이듬해 참판에 오르고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피봉되었으며 세조가 즉위 하자 좌익(佐翼)의 공 2등에 채록되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거쳐
1467년(세조 13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그는 무에가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했으나 한가지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첩 10여 명을 거느렸다.[문헌] 단종. 세조. 성종실록
신증보국여지승람
홍덕연 洪德演
1493년(선조 23년)~1553년(명종 8년)조선 명종 때의 문관 자는 숙용(叔容)본관은 남양(南陽) 대사성 이평(以平)의 아들. 1524년(중종 19년)문과에 급제 중종 때에 사유(師儒)로 뽑혔으며누진하여 강원도도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죽었다.그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경학에 독실하였으며 제자백가에 이르까지 열독하였다. 김안국(金安國)에게 배웠으며 용문산에 들어가 조광조(趙光祖)와 같이 지낸 관계로 매우 친숙하였다. 세 번 주군의 수령을지냈으나 옥사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간(臺諫)에 잇으면서 모든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논박으로써 곧은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다. 만년에 여동래(呂東萊)의 십칠사(十七史)와 동국사(東國史)를 애독하며 고금의 득실을 검토 연구하여효연히 그 세상을 보는 듯하였다.
[문헌] 중종실록 인물고
홍인우 洪仁祐
1515년(중종 10년)~1554년(명종 9년)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길 호는 치재(恥齋)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연(德演)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랑(思良)의 딸이다. 서경덕. 이황의 문인이다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 하였으며 -심경. 근사록. 중용. 대학에 전심을 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명인들과 강마하고 논란 하였다. 노수진(盧守進)은 학문 하는중에 의심나는거이 있으면 서신이나 구두로 물었다. 김안국(金安국)도 그의 학행을 칭찬 하였다고 한다. 어버이의 병환으로 익서를 배워 약의 처방을 알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고 여의주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치재집 2권과 관동일록이 있다
홍적 洪迪
1549년(명종 4년)~1591년(선조 24년)조선 선조 때의 문관 자는 태고(太古) 호는 양재(養齋) 하의생(荷衣生) 본관은 남양(南陽) 치재(恥齋)인우(仁祐)의 아들.판서 진(進)의 동생 진사를 거쳐 1572년(선조 5년) 문과에 급제 사국(史局)에 추천되었고 호당(湖當)에 뽑혔다. 그후로는 홍문관에 10년 동안이나 있었고 경학(經學)에 매우 밝았다. 그때 양사(兩司)에서 이율곡(李栗谷)을 탄핵하자 홍문관에서 이를 반박하니 왕은 대노하여 홍문관의 모든사람을 출척하였다. 적도 장연(長淵)현감으로 좌천되었으며 4년 후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서 다시 등용되어 병조정랑을 거쳐 집의. 사인에 이르렀다. 벼슬에 나가서 24년 동안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고 종왕(鍾王). 회소(懷素)의 필법을 따라 필명도 높았다.[저서]하의시집(荷衣詩集) [문헌]人物考
홍진 洪進
1541년(중종 36년)~1616년(관해군 8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흐고(希古) 호는 인제(認薺) 퇴촌(退村) 시호는 단민(端敏) 본관은 남양(南陽) 치재(恥齋)인우(仁祐)의 아들. 1570년(선조 3년) 문과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고 직제학(直提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진문사랑(進問事郞)으로 심문했다.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라 우부승지에 옮겼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셔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랐으며 그 공으로 공신의 호를 받고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피봉되었다. 죽은 뒤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문헌] 인물고홍 빈 洪 彬
1288년(충렬왕 14년)~1353년(공민왕 2년) 본관은 남양(南陽)고려 말기의 문신. 자는 문야(文野) 시호는 강경(康敬)충숙왕이 무고를 입고 폐위(廢位)되어 원나라에 억류죄자 이를 변호했으며. 충숙왕이 복위되자 그의 공을 인정한 왕이 원나라에 정동성이문소(征動省理問所)의 벼슬을 내릴 것을 주청했고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都僉議贊成事判軍簿使)에 올랐으며.1339년 충숙왕이 죽자 유명(遺命)에 의하여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가 되었다 이해 조적(曹迪)의 난 때 성관(省官)과 함께 조적(曹迪)의 강요로 충혜궁(忠惠宮)을 습격했으며 조적이 패사(貝死)하자 다른 사람은 모두 순군(巡軍)에 잡혔으나 그는 용서되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조적 일당의 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되자 함께 잡혀가 왕을 위해 변호. 이듬해 왕이 귀국하게 되자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이어 행성낭중(行省郎中)에 올랐다. 1353년(공민왕 2년)우정승(右政丞)에 승진.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공신(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功臣)의 호를 받고.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그 뒤 홍언박(洪彦博).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다가 사직하고 66세에 죽었다. 시호는 강경공(康敬公)이다 [문헌]高麗史. 고려사절요. 益齊亂藁(익제난고)
12世 홍순(洪順)~아들(1)홍운수(洪云遂)(2)홍운형(洪云衡)13世 홍운수 14世 홍유룡(洪有龍) 15世 홍덕보(洪德輔 16世 홍심(洪深) 漢城府尹 17世 홍응(洪應) 左議政 益城府院君 忠正公 18世 홍상 (洪常)
홍 심 洪 深
1398년(태조 7년)~1456년(세조 2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청(伯淸) 조부는 시랑(侍郞) 홍유룡(洪有龍)이고 부친은 홍덕보(洪德輔)이다 어머니는 윤규(尹珪)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년)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 사온직장(司瑥直長) 사헌부남부령(司憲府南部領)등을 지냈다. 이 때 딸이 동궁(東宮)에 간택되어 쌀과 콩 등 30석을 하사 받은 적이 있고 1433년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있을 때 의복을 하사 받았다. 1436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었고 1439년에 장령(掌令)을 거쳐 세종 때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겸 지병조사(知兵曹事)를 역임햇다. 1450년(문종 1년)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동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 한성부윤(漢城府尹)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는 경기도관찰사로 1454년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있을 때 세조 즉위와 관련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채록되었다. 1456년(세조 2년)에 평양선위사(平讓宣慰使)로 재임 중에 타게했다.
홍 응 洪 應
1428년(세종 10년)~1492년(성종 23년) 조선 성종 때의 재상.자는 응지(凝之) 호는 휴휴당(休休堂)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남양(南陽) 한성부윤(漢城府尹) 심(深)의 아들. 1451(문종 1년) 증광시(增廣試)에 장원 급제 정난(靖難)좌리(佐理)공신(功臣)에 채록되고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성종(成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문명(文名)이 있고 글씨를 잘 썼으며 현상(賢相)으로 전해 진다. 필적으로는 모간(摸刊)한 것이 해동명적(海東名跡)에 전한다 [문헌]성종실록 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槿域書畵徵(근역서화징) 海東名跡(해동명적)
홍 흥 洪 興
1424년(세종 6년)~1501년(연산군 7년) 조선 성종 때의 문관. 자는 사걸(士傑) 본관은 남양(南陽) 한성부윤(漢城府尹) 심(深)의 아들. 좌의정 응(應)의 아우 20세에 사마시에 합격 음사(蔭仕)로 출신하여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내외 벼슬을 역임하여 치적을 나타냈고 세번 헌부(憲府)를 맡아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자 백성들이 기뻐 맞이하였다. 성품이 정직하여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아부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동료들이 두려워하였다. 서도에 능하여 양주(楊州)의 홍응신도비문(洪應神道碑文 ; 李淑珹이 撰함)을 썼다. [문헌]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조선금석총람 인물고
홍 상 洪 常
1457년(세조 2년)1513년(중종 8년) 조성 덕종의 부마(駙馬)자는 자강(子剛) 시호는 소이(昭夷) 본관은 남양(南陽) 좌의정 응(應)의 아들. 덕종의 명숙(明淑)공주와 혼인하여 당성위(唐城尉)가 되어 강양군(康陽君)의 봉함을 받았다.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이 되어 오랫동안 금병을 관장하였으며 연산군 때에 숭록대부의 위계에 올라 의빈(儀賓)의 극품에 이르렀으며 1504년(연산군 10년) 사화로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중종이 즉위하자 특히 원종(原從)공신의 호를 받고 왕의 권우(券遇)가 극진하여 세절(歲節)과 생신에 사람을 보내어 사찬(賜饌)이 계속되었다. 성품이 화순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몸가짐을 삼가서 부귀로 사람을 억압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어진 재상 인줄은 알아도 귀척(貴戚)의 종족임을 알지 못하였다. 아들 백경(伯慶)이 있다.[문헌] 중종실록 인물고 璿源系譜(선원계보)容齋集(용재집)
홍대순 洪大純
고려 고종 때 사람 일명 대선(大宣) 복원(福源)의 아버지 1219년(고종 6년) 몽고의 원수 합진(哈眞 . 哈兄吉 . 合臣 . 河稱)등이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대순은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 있으면서 그들을 맞이하여 항복했다. 그후 아들 복원도 1233년 현보(賢甫)와 함께 난을 일으키고 쫓기게 되니 민호(民戶)를 이끌고 몽고에 항복했다. 그로 인해 복원은 몽고의 동경(東京. 遙陽) 총관이 되어 조국인 고려에 갖은 압력을 가했으며 대순도 대장군이 되는 등 대대로 몽고의 주구로서 조국에 반역하게 된 길을 열어 놓았다.-홍복원(洪福源) [문헌] 고려사
홍복원 洪福源
1206년(희종 2년)~1258년(고종 45년) 고려 중기의 역신(逆臣) 처음 이름은 복량(福良) 시호는 충헌(忠獻) 도령(都領) 대순(大純)의 아들. 그 선조는 중국인 당나라 때 고려로 이사해 왔다. 1218년(고종 5년) 원나라가 강동성(江東城)에 침입 했을 때 아버지 대순이 자진해 항복하고 적병을 불러들였고 1231년(고종 18년) 원나라가 살례탑(撒禮塔)을 보내어 다시 침입할 때 아들 복원이 또 항복했다. 원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 복원은 서경낭장(西京郎將)으로 있을 때 반란을 일으키고 잡혔으나 도주하여 원나라로 들어가 동경총관(東京摠管)이 되었으며 그위 원나라가 조선을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뒤에 영녕공(永寧公) 준(逡)이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고 보낸 장사(壯士) 10여 인에게 맺을 맞아 죽었다.[문헌]고려사 高麗史節要 元史
홍다구 洪茶丘
1244년(몽고 태종 16년 고려 고종 31년~1291년(원 세조 28년 고려 충렬왕 17년) 고려인으로 몽고에 귀화한 무장 본명은 준기(俊奇) 다구는 아명(兒名)몽고말로 찰구이 (察球爾) 복원(福源)의 아들 군상(君祥)의 형 복원은 몽고 세력을 믿고 오랫동안 조국인 고려를 괴롭혔다 다구는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효용(驍勇)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1261년(몽고 중통 2년 원종 2년)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이 되어 군병을 데리고 봉주(鳳州鳳山)에 들어와서 둔전총관부(屯田摠管府)를 세웠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김방경(金方慶)과 더불어 진도에서 싸우고 다시 탐라(耽羅)에 건너가 난을 평정하였다.
