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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경북 문경 출생 참으로 힘들었던 외로운 싸움
신 한 동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인류는 과욕과 자제를 통하여 인류의 행복을 위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으나, 때로는 행복을 파괴하는 전쟁 역시 스스로 수없이 일으켜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인류의 이상인 행복과 행복을 파괴하는 전쟁이 공존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나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의해 너무도 큰 희생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첫돌을 막 지내면서 걸음걸이를 시작하고 있을 때, 6.25가 발생하였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부모님, 삼촌 등 여러 식구들이 함께 살았으며, 온 가족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해발 1,162미터의 문수봉(경북 문경군 동로면, 충북 단양군 단양면 및 제원군 덕산면의 접경지역)산허리 밑으로 20여 가구씩 골짜기마다 4개 마을이 터 잡아. 화전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고, 김대건 신부께서 일시적으로 은둔했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비록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촌이지만 조선 말기 때 나의 7대 선조께서는 이곳에서 진사 벼슬을 지냈고, 우리 집의 생활 정도 역시 마을에서 제일 좋았기 때문에 이웃으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6.25전쟁 때 북한 인민군의 영남지방의 침략경로로 이용되면서 우리 가정의 행복은 깨지기 시작하였다. 북쪽 동부 내륙지역에서 영남지방으로 가장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동네와 동네를 잇는 이 산길(단양. 별천-차갓재-안생달-여묵재-문경. 갈평-상주들판)은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는 등산로와 같은 험준한 길이었는데 북한 인민군들이 밤중에 이 길을 택하여 영남지방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남침을 위한 사전준비가 치밀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근처 마을로 피난 가셨던 어머님이 그곳에서 유행하던 병에 걸리셔서 전시 중에 약 한번 쓰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당시에 나는 생후 19개월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유대용품이 없었던 관계로 내 생명은 밥물과 미음에 의존하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더구나 홍역에 걸렸을 때는 코피를 쏟으며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천운으로 회복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아버지는 새어머님을 맞이하셨다. 나도 이집 저집 이웃을 돌아다닐 만큼 성장하였다. 누가 보아도 쉽게 죽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서야 아버지는 큰 산 두 개를 넘어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면사무소에 가셔서 나의 출생신고를 하셨다. 따라서 나는 실제 나이보다 4살이 늦은 나이로 호적에 기록되었다. 이곳은 만학을 한 나로서, 대학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할 때 나이 제한을 받지 않게 되어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비극 속에서 삶을 위한 선택 옛 말에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 가정에도 들어맞은 것 같다. 선대의 후광으로 할아버지께서는 7남매를 두셨고, 가을 동지 때가 되면 이웃 마을에서 거두어들인 곡식과 과일로 뒤주가 그득했었다. 그러나 6.25로 많은 친족이 목숨을 잃었고, 할아버지의 맏아들인 큰아버지 역시 주벽과 낭비가 심하여 많은 재산을 탕진하셨다. 이로 인하여 할아버지께서는 둘째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옛날의 명성을 회복하시고자 무던히도 노력하셨다. 아버지는 낮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고도 부족하여 달밤을 이용해서 흙을 나르고 돌둑을 쌓으셨으며, 구부러진 층계 논을 문전옥답으로 만드셨다. 발동기를 비롯한 현대식 정미소 기계들을 등에 지고 해발 800미터나 되는 큰 산 두 개를 넘어 운반하시는 등 재래식 물레방아를 현대식 기계정미소로 정리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그토록 애써 장치하셨던 정미소에서 원망스럽게도 기계사고로 말씀 한마디 못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고로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시에 나는 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명전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반장을 맡아왔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부모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고 자라고 있던 때(1962년 이른 봄)였다. 특히 할아버지의 슬픔은 극에 달해, 차마 죽지 못해 살아가시는 것 같았다. 일 년이 지난 후 나는 새어머니의 배려로 부근에서는 가장 좋은 문경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입학금 외에는 한 번도 수업료를 내지 못한 관계로 학교에서 자동 제적당했다. 당시에 초등학교 졸업생은 총 18명이었으나 이 중에서 6명의 중학교 지원자 모두가 합격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면,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은 훌륭한 교육자로 선정되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졸업 후 나는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와 함께 고향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며 농사일을 하여야만 했다. 