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 동안 9-10장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제에 대해서 언급해 왔습니다. 1)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했다고 해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9:1-5). 2)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거나 변하지 않는다(9:6-24), 3)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부 선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다(9:25-29), 4)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것은 그들의 과오이지 하나님의 실수는 아니었다(9:30-10:21). 이제 바울은 11장에 들어와서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제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모두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남겨 두셨다(11:1-10), 2)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 몇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11:11-24), 3)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하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1)
"그러므로 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또한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입니다(1)."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들었으며,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은 일에 대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불 신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을 던진 후에 즉시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 이해서 먼저 자신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아브라함 자손이었으며,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바울 역시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바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 엘리야의 예(2-3)
"하나님은 자신이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엘리야에게 한 말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고발했습니다(2).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었고,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마저 찾고 있나이다(3).'
바울은 앞에서 자기 개인의 예를 들어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또 다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성경 적인 예는 엘리야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극도로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아합 왕은 바알 종교를 신봉하던 이세벨을 아내로 맞으면서 극도로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은 공개적으로 나서서 바알 종교의 선교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녀는 친히 물질적, 정신적으로 수많은 바알 종교의 제사장들을 후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물들게 되었고, 아합 왕은 이 러한 일을 방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좆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참 신임을 증거하기 위해 바알의 제사장들과 공개적인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결국 엘리야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엘리야는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영적인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제단을 쌓고 자기 신에게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이 그 재물에 응답을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에게 드린 제물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하나님께 드린 제물에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태우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엘리야는 일단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은 거기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엘리야를 잡아죽이기 위한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식은 엘리야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크게 낙심하여 광야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주여 이 백성이 주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주의 제단을 헐었나이다. 이제 이스라엘에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은 내 생명마저 빼앗으려고 하나이다."
* 남은 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많다(4)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답변은 어땠습니까? '내가 나를 위해 7천 명을 남겨 두었으니,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니라'(4)."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000명을 남겨 두었다!." 엘리야는 모든 사람의 사람이 사라지고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타락할 때에도 여전히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7000명의 경건한 사람들을 보존해 두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아서 외롭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가장 타락해 있을 때에도 그 백성을 위해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보존해 두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겨 두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많은 경건한 자손들을 넘겨 두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어떻게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2.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가? 왜 이러한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인지 말해보자.
3. 우리는 의인이 사라지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왜 낙심하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서 서로 이야기 해보자.
제목: 선택과 유기(롬 11:5-10)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인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 중에 경건한 백성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가장 영적으로 타락한 아합 왕 때에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울 때에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해 경건한 사람들을 보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남겨 주신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이 "불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다"고 말했습니다(암 4:11).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체를 가지고 알곡과 겨를 나누듯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나누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암 9:8-10). 또한 미가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자기 양을 모으듯이 자기 백성 중에서 남은 자를 모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미 2;12).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도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이 악을 행치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습 3:12-13). 이 외에도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보존해 두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렘 23:3, 사 6:13, 7:3, 17:6, 겔 11:17 참고).
*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5-6)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5). 만일 (이 선택이)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구원은)더 이상 행위로 인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은혜가 은혜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6)."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에도 아주 버리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도 은혜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는 우상 제작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도 역시 그들이 다른 백성보다 나아서 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보다 더 연약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를 떠나갈 때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은혜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끝까지 그들에게 은혜와 자비로 대해 주셨습니다.
* 선택된 자만 구원을 받음(7)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구하던 그것을 얻지 못했고, 오직 선택된 자가 얻었으며, 남은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7)."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패역할 때에도 남은 자들을 보존하신 일을 모녀 우리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하던 것(의,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로 구원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율법을 통해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던 의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을 선택하고, 에서는 보리고 야곱을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선택받지 못했던 이스마엘과 에서는 결국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회개하지 않다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 성경의 근거(8-10)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습니다(8).' 또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그물과 장애물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9),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이 항상 굽게 하소서'(10)."
