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장흥동 도선산의 궁궐도감 羅德讓 墓表 재벌번역
○필자가 고문헌 번역을 취미로 시작 한 것이 2008년도 12월경이 다. 이제 햇수로는 만3년째에 접어들었다.
○도선산 묘비를 번역하였던 2008년도와 그동안 연마했던 지금의 나를 비교하기 위해 필자의 직계 선대의 묘비를 다시 번역해 보았다.
○번역을 해놓고 보니 초기 번역이 오류가 매우 많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
글/恩津 宋在晟
번역 /나천수
往昔(왕석)/ 옛적에
龍蛇板蕩之際(용사판탕지제)/도둑들이 나라를 뒤흔들 때에
誠臣烈士磊落(성신열사뇌락)/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신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성심껏 장렬하게 싸운 사람으로 마음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 없었다.
朔望而故通政大夫宮闕都監羅公諱德讓(삭망이고통정대부궁궐도감나공휘덕양)/삭망 날에 고 통정대부 궁궐도감 나덕양 공은
以韋布之士(이위포지사)/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이지만
挺身奮義(정신분의)/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나아가 의기를 떨쳤으며
誓死討賊(서사토적)/죽기를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니
如非忠君愛國出於誠心不可能也(여비충군애국출어성심불가능야)/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亦足爲後世爲人臣者法矣(역족위후세위인신자법의)/ 또한 후세로 하여금 신하됨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公沒三百有餘年後孫謀樹顯刻(공몰삼백유여년후손모수현각)/공이 죽은 지 3백여 년이 지나 후손들이 비문을 세우자고 모의하여
于遂使鍾聲鍾烈 (우수사종성종열)/이 일을 마침내 종성, 종열에게 시키자
徵余銘世好難辭(징여명세호난사)/나에게 명을 구하려는데 세의로 거절하기 어려워
按狀以叙之(안상이서지)/행장을 상고하여 서술하였다.
公字得之系出羅州(공자득지계출나주)/공의 자는 득지요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以將軍諱富爲鼻祖屢傳(이장군휘부위비조루전)/장군 부가 시조로 여러번 전해오며
諱公彦討賊有功封羅城君(휘공언토적유공봉나성군)/휘 공언은 외적을 토벌한 공으로 나성군에 봉해졌다.
入我朝諱自康務安縣監生(입아조휘자강무안현감생)/조선조에 들어와 휘 자강은 무안현감으로 살았으며
諱繼祖將仕郞寔公高祖也(휘계조장사랑식공고조야) /휘 계조는 장사랑으로 공의 고조이다.
曾祖諱逸孫直長贈都承旨己卯名賢流(증조휘일손직장증도승지기묘명현류) /증조 휘 일손은 직장이며 증직으로 도승지를 하였으며 기묘명현으로 전해진다.
祖諱昶 弼善 筆法著名(祖諱昶 弼善 필법저명)/할아버지 휘 창은 필선을 하셨으며 글씨나 문장을 쓰는 법으로 이름이 세상에 높이 드러났으며,
考諱 士愔有才勇(考諱 사음유재용)/아버지 휘 사음은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以漢陰李相公薦拜折衝將軍副護軍(이한음이상공천배절충장군부호군) /한음 이덕형 재상의 추천으로 절충장군 부호군을 제수 받았다.
妣利川徐氏掌仕郞允智女 (비이천서씨장사랑윤지여)/비는 이천서씨 장사랑 윤지의 따님이다.
公以明宗戊申生 (公以明宗戊申生)/공은 명종 무신년에 태어났으며
孝愛純篤 (효애순독)/효도와 사랑이 순수하고 독실하고
亦有氣節(기절)/또한 기개와 절조가 있어
人皆期以遠大及島夷猖獗(인개기이원대급도이창궐)/사람들은 모두 뜻과 見識이深遠하다 하였는데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여
宗社生靈危在朝夕(종사생영위재조석)/종묘사직과 백성들이 조석으로 위기에 빠지자
公乃痛憤(공내통분)/공이 통분하여
遂杖義從健齊金公千鎰(수장의종건제김공천일)/마침내 義의 지팡이를 따라 건제 김천일과
以募義族以建旗(이모의족이건기)/무리들과 모의를 하고 기를 세웠으며
分部自任粮機轉運之責(분부자임량기전운지책)/스스로 양식과 기기의 운반책임을 분담하여
冒死直前籌劃甚精調度(모사직전주획심정조도)/죽음을 무릎 쓰고 앞으로 나아가 이러한 양식이나 기기를 사정에 맞게
於水原之袒柵江華之陣操縱於晉陽之守其於善山夫兵所之饋餉(어수원지단책강화지진조종어진양지수기어선산부병소지궤향)/수원으로, 강화의 진으로, 진양을 지키는 곳으로, 선산의 부병소까지 음식을 보내어 접대하는 적절한 처리는
亦多公轉漕之力也(역다공전조지력야)/역시 공의 큰 조운(漕運)의 힘에 의한 것이다.