그해에 새어머니는 6살 먹은 남동생과 여동생을 남겨두고 주위 사람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며 개가를 하셨다. “너희들 3남매는 하늘이 주신 복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과 헤어져서는 못 산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던 어머니셨다. 나는 그 어머니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당시에 여동생은 내가 키우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랬기 때문에 한동안 이집 저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물건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여동생을 등에 업고 눈 덮인 산속을 만났을 때난 허기에 지쳤을 때에는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루 종일 걸어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먹을 것이라곤 차디찬 밥 한 덩어리뿐이었다. 14살의 나이로 이런 일을 감당해내기랄 참으로 힘겨웠다. 결국에는 여동생을 어머니께서 데리고 가셨는데 그 일로 지금까지 친어머니로만 알고 살아왔던 나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막연하게나마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 한 장 남겨 두시지 않은 채 돌아가신 친어머님에 대한 생각은 잠시 일 뿐, 항상 머리에 기억되는 분은 새어머니뿐이었다. 이것은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 같았다. 그 후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면서 나의 마음을 달래주셨다. 이런 덕분에 한동안은 한문을 배워 막연하게나마 한의업을 하겠다는 의욕도 가져보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는 너무도 부끄러웠고 나 자신이 초라함을 느꼈다. 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농사일을 하면서 책을 읽어보았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 욕심대로 되지 않았다. 논과 밭의 경사가 심하여 모든 것을 지게로 운반하여야 했고, 자동차는커녕 자전거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꼬부라진 산길이었기 때문에 산을 넘어 12킬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에서 비료(요소 및 유안)와 행정지원물자를 지게로 져 나를 때는 온 등골이 짓눌려오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주위의 눈총이었다. 비교적 따뜻하게 대해주시려는 이웃들의 손길도 나에게는 싸늘하게 느껴졌고 조소하는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특히 논밭을 갈거나 타작과 같은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일꾼 구하기가 힘들었고, 음식이나 빨래 등 여자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남에게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몇 년 동안이나 초가지붕을 갈지 못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빗물이 새었고, 노래기와 같은 지저분한 벌레들이 많이 생겨서 밥을 지을 때나 먹을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다행히도 식량은 풍부하여 남들처럼 보리죽, 감자죽, 강냉이 등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게 앞날의 희망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할아버지를 위하여 집안 어른들과 이웃들이 나의 결혼을 재촉할 때는 참으로 갈등이 심했다. 어려서부터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위하고 지금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결혼보다 더한 일이라도 당장에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 평생을 좌우하는 결혼을 현실에 구속되어 경솔하게 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을 자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당시에 결혼을 그토록 강요하셨던 종조부님은 나중에 매우 미안해하셨다.) 그러던 중 섣달 그믐날, 나는 하찮은 일로 이웃에 살고 있던 큰집의 형님으로부터 많은 구타를 당했다. 당장에 어디론가 가고 싶었지만 설날의 아버지 제사 문제로 하루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약간의 중요한 것만 챙긴 뒤 쌀 두말을 팔아 마련해 두었던 700원을 가지고 말로만 듣던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이날은 나의 생애를 바꾸어놓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무릎이 빠지도록 쌓인 눈과 휘몰아치는 새벽의 눈보라 속에서 추위도 무서움도 느끼지 못했다. 어둠을 뚫고 하얀 눈빛의 안내를 받으며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단양 근처에까지 걸어왔을 때 훤하게 날이 밝았다. 고향을 무작정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암담하였지만 이것은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이었다. 서울까지 차비 180원을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520원이었다. 다행히도 전날 떡국과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서울생활을 시작하느냐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 당시 내 나이 17세로서 꿈은 컸지만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파출소 급사로 시작된 서울생활은 가축병원 조수생활로 정착하였다. 그해 추석 때 고향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할아버지와 남동생은 이웃에 있는 큰집에서 살고 계셨다. 