홍군상 洪君祥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한 자. 아명은 쌍숙 본관은 당성(唐城) 복원(福源)의 다섯째 아들. 14세 형다구(茶丘)를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세조의 사랑으로 글을 배우고 1266년(원종 7년 ; 원 지원 3) 고려인 300호로 군단응ㄹ 만들어 통괄 하게 되었다. 만수산(萬壽山) 축성과 통주(通州) 운하 개척공사에 종사하였으며. 임연(林衍)이 반란을 일으키자 특눌극(特訥克)을 따라 이를 토평하였다. 고려에 들어와 충렬왕과 일본 정벌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세조가 죽자 승상 완택(完澤)과 의논하고 일본 정벌을 취소케 하였다. 원에서 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 다구는 고려에 대하여 많은 괴로움을 주었으나 군상은 도리어 고려를 도왔으므로 충렬왕이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공신 칭호를 주었다. - 홍다구(洪茶丘) [문헌] 고려사
홍중희 洪重喜
고려 말기의 민족반역자 복원(福源)의 손자 다구(茶丘)의 아들 일찍이 그의 조상은 몽고에 잡혀가 살았으며 할아버지 아버지 데에 이르서는 원나라 조정에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 민족반역 행위가 많았다. 중희도 원나라에서 무이;ㄴ으로 출세하여 요양행성의 우승(右丞)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그도 본국에 끼친 해가 많으니 1309년 충선왕 1년) 본국의 왕을 살해하려고 꾀하다가 귀양갔으며 또 본국인 고려를 말살시켜 원나라의 행성으로 삼자고까지 건의 하였다. -홍복원 홍다구[문헌]고려사 新元史
홍 진洪 縉
1541년(중종36년)~1616년(광해군8)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認齋). 퇴촌(退村) 시호는 단민(端敏) 본관은 남양(南陽) 치재(恥齋) 인우(仁祐)의 아들. 1570년(선조 3년) 문과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고. 직제학(直提學)때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진문사랑(進問事郞)으로 심문했다.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라 우부승지에 옮겼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셔.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랐으며 그 공으로 공신의 호를 받고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에 피봉되었다.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을 추증받았다. [문헌] 人物考
홍 규 洪 奎
고려 충숙왕의 장인.초명은 문계(文系) 시호는 광정(匡定) 본관은 남양(南陽) 진(縉)의 아들 원종 때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오자 당시 집권하고 있던 임유무(林惟茂一行의 아들)가 항거하었으므로 규는 유무의 매부(妹夫)였지만 대의를 위해 송송례(宋松禮)와 더불어 삼별초(三別抄)의 힘을 빌어 그를 죽였다. 이어 그 공으로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원제(元帝)로 부터 표창을 받고 본국의 일품직을 받아 좌부승선(左副承宣)에 이르렀으나 나라 일이 기울어지고 간신배가 날뛰니 벼슬에 마음이 없어져 사퇴.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에 승진되었으나 또한 사퇴하였다.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양가의 여자를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에 그 딸의 머리를 깎은 사건으로 가산이 몰수 되었고 해도에 귀양갔다. 후에 김방경(金方慶) 홍자번(洪子藩)등의 청으로 가산을 도로 찿고 사면되었으며 충선왕 때에 익산군에(益山君)에 피봉되었고 충숙왕 때에 추성진력정안공신(推誠陳力定安功臣).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상의첨의도감사(尙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죽었다.아들 융(戎)이 있으며 딸은 충숙왕의 비가 되었으니이가 명덕(明德) 태후이다.[문헌] 고려사
광정공 홍규(匡定公 洪奎 ; 부인은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 광주김씨>는 딸 둘이 충선왕비 충숙왕비가 되어 국혼(國婚)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 졌으며 충선왕 충숙왕의 장인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 ; 금자광록대부가 바꿘 품계로 2품께)로 상의 첨의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를 지내고 이어 벽상삼한공신(璧上三韓功臣; 공신당의 등 서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채록 되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삼중대광은 정 1품)의 품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익주(남양 ; 당성의 옛 이름)을 남양부(南陽府)로 승격하고 광정공의 식읍(食邑 ; 공이 많은 신하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 것)으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본관을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하게 되었다. 남양홍씨는 고려 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시대 와서는 잠시 수난을 당한 때도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가 남양홍씨 가문을 희유하기 위해 수교(受敎)로서 태사공의 후손은 누구나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 일을 할수 없도록 명을 내렸더고 하여 역대 조정에서도 추인 했다고 한다.
홍 융 洪 戎
생몰연대 미상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 첨의중찬 규(奎)의 아들 1316년(충숙왕 3년)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왕이 사냥을 즐기므로 자주 수행하였다. 밀직 나유(羅裕)의 딸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고 만호 황원길(黃元吉)의 딸과 재혼 하였으나 자색이 뛰어나 항상 방안에 두고 친척이라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충혜왕은 규(奎)의 딸 명덕태후의 소생이므로 융(戎)에게는 생질이 되는데 융(戎) 죽은 뒤 내수(內竪) 최화상이 황씨가 절색이라고 칭찬을 하자 충혜왕이 밤중에 그 집에 가서 사음(私淫)하고 금은기채백(金銀其綵帛))등을 주엇다 한다
홍언박 洪彦博
1309년(충선왕 1년)~1363년(공민왕 12년) 고려 공민왕 때의 대신 자는 중용(仲容
시호는 문정(文正)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규(奎)의 손자 1330년(충숙왕 17년) 문과에 급제 충목왕 때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고 공민왕이 즉위하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어 공신호를 받고 남양후에 피봉되었다.1361년(공민왕 10년) 문하시중에 보직되어 홍적이 침입하자 조정에서 피난의 의론이 일어낫으나 홀로 피난을 반대하다가 서북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자 할 수 없이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에 나가서 전쟁의 방침을 세워 서울을 희복하였다. 김용(金鏞)의 무리가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을 일으켯을 때에 아들 사범(師範)이 사람을 보내어 피하기를 권하고 또한 적이 문밖에 이르니 가족들이 피하기를 독초하였으나<한나라의 수상(首相)으로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느냐>말하고 태연하게 의관을 차리고 문을 연다음 적에 대하여<너희는 도적인데 무슨제지(帝旨)를 운운하느냐>꾸짓고 피살되었다.[문헌]고려사[저서]양파집
홍사우 洪師禹
?~1375년(우왕 1년) 고려 말기의 무장 시중 언박(彦博)의 아들. 경상도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합포(合浦)에 있으면서청렴하고 근면하였으며 해적이 삼일포에 침입하자 이를 격파였다. 후에 전라도도순문사에 보직되었으나 아들 윤(倫)이 공민왕을 죽인 사건에 연좌되어 원주에 귀양갔다가 우왕이 보낸 홍인철(洪仁哲)에게 아들 이(彛)와 함께 피살되었다. [문헌] 고려사
홍사범 洪師範
고려 말기의 관리 언박(彦博)의 아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다. 1372년(공민왕 21년) 명나라에 들어가 악기를 많이 얻어 왔으며. 뒤에 다시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문헌] 고려사
홍사석 洪師錫
?~1448년(세종 30년) 조선 세종 때의 무관. 시호는 장양(壯襄) 본관은 남양(南陽) 무예에 능하여 태종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세종 때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진응사(進鷹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압록강 연안에 잇는 야인이 강계지방에 침입하여 빈민을 살육하고 약탈을 감행하였는데 이를 시찰하기 위하여 현지에 나가 여연(閭延)절제사 김경(金敬) 강게절제사 박초(朴礎) 등이 방어에 태만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강계부사가 되어 야인을 소탕하고 전라도도절제사로 옮겼다가 뒤에 여연절제사가 되어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압록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회령진(會寧鎭)병마절제사를 거쳐 중추원부사에 승진하고 지사(知事)에 이르러 죽었다. 아들 백운(伯韻) 계운(季韻)의 형제가 있었다.[문헌]세종실록 昭代紀年
홍 관 洪 寬
고려 공민왕 때의 자제위(子弟衛)의 한 사람. 시중. 언박(彦博)의 손자 판합문사(判閤門事). 한안(韓安) 등과 더불어 자제위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받다가 뒤에 최만생(崔萬生) 홍윤 등과 더불어 공민왕을 죽였다. 관은 참형을 당하였고 일족이 모두 귀양가고 또는 관비(官婢)에 처치되었다. 자제위.공민왕시역사건 [문헌]고려사
홍 윤 洪 倫
?~1374년(공민왕 23년) 고려 말기의 역신(逆臣) 본관은 남양(南陽) 시중(侍中) 언박(彦博)의 손자. 공민왕이 아들이 없어 미모의 소녀들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만들어 궁중에 두었는데 그 중 1인인 홍윤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아이를 배게 했다. 왕이 알고 윤을 죽이려 하자 최만생(崔萬生) 등과 모의 밤중에 왕의 침실로 뛰어들어 취중에 잇는 왕을 죽이고 잡혀 처형당햇다.-자제위 공민왕 시역사건
[문헌] 고려사
홍 기 洪 器
고려시대 문신 1063년(문종 17년)문과에 급제하여 1077년 우보궐(右輔闕)이 되고 1098년(숙종 3년)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 1101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어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을 겸임했다.[문헌]고려사
홍 기 洪 機
고려 명종의 서자(庶子) 같은 명종의 서자인 선사(善思) 홍추(洪樞). 홍규(洪規).
홍균(洪鈞). 홍각(洪覺). 홍이(洪貽) 등과 함께 중이 되었다. 여러 소군들과 함께 위복(威福)을 누리며 뇌물을 받는 등 기강을 문란케 하여 비난을 받다가 1197년(명종 27년) 명종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페위될 때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문헌] 고려사
홍 선 洪 詵
?~1318년(충숙왕 5년) 고려 말기의 무신 시호는 관정(寬靖) 1292년(충렬왕 18년)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공물(貢物)을 바쳤으며. 이듬해에도 대장군(大將軍)으로서원에 파견되어 인삼을 바쳤다. 1298년 삼사좌사(三司左使). 밀직부사(密直府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1307년(충렬왕 23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원에 가서 고려에 행성(行省)을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사(謝)하고 돌아왔으며.1313년(충숙즉위) 강녕군(江寧君) 봉해졌다. [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홍길민 洪吉旼
1353년(공민왕 2년)~1407년(태종 7년)조선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남양(南陽) 중추원부사 보현9普賢0의 아들. 1376년(우왕 2년) 전법정랑(典法正郞)으로 급제. 일찍이 강릉도(江陵道) 안렴사가 되어 지산에 횡포하는 강호(强豪)들을 제압하며그들에게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었다.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양왕 초에 우사의대부(右司義大夫)가 되어 정몽주(鄭夢周)가 우상이 됨에 있어서 재상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고 좌부승지가 되어 개국의 공 2등에 채록되어 추성협찬공신(推誠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옮겨 자헌대부의위계에에 올라 남양군(南陽君)의 봉함을 받고 죽었다. 길민은 가세가 현귀하고 부요 하여 노비가 천여명이 있었으나 항상 검소하고 사치를 피하였다 아들 여방(汝方)이 있다.[문헌] 太祖. 太宗實錄
홍여방 洪汝方
?~1438년(세종 20년)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원(子圓) 호는 연생당 판서 길민(吉旼)의 아들.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되고 예문관검열과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이듬해에 복관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41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하였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형조.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조의 아전을 불법으로 책문하여 문와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에 유배 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 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 평안감사을 거쳐 지군총제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하여 파직 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에문관대에학에 임명되었으며 북경에서 돌아올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을 보내 두었다.
귀국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홍 예 洪 裔
동지추밀원 한림학사치사 .同知樞密院 翰林學士致士 배(配) 驪興閔氏.여흥민씨 高宗 戊戌年 卒.고종 무술년 졸
홍자번 洪子藩
1237년(고종 24년)~1306년(충렬왕 32년) 고려 중기의 명신. 자는 운지(雲之) 시호는 충정(忠正) 동지밀직(同知密直) 예(裔)의 아들. 과거에 급제 남경유수판관(南京留守判官)으로 나갔으며 이어 광주통판(廣州通判)을 거쳐 충청. 경상. 전라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쌓았다. 다시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들어와 원종 때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으며 원나라의 동정(東征)의 역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전라도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전함(戰艦)을 만들어 공을 세워고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어 이어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294년(충렬왕 20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었고 이어 우중찬(右中贊)에 올라 편민18사(便民十八事)를 지어 올렸으며 1298년 충렬왕 복위후 공신의 호를 받고 경흥군 개국후(慶興郡開國候)에 피봉되었다.1305년(충렬왕31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피봉되어 자의도평의사사(恣意都評議司事)가 되었고 이해 왕이 원나라에 갔는데 왕유소(王惟紹) 송인(宋麟)등의 무리가 충선왕의 곁에서 갖은 흉모(兇謨)를 자행하고 왕 부자를 이간하자 자번이 원에 들어가 두 왕을 모시고 돌아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세번 재상을 지냈으며 의론이 올바르고 대신의풍이 있었다.
뒤에 좌중찬상한벽상진충동덕좌공신(左中贊三韓璧上盡忠同德左功臣)에 봉해졌으며 충선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아들 경(敬) 순(順)이 있다.[문헌]고려사
홍 징 洪 徵
?~1388년(우왕 14년) 고려 우왕 때의 무신 권신(權臣) 염흥방(廉興邦)의 매부. 1377년(우왕 3년) 신주(信州.봉주(鳳州) 등지에 침입한 왜구와 싸웠던 양백익(梁伯益). 나세(羅世) 등이 원군을 요청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출전 왜적을 방어했다. 1384년(우왕 10년)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동북면(東北面) 사태를 조사하는 한편 동북면 부원수로 활약했다. 1388년 처남 염흥방이 사형당할 때 연좌 함께 사형되었다.
