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전쟁이란 본시 그런 것!"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과의 대화 - "잊을 수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바오닌은 편안한 남자다. 그는 작가답게 열려 있고, 예민하지만 사려 깊고, 어떤 부분에서는 과격하다 싶을 만큼 단호하다. 가끔은 그런 그가 위태로워 보일 때도 있다. 아주 오래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한겨레21> 256호에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을 쓸 때의 일이다. 원고 마감이 임박해 밤샘 작업을 하다가 나는 갑자기 바오닌을 떠올렸다. 왠지 그는 전쟁이 부르는 인간의 '집단적 광기'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의 슬픔>을 쓴 작가니까. 그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했다. 새벽 1시였다.
- 원고를 받고 싶다. 근데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
어떤 내용인가?
-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당신의 단상을 함께 싣고 싶다.
그런 내용의 기사를 정말 실을 수 있는가?
-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네가 쓰면 나도 쓴다.
그날 아침 그는 팩스로 원고를 보내왔고, 오후에 그의 사진이 담긴 빠른 우편이 날아왔다. 그가 좋아한다는 장미꽃을 한다발 사안고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바오닌은 왼쪽 팔에 검은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일주일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그가 담담히 말했다. 그와 약속을 잡기 위해 여러 차례 통화를 했을 때도 그는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황망히 조의를 표하고 상중에 찾아와서 실례는 아닌지, 인터뷰가 가능하겠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일어서더니 조니워커를 한 병 들고 왔다. "얘기가 길어지겠지..." 그의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사진/ 사진작가 최경자
- 먼저 '전쟁'이 당신에게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전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전쟁을 구경거리로 삼는다. 예를 들자면, 전쟁영화 그리고 장난감 총, 장난감 탱크와 같은... 그러나 전쟁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 전쟁은 한마디로 '참화'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군대에 자원했다. 내가 속해 있던 '영광의 제27청년여단' 소년병 500명 중 끝까지 살아남은 병사는 단 열 명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는 신념을 가지고 싸웠고, 결국 승리했기 때문에 좌절감은 없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있다. 결국 시간이 상처를 덮도록 도와주었다. 잊을 수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알고 있는가
= 나는 게릴라(베트콩)이 아닌 정규군이었고, 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전쟁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고, 정확한 공격대상이 있고, 룰이 있다. 서로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내가 쏘지 않으면 적이 쏘는 상황에서 치르는 게 전쟁이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을 쏜다는 건 이미 전쟁이 아니다. 그건 '살인'이다. 전쟁의 목적과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 왜 그런 일이 생기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 아아, 전쟁이란 본시 그런 것이다. 아주 착하고, 학식이 있고, 예의가 바른 청년들조차도 하루아침에 야수로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비트랩에 걸린 미군을 쳐다보는 일은 나 역시도 어려웠다. 그들은 하루고, 이틀이고, 서서히 고통을 받으면 죽어간다. 그 광경을 목격한 동료 병사라면 복수심을 가지고 싸우게 될 것이다. 게릴라전이란, 길을 지나는 미군에게 어여쁜 소녀가 물을 떠주고 그 물을 받아마시는 미군의 등 뒤로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에겐 그 거대한 미국에 대항할 마땅한 무기가 없었으니까...
- 미국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 미국은 자국의 영토 안에서 한 번도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는 나라다. 어찌 보면 행복한 민족일지 모르지만, 아직은 덜 성숙한 민족이다. 그들은 폭탄 하나가 떨어졌을 때, 그로 인해 생겨날 고통을 모른다. 그래서 게임을 하듯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직접 눈으로 본 미국 사회는 어떠했는가.
= 미국은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이다. 미국 사회는 나름대로 민주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고 이성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편안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세계의 모든 시민이 미국화해야 한다는 이상을 품게 된 것 같다. 그 생각의 출발점은 좋았을 수도 있는데, 미국화하지 않은 나라, 미국화를 거부하는 나라, 결국 미국의 뜻을 거스르는 나라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바오닌은 술이 약했다. 술기운은 그이 벌개진 얼굴이나 충혈된 눈동자가 아니라 촉촉한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난 우울해. 외국의 젊은이들은 배낭여행을 가는데, 베트남에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고위층이거나 해외에 일을 하러 가는 젊은이들 뿐이야". 미국 얘기를 하다가 문득 비행기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까. 확실이 그는 상중이라 감정선이 여려져 있었다. 부예지는 눈빛과 잠겨드는 목소리를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하다.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려 대화의 고삐를 한 번 더 당겨보았다.
- <전쟁의 슬픔>이 베트남 사회에 던지 파장이 대단했는데,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오랜 세월을 전쟁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에겐 문학도 하나의 무기라는 생각이 강했다. 문학작품을 통해 전쟁영웅을 그리거나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노래하는 것. 이를 통해 조국애를 고취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병사화 그의 가족들에겐 고통과 상실이 따르는 것이다. 베트남에 영웅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기에 어떤 이들은 전쟁을 마치 '축제'처럼 노래하고, 심지어 북베트남 병사들을 '로봇'처럼 그렸다. 도대체 모두가 영웅이라면 그게 어찌 영웅일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그동안 베트남의 문학은 지나치게 '이념과 정치'의 논리에 갇혀 다양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문학이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의 한 기능이 지나치게 극단을 향해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진정한 작가였다면, '성전'이나 '해방전사'들뿐만 아니라 당신이 돌아본 민간인학살 현장에 대해, 그곳에서 이름 없이, 이유 없이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했고, 썼어야 했다. 사실 난 잘 알고 있지 못했다. 문학은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간.에. 천.착.하.는.것. 그것이 문학이다.