이제 바울은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이 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해 성경 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서 세 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인용한 말은 (사29:10)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혼미한 영을 주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거역하게 되자, 마침내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심판이 시행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인용한 말은 (신 29:2)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영적인 눈과 귀를 어둡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하나님과 그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영적인 둔감함과 어두운 눈과 귀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에게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셋째로 인용한 말은 (시 69:4)에 나오는 다윗의 증언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다윗은 신의를 저버리고 의인을 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신의를 저버린 악인들이 누리는 축복(밥상)이 오히려 그들을 잡는 올무와 덫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기력이 쇠하여 그 등이 굽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를 배반한 유다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5:25).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에도 끝까지 거역하다가 버림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언제든지 이스라엘 중에는 하나님이 보존해 주신 경건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멸망하게 될 사람들도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선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 나머지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2. 수많은 곤경 중에서 의를 지키다가 구원을 받게 된 예를 들어보자.
3.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반대하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 사람의 사례를 들어보자.
제목: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는가?(롬 11:11-12)
바울이 11장에 와서 던진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로 그가 제시한 증거는 개인적인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은 것을 볼 때에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만일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인인 자신도 역시 버림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그가 제시한 증거는 성경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엘리야 때에 하나님께서 7,000명의 경건한 자를 남겨 두신 것처럼 지금도 자기 백성을 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다윗과 호세아,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을(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는) 인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첫째 질문과 대답을 마치고, 11절부터 두 번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받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했는가?(11(상))
"그러므로 내가 말합니다. '그들이 넘어질 만큼 실족했습니까?' '그렇지 는 않습니다.'(11(상))"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스라엘이 넘어질 만큼 실족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완전히 넘어져서 다시는 회복될 수 없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결국 그들은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은 주변 국가들이나,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압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들을 완전히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에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메시아를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이 로마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1900년 가까이 나라를 잃고 이방인들 틈에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독립시켜 주셨으며, 그들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때에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 왜 이스라엘이 넘어졌는가?(11(하))
"그들이 넘어짐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른 것은 이스라엘로 시기심을 유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11)."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이방인 중에 흩어져 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에게 버리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 그들을 버려 두셨습니다. 둘째 이유는 이방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그 복음을 이방인에게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들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 받은 축복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하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 넘어짐과 부요함(12)
"만일 그들의 넘어짐으로 세상이 부요하게 되고, 그들의 실패로 이방인의 부요하게 되었다면, 그들의 충만함을 인해 세상이 얼마나 더 부요하게 되겠습니까?(12)"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일로 인해 세상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자, 그 복음을 이방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행전에서 이러한 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바울은 항상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그들을 박해하거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 수 없이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유대인의 실패를 이방인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복음 거부는 오히려 세상에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한 일이 이방인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유대인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세상에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선택하신 백성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다 차게되면 하나님은 다시 닫으셨던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는 사건은 이방인들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 올 때에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그들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는가? 만일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시 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방인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올 때에 온 세상을 어떻게 축복하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제목: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인 구원(롬 11:13-16)
바울은 (11:11-12)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강조했습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이방인을 구원하는 기회로 만드셨다. 2) 이방인 구원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 것이다. 3)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 이 일로 인해 세상은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제 다시 한 번 이 세 가지 진술을 자기 개인 사역과 관련하여 반복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방인의 사도의 직분(13-14)
"그러나 이방인인 여러분에게 내가 말합니다. 나는 진정 이방인의 사도이며, 나는 내 사역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13).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혈육을 시기하게 해서 그들 중에 얼마를 구원할 것입니다(14)."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사도라고 선언하며,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번역된 말(독사조)은 원래 "영화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의 자기 직분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일에 충성함으로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이방인을 통해서 자기의 혈육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직분은 더 한층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거룩한 복음 전파 사역을 남을 시기하게 하는 저속한 도구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시기심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악한 것이나, 가져서는 안될 것을 탐한다면 그 시기심은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것이나 가져도 되는 것을 원한다면, 그 시기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시기하게 하려는 했던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게 하기 이해 시기심을 유발하는 것은 선하며 좋은 일입니다.