[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홍영통 洪永通
?~1395년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시호는 안민(安愍) 공민왕 때 음보(陰補)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 기용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순성경절협찬공신(純誠勁節協贊功臣)이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1383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며 1388년(우왕 14년)에 영(領)문하부사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파직당했다가 판문하부사에 복직 되었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다.
홍게정 洪係貞
1471년(성종 5년)~1514년(중종 9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숙간(叔幹) 아버지는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윤덕(潤德)이며 어머니는 신송주(申松舟)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단이면서 명성을 떨치다가 1513년(중종 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그뒤 승무원의 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등 한림과 사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드디어 예문관대교로 승진 하였다. 그러나 그뒤 44세로 죽었으므로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문헌] 국조방목 인물고
홍춘경 洪春卿
1497년(연산군 3년)~1548년(명종 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중(明仲)호는 석벽(石壁) 본관은 남양(南陽)대교(待敎) 계정(係貞)의 아들. 사마시를 거쳐 1528년(중종 23년) 문과에 급제.예조.병조 홍문관.사간원.성균관 등에 보직되었다.
때마침 궁중에 불온문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 박귀인(朴貴人)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여 그를 하옥시켰다. 사간 송순(宋純)은 혼자서 그의 불가함을 논하다가 배척되니 춘경을 송순을 구출하려다가 옥에 갇혔다.
이듬해 다시 등용되어 형. 공조정랑을 거쳐 1536년 중시(重試)에 들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황해도관찰사.공조참의를 지내고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에 굽히지 않고 평상 권세가의 집을 찾은일이 없으며 다만 송인수(宋麟壽)와 서로 내왕할 뿐이었다.[문헌] 人物考
홍춘경 가족사항 落花巖 洪春卿 詩
자(子) 홍천민(洪天民) 國破山河 異昔時(국파산하 이석시)
자(子) 홍성민(洪聖民) 獨留江月 畿盈虧(독류강월 기영휴)
손(孫) 홍서봉(洪瑞鳳) 落花巖畔 花猶在(낙화암반 화유재)
손(孫) 홍서익(洪瑞翼) 風雨當年 不盡吹(풍우당년 불진취)
부(父) 홍계정(洪係貞)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엣과 다르고
조부 홍윤덕(洪潤德) 홀로남은 강에 뜬달 몇번이나 차고 졌는가
증조부 홍경손(洪敬孫) 낙화암 언덕에 피는 꽃은
외조부 김기수(金期壽) 비바람 휘몰던 당시에 다 날리지 아니한 것이라네
처부 이맹우.김연(李孟友) 金演
홍징.홍상부. 홍지. 홍경손.홍윤덕. 홍계정.홍춘년. 홍춘경. 홍천민. 홍성민. 홍일민. 홍서봉. 홍명일 홍명원.
홍춘경의 후손 상신 6명 당상관 32명 문과급제 97명 조선 최고의 명문가
홍천민 洪天民
1526년(중종21년)~1574년(선조 7년)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달가(達可)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춘경(春卿)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서 공부하였으며 18세 때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년) 문과에 급제 벼슬은 도승지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그를시험한 시를 보고 경탄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문헌]人物考
홍서봉 洪瑞鳳
1572년(선조 5년)~1645년(인조 23년)조선 인조 때의 대신.자는 휘세(輝世)호는 학곡(鶴谷)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남양(南陽) 도승지 천민(天民)의 아들. 1594년(선조 27년) 문과에 급제 이조좌랑에 이르러 그의 명망을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인조가 반정하자 이조참의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이르러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채록되고 익년군(益寧君) 피봉되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병.이. 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러 1636년(인조 14년) 호란(胡亂)를 만나 왕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여러 번 적진(敵陳)에 드나들면서 화의를 성립시켰으며 전후 수습에 많은 힘을 썼다. 1641년(인조 19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에 승진 하였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어 죽었다. 문장이 능하였으며 더욱 시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을 떨쳤다.[저서] 학곡집 [문헌]선조.인조. 숙종실록남한일기月沙集.서파집大東野乘 인물고
홍명일 洪命一
1503년(선조 36년)~1651년(효종 2년)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만초(萬初) 호는 보옹(保翁) 본관은 남양(南陽) 영의정 서봉(瑞鳳)의 아들. 1633년(인조11년) 문과에 급제. 한림대교(翰林待敎)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김상헌(金尙憲) 등이 화의론(和議論)을 반대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는 날 왕을 따르지 않고 홀로 안동에 돌아가자 그를 처형하자는 논이 일어나자 부제학 이무(李无)등과 함께 그를 변호하였다. 벼슬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시와 필법에 뛰어났다. 49세의 일기로 죽으니
정사영사공신(靖社寧社功臣)에 채록.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안군(寧安君)에 봉했다. [문헌] 인조실록. 芸窩集(운와집)
홍성민 洪聖民
1536년(중종 31년)~1594년(선조 27년) 조선 선조 때의 문관 자는 시가(時可)호는 졸옹(拙翁) 시호는 문정(文貞)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춘경(春卿)의 둘째 아들. 진사에 1등으로 장원하고 1564년(명종19년) 명경시(明經試)에 급제 1575년(선조 8년) 호조참판에 이르러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종계변무(宗系辯誣)에 대하여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1580년(선조 13년) 병조참의로 이문(吏文)시험에 우등하고 가자(加資를 받았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1590년(선조 23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채록되고 익성군(益城君)피봉되었다. 이듬해에 심의겸(沈義謙)과 교의(交誼)가 두터운 한편 정철(鄭澈)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관작이 삭탈되어 부령(部寧)에 귀양갔다가 왜적이 서울을 함락 하였다는 말을 듣고 적소에서 설한령(薛罕領)을 넘어 행재소(行在所)에 갓다 다시 복관되어 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러 죽었다. 천성이 간결하고 담박하여 세속에 따르지 않았으며 훈작에 있어서 왕은 원훈(元勳)에 채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2등을 받았다. 문장이 화려하고 필법이 정결했다.
[문헌]명종.선조실록.서일집,상촌집.朝野僉載.국조방목.春坡日月錄.松江別集.藥圃集.西留齋集.해동명신록.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홍서익 洪瑞翼
1572년(선조 5년)~1623년(인조1년) 조선 광해군 때의 문관. 자는 익지(翼之) 호는 화옹(禾翁) 익성군(益城君) 성민(聖民)의 아들 1609년(광해군 1년) 문과에 급제 수안군수를 비롯하여 옥천 선산군수를 역임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분(分) 병조참의가 됐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피하여 외직으로 나가 가평군수가 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병으로 죽으니 후에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아들 명구(命耉)는 감사를 지내고 명하(命夏)는 영의정(領議政)을지냈다.[문헌] 광해군일기 인물고
홍명구 洪命耉
1596년(선조 29년)~1637년(인조 15년) 조선 중기의 관찰사 자는 원로(元老)호는 나재(懶齋) 시호는 충렬(充烈)본관은 남양(南陽) 참의 서익(瑞翼)의 아들. 8살레 능히 시를 지으니 백사(白沙) 현헌(玄軒) 같은 선비들이 칭찬하고 장차 큰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 인조 반정 후 청현(淸顯)을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서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이미 평양을 지나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격하여 적병을 추격 금화(金化
에서 적에게 패하여 주었다. 이조판서를 추증하였고 명구가 적병에게 굽히지 않고 순절한 터에 금화 고울 사람들이 사당을 지엇다. 뒤에 현종 때 의열(義烈)이란 사액(賜額)을 내렸으며 순조 때 그 자손 홍병륜(洪秉輪) 등의 주청을 쫒아 채천(遞遷)않은 은전을 베풀었다..[문헌]인조실록. 해동명신.록대동야승.청음선생집.낙천집.
홍중보 洪重普
1612년(광해군 4년)~1671년(현종 12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원백(遠伯) 호는 이천(梨川)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남양(南陽) 감사 명구(命耉)의 아들. 1635년(인조 13년) 진사에 뽑혀 강릉(康陵 ; 영릉(英陵)참봉 등을 지내고 1645년(인조23년) 문과에 급제 괴원(槐院)에 보직되어 이어 사국(史局). 춘방(春坊) ; 대각(臺閣)을 거쳐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오르고 선훈(先勳)을 이어받아 익흥군(益興君)에 피봉되었다. 다시 들어와 병.공. 예.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도승지를 네번 대사헌을 3번 대사간을 2번이나 지냇으며 뒤에 공.형. 예조판서를 4번이나 지냈다.1669년(현종 10년) 우의정에 올라 중망을 얻었는데 장령 조세환(趙世煥)이 지나치게 중상하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처벌될뻔 했지만 중보 애써 무사히 되니 그 도량이 큼에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일찍이 그는 숙위(宿衛)가 허술한 것을 우려하여 가내(家內)군병 중에서 날쎈 군사를 뽑아 친이 조련하여 정초군(精抄軍)이라 이름하고 임금이 거동할 때 수시로 호위케 하였다.이는 숙종 때 와서 금위영(禁衛營)으로 개칭되었는데 실로 중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문헌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陶谷集(도곡집
인물고
홍득기 洪得箕
1635년(인조 13년)~1673년(현종 14년) 조선 효종 때의부마(駙馬)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남양(南陽) 우의정 중보(重寶)의 아들. 관찰사 명구(命耉) 손자. 효종의 딸 숙안(叔安)공주를 취하고 익평부위(益平副尉)가 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익평위로 승진하였으며. 원종 때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 왔다. 효종. 현종. 양조에서 20년동안 대궐안을 출입하였으나 겸손하고 근신하여 일언 일사에 지탄을 받을 것이 없었다. 익평군 습봉을 받고 죽엇다. [문헌] 효종. 현종개수일록. 승정원일기
홍득우 洪得禹
1641년(인조 19년)~1700년(숙종 26년)조선 원종 때의 문관 자는 숙범(叔範 호는 수졸개(守猝齋) 본관은 남양(南陽)우의정 중보(重普)의 아들. 1662년(현종 3년) 사마시에 합격 음사로 통진(通津)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일찍이ㅡ 송준길(宋俊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준길이 오예(誤禮)문제로 관작의 추탈을 곧 사면되었다, 후에 장악사복주부(掌渥司僕主簿) 좌랑부사.첨지중원사를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로 발탁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작은 사건으로 파직되고 그해에 죽었다. 그는 풍체가 늠름하고 언행이 단하하여 사람들의 경애를 받았으며 9주군을 다스리면서 가는 곳마다 청렴하게 선정을 베풀어 재물을 저축하지 않았다. 사람의 중망을 얻어 공보(公輔)의 기대가 컸으나 1671년 이후 사로에 뜻이 없어서 여러번 요직에 임명을 받았지만 다 사절하였다.[문헌] 현종실록 인물고
홍치중 洪致中
1667년(현종 8년)~1732년(영조 8년)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사능(士能) 호는 북곡(北谷) 시호는 충간(忠簡)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득우(得禹)의 아들 민정중(閔鼎重)에게 배웠으며 1699년(숙종 25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들어서 ㅊ랑릉(昌陵)참봉, 의금부도사(都事)를 지냈으며 1706년(숙종 32년) 정시(庭試)에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내고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러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과 같이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정했다. 돌아와 옥당전랑(玉堂銓郞) 응교(應敎). 승지. 병참. 대사간을 역임하고 1717년(숙종43년) 전라관찰사로 나갔고 이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함경관찰사 부제학 도승지를 지냈다. 경종이 즉위하여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김일경(金一鏡)등의 도당에 몰려 홍주(洪州)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삭직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고 이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참찬을 역임하고 1726년(영조 2년) 우의정에 올라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옮겼다가 물러났으며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다시 들어와 좌의정에 복귀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항상 당론(黨論)을 국가의 화근으로 생각하고 왕의 뜻과 같이 당평론(堂平論)을 주장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하여 조정에 선지 30년 가산에 뜻이 없어 때때로 집사람이 끼니를 꾸어다 대는 형편이었다. [문헌]영종실록 승정원일기 知守齊集. 國朝人物志
홍명하 洪命夏
1608년(선조 41년)~1668년(현종 9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남양(南陽) 병조참의 서익(瑞翼)의 아들 1644년(인조 22년)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고 1646년(효종 4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예조참판.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제조(諸曹)판서를 거쳐 1663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에 올랐다, 1666년(현종 7년)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힐문(詰問)하자 왕이 근심할 때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논격(論擊)하여 돌려 보내 더욱 왕의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사퇴를 청했으나 왕은 영의정을 내렸으며 그해 61세로 죽었다. 숙종 때 시호를 내렸으며 순조 때 여주 기천서원에 배향하엿다. [문헌]인종.효종.현종실록.비변사첨록.송자대전.보게집.국조인물지
홍득귀 洪得龜
1653년(효종 4년)~?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자징(子徵) 호는 창곡(蒼谷) 본관은 남양(南陽) 영의정 명하(命夏)의 손자.벼슬은 목사를 지냇다. 산수(山水)를 잘 그렸으나 화단(畵斷)에 보면 고법(古法)을 본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편폭소경(片幅小景)을 즐겨 그려서 널리 애호되었다고 한다 [작품]수하어옹도 (樹下御翁圖)
[문헌]槿城書畵徵(근성서화징)
홍 형 洪 泂
1446년(세종 28년)~1500년(연산군 6년)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연(子淵) 본관은 남양(南陽) 경상좌도절도사 귀해(貴海)의 아들.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년) 문과에 급제. 뽑혀서 예문관검렬에 보직되고 승정원주서에 전임되었다.