- <전쟁의 슬픔>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적 신문인 <공안>뿐만 아니라 비교적 객관적인 논조의 신문인 <뚜오이쩨(젊은이)>까지도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심지어 당신의 동료 작가들조차 "미국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등의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 그때는 아주 특별한 시기였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몰락하고,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는 등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의 조짐을 보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인민들의 사상무장이 요구되던 때였다. 시기적으로 그랬다. 베트남에서는 정부가 직접 작가에게 '압력'을 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언론을 통해 끊임없는 비판이 이루어질 뿐이다. 물론 작가로서의 생명뿐 아니라 한 개인의 정치적 생명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혹독한 비난이 퍼부어지긴 했지만. 당시 베트남작가회의에는 약 700여 명의 작가들이 등록돼 있었다. 나는 그중에 약 10%인 70명 정도만을 진정한 작가라 여기고 있다. 그들 중 약 30여 명의 작가들이 나를 옹호했으니 절반의 지지는 얻은 셈 아닌가. (엷은 웃음)
- <전쟁의 슬픔>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한다 해도, 그 책이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데는 다분히 서방세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조심스런 분석도 있다.
= 인정한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부분도 있다. 영국이나 미국, 싱가포르 등지의 신문을 보면서 내 얘기가 부분적으로 편집돼 베트남전쟁이 가졌던 민족해방적 성격의 측면이나 북베트남 병사들의 고귀한 희생까지도 일방적으로 깍아내리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만났던 한 미국인 기자는 밀라이 학살 사건을 얘기하면서 내 소설을 근거로 북베트남군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술이 동났다. 그가 엎어놓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흘러내린 것이다. 그는 지쳐 보였다. 나는 서둘러 집 안을 훑어보았다. 거실에는 검은 옻칠을 한 나무 탁자와 7인용의 둥근 소파, 탁자 위에는 비나타바, 카멜, 555 등 세 종류의 담배가 접대용인 듯 뜯지 않은 채로 놓여 있고(그는 555밖에 피우지 않는다), 소파 맞은편에 위치한 장식장에는 온갖 종류의 양주와 양주잔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장식장 위에는 일제 소니 텔레비전, 카세트가 얹혀져 있고, 그 위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그림은 소파 측면에도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벽면에도 걸려 있었다. 3층에는 그의 작업실이 있고, 아담한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사진/ 사진작가 최경자
- 신발장에 웬 신발이 그렇게 많나
= 집안의 여자들이 사들인 신발이다.
- 집이 참 좋다. 작가가 너무 부자 아닌가.
= 작가로서의 내 인생은 실패다. 작가는 (경제적으로) 평균 이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노벨상을 받고 싶은 욕심은 없는지... 노벨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노벨상은 서구의 상이다. 작가를 굳이 구분하자면, 평범한 작가, 재능 있는 작가, 천재적인 작가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노벨상은 천재적인 작가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일본에서 노벨상을 받은 작가가 나왔지만, 그건 다분히 계산된 정치적 배려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은 아직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여건이 성숙해 있지 않다. 한국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가 나올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웃음)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주는 상이 가장 가치 있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와의 일화 한 토막. 예담출판사에서 바오닌에게 <전쟁의 슬픔> 한국어 번역판 저자 서문을 부탁해왔다. 일주일 내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불통이었다. 출판 일정이 촉박했던 데다 다음 날이면 민간인학살 현장 답사를 떠날 참이었다. 밤 10시, 11시... 한 시간 단위로 그에게 전화했다. "옷 갈아입으러 잠깐 집에 들렀다. 아버님이 병원에 계신다". 그 병환의 위중함을 알 길이 없는 나는 "시간이 없다"며 그를 재촉했다. 그는 결국 수술실 문 앞에서 서문을 써 보내주었다.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그때 일을 사과했고, 그는 손사래를 치며 "친구 사이에 '미안하다, 고맙다' 등의 인사치레는 생략하자"고 했다.
그날은 나도 술이 과했다. 호텔에 돌아와보니 사진기가 어딘가로 달아나고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바오닌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기를 찾았다. 한참 만에 그가 걱정스런 말투로 "없다"고 했다. 바오닌 집을 나선 이후의 행로를 쫓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사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중요한 건 사진기가 아니라 바오닌과 인터뷰한 필름인 것이다. 할 수 없이 오후에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 번 잘 찾아봐달라고. 수화기 저편에서 그가 버럭 고함을 쳐댔다. "없어! 없다구!". 친구란 그런 것이다. 서로 고성을 질러대기도 하는 것이다. 수화기 이편에서 나는 모처럼 깔깔깔 하고 웃어댔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일화 한 편 더 소개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베트남전쟁"이라는 주제로 바오닌과 함께 일본 동경외국어대학의 학회에 간 적이 있다.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나고 도쿄 시내 투어를 하는데, 학교측에서 우리를 처음 데리고 간 장소가 야스쿠니신사였다.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어쩌면 우리의 치부일 수도 있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발표를 한 터라 마음이 불편했던 나는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한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몹시 상했다. 간신히 예의를 갖춰 "다른 참가자들은 잘 돌아보시고 오라, 난 밖에서 기다리겠다" 며 정중히 입장을 거절했다. 잠시 후에 보니 바오닌이 신사 벽에 기대어 눈을 껌벅거리며 서 있다. 한 일본인 관계자가 "선생은 왜 안 들어가세요?" 물으니 그가 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우린 친구니까!". 그는 벽의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