* 이스라엘과 이방인 구원(15)
"만일 그들을 버린 일이 세상을 화목하게 만들었다면, 그들을 용납하는 일은 죽은 자로부터 생명을 얻게 하지 않습니까?(15)"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국 유대인 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 선교와 유대인 선교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은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 사건은 다시 유대인의 구원에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거역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세상을 복음을 통해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이방인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이 일은 온 세상에 죽은 자가 영생을 얻는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이것은 문자 그대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2)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서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한다. 3)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로서 장차 유대인의 회복이 이방인에게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될 것을 말한다. 이 중에 가장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세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넘어진 사건을 이방인을 구원하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하신 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유대인의 회복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온 세상을 더 큰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 두 가지 비유(16)
"만일 첫 열매가 거룩하면 그 떡도 거룩하고, 만일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할 것입니다(16)"
이제 바울은 위에서 말한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첫째로 제시한 비유는 첫 열매와 떡의 비유였습니다. 바울은 첫 열매가 거룩하면 그 나머지 떡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소제를 드렸습니다. 이때에 제사장은 모든 떡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했으나, 대부분 그 떡 중에서 일부분만을 대표로 드렸습니다. 이러한 경우 떡 중에서 일부분이 드려지면, 드려지지 않은 다른 떡도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민 15;19-21). 바울이 제시한 두 번째 비유는 뿌리와 가지의 비유였습니다. 바울은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 역시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나무의 경우 그 뿌리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면,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도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비유는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거룩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선택받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발한 처음 드려진 떡이나, 뿌리는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떡과 가지는 그 후손인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신 것처럼, 그 후손인 영적 이스라엘도 (잠시 버리시긴 했지만) 다시 불러서 거룩한 무리에 포함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바울은 어떻게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일을 영광스럽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는가?
2.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말해보자. 이스라엘의 회복이 후에 인류에게 미칠 축복은 어떤 것인가?
3.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한 두 가지 비유의 의미와, 그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보자.
제목: 이방 기독교인에 대한 권고(롬 11:17-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넘어진 일을 이방인을 구원하는 계기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 정한 수가 할 때까지 잠시 유대인들을 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정한 수가 차게 되면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더 축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이방인들을 행한 경고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은 이방인 성도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몇 가지 경고를 더하고 있습니다.
* 감람나무의 비유(17)
"또한 가지 중 일부가 꺾여졌는데, 야생감람나무였던 여러분이 그 가지에 접붙임을 받아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사람이 되었으므로(17)....."
바울은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있는 작은 숲이나 과수원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참 감람나무로, 그리고 이방인을 야생 감람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 감람나무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그리고 꺾여진 가지는 복음을 거절하다가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접붙임을 받은 야생 감람나무 가지는 이방인 중에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야생 감람나무의 가지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참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게 된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감람나무의 비유는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대로 농부들이 야생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는 일이 없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농부들이 바울의 말과는 반대로 참 감람나무 가지를 야생 감람나무에 접붙여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주석 가들은 바울의 비유가 사실성이 없는 비유라고 비난했습니다. C. H. Dod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농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감람나무에 관한 일도 모르고 있었다."(다드, 로마서 주석, p. 180).
그러나 바울이 제시한 비유가 전혀 사실무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농부들은 참 감람나무를 돌 감람나무에 접붙여왔습니다. 그러나 노화된 감람나무를 다시 활기 있게 할 경우에는 바울의 말과 같이 야생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였습니다. William Ramsay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인 환경, 즉 감람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경우에, 노화된 감람나무에 어린 야생 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어린 야생 감람나무의 가지는 감람나무의 수액을 받아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노화된 참 감람나무는 다시 소생하게 되는 것이다."(Ramsay, "감람나무와 야생감람나무", in the Expositor, 6번째 시리즈, 제9권 pp. 16-34, 152-160 참조).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비유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노화된 감람나무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노화되어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기 위해 이방인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교만하거나 자긍하지 말라(18)
"그 가지들을 향해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8)."