사헌부감찰.예조좌랑.교서관.교리 등을 역임한 뒤 문.무겸비의 재사로 선출되어 경원(慶源)판관이 되었다. 그후 다시 조정에 들어와 장령. 사예.사간.통레 등에 임명되고장레원판결사에 승진되어 사심없이 정사를 처리했다.
부제학.동부승지로 있다가 우부승지로 승진했으며 때마침 연산군의 횡포한 정치가 시작되기 직전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며 죽었다. 아들 언필(彦弼)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문헌]인물고
홍언필 洪彦弼
1476년(성종 7년)~1549년(명종 4년) 조선 초기의 명신 자는 자미(子美)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문희(文僖) 본관은 남양 승지 형(泂)의 아들. 1504년(연산군10년)문과에 급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진도에 귀양갔다가 중종반정 후 사면되어 전시(殿試)에 합격되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에 지목되어 옥에 갇혔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명으로 풀려 나옸다. 이어 이.호.병.형.4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올랐으나 김안로(金安老)와 틀려 남양에 하향했다가 김안로 실각 후 다시 호조판서로 들어와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가 좌의정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명종 때에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어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피봉되었으며 74세의 일기로 죽으니 시호를 내리고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문헌]海東名臣錄
홍섬 洪暹
1504년(연산군 10년)~1585년(선조 18년)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제(忍齊) 시호는 경헌(景憲)본관은 남양(南陽) 영의정 언필(彦弼)의 아들. 어머니는 송(宋)씨로 영의정 질의 딸 1531년(중종 36년) 문과에 급제 이조좌랑(吏曹左郞)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1535년(중종30년) 김안로(金安老)의 무소로 흥양현(興陽縣)에 귀양갔다가 3년만에 석방되었으며 1552년(명종 7년)염근인(廉謹人)으로 뽑혀 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에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이양(李樑)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가 다시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대제학을 지냈다,1571년(선조 4년) 좌의정이 되어 궤장(机杖)을 받고 영의정에 승진하여 세번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經書)에 깊었다. [저서]인재집
[문헌]중종.선조실록.해동명신록 연려실기술 국조방목.국조명신록.경년일기.
栗谷集(률곡집)
홍언광 洪彦光
자는 군하(君夏)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백형 언필(彦弼)과 함께 진도로 유배 되었다가 1506년에 풀려 났으며 1501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13년(연산군 8년)참봉에 이르렀다. 그후 의금부도사 직장 및 공조, 형조. 좌랑을 거쳐 도총부경력등을 역임하였다.
홍 담 洪 曇
1509년(중종 4년)~1576년(선조 9년)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자는 대허 시호는 정효(貞孝). 본관은 남양(南陽) 정랑 언광(彦光)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언필(彦弼)의 조카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중종 30년) 문관에 급제. 정자를 비롯하여 명종 때 효자로서 이조좌랑에 특진하고 1551년(명종6년) 염근인(廉謹人 ; 淸簡人)에 뽑혀 21명이 왕의 사연(賜宴)에 참여하는 영광을 받았다. 155년(명종 10년) 사응사로 명나라에 갔다왔으며 선조 때 지금의부사(知禁義府事)를 지냈고 좌참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러 죽었다. 천성이 강직하고 근면하였고 권세에 아부하는 일이 없었으며 벼슬에 나가서는 청렴하고 근면하였고 퇴근하면 집에와 문을 닫고 독서에 힘스고 교제를 피하였으며 항상 생활에 검소하고 효성이 독실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읍인(邑人)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문헌]중종.명종.선조실록.인물고.연려실기술 국조방목
홍희남 洪喜男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자는 자열(子悅).본관은 남양(南陽)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대일관계에 있어 난관에 봉착하면 반드시 희남이 파견됐다. 이로써 1년 동안 3계급씩 특진하여 나이 50십이 못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본에 여섯번 명나라에 두번 다녀왔고 1649년 인조의 국상을 당했을 때 일본의 조제사(弔祭使)가 진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서 그 절차를 정했으며 그뒤 일본사신이 오게 된 전례를 만들었다. 1659년 문위사(問慰使)에 수행하여 유황(硫黃)의 산화법을 배워 우리나라에 전하였다.
[문헌] 通文館志
홍경주 洪景舟
?~1521년(중종 16년)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제옹(濟翁). 시호는 정희(靖憙)경렬(慶烈) 본관은 남양(南陽) 임(任)의 아들, 중종 후궁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1501년(연산군 7년)에 등용 1506년(연산군 12년)에는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이 되고 1507년(중종 2년)에는 추성보사정난공신(推誠保社定難功臣)이 되었다. 이조판서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특히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김전(金詮) 등과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기묘사화 [문헌] 중종실록 新增東國與地勝覽. 國朝傍目.
홍희빈(洪熙嬪
조선 중종 후궁 경주(景舟)의 딸 1519년(중종 14년) 남곤(南袞). 심정(審貞)등의 훈구재상(勳舊宰相)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을 일으켰다.-기묘사화
[문헌] 중종실록
홍경림 洪景霖
1510년(중종 5년)식년시 병과 2 자는 윤경 본관은 남양(南陽) 시호(諡號) 봉호(封號) 정국공신(靖國功臣) 익원군(益原君) 가족사항 부(父) 홍임(洪任) 생부(生父) 조부(祖父) 홍정(洪淀) 증조부(曾祖父) 홍척(洪陟) 외조부(外祖父) 허손(許蓀) 처부(妻父) 여충보(呂忠輔) 형(兄) 홍경주(洪景舟) 손(孫) 홍흔(洪渾)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품계(品階) 관직(官職)
공조판서(工曹判書)
홍봉세 洪奉世
1498년(연산군 4년)~1575년(선조 8년)조선시대의 문관 자는 흠중(欽中)본관은 남양(南陽) 공조판서 경림(景霖)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에게서 배웠으나 기묘사화(士禍)에 관련되어 귀양갔었다. 다시 벼슬에 나가 장례원판결사 남양(南陽) 괴산(槐山)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여주(驪州)목사에 이르렀다. 어디가든 청렴하고 근면하여 공평하게 다스렸으므로 관속(官屬)들이 두려워서 불의한 일을 하지못하였다.
홍 온 洪 溫
사마시에 합격. 자는 경휘 1568년(선조1년)원릉참봉 이르럿으며 뒤에 직장 장원서장원을 지냈으며 아들 홍가신(洪可臣)의 공으로 영의정 추증 되었고 익령부원군(益寧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홍가신 洪可臣
1541년(중종 36년)~1615년(광해군 7년) 조선 선조 때의 공신.자는 흥도(興道)호는 만전(晩全) 본관은 남양(南陽) 장원(掌苑) 온(溫)의 아들. 아직 성동이 되기 전에 성인의 의풍이 있었으며. 사서삼경과 백가어에 정통하였고 또 필법과 시문에도 능하여 이름이 높았다.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1567년(명종 22년) 진사에 합격 강릉 참봉이 되었으며. 1573년(선조 6년)산림조행(山林操行)의 선비로 추천을 받아 예민주부를 거쳐 형조좌랑 지평을 역임하고 안산군수로 나가 선치를 하였으며. 수원부사가 되어 표창을 받았으나 정여립(鄭汝立)과 교정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홍주목사(洪州牧使) 보직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평정하고 청난(淸難)의 공신 1등에 채록되어 분충출기합모적의청절(奮忠出氣合謨迪毅淸節) 공신의 호를 받았다. 광해군 때에 영원군(寧原君의 봉함을 받고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판결사에 올랐다. 한성우윤겸금오당상(金吾堂上)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 아산(牙山)에 돌아가 죽었다. [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일기.만금선생문집. 인물고
홍가신의 書 우측부터
위애 추향만 늦가을 향기 좋기도 해라
준전절 일지 술잔 앞에 한 가지 꺽어두었네
해운 천리 격 바다 구름 천리 먼 곳이라
무로 증상사 더욷 더 그리워할 길이 없도다
홍 지 洪 智
무학대사의 소점지 남양홍씨 묘역 홍지(洪智)묘 양주군 남면 상수리 고려말 충신 본관은 남양(南陽) 홍지(洪智)묘는 우학대사가 나라를 편안하게 할 좋은 터로 지목하고 홍지의 묘를 소점 했다고 하며 묘역에 수십기 홍씨 묘가 있다 수십기 묘중에 홍지(洪智) 묘가 지방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홍경손 洪敬孫
1409년(태종 9년)~1481년(성종12년) 조선 성종 때의 문관 자는 길보(吉甫) 호는 우국재(右菊齋) 본관은 남양(南陽) 사재감직장(司宰減直長) 지(智)의 아들. 고려의 종실 수연(壽延)대군 왕규(王珪)의 외손 사마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문과에 급제. 교리.장령.판사. 등의 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겸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재예가 뛰어났으나 왕(王) 외손이므로 세상에 잘 용납되지 못하였다. 시보다 문을 더 잘하여 여지승람(與地勝覽)에 그의 글이 실려있다. [저서]충음시고(蟲吟詩稿) [문헌] 인물고
홍 식 洪 湜
1559년(명종 14년)~1610년(광해군 2년)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중청(仲淸)호는 서호(西湖) 현감 여겸의 아들. 1588년(선조 21년) 문과에 급제 검열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대사헌을 역임 1606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당시 소북(小北)에 속하여 대북(大北)의 탄압에 앞장섰다. 1608년 광해군 즉위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문헌]선조실록.광해군일기
홍우경 洪友敬
1590년(선조 23년)~1625년(인조 3년)조선 선조의 부마(駙馬) 자는 경부(
敬夫) 본관은 남양(南陽) 참판 식(湜)의 아들.선조의 딸 정인(貞仁)옹주와 혼인하여 당성위(唐城尉)의 봉작을 받고 누진하여 봉헌대부(奉獻大夫)에 이르렀다. 옹주 혼인하면 저택을 하사하는 예가 있었는데 우경은 굳이 사양하였다. 성질이 검소하여 사치를 피하였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울분하여 침식을 폐하고 정청(庭請)에 나가지 않고 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 한찬남(韓纘男) 등의 죄를 성토하였으므로 부자가 함께 삭직 당하고 귀양갔다. 인조가 반정하자 복관되고 승자(陞資) 하였으나 항상 우울한 심정으로 집에서 국사(國史)를 즐기다 죽었다. 특히 유록대부를 추증하였다.[문헌]在澗集(재간집)
선조의 사위인 정간공 홍우경(洪友敬) 1590년(선조 23년)~1625년(인조 3년)과 의부인 정인옹주(貞仁)의 墓 충북 진천군 만승면 실원리 산 50~2