모든 토지는 큰집에서 경작하고 있었으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심어놓으셨던 5년근 작약과 목단밭 300평을 포함해서 돈을 받고 팔 수 있었던 것은 모드 큰집에 의해서 팔려 없어졌다. 남은 것은 당시를 생각할 수 있는 흔적뿐이었다. 예상했었던 일이라 덤덤한 마음으로 서울로 다시 올라왔지만 할아버지와 남동생의 생활이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서울로 할아버지를 모실 수도 없는 처지여서 괴롭기만 하였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제각기 자신의 삶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돈과 지식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돈과 지식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돈과 지식의 관계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지만 돈이 많으면 지식을 얻을 가능성이 크고, 지식이 풍부하면 역시 돈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돈과 지식은 서로 약점을 보완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중 최소한 하나라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돈은 지식에 비해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어 영구적이거나 안정적이지 못하므로 대부분은 지식을 통해서 돈을 얻으려고 한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다행히도 의무교육은 받았다. 하지만 복잡 다기한 현대문명사회를 능동적으로 살아갈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짧은 사회경험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학문적 지식을 얻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생각 끝에 간신히 얻은 직장이 바로 가축병원이었다. 여기서 주로 내가 하는 일은 개똥을 치우고, 입원한 개를 돌보며 개밥을 끓여주는 것이 주 업무 이었다. 때로는 개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조제해주기도 했다. 충무로 5가 로터리에 있었던 가축병원은 내가 밥얻어 먹기도 미안할 만큼 손님이 없었다. 다만 가끔 이루어지는 애견매매로 병원이 운영될 수 있었다. 많은 돈을 들여 대학교육까지 마친 수의사들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서당 개 3년에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3년여 동안 가축병원을 옮겨 다니며 익힌 솜씨는 개의사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새벽 4새부터 7새까지 북아현동과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일대를 자전거를 오가며 셰퍼드 개를 훈련시키는 고된 일도 돈 버는 재미에 피곤한 줄 몰랐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묘기라도 부리는 듯 한손으로는 개 고삐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은 채 사람과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다닐 때는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자전거바퀴가 전차 철로 사이에 끼어 곤두박질치며 넘어지는 바람에, 뒤따르는 자동차에 치어 죽을 뻔 한 고비도 있었다. 개똥냄새가 풍기는 가게 안에서 밥을 해먹으며 손님이 앉았던 긴 의자 위에서 잠을 자고 지냈지만, 장래에 대한 삶의 애착과 희망이 있었기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시골에서도 했었던 자취생활은 이제는 퍽 익숙해져 있어서 별 거부감 없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68년 가을에는 실습하러 왔던 수의사와 공동으로 마포 서교동에 가축병원을 개업하였다. 개업 첫날 저녁에는 동업 수의사의 선배이자 내가 엊그제까지 근무했던 가축병원 원장이 술에 취한 채 찾아와서 자신의 손님을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우리를 마구 때리고 창문을 깨부쉈다. 우리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병원을 시작하였지만 병원은 나날이 번창했다. 병원 규모도 4평에서 10평으로 늘어났고, 동업 수의사도 장가밑천을 장만해서 결혼을 했다. 나 역시 냉동기술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수료증을 가지고 취직을 원했지만 오라는 곳은 없었다. 이미 나이는 21살이었다. 더 이상 나이가 들기 전에 무엇인가 내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으나 마땅한 대상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돈을 벌고 나니 전에 돈 벌면 공부하기로 했던 굳은 결심은 돈의 위력 속에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진 돈으로 땅을 사두기로 하고 다시 벽돌공으로 일 해봤지만 건설현장에서도 별로 관심은 끌지 못했고, 냉동기술학원을 졸업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동업 수의사로부터 경제적 지원 약속을 받아 한일 검정고시학원을 가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학력은 생각하지 않고 의욕만 가지고 처음부터 중3반에 들어가서 강의를 들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 듯 알 듯 하다 이해하지 못하여 다시 중2반으로 밀려 내려갔다. 창피하기도 해서 공부를 포기하려고 했었지만 미리 납부한 등록금이 아까워 계속했다. 다행히도 8개월 만에 1969년 고입검정고시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해에 대입검정고시에 응시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동안 경제적. 정신적 도움을 주시던 수의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나의 어려움은 다시 계속되었다. 책을 펴면 끼니 걱정이 되었고 눈앞에는 남은 돈이 얼마라는 것이 아른거렸다. ‘몇 달 후에는 돈이 다 떨어지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검정고시에 합격한들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차라리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어떨까?