이제 바울은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서 먼저 믿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몇 가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해 자긍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믿은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을 업신여기고 교만해 지는 일을 막기 위한 경고였습니다. 복음을 믿은 이방인 성도들은 결코 유대인을 향해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지되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넘어진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라(19-21)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를 그 곳에 접붙이기 위한 것이었다'(19). 맞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꺾여졌으며 여러분은 믿었기 때문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20)!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아끼지 않으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21)."
바울의 말을 이방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믿지 않음으로 축복에서 제외되었고, 이방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로 교만해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교만해지기 보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 가지인 이스라엘 백성도 버리셨다면, 야생 가지였던 우리도 거역하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하심을 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한 백성들을 엄중하게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은혜를 잊고 교만한 사람은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의 대상입니까?
*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2. 왜 우리는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3. 우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잃고 교만해져 있거나 낙심해 있지 않습니까?
제목: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롬 11:23-2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을 이방인 구원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정한 숫자가 다 찰 때까지 유대인은 완악해지고, 이방인들을 위해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멸시하거나 자만에 빠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버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자만에 빠진 이방인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성도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에 버림을 받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한 후에 다시 그들도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역시 회복될 수 있다(23)
"그들 역시 불 신앙에 계속 머물지 않는다면 접붙임을 받게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23)."
바울은 이방인에게 권면한 후에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지금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되었으나, 그들에게도 회복의 기회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받아 주셨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다시 받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원래 자기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일이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회개한 이스라엘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했습니다(겔 37장). 에스겔은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에스겔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뼈들은 죽어 마른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명하여 그 뼈들을 다시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할 때에 하나님은 그 뼈들을 다시 살려서 큰 군대를 만드셨습니다. 이 말라버린 뼈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든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회복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겔 37:11-14). 이와같이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을 다시 축복의 자녀로 만드실 것입니다.
*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일은 이방인 보다 더 쉽다(24)
"여러분이 원래 있었던 돌 감람나무에서 베어져서,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원래부터 감람나무 가지였던 그들을 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이는 일은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24)"
바울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이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일보다 더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마치 야생 감람나무 가지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는 것처럼 어색한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은 원래 감람나무였던 가지를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은 이방인을 구원한 일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원예학적으로 한 번 꺾여 죽었던 가지를 다시 나무에 접붙이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꺾여져서 죽은 가지를 다시 나무에 접붙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나무도 다시 살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 결 론 *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또한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를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를 백성에서 제거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가정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라 해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를 자기 백성에서 제외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그들을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우리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믿은 나라라도(예를 들어 이스라엘, 유럽, 미국 등) 타락하면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늦게 믿는 나라(예를 들어 한국)라도 주님을 믿으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예수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약속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이스라엘의 회복이 분명한지 아는 대로 말해보자.
2. 하나님은 넘어진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게 된 경우를 아는 대로 이야기 해보자.
제목: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이유(롬 11:25-27)
하나님은 복음을 거역한 이스라엘을 약속에서 제외시키시고, 복음을 믿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성도들은 이 일로 인해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자신도 버림받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잠시 버림을 받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즉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넘어진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자만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비밀(25(상))
"왜냐하면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이 비밀을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25(상))."
바울은 감람나무의 비유를 바친 후에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형제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말한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그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말을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수만이 아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된 비밀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2-3). 이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였습니다(롬 16:25-26).