홍명원 洪命元 1573년(선조 6년)~1623년(인조 10년) 조선 광해군 때의 문관 자는 낙부(樂夫)호는 해봉(海峰)본관은 남양(南陽) 진사 영필(永弼)의 아들.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 괴원(槐院). 옥당(玉堂)을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가 설서. 사서에 옮겼으며 헌납(獻納)으로 권행(權幸)을 비방하다가 몰려나 북도도사(北道都事)로 3년 동안을 지내고 돌아와 춘관랑(春官郞)이 되었다. 이어 죽산(竹山)부사. 정주(定州). 의주(義州)목사를 역임 승지로 들어왔다가 양친(養親)하기 위해 광주목사가 되어 치적이 나타났으므로 표창을 받았다. 때에 광해군의 금나라와의 수호관계과 명나라에 발각되자 그는 사신으로 건너가 이를 무마시키고 돌아왔으며 금나라에서 누차 조선을 위협하는데 대하여 조의가 분분하였으나 명원이 단연 배금(排金)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 흉도들이 서울근방에서 난을 일으켜려 하자 명원이 기보(畿輔)관찰사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그는 조정에 선 지 27년동안 마음을 다하여 직책에 충실하였으며 위형(威刑)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다 정복하였다. 광해군 때에 권문세가들이 인척관계를 맺기를 청하였으나 다 거절 뭇사람의 격노를 받았으나 추호도 움직이지 않아 세상에서 장덕군자(長德君子)라 일컬었다. 글은 양한(兩漢)을 주로 하고 시는 성당(盛唐)을 전공하였으며 당시 문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 그의 학행에 탄복하였다. [문헌]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물고 홍처윤 洪處尹 1607년(선조 40년)~1663년(현종 4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 1639년(인조 17년) 동생 처대(處大)와 같이 문과에 급제 검열로부터 감찰에 승진하고 홍산(鴻山) 현감으로 있다가 시강원의 문학(文學)으로 조정에 불리어 들어와서 사퇴하였다. 효종 즉위년에 정랑에서 전임되고 그때 김자점(金自點) 이 마구 권세를 부리자 처윤은 그의 출척을 주청했다. 교리로 있을 때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고 배처된 유신(儒臣)을 옹호하여 그의 부당함을 논하다가 자기가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후 현종이 세자로 있을 무렵 용서를 받고 다시 기용되어 직강(直講) 보덕(輔德)을 겸임하였으며 현종 때에 들어서 형조참의로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에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하였다.[문헌] 인물고 홍광일 洪光一
1738년(영조 14년)~1822년(순조22년)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백승(伯承) 호는 화서(華西) 본관은 남양(南陽) 명원(命元)의 아들. 생원에 합격하고 1776년(영조 52년) 문과에 급제 괴원에 들어가 성균전적. 형. 이조좌랑. 지편. 장령. 정언. 흡곡(翕谷) 현령. 강원도사. 경성판관 등을 역임하고 돈녕부도정에 이르러 팔질(八질)로서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며. 동지중추부사. 한성좌윤을 거쳐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러 죽었다. 천성이 정숙하여 서재에 꿇어앉아 열독하고 만년에 역리(易理)를 연구 제헌의 글을 탐독하여 박학다식에 이르니 원근학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어른들에게는 빙직으로 산업을 늘릴 것을 말하고 자제들을 보고 효제(孝悌)의 도를 가르쳐 주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환심을 받았다. 서사에 능하고 문사에 뛰어나 어떠한 큰 문집이라도 붓을 들면 능히 완성하였다.[저서]관상편(觀象篇) 유고(遺稿) 3권 [문헌]매산집(梅山集) 홍처후 洪處厚 조선 효종 때 문신 자는 덕재(德載)호는 성암(醒菴) 본관은 남양(南陽) 경기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 18세에 진사에 합격.재량(齋郞)에 보직되고 또 세마(洗馬). 별좌(別坐) 금오량(金吾郞)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다 사퇴하였다.1629년(인조 7년)정시(庭試)에 급제. 뽑혀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정언(正言)이 되었다. 그후 참판(參判)에 이르러 85세로 죽었으며. 효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문헌] 人物考 홍 성 洪 晟 1702년(숙종 28년)~1778년(정조 2년)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자는 광국(光國)본관은 남양(南陽) 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의 아들. 1723년(경종 3년) 문과에 급제 승정원에 들어가 여러 벼슬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기사(耆社)에 들어가 죽었다. 문장과 시사가 고전적 이었으며 만년에 더욱 조에가 깊엇고 시체(詩體)가 더욱청아하고 고조(古調)의 미가 있었으며 필법이 또한 능숙하였다.[문헌]영조실록. 海左集. 홍수량 洪受亮 1627년(인조 27년)~1697년(숙종 23년) 조선 숙종 때의 문관 자는 청숙(淸叔) 호는 계헌(癸軒)본관은 남양(南陽) 경기관찰사 처후(處厚)의 아들. 현종 때 37세에 강릉(康陵)참봉이 되어 첨정(僉正) 순흥부사를 역임하였다. 수량이 벼슬에 나가 정치를 공정하게 했으며 번거로움을 피하고 대강과 요령에 따라 사물을 처리하고 위험보다 덕으로써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 하였다. 만년에 산국에 단니면서 요로에 나가지 않았고 성밖에 거주하며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더욱이 시부(詩賦)에 뛰어났고 또한 해서(楷書)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문헌]陶谷集(도곡집) 홍우서 洪禹瑞 1662년(현종 3년)~1716년(숙종 42년) 조선 숙종 때의 문관. 자는 중웅(仲熊) 호는 서암(西巖) 본관은 남양(南陽) 경기관찰사 명원(命元)의 증손 순흥부사 수량(受亮)의 아들 20세에 상사(上舍)에 합격하고 1702년(숙종 28년)문과에 장원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청근(淸近)에 있어서 간원(諫垣) 문관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다. 옥당에 올라 형. 병조의 참지를 역임 자칭하여 동래부사로 나갔다. 이어 대사간으,로 들어와 게주(啓奏)에 널리 활약하였으며 노. 소론이 일어나자 숙종이 교서에 거역하여 파직되고 무안(務安)에 귀양갔다. 이해 겨울에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모든 권신(權臣)들이 그가 전판이 된 걸 꺼려 서주(西州) 수령으로 몰아냇으나 잘 다스리니 읍이 창설된 이후에 치적이 제일이라 칭송받았다. 수찬으로 지사(知事) 조태채(趙泰采) 권무경(權懋經) 등의 죄형이 너무 가볍다고 논란하고 사직되어 물러 났다가 다시 교리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조좌랑에 옮겨 승지에 특임되어 죽엇다. 경사에 밝고 성리의모든 글을 연구하여 심신에 체험한 것으로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논주에도 주자서(朱子書)에서 얻은 것을 많이 인용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필법이 또한 묘경(妙境)이 이르렀다.[문헌] 숙종실록 인물고 홍수헌 洪受憲 ?~1711년(숙종 37년)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자는 군택(君澤)호는 담포(淡圃) 본관은 남양(南陽)춘경(春卿)의 5대 손. 관찰사 처후(處厚)의 아들 현종 때 진사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년) 문과에 급제. 수찬으로 어사가 되어 북도를 순찰하여 탐관오리를 숙청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688년(숙종 14년) 헌납으로 이조판서 박세채(朴世采). 남구만(南九萬)을 구하려다 북청(北靑) 판관으로 몰려났다.가 곧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와 사예(司藝)의 취임을 거부. 무안에 귀양갔다. 1694년(숙종 20년) 인현(仁顯)왕후의 복위도청(復位都廳)에 기용되어 가자되고 대사간에 옮겨 장흐재(張希載)의 죄를 논박하고 대사성으로 자원 이천부사로 나가 선치하였으므로 읍인이 덕을 사모하여 철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이르러 조태억(趙泰億)이 이동언(李東彦)에 대하여 무고한 사건에 강경한 탄핵을 하였는데 소를 올려 태억의 망동을 엄책하였다 좌참찬에 이르러 죽었다. [문헌] 현종. 숙종실록 국조인물지 知守齋集(지수재집). 홍처윤 洪處尹 1607년(선조 40년)~1663년(현종 4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 1639년(인조 17년) 동생 처대(處大)와 같이 문과에 급제 검열로부터 감찰에 승진하고 홍산(鴻山) 현감으로 있다가 시강원의 문학(文學)으로 조정에 불리어 들어와서 사퇴하였다. 효종 즉위년에 정랑에서 지평으로 전임되고 그대 김자점(金自點)이 마구 권세를 부리자 처윤은 그의 출척을 주장했다. 교리로 있을 때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고 배척된 유신(儒臣)을 옹호하여 그의 부당함을 논하다가 자기가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후 현종이 세자로 있을 무렵 용서를 받고 다시 기용되어 직강(直講). 보덕(輔德)을 겸임하엿으며 현종 때에 들어서 병조참의로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에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하였다. [문헌] 인물고 홍수주 洪受疇 1642년(인조 20년)~1704년(숙종 30년) 조선의 화가 자는 구언(九言)호는 호은(壺隱) . 호곡(壺谷)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觀察使) 처윤(處尹)의 아들.1662년(숙종 8년) 문과에 급제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시문(詩文)도 잘했으며 서화(書畵)도 유명해서 그 딸이 빌려온 치마에 장을 업질러 울상이 된 것을 보고 그 치마에다 포도를 그려 팔아 새비단을 몇필 사 왔다는 일화까지 잇을만큼 매죽포도(梅竹葡萄)를 잘 그렸다.[작품]葡萄圖(포도도)[유필]태종헌릉신도비(太宗獻陵神道碑) ; 廣州재[문헌]숙종실록 東國文獻畵家編(동국문헌화가편) 홍처대 洪處大 1609년(광해군 1년)~1676년(숙종 2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일(仲一)호는 역헌(轢軒) 본관은 남양(南陽) 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 2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 때 문과에 제4위로 형 처윤(處尹)과 같이 급제.항원전적(翰苑典籍) 등 요직을 거쳐 벼슬이 병조. 형조참판. 도승지. 한성우윤에 이르러 특히 자헌(資憲)대부에 승진했다. 그후 중추부사로서 영남지방에 내려가 무과(武科)를 분장(分掌)하다가 군위(軍威)에서 객사하였다. [문헌] 인물고
홍무적 洪茂積
1577년(선조10년)~1656년(효종 7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면숙(勉叔) 호는 백석(百石)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남양(南陽) 광해군 때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내세울 때 이를 반대하다가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갔고 9년만에 인조반정이 있어 창녕현감(昌寧縣監) 장령(掌令)을 지냈고 사간. 승지. 참의를 거쳐 1643년(인조21년) 병조참판에 특임 이어 대사헌에 올라 이듬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47년(인조 25년) 신생의 옥(獄)에 연좌되어 정의(旌義)에 귀양갔다가 곧 갑산(甲山)에 다시 이듬해 홍천(洪川)으로 옮겼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다시 대사헌에 올랐다. 그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656년(효종 7년)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라 우참찬이 되어 그해 죽었다. [문헌]인조효종실록 연려실기술 宋子大全
홍봉세 洪奉世
1498년(연산군 4년)~1575년(선조 8년)조선시대의 문관 자는 흠중(欽中) 본관은 남양(南陽)공조판서 경림(景霖)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에게서 배웠으나 기묘사화(士禍)에 관련되어 귀양갔었다. 다시 벼슬에 나가 장례원판결사 남양(南陽). 괴산(槐山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여주(驪州)목사에 이르렀다. 어디가든지 청렴하고 근면하여 공평하게 다스렸으므로 관속(官屬)들이 두려워서 불의한 일을 하지 못하였다.
홍봉조 洪鳳祚
1680년(숙종 6년)~1760년(영조 36년) 조선 영조 때의 문관 자는 우서(虞瑞) 호는 우산(盂山)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남양(南陽) 유촌(柳村) 종록(宗祿)의 손자 강원감사 숙(琡)의 아들. 1725년(영조 1년)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서도에 능하였으며 여주(驪州)의 좌의정 민정중(民鼎重)의 비문(碑文 ; 李締撰) 좌의정 이세백(李世伯)의 비문 경주(慶州)의 신라 시조 왕묘비(新羅始祖王朝碑 ; 英祖己卯 건립.趙觀彬撰) 영의정 신완표(領議政 ; 朴弼周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진도비(洪振道碑) .주부(主簿) 서문택(徐文澤)의 비갈(碑碣 ; 李締撰)등을 썼다.[문헌]경종. 영조. 순조실록 號譜 朝鮮金石總覽
홍붕 洪鵬
1539년(중종34년)~1597년(선조 30년) 조선 선조 때의 문관 자는 천유(天遊) 호는 경제(敬齊) 본관은 남양(南陽) 주부 거방(巨舫)의 아들 여러 벼슬을 거쳐 제용첨정(濟用僉正)에 이르러 죽었다. 현종 때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함께 모셨다.