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는 것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에 공부는 의욕대로 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돈을 쓰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동업으로 시작했던 도서관(북아현동), 빌려준 채권으로 인수 맡았던 미장원(서교동), 월부이자놀이는 오히려 경제적 손해를 봤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안겨주었다. 그동안 비슷한 입장으로 공부하던 친구들 중 하나가 대학교 교복을 입었을 뿐 대부분이 경제문제로 혹은 이성문제로 중도에서 포기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나는 하느님께 기도도 드려봤다. “하느님, 저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여주시고 아울러 능력을 주시옵소서.......” 절실한 교인도 아니었지만 교회의 새벽 종소리에 매료되어 가끔 교회에도 나갔으나 내 마음은 목사님의 설교에 동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 헌금할 돈도 없어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싫어졌다. 눈을 감고 맹목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참석의 의의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진정한 구원자라면 누구나 교인이라 해서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 ‘먹고 싶은 것 먹으며, 입고 싶은 것 입고, 즐기고 싶은 것 즐겨가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행운이나 복을 주시지 않으리’하고 스스로 믿고 다짐하면서 노력을 계속했다. 두 번째 대입검정고시에 실패한 후로는 가지고 있던 돈을 쓰기로 하고, 자는 것 먹는 것 외에는 일체 돈을 쓰지 않았다. 입을 옷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업 수의사 아버지께서 입었던 헌옷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옷이 너무 커서 입는 것이 아니고 걸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도 60대가 입었던 옷이라 색깔이 대부분이 밝은 색이 아니고 회색이어서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많고 국가고등고시와 같은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다가 대입문제를 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거주지는 구파발, 북아현동, 천연동, 신교동, 합정동, 서교동, 휘경동, 수유리, 퇴계로5가 등 인연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전전하였다. 나는 1972년이 되어서야 3년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3년 만에 얻은 이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참으로 값진 승리였다.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반갑게 알려야 할 사람이나 기뻐해주는 사람도 없어 나의 처지가 슬프기도 하였다. 그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점에 아쉬움과 후회를 하면서 다시 내일이 걱정되었다. 어느 날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올라 하느님께 기도했다. “저 많은 집들 가운데 제가 안주할 장소 하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느님, 제발 먹고 잘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와 제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찻소리들뿐이었다. 맨주먹으로 서울에 올라온 이웃 마을의 ○○는 10년 만에 집을 사고 세탁소를 두 개난 경영하고 있는데 비해 나는 얻은 것이라고는 검정고시 합격증 2장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식처도 없고, 기술도 직장도 없었다. 남은 돈도 얼마 되지 않았다. 돈이 떨어지니 돈을 택하지 않고 지식을 택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당시에 가지고 있던 돈으로 사려고 했었던 지금의 강남 일대 뽕나무밭 600평과 성산동 일대의 논 일부, 그리고 벽돌공으로서 지금까지 기술을 쌓아왔더라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 내 자신이 한심스레 여겨졌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려움을 참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자에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행운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주시리라고 자위하면서 맹목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해갔다. 순탄했던 대학생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 있으면 됐지 대학교육이 꼭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나는 한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국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책임과 의무를 질 줄 아는 정도의 기본지식, 즉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지적 수준이면 되지 않겠는가, 돈도 없고 나이도 많고 머리도 그렇게 좋지 못한 나로서 대학을 졸업한 후 투자한 것만큼 소득이 있겠는가 하는 점에 확신이 가지 않았다. 내 나이 25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생활을 마치고 나면 32살이 된다. 대학에 진학하여 가정교사로 공부하겠다는 희망은 전기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후기 사립대학 입학시험을 남겨둔 상태에서 부정적으로 변하였다. 