* 비밀의 정체(25(하)-26(상))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5). 그리고 이와 같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26(상))"
바울이 말한 비밀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이스라엘은 일정한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 완악한 채로 있게 될 것입니다(25(하)). 이러한 언급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7절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채로 그대로 두셨습니다(9;18).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것처럼,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악한 현상은 모든 이스라엘이 아닌, 일부에게 나타날 현상이 될 것입니다("이스라엘의 더러는...). 2) 둘째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올 때까지 지속 될 것"입니다(25(하)).하나님은 이방인 중에 정한 숫자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을 완악한 채로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이방인 중에서 선택받은 모든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거부와 불신을 이방인을 구원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3) 셋째 그리고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26(상)).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칼빈은 본문에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은 교회를 언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란 말을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방인이 들어오고 최종적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교회인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부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갈 6;16), 로마서 전체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을 말할까요? 만일 그렇다면 장차 이스라엘 중에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때에도 그들 중에는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징계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브루스는 "온 이스라엘"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모든 유대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부르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 중에 대부분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가 있다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대부분이 복음을 믿고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해하면 겸손해지게 되는지 이야기해보자.
2. 바울이 말한 구원의 비밀이 무엇인가? 세 가지로 설명 해보자.
3. 온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이 사건과 우리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제목: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성경적 증거(롬 11:26-27)
바울은 (롬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언급했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2-11).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넘어진 일을 이방인 구원의 기회로 삼으셨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완악해 질 것이다. 3) 이방인 구원 사건은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3가지 사항을 언급한 후에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성경을 인용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 성경적 증거(26-27)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도 같습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실 것이며, 그가 야곱으로부터 불 경건한 일을 돌이키실 것이라(26)."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 얻게될 것에 대한 증거로 두 개의 성경구절(사 59:20, 사 27:9))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인용한 구절은 (사 59:20)로서, 이 곳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바울은 이 구절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내용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사 59:20)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구원자가 시온(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다(사 59:20). 2) 구원자가 오셔서 하실 일은 야곱, 즉 이스라엘로부터 그들이 행한 불 경건한 일들을 돌이켜 주는(제거하는) 일이다(사 27:9).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그리스도께서 시온, 즉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이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행한 모든 불경건한 일을 약속대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 죄 용서와 언약(27)
"또한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의 죄를 제거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행할 내 언약이라'(27)."
바울이 두 번째 인용한 구절은 (사 27:9)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사 27:9)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입으며, 그 죄를 없이 하시리라. 이것은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서진 횃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 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하심으로 인한 것이라." 바울은 27절에서 전반부만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실 것을 이미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장차 모든 이스라엘이 돌아옴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약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아담과의 언약(창 1:28-30, 2:16-17)
여기서 주신 언약은 언약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아담이 이 명령을 순종했다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명령을 거역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2) 노아와의 언약(창 6:18, 9:9-17)
하나님은 인류를 홍수로 멸하신 후에 노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드린 예배를 받으신 후에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 이 세상 마지막까지 심판을 연기하고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3) 아브라함과의 언약(창 12:1-3, 13:14-17, 15:1-21, 17: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고,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며, 그를 큰 나라의 조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아브라함을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셨으며, 그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온 세상이 복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4)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과의 언약(출 19:5-6, 24:7-8, 신 28:1-30:30)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백성과 제사장나라로 삼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옛언약", 즉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5) 다윗과의 언약(삼하 7:4-16, 대상 17:3-14)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왕권을 계승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통해 세상을 다스릴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6) 새 언약(렘 31:31-34, 32:40-41)
새 언약이란 말을 구약에서 처음 언급한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옛 언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 다시 그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죄를 씻고, 하나님의 영을 보냐 그들을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찬을 드실 때에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이 바로 "새 언약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라고 선언하셨습니다(고전 11:24-25). 시내 산 언약은 쌍방간이 서로 지킬 의무가 있는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성취하실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구속자가 되어 죄인들의 죄를 씻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이 언약을 따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시 돌아와서 새 언약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이스라엘의 회복될 것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말해보자.그것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3. 성찬 때에 마시는 포도주와 떡은 새 언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새 언약에 믿음으로 동참한 사람들인지 말해보자.