[문헌]俎豆錄
홍상재 洪尙載
?~1391년(공양왕 3년) 고려 말기의 문신 시중 채하중(蔡河中)의 사위 하중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사면되어 돌아와 여러 벼슬을 거쳐 에부상서 이르렀다. 1370년(공민왕 19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건너가 태조의 즉위를 축하 여 명의 국교를 맺었으며 뒤에 명나라에 억류되어 먼 곳에 귀양갔다가 1384년(우왕 10년)정몽(鄭夢周)가 사신으로 갔을 때에 풀려 돌아왔다. 문하평리에 이르러 당산군(唐山君)에 피봉되었다. [문헌]高麗史
홍서주 洪敍疇
1499년(연산군 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도원(道源)시호는 정민(貞敏) 1521년(중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검상(檢詳). 장령(掌令)을 역임. 1533년 작서(灼鼠)의 변(變)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유배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金安老)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와 1543년 응교(應敎)가 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감찰사로 부임. 1545년(명종 즉위)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문헌] 중종. 명종실록. 國朝人物考
홍석귀 洪錫龜
1621년(광해군 13년)~1679년(숙종 5년)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국보(國寶)호는 동호(東湖) 또는 구곡산인(九曲山人) 지리재(支離齋) 본관은 남양(南陽) 진사 준(浚)의 아들. 10여세 때부터 글씨를 잘써서 이웃의 편액(扁額)을 썼으며 효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불러 시험하고 신(宸)을 벗어 하사하였다.선생이 없어 독서에 힘써 천문학의 이치에 정통하여 나무로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성관(星官)들의 연구에 표본이 되었다. 취미대사(翠微大師)의 수초비(守初碑 ; 顯宗己酉에 세우고 金錫胄가 撰함) 해주(海州)의 정랑(正郞) 박여롱(朴汝龍)의 비문(碑文 ; 肅宗乙卯에 세우고 閔衡重이 撰함) 양근(揚根)의 홍윤(洪潤)의 묘비 등을 썼다. [문헌]畏齋集(외재집) 三淵集(삼연집) 朝鮮金石總覽
홍석 洪錫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공숙(公叔) 호는 손우(遜愚)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 태백산 춘양동(春陽洞)에 은거 학문을 닦았다. 후에 김수항(金壽恒) 송시열(宋時烈)에게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참봉(參奉)이 되고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에 이르고 77세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상제요록(喪祭要錄) [문헌]일성록 藥坡漫錄
홍석기 洪錫箕
1606년(선조 39년)~1680년(숙종 6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洲) 시호는 효정(孝定) 1641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고 정언(正言)으로 만언소(萬言疎)을 올려 시사(時事)을 논하여 해운판관(海運判官)에 좌천되었다. 1654년(효종 5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기용괴었다가 인동부사(仁同府使)로 부임. 그후 남원부사(南原府使)등 여러 외직(外職)을 지내고 사직 청주에서 머물면서 화양(華陽)에 와 있는 송시열(宋時烈)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저서] 만주유집(晩州遺集) [문헌] 인조 효종실록 國朝人物考
홍선양 洪善養
1727년(영조 3년)~1798년(정조 22년)조선 정조 때의 문관 자는 사호(士浩) 본관은 남양(南陽)매산(梅山) 직필(直弼)의 조부 1754년(영조 30년) 생원에 합격하고 늦게 강릉 참봉이 된 후에 여러 벼슬을 거쳐 청주 목사에 이르렀다. 이어 장용영(壯勇營) 종사관. 상의원첨정(尙衣僉正)을 거쳐 선혜랑(宣惠郞)이 되어 죽었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명예를 구하지 않고 덕애를 베풀렀으며 사람을 대하는데 귀천이나 천소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만년에 서화를 좋아하여 화죽(花竹)을 잘 그렸으며 언행에 근신하여 일찍이 인물의 비판이나 정치의 득실을 말할 일이 없었고 권문에 아부하거나 출입하지 않았다. 더욱이 재물을 멀리하여 부당한 물건은 사소한 것이라도 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문헌]정조실록 매산집(梅山集)
홍세공 洪世恭
1541년(중종 36년)~1598년(선조 31년)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중안(仲安)호는 봉계(鳳溪) 본관은 남양(南陽)군수 보(甫)에 아들 1573년(선조 6년)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평안도조도사(平安道調度使)로 군량(軍糧)을 조달하는데 공이 있었으며등창을 앓아 죽었다. 이조판서를 추증 하였고 뒤에 다시 영의정을 추증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봉했다. [문헌] 선조실록. 鳳溪逸稿(봉계일고) 國朝榜目.國朝人物志
홍세영 洪世英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중실(仲實) 본관은 남양(南陽)감사(監司) 세공(世恭)의 형 1568년(선조 1년)생원이 되고 1572년(선조 5년) 문과에 급제 승지(承旨)를 지냈다.[문헌]선조실록. 국조방목
홍세태 洪世泰
1653년(효종 4년)~1725년(영조 1년)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본관은 남양(南陽) 익하(翊夏)의 아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시에 능했다. 1682년(숙종 6년)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시묵(詩墨)을 얻고자 하는 자 많아 써 주니 보배로 알았다. 한다.연나라 사신이 글에 능해 조선의 시를 보자 할 대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시를 지어 보였고 그후 이문학관(吏文學官).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을 지냈다. 만년에 바다와 산을 유랑하며 풍월을 즐기고 돌아와 병들어 죽었다.[저서]해동유주(海東遺珠) [문헌] 人物考
홍숙 洪淑
1464년(세조 10년)~1538년(중종 33년) 조선 초기의 명신 자는 순부(純夫) 시호는 장희(莊僖) 본관은 남양(南陽)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익생(益生)의 손자 1496년(연산군 2년) 문과에 급제 이조참의를 지내고 중조 조에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당원군(唐原君)에 피봉 되었다. 뒤에 예조판서 좌찬성에 올랐으나 김안로(金安老)를 다시벼슬에 올림을 반대하여 과천(果川)에 물러갔다.[문헌]중종실록 인물고
홍순 洪淳
?~1377년(우왕 3년) 고려 공민왕 때에 사신으로 원나라에 건너갔는데 마침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삼고 연경(燕京)에 있는 고려사람들로 하여금 다 따르게 하였으나 순은 이에 응치 않고 오랫동안 연경에 잇어 식량이 떨어져 생활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지켰다. 후에 본국에 돌아와 첨의평리(僉議平理)에 특임되어 우왕 때에 죽었다. [문헌] 고려사
홍순로 洪純老
1416년(태종 16년)~1474년(성종 5년) 조선 세조 때의 공신 시호는 안양(安襄) 본관은 남양(南陽)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약(約)의 서자(庶子) 완력이 충출하여 궁마(弓馬)를 잘 하였는데 세종의 특명으로 내금위(內禁衛)에 배속된 후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을 때 세조를 따라 서울에 갔고 1453년 계유정란(癸酉靖亂) 때에 공신의 호를 받았다. 1464년(세조 9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오르고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문헌] 端宗. 世祖 성종실록
홍순목 洪淳穆
?~1884년(고종 21년) 조선 고종 때의 대신 자는 희세(熙世) 호는 분계(汾溪) 본관은 남양(南陽) 승지 종원(鍾遠)의 아들. 1844년(현종 10년) 문과에 급제 고종 초에 황해도관찰사.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을 거쳐 1872년(고종 9년) 영의정에 올라 영돈녕부사를 겸했다. 그는 당시 보수적 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여 미국과의 국교를 반대하였으며. 이듬해 대원군의 실각으로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로 물러나 있다가 1882년(고종19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에 복직 이듬해 관제개혁에 따라 김병국(金炳國)과 함께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으며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 그의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참여하여 피살되자 관작의 삭탈을 당하고 이어 자살하였다. 1894년 (고종 31년)에 복관되었다.
[문헌]일성록. 승정원일기.本朝紀事
홍만식 洪萬植
1842년(현종 8년)~1905년(광무 9년) 조선 말기의 지사(志士)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남양(南陽) 영의정(領議政) 순목(淳穆)의 아들. 1866년(고종 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한원(翰苑)에 들어가 옥서(玉署). 은대(銀臺)은 거쳐 여주목사로서 치적이 있었고 1884년(고종 21년)에 동생 영식(英植)이 김옥균(金玉均) 등과 같이 모반(謨叛)을 일으키고 스스로 우의정에 앉자 아버지 순목은 자살하고 만식은 아버지의 만류로 죽지 않았으나 자수하여복역하다가 다음해에 석방 1905년(광무 9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흥분한 나머지 음독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이 애석히 여겨 특별히 숭정참정대신(崇政參政大臣)을 추증하고 궁내부(宮內府)에 명하여 장례를 돌보게 하였다.[문헌] 승정원일기 騎驪隨筆(기려수필)
홍영식 洪英植
1855년(철종 6년)~1884년(고종21년)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남양(南陽) 영의정 순목(淳穆)의 아들. 1879년(고종 16년) 문과에 급제 옥당(玉堂). 대교(待敎).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참판(參判)이 되었다. 조준영(趙準永). 어윤중(魚允中) 등과 같이 일본을 시찰하렸고 1883년(고종 20년) 특사로 미국에 부임 해외사정에 밝았으며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독립당을 조직 사대당(事大黨)을 일소하고 청의 기반을 벗어나 일본의 힘을 빌려 제정(諸政)의 개선을 기도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우정국(郵政局)을 창설하고 총판(總辦)이 되어 그 개국연(開局宴)에 6조 판서와 대관을 초청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피살되었다. 갑오경장(甲午革新)때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등의 상주(上奏)로 죄명을 썻고 관(官)에 복귀되어 1910년(융희 4년)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갑신정변
홍순학 洪淳學
1842년(현종 8년)~? 조선 말기의 문장가 1866년(고종 3년)에 주청사(奏請使) 유후조(柳厚祚)의 서장관(書壯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한<연행가(宴行歌)>란 장편시를 지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1884년(고종 21년) 인천항감리(仁川港監理) 이듬해 인천부사를 겸했으며 그뒤 협관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저서]연행가 [문헌]일성록 승정원일기
홍순형 洪淳馨
1857년(철종 8년)~?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여문(汝聞) 판서 석종(奭鍾)의 아들. 1874년(고종 11년)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1884년 갑신정변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며 1893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등을 지냈고 갑오개혁으로 궁내부 왕태후 궁대부(宮內府王太后宮大夫).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을 역임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방 때 일본 정부에 의하여 남작(南爵)이 되었으나 거절했다. [문헌]일성록韓國痛史. 文品案
홍승 洪昇
1612년(광해군 4년)~1688년(숙종 14년)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초(景初), 호는 정애(鼎崖) 본관은 남양(南陽) 도사 선경(善慶)의 아들. 1654년(효종 5년) 사마에 합격 경사를 정독하며 과거에 뜻이 없었다. 1662년(현종 3년) 천거를 받아 장사랑(將仕郞). 남별전(南別殿) 참봉 등을 역임하였으나 양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돌아가 죽었다. [저서]고금사실(古今事實) 사례의식(四禮儀式)역대촬요(歷代撮要)사적록(私贖錄)3책 [문헌]瓦窩錄(와와록)
홍여순 洪汝諄
?~1609년(광해군 1년)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 생원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1년) 문과에 급제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 하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행호군으로 병조판서에 이르러 임진왜란에 난민들에게 짐을 태워 버리고 호조판서로 선조를 모시고 평양에 이르러 난민들에게 절골의 부상을 당하였으며 순찰사로 지중추부사에 승진하여 대간의 탄액을 받고 순천에 귀양갔다.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 등과 더불어 분쟁을 일으켜 대북(大北) 소북(小北)의 당파를 만들어 대북에 속하였으며 다시 육북(肉北) 중북(中北) 골북(骨北)으로 세분하여 골북파에 속하여 망국의 대과를 범하였다. 병조판서로 관작의 삭탈을 당하고 문밖에 몰려나갔다가 1602년(선조35년) 직첩의 환급을 받았으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양사(兩司)에서 들고 일어나 진도(珍島)에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일찍이 유영경(柳永慶) 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을 공박하다가 이원익(李元翼)에게 <이사람을 쓰다가는 국가에 큰 화가 미치겠다.>는 극언의 논평을 받았다.[문헌] 선조실록 人物志