오직 하겠다는 의욕과 무모한 희망만으로는 오히려 내 일생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재력의 뒷받침 없이 사립대학의 진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현동 국립도서관에서 만났던 재수생(노영록으로 기억)은 내가 건국대학교 야간무역학과를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학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학우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낙원동 학교운동장에 있는 오동나무 그늘은 짧은 시간이나마 학우들에게는 낭만과 휴식을 주었고 장래를 생각하는 대화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학우들은 은행원, 공무원, 무역회사 직원, 초등학교 교사, 중소기업 경영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과 대학교수들은 나에게 장래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해주기도 했고 자신감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내가 서울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도 공무원 임용을 거부하게 했고(당시에는 공무원이 낮은 급료로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음), 사회에도 과감히 뛰어들게 했다. 사회경험을 얻기 위하여 첫 직장으로 보험회사 외무직을 택했다. 회사일 관계로 대학교에 있는 공인회계사 연구실 내규를 어겼기 때문에 비록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어도 불과 2개월 동안의 활동 결과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의 대학등록금이 6만7천원 정도였는데 총 21만원의 소득을 얻었으니 나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 만난 보험고객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는 행운도 함께 얻었다. 이것은 나의 성실한 생활에 대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보살펴주신 결과로 생각되었다. 가정교사로서 입주하면서 그동안 불안정한 상태에서 내일을 예측 못하고 지내던 나의 대학생활이 규칙적인 생활로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새벽 4시경에 교회로부터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는 나에게 하느님목소리로 들려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하였다. 나는 안정을 찾으면서 3학년 때는 무역사 자격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졸업 전에 이미 무역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가정지도를 받던 학생도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합격하였다. 서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나는 현역으로 육군에 입대하였으나 상관의 배려로 입대 1년 만에 의가사로 전역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직장을 얻고 결혼할 때까지 장장 6년 동안 입주해 있었다. 그동안 한 가족처럼 따뜻이 대해주시며 안식처를 제공해주셨던 마포 공덕동에 사시는 이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곳에서 가정은 인간의 마음과 육체의 안식처이며 모든 의욕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가정이 빈약하고 불편하다 할지라도 가정을 가지고 있는 모든 분들은 그 사실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가정 없이 떠도는 생활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살아왔다. 불평할 것이 있어도 말할 대상이 없고, 명절이 되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정처 없이 방황을 하곤 했다. 심지어 달력 그림에 있는 행복한 가정의 정경이나 세배하는 모습의 사진만 보아도 부러워하던 나였다. 가정을 가지고 나서 나는 대학교 재학시절부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자친구를 원했으나 이것은 나의 꿈이었을 뿐, 대부분의 여성들이 타산적이고 물질에 약해 보여 일찌감치 단념한 상태였다. 여기에 투입할 시간이나 노력을 공부에 투자하여 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입사했던 직장은 나의 이상에 어울려 평생의 직장으로 생각하고 이때부터 결혼상대자를 찾았으나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가지고 있는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 없이 자라온 나의 성장과정이 정상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여건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고이 간직해왔던 초등학교 성적통지표와 우등상장, 검정고시 합격증, 무역사 자격증, 기타 여러 직장의 입사합격증 등과 같은 서류들이 나의 삶의 발자취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물증이 되어 당시에 결혼을 망설이고 있던 지금의 아내가 나와 결혼을 결심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해주었다. 1979년 10월 비록 보증금 100만원의 단칸 월세 방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이지만 참으로 포근한 생활이었다. 나는 가정생활대한 강한 애착을 느꼈고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면 무엇이라도 해내리라는 신념을 가졌다. 따라서 월급은 몽땅 저축을 했고 2개월마다 받는 보너스로 생활해갔다. 주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참아온 아내가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친척이나 이웃 직장 동료들로부터 구두쇠로 불릴 만큼 인색했다. 담배도 돈이 아까워 피우지 않았다. 그것은 내 것이 있어야 타인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남이 막을 때 같이 먹고 남이 이야기할 때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활 덕분에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으며 매년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주택청약부금을 들어 결혼 3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직장상관의 배려로 대학에 출강할 수도 있었고, 외국에 연수했던 경력은 대학으로 적을 옮기는데 도움이 되었다. 