제목: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 하나님의 신실하심(롬 11:28-29)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악할 때에도 항상 경건한 백성들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 정한 숫자가 찬 후에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은혜를 베푸시고 부르신 후에 그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 원수, 그러나 사랑 받은 이스라엘
"한편으로 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여러분들로 인해 원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선택하심에 의해 그들은 조상들로 인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28)."
유대인들은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데 반해,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택적인 면에서 보면 그들은 그 조상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기에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 신실하신 하나님
"왜냐하면 하나님이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29)."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한 번 은혜를 베푸신 것을 후회하거나 취소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가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부름 받을 때에 그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도 여러 번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신 일을 후회하거나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그는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피난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40년을 지내며 보잘 것 없는 늙은 목동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서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일을 취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 한 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최고의 선지자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의 집에서 가장 어린 막내였으며,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에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아내와 동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하게 되자 그 일을 숨기려고 고의로 우리야를 심한 전쟁터로 내몰아 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말년을 심한 고통과 아픔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도 항상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무시했으며, 간음과 폭력과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려서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고 70년만에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또 다시 지금도 메시아와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방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또 다시 버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번 부르신 백성을 버리지 않고, 그 부르신 일을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베풀었다가도 그 일로 인해 손해가 나면 즉시 그 약속을 취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 번 하신 은혜와 약속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버림받은 이스라엘도 후에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부모들은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면 그들을 징계하지만,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하나님도 자기백성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지만,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으신다.
2. 이스라엘이 수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고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 성경 적인 사례들을 들어보자.
3. 다음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 보자(요 6:38-40, 요10:27-30, 롬 8:31-39, 빌 1:6)
제목: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 하나님의 긍휼(롬 11:30-32)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회복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 번 부르신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그 후에는 그들을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도 그 징계가 끝난 후에 다시 불러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회복의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자비)때문이었습니다.
* 불순종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30-31)
"그때에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여러분들이 긍휼을 얻었습니다(30). 이와 같이 또한 이 사람들도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긍휼에 의해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31)."
바울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긍휼(자비)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를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영원히 징계하지 않고 다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때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고, 하나님 백성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었으며, 하나님을 모르고 소망없이 살았습니다(엡 2:12).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방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영적인 특권을 받았지만 그들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지금 이방인을 향해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을 긍휼히 여겨주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신 이유(3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32)."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모두 불순종의 감옥에 가두어 두셨을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불순종을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없는 토굴 감옥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순종이라는 토굴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불순종의 감옥에 먼저 갇힌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두셨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32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신 후에 더 큰 자비를 베풀어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엡 2:8-9).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때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특별한 영적인 특권과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지고 소망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자기 행위를 버리고 주님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스라엘은 자신들만 선민으로 간주하고 이방인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이방인들도 교만하거나 자만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인 모두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순종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엡 2:8-9)에서 이렇게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 적용을 위한 질문
1. 왜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넘어지는 일을 허락하셨는가?
2. 주변에서 좋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우는 없는가? 예를 들어보자.
3. 이방인과 유대인이 불순종한 일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됐는지 말해보자
제목: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찬양(롬 11:33-35)
바울은 1-11장을 통해서 그 동안 복음에 대해 광범위하게 진술해왔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문제를 다루었으며, 계속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이제 그의 말을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던 중 그의 마음이 찬양으로 가득차서 더이상 말을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잠시 진술하는 것을 중단하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찬양(33)
"오 풍부함과 심오함이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으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바울은 갑자기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의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해서 말을 하다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크신 판단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며, 그 길을 발견할 수도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33절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이 말이 "부요함과 심오함이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폭이 얼마나 넓으며 그 깊이가 얼마나 심오한 지에 대해 감탄을 하는 동시에,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대한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참으로 그 폭이 넓고 그 깊이가 심오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베푸신 크고 위대하신 사랑이 나타나있고, 죄인을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주신 크신 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자녀로 삼아 자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섭리는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더 풍부하고 심오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여, 성령을 통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구원 계획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형 틀인 십자가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넘어진 것을 계기로 이방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통해 장차 유대인을 다시 불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아무도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깨달은 성도들이 그 지혜와 지식에 감탄해 하며 찬송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그 길이 우리의 길보다 높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한한 우리의 생각과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시는 일을 헤아리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한 자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높으신 지혜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겸손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알게되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 와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순종의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겸손히 엎드려서 기도하는 자세를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인간을 피조물의 위치에 서게 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배하는 참된 예배의 자세를 갖게 만들어 줍니다.