홍우원 洪宇遠
1605년(선조 38년)~1687년(숙종 13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남양(南陽) 한성서윤(漢城庶尹) 영(榮)의 아들. 1645년(인조 23년) 문과에 급제 한림주서(翰林注書)를 지내고 옥당수찬관(玉堂修撰官)에 이르러 1654년(효종 5년) 강빈옥사(姜嬪獄事 1645년) 때 귀양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을 사면할 것을 왕에게 청하여 뒤에 용서되어 돌아왔으나 황해감사(黃海監司) 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의 원(寃)을 소진(疎陳)하였다가 장사(杖死)되자 이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뒤에 효종이 죽자 복상문제로 다시 남 서인이 대립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우원이 소를 올려 그 잘못을 논하여 삼사(三司)의 탄액을 받고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하여 송시열 등이 실각되고 이듬해 왕이 부름을 받아 고성(高城) 군수로 보직 이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佐參贊)에 이르렀다. 그뒤 1680년 소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남인으로서 명천(明川)으로 귀양갔다가 문천(文川)으로 옮겨져 거기서 죽었다.[문헌]효종.현종. 숙종실록 남파집
홍우진 洪禹傳
1663년(현종 4년)~? 조선 영조 때의 문관 자는 집중(執中) 호는 귀만(龜漫) 본관은 남양(南陽) 정랑 수제(受濟)의 아들. 1702년(숙종 28년) 양전(量田)의 일을 진사에 합격 군수에 이르러 5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이 되었는데 생사와 화복으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으며 1719년(숙종45년) 양전(量田)의 일을 중지하고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속히 추진하기를 주청하여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의 반대를 받고 박필몽(朴弼夢)의 주청에 의하여 삭직되고 귀양갔다.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고 대사간을 거쳐 수원부사에 보직되어 1727년(영조3년)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왕의 묘정에 함께 배향했는데 이를 철향(撤享)하라고 주장하다가 삭되어 문 밖으로 몰려났다. [문헌] 숙종. 영조실록 藥波漫錄
芝陽漫錄
홍우창 洪祐昌
1819년(순조 19년)~?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유성(幼盛) 시호는 정헌(貞憲) 1866년 문과에 급제한 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고. 1877년(고종 14년)예조참판으로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원산(元山). 인천(仁川) 등지의 개항(開港)을 서두르는 일본 침략정책 지지에 노력했다. 1879년 형조 이조참판을 거쳐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가 되었다. [문헌]고종기사 승정원일기
홍원섭 洪元燮
조선 순조 때의 문장가 자는 태화(太和) 호는 태호(太湖) 본관은 남양(南陽) 북곡(北谷) 치중(致中)의 현손 영조 때에 낳았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았으며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사(蔭仕)로 벼슬이 올라 참의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 수원판관으로 왕명을 받아 상랑문(上樑文)을 지어 드리고 음관으로 문원(文苑)에 들어가 영광에 참여한 자는 오직 원섭 한 사람 뿐이었다. 순조 조에 죽었으며 아들 현규(顯圭)는 시재(詩才)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저서]대호집
홍원식 洪原植
?~1919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화성 출신 1907년(융희 1년) 군대 해산 때 이를 반대 일본군과 항정하다가 부상을 입은 후 각처로 전전하며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뒤에 구구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 김성렬(金聖烈) 안종후(安鍾厚) 등과 일본 헌병 2명을 타살하고 도망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지도하고 체포되어 일본군의 제암리교회 대학살 때 살해되었다.[문헌] 韓國獨立運動史 三一運動秘史
홍위 洪瑋
1559년(명종 14년)~? 조선 인조 때의 문관 자는 위부(瑋夫) 호는 서담(西潭) 본관은 남양(南陽) 소(訴)의 아들.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1년(선조 34년) 문과에 급제 누진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전언되어 공사에 근면하고 공정하여 사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언론에 강직하고 공명하여 꺼리는 바 없었으나 사헌부 지평으로 죄인에게 태형을 가한 사건으로 무소를 받고 귀양갔다. 인조가 반정하자 병조정랑을 거쳐 성균사예를 지내고 예천(醴泉)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토민 중에 그를 혐오하는 자가 있었서 부정을 무소당하여 구속되었다가 인조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이어 병으로 죽었다. 일찍이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으며 효성이 돈독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문헌] 人物考
홍위 洪葦
?~1660년(현종1년) 조선 효종 때의 문관 자는 군실(君實) 호는 청계(淸溪) 본관은 남양(南陽) 진사 원호(遠湖)의 아들. 인조 때 진사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 1년)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에 출입하며 충성을 다하였고 언행이 절실하여 공담(空談)은 없었으며 계주(啓奏)에 힘써 전후 장소(章疎)가 수만 마디에 이르렀다. 이이(李耳) 성흔(成渾) 등을 성묘(聖廟)에 종사할 것을 여러 번 주청하였으므로 경상도진사 유직(柳稷) 등 9백여 명으로부터 논박을 받았으며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곧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모든 숙제를 일소하고 밀려 있던 안건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에 승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문헌] 현종실록 인물고
홍유손 洪裕孫
조선 중종 때의 시인자는 여경(餘慶) 호는 조총(條叢) 광진자(狂眞子) 본관은 남양(南陽) 부리(府吏) 순치(順致)의 아들. 가세는 대대로 청빈(淸貧)하였으나 성질이 방달(放達)하여 얽매이지 않았다.남양 태수가 그의 문장에 능한 것을 보고 이역(吏役)을 면제 시켰다. 이어 김종직(金宗直)에게서 공부했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세속(世俗)에서 벗어나산과 물을 찾아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당시의 명류(名流) 김수온(金守溫) 김시습(金時習)등과 교유하며 시률(詩律)화홥하여 이름을 떨쳤고 당시의 명공(明公) 거경(巨卿)들이 다투어ㅠ교유하기를 원하였다. 76세에 처음으로 아내를 맞아 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성(志誠)이라 했다. [문헌] 人物考
홍의영 洪義泳
조선 순조 때의 문필가 자는 정칙(正則)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남양(南陽) 첨정 계우(啓祐)의 아들. 1783년(정조 7년) 문과에 급제 사헌. 사간양원의 소청으로 절도에 귀양가기로 결정되었으나 이어 취소 되었다. 순조 때 경기도 암행어사로 순행하여 양주목사 송면재(宋冕載)외 14명의 불법사실을 적발하고 전 개성유수 유한모(兪漢謀)의 탐학부도(貪虐不道)의 사실과 전 수원융수 이두집(李斗集)의 폐륜사항을 적발하였으며 마전(麻田)군수의 선치 사적을 주청하여 벼슬을 올리게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교리에이르렀으나 가호(家禍)로 인하여 진취에 뜻이 없어서 사퇴하였다. 시와 글씨에 능하고 한묵(翰墨)에 힘썼으며 특히 행초(行草)서를 잘하였다. 항상 화가들과 교유하였으므로 제화(題畵)의 필적이 가장 많았고 66세에 죽었다. [저서]북관기사(北關記事) [문헌] 정조실록. 槿城書畵徵
홍이평 洪以平
1463년(세조 9년)~1525년(중종 20년)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중성(仲成) 본관은 남양(南陽) 상호군(上護軍) 귀손(貴孫)의 아들. 무관 집안에 태여났으나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정통하였다. 당시 성종이 경술(經術)을 승상하여 이평은 수차 강과(講科)에 참여하게 되어 이때부터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원기(趙元起). 권달수(權達手) 정희량(鄭希良) 등과 가까이 지냈다. 1494년(성종 25년)부터 조부모 부모의 상(喪)을 연이어 맞이하게 되어 20년 동안이나 과거의 기회를 놓쳤다. 친구들은 그를 몹씨 근심하고 딴 방면으로 나가도록 권했으나 이평은 듣지않고 더욱 더 학업에 힘써 1513년(중종 8년) 대과(大科)에 급제 처음에는 성균전적이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상의원정(尙衣院正) 에 이르렀다. 1525년 대구부사로 내려가 재직중 병사하였다. [문헌] 人物考
홍익한 洪翼漢
1586년(선조 19년)~1637년(인조 15년)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남양(南陽) 진사(進士) 이성(以成)의 아들. 어려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에게 배우고 1624년(인조 2년)급제 사서(四書)를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1636년(인조 14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내세워 사신(使臣)을 보내 왔을 때 청나라 사신을 죽임으로서 모욕을 씻고자 주장했으며 마침내 병자호란을 당했을때에도 최명길(崔鳴吉)등의 화의론(和議論) 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 하니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 당하니 소위 병자(丙子)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이다 뒤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嗣)에 제사 지냈다. [문헌] 明陪臣考(명배신고)
홍인걸 洪仁傑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응시(應時) 본관은 남양(南陽) 직장(直長) 덕렴(德廉)의 아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 공부에 힘을 써 28세에 진사가 되어 33세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해미(海美)현감. 서천(舒川) 군수를 거쳐 희양(淮陽)부사에 특진했다. 그 당시 이율곡(李栗谷)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인걸을 사헌부에다 보직 시키려고 하였으나 사퇴하고 화양에서 돌아와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인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왕을 모시고 평양으로 가는 도중 형조참의에 임명되었고 이어 삼척(三陟)부사로 내려갔다. 1595년에 왜구가 삼척지방에 침입하자 이를 잡아서 검색한 결과 그들중에 우리나라 사람이 끼어 있었으므로 인걸은 감사에 압송하려 하였으나 아우 인간(仁侃)이 임의로 격분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이사실이 봉사자(奉使者)를 통해 인걸이 무고한 자를 공을 세우기 위해 함부로 죽인 것처럼 조정에 보고되니 잡혀서 참혹한 고문에 못이겨 끝내 허위로 자백하였다. 윤근수(尹根壽)는 그를 구출하려고 힘썼으나 이루지 못하고 2년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결국 옥사하였다. 인걸의 사위가 정철(鄭澈) 아들로서 당시 철이 주위에서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인걸이 화를 입게 된것이다.[문헌] 人物考
홍인계 洪仁桂
고려 말기의 장군 1370년(공민왕 19년) 원수 지용수(池龍壽)를 따라 비장(裨將)으로서 최공철(崔公哲)등과 함께 요성(遼城)을 쳐 공을 세웠다. 우왕 때 들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원수가 이성계(李成桂)의 지휘를 받아 수차에 걸쳐 그들을 몰아냇다. 1390년(공양왕 2년)이.초(彛初)의 옥에 연좌 벼슬은 지밀직(知密直)에 이르렀다. [문헌] 고려사
홍인호 洪仁浩
1753년(영조 29년)~1799년(정조 23년)조선 정조 때의 문신 자는 원서(元瑞)봉조하. 수보(秀輔)의 아들. 1777(정조 1년)문과에 급제 교리(校理).승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98년(정조22년)공조참판에 이르러 병사했다.앞서 1784년(정조 8년) 왕명으로 각도의 형옥결안(刑獄決案)을 편집 순조 대[심리록(審理錄)]이라 간행하였다.[문헌] 正祖實錄
홍일순 洪一純
1804년~1856년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헌문(憲文)호는 오곡(鰲谷) 본관은 남양(南陽) 1844년(헌종 10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사포서별제(司圃署別堤) 경모궁령(景慕宮令) 등을 지냈다. 성리학(性理學). 경전(經傳)에 독자적 해석을가하여 이름이 났다
홍임 洪霖
1685년(숙종 11년)~1728년(영종 4년)조선 영조 때의 충의사 초명은 진(震) 자는 춘경(春景)시호는 충강(忠剛) 첨사 수명(受命)의 아들. 어려서부터 몸이 심약하였으나 내성(內性)이 매우 강했고 홀어머니에 효성이 지극했다.집은 가난하여 호구가 어려웠으나 일찍이 3년동안의성(義城) 창고의 문무를 맡아보면서 추호도 국고의 흠축이 없었다 이봉상(李鳳祥)이 충청도절도사로 청주로 나갈 때 염결로 추천되어 막비(幕裨)로 따라가 이인좌(李麟佐)등의 행동이 수상함을 알고 봉상에게 사실을 말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내 이인좌 도당이 암암리에 성내에 침입하여 변을 일으켜 병영을 습격하고 병사(兵使)봉상을 죽이려 할 때에 홍임은 스스로 참병사라고 외치면서 몸으로 그를 막으며 적의 칼을 빼앗서 가지고 대항하다가는 잡혔으나 끝까지 꾸짓다가 피살되었다. 조정에서 호조참판을 추증하고 청주의 표충사(表忠祠)에 제사했으며 그의 애첩인 기생 해원(海月)의 신분을 기안에서 빼어주었다.임이 본래 아들이 없었는데 해월이 임이 죽은 몇달 뒤 아들을 낳고 또 아내가 쌍둥이를 낳았다. [문헌] 인물고