감히 고향을 떠날 때 생각하지도 못했던 박사학위를 받고 할아버지와 부모님 산소를 찾아 그동안에 자주 뵙지 못한 것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용서를 빌었다. 어지럽게 시작되었던 결혼생활이 5년이 지났을 때 남매를 둔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같은 나이 또래와 비슷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나를 위하여 격려해주시며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보답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 내가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국제적으로 장사를 하여 크게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무역사 자격을 얻어 일반무역회사에 입사하였었다. 그러나 무역회사의 무역 업무를 보면서 무역업은 나의 적성과 처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원리원칙을 따지며 팥 심은 곳에 팥만 나야한다고 주장하는 내 생각은 냉엄한 현실에 적절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첫 직장에서 6개월 만에 스스로 물러섰지만 나로서는 매우 값진 경험을 했다. 새로 얻은 직장은 무역 업무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 직장처럼 별을 보면서 출근하여 별을 벼면서 퇴근하는 경쟁이 치열한 회사가 아니었고 후생시설도 좋아 훨씬 여유 있는 직장이었다. 현재 공무원들이 처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의 결과라 생각한다. 근무시간이 짧고 신분상 장래가 보장되어 있으며 비교적 후생시설이 잘되어 있다는 점에 공무원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거나 상대를 비방하기 전에 자신의 할 일을 먼저 한 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무리가 없고, 상대를 설득하는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내가 감히 대학교 강단에 설 수 있게 한 결정적인 밑받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학력이 좋거나, 재력이 있거나, 또는 속된 말로 백그라운드가 있는 것도 아닌 나로서 비교적 순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것도 아닌 나로서 비교적 순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고에 기초를 둔 성실성에 있었다고 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그러나 촌음을 다투는 현대에 있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을 수 있는 경험은 너무 커다란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책을 통하여 이를 체험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우선 무역학을 꾸준히 공부하여 연구기관이나 강단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깊이 있는 학문에 접근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학에 치중하여 국제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당부한다. 국경의 개념의 허물어지고 이념의 막이 허물어지는 지구촌 시대를 맞아 필요한 것은 의사소통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암기하듯이 임시적으로 공부했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이를 응용하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은 어쩌면 교육의 낭비라 할 수 있다. 국제화 시대에 권리를 올바로 행사하고 자신의 언행에 스스로 책임지며 불의에 물러설 줄 모르는 참된 인간을 사회는 요구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인간을 하나라고 더 많이 사회에 배출하기 위하여 모든 정성과 노력으로 사회교육에 힘쓰고자 한다. 영어 한 단어 더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한 점의 부끄럼 없는 행동으로 사회를 선도해가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검정고시 출신자들은 학교의 정규수업과정을 오직 시험에 의해서 평가받았을 뿐, 자신의 품행에 대한 평가는 사회생활을 통해서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검정고시 출신자들이 사회로부터 평가받은 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무서운 집념의 인간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재학 시절에 우리나라 금융기관이 학력제한을 철폐했을 때, 나는 시중은행의 중견행원 및 대한항공의 중견사원의 입사시험에 1차 합격한바 있었으나 면접에서 모두 거절당한 적이 있다. 이는 아마 검정고시 출신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모든 검정고시 시각의 출신자들은 위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우리 스스로 지우기 위하여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고, 차후 검정고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합격증 교부시 최소한의 교양교육을 시켰으면 한다. 그것은 운전면허시험 때 실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교양교육제도와 같은 제도를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동생이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대로 고아들과 노인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아원과 양로원의 분리운영 형태가 아닌 병합운영(고아원+양로원)으로 노인에게는 외로움을 달래주고, 아이들에게는 효도와 소속감을 불어넣어 상호간에 의존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기여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