往來元帥權公陣(왕래원수권공진)/원수 권율장군이 공의 진을 오갈 때
隨補式服機械旦與(수보식복기계단여) /식복, 기계를 밤을 세워 즉시 보수를 하여 주었으며
李大胤 崔尙重 等(이대윤 최상중 등)/이대윤 최상중 등과
迭相殫力轉漕無屢(질상탄력전조무루) /번갈라 가며 마음과 힘을 다 쏟아 끝없이 조운하였으니
按撫使鶴峯金公誠一(안무사학봉김공성일)/안무사 학봉 김성일이
以爲三南漕運湖南爲最善啓薦除官(이위삼남조운호남위최선계천제관)/삼남의 조운에서 호남이 가장 잘했다는 것을 아뢰어 벼슬에 임명하도록 천거하였으나
亂定後每恨不以爲與三壯士同殉(란정후매한불이위여삼장사동순)/난이 평정 된 후 삼장사와 같이 함께 순절하지 못한 것을 매양 한스러워 했으며
以絶念進取晦身嵁巖沒身自靖焉(이절염진취회신감암몰신자정언)/나아갈 뜻을 끊고 몸을 뒤로 숨기면서 험한 바위너설에 몸을 던져 자결하려 하였다.
仁祖庚午四月二十七日卒享年八十三(인조경오사월이십칠일졸향년팔십삼)/인조 경오년 4월27일 죽으니 향년83세였다.
葬于州西長興洞枕子之原 (장우주서장흥동침자지원)/나주 서쪽 장흥동에 장사 지내니 침자의 자리이다.
配咸平李氏佐郞絳女(배함평이씨좌랑강여)/배는 함평이씨 좌랑 강의 따님이며
有女士風墓用魯禮/딸이 있는데 선비의 기풍이 있었으며 노나라의 예에 따라 묘를 썼다.
育五男海龍海鵬海龜逸參奉有孝學海鳳進士(육오남해룡해붕해구일참봉유효학해봉진사) /다섯 아들을 길렀는데, 해룡, 해붕, 해구, 遺逸로 참봉이 되고 책을 읽으면서 효도를 한 진사 해봉은
與仲兄受業于沙溪金先生(여중형수업우사계김선생) /중형과 함께 사계 김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海鶴參奉孫曾以下多不盡錄(해학참봉손증이하다불진록)/해학은 참봉으로 손자 증손 이하로는 다 기록하는 것이 번거로워 하지 않는다.
嗚呼, (오호)/아,
公之世寢遠文蹟殘缺(공지세침원문적잔결)/세월이 흘러 공의 능침은 멀고 문헌의 흔적은 이지러져서 완전하지 못하는데
謹以難祥(근이난상)/삼가 상세함은 어렵지만
而惟其忠愛之誠卓然(이유기충애지성탁연)/생각해보니 충성과 사랑의 정성이 탁월하므로
如是則雖百世加徵也(여시칙수백세가징야) / 이와 같이 비록 백세가 지났지만 더욱 밝힐 수 있을 것이다.
乃爲之銘曰 (내위지명왈)/이에 명에 이르기를
忠義之性(충의지성)/충의의 품성이요
才智之名(재지지명)/재주와 슬기로 이름이 났으니
適時板蕩(적시판탕)/나라의 형편이 정치를 잘못하여 어지러워짐을 이르는 때에
敵愾殫誠(적개탄성)/적에 대한 분노로 誠을 다하여
起自草野大振義聲(기자초야대진의성)/스스로 초야에서 의로운 외침을 크게 떨쳤다.
亂定斂藏絶意(난정렴장절의) /난(難)이 평정되어 그 공을 드러내지 않고 뜻을 끊었지만
復榮沒身自靖志操之淸(복영몰신자정지조지청) /다시 살아나 몸을 던져 자결을 하려 했던 맑은 지조가
長興之原有山峰嶸(장흥지원유산봉영)/장흥동 터 산봉우리 가파른데 있지만
我銘闡幽以表(아명천유이표)/내가 쓴 銘은 그윽한 것을 드러내는 묘표로
其塋岦(기영립) /무덤 앞에 우뚝 서리라.
靑巴天中節(청파천중절) /푸른 5월의 단오절에
恩津 宋在晟 撰(은진 송재성 찬/)은진 송재성 찬하고
靑松 沈翰求 謹書(청송 심한구 근서)/ 청송 심한구 삼가 쓰다.
丙午三月日謹竪(병오삼월일근수)/병오년 3월 일 삼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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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1년 8월 20일 구도의길에서 퍼 올렸음
(덕양 1548~1618)의 몰년이 족보와 묘표에는 경오1630 이고 석호집이나 남간집에는 무오1618으로 되어있어 아리송함
하지만 남간집(저자의 행력)편에 일대기를 보면 1618~1623년 사이가 공란인걸 보면 이때가 시묘살이 기간인것 같다.
配 함평이씨는 병인년 1626년 卒 (남간집 p205 참조)
덕양공의 형수 (덕겸의 配가 1631년 신미년에 졸함)
海鶴은 덕양공의 5子이며 증손 이후로는 후대가 끊김
니재집 번역중 해학의 후손들 묘지가 금수리에 있었던걸로 나옴
제가 니재공 시제 때문에 여러번 갔지만 확인은 못 했음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상권 213쪽 上참조]
[문숙공파/충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 21世 참봉공 諱 신손(愼孫)은 수산공 諱 자진(子進)의 둘째아들로 고려가 망할 때 아버지를 따라 나주 우정동에 내려와 그 후로 유훈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염수재는 참봉공 諱 신손(愼孫)이하 제 선조의 세일사에 제계하는 재실이니 무염이조(毋念爾祖)와 소수궐덕(소修厥德)의 뜻으로 제호하였다. 1965년 건축하였으며 송재성(宋在晟)이 재기(齋記)를 짓고
김순동(金舜東)이 액자를 썼으며 묘도비문은 후손 순택(淳澤)이 찬하였다
海鵬(해붕 1577~1634)도 시서공의 작은아버지 대성의 사위임
주봉 沈翰求, 1898∼1974)
宋在晟(1902~1972) 우암의 11손으로 1975년에 述菴集이 간행됨
발행처: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