*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몇 가지 질문(34-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34)? 누가 먼저 주께 드려 주께 갚음을 받을 수 있으랴?(35)"
이제 바울은 계속해서 몇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34절의 질문은 (사 40:13)을 인용한 것이며, 35절의 질문은 (욥 35:7-41:11)을 요약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조언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 무엇을 먼저 드려서 하나님을 빚진 분으로 만들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만들고 그것을 우리에게 먼저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하나님께 조언하는 상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조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 분의 조언자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우리의 상담 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채무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조언하거나,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려고 하기 보다, 오히려 그 분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을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극한 고난을 받을 때에 고통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하나님의 크신 지혜를 깨닫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1-6 참조) 우리가 진정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지한 벌레와 소경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진정한 자신이 모습을 보게 하는 지름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잠 9:10).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참된 지헤와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으며, 아무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다울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분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보자(사 55:8-9).
2.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무지한지 욥의 예를들어 설명해 보자.
3. 우리가 지금 살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있는지 말해보라.
제목: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롬 11:36)
바울은 그 동안 계속되었던 구원에 대한 진술을 찬송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위대한 섭리에 대해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도 위대하고 오묘해서, 그 섭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게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올바른 신학은 참된 찬송(예배)을 낳고, 참된 찬송(예배)이 없는 신학은 올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만물의 원인과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36(상))
"이는 만물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를 통해 존재하며, 주님께 돌아가기 때문입니다(36(상))."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만들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필요를 말하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실로 성도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며 중간이고, 또한 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은 우리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디에서 처음 만물이 나왔느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에크: from)"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디아: through)" 라고 대답할 것입다. 그리고 누가 우리에게 "왜 만물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로(에이스: into)" 간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 전치사(에크: from, 디아: through, 에이스: into)를 사용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지으셨고(from Him), 하나님이 그 만물을 유지하시며(through Him), 하나님이 만물의 목표가 되신다는 것(into Him)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만물"(all things)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전체를 말합니다. 만물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 전체와,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인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은 가로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말하는 만물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섭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금 구원에 대한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을 통해 진행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셨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 송영(36(하))
"주님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36(하))"
이제 바울은 최종적인 송영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영광이 영원토록 주님께 있으라!"고 선언합니다.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만물의 근원이 되시고, 만물을 유지하고 만물의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과 인간의 교만은 이러한 일에 대해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우리의 교만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만물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 결론: 참된 신학과 찬송(예배)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학(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송영(예배와 찬송)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이 없이는 참된 찬송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예배와 찬송은 참된 신학이 동반될 때에 가능해 집니다. 바울도 (롬 1-11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묵상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과 같이 올바른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인도해 줍니다. 참된 신학이 없는 예배는 우상 숭배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찬송(예배)가 없는 신학은 올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전히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과학의 관찰과 평가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예배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에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C말에 핸들리 모울 주교가 말했던 것처럼, "경건하지 못한 신학"과 신학이 없는 경건", 둘 다를 똑같이 주의해야 합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만물이 하나님으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보자.
2.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지고 있지 않은가? 있다면 예를 들어 보자.
3. 왜 경건하지 못한 신학과 신학이 없는 경건이 모두 위험한가? 경건과 신학이 겸비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