홍입공 洪立功
고려 인종 때의 중랑장(中郞將) 중종 때의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일으키고 입공으로 차장군(借將軍)을 삼아 척준경(拓俊京)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준경이 60여 명 군인과 섭을 주면서 도성(都省) 남로(南路0가서 방화(放火)할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불의의 행동임을 깨닫고 부하들과 함께 몰래 선의문로 궐내에 들어가 왕 앞에 사실을 고백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위하였다. [문헌] 고려사
홍자 洪자(가래나무 자)
1707년(숙종 33년)~1781년(정조 5년) 조선 영조 때의 문관 자는 양지(養之) 본관은 남양(南陽) 귀조(龜祚)의 아들. 1753년(영조 29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시에 능하였으며 북청(北靑)의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 ; 英祖 甲午에 세우고 黃最源이 撰함)와 경주의 상강묘비(三綱墓碑 ; 英祖 丙戌에 세우고 南有容에 撰함)등을 썼다. [문헌]영조실록 朝鮮金石總覽
홍종우 洪鍾宇
조선 말기의 자객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함으로써 정치 보복을 행하려던 민비(閔妃)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1892년(고종 29년) 일본에서 이일직(李逸稷)과 공모 동지로 가장하고 김옥균네게 접근했다. 1894년(고종 31년)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우리나라에 관한 문제에 관섭치 말기를 요청할 목적으로 김옥균이 상해(上海)로 떠날 때에 여비를 부담하면서 함께 따라갔다. 이해 2월 22일 일행은 상해에 닿아 미조계(美祖界)동화양행(東花洋行)에 투숙케 되었던 바 당일에 홍종우는 권총으로 김옥균을 살해했다. 그뒤 홍종우는 당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국 정부로부터 이홍장에게 교섭이 있어 이해 3월 7일 청국군함 위정호(威靖號)의 호송(護送)으로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인천에 상륙 귀국했다. 그 공으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와 경사(京師)의 사택(舍宅)까지 하사(下賜) 받아 세도를 누렸다. 1898년(광무 2년) 황국협회(皇國協會) 조직에 가담 이해 11월 길영수(吉永洙)등과 보부상(褓負商)들을 동원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습격하고 앞서 독립협회를 모함한 죄로 구금된 조병식(趙秉式) 등을 지지하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당시의 수구파(守舊派) 정권을 옹호하는 데에 활약했다,[문헌]李瑄根 ; 朝鮮最近政治史. 菊池謙讓. 金玉均上海橫絲事件(近代朝鮮史 下)
홍종응 洪鍾應
1783년(정조 7년)~? 조선 말기의 문신 시인. 자는 사협(士協) 시호는 문헌(文憲) 1827년(순조 27년)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 동래부사. 대사성(大司成).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남릉군(南陵君)에 봉해졌다. [문헌]純祖.憲宗 哲宗實錄
홍대연 洪大淵
조선 순조 때의 화가 자는 계선(繼善) 호는 화은(花隱) 본관은 남양(南陽) 산수와 꽃을 사랑하여 화장산(花莊山)의 남쪽이며 화심강(花心江)의 북녁인 땅에서 살면서 스스로 화은이라 호하였으며 30여 년 동안 호탕하게 놀다가 1818년(순조 18년) 번화한 곳을 버리고 수의곡(繡衣谷)에 들어가 산수와 꽃을 그리는 것으로 즐기었다. 그의 유작으로 <쌍로담소도(雙老淡笑圖)>와 <현폭도(懸瀑圖)> 및 <유안독주도(柳岸獨舟圖)> 등이 덕수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추산행려도(秋山行旅圖)>가 세간에 전하여진다. [문헌]槿城書畵徵(근성서화징)
홍득일 洪得一
조선 광해군 때의 문관 자는 형제(亨諸) 호는 만회(晩悔) 본관은 남양(南陽) 판결사 사효(思斅)의 아들. 생원에 합격하고 1613년(광해군 5년) 문과에 급제 누진하여 강원감사이 이르렀다.[문헌] 藥坂漫錄(약판만록)국조인물고 國朝寶鑑
홍득주 洪得周
조선 순조 때의 학자 자는 신백(愼伯)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동생 득은(得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가 흉년으로 군량이 부족함을 알고 돈 5천1백냥(兩)과 양곡 1천 2백포(包) 등을 공급 군량 확보에 차질이 없게한 공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학문에 밝고 특히 의약(醫藥)에 뛰어나서 의서(醫書) 일관강목(一貫綱目)을 간행하였으며 약재(藥材)를 저축해서 빈민의 치료에 힘썼다. 글씨도 잘 썼다. 의주(義州)의 학봉사(鶴峯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문헌]義州邑誌. 國朝人物考
홍무적 洪戊積
1577년(선조 10년)~1656(효종 7년)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면숙(免叔) 호는 백석(白石)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남양(南陽) 광해군 때 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등이 페모론(廢母論)을 네세울 때 이를 반대하다가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갔고 9년만에 인조반정이 있어 창녕현감(昌寧縣監). 장령(掌令)을 지냈고 사간. 승지. 참의를 거쳐 1643년(인조21년) 병조참판에 특임 이어 대사헌에 올라 이듬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647년(인조 25년) 신생이 옥(獄)에 연좌되어 정의(旌義)에 귀양갔다가 곧 갑산(甲山)에 다시 이듬해 홍천(洪川)으로 옮겼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다시 대사헌에 올랐다. 그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656년(효종 7년)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라 우참찬이 되어 그해 죽었다. [문헌]인조. 효종실록. 연려실기술. 송자대전
홍병기 洪秉箕
1868년(고종 5년)~1949년 3 .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인암(仁菴) 경기도 여주(驪州) 출생 1894년(고종 31년) 동학(東學)에 가담하여 개화운동(開化運動)에 참여 3 . 1운동 때는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 1922년 7월에 천도교 동지들과 독립운동단체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뒤 1926년 12월에 먼저 만주에 진출하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다시 천도교 장로서 교세 확장과 항일운동에 힘썼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문헌]三一運動秘史
홍지성 洪至誠
1528년(중종 23년)~1597년(선조 30년)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자는 강중(剛中)호는 불정산인(佛頂山人) 본관은 남양(南陽) 유손(裕孫)의 아들 천성이 고결하고 아담하여 몸가짐과 사람들을 대하는데 세속과 달리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글에 있어서 읽지 않는 것이 없었고 후진을 위하여 가르침에 게을리함이 없었으며 밤중에 이르러 학도들은 곤히 졸고 있으나 지성을 홀로 단정히 앉자 사색에 게으른 빛이 없었다. 고문의 난해한 어떤 귀절이라도 조리있게 자세히 해석하여 남은 의의(疑義)가 없게 하였다. 왜적의 정유재란 때 해를 받아 죽었다.[문헌] 인물고
홍지해 洪趾海
1720년(숙종 46년)~1777년(정조 1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미(伯美) 판서 게희(啓禧)의 아들. 1752년(영조 28년)문과에 급제 정언(正言) 전라도도사 승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74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776년(영조 52년)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하여 영조의 즉위를 방해했다가 이듬해 주살되었다.[문헌] 영조. 정조실록
홍직필 洪直弼
1776년(영조 52년)~1852년(철종 3년)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백응(伯應) 호는 매산(梅山)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남양(南陽) 동돈령(同敦寧) 이간(履簡)의 아들. 근재(近齋) 박윤연(朴胤淵)에게 배웠으며 젊어서부터 과거에 뜻이 없고 오직 수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노주(老洲) 오흐상(吳熙常) 송환기(宋煥箕) 이직보(李直輔)등 당대의 현사(賢士)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순조가 그 명성을 듣고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을 내린 후 다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내렸으며 헌종 때에 벼슬이 올라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 하자 대사헌에 발탁 지돈녕. 형조판서에 올려 주었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조선 중기의 우수한 유학자로서 많은 문하(門下)를 양성하였지만 그의 뛰어난 점은 문장에 있었다. 문집 52권이 전한다 [저서]매산집 [문헌] 철종실록 苟庵集 肅齊集
홍진도 洪振道
1584년(선조 17년)~1649년(인조 27년) 조선 인조 때의 공신 자는 자유(子由) 시호는 충목(忠穆) 본관은 남양(南陽) 동지돈녕부사 희(憙)의 아들 아버지 희는 구사맹(具思孟)의 사위로 진도는 인조와 이종4촌 형제간이었다. 1613년(광해군 5년)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 별제(別提)가 되고 의금부로 전임 된 후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구굉(具宏) 신경정(申景禎)과 모의하고 동생 진문(振文)도 그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능창군(綾昌君)을 살해하자 능창군의 형인 인조는 그 화가 미칠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집을 반환하자 진도는 자기 집을 인조에게 바쳤다. 때마침 원종이 죽자 광해군은 또 그 조객들을 살펴보았으나 진도는 겁내지 않고 끝가지 장례을 치렀다. 1623년 3월 거사에 뜻을 같이한 인사들과 서대문밖에서 화합한 다음 끝내 인조반정을 이룩하여 그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 훈 3등에 채록되어 남양군에 봉군된 후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문헌]
인물고
홍처량 洪處亮
1607년(선조 40년)~1683년(숙종 9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회(子晦) 호는 북정(北汀) 시호는 정정(貞靖) 본관은 남양(南陽) 도승지 천민(天民)의 증손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명현(命顯)의 아들 일찍 진사를 거쳐 1637년(인조15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지내고 병조정랑 경기도사에 이르럿을 때 중시(重試)에 뽑혀서 옥당에 들어갔으며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뒤 청풍(淸風)부사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년) 인선(仁宣) 왕후의 국상을 맞아 예조판서로서 빈 혼전도감(殯 魂殿都監)의 제조를 겸하고 대왕대비의 복제를 논할 때 공이 있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현종이 죽으니 빈전도감제조에 차출되어 장례를 치른 뒤 승급의 권유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조판서를 사임 중추부사가 되었다.그때 예론이 일어나 의례(儀禮)의 여러 대신들을 심히 공격하자 두문불출하고 왕명을 기다렸으며 1676년 기사(耆社)에 들어 간뒤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79년 강도투서(江都投書) 사건이 일어나 그 투서 가운 데 처량 등 여러대신들의 이름이 있었으며 권대운(權大運) 윤휴(尹虧) 등은 투서의 여러 대신들의 처벌을 주장햇으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이듬해 무사히 되어 공. 예조판서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했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퇴했다. [문헌] 人物考
홍호문 洪好文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유재(有哉) 호는 노포(老圃) 본관은 남양(南陽) 이조판서 처량(處亮)의 손자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경종. 영조. 3조에 역사하여 대사간 대사헌 충청감사를 거쳐 벼슬이 한성판윤에 이르러 시사(耆社)에 들어갔다.
[문헌]國朝榜目
홍창한 洪昌漢
1698년(숙종 24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기(大紀) 영의정 국영(國榮)의 조부 이재(李縡)의 문인. 1728년(영조 4년)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 지평. 수찬(修撰)을 거쳐 1738년 해서암행어사(海西暗行御史)로 나갔다. 그뒤 경성판관(鏡城判官). 사간.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을 거쳐 1745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글씨를 잘썼다. [문헌]英祖實錄
홍주화 洪胄華
1660년(현종 1년)~1718년(숙종 44년)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군실(君實) 호는 만은(晩隱)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숙종 초기에 송시열이 유배되자 그의 서적을 보관했고 1689년(숙종15년) 인현왕후가 페위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이어 송시열이 사사(賜寫0되자 박세휘(朴世輝). 한성우(韓聖佑)등과 백인소(百人疎)를 올려 스승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그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하였다.[저서]만은유고(晩隱遺稿)[문헌]朝鮮圖書解題(조선도서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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