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라는 시간은 21세기라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의 청춘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와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는 연령층이며, 또한 현대의 청춘들은 그 시절에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함과 함께 출생 신고를 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980년(혹은 1980년대라는 시간의 묶음)은 2002년의 현재가 존재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해주는 시기인 것이다.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다. 30~40대의 나이가 주를 이루는 감독들의 연배를 생각해볼 때 1980년대는 그들에게 젊음에 대한 억압과 그에 맞선 반역이 활성화되었던 ‘추억’의 시기이자, 현재에 대한 변화의 꿈이 싹트기 시작한 ‘발아’의 시절이다. 바로 그 시절로 회귀하는 영화가 한 편 있으니 바로 “모범시대 불량영웅”을 표방한 <품행제로>.
문덕고의 전설적인(?) 쌈장 중필(류승범 분)은 하루하루가 지겨우면서도 바쁘다. 가기 싫은 학교 가랴, 애들 쌈지돈 삥 뜯으랴, 쌈장의 의무를 하는 등 정말이지 하루가 쏜살같다. 그런데 중필의 마음을 앗아간 여인이 등장하게 되니 바로 이웃 여고의 퀸카 민희(임은경 분).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새로 전학 온 모범생 영만(최우혁 분)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사랑에는 난관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민희가 다니는 학교의 짱 나영(공효진 분)이 그 걸림돌이다. 중필을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민희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것. 여기에 중필에게 위협적으로 도전해오는 무지막지한 쌈꾼 상만(김광일 분)의 등장까지. 갈 길이 먼 중필의 행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품행제로>가 시,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있는 1980년대 고등학교에 몸담아보았던 관객이라면 이들이 펼치는 해프닝과 개그들이 터무니 없는 사건들이 아님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일종의 시각적 대체 경험을 제공받겠지만 말이다. 그 만큼 <품행제로>의 1980년대 이미지들은 현대의 테크놀러지와 결합되어 만화 같은 상황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이 제시를 통해 상황을 인식하는 관객에게는 사실의 꽤나 정확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만 하다.
1980년대는 억압과 자유의 카오스적 혼재를 표출하는 시대였다. 군사 정권이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의 힘에 많은 젊음의 꽃이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채 시들기도 했을지라도, 이와 달리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세대들은 교복 자율화라는 특이한 양상의 자유를 보장 받기도 했다. 하지만 외모는 자유를 획득했으나 실천과 행동에는 수 많은 제약이 따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는 말쑥한 사복 차림의 꼭두각시 인형(사회가 시쳇말로 모범생이라 일컫는)을 길러내는 (교육)정책의 일환임에 틀림없다. 마치 권력자들이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듯….
그러한 시절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했다. 그 영웅은 바로 학교의 쌈장들이었다. 그들의 일개 주먹다짐은 마치 웨스턴의 총잡이들의 전설처럼, 혹은 중원의 무사들의 결투처럼 반에서 반으로 온 교정을 떠돌아다녔다. 교내 쌈장들은 비록 밖에서는 못된 짓(?)을 저질렀을지언정, 자신들의 급우 혹은 교우들에게는 많은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의외로 순진한 친구들이 아니었던가(영화 <친구>의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라). 마치 중필이 영만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품행제로>의 조근식 감독은 이러한 정서들을 잘 포착해내고 영화 속에 꽤나 부드럽게 용해시켜 놓고 있다. 그래서 <품행제로>는 상당히 코믹하게 다가온다. 웃음의 효과는 인간의 기억과 맞물릴 때 더욱 확장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품행제로>는 신인감독답지 않은 매끄러운 연출력과 소품들을 이용한 유효 적절한 웃음, 여기에 류승범이란 걸출한 청춘이 한 데 어우러져 있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영화에서 사용된 특수효과의 촌스러움은 1980년대의 그것과 상당히 닮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간간히 삽입되는 만화 주제곡들은 작품에 맛깔스런 양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품행제로>에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너무나 많은 웃음에 묻혀, 마치 <몽정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1980년대라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정치적 자유를 위한 그 젊음의 물결)이 너무 희화화되지 않을까, 또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중요함이 단순히 희극적 순간으로 비춰지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두려움이 그것이다. 어쨌든 <품행제로>는 상당히 재미있게 만들어진 작품 임엔 틀림없다. 정말 그 때 우린 교사의 권위에 한 번쯤 도전해주고, 외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영웅을 필